‘헐, 이 정도 눌렀는데도 아직 안 느껴진다고?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가슴이 커졌을 텐데.’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결론을 내렸다.“그렇다면 확실히 유전이 맞아요. 이건 방법 없어요. 수술해야 해요.”“우리 엄마는 몸매 좋은데, 왜 나만 이래?”“정현 씨 어머니 몸매가 좋다고 정현 씨 몸매도 좋으리란 보장은 없죠.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수도 있으니까요.”“그럴 수도 있어?”“부모님 중에 한 분이라도 선천적으로 날씬한 분이 계시면, 정현 씨 몸매에도 영향 줄 수 있어요. 그런 상황이라면 가슴 키워준다는 마사지숍은 절대 믿지 마요. 선천적인 건 바꿀 수 없으니까요.”“됐어요. 할 얘기도 끝났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하정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아예 무시했다.내가 방에서 나왔을 때, 이영미도 마침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뒤를 흘긋 보더니 조심스럽게 나에게 달려와 물었다.“이봐, 솔직히 말해. 내 딸과 무슨 사이지?”나는 고개를 저었다.“전 윤지은 씨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그런데 우리 지은이 왜 저렇게 이상해?”“어머님, 다른 일 없죠? 없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잠깐만, 있어.”사실 나는 진작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 타이밍에 이영미가 나를 불러 세울 줄은 몰랐다.‘역시 묻지 말았어야 했는데.’그런데 이미 말을 꺼냈으니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이에요? 만약 마사지를 원하는 거라면 해드릴 수 없어요.”“아무 문제 없는데 마사지는 무슨, 그런 거 필요 없어. 사실은 다른 목적이 있어. 수호 씨 잘하지? 우리 남편 좀 봐줄 수 있어? 그 방면에 문제 있는 게 아닌지?”이영미는 겉으로는 신경 안 쓴다고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무척 신경 쓰고 있었다.특히 매번 찔러 봐도 반응 없는 윤해철이 이상해, 안 되는 건데 부끄러워 말 못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남편 상태 봐달라는 게 목적이었다고?’이영미가 나를 붙잡아 세우고 남편 상태를 봐달라는 부탁을
“뭘 도와주면 돼?”“저 사실 양동준 형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데, 혹시 설득해 주실 수 있어요?”양동준 형님이 윤씨 가문을 위해 일하니까 어머님 도움을 받으면 일이 쉽게 해결될 게 뻔하다.이영미는 그 말을 듣더니 싱긋 웃었다.“그게 뭐 별거라고. 간단하네. 수호 씨가 나 도와주면 양동준은 내가 설득해 주지.”동의를 얻어내고 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그럼 약속한 거예요, 어머님? 지금 가요.”“난 됐어. 수호 씨 혼자 가.”“네? 제가 어떻게 혼자 가요?”“내가 요즘 그이랑 싸우고 있어서 돌아가면 안 돼. 그리고 내가 그런 병 보게 했다는 거 비밀로 해야 해.”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런데 저 아버님을 모르고 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병은 어떻게 봐 드려요?”“내 남편 스케줄을 알려줄 테니까, 기회는 수호 씨가 만들어. 병 다 보면 결과도 나한테 알려주고.”‘그러면 되는구나.’하지만 이건 나에게 테스트나 다름없었다.‘물론 어렵지만, 양동준 형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기 위해서라면, 까짓거 해보지 뭐!’“좋아요, 아버님 스케줄 알려주세요.”나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그건 이따가 알려줄게. 그리고, 지은한테 비밀로 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은 이영미가 귀띔해 주지 않아도 절대 윤지은한테 알리지 않을 작정이었다.이영미와 대충 상의를 마친 뒤, 나는 윤지은 집을 떠나 다시 차로 돌아왔다.이번에는 더 이상 전처럼 우울하지 않았다.하지만 애교 누나가 걱정되었다. 누나의 아버지는 보기에도 무서운 분이니 애교 누나가 본가로 잡혀갔을 게 뻔했다. 그걸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누나에게 문자라도 보내야 하나 생각하다가 아버지한테 들켜 또 꾸중을 들을까 봐, 나는 망설여졌다.그렇다고 상황을 물어보지 않기에는 너무 걱정되었다.결국 고민 끝에 애교 누나한테 문자를 보냈다.[누나, 지금 어때요? 아버님이 누나 곤란하게 하지는 않았죠?][난 괜찮아요. 그래도 내가 친딸이라 너무 몰아붙이지는 않았어요. 그러는 수호 씨는
