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피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헛소리 그만해. 나 지금 너 보고 싶어. 만날 거야 말 거야?”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라는 사인을 보냈다.하지만 민우는 여전히 망설였다.“나... 우리 내일 만날까? 내일 면접 성공하면 만나자. 실패하면... 다른 사람 찾아.”“다른 사람 찾으라니,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신민우, 너도 내가 맨 처음 좋아한 사람이 너 아니라는 거 알지? 그런데도 결국은 너랑 만났어. 나 임설아는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너랑 같이 있기로 했으면 절대 다른 사람 안 만나.”“우리가 몇 년을 만났는데, 다른 사람 찾아가라고? 너 죽고 싶어?”임설아는 울면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옆에서 그걸 듣고 있는 내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임설아가 이렇게 당돌할 줄이야.민우는 된통 욕을 먹고는 쩔쩔맸다.“나, 나도 이러기 싫어. 내가 너무 쓸모없는 놈이라서 그래.”“그래, 너 쓸모없는 놈 맞아. 어떻게 3년을 만났는데 털끝 하나도 안 건드려? 내가 뭐 조선시대 종갓집 규수라도 되는 줄 알아? 내 의견은 물어봤어? 난 너랑 결혼하고 싶고 백년해로하고 싶은데, 딴 놈 만나라고? 신민우, 우리 만나. 내가 너 죽여버릴 테니까...”임설아는 더 펑펑 울었다.민우 역시 눈물을 흘렸다. 사내놈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설아야, 미안해...”“미안하다는 소리 듣기 싫어. 애초에 나한테 했던 약속이나 지켜. 평생 나 아니면 결혼도 안 하겠다고 했잖아. 나 그거 진담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말한 대로 약속 지켜.”나는 얼른 민우 어깨를 두드리며 정신 차리라고 귀띔했다.임설아처럼 좋은 여자애를 놓치면 민우는 분명 후회할 거다.민우는 내 격려를 받고 심호흡했다.“좋아. 임수거리에서 기다릴게, 마침 옆에 수호도 있어.”“수호? 어떤 수호?”“정수호. 우리 대학 동기. 네가 좋아했던 애.”“네가 말 안 하면 잊을 뻔했네. 둘이 어떻게 만났어?”나는 멍하니 둘의 대화를 들었다.
두 사람은 조금 뒤 보기로 약속했다.민우는 신이 나서 말했다.“수호야, 여기서 기다려. 나 설아 데려올게.”“난 됐어. 둘이 만나는데 내가 왜 끼어?”민우는 다급히 말했다.“안돼, 넌 내 은인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까지 설아를 피하고 있었을 거야. 나 설아 앞에서 너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 내 말 들어. 기다려.”말을 마친 민우는 신이 나서 전기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버렸다.민우가 떠난 뒤,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설아와 대화했던 내용을 뒤져봤다.특히 어제 받았던 음성 메시지를. 지금까지도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나는 모든 대화 내용을 삭제했다. 이러면 증거가 없어질 테니.그때 임설아가 내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안녕하세요. 나 임설아 엄마예요. 어젯밤 설아 핸드폰으로 대화한 건 그쪽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어요. 우리 설아랑 뭐 있죠?]‘귀신을 속여라.’‘아주 본인이었다고 광고를 해!’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협조했다.[어머님이셨군요. 저와 임설아는 그저 평범한 친구입니다. 아무 관계도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임설아는 나에게 또 문자를 보냈다.[믿어요. 어제 보낸 음성 메시지 역시 테스트 일종이니 다른 사람과 말하지 말아요.]나는 웃으며 임설아의 문자에 답장했다.[네, 그럼요. 하지만 좀 궁금하네요. 혹시 어제 저를 테스트하려고 스스로 한 거예요?]임설아는 화가 난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어른한테 못하는 말이 없군.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 당연히 인터넷에서 찾았지.][그렇군요. 알겠어요. 부모님 마음은 다 똑같잖아요. 이해해요. 그러면 그 사진은요? 어떻게 딸 사생활이 담긴 사진을 폭로하는 사진은 마구 배포할 수 있어요?][사진으로 유혹하지 않으면 속았겠어요?][네, 참 촐명하시네요.]‘얼마나 똑똑했으면 낯선 남자를 시험하려고 자기 딸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을 보내지?’‘이런 말은 귀신도 안 믿겠어.’대화를 하면 할수록 어이없는 일의 연속이었다.심지어 임설
