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여태감이 들어간 뒤 원경릉도 따라 들어갔다. 우문호는 몸을 살짝 일으키며 목여태감을 보았다. “태감님, 부황께서 남주를 받으셨다는 말씀입니까?”목여태감은 빙빙 돌려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묻는 우문호를 보고는 자신도 솔직하게 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왕야께서 그렇게 물으신다면, 제가 몇 말씀드리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을 고깝게 듣지 마시지오. 왕야께서 황후에게 마음을 표하려거든 다른 방법도 많았을텐데, 굳이 황제께서 초왕비에게 하사한 남주를 황후께 보낼 필요가 있었습니까?”이 말을 듣자 우문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원경릉을 향했다. 원경릉은 눈을 아래로 드리우고는 무표정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향했던 눈동자가 천천히 목여태감 쪽으로 움직였다. “태감님께서는 이만 돌아가주시지오. 본왕이 왕비에게 긴히 할말이 있습니다.”목여태감은 고개를 돌려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일단 남은 남주 한 꿰미와 차용증서부터 돌려주시지오. 황제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습니다.”“태감님 남주 한 꿰미는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직접가서 부황께 사죄를 드릴테니 먼저 돌아가십시오.” “지금와서 소용 없습니다. 황제를 더 화나게 하시려는 겁니까?” 원경릉의 태도에 태감은 화가 났다.우문호는 원경릉을 노려보았다. “태감께 돌려드려!”원경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잃어버렸으니 제가 사죄드리러 가야죠.”목여태감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께서 남주를 잃어버렸다고만 하신다면 저희 쪽에서도 달리 도울 방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왕비께서 잃어버린 그 남주 한 꿰미를 중신궁(中珅宮) 옥집사가 가져왔습니다. 정말 왕비께서 잃어버린 물건이라고 한다면 중신궁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다시 잘 생각해보시지요!”태감은 말을 마치고 우문호를 보았다. “왕야. 소인 먼저 돌아가보겠습니다. 왕비께서 끝까지 황제께 직접 사죄를 하길 원하신다면야. 다만 분실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그저 왕비께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변명없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왕야!” 탕양이 다급하게 불렀다. “왕비가 황제님을 더 노하게 할까 염려됩니다!”우문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원경릉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그의 귓전에 맴도는 것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맘대로 하라 그래. 부황은 이미 본왕에 대해 실망할 대로 실망했으니 더 실망시킬 수도 없을거야.”“왕비는 왜 황후께 남주를 선물했을까요? 서일은 애써 그녀의 행동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왜 겠는가? 당연히 아첨하려는 목적이지!” 우문호가 대답했다. “아첨을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서일이 다시 물었다.탕양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서일을 바라보았다. “바보도 알겠다! 정후는 줄곧 주씨 집안에 기대려고 했지않는가? 이는 자네도 모르는 일은 아닐테고.”서일은 코웃음을 쳤다. “정후 그 노인네가 뻔뻔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 왕야께서 황제에게 총애를 받을 때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다가, 지금 우리가 권세를 잃으니 바로 주씨 집안에 발을 담그려 하다니요!”서일은 우문호가 듣고 있다는 것도 깜빡 잊었다. 우문호가 이를 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자 탕양이 서일을 보고 “무슨 헛소리야! 입 다물거라!”라고 소리쳤다.서일은 자신이 실언했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우문호를 한번 보더니 자신의 입을 막았다. 우문호는 마음이 시큰거렸다. 아무도 그가 마음 속으로 원경릉이 변하기를 바라는지 모른다. 그의 마음 속에는 말할 수 없이 분노와 실망스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원경릉은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귓가에 스친다. 그녀는 손을 들어 뺨을 만져보니 피가 손에 묻어나왔다.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씩씩하게 걸었다. 걸으면서 피가 뚝뚝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래나 저래나 죽을 목숨, 이깟게 무슨 대수라고.’별전과 어서방(御書殿)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그녀는 평소보다 오래 걸었다. 입구에 다다른 원경릉을 발견한 목여태감이 명원제에게 알렸다.“기다리라고 해.”명원제가 싸늘하게 말했다.원경릉은 밖에 서서 꼼짝 하지 않았다
