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야!” 탕양이 다급하게 불렀다. “왕비가 황제님을 더 노하게 할까 염려됩니다!”우문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원경릉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그의 귓전에 맴도는 것 같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맘대로 하라 그래. 부황은 이미 본왕에 대해 실망할 대로 실망했으니 더 실망시킬 수도 없을거야.”“왕비는 왜 황후께 남주를 선물했을까요? 서일은 애써 그녀의 행동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왜 겠는가? 당연히 아첨하려는 목적이지!” 우문호가 대답했다. “아첨을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서일이 다시 물었다.탕양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서일을 바라보았다. “바보도 알겠다! 정후는 줄곧 주씨 집안에 기대려고 했지않는가? 이는 자네도 모르는 일은 아닐테고.”서일은 코웃음을 쳤다. “정후 그 노인네가 뻔뻔하기 그지 없습니다. 우리 왕야께서 황제에게 총애를 받을 때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다가, 지금 우리가 권세를 잃으니 바로 주씨 집안에 발을 담그려 하다니요!”서일은 우문호가 듣고 있다는 것도 깜빡 잊었다. 우문호가 이를 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자 탕양이 서일을 보고 “무슨 헛소리야! 입 다물거라!”라고 소리쳤다.서일은 자신이 실언했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우문호를 한번 보더니 자신의 입을 막았다. 우문호는 마음이 시큰거렸다. 아무도 그가 마음 속으로 원경릉이 변하기를 바라는지 모른다. 그의 마음 속에는 말할 수 없이 분노와 실망스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원경릉은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귓가에 스친다. 그녀는 손을 들어 뺨을 만져보니 피가 손에 묻어나왔다.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씩씩하게 걸었다. 걸으면서 피가 뚝뚝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래나 저래나 죽을 목숨, 이깟게 무슨 대수라고.’별전과 어서방(御書殿)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그녀는 평소보다 오래 걸었다. 입구에 다다른 원경릉을 발견한 목여태감이 명원제에게 알렸다.“기다리라고 해.”명원제가 싸늘하게 말했다.원경릉은 밖에 서서 꼼짝 하지 않았다
몹시 화가 난 명원제는 목여태감으로 하여금 원경릉을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손왕은 동정어린 눈빛으로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화가 난 부황이 화를 원경릉에게 풀까봐 걱정이 되었다. 듣자하니 우문호가 다친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고 하던데, 우문호에게 가서 초왕비를 데려올 방법을 찾아보라고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경릉이 궁 안으로 들어오자 명원제는 “무릎을 꿇어라!” 하고 소리쳤다. 그녀는 명원제의 말에 따라 무릎을 꿇고는 “부황을 뵙습니다!”라고 말했다. 궁 안은 어수선해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손왕을 향해 물건을 던진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바닥 한켠에는 남주 한 꿰미도 떨어져 있었다. “방금 목여가 돌아와 전해주었다. 짐이 네게 하사한 남주를 한 꿰미 잃어버렸다고? 어디서 잃어버린 것이냐?” 명원제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건곤전에서 잃어버렸습니다.”“보아라. 이 바닥에 떨어져있는 남주가 네가 건곤전에서 잃어버린 남주가 아니더냐?”원경릉은 바닥에 남주를 보며 “맞습니다.” 라고 했다. “이 남주는 황후를 모시는 집사가 가져온 것이다. 네 말이 맞다면, 황후가 남주를 훔쳤다는 말이냐?” 명원제의 목소리에 실망스러움이 가득했다. 원경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소인은 누가 남주를 가져갔는지 알고 있습니다.”“어?” 명원제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누가 가져갔는지 알고있다고?”“네. 누가 가져갔는지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냐?” 명원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원경릉이 잠시 침묵하더니 “희상궁.”이라고 말했다. 명원제가 분노하여 탁자를 내리쳤다. “터무니 없는 소리!”이 상황을 지켜보던 목여태감이 급히 달려왔다. “왕비!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시다니요. 희상궁은 태상황님의 사람이지 않습니까?”“네. 그렇죠.” 원경릉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난해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원제가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는 방금 원경릉이 뱉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