“수호야, 너 그게 무슨 말이야?”민우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남자가 그립다던데?”“어, 정말이야?”신민우의 표정은 더욱 이상해졌다.“설아 어머니 남편 있는데?”“남편이 있는데 뭐? 남편이 있다면 만족시켜 주지 못하나 보지. 임설아 아버지도 중년이라서 기능이 많이 약해졌나 보지, 반대로 어머니는 오히려 욕구가 많을 나이고.”나는 덤덤한 얼굴로 헛소리했다. 그러다가 임설아를 바라봤다.“임설아, 안 그래?”“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임설아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니 왠지 헛웃음이 나왔다.‘그러게 왜 자기 어머니를 방패막이로 사용해? 내가 바보인 줄 아나?’‘네가 놀겠다니 같이 어울려주는 거야.’“임설아, 네 어머니 병원에 좀 데려가 봐. 안 그러면 참다가 병 나.”사실 이 말은 임설아에게 하는 충고였다.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왜냐하면 임설아 낯빛을 보니 확실히 정상은 아니라는 게 티가 났으니까.임설아는 나를 휙 째려봤다.“너나 잘해. 민우야, 나 오늘 집에 가기 싫어. 네 자취방 가고 싶어.”퉁명스럽게 나를 쏘아붙인 임설아는 얼른 민우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그 말을 들은 민우는 안색이 변했다.“뭐? 내 자취방에?”민우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얼른 테이블 아래로 그를 걷어찼다.‘아까 말한 걸 모두 잊었나?’사실 민우는 걱정이 있었다. 지금 그가 사는 곳은 환경이 안 좋아 임설아가 자기와 함께 고생하는 걸 원치 않았다.하지만 내가 자꾸만 발로 툭툭 차며 임설아를 집에 데려가라고 일깨워 주니 갈등이 생긴 모양이었다.옆에서 그 모습을 보는 나만 조급해 났다.‘나였으면 진작 동의했을 텐데. 이러니까 임설아가 불만이 많지.’“설아야, 아니면 내일 내 일자리가 확정되고 다른 자취방을 알아보면...”그 말을 들은 설아의 낯빛은 이내 어두워졌다.“또 변명이야? 매번 왜 변명이 그렇게 많아? 난 그저 너랑 하룻밤 같이 있고 싶을 뿐인데, 왜? 그게 그렇게
[수호 씨,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돌아와요.]애교 누나의 말에 나는 헤실 웃었다.“누나, 저 보고 싶어요?”[장난 그만 쳐요. 시간도 늦었고, 다치기까지 했는데 나쁜 사람 만나면 어떡하려고요?]“나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젠장!”나는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건너편에서 애교 누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수호 씨, 무슨 일이에요?]나는 불안한 마음에 뒤로 물러섰다.그도 그럴 게, 나랑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흰머리 사내, 정태곤이 음산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이거 너무 운이 없는 거 아니야?’나쁜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하자마자 나쁜 사람을 만나 버리다니.게다가 이 골목은 너무 외진 고에 있어, 도움을 청해도 올 사람이 없다.나는 애교 누나한테 상황 설명할 새도 없이 전화를 끊고 뒤돌아 도망쳤다.정태곤은 내 뒤를 천천히 따라왔다. 뒤를 보니 점점 작아지는 놈의 실루엣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됐다.하지만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정태곤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그것도 미친 속도로.“젠장, 젠장...”나는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난 정태곤과 같은 레벨도 아닌데, 이대로 잡히면 죽지 않더라도 적어도 불구가 될 게 뻔했다.정태곤이 점점 가까이 오더니 갑자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낮에는 도망쳤겠지만, 지금도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나는 다급히 소리쳤다.“나 정말 소여정 씨랑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난 평범한 직원이라고, 내가 어떻게 소여정 씨 같은 사람을 건드려?”정태곤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뛸 수 없었다.그러다 결국 정태곤이 나를 따라잡아 발로 세게 걷어찼다.그때 어찌 된 영문인지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 발길질을 피해버렸다.그 순간, 정태곤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나를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발 괜찮죠?”나는 걱정스레 물었다. 그 목적도 사실은 내가 보통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정태곤은 그 말을 무