몹시 화가 난 명원제는 목여태감으로 하여금 원경릉을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손왕은 동정어린 눈빛으로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화가 난 부황이 화를 원경릉에게 풀까봐 걱정이 되었다. 듣자하니 우문호가 다친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고 하던데, 우문호에게 가서 초왕비를 데려올 방법을 찾아보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경릉이 궁 안으로 들어오자 명원제는 “무릎을 꿇어라!” 하고 소리쳤다. 그녀는 명원제의 말에 따라 무릎을 꿇고는 “부황을 뵙습니다!”라고 말했다. 궁 안은 어수선해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손왕을 향해 물건을 던진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바닥 한켠에는 남주 한 꿰미도 떨어져 있었다. “방금 목여가 돌아와 전해주었다. 짐이 네게 하사한 남주를 한 꿰미 잃어버렸다고? 어디서 잃어버린 것이냐?” 명원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건곤전에서 잃어버렸습니다.”“보아라. 이 바닥에 떨어져있는 남주가 네가 건곤전에서 잃어버린 남주가 아니더냐?”원경릉은 바닥에 남주를 보며 “맞습니다.” 라고 했다. “이 남주는 황후를 모시는 집사가 가져온 것이다. 네 말이 맞다면, 황후가 남주를 훔쳤다는 말이냐?” 명원제의 목소리에 실망스러움이 가득했다. 원경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소인은 누가 남주를 가져갔는지 알고 있습니다.”“어?” 명원제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누가 가져갔는지 알고있다고?”“네. 누가 가져갔는지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냐?” 명원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원경릉이 잠시 침묵하더니 “희상궁.”이라고 말했다. 명원제가 분노하여 탁자를 내리쳤다. “터무니 없는 소리!”이 상황을 지켜보던 목여태감이 급히 달려왔다. “왕비!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시다니요. 희상궁은 태상황님의 사람이지 않습니까?”“네. 그렇죠.” 원경릉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난해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원제가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는 방금 원경릉이 뱉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
남주의 바친 목적은 무엇인가?현비는 인삼차를 내려놓고 원경릉을 보더니 머뭇거리며: “초왕비도 있었군요? 그럼 신첩은 이만 폐하를 방해하지 않고 물러나겠습니다.”명원제가: “기왕 온 김에 앉으시게. 이 일은 그대의 아들과도 관계가 있으니.”:초왕과 관련이 있다는 말에 현비는 원경릉을 능지처참해도 성이 풀리지 않을 지경이다.현비는 분노를 삭이며, 입술엔 변함없이 웃음을 띤 채, ‘예!”현비가 발길을 돌려 앉는 동안, 빠른 속도로 상황을 되짚어봤다. 원경릉이 황후에게 아첨한 것이 다섯째 의도라고 황제는 생각하지만, 다섯째가 그럴 리 없다. 안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나서지 말아야 할 때에 다섯째가 이런 경거망동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아내를 잘못 얻었군.만약 이 일로 다섯째가 황제의 눈 밖에 나서 추방이라도 당하면, 현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원경릉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어쩌다가 이 따위 여자에게 휘둘리게 되었지? 당초에 순리대로 주명취를 아내로 맞았으면 오늘의 이런 상황이 벌어질 리 없는데. 현비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원경릉의 뼈마디를 분질러도 시원치가 않은 마음이다. 원경릉은 꼿꼿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죽일 듯이 노려보는 현비의 시선을 못 느낄 수가 있겠는가? 이 일 때문이 아니어도 현비는 원경릉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그때 “황후 마마 납시오!” 태감의 목소리가 들렸다.명원제는 손을 흔들어, 뜻을 표하자 목여태감이 달려 나가고, 황후가 옥집사를 데리고 오는 것이 보였다. 목여태감이 보니 희상궁도 방금 도착했기에, 황후께 나아가 몸을 숙이며, “마마, 폐하께서 들라 하십니다!”목여태감은 이제 다시 희상궁을 보니, 희상궁은 얼굴이 태연하고 꾸밈없는 기색이다.목여태감이: “상궁은 안으로 들게!”황후와 옥집사가 앞서 가고, 희상궁이 뒤를 따르는 모습으로 세 사람이 어서방에 들어갔다.현비는 황후를 보고, 황급히 일어나 예를 취하며, “신첩 황후마마를 뵙습니다.”황후는 평상시처럼 현비를 한 번 쳐다보고, “현비도