남주의 바친 목적은 무엇인가?현비는 인삼차를 내려놓고 원경릉을 보더니 머뭇거리며: “초왕비도 있었군요? 그럼 신첩은 이만 폐하를 방해하지 않고 물러나겠습니다.”명원제가: “기왕 온 김에 앉으시게. 이 일은 그대의 아들과도 관계가 있으니.”:초왕과 관련이 있다는 말에 현비는 원경릉을 능지처참해도 성이 풀리지 않을 지경이다.현비는 분노를 삭이며, 입술엔 변함없이 웃음을 띤 채, ‘예!”현비가 발길을 돌려 앉는 동안, 빠른 속도로 상황을 되짚어봤다. 원경릉이 황후에게 아첨한 것이 다섯째 의도라고 황제는 생각하지만, 다섯째가 그럴 리 없다. 안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나서지 말아야 할 때에 다섯째가 이런 경거망동을 할 리가 없지 않은가?아내를 잘못 얻었군.만약 이 일로 다섯째가 황제의 눈 밖에 나서 추방이라도 당하면, 현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원경릉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어쩌다가 이 따위 여자에게 휘둘리게 되었지? 당초에 순리대로 주명취를 아내로 맞았으면 오늘의 이런 상황이 벌어질 리 없는데. 현비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원경릉의 뼈마디를 분질러도 시원치가 않은 마음이다. 원경릉은 꼿꼿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 죽일 듯이 노려보는 현비의 시선을 못 느낄 수가 있겠는가? 이 일 때문이 아니어도 현비는 원경릉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그때 “황후 마마 납시오!” 태감의 목소리가 들렸다.명원제는 손을 흔들어, 뜻을 표하자 목여태감이 달려 나가고, 황후가 옥집사를 데리고 오는 것이 보였다. 목여태감이 보니 희상궁도 방금 도착했기에, 황후께 나아가 몸을 숙이며, “마마, 폐하께서 들라 하십니다!”목여태감은 이제 다시 희상궁을 보니, 희상궁은 얼굴이 태연하고 꾸밈없는 기색이다.목여태감이: “상궁은 안으로 들게!”황후와 옥집사가 앞서 가고, 희상궁이 뒤를 따르는 모습으로 세 사람이 어서방에 들어갔다.현비는 황후를 보고, 황급히 일어나 예를 취하며, “신첩 황후마마를 뵙습니다.”황후는 평상시처럼 현비를 한 번 쳐다보고, “현비도
진주 사건이 밝혀지자, 구전단의 범인이?주황후는 의아하다는 듯 옥집사를 보고, “뭘 잘못 들었다는 거지? 진주를 돌려 드리라고 했는데, 뭐라고 아뢴 것이냐?”“마마……” 옥집사는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며, “제가 멋모르고, 초왕비가 보낸 진주는 초왕을 위해서라 생각해서, 그만,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초왕비가 황후께 초왕에 대해 잘 말씀해 주셨으면 한다고.”주황후가 노발대발하며, “넘겨짚는 것도 정도가 있지?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그때 황후가 문득 정신이 들며, 옥보가 황후를 따른지 오래되었고 평소 침착하고 신중한 성격이라, 황제 폐하 앞에서 결코 함부로 넘겨짚은 말을 내뱉을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황후는 바로 주명취를 떠올렸다.전에 주명취가 현비를 찾아가자고 했으나, 황후는 당장 현비와 맞붙을 필요도 없고, 현비는 태후의 조카라 눈 밖에 나면 오히려 일이 힘들어 진다고 생각했다.명원제의 낯빛이 졸지에 험악해 졌다. 옥보가 어찌 감히 단독으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황후의 명령이었겠지, 명원제의 싸늘한 눈빛이 황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주황후는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기에, 손으로 옥집사의 따귀를 때리며, 성난 목소리로: “방자한 것, 제멋대로 추측하고, 함부로 폐하 앞에서 지껄여?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옥집사는 바닥에 꿇어 앉아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폐하 용서해 주소서. 폐하 용서해 주소서!”명원제는 무표정하게 명령했다: “여봐라, 옥보를 끌어내 곤장 30대를 매우 쳐라.”주황후는 가슴이 아팠지만 옥보를 위할 수 없어 길길이 날뛰며: “좀 봐주려 해도 말이야. 어서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빌지 못해?”옥집사는 머리를 땅에 찧으며 반쯤 축 늘어진 몸으로 얼굴에 핏기가 없다. “소신을 벌해 주시니 폐하의 은혜가 망극하옵니다.”옥집사가 끌려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밖에서 퍽퍽하는 곤장 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다.주황후는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표
희상궁의 자백“감히 자네가 약을 바꿔 치기 한 것이 아니란 말이냐?” 원경릉이 물었다.희상궁은 침묵했다.명원제는 탁자를 치려 했으나, 천천히 손을 내려 놓으며 고요하게 희상궁을 바라본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 앉는다.희상궁은 분명 한 마디로 반박할 수 있음에도, 아무 말이 없다.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명원제는 놀라움과 분노가 몰아쳤다. 어째서 희상궁이란 말인가?“왕비 마마, 증좌는 있는 것이겠지요?” 목여태감은 가슴이 철렁해서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원경릉은 평소처럼: “증좌는 건곤궁에 있지요, 태상황 폐하의 곁에 말입니다. 희상궁, 자네는 태상황 폐하 앞에 가야 이실직고 하겠느냐? 자네가 태상황 폐하를 해하였으니, 폐하께서 자네 때문에 화병을 일으키셔도 할 수 없지, 건곤궁에 가서 대질하자 꾸나.”희상궁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이 시시각각 암담해지고 팽팽하던 얼굴이 푸석해 지며 눈꼬리가 처지고 순식간에 나이를 먹은 것 같다.