[내가 뭘 어쨌다고?]소여정의 대답에 나는 더욱 화가 났다.[이게 다 소여정 씨 때문이잖아요. 당신 남자가 사람을 시켜 나를 죽이라고 했다고요. 낮에도 나를 죽일뻔하더니, 방금 또 죽이러 쫓아왔어요. 나 하마터면 죽을뻔했다고요.]그 시각 별장 안.소여정은 내가 보낸 문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괜찮아?]나는 셀카를 한 장 찍어 보냈다.[직접 봐요. 팔도 깁스를 하고 갈비뼈도 두 개나 부러져서 회복 중인데, 식사 도중에 그 악마 같은 놈이 또 튀어나왔어요. 내가 발이 빨랐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벌써 시체가 됐다고요.][그쪽이 죽으면 내가 맨 처음 향을 피워줄게.][헐, 내가 이렇게 됐는데 농담이 나와요? 정말 악독한 사람이네요.]대화를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소여정이 만약 내 옆에 있었다면 한바탕 제대로 혼쭐내줬을 텐데.[나 원래 양심도 없고 독한 여자야. 안 그러면 왜 남의 정부나 하고 있겠어?][아주 대단하네요. 그래요, 앞으로 피하면 그만이지. 우리 더 이상 연락하지 말죠.]나는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소여정을 아예 삭제했다.생각할수록 소여정이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본인 때문에 이 지경으로 다쳤는데, 위로의 말은 하지도 않고 놀려대다니.‘생긴 게 예쁘면 뭐 해? 속이 악독한데. 앞으로 이런 여자랑은 더 이상 엮이지 말아야지.’한편 별장에 있던 소여정은 나에게 문자를 보내다가 전송 실패하자, 그제야 내가 본인을 삭제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때, 샤워를 마친 임천호가 밖으로 걸어 나오더니 소여정더러 자기 다리에 앉으라고 사인을 보냈다.소여정은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가 임천호의 품에 안겨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정태곤더러 돌아오라고 해요.”“왜?”“나 정수호라는 남자랑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조직 보스씩이나 되는 사람이 일개 마사지사를 왜 물고 늘어져요? 이건 좀 수준 떨어져 보여요.”임천호는 허허 웃으며
소여정은 고개를 들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임천호를 바라봤다. 임천호는 얼른 그녀에게 강하게 키스했다.“이러지 마, 나 마음 아파.”“마음 아프기는 해요? 정태곤을 강북에 보내 내 뒤를 캐게 하고, 의심하고 믿지 않았으면서.”임천호는 소여정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내가 잘못했어. 지금 당장 정태곤한테 연락해서 돌아오라고 할게.”임천호는 말을 마치자마자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정태곤, 돌아와.”“봤지? 네 말대로 했으니 이제 기분 풀렸지?”소여정은 임천호 품에 기댔다.“기분 나쁠 것도 없어요. 제 말대로 해주는 것만으로도 기꺼워요. 자꾸만 제가 변했다고 하는데, 사실 회장님도 변했어요. 제가 예전처럼 회장님한테 의지하는 건 아니지만, 자꾸 저를 예전처럼 속박하지 말아줄래요?”“강북 사람들 중에 제가 회장님 여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제가 어디로 도망가겠어요?”소여정은 말하면서 구슬 같은 눈물을 떨구었다.소여정은 사실 임천호에게 마음이 있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고, 가장 무기력할 때, 임천호가 불구덩이 속에서 그녀를 꺼내줬으니.한때 소여정은 임천호에게 무척 의지했었다. 심지어는 임천호의 곁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만 같았었다.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성장한다.그렇게 성장한 소여정은 많은 걸 알게 됐고, 더 강해졌고, 독립적으로 변했다. 때문에 일정한 공간과 자유가 필요해졌다.그런데 소여정이 그럴 때마다 임천호는 매번 그녀가 자기 곁에서 떠나려는 줄 알고, 더 속박하고 옥죄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점점 멀어졌고,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소여정도 변하고 싶지만, 미래가 어떨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그 시각, 강북의 어느 한 거리에서 임천호의 전화를 받은 정태곤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정태곤은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임천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결국은 강북을 떠났다. 하지만 그와 나의 원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나는 아슬아슬하게 동네에 도착했고, 애교 누나 집에 들어서고 나서야 안심할