진주 사건이 밝혀지자, 구전단의 범인이?주황후는 의아하다는 듯 옥집사를 보고, “뭘 잘못 들었다는 거지? 진주를 돌려 드리라고 했는데, 뭐라고 아뢴 것이냐?”“마마……” 옥집사는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며, “제가 멋모르고, 초왕비가 보낸 진주는 초왕을 위해서라 생각해서, 그만,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초왕비가 황후께 초왕에 대해 잘 말씀해 주셨으면 한다고.”주황후가 노발대발하며, “넘겨짚는 것도 정도가 있지?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그때 황후가 문득 정신이 들며, 옥보가 황후를 따른지 오래되었고 평소 침착하고 신중한 성격이라, 황제 폐하 앞에서 결코 함부로 넘겨짚은 말을 내뱉을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황후는 바로 주명취를 떠올렸다.전에 주명취가 현비를 찾아가자고 했으나, 황후는 당장 현비와 맞붙을 필요도 없고, 현비는 태후의 조카라 눈 밖에 나면 오히려 일이 힘들어 진다고 생각했다.명원제의 낯빛이 졸지에 험악해 졌다. 옥보가 어찌 감히 단독으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황후의 명령이었겠지, 명원제의 싸늘한 눈빛이 황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주황후는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기에, 손으로 옥집사의 따귀를 때리며, 성난 목소리로: “방자한 것, 제멋대로 추측하고, 함부로 폐하 앞에서 지껄여?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옥집사는 바닥에 꿇어 앉아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폐하 용서해 주소서. 폐하 용서해 주소서!”명원제는 무표정하게 명령했다: “여봐라, 옥보를 끌어내 곤장 30대를 매우 쳐라.”주황후는 가슴이 아팠지만 옥보를 위할 수 없어 길길이 날뛰며: “좀 봐주려 해도 말이야. 어서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빌지 못해?”옥집사는 머리를 땅에 찧으며 반쯤 축 늘어진 몸으로 얼굴에 핏기가 없다. “소신을 벌해 주시니 폐하의 은혜가 망극하옵니다.”옥집사가 끌려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밖에서 퍽퍽하는 곤장 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다.주황후는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표
희상궁의 자백“감히 자네가 약을 바꿔 치기 한 것이 아니란 말이냐?” 원경릉이 물었다.희상궁은 침묵했다.명원제는 탁자를 치려 했으나, 천천히 손을 내려 놓으며 고요하게 희상궁을 바라본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 앉는다.희상궁은 분명 한 마디로 반박할 수 있음에도, 아무 말이 없다.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명원제는 놀라움과 분노가 몰아쳤다. 어째서 희상궁이란 말인가?“왕비 마마, 증좌는 있는 것이겠지요?” 목여태감은 가슴이 철렁해서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원경릉은 평소처럼: “증좌는 건곤궁에 있지요, 태상황 폐하의 곁에 말입니다. 희상궁, 자네는 태상황 폐하 앞에 가야 이실직고 하겠느냐? 자네가 태상황 폐하를 해하였으니, 폐하께서 자네 때문에 화병을 일으키셔도 할 수 없지, 건곤궁에 가서 대질하자 꾸나.”희상궁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이 시시각각 암담해지고 팽팽하던 얼굴이 푸석해 지며 눈꼬리가 처지고 순식간에 나이를 먹은 것 같다.“건곤궁까지 가실 필요 없으십니다. 쇤네가 했습니다!” 희상궁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실내는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명원제의 분노에 찬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명원제의 목소리가 다시 천천히 울려 퍼지나 공허하고 창백하게, “왜 그랬지?”희상궁은 얼굴에 울음보다 흉한 웃음을 흘리며, “쇤네는 태상황 폐하를 해하려는 마음을 먹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약은 쇤네가 바꿨지요, 독약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알고 난 뒤엔 이미 너무 늦었지요.”“그래서 남나인을 죽여 네 죄를 대신 씌웠느냐!” 원경릉이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희상궁이 말했다.“누가 너에게 약을 바꾸도록 시켰느냐?” 명원제는 등골이 서늘해 지는 것을 느꼈다. 궁중에서 희상궁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희상궁은 머리를 땅에 찧으며, “폐하, 쇤네를 죽여 주시옵소서, 쇤네는 말할 수 없습니다.”“자네……” 명원제는 실망이 극에 달해, “일이 이지경이 되었거늘, 배후에서 지시한