“건곤궁까지 가실 필요 없으십니다. 쇤네가 했습니다!” 희상궁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실내는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명원제의 분노에 찬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명원제의 목소리가 다시 천천히 울려 퍼지나 공허하고 창백하게, “왜 그랬지?”희상궁은 얼굴에 울음보다 흉한 웃음을 흘리며, “쇤네는 태상황 폐하를 해하려는 마음을 먹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약은 쇤네가 바꿨지요, 독약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알고 난 뒤엔 이미 너무 늦었지요.”“그래서 남나인을 죽여 네 죄를 대신 씌웠느냐!” 원경릉이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희상궁이 말했다.“누가 너에게 약을 바꾸도록 시켰느냐?” 명원제는 등골이 서늘해 지는 것을 느꼈다. 궁중에서 희상궁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희상궁은 머리를 땅에 찧으며, “폐하, 쇤네를 죽여 주시옵소서, 쇤네는 말할 수 없습니다.”“자네……” 명원제는 실망이 극에 달해, “일이 이지경이 되었거늘, 배후에서 지시한
희상궁, 원경릉과 함께 초왕부로희상궁은 쓴웃음을 지으며, “인정에 빚을 지면 결국 갚아야 하나 봅니다. 쇤네가 작년에 큰 병에 걸렸는데 초왕비께서 좋은 약을 보내주셔서 나았지요. 이번에 초왕비 마마를 도와드린 것으로 그때의 빚을 갚은 셈 쳐주세요. 쇤네 생각에 초왕비께서는 벌을 받지 않으실 겁니다. 태상황 폐하께 마마가 필요하니 기껏해야 욕이나 좀 들으시는 정도겠지요. 쇤네는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희상궁은 말을 마치고 머리를 땅에 세게 조아리고 고개를 들며 평온한 안색으로, “쇤네는 더 말씀 드릴 게 없습니다. 폐하, 쇤네에게 독이 든 술을 내려 주시옵소서!”이생에 진 빚을 희상궁은 이미 다 갚았다.내일 저승길을 떠나도 그분께 빚진 건 없다.명원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자네가 만약 배후에 있는 자를 실토하면, 짐은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희상궁은 침묵했다. 이미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결연함이다. 명원제는 극도로 미우면서도 가슴이 아려 도저히 희상궁을 죽일 수 없으며, 태상황께 이 사실을 고할 수도 없다. 태상황이 지금 이 일로 마음의 병을 얻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곁에서 자신을 수십 년간을 모셔온 사람이 자기를 해치려 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잠시 침묵한 끝에 황제가: “태상황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자네 말을 믿겠네, 추궁하지도 않을 것이네, 단지 자네는 나이가 들었으니 다시 태상황 폐하의 시중을 들기엔 적합하지 않아. 초왕비와 자네가 마음이 맞는 것 같으니 짐이 초왕비를 위해 태상황께 양해를 구해 보지. 초왕비는 희상궁을 초왕부로 데려가라.”명원제는 결국 자기가 손을 쓰기 싫으니, 희상궁이 원경릉을 해치려 했는데도 그녀에게 딸려 보내 처리하도록 시켰다.원경릉은 눈이 동그래지며 말문이 막혔다!“희상궁은 먼저 물러가라.” 명원제는 노기를 거두고 평소처럼 얘기했다.희상궁은 복잡한 심경으로 원경릉을 보고 예를 취한 뒤 물러났다.명원제는 상선에게, “살펴보러 가거라, 가서
우문호가 후궁을 맞는다? 명원제는 원경릉에게,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면, 혹시라도 말이다, 초왕부에 돌아가서 네 아버지께 여쭤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지.”원경릉은 속수무책이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떠보는 게 정말 나은 걸까?“아버지 걱정 시키지 말아야죠.” 원경릉이 말했다.이 대답에 명원제는 만족하며 잠시 원경릉을 보더니 갑자기: “방금 희상궁 말이 제왕비가 널 미워해서 해치려고 했다는데, 미리 말해두지만 사적인 복수를 해서는 안된다, 알겠느냐?”“그녀가 먼저 절 건드리면?” 원경릉이 반문했다. 결코 순순히 당할 사람이 아니다.“못 그럴 거야. 주씨 집안도 제왕비가 멋대로 구는 걸 다시는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리고 한 가지 더.” 명원제는 낮게 기침을 하더니, 원경릉을 바라보며, “현비가 짐에게 언급한 적이 있는데, 다섯째와 제왕비는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였지만 마지막에 인연이 닿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 남아있는데다, 제왕비한테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생긴 게 제왕비와 쏙 빼 닮아서, 짐도 다섯째에게 보상해주는 심정으로 주씨 집안 둘째딸을 후궁으로 들여줄까 하는데, 무슨 다른 의견 있느냐?”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없어요!”명원제는 다소 의외다. 이렇게 대범하다고?주씨 집안 둘째는 정부인의 딸로 그녀가 시집을 오면 정비는 옆으로 비켜줘야 되는데 진짜 신경이 안 쓰인다고?아니면 원경릉은 주씨 집안의 세력을 모르는 건가?원경릉이 둔한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니 이점은 알고 있을 것이다.“가거라.” 명원제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원경릉이 물러나왔다.문을 나서며 원경릉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후궁을 들여? 좋아, 안 좋을 게 뭐 있어? 후궁을 들이면 우문호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거니 앞으로 둘이 알콩달콩 살며 다시는 원경릉을 귀찮게 하지 않겠네. 별전 밖으로 나와 희상궁이 홰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을 보고 두 손을 떨군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희상궁의 눈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인다. 원경릉과 희상궁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
