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사건이 밝혀지자, 구전단의 범인이?주황후는 의아하다는 듯 옥집사를 보고, “뭘 잘못 들었다는 거지? 진주를 돌려 드리라고 했는데, 뭐라고 아뢴 것이냐?”“마마……” 옥집사는 입술이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며, “제가 멋모르고, 초왕비가 보낸 진주는 초왕을 위해서라 생각해서, 그만,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초왕비가 황후께 초왕에 대해 잘 말씀해 주셨으면 한다고.”주황후가 노발대발하며, “넘겨짚는 것도 정도가 있지? 간이 배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그때 황후가 문득 정신이 들며, 옥보가 황후를 따른지 오래되었고 평소 침착하고 신중한 성격이라, 황제 폐하 앞에서 결코 함부로 넘겨짚은 말을 내뱉을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황후는 바로 주명취를 떠올렸다.전에 주명취가 현비를 찾아가자고 했으나, 황후는 당장 현비와 맞붙을 필요도 없고, 현비는 태후의 조카라 눈 밖에 나면 오히려 일이 힘들어 진다고 생각했다.명원제의 낯빛이 졸지에 험악해 졌다. 옥보가 어찌 감히 단독으로 이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황후의 명령이었겠지, 명원제의 싸늘한 눈빛이 황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주황후는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기에, 손으로 옥집사의 따귀를 때리며, 성난 목소리로: “방자한 것, 제멋대로 추측하고, 함부로 폐하 앞에서 지껄여?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옥집사는 바닥에 꿇어 앉아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폐하 용서해 주소서. 폐하 용서해 주소서!”명원제는 무표정하게 명령했다: “여봐라, 옥보를 끌어내 곤장 30대를 매우 쳐라.”주황후는 가슴이 아팠지만 옥보를 위할 수 없어 길길이 날뛰며: “좀 봐주려 해도 말이야. 어서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빌지 못해?”옥집사는 머리를 땅에 찧으며 반쯤 축 늘어진 몸으로 얼굴에 핏기가 없다. “소신을 벌해 주시니 폐하의 은혜가 망극하옵니다.”옥집사가 끌려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밖에서 퍽퍽하는 곤장 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다.주황후는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은 표
희상궁의 자백“감히 자네가 약을 바꿔 치기 한 것이 아니란 말이냐?” 원경릉이 물었다.희상궁은 침묵했다.명원제는 탁자를 치려 했으나, 천천히 손을 내려 놓으며 고요하게 희상궁을 바라본다. 마음이 무겁게 내려 앉는다.희상궁은 분명 한 마디로 반박할 수 있음에도, 아무 말이 없다.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명원제는 놀라움과 분노가 몰아쳤다. 어째서 희상궁이란 말인가?“왕비 마마, 증좌는 있는 것이겠지요?” 목여태감은 가슴이 철렁해서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원경릉은 평소처럼: “증좌는 건곤궁에 있지요, 태상황 폐하의 곁에 말입니다. 희상궁, 자네는 태상황 폐하 앞에 가야 이실직고 하겠느냐? 자네가 태상황 폐하를 해하였으니, 폐하께서 자네 때문에 화병을 일으키셔도 할 수 없지, 건곤궁에 가서 대질하자 꾸나.”희상궁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이 시시각각 암담해지고 팽팽하던 얼굴이 푸석해 지며 눈꼬리가 처지고 순식간에 나이를 먹은 것 같다.“건곤궁까지 가실 필요 없으십니다. 쇤네가 했습니다!” 희상궁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실내는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명원제의 분노에 찬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명원제의 목소리가 다시 천천히 울려 퍼지나 공허하고 창백하게, “왜 그랬지?”희상궁은 얼굴에 울음보다 흉한 웃음을 흘리며, “쇤네는 태상황 폐하를 해하려는 마음을 먹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약은 쇤네가 바꿨지요, 독약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알고 난 뒤엔 이미 너무 늦었지요.”“그래서 남나인을 죽여 네 죄를 대신 씌웠느냐!” 원경릉이 날카롭게 쏘아 붙였다.“제가 죽인 것이 아닙니다.” 희상궁이 말했다.“누가 너에게 약을 바꾸도록 시켰느냐?” 명원제는 등골이 서늘해 지는 것을 느꼈다. 궁중에서 희상궁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희상궁은 머리를 땅에 찧으며, “폐하, 쇤네를 죽여 주시옵소서, 쇤네는 말할 수 없습니다.”“자네……” 명원제는 실망이 극에 달해, “일이 이지경이 되었거늘, 배후에서 지시한