“안 돼요.”나는 단번에 거절했다.“누나, 안 그래도 저 고작 마사지사인 데다 나이도 어리고, 이룬 성과도 없어요. 그런데 이대로 아버님 도움까지 구한다면, 아버님은 저를 더 무시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더 허락할 리 없고.”이것 때문이라도 나는 절대 누나의 집에 가지 않을 거다.애교 누나가 내 손을 잡고 나를 위로했다.“수호 씨 마음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이잖아요. 우선 안전부터 보장해야 하지 않겠어요?”“저 스스로 보호할 수 있어요. 믿어줘요!”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무엇보다 누나에게 나도 이젠 남자라는 걸, 그래서 모든 일에서 누나가 돌봐줄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였다.애교 누나는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수호 씨도 참, 나한테까지 그렇게까지 내외할 거 없어요. 난 그런 거 상관 안 해요...”“누나, 그런 말 하지 마요. 저 이미 결정했어요.”나는 애교 누나의 말을 잘랐다.그제야 애교 누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알았어요. 정 그렇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만약 정말 상대하기 벅차면 꼭 말해야 해요.”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 저녁에 경험한 일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철렁할 일이지만, 그만큼 도움도 많이 됐다.특히 민우의 기술은 너무 도움됐다. 정태곤 같은 사람한테도 먹혔으니까.‘그 기술 잘 연습해야지. 아주 익숙해져서 민우보다도 강해질 거야.’그러면 나중에 정태곤을 다시 만나더라도 너무 놀라서 넋을 잃은 일은 없을 테니까.침대에 누운 내 머릿속에는 온통 정태곤과 싸우던 모습뿐이었다.그대로 열심히만 연습하면 분명 실력이 크게 늘 거란 확신도 들었다.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사모님이 사장님께 내가 다쳤다고 얘기한 덕에 집에서 몸조리하라는 사장님의 연락을 받게 됐다. 때문에 당분간은 출근할 필요가 없어 원하는 시간에 깨어날 수 있었다.내가 깨어났을 때, 애교 누나는 이미 아침상을 차려 놓고
“내 딸이 왕정민과 이혼한 게 자네 때문인가?”이태웅은 다시 물었다.수간 너무 불안해졌다.아무리 봐도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불안해서 얼른 설명하려고 할 때, 애교 누나가 다급하게 달려왔다.“아버지, 그런 거 아니에요. 왕정민이 바람피웠어요. 그 인간이 먼저 잘못했다고요.”“그렇다고 똑같이 구는 거니?”이태웅은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애교 누나를 향해 호통쳤다.그 목소리에 놀란 애교 누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물을 그썽거렸다.애교 누나가 아버지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나도 무서웠지만 애교 누나가 억울하게 꾸중을 듣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워서 두고 볼 수가 없었다.“아버님, 이 일은 애교 누나 잘못 아닙니다. 탓하려면 저를 탓하세요...”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태웅은 차갑게 내 말을 끊었다.“자네를 탓하라고? 당연한 거 아닌가? 내 딸과 왕정민이 어떻든 두 부부 사이의 일인데,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하나? 내 딸과 왕정민이 이혼하자마자 내 딸 집에 얹혀사는 건 무슨 속셈이고?”그 질문에 얼떨떨해져 나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했다.“나쁜 마음으로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 애교 누나랑 같이...”“그 입 다물게!”이태웅은 또 차가운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그 목소리에 놀란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나는 이토록 불안한 적도, 겁먹은 적도 없다. 이토록 내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도 처음이고.이태웅은 아직도 나를 혼내고 있었다.“내 딸과 만나고 싶다고? 무슨 자격으로? 왕정민 같은 사람도 내 눈에 안 차는데, 자네가 내 눈에 찰까?”이태웅의 싸늘한 눈초리가 내 마음을 쿡 찔렀다.나는 소매 안에서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이태웅이 나를 설교하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입을 열었다.“네, 저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신분도 백도 아무것도요. 그래서 애교 누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도 제가 평범하다는 걸 인정해요.