태상황은 다 알고 있다?건곤전에 도착하자, 태상황은 의외로 반쯤 걸터앉아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다.건곤전 안은 상선 외에 한 명 더 있는데, 이 사람은 온통 검은색 옷에 허리에 검을 차고 귀밑머리가 하얀 것이 나이가 제법 있는 사람이다. 그는 원경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굴빛이 확 바뀌는데 섬광처럼 차갑고 날카롭다.태상황이 해바라기씨를 벗기며: “나가게.”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그 사람 발소리가 가볍길래 자세히 보니, 걸어가는 동안 내내 발이 땅에 닿지 않다가 금방 건곤전 밖으로 사라졌다.“뭘 봐? 저 사람은 외로운 그림자 무사야. 일은 잘 풀렸나?” 태상황은 원경릉을 쏘아보며 한가하게 묻는데 정신은 생각보다 또렷해 보인다.원경릉은 문득 이 늙은이가 실은 뭐든 다 알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희상궁을 사주한 인물을 포함해서 말이다.늙은이가 그녀를 보고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원경릉은 머리털이 쭈뼛하게 곤두섰다. 제대로 맞춘 게 틀림없다. 늙은이가 뭐든 다 알고 있다.“상선, 내가 태상황 폐하와 단둘이 나눌 얘기가 있는데,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을까.” 원경릉은 바보취급을 당할 순 없으니, 정확히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상선은 눈치가 있는지 바로 나갔다.태상황은 여전히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한 대 패고 싶은 표정으로, “뭐 물어볼 게 있나? 과인이 반드시 답을 해준다는 법은 없지만.”“누가 약을 바꿔 치기 했어요?” 원경릉이 다가가 물었다, “알고 계시죠?”“알지!” 눈을 감은 채, “남나인.”“저한테 어수룩한 척 하지 마세요……”“무엄하다!” 태상황이 일갈하자, “네가 지금 누구와 얘기하는지 알고 있느냐?”원경릉은 눈을 감고 웃겨서 배가 당기는 걸 간신히 참으며,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태상황은 ‘풉’ 하고 계속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지만 착실하게 원경릉의 말상대를 하며, “그렇지, 과인은 알고 있지.”원경릉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태상황을 본다. 다들 태상황이 어떻게 느낄까 전전긍긍
택란은 어릴 적부터 화염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는 내면의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을 제어하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스승님을 따른 후, 스승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약점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정의 틈새가 생기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항상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일을 담담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진심 어린 감정을 흔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녀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꼬마 봉황이 날개를 펼쳐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었다.그들은 수년간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성장해 왔고,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잠시 후, 택란은 다시 구조 현장으로 나갔고, 여전히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위왕과 안왕은 어린 조카의 침착함에 깜짝 놀랐다.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이의 천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그들은 택란이 애초에 아이로서의 천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태어난 후, 조금이라도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빠르게 세상을 이해하며, 지혜롭고 노련한 어른처럼 모든 것을 맞서야 했다.사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대나 요구가 없었으며, 능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그녀의 모든 행동을 걱정하고 감시하지 않았다.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약도성의 일이 안정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번 약도성 방문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놀이가 아닌 실습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의지와 감정을 단련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구조 작업은 계속되었고, 지진이 발