희상궁, 원경릉과 함께 초왕부로희상궁은 쓴웃음을 지으며, “인정에 빚을 지면 결국 갚아야 하나 봅니다. 쇤네가 작년에 큰 병에 걸렸는데 초왕비께서 좋은 약을 보내주셔서 나았지요. 이번에 초왕비 마마를 도와드린 것으로 그때의 빚을 갚은 셈 쳐주세요. 쇤네 생각에 초왕비께서는 벌을 받지 않으실 겁니다. 태상황 폐하께 마마가 필요하니 기껏해야 욕이나 좀 들으시는 정도겠지요. 쇤네는 누구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희상궁은 말을 마치고 머리를 땅에 세게 조아리고 고개를 들며 평온한 안색으로, “쇤네는 더 말씀 드릴 게 없습니다. 폐하, 쇤네에게 독이 든 술을 내려 주시옵소서!”이생에 진 빚을 희상궁은 이미 다 갚았다.내일 저승길을 떠나도 그분께 빚진 건 없다.명원제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자네가 만약 배후에 있는 자를 실토하면, 짐은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할 수 있다.”희상궁은 침묵했다. 이미 생사의 경계를 넘어선 결연함이다. 명원제는 극도로 미우면서도 가슴이 아려 도저히 희상궁을 죽일 수 없으며, 태상황께 이 사실을 고할 수도 없다. 태상황이 지금 이 일로 마음의 병을 얻을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곁에서 자신을 수십 년간을 모셔온 사람이 자기를 해치려 했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잠시 침묵한 끝에 황제가: “태상황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자네 말을 믿겠네, 추궁하지도 않을 것이네, 단지 자네는 나이가 들었으니 다시 태상황 폐하의 시중을 들기엔 적합하지 않아. 초왕비와 자네가 마음이 맞는 것 같으니 짐이 초왕비를 위해 태상황께 양해를 구해 보지. 초왕비는 희상궁을 초왕부로 데려가라.”명원제는 결국 자기가 손을 쓰기 싫으니, 희상궁이 원경릉을 해치려 했는데도 그녀에게 딸려 보내 처리하도록 시켰다.원경릉은 눈이 동그래지며 말문이 막혔다!“희상궁은 먼저 물러가라.” 명원제는 노기를 거두고 평소처럼 얘기했다.희상궁은 복잡한 심경으로 원경릉을 보고 예를 취한 뒤 물러났다.명원제는 상선에게, “살펴보러 가거라, 가서
우문호가 후궁을 맞는다? 명원제는 원경릉에게,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면, 혹시라도 말이다, 초왕부에 돌아가서 네 아버지께 여쭤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지.”원경릉은 속수무책이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떠보는 게 정말 나은 걸까?“아버지 걱정 시키지 말아야죠.” 원경릉이 말했다.이 대답에 명원제는 만족하며 잠시 원경릉을 보더니 갑자기: “방금 희상궁 말이 제왕비가 널 미워해서 해치려고 했다는데, 미리 말해두지만 사적인 복수를 해서는 안된다, 알겠느냐?”“그녀가 먼저 절 건드리면?” 원경릉이 반문했다. 결코 순순히 당할 사람이 아니다.“못 그럴 거야. 주씨 집안도 제왕비가 멋대로 구는 걸 다시는 가만두지 않을 테니, 그리고 한 가지 더.” 명원제는 낮게 기침을 하더니, 원경릉을 바라보며, “현비가 짐에게 언급한 적이 있는데, 다섯째와 제왕비는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였지만 마지막에 인연이 닿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이 남아있는데다, 제왕비한테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생긴 게 제왕비와 쏙 빼 닮아서, 짐도 다섯째에게 보상해주는 심정으로 주씨 집안 둘째딸을 후궁으로 들여줄까 하는데, 무슨 다른 의견 있느냐?”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없어요!”명원제는 다소 의외다. 이렇게 대범하다고?주씨 집안 둘째는 정부인의 딸로 그녀가 시집을 오면 정비는 옆으로 비켜줘야 되는데 진짜 신경이 안 쓰인다고?아니면 원경릉은 주씨 집안의 세력을 모르는 건가?원경릉이 둔한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니 이점은 알고 있을 것이다.“가거라.” 명원제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원경릉이 물러나왔다.문을 나서며 원경릉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후궁을 들여? 좋아, 안 좋을 게 뭐 있어? 후궁을 들이면 우문호가 원하는 대로 되는 거니 앞으로 둘이 알콩달콩 살며 다시는 원경릉을 귀찮게 하지 않겠네. 별전 밖으로 나와 희상궁이 홰나무 아래 서 있는 것을 보고 두 손을 떨군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희상궁의 눈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인다. 원경릉과 희상궁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