[나한테도 그래요?]형수의 물음에 나는 양심에 찔렸다.전에 용천 호텔에 있을 때, 형수가 나를 무시한다고 껌딱지처럼 졸졸 쫓아다녔으면서, 형수가 마음을 여니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다니.순간 내가 너무 나쁜 놈처럼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형수를 갖고 논 셈이니까.형수한테 너무 미안했다.“형수, 미안해요. 제가 너무 무능해서 애교 누나한테도 상처를 줬는데, 더 이상 상처 주기 싫어요.”형수는 나를 탓하기는커녕 한숨을 푹 쉬었다.[나도 수호 씨 이해해요. 탓하지 않아요. 적어도 함께했던 시간 동안 정말 행복했어요. 하지만 다른 곳에서 지낸다니 아쉽기는 하네요.]나도 형수와 떨어져 지내기 아쉬웠다. 애교 누나도 마찬가지고.하지만 애교 누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다시 마음이 확고해졌다.나는 더 이상 이 동네에 있을 수 없다. 만약 애교 누나 아버지가 알면 내가 누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테니까.아직은 능력도 없고 내 잠재력도 보여줄 수 없으니,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동네를 떠나는 거다. 미련 없는 사람처럼.“형수, 진동성 그 인간은 요즘 집에 안 들어와요? 두 사람은 정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나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무엇보다 형수의 현황이 걱정되었다.그러자 형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상관없어요. 이제 신경도 안 써요. 나만 잘 살면 되지, 그 인간이 뭘 하든 관심 없어요. 수호 씨, 지낼 곳은 찾았어요?”형수는 다시 주제를 돌렸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이요. 방금 핸드폰으로 찾고 있었어요.”[우선 찾지 마요. 잠깐 내 둘째 동생 집에서 지내요. 지난번 용천 호텔에서 내 둘째 매제가 바람피우던 거 기억 나죠?]“네, 왜요? 두 사람 이혼한대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형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어디 그것뿐이게요? 그것보다 더 지저분해요. 진용진이 우리한테 본모습을 들키니 아예 내 동생한테 이혼 얘기를 꺼낸 것도 모자라, 내 동생을 빈털터리로 내쫓으려 하고 있어요.][그동안 애들 돌보랴, 시
형수는 행동력을 과시하는 듯 바로 고수연한테 전화했다.요즘 진용진 일로 심란해하던 고수연은 형수의 말을 듣자마자 반갑게 대답했다.[언니 동생 오라고 해. 진용진 그 개자식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여자 만나고 다녀. 너무 역겨워서 나도 돌려줘야겠어.]그 말에 형수는 가슴이 철렁해 바로 귀띔했다.“당분간 네 집에서 좀 지내게 하라는 거지 몸을 노리라는 거 아니야.”[내가 언제 몸을 노렸다고 그래? 내가 지금 남자 몸을 노릴 기분이겠어? 분노하는 거잖아! 분노! 잘못은 진용진이 했는데, 왜 사과를 안 해? 게다가 어떻게 뻔뻔하게 먼저 이혼을 입에 올려? 무슨 자격으로 나를 빈털터리로 집에서 쫓아내겠다는 건데?][이 세상에 정말 좋은 남자는 없어. 앞으로 남자 말을 믿나 봐라.]형수는 동생을 안쓰러워했다. 어쩌면 언니 동생이 쌍으로 이렇게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는지?형수는 한숨을 푹 쉬었다.“우선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네 몸과 두 아이나 잘 챙겨. 네가 아파서 쓰러지면 진용진만 좋아할 거잖아.”고수연은 울면서 말했다.[알았어. 화내지 않을게. 그런 남자 때문에 화내는 건 감정 낭비야. 참, 언니, 그 동생분더러 일찍 와달라고 해. 진용진이 또 찾아와서 행패 부릴까 봐 무서워.]“알았어, 바로 가라고 전화할게.”형수는 동생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나에게 전화했다.[수호 씨, 동생한테 이미 말해뒀으니 바로 가요. 이따가 주소 보내줄게요.]“네.”[가서 내 동생 좀 돌봐줘요. 진용진이 또 행패 부리면 혼내줘요.]“형수, 걱정하지 마요. 제가 있는 한, 수연 누나가 괴롭힘당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전화를 끊은 뒤 형수는 바로 동생네 집 주소를 보내 주었다.나는 몇 달 동안 살던 동네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이곳에는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애교 누나고, 한 명은 형수다.하지만 누나의 아버지 때문에 이곳을 잠시 떠나 있어야 한다는 게 매우 아쉬웠다.그런데 별 수 있나? 누나와 형수를 위해서
그 모습을 보기 살짝 민망해, 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수연 누나 맞죠? 정수호예요.”“알아요, 들어와요.”고수연은 눈시울이 붉은 게, 방금 운 듯했다.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집안이 어수선한 데다, 방금 한바탕 싸운 듯한 흔적들이 보였다.나는 미간을 팍 구겼다.“왜 이래요? 집에 도둑 들었어요?”“아니, 그 인간이 다녀갔어요. 나랑 한바탕 싸웠어요.”“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분명 본인이 잘못했으면서 손찌검까지 했어요?”나는 짐을 놓고 얼른 집을 정리했다.고수연은 우울한 모습으로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질러진 집을 정리할 마음도 없어 보였다.결국 내 도움으로 집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고수연의 기분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심지어 가끔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그 모습이 너무 불안해 보여, 나는 고수연에게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수연 누나, 울지 마세요. 