나와 윤지은은 하이 파이브를 했다. 우리의 합이 이렇게 잘 맞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물론 하정현의 도움도 컸다.우리 셋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로 안성태와 마주 섰다.그때 하정현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안성태, 너한테 한 번만 기회를 줄게. 네가 그 계약서를 나한테 돌려주고 내 사진을 모두 삭제하면 네 책임을 묻지 않을게.”안성태는 그 말을 듣더니 피식 웃으며 외투를 벗어 던졌다.“너희가 꽤 치는 줄 몰랐네. 마침 잘 됐어. 나도 오랜만에 좀 놀아보자.”그때 나는 즉시 윤지은과 하정현 앞에 막아섰다.“저놈은 내가 상대할 테니 두 사람은 본인 몸이나 잘 지켜요.”무엇보다 안성태는 덩치가 컸기에 나는 절대 그놈이 윤지은이나 하정현을 노리게 둘 수 없었다.“승산은 있어?”윤지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할 거예요.”“그럼 힘내.”나는 안성태 앞으로 다가갔다.내 키도 185라 놈 앞에서 조금도 꿀리지 않았다.비록 안성태의 덩치가 나보다 훨씬 컸지만 나보다 민첩성에서 떨어질 수 있었다.안성태가 나를 먼저 공격했다.하지만 나는 신속히 오른쪽으로 몸을 피했다.변석훈이 전에 말했는데 알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는 서둘러 공격하는 것보다 우선 상대의 실력과 잘 쓰는 기술, 그리고 약점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때문에 초반에 나는 계속 피하기만 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만 하면 그걸로 족했으니까. 그와 동시에 나는 상대를 관찰했다.몇 분 동안 싸우다 보니 s는 안성태가 덩치가 커서 힘만 넘쳐났지 기술과 스피드가 많이 달린다는 걸 발견했다. 나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이젠 내가 공격할 차례다, 이 개자식아.”나는 신속히 공격했다.지난 한 달 동안 피하는 법과 공격하는 법을 배운지라 내 현재 속도는 안성태보다 훨씬 빨랐다.나는 단번에 필살기를 쓰겠다는 마음으로 놈의 정가운데를 잡았다.그 순간 안성태는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지르면서 눈을 까뒤집었다.“이 비겁한 자식...”나는 피식
“안성태, 내가 정말 사람 잘못 봤네.”하정현은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하지만 그 모습을 본 안성태는 오히려 깔깔 웃어댔다.“하하하, 나 원래 불법 장사하는 사람이야. 어디서 순진한 척하는 거야? 그러게 순순히 촬영에 협조하면 됐잖아. 왜 그렇게 기어올라? 네가 계약을 위반했으니 위약금을 내는 건 당연하잖아.”“계약서에 명확히 적혀 있어. 촬영에 협조하지 않을 시 위약금을 지불한다.”“그게 1억이라고?”하정현은 후회막심했다.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옛 동창이거나 고향 사람들이라서 하정현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 촬영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틀 전까지만 해도 정상적인 촬영이라 순조로웠는데, 오늘 갑자기 낯부끄러운 장면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그것도 못생긴 남자 모델들과 함께.그러니 하정현은 당연히 싫다고 거절했다.그랬더니 이 사람들은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며 하정현더러 위약금을 물어내라며 마구 때렸다.그 순간 하정현은 죽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나와 윤지은 역시 하정현의 몸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나는 얼른 윤지은과 함께 하정현을 부축했다.“이건 정현 씨 잘못 아니에요. 탓하려면 쓰레기 같은 저 자식들을 탓해야죠.”“헛소리 그만하고 대답해. 위약금 낼래? 아니면 촬영에 협조할래? 선택하지 않으면 오늘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갈 생각 하지 마.”윤지은은 이내 나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내가 유도를 배운 적 있어서 한두 명은 문제없어. 나머지를 혼자 해결할 수 있겠어?”현장에는 총 6명이었다.윤지은이 2명을 맡는다면 나는 4명을 해결하면 된다는 뜻이었다.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절대 맥 빠지는 소리를 할 수 없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문제없어요.”“그럼 왼쪽 둘은 내가 맡을게. 나머지는 네가 해결해.”윤지은은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왼쪽에 있는 놈에게 돌진했다.이윽고 나 역시 하정현더러 자리를 찾아 숨어 있으라고 하고는 다른 놈에게 달려들었다.하지만 하정현은 숨지