태상황은 다 알고 있다?건곤전에 도착하자, 태상황은 의외로 반쯤 걸터앉아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다.건곤전 안은 상선 외에 한 명 더 있는데, 이 사람은 온통 검은색 옷에 허리에 검을 차고 귀밑머리가 하얀 것이 나이가 제법 있는 사람이다. 그는 원경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얼굴빛이 확 바뀌는데 섬광처럼 차갑고 날카롭다.태상황이 해바라기씨를 벗기며: “나가게.”검은 옷을 입은 사람은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그 사람 발소리가 가볍길래 자세히 보니, 걸어가는 동안 내내 발이 땅에 닿지 않다가 금방 건곤전 밖으로 사라졌다.“뭘 봐? 저 사람은 외로운 그림자 무사야. 일은 잘 풀렸나?” 태상황은 원경릉을 쏘아보며 한가하게 묻는데 정신은 생각보다 또렷해 보인다.원경릉은 문득 이 늙은이가 실은 뭐든 다 알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희상궁을 사주한 인물을 포함해서 말이다.늙은이가 그녀를 보고 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원경릉은 머리털이 쭈뼛하게 곤두섰다. 제대로 맞춘 게 틀림없다. 늙은이가 뭐든 다 알고 있다.“상선, 내가 태상황 폐하와 단둘이 나눌 얘기가 있는데,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을까.” 원경릉은 바보취급을 당할 순 없으니, 정확히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상선은 눈치가 있는지 바로 나갔다.태상황은 여전히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한 대 패고 싶은 표정으로, “뭐 물어볼 게 있나? 과인이 반드시 답을 해준다는 법은 없지만.”“누가 약을 바꿔 치기 했어요?” 원경릉이 다가가 물었다, “알고 계시죠?”“알지!” 눈을 감은 채, “남나인.”“저한테 어수룩한 척 하지 마세요……”“무엄하다!” 태상황이 일갈하자, “네가 지금 누구와 얘기하는지 알고 있느냐?”원경릉은 눈을 감고 웃겨서 배가 당기는 걸 간신히 참으며,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습니다.”태상황은 ‘풉’ 하고 계속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지만 착실하게 원경릉의 말상대를 하며, “그렇지, 과인은 알고 있지.”원경릉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태상황을 본다. 다들 태상황이 어떻게 느낄까 전전긍긍
우문호를 찾아온 손왕, 경조부 부윤이라니?“안 기쁘냐?” 태상황이 안색을 살피더니 묻는다.“기쁠 만한 일이 없네요.” 태상황이 웃으며, “다섯째가 측실을 들이는 것 때문이지? 이건 현비 생각일 게야. 보아하니 너 다섯째한테 그다지 관심도 없던데,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 신경 쓸게 뭐가 있어?”태상황도 이 일을 알고 있네? 측실을 들이는 거에 대해 벌써 얘기가 오간 모양이군.“그 일 때문 아니에요. 제 입장엔 그건 일 축에도 못 끼어요.” 굳이 일이라고 한다면 좋은 일 쪽이다, “희상궁 저랑 궁을 나갈 건데 아시죠?”“알고 있어!” 알아? 이건 방금 전에 정해진 일인데, 누가 이렇게 빨리 보고했을까? 누가 이렇게 재빠르지? 원경릉은 저도 모르게 방금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을 떠올렸다. 아마 그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태상황의 귀와 눈 역할을 하고 있겠지?“희상궁한테 잘해 주렴, 과인이 희상궁에게 실망은 했지만 그래도 미워하고 원망한 적은 없다.” 태상황은 눈을 감고 손을 닦으며 말했다.태상황과 같은 존귀한 신분의 사람이 누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죽이려 했는데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는데다 심지어 그 사람한테 잘 해주라니 정말 야릇하다.궁중 어서방의 별전, 손왕은 우문호가 궁 안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이토록 상처가 심각한지 몰랐다. 우문호가 조금의 생기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니 고무공처럼 동그란 머리에 열이 받아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곤두서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어느 놈이 한 짓이야? 토막을 내서 죽이고 시체를 잘근잘근 씹어도 분이 안 풀리네.”화가 나서 한 손에 약 먹을 때 먹으라고 보낸 약과를 입에 넣으며, 노기가 등등하게 와그작와그작 씹는다. 우문호는 오히려 평온하게 손왕이 끊임없이 먹는 걸 지켜보며, “저쪽에 간식 있어, 상선이 보내온.”원경릉에게 보낸 거란 말은 하지 않았다. 우문호는 사실 마음이 안절부절해서 줄곧 밖을 쳐다봤다.탕양이 간식을 가져다 손왕 앞에 놓아두니, 손왕이 손을 저으며,