우선 물부터 마셔요.”고수연은 손을 뻗어 컵을 받아 들었다.“미안해요. 감정이 주체가 안 되네요. 피곤할 텐데 가서 쉬어요. 지금은 챙겨줄 수가 없네요.”“저는 상관하지 마세요. 저도 다 큰 어른인데, 스스로 돌볼 수 있어요.”고수연이 여전히 우울해 보여,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간단히 내가 묵을 객실이 어디인지 묻고 짐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하지만 객실 침대에 앉아 있는 게 매우 불편했다.문밖에 있는 여자와 친한 사이도 아닌 데다, 남녀가 단둘이 있으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민우한테서 두 번이나 전화가 걸려 왔었다.그제야 오늘 민우를 데리고 면접보러 가겠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건데 내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나는 얼른 민우에게 전화했다.“민우야, 미안해. 아침에 일이 좀 있어서 폰을 확인하지 못했어... 너 면접은 어떻게 됐어?”그나마 다행인 건, 어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면접 절차에 대해 대충 얘기했기에, 민우는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아도 아마 면접에 지장이 가지
[있었지. 그런데 몸이 안 좋았다고 했잖아. 그래서 검사하고 하려고 얘기해 보려고 했지.]“하긴, 천천히 해. 서로 소통만 잘하면 점점 더 좋아질 거야.”나는 임설아의 몸을 노린 적도 없고, 두 사람이 헤어지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솔직히 말하면 두 사람이 백년해로하기를 더 바란다.지금의 나는 남주 누나처럼 개과천선했다. 때문에 미색에 절대 홀리지 않을 거라고 이미 다짐했다.실력이 없으면 미색을 탐하면 안 된다. 때문에 나는 우선 내 실력부터 키워야 한다.우리는 그 뒤로도 한참 얘기를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나는 살금살금 문 앞으로 다가가 문틈 사이로 거실을 확인했다.고수연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가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니 위로해야 할지 무척 고민되었다.위로 하자니, 내키지 않았고. 그냥 넘어가자니, 너무 매정한 것 같았다.나는 침대에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거실로 나갔다.“수연 누나, 울지 마세요. 계속 울면 실명할 수도 있어요. 그런다고 그 남자가 마음 아파하지는 않잖아요.”이 말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이 말을 들은 고수연은 더 서럽게 울었다.“괴로운 걸 어떡해요? 아이 키우고, 시부모님 모시는 게 어디 쉬워요? 내가 늙으면 남편이 싫어할까 봐, 관리도 열심히 했어요.”“충분히 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바람피우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고수연은 말하면서 계속 흐느껴 울었다.나는 얼른 티슈 몇 장을 뽑아 건네며, 부족한 말솜씨로 고수연을 위로했다.“변심한 남자는 곁에 둬도 소용없어요. 차라리 일찍 버리세요. 그리고 아직 젊은데, 일자리도 찾으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요.”“말이 쉽지, 벌써 경력 단절된 지 몇 년이 됐어요. 그런 사람을 누가 받아줘요?”“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잖아요. 앞을 내다봐요. 그래야 사는 게 희망이 있죠.”나는 위로하면서도 막막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계속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나도 방법이 없었다.아직 결혼도 안 해
진용진은 그에 반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고수연, 당신도 그만해. 곧 이혼할 사이에, 이러는 거 싸 보여.”고수연은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맞아, 나 싸. 당신이 바람피운 거 알면서도 이래. 내가 여자 망신시키고 있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도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하겠다고. 당신을 떠나면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떡해?”고수연은 말하면서 또 흐느껴 울었다.진용진은 아예 이골이 났는지 귀찮은 티를 팍팍 냈다.“내가 당신을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이런 점이야. 나를 사랑한다면서 사랑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그저 맨날 껌딱지처럼 달라붙는 것만 좋아하고.”남자도 자유가 필요해.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당신이 너무 옥죄어 와서 숨쉬기 바빠. 나 이제 더 이상 못 참겠어.”고수연은 황급히 사과했다.“앞으로 안 그럴게.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집에만 잘 돌아오고, 나를 계속 사랑해 주면 돼.”