희상궁, 원경릉과 함께 초왕부로희상궁은 쓴웃음을 지으며, “인정에 빚을 지면 결국 갚아야 하나 봅니다. 쇤네가 작년에 큰 병에 걸렸는데 초왕비께서 좋은 약을 보내주셔서 나았지요. 이번에 초왕비 마마를 도와드린 것으로 그때의 빚을 갚은 셈 쳐주세요. 쇤네 생각에 초왕비께서는 벌을 받지 않으실 겁니다. 태상황 폐하께 마마가 필요하니 기껏해야 욕이나 좀 들으시는 정도겠지요. 쇤네는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희상궁은 말을 마치고 머리를 땅에 세게 조아리고 고개를 들며 평온한 안색으로, “쇤네는 더 말씀 드릴 게 없습니다. 폐하, 쇤네에게 독이 든 술을 내려 주시옵소서!”이생에 진 빚을 희상궁은 이미 다 갚았다.내일 저승길을 떠나도 그분께 빚진 건 없다.명원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자네가 만약 배후에 있는 자를 실토하면, 짐은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희상궁은 침묵했다. 이미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결연함이다. 명원제는 극도로 미우면서도 가슴이 아려 도저히 희상궁을 죽일 수 없으며, 태상황께 이 사실을 고할 수도 없다. 태상황이 지금 이 일로 마음의 병을 얻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곁에서 자신을 수십 년간을 모셔온 사람이 자기를 해치려 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잠시 침묵한 끝에 황제가: “태상황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자네 말을 믿겠네, 추궁하지도 않을 것이네, 단지 자네는 나이가 들었으니 다시 태상황 폐하의 시중을 들기엔 적합하지 않아. 초왕비와 자네가 마음이 맞는 것 같으니 짐이 초왕비를 위해 태상황께 양해를 구해 보지. 초왕비는 희상궁을 초왕부로 데려가라.”명원제는 결국 자기가 손을 쓰기 싫으니, 희상궁이 원경릉을 해치려 했는데도 그녀에게 딸려 보내 처리하도록 시켰다.원경릉은 눈이 동그래지며 말문이 막혔다!“희상궁은 먼저 물러가라.” 명원제는 노기를 거두고 평소처럼 얘기했다.희상궁은 복잡한 심경으로 원경릉을 보고 예를 취한 뒤 물러났다.명원제는 상선에게, “살펴보러 가거라, 가서
우문호가 후궁을 맞는다? 명원제는 원경릉에게,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면, 혹시라도 말이다, 초왕부에 돌아가서 네 아버지께 여쭤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지.”원경릉은 속수무책이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떠보는 게 정말 나은 걸까?“아버지 걱정 시키지 말아야죠.” 원경릉이 말했다.이 대답에 명원제는 만족하며 잠시 원경릉을 보더니 갑자기: “방금 희상궁 말이 제왕비가 널 미워해서 해치려고 했다는데, 미리 말해두지만 사적인 복수를 해서는 안된다, 알겠느냐?”“그녀가 먼저 절 건드리면?” 원경릉이 반문했다. 결코 순순히 당할 사람이 아니다.“못 그럴 거야. 주씨 집안도 제왕비가 멋대로 구는 걸 다시는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리고 한 가지 더.” 명원제는 낮게 기침을 하더니, 원경릉을 바라보며, “현비가 짐에게 언급한 적이 있는데, 다섯째와 제왕비는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였지만 마지막에 인연이 닿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 남아있는데다, 제왕비한테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생긴 게 제왕비와 쏙 빼 닮아서, 짐도 다섯째에게 보상해주는 심정으로 주씨 집안 둘째딸을 후궁으로 들여줄까 하는데, 무슨 다른 의견 있느냐?”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없어요!”명원제는 다소 의외다. 이렇게 대범하다고?주씨 집안 둘째는 정부인의 딸로 그녀가 시집을 오면 정비는 옆으로 비켜줘야 되는데 진짜 신경이 안 쓰인다고?아니면 원경릉은 주씨 집안의 세력을 모르는 건가?원경릉이 둔한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니 이점은 알고 있을 것이다.“가거라.” 명원제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원경릉이 물러나왔다.문을 나서며 원경릉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후궁을 들여? 좋아, 안 좋을 게 뭐 있어? 후궁을 들이면 우문호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거니 앞으로 둘이 알콩달콩 살며 다시는 원경릉을 귀찮게 하지 않겠네. 별전 밖으로 나와 희상궁이 홰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을 보고 두 손을 떨군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희상궁의 눈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인다. 원경릉과 희상궁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