한 마을 주민이 눈물을 닦으며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원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오. 조정은 우리를 모조리 죽이길 바라오. 우리가 죽어야 조정은, 이 약도성을 완전히 삼킬 수 있소.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소.”택란은 화가 나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 왔잖냐! 빨리 계속 파시게!”주민이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웬 꼬마가, 넌 누구냐?”택란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둠 속이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약도성의 성주, 우문택란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산사태가 난 지역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작은 몸집이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작아 보였다.황실의 공주라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공주가 이런 곳에 직접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저택 안에서 잘 보호받고 있어야 할 존재다.그녀는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해 접근한 곳의 흙을 한 겹씩 옮겨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구조 요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 급히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약도성의 지진은 강북부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낡은 집도 무너졌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약도성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위왕과 안왕은 신속히 구조 병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택란이 약도성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 여태껏 택란이 스승과 함께 떠났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네 오빠들은 바로 병사를 데리고 약도성으로 향했다. 지진 발생 12 시진 후 약도성에는 8천 명 이상의 병사가 합류했다.약도성의 백성은 조정이 지원군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정이 약도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과거에도 가뭄, 메뚜기 떼, 산사태 등의 재난이 일어났지만, 북막조정은 몇 포대의 쌀만 보내며 형식적인 구조를 했을 뿐이다.약도성
지진이 발생하기 전, 호명과 주 아가씨는 약도성 중심부에서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새벽녘은 사람들이 가장 피곤할 시간이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백성들은 분노했다. 그중 한 집안은 도축업을 하는 홀아비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새벽 무렵에야 돼지를 잡고 고기를 나눠주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데다 아이까지 깨우니,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옆집 사람은 칼을 들고 나가 저들을 쫓아내면 다시 잘 수 있다고 부추겼다.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상황이라 아들을 방으로 데려다 놓고, 즉시 칼을 들고 나가 주 아가씨와 맞섰다.그가 칼을 휘두르며 집안 식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지진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먼지가 자욱했고, 곁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옆집 역시 무너졌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집 처마 아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깔려 있었다.“아들! 아들아!”홀아비는 그제야 안으로 데려다 놓았던 아들을 떠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 겨우 세 살밖에 안 되는 아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그는 미친 듯이 벽돌과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 아가씨와 호명도 서둘러 도왔다.지진은 단 몇 초 만에 일어났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고, 그 결과 무너진 집에 깔린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약도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방에서 울부짖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 조정과 맞서던 이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홀아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들 함께 벽돌을 치우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구가 없어서 맨손으로 작업해야 했다. 주 아가씨의 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흙벽을 밀어내고 벽돌을 옮겼다.반 시진 후, 주 아가씨가 마침내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다리를 크게 다쳐 엉엉 울고 있었다. 홀아