고수연은 말하면서 진용진을 끌어안고 입 맞췄다.그러다 보니 진용진도 점차 반응했다.곧이어 진용진은 고수연을 품에 안고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건 당신이 스스로 말한 거다. 내가 강요한 거 아니야. 자, 엎드려. 우선 한 발 빼자...”고수연은 순순히 엎드려 다정하게 물었다.“여보, 이 높이 괜찮아?”진용진은 음탕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아주 좋아.”말하면서 비릿한 미소를 짓는 진용진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보기 힘들었다.진용진은 분명 고수연의 몸만 탐하는 건데, 고수연은 체면도 다 버린 채 진용진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으니.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그걸 듣고 있는 게 괴로워, 나는 물건을 내려놓고 바로 집을 나왔다.나는 동네 공원에 앉아 답답한 마음을 추슬렀다.같은 고씨 집안 사람이고, 모두 미녀인데, 두 사람이 왜 이렇게 다른지?형수는 독립적인 여지인데, 고수연은 남자의 부속품 같았다.분명 상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핸드폰을 꺼내 형수한테 상황을 말하려고 했다.하지만 폰을 꺼내자마자 고수연이 빼앗아 갔다.“뭘 또 말해요? 여기 우리 집이거든요. 내가 지내도 된다면 지내고,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그 말을 들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좋아요, 갈게요. 핸드폰 돌려줘요.”“안 돼요. 우선 짐부터 싸요. 그쪽이 후회할까 봐 먼저 주기 싫어요.”고수연은 나를 아예 소인배 취급했다.분명 소인배는 제 남편 진용진인데, 그런 인간한테는 매달리고, 내 앞에서는 위세를 떨고 있다니.나는 속으로 고수연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솔직히 형수만 아니면, 당장 이 여자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나는 애써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난 그쪽처럼 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은 아니니까.”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고수연을 비아냥거리는 말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내 말을 들은 고수연은 갑자기 욱해서 소리쳤다.“누구더러 낯가죽이 두껍다는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해 봐요.”고수연은 말하면서 나를 향해 손톱을 드러냈다.그 틈에 나는 얼른 핸드폰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다만 고수연이 발 빠르게 움직여 내 손을 피했다.그렇게 싸우다 보니 신체 접촉은 피할 수 없었다.그래도 남자라 여자 하나 제압하기에는 수월했으나, 팔이 다친 바람에 한 손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수연은 생각보다 악랋해서 나를 이길 수 없자 다친 내 팔을 세게 잡았다.갑자기 전해지는 고통에 나는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심지어 눈물도 찔끔 흘러나왔다.나는 잔뜩 분노해서 고수연을 노려봤다.“미쳤어요? 팔 다친 거 안 보여요?”고수연은 뻔뻔하게 대답했다.“아니까 팔 공경한 거지. 여자인 나한테 폭력을 쓰는 그쪽도 비겁한 건 똑같으면서.”“정말 제정신 맞아요? 남편이 바람피웠는데도 매달리며 굽신거리다니.”나 역시 독설을 퍼부었다.고수연은 그 말에 나를 독하게 노려봤다.“바람피운 게 어때서요? 세상에 바람 안 피우는 남자가 몇이나 돼요
나와 윤지은은 하이 파이브를 했다. 우리의 합이 이렇게 잘 맞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물론 하정현의 도움도 컸다.우리 셋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로 안성태와 마주 섰다.그때 하정현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성태, 너한테 한 번만 기회를 줄게. 네가 그 계약서를 나한테 돌려주고 내 사진을 모두 삭제하면 네 책임을 묻지 않을게.”안성태는 그 말을 듣더니 피식 웃으며 외투를 벗어 던졌다.“너희가 꽤 치는 줄 몰랐네. 마침 잘 됐어. 나도 오랜만에 좀 놀아보자.”그때 나는 즉시 윤지은과 하정현 앞에 막아섰다.“저놈은 내가 상대할 테니 두 사람은 본인 몸이나 잘 지켜요.”무엇보다 안성태는 덩치가 컸기에 나는 절대 그놈이 윤지은이나 하정현을 노리게 둘 수 없었다.“승산은 있어?”윤지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할 거예요.”“그럼 힘내.”나는 안성태 앞으로 다가갔다.내 키도 185라 놈 앞에서 조금도 꿀리지 않았다.비록 안성태의 덩치가 나보다 훨씬 컸지만 나보다 민첩성에서 떨어질 수 있었다.안성태가 나를 먼저 공격했다.하지만 나는 신속히 오른쪽으로 몸을 피했다.변석훈이 전에 말했는데 알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는 서둘러 공격하는 것보다 우선 상대의 실력과 잘 쓰는 기술, 그리고 약점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때문에 초반에 나는 계속 피하기만 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만 하면 그걸로 족했으니까. 그와 동시에 나는 상대를 관찰했다.몇 분 동안 싸우다 보니 s는 안성태가 덩치가 커서 힘만 넘쳐났지 기술과 스피드가 많이 달린다는 걸 발견했다. 나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이젠 내가 공격할 차례다, 이 개자식아.”나는 신속히 공격했다.지난 한 달 동안 피하는 법과 공격하는 법을 배운지라 내 현재 속도는 안성태보다 훨씬 빨랐다.나는 단번에 필살기를 쓰겠다는 마음으로 놈의 정가운데를 잡았다.그 순간 안성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눈을 까뒤집었다.“이 비겁한 자식...”나는 피식