풍도성 안은 술잔을 주고받고 건배하며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안지여는 오늘 황금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에 거대한 이무기를 수놓았으며, 황실의 밝은 황색과는 약간 구별되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곤룡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과 매우 흡사했다.안지여는 자신의 야심을 이미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당연히 안지여는 오늘도 야심을 감출 생각 없이 손님들에게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인근 지역 조정 관리들이 손님으로 왔어도 안지여는 전부터 맺어온 관계였기에,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두터워 산 넘고 물 건너 저 멀리 있는 황제가 그들을 시시콜콜 관리할 수 없었다.그 자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황실에서 파견한 일행이 온다는 것을 알고, 연회석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듣자하니 안풍 친왕 전하와 이리 부마께서 오늘 오신다던데 어째서 안 보입니까?”안지여가 잔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면 결국 오겠지요.”“여정을 듣기론 오늘 분명 풍도성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밤이 되도록 아직 안 보입니까? 설마 성주님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성주님이 가서 맞이하셔야 한다고? 아주 허세가 대단한데? 퉤!”“누가 아니랍니까?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하는 거였으면 며칠 전에 풍도성에 도착해 성의를 보여야지, 오늘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늦게서야 와서, 아직도 잔치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성주님의 체면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행태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들어오게 막고 돌려보내시지요, 마음만 받은 셈 치고요. ”“맞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풍도성에서 받은 공물이 적지 않았으니, 만족한 줄도 알아야죠.”“풍도성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 없어요. 뭐 때문에 그럽니까? 수백 년 전에 풍도성은 원래 북당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선을 긋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모두 안지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몇 잔 들어가자, 비위를
소여쌍의 욕은 거의 반 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도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 무쌍거 사람들은 다 익숙해져 있었다. 성주가 오지 않거나 소여쌍이 아프기 시작해도 이렇게 욕을 해댔다.욕하다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늙은 몸종이 가서 달랬다. “부인 그러실 게 뭐가 있으십니까? 몸이 가장 중하십니다.”소여쌍이 의자에 기대 늘어졌다. 극도로 피곤해 풀린 눈으로 천정을 보며 비참함이 가슴 깊은 곳을 타고 내렸다. “오늘이 초엿새지?”“네!” 늙은 몸종이 대답했다.소여쌍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곧 15일이구나. 또 내 명을 재촉하는 고통이 오겠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그러자 늙은 몸종도 매우 괴로워했다. “부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고통도 며칠이면 그럭저럭 지나가서, 그동안도 그렇게 지내셨잖아요?”“며칠이면 뭐 그럭저럭 지나가나?” 소여쌍이 잔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네가 이 고통을 안 당해봐서 그래. 이게 다 이리봉청 그년 짓이야. 오빠가 그년을 쫓아가서 죽이게 한 걸 정말 후회해. 그년을 잡아 와서 가두고 내가 한 번씩 아플 때마다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나보다 수천 수백 배 고통스럽게 해야 했어.”늙은 몸종이 소여쌍의 손을 쥐었다. “부인 그런 생각 마세요. 벌써 죽은 사람을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성주님과 자꾸 다투지 마세요. 자꾸 다투시다 보면 감정이 사라집니다.”소여쌍이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진작부터 나한테 아무 감정 없어.”“성주님은 이리봉청에게 아무 감정 없으세요. 감정이 있을 리도 없고요. 안 그러면 당시 부인을 위해 이리봉청을 죽이고 천문 세가 사람을 다 죽이셨을 리가 없죠.”소여쌍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전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 몇 년간, 성에 들어온 여자들 생긴 걸 보라고. 전부 이리봉청을 쏙 빼닮았잖아? 오빠는 역시 후회하고 있는 거야. 날 위해 이리봉청을 죽인 걸.”소여쌍은 늙은 몸종의 손을 잡는데 고여서 썩