자금단을 주고간 손왕, 우문호 출궁하다손왕이 헤헤 웃으며, “내 생각에 네가 비교적 나을 거 같아, 큰형이 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큰형을 안 좋아 하잖아 그래서 자연스럽게 널 천거했지.”탕양의 안색도 어두워지며, “손왕 전하, 이렇게 추천하신 것이 초왕 전하께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손왕이 당황하며, “왜 초왕한테 해가 되는데? 난 그냥 말 나온 김에 한 거라 정식 천거도 아니고, 아바마마도 내 말을 들으실 것 같지 않고 말이야. 탕양 너 진짜 너무 소심하네, 너 같은 성격도 즐거운 일이 있긴 해?”탕양은 쓴 웃음을 지으며, ‘하여간 나름 정확하게 아는 것도 있으시네요, 황제 폐하가 손왕 전하 말을 안 들으신다는 건 정확히 맞추셨어요. 그리고 언제 심사숙고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긴 한가요?’ 이 손왕 전하께서는 정말 단순 그 자체시다.손왕이 모두의 얼굴빛이 이상하자 뭔가 잘못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기 입을 한 대 때리더니, “요 멍청한 입이 뭘 또 잘못 말한 거지?”“괜찮아 형.” 우문호는 고개를 흔들며, “틀린 말 없어, 형은 날 높이 평가해 날 천거한 거니 당연히 맞는 얘기야.” 우문호의 눈은 계속 밖을 떠돌고, 원경릉은 아직 안 돌아왔다. 아바마마가 진노하셨는데 원경릉을 어떻게 처리하셨을까?손왕은 간식을 다 먹고 가고, 가기 전에 비분강개 하며 우문호를 위해 범인을 저주하며 욕했다. 게다가 형제 간에 우애를 다할 셈인지 자기의 자금단도 탕양에게 건내 주었다.우문호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손왕은 직접 우문호의 몸에 던지고는, “이거 맛 없다더라, 난 필요 없어, 다시 말하지만, 난 태자의 자리에 욕심이 전혀 없으니 아무도 날 해치지 않을 거다.”던져 놓더니 그냥 나갔다.탕양은 황급히 무슨 보물인 것처럼 집으며, “손왕 전하는 역시 왕야께 관심을 기울이시는 군요.”우문호는 묵묵히, “나도 알아.”둘째형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으론 태자의 지위를 둔 경쟁이 과열되기 시작했음을 알고 있다
초왕부로 돌아와 목욕하는 원경릉우문호는 눈을 감아도 어찌 된 일인지 마차가 여전히 요동을 친다. 전에 예친왕이 준 자금단으로 일시적으로 기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 자금단 효과가 사라지고 상처가 위중하다 보니 이 정도의 요동으로도 우문호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원경릉은 본래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우문호의 미간이 찡그려 진 채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악 상자를 꺼내 우문호에게 강력한 진통제를 주사했다.우문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더니, 진통제를 주사한 후 통증이 줄었는지 겨우 눈을 뜨고 원경릉을 봤다.원경릉은 약 상자를 만지작거리느라 우문호를 보지 않고 있는데 볼에 머리카락 하나가 내려와 눈꼬리를 가렸다.“아바마마께서 널 처벌하지 않으신 게 정말 사실이냐?” 우문호가 쉰 소리로 물었다.원경릉이 약 상자를 닫으며, “아바마마께서 추호의 빈틈도 없이 살피시고 내가 이번 일과 무관함을 아셨으니, 당연히 날 처벌하실 리가 없지.”“누가 한 건데? 희상궁은 또 왜 우리를 따라 출궁하는 거야?”“현비마마도 어서방에 계셨으니, 몸이 좋아지면, 현비마마께 가서 물어봐.” 원경릉은 다시는 우문호 앞에서 주명취에 대해 말해선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초왕부로 돌아가면 그녀는 다시 그 숨막히는 생활을 해야만 한다.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느니 삼가는 편이 낫다.현비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에 우문호는 눈살을 찌푸렸다.생모는 몸이 좋지 않아 늘 궁중의 일엔 상관하지 않으셨는데 왜 이번 일엔 끼어드신 걸까?원경릉은 눈을 감고 머리를 창에 기댄 채 서늘한 바람이 밖에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마음도 가을의 소슬함에 물든 것 같다.우문호는 그녀를 보니, 가을 태양이 그녀의 옆 얼굴에 비치며 부드럽고 따스한 빛이 감도는 반면 반대쪽은 어둡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요 며칠이 원경릉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일면이었다면, 지금은 차갑게 가라앉은 어둠 쪽이다.초왕부에 돌아온 원경릉은 마차에서 내려 희상궁을 데리고 봉의각으로 갔다.녹주와 기상궁이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