“안성태, 내가 정말 사람 잘못 봤네.”하정현은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 모습을 본 안성태는 오히려 깔깔 웃어댔다.“하하하, 나 원래 불법 장사하는 사람이야. 어디서 순진한 척하는 거야? 그러게 순순히 촬영에 협조하면 됐잖아. 왜 그렇게 기어올라? 네가 계약을 위반했으니 위약금을 내는 건 당연하잖아.”“계약서에 명확히 적혀 있어. 촬영에 협조하지 않을 시 위약금을 지불한다.”“그게 1억이라고?”하정현은 후회막심했다.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옛 동창이거나 고향 사람들이라서 하정현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 촬영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틀 전까지만 해도 정상적인 촬영이라 순조로웠는데, 오늘 갑자기 낯부끄러운 장면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그것도 못생긴 남자 모델들과 함께.그러니 하정현은 당연히 싫다고 거절했다.그랬더니 이 사람들은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며 하정현더러 위약금을 물어내라며 마구 때렸다.그 순간 하정현은 죽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나와 윤지은 역시 하정현의 몸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나는 얼른 윤지은과 함께 하정현을 부축했다.“이건 정현 씨 잘못 아니에요. 탓하려면 쓰레기 같은 저 자식들을 탓해야죠.”“헛소리 그만하고 대답해. 위약금 낼래? 아니면 촬영에 협조할래? 선택하지 않으면 오늘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갈 생각 하지 마.”윤지은은 이내 나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내가 유도를 배운 적 있어서 한두 명은 문제없어. 나머지를 혼자 해결할 수 있겠어?”현장에는 총 6명이었다.윤지은이 2명을 맡는다면 나는 4명을 해결하면 된다는 뜻이었다.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절대 맥 빠지는 소리를 할 수 없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문제없어요.”“그럼 왼쪽 둘은 내가 맡을게. 나머지는 네가 해결해.”윤지은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왼쪽에 있는 놈에게 돌진했다.이윽고 나 역시 하정현더러 자리를 찾아 숨어 있으라고 하고는 다른 놈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하정현은 숨지
윤지은은 두말없이 파이프렌치를 받아 들었다.그제야 나도 망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철제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하정현은 그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그 순간 나는 먼저 관찰하다가 기습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쪽으로 바로 달려갔다.쾅쾅쾅!철문이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윤지은의 이런 모습은 너무 용맹스러웠다. 나 역시 그런 그녀에게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분명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인데 곤란한 상황 앞에서 전혀 당황하지 않는 이런 용기는 정말 기특했다.얼마 뒤, 철제문은 안에서 열리더니 꽃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나와 물었다.“뭐 하는 거야?”윤지은은 두말없이 파이프렌치를 들이밀었다. 그 순간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놈도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하정현 어디 있어?”“젠장. 그 계집애를 찾으러 온 거였어? 센 척하긴.”“잔말 말고. 하정현 어디 있어?”윤지은은 언성을 높이며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안에...”윤지은은 두말없이 제 앞을 막은 놈을 밀치고 안으로 쳐들어갔다.창고 안은 아주 간단한 스튜디오였는데 촬영 내용은 어디 내놓기 남사스러운 장면들이었다.그 가운데 하정현이 있었는데 얼굴에 상처가 난 걸 보면 맞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하정현 여에는 상의를 벗어 던진 못생긴 놈들이 서 있었는데 보아하니 하정현의 촬영 파트너인 것 같았다.나는 하정현을 본 순간 곧장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때 남자 한 명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나는 한주먹으로 놈을 쓰러뜨리고 하정현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괜찮아요?”하정현의 얼굴에는 온통 상처였으며 눈시울은 빨갰다.“괜찮아. 안 죽어.”그때 촬영장 스태프들이 우리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윤지은은 우리 앞에 막아선 채 당장 놈들에게 덤벼들 태세를 취했다.“한 발짝만 더 나서 봐!”그 순간, 긴 콧수염을 가진 남자 한 명이 냉소를 머금은 채 걸어 나왔다.“계집애 주제에 이 많은 인원을 다 묶어둘 수 있을