“그럼... 호명, 가십시다!”주 아가씨는 왠지 모르게 택란의 말을 믿었다.호명도 주 아가씨의 말을 듣고 동의했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지진이 생기지 않으면 백성들을 귀찮게 한 정도로 끝날 테지만, 정말 지진이 발생한다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게다가 약도성의 백성들은 조정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더 미움을 사도 중요하지 않다.일행은 즉시 돌아가 병사들을 소집해 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백성에게 넓은 곳으로 대피하라고 알렸다.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백성은 역시나 원치 않았다.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병사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성주가 단호하게 명령한 일이었기에, 백성들은 마지못해 끌려 나갔다.그러나 문제는 강제로 밖으로 끌어낸 사람들을 계속 감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떠난 후 많은 백성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게다가 일부 폭도들은 이를 계기로 병사들과 정면으로 맞서며 심각한 충돌을 일으켰다.부분 병사가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는 마을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마을은 거의 조정을 적대시하는 곳이었다. 너무 외진 곳이고 여인도 적은 곳이라, 이곳 남자들은 혼사도 치르지 못하고 가난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루 세 끼를 유지하기조차 힘들었고, 금나라의 선동이 더해져 이 지역의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 이 몇몇 마을에서 15세 이하의 아이들은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병사들이 징과 북을 울리며 백성을 깨우자, 폭도들이 화를 내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몸싸움이 벌어졌고, 20여 명의 병사들이 이들에게 압도당해 심하게 얻어맞았다.결국 병사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약도성에서 대피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약 만 명 정도였다. 대부분 병사가 떠난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조정이 백성을 괴롭힌다고 욕하며 약도성에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이에 주 아가씨가 분노를 참지 못해 말했다.“성주께 말씀드려서 집을 전부 불태워버리자고 해야겠습니다! 정말 너무합니다.”호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녁 무렵, 그들 일행은 출발했다.약도성의 밤은 전혀 활기가 없었다. 해가 지고 나면 거리에서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수년간 치안이 매우 나빴다. 비록 저녁에 병사들이 순찰하고 있지만, 백성들은 이미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덕분에 이번 외출은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약도성이 가난하다 보니, 부유한 이들의 저택만 튼튼할 뿐, 대부분의 집은 돌집이나 흙집, 나무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초가 거의 다져지지 않은 상태여서 지진이 발생한다면, 대부분의 건물이 버틸 수 없을 것이다.택란은 이 점이 걱정되었지만, 아직 지진이라 단언할 수 없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길한 예감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그녀는 꼬마 봉황에게 물어보았고, 꼬마 봉황이 하늘로 날아올라 몇 바퀴를 돌며 주변을 살폈다.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을 본 꼬마 봉황은 택란에게 알렸다. 그녀의 불안감이 점점 더 커졌다.택란은 호명과 주 아가씨에게 자신의 걱정을 털어놓으며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호명과 주 아가씨는 믿지 않았다. 약도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만 지진이 발생하였다.주 아가씨가 말했다.“오늘 밤하늘을 보니 지진운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걱정하신 것 같습니다.”“지진운은 믿을 수 없소. 강가로 한번 가보시게.”