윤지은은 두말없이 파이프렌치를 받아 들었다.그제야 나도 망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철제 창고가 하나 있었는데 하정현은 그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그 순간 나는 먼저 관찰하다가 기습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윤지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쪽으로 바로 달려갔다.쾅쾅쾅!철문이 부딪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윤지은의 이런 모습은 너무 용맹스러웠다. 나 역시 그런 그녀에게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분명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인데 곤란한 상황 앞에서 전혀 당황하지 않는 이런 용기는 정말 기특했다.얼마 뒤, 철제문은 안에서 열리더니 꽃무늬 셔츠를 입은 남자 한 명이 나와 물었다.“뭐 하는 거야?”윤지은은 두말없이 파이프렌치를 들이밀었다. 그 순간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놈도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하정현 어디 있어?”“젠장. 그 계집애를 찾으러 온 거였어? 센 척하긴.”“잔말 말고. 하정현 어디 있어?”윤지은은 언성을 높이며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안에...”윤지은은 두말없이 제 앞을 막은 놈을 밀치고 안으로 쳐들어갔다.창고 안은 아주 간단한 스튜디오였는데 촬영 내용은 어디 내놓기 남사스러운 장면들이었다.그 가운데 하정현이 있었는데 얼굴에 상처가 난 걸 보면 맞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하정현 여에는 상의를 벗어 던진 못생긴 놈들이 서 있었는데 보아하니 하정현의 촬영 파트너인 것 같았다.나는 하정현을 본 순간 곧장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때 남자 한 명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나는 한주먹으로 놈을 쓰러뜨리고 하정현 옆으로 다가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괜찮아요?”하정현의 얼굴에는 온통 상처였으며 눈시울은 빨갰다.“괜찮아. 안 죽어.”그때 촬영장 스태프들이 우리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다.윤지은은 우리 앞에 막아선 채 당장 놈들에게 덤벼들 태세를 취했다.“한 발짝만 더 나서 봐!”그 순간, 긴 콧수염을 가진 남자 한 명이 냉소를 머금은 채 걸어 나왔다.“계집애 주제에 이 많은 인원을 다 묶어둘 수 있을
“어디서 감히! 나 경찰에 신고한다?”나는 마음이 조급하고 걱정이 앞섰다.하지만 내 말에 상대는 오히려 냉소적으로 말했다.“그래. 신고해. 경찰이 도착했을 때면 그 계집애는 죽어 있을 테니까.”“내가 돈 줄 테니까 그 여자 풀어줘.”나는 하정현을 구하고 싶었지만 하정현이 있는 곳이 어딘지 몰랐기에 이런 방법으로 거래할 수밖에 없었다.상대는 돈을 갚는다는 말에 이내 웃었다.“좋아. 그럼 북교 사거리 뒤쪽에 있는 공터로 와.”상대가 말한 곳은 도심과 매우 먼 데다 사고 다발지역이라 택시 기사들도 다니기 싫어하는 일대였다.그렇다고 버스를 타는 건 더욱 불가능했다. 버스는 너무 느려 도착하면 모든 게 끝날 수도 있었다.한참 고민한 끝에 나는 결국 윤지은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지은 씨, 혹시 안 쓰는 차 있으면 좀 빌려줘요.”윤지은은 나를 꿰뚫어 볼 듯 훑으며 물었다.“뭐 하려고?”“그런 건 묻지 말고 한 번만 빌려줘요. 한 번만 쓰고 돌려줄게요.”“이유도 말해주지 않는데 내가 왜 빌려줘야 하지?”나는 너무 조급한 나머지 결국 하정현의 일을 모두 실토했다.자초지종을 들은 윤지은은 즉시 안색이 변하더니 두말없이 외투를 걸치고 나와 함께 밖으로 뛰쳐나갔다.“차고에 차 한 대 있어. 이게 차키야.”윤지은은 BMW 차키를 나에게 던져주며 나더러 운전하라고 했다.그건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명색이 윤씨 가문 딸인데, 스포츠카 몇 대 정도 소유하고 있는 건 정상이었으니까.나는 신속하게 시동을 걸고 놈이 말한 주소지로 내달렸다.윤지은의 얼굴은 어느새 잿빛이 되어 있었다.“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또 간 거야? 돈이 그렇게 부족한가?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정현 씨가 이번에 강북에 온 이유가 엄청 성가신 일 때문이라는 거 모르죠?”윤지은은 즉시 나를 돌아봤다.“무슨 성가신 일? 나한테 말한 적 없는데?”“정현 씨 어머니가 정현 씨더러 방법을 대서 아버지를 빼내라고 했대요. 안 그러면 연을 끊겠다고 하면서요.”내 말을
나는 재차 거절하며 말했다.“앞으로 우리 가게 자주 찾아와 주시면 돼요. 그러니 2억은 받을 수 없어요.”“에이, 수호 씨가 마음에 들어서 주고 싶어 주는 건 데도 안 받을 거야? 돈 받고 우리 딸이나 잘 만족시켜 줘.”이영미는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그에 반해 나는 그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님은 제가 지은 씨랑 만나는 거 괜찮아요?”“괜찮지 그럼. 이렇게 잘생기고 몸매도 좋은 남자애가 또 어디 있다고. 수호 씨가 우리 딸 만족시켜 주면 우리 지은이도 좋아할 거야.”“난 개방적인 사람이라 우리 딸만 즐겁고 행복하면 돼. 결혼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잠깐 만나다 헤어지면 그만이야.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 윤씨 가문은 지은이를 먹여 살릴 수 있어.”처음 들어보는 관점에 나는 크게 놀랐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윤씨 가문은 워낙 재산이 많고 부부가 워낙 개방적이니 결혼이 최종 귀착점이 아닐 수 있었다.게다가 이영미는 자식이라고는 윤지은 한 명뿐이니, 당연히 자기 딸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부끄럽네요. 하지만 어찌 됐든 이 돈은 받을 수 없어요...”“안 받으면 안 돼. 안 받으면 수호 씨가 우리 지은이 만족시켜주지 못할까 봐 걱정돼. 우리 지은이가 불감증인데 수호 씨를 못 잊는 걸 보면 수호 씨가 그쪽 방면으로 꽤 쓸만하다는 뜻이니까.”“콜록콜록...”나는 침에 사레가 들렸다.“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구체적인 상황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우리 지은이가 수호 씨랑 같이 있고 싶어 하고 나도 수호 씨가 마음에 드니까, 수호 씨는 우리 지은이만 만족시켜. 난 우리 딸이 평생 즐거움을 경험해 보지 못하는 건 바라지 않아. 그러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뭔 소용이 있어?”역시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걸 나는 다시 한번 느꼈다.나는 열심히 돈 벌어 출세하려고 아득바득하고 있는데, 이영미는 벌써 후대의 행복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그것도 이토록 깊숙이.그때