“어디서 감히! 나 경찰에 신고한다?”나는 마음이 조급하고 걱정이 앞섰다.하지만 내 말에 상대는 오히려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래. 신고해. 경찰이 도착했을 때면 그 계집애는 죽어 있을 테니까.”“내가 돈 줄 테니까 그 여자 풀어줘.”나는 하정현을 구하고 싶었지만 하정현이 있는 곳이 어딘지 몰랐기에 이런 방법으로 거래할 수밖에 없었다.상대는 돈을 갚는다는 말에 이내 웃었다.“좋아. 그럼 북교 사거리 뒤쪽에 있는 공터로 와.”상대가 말한 곳은 도심과 매우 먼 데다 사고 다발지역이라 택시 기사들도 다니기 싫어하는 일대였다.그렇다고 버스를 타는 건 더욱 불가능했다. 버스는 너무 느려 도착하면 모든 게 끝날 수도 있었다.한참 고민한 끝에 나는 결국 윤지은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지은 씨, 혹시 안 쓰는 차 있으면 좀 빌려줘요.”윤지은은 나를 꿰뚫어 볼 듯 훑으며 물었다.“뭐 하려고?”“그런 건 묻지 말고 한 번만 빌려줘요. 한 번만 쓰고 돌려줄게요.”“이유도 말해주지 않는데 내가 왜 빌려줘야 하지?”나는 너무 조급한 나머지 결국 하정현의 일을 모두 실토했다.자초지종을 들은 윤지은은 즉시 안색이 변하더니 두말없이 외투를 걸치고 나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갔다.“차고에 차 한 대 있어. 이게 차키야.”윤지은은 BMW 차키를 나에게 던져주며 나더러 운전하라고 했다.그건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명색이 윤씨 가문 딸인데, 스포츠카 몇 대 정도 소유하고 있는 건 정상이었으니까.나는 신속하게 시동을 걸고 놈이 말한 주소지로 내달렸다.윤지은의 얼굴은 어느새 잿빛이 되어 있었다.“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또 간 거야? 돈이 그렇게 부족한가?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정현 씨가 이번에 강북에 온 이유가 엄청 성가신 일 때문이라는 거 모르죠?”윤지은은 즉시 나를 돌아봤다.“무슨 성가신 일? 나한테 말한 적 없는데?”“정현 씨 어머니가 정현 씨더러 방법을 대서 아버지를 빼내라고 했대요. 안 그러면 연을 끊겠다고 하면서요.”내 말을
나는 재차 거절하며 말했다.“앞으로 우리 가게 자주 찾아와 주시면 돼요. 그러니 2억은 받을 수 없어요.”“에이, 수호 씨가 마음에 들어서 주고 싶어 주는 건 데도 안 받을 거야? 돈 받고 우리 딸이나 잘 만족시켜 줘.”이영미는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그에 반해 나는 그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님은 제가 지은 씨랑 만나는 거 괜찮아요?”“괜찮지 그럼. 이렇게 잘생기고 몸매도 좋은 남자애가 또 어디 있다고. 수호 씨가 우리 딸 만족시켜 주면 우리 지은이도 좋아할 거야.”“난 개방적인 사람이라 우리 딸만 즐겁고 행복하면 돼. 결혼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잠깐 만나다 헤어지면 그만이야.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 윤씨 가문은 지은이를 먹여 살릴 수 있어.”처음 들어보는 관점에 나는 크게 놀랐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윤씨 가문은 워낙 재산이 많고 부부가 워낙 개방적이니 결혼이 최종 귀착점이 아닐 수 있었다.게다가 이영미는 자식이라고는 윤지은 한 명뿐이니, 당연히 자기 딸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부끄럽네요. 하지만 어찌 됐든 이 돈은 받을 수 없어요...”“안 받으면 안 돼. 안 받으면 수호 씨가 우리 지은이 만족시켜주지 못할까 봐 걱정돼. 우리 지은이가 불감증인데 수호 씨를 못 잊는 걸 보면 수호 씨가 그쪽 방면으로 꽤 쓸만하다는 뜻이니까.”“콜록콜록...”나는 침에 사레가 들렸다.“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구체적인 상황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우리 지은이가 수호 씨랑 같이 있고 싶어 하고 나도 수호 씨가 마음에 드니까, 수호 씨는 우리 지은이만 만족시켜. 난 우리 딸이 평생 즐거움을 경험해 보지 못하는 건 바라지 않아. 그러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뭔 소용이 있어?”역시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걸 나는 다시 한번 느꼈다.나는 열심히 돈 벌어 출세하려고 아득바득하고 있는데, 이영미는 벌써 후대의 행복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그것도 이토록 깊숙이.그때