이곳에는 바다가 없고, 산을 따라 흐르는 큰 강만 있었다.다들 풍등을 들고 강가로 향했다.강물의 흐름은 빠르지 않았고, 눈에 띄게 가뭄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물 높이는 겨울이나 봄에 비해 많이 낮아졌고, 어떤 곳은 강바닥이 드러나 있었다.택란은 풍등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강물은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아마도 수심이 얕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이곳에 샘물이 있소?”택란이 주 아가씨에게 물었다.“있습니다. 여기서 2리 정도 떨어진 곳에 큰 샘물이 하나 있는데, 근처 주민들이 그곳에서 물을 떠다 마십니다.”“좋소. 가보겠소!”택란이 말했다.일행은 다시 큰 샘물로 향했다. 주 아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부지깽이를 찾다가 깜짝 놀라 외쳤다.“뱀이야! 부엌에 뱀이 들어왔다! 어서 뱀을 잡아! 성주께서 놀라시면 안 된다!”몇몇이 부엌으로 몰려가 한바탕 소동 끝에 뱀 세 마리를 잡아냈다. 비록 정원에 뱀이 나타나지만, 뱀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어찌 집 안으로 들어온 걸까?택란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이오?”공연이 서둘러 대답했다.“성주님, 방으로 돌아가십시오. 여기 뱀이 있습니다.”“뱀이 집 안으로 들어왔소?”택란은 뱀을 힐긋 보았다. 그 뱀은 독성이 없는 풀뱀이다.“어제 요리사가 쥐가 많이 돌아다닌다고 했는데, 오늘은 뱀이 여기저기 기어다니네. 정말 이상한 일이오.”“별일 아닙니다!”공연은 손을 씻고 와서 말을 이었습니다.“제가 성주님을 방으로 모시겠습니다.”택란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아직 정오였고, 태양이 세게 내리쬐고 있었습니다.“약도성에 예전에 지진이 난 적이 있었느냐?”택란이 고개를 돌려 요리사에게 물었다.요리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지진이요? 땅이 움직이는 것을 말씀하십니까?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습니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땅이 흔들리고 산이 흔들려서 집도 무너지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하셨습니다.”“성주님 겁주지 말고 할 일 하시오.”공연은 택란이 놀랐을까 봐 걱정하며 요리사에게 떠나라 했다.택란은 방으로 돌아간 뒤, 꼬마 봉황을 불렀다.뱀, 곤충, 쥐, 그리고 새는 지진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특히 꼬마 봉황은 영적인 새이기에 더더욱 그렇다.꼬마 봉황이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꼬마 봉황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뭔가 큰일이 닥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설마 지진이 나는 건 아니겠지?”택란은 바닥에 엎드려 귀를 대고 지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그녀의 청력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기에, 지진이 오고 있다면 땅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하지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건설을 추진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첫걸음을 내디뎌야 한다는 생각으로, 택란은 이에 관해 세게 명을 내렸다.성내 백성들은 택란이 이 도시의 성주이자 진국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택란이 낭산의 도적들을 토벌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여덟 살짜리 아이가 낭산 도적들을 전멸시켰다는 것을 누가 믿을까?이곳의 백성들은 평생 황실 사람을 본 적 없었다. 지금 이렇게 직접 마주하자, 감정이 폭발하여 약도성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황실에 대한 깊은 원망을 드러냈다.약도성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백성은 백여 명에 불과했고, 셈조차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이렇게 폐쇄적인 환경에서 원망은 쉽게 극대화되었다.특히 금나라 사람들이 부추기자,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처음엔 택란도 외출을 하곤 했지만, 적대적인 감정이 격렬해지자 외출할 때마다 돌멩이가 날아왔다. 다행히 호명이 그녀의 안전을 염려해 경호를 강화하면서 크게 다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양두는 백성들과 다투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자네들이 원망해야 할 대상은 북막의 황실과 진가요!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북당을 침략하려다 패배하는 바람에 약도성을 내놓은 것이오. 다들 그때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소? 전쟁을 지지해 놓고 이제 와서 북당을 원망하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소!”양두는 기세가 등등했고 욕도 도리가 있어, 백성들을 순간 잠잠하게 했다. 하지만 이내 돌멩이가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고, 양두는 머리를 감싸며 도망쳐야 했다.이들은 이성적으로 도리를 따질 사람이 아니었다.호명은 상황을 이대로 둘 수 없다고 생각해, 택란에게 경성으로 돌아가길 권유했다. 하지만 택란은 단호히 거절했다. 첫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십 년이 지나도 변화는 없을 것이고, 약도성은 영원히 이 상태로 남을 것이다.호명은 사고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경호를 더욱 강화했다.그는 주 아가씨에게도 특별히 경계를 강화해