안지여는 소야쌍을 놓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이틀 뒤가 내 생일인데, 당신 몸 상태는 어때?”그러자 소여쌍은 시녀의 손을 뿌리치고 얼른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 했는데, 몇 걸음 만에 휘청거리더니 하마터면 안지여 뒤로 넘어질 뻔했다.안지여는 소여쌍을 잡아줄 수 있었지만, 손을 뻗지 않고 그녀를 등지며 보이지 않는 척했다.시녀는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얼른 소여쌍을 부축해 바닥에 넘어지는 것까지 막았다.소여쌍이 숨을 돌리고 살짝 웃었다. “몸이 많이 좋아져서 오빠 곁에 있을 수 있어요. 오빠 생일에 당연히 제가 곁에 있어야죠.”안지여는 그제야 소여쌍을 돌아봤다. “생일엔 손님이 많이 올 거야, 올해는 다른 어떤 해보다 성대하게 하니까 당신도 잘 차려입어. 내가 내일 사람을 시켜 장신구를 보내도록 하지.”“네, 알았어요!” 소여쌍이 기쁜 듯이 말하며 안지여를 한없이 바라봤다.하지만 안지여는 소여쌍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정 설명했고 체면도 차렸으니 됐다 싶어 말했다. “난 아직 일이 있어서. 당신 쉬는 걸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잘 쉬고 있어.”안지여는 말을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려고 했다.이때 소여쌍이 갑자기 닭발 같은 손을 뻗어 안지여의 팔을 붙잡으며 서둘렀다. “오빠, 어렵사리 왔는데 저랑 얘기 좀 더 해요.”안지여가 고개를 숙이고 소여쌍의 마르고 늙은 손을 바라봤다. 손등에 주름이 자글거리는 것이 구겨진 비단 뭉치처럼 너무 흉해서 혐오감이 든 나머지 쓱 손을 뺐다. “말했잖아, 일이 바쁘다고.”소여쌍의 눈빛이 갑자기 매서워지며, 늙고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이 바쁜 거예요, 아니면 그 여우 년을 찾아가는 거예요?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여자를 성에 얼마나 숨겨놨는지.”안지여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소여쌍이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축 처진 눈에서 원한이 쏟아져 나왔다. “제가 늙었다고 싫어하는 거잖아요, 아녜요? 잊지 마세요. 오빠의 동안도 결국 늙는다고요. 이리봉청이 아직 살아있어도 지금 저보다
안지여의 생일잔치에 상인, 인근 주와 현의 관리, 무림 사람들, 강호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안지여는 그동안 사교의 폭이 넓고, 각계각층 인사들과 교분을 맺고 있어 이번에 생일잔치란 이름을 빌려 그들 모두 한자리에 모아 대사를 논의하고자 했다.안지여는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 전에 시기를 놓치고 이제 우문호가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이때가 대사를 치를 적기였다.우문호가 몇 년 더 북당을 다스리고 나면 그에게 더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몰랐다.그래서 조정이 사람을 파견한다는 소식에 그는 기뻤다. 이를 빌미로 조정에 본때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천문 세가의 무덤도 생일잔치 후 태워버릴 계획으로, 물론 완벽한 구실을 붙여 백성들에게 설명할 생각이었다.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온 건, 안지여에게 아주 완벽한 빌미를 제공해 주는 셈이었다. 모든 것을 이리 부마 탓으로 돌리고 백성들에게 조정이 저지른 일이라고 알리면 천문 세가를 그토록 떠받들던 풍도성 백성들은 조정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안지여는 부마 이리율을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그의 내력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부이자 늑대파 문주라고 했으나 그건 전부 민간에 있을 때 신분에 불과했다. 결국 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는 길을 택한 이 사람은 극도로 지위와 재산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을 다루기 어렵지 않은 건, 안지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부마 이리율의 마음 저 밑엔 상인이란 출신을 벗어던지고 상류 계층에 들어 후작 세가가 된 후 2~3세대가 지나면 철저하게 이전 상인의 신분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목표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생일까지 아직 이틀 남았다.안지여는 두번 다시 소여쌍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한번은 가야 했다. 그의 생일잔치에 소여쌍이란 성주 부인이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성주 부부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해서,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허상을 심어주려는 것뿐이었다.소여쌍은 풍도성 동쪽 무쌍거에 살고 있었다. 혼인하던 그해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