소설 중간마다 가끔 나오는 삽화는 수위가 너무 높았다.나는 이런 걸 이해할 수 없지만 요즘 많은 여자애들 사이에서 비엘이 인기라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영미도 그중 하나였을 줄은 몰랐다.나는 책을 다시 책장에 밀어 넣고 다른 책 하나를 골랐다. 이번에는 비엘 만화였다. 이영미가 이 정도로 심각하게 베엘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니.나는 그 책을 도로 꽂아 넣고 또 다른 책을 골랐다. 하지만 이번 역시 비엘 만화였다.알고 보니 책장 전체에 이런 책들뿐이었다.나는 너무 어이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보아하니 이영미는 평소 이런 책을 즐겨 보고 윤해철은 이영미를 무척이나 아끼기에 특별히 아내를 위해 전문 책장까지 만들어준 모양이었다.볼 수 있는 책이 없어 나는 결국 새를 구경하러 갔다.어떤 새들은 마치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무척 재밌게 행동했다.그중에 말할 수 있는 앵무새 두 마리가 있었는데, 나는 참지 못하고 그 앵무새들을 건드렸다.그때 한 앵무새가 갑자기 이영미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여보, 샤워해.”그러자 다른 앵무새가 잇따라 소리 냈다.“같이 씻을래?”“좋아. 난 역시 욕실이 좋아...”대화가 이어지는 두 앵무새를 보니 나는 넋을 잃었다. 앵무새까지 이 정도로 밝히는 걸 보면 평소 이 집 부부가 얼마나 붙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 뒤로 무려 2시간 뒤에 윤해철과 이영미는 함께 내려왔다.나는 속으로 윤해철의 지속력에 감탄했다.이영미는 얼굴이 발그스름했고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오래 기다렸지?”“아니에요.”나는 예의상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지만 솔직히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었다. 아니, 참기 힘들다는 게 더 맞을지도.집안 곳곳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분위기에 보통 사람들이 오면 정말 견디지 못할 거다.“수호 군, 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수표를 써줄 테니까.”윤해철은 내려올 때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가 돋보인다던 양복을 입고 내려왔다. 그 모습은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너무 멋있었다.그러니
“크흠...”나는 일부러 헛기침하며 뒤에 나도 앉아 있다는 걸 티 냈다.그런데 이영미는 오히려 깔깔 웃으며 말했다.“수호 씨는 한숨 자. 나는 우리 남편과 볼일이 좀 있으니까.”‘이건 무슨 상황이지?’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잘 수 있을 리가 있나?“저기 두 분 좀만 참으세요. 이따가 집에 도착하면 마음껏 하셔도 돼요.”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또래의 부부에게 이런 말을 하려니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때 이영미가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이런 걸 어떻게 참아? 수호 씨도 경험 있을 거 아니야. 하고 싶을 때 쉽게 참아져?”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그럼 저 먼저 내렸다가 두 분 끝나면 다시 올게요.”“그럴 필요 없어. 그냥 앉아 있어. 차는 움직일 때 더 느낌 있으니까.”내 옆에 앉은 기사는 이런 대화를 듣고도 덤덤한 표정이었다. 보아하니 자주 있는 일이라 익숙해진 듯했다.결국 나는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올 리가 만무했다.그도 그럴 게, 귓가에 자꾸만 이영미의 애교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으니까.비록 두 사람은 정말 몸을 섞지는 않았지만 서로 희롱하며 불장난하는 모습만 봐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심지어 가끔 몸을 저릿하게 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이 점으로 보면 두 사람이 평소 자주 야릇한 농담을 주고받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둘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다 보니 나는 점점 부러웠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도 나중에 늙어서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집으로 가는 내내 화끈한 장면이 뒤에서 생중계되는 바람에 영화를 관람할 때보다 더 괴로웠다.심지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윤해철은 이미영을 안고 서둘러 침실로 돌진했다.운전기사이자 윤씨 가문 집사인 손정현은 나를 거실로 데리고 가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그때 나는 문득 궁금해서 물어봤다.“혹시 기사님은 아무 반응도 없어요?”손정혁은 덤덤하게 대답했다.“나도 이제 50이 넘는데 무슨 반응이 있겠어요?”“50이 넘는다고 나이 든 건 아