소설 중간마다 가끔 나오는 삽화는 수위가 너무 높았다.나는 이런 걸 이해할 수 없지만 요즘 많은 여자애들 사이에서 비엘이 인기라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영미도 그중 하나였을 줄은 몰랐다.나는 책을 다시 책장에 밀어 넣고 다른 책 하나를 골랐다. 이번에는 비엘 만화였다. 이영미가 이 정도로 심각하게 베엘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니.나는 그 책을 도로 꽂아 넣고 또 다른 책을 골랐다. 하지만 이번 역시 비엘 만화였다.알고 보니 책장 전체에 이런 책들뿐이었다.나는 너무 어이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보아하니 이영미는 평소 이런 책을 즐겨 보고 윤해철은 이영미를 무척이나 아끼기에 특별히 아내를 위해 전문 책장까지 만들어준 모양이었다.볼 수 있는 책이 없어 나는 결국 새를 구경하러 갔다.어떤 새들은 마치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무척 재밌게 행동했다.그중에 말할 수 있는 앵무새 두 마리가 있었는데, 나는 참지 못하고 그 앵무새들을 건드렸다.그때 한 앵무새가 갑자기 이영미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여보, 샤워해.”그러자 다른 앵무새가 잇따라 소리 냈다.“같이 씻을래?”“좋아. 난 역시 욕실이 좋아...”대화가 이어지는 두 앵무새를 보니 나는 넋을 잃었다. 앵무새까지 이 정도로 밝히는 걸 보면 평소 이 집 부부가 얼마나 붙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 뒤로 무려 2시간 뒤에 윤해철과 이영미는 함께 내려왔다.나는 속으로 윤해철의 지속력에 감탄했다.이영미는 얼굴이 발그스름했고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오래 기다렸지?”“아니에요.”나는 예의상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지만 솔직히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었다. 아니, 참기 힘들다는 게 더 맞을지도.집안 곳곳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분위기에 보통 사람들이 오면 정말 견디지 못할 거다.“수호 군, 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수표를 써줄 테니까.”윤해철은 내려올 때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가 돋보인다던 양복을 입고 내려왔다. 그 모습은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너무 멋있었다.그러니
“크흠...”나는 일부러 헛기침하며 뒤에 나도 앉아 있다는 걸 티 냈다.그런데 이영미는 오히려 깔깔 웃으며 말했다.“수호 씨는 한숨 자. 나는 우리 남편과 볼일이 좀 있으니까.”‘이건 무슨 상황이지?’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잘 수 있을 리가 있나?“저기 두 분 좀만 참으세요. 이따가 집에 도착하면 마음껏 하셔도 돼요.”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또래의 부부에게 이런 말을 하려니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때 이영미가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이런 걸 어떻게 참아? 수호 씨도 경험 있을 거 아니야. 하고 싶을 때 쉽게 참아져?”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그럼 저 먼저 내렸다가 두 분 끝나면 다시 올게요.”“그럴 필요 없어. 그냥 앉아 있어. 차는 움직일 때 더 느낌 있으니까.”내 옆에 앉은 기사는 이런 대화를 듣고도 덤덤한 표정이었다. 보아하니 자주 있는 일이라 익숙해진 듯했다.결국 나는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올 리가 만무했다.그도 그럴 게, 귓가에 자꾸만 이영미의 애교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으니까.비록 두 사람은 정말 몸을 섞지는 않았지만 서로 희롱하며 불장난하는 모습만 봐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심지어 가끔 몸을 저릿하게 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이 점으로 보면 두 사람이 평소 자주 야릇한 농담을 주고받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둘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다 보니 나는 점점 부러웠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도 나중에 늙어서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집으로 가는 내내 화끈한 장면이 뒤에서 생중계되는 바람에 영화를 관람할 때보다 더 괴로웠다.심지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윤해철은 이미영을 안고 서둘러 침실로 돌진했다.운전기사이자 윤씨 가문 집사인 손정현은 나를 거실로 데리고 가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그때 나는 문득 궁금해서 물어봤다.“혹시 기사님은 아무 반응도 없어요?”손정혁은 덤덤하게 대답했다.“나도 이제 50이 넘는데 무슨 반응이 있겠어요?”“50이 넘는다고 나이 든 건 아