이리 나리는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말곁으로 걸어가 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원경릉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사람이란 이래야 하는 법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삶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내 재산은 평생을 써도 남을 만큼 많으니 아끼며 살 필요 없다는 것이다.”그는 말 위로 자연스럽게 올라탄 뒤,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원경릉은 그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가 앞서 한 말은 그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지만, 뒤이어 한 말은 또 다른 의미로 그녀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저렇게 자랑하지 않으면 못 참는 걸까?랑문서가 정식으로 설립된 날, 삼대 거두는 길고 긴 폭죽을 보내왔다. 폭죽 소리는 십 리 밖까지 울려 퍼졌고, 이는 북당이 한 걸음 더 발전했음을 상징했다.수도에서 천 리 떨어진 약도성에서도 이날 폭죽 소리가 울려 퍼졌다.도성 중심에 새로 만들어진 상업 거리가 성대하게 시작을 알렸다. 이곳은 택란이 계획한 곳으로, 각종 장사를 한곳에 모아 거래를 규범화하고, 관아에서 관리하여 사기와 도둑질 같은 문제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첫 번째 상업 거리라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는 시작일 뿐, 앞으로 더 많은 곳을 만들 예정이다.같은 날, 또 다른 기념행사가 열렸다. 바로 도로 건설의 시작이었다. 간소한 의식을 치른 뒤, 도로 공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다른 성들과 비교하면 약도성은 광산 자원을 개발하지 않으면 발전을 이루기 어려웠다. 광산 개발을 위해서는 금나라와의 합의만 아니라, 산을 개척하고 도로를 건설하는 등의 기초 공사도 필요했다.조정에서 약도성에 특별히 자금을 지원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작업은 성에서 스스로 해내야 했다. 다행히 금나라에서 10만 냥을 확보했기에, 이를 공사에 사용할 수 있었다.한편, 택란은 계속 금나라의 상황을 꼬마 봉황을 통해 접하고 있었다.진국왕은 얼음에 맞은 후 죽지는 않았지만,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크게 화를 내며 자신의 지위를
주 어르신은 원경릉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자, 한마디 더 덧붙였다.“세상 만물은 도법을 떠날 수 없다.”원경릉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주 어르신은 정말 학식이 깊으십니다!”“대충 추측한 것이다!”소요공이 손으로 부채질하며 원경릉에게 물었다.“또 진맥하러 온 것이냐? 어제 네 할머님도 다녀갔다.”“혈압과 혈당을 측정하기 위해, 손가락을 찌를 것입니다!”원경릉이 말했다.무상황은 손가락 찌른다는 말을 듣고, 재빨리 안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는 얼마 전 혈당이 높다는 진단을 받았고, 며칠에 한 번씩 손가락을 찔러 혈당을 측정해야 했다. 손가락을 찌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는가?원경릉은 그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차분히 약상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어르신은 모범을 보이듯 먼저 혈압을 쟀고, 소요공도 뒤따라 검사했다.검사를 마친 두 사람은 무상황을 붙잡아 의자에 앉히고, 손가락을 원경릉 앞으로 내밀었다. 소요공이 말했다.“세게 찌르거라!”원경릉은 물론 세게 찌를 리 없다. 그녀가 부드럽게 처리했지만, 무상황은 여전히 분노에 찬 눈빛으로 소요공을 노려보았다.혈압과 혈당이 조금 높긴 했지만, 심각한 편은 아니라서 약을 먹을 필요는 없었다. 대신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했다.모든 검사를 마친 후, 원경릉은 랑문서 설립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주 어르신은 중요한 일이니 곧바로 동의했고, 바로 이리 나리를 불러왔다.이리 나리는 이미 이런 노골적인 요구에 익숙해져 있었다.그는 과거 늑대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평생에서 얻은 것이 많지만, 그 어떤 것도 공주보다 귀하지 않다. 만약 내 모든 것을 공주와 바꿀 수 있다면 기꺼이 바꾸겠다. 늑대파도 포함해서 말이다.”이 말에 늑대파 사람들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를 둘러싼 채 한바탕 두들겨 팼다. 이리 나리는 가까스로 틈에서 빠져나와 힘겹게 말했었다.“하지만 설랑은 제외다!”그는 결국 더 심하게 두들겨 맞았고,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