하지만 윤지은은 겉으로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뜬금없이 왜 이래?”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윤지은이 대놓고 거절하지 않았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뜻이니까.나는 말을 이었다.“우리가 서로 날을 세우고 있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사람 중에 서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안 그래요?”“그런 거 묻지 마. 난 몰라.”윤지은은 답변을 거절했다.이에 나는 싱긋 웃었다.“저는 지금 이대로가 편한 것 같아요. 사실 지은 씨가 말은 독하게 하지만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내가 그딴 감언이설에 넘어갈 것 같아? 그럴 시간에 사업이나 일궈.”“안 그래도 사업은 할 거예요. 참, 이틀 뒤에 천수당이 개업하는데 지은 씨도 와요.”“시간 봐서. 스케줄 없으면 가고, 있으면 못 가.”윤지은은 항상 이런 식이다. 어느 한번 애교 누나나 형수처럼 확정된 대답을 할 때가 없다.하지만 윤지은이 이렇게 말한 것만 해도 나는 무척 기뻤다.나는 다른 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면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서로 틀어져 영원히 얼굴 보지 않는 관계보다는 나으니까.우리가 한창 대화하고 있을 때 이영미와 윤해철이 짐을 챙겨 나왔다.나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짐을 대신 들었다.윤지은은 아버지한테 여전히 쌀쌀맞게 굴었지만,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나오라는 건 고분고분 동의했다.차에 오른 뒤 윤해철은 참지 못하고 한탄했다.“지은이 쟤는 성격이 누구를 닮았는지 아주 고집불통이야.”“누구를 닮았긴? 당연히 당신을 닮았지. 당신도 젊었을 때 저랬잖아.?”“내가 그랬다고? 난 당신 앞에서 저런 적 없는데?”윤해철은 인정할 수 없었다.그때 이영미가 윤해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내 앞에서는 그런 적 없어도 아버님 앞에서는 그랬잖아. 잘 생각해 봐. 지은이 성격 당신이랑 똑 닮았지?”윤해철은 난감한 듯 얼굴을 붉혔다.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젊었을 때 윤해철은 사업
“지금이야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 만나면 생각이 바뀔 거야.”윤해철은 여전히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다만 윤지은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 쓰레기가 얼굴에 쓰레기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 부잣집 도련님 중에 쓰레기가 없다는 건 어떻게 장담해요? 아빠는 그동안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 봤잖아요. 그럼 아빠가 한번 말해 봐요. 평소 만났던 부잣집 도련님 중에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어요?”“다 싸잡아서 욕하지 마. 부잣집 도련님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 누군가는 네가 말한 그런 사람이 있겠지...”“저는 싸잡아서 욕한 적 없어요. 그저 어떤 신분의 남자든 쓰레기는 똑같이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었어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래요. 그 누구도 저를 강요할 수 없어요.”“아빠가 정말 저를 아끼고 사랑하고 저를 위해 생각한다면 제 의견도 존중해 줘야 하잖아요. 계속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할 게 아니라...”“내가 언제 강요했다고 그래? 몇천억짜리 회사를 그냥 주겠다는데 그게 왜 강요야?”두 부녀가 싸움 날 것 같자 이영미는 얼른 끼어들어 분위기를 풀었다.“됐어. 그만 싸워. 어쩜 부녀라는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워대? 지은아, 가업을 잇고 싶지 않으면 잇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엄마가 네 편 들어줄게. 오늘 식사 자리에 꼭 참석해. 엄마 체면 봐서라도. 알았지?”윤지은은 소파에 기대앉아 건성으로 대답했다.“나중에 주소 보내줘요.”그 말에 이영미는 활짝 웃었다.“그래. 레스토랑 예약하면 바로 알려줄게.”“여보, 나 짐 싸는 거 좀 도와줘.”이영미는 윤해철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홀로 남겨진 나는 윤지은을 빤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 곁으로 움직였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나를 째려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얘기 좀 해요.”“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있던가?”“아무 거나 얘기하면 되죠. 그러고 보니 우리 안 본 지 꽤 됐잖아요.”“차라리 평생 내 눈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