하지만 윤지은은 겉으로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뜬금없이 왜 이래?”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윤지은이 대놓고 거절하지 않았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뜻이니까.나는 말을 이었다.“우리가 서로 날을 세우고 있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사람 중에 서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안 그래요?”“그런 거 묻지 마. 난 몰라.”윤지은은 답변을 거절했다.이에 나는 싱긋 웃었다.“저는 지금 이대로가 편한 것 같아요. 사실 지은 씨가 말은 독하게 하지만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내가 그딴 감언이설에 넘어갈 것 같아? 그럴 시간에 사업이나 일궈.”“안 그래도 사업은 할 거예요. 참, 이틀 뒤에 천수당이 개업하는데 지은 씨도 와요.”“시간 봐서. 스케줄 없으면 가고, 있으면 못 가.”윤지은은 항상 이런 식이다. 어느 한번 애교 누나나 형수처럼 확정된 대답을 할 때가 없다.하지만 윤지은이 이렇게 말한 것만 해도 나는 무척 기뻤다.나는 다른 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면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서로 틀어져 영원히 얼굴 보지 않는 관계보다는 나으니까.우리가 한창 대화하고 있을 때 이영미와 윤해철이 짐을 챙겨 나왔다.나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짐을 대신 들었다.윤지은은 아버지한테 여전히 쌀쌀맞게 굴었지만,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나오라는 건 고분고분 동의했다.차에 오른 뒤 윤해철은 참지 못하고 한탄했다.“지은이 쟤는 성격이 누구를 닮았는지 아주 고집불통이야.”“누구를 닮았긴? 당연히 당신을 닮았지. 당신도 젊었을 때 저랬잖아.?”“내가 그랬다고? 난 당신 앞에서 저런 적 없는데?”윤해철은 인정할 수 없었다.그때 이영미가 윤해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내 앞에서는 그런 적 없어도 아버님 앞에서는 그랬잖아. 잘 생각해 봐. 지은이 성격 당신이랑 똑 닮았지?”윤해철은 난감한 듯 얼굴을 붉혔다.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젊었을 때 윤해철은 사업
“지금이야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 만나면 생각이 바뀔 거야.”윤해철은 여전히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다만 윤지은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 쓰레기가 얼굴에 쓰레기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 부잣집 도련님 중에 쓰레기가 없다는 건 어떻게 장담해요? 아빠는 그동안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 봤잖아요. 그럼 아빠가 한번 말해 봐요. 평소 만났던 부잣집 도련님 중에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어요?”“다 싸잡아서 욕하지 마. 부잣집 도련님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 누군가는 네가 말한 그런 사람이 있겠지...”“저는 싸잡아서 욕한 적 없어요. 그저 어떤 신분의 남자든 쓰레기는 똑같이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었어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래요. 그 누구도 저를 강요할 수 없어요.”“아빠가 정말 저를 아끼고 사랑하고 저를 위해 생각한다면 제 의견도 존중해 줘야 하잖아요. 계속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할 게 아니라...”“내가 언제 강요했다고 그래? 몇천억짜리 회사를 그냥 주겠다는데 그게 왜 강요야?”두 부녀가 싸움 날 것 같자 이영미는 얼른 끼어들어 분위기를 풀었다.“됐어. 그만 싸워. 어쩜 부녀라는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워대? 지은아, 가업을 잇고 싶지 않으면 잇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엄마가 네 편 들어줄게. 오늘 식사 자리에 꼭 참석해. 엄마 체면 봐서라도. 알았지?”윤지은은 소파에 기대앉아 건성으로 대답했다.“나중에 주소 보내줘요.”그 말에 이영미는 활짝 웃었다.“그래. 레스토랑 예약하면 바로 알려줄게.”“여보, 나 짐 싸는 거 좀 도와줘.”이영미는 윤해철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홀로 남겨진 나는 윤지은을 빤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 곁으로 움직였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나를 째려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얘기 좀 해요.”“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있던가?”“아무 거나 얘기하면 되죠. 그러고 보니 우리 안 본 지 꽤 됐잖아요.”“차라리 평생 내 눈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