풍도성 안은 술잔을 주고받고 건배하며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안지여는 오늘 황금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에 거대한 이무기를 수놓았으며, 황실의 밝은 황색과는 약간 구별되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곤룡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과 매우 흡사했다.안지여는 자신의 야심을 이미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당연히 안지여는 오늘도 야심을 감출 생각 없이 손님들에게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인근 지역 조정 관리들이 손님으로 왔어도 안지여는 전부터 맺어온 관계였기에,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두터워 산 넘고 물 건너 저 멀리 있는 황제가 그들을 시시콜콜 관리할 수 없었다.그 자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황실에서 파견한 일행이 온다는 것을 알고, 연회석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듣자하니 안풍 친왕 전하와 이리 부마께서 오늘 오신다던데 어째서 안 보입니까?”안지여가 잔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면 결국 오겠지요.”“여정을 듣기론 오늘 분명 풍도성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밤이 되도록 아직 안 보입니까? 설마 성주님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성주님이 가서 맞이하셔야 한다고? 아주 허세가 대단한데? 퉤!”“누가 아니랍니까?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하는 거였으면 며칠 전에 풍도성에 도착해 성의를 보여야지, 오늘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늦게서야 와서, 아직도 잔치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성주님의 체면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행태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들어오게 막고 돌려보내시지요, 마음만 받은 셈 치고요. ”“맞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풍도성에서 받은 공물이 적지 않았으니, 만족한 줄도 알아야죠.”“풍도성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 없어요. 뭐 때문에 그럽니까? 수백 년 전에 풍도성은 원래 북당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선을 긋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모두 안지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몇 잔 들어가자, 비위를
소여쌍의 욕은 거의 반 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도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 무쌍거 사람들은 다 익숙해져 있었다. 성주가 오지 않거나 소여쌍이 아프기 시작해도 이렇게 욕을 해댔다.욕하다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늙은 몸종이 가서 달랬다. “부인 그러실 게 뭐가 있으십니까? 몸이 가장 중하십니다.”소여쌍이 의자에 기대 늘어졌다. 극도로 피곤해 풀린 눈으로 천정을 보며 비참함이 가슴 깊은 곳을 타고 내렸다. “오늘이 초엿새지?”“네!” 늙은 몸종이 대답했다.소여쌍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곧 15일이구나. 또 내 명을 재촉하는 고통이 오겠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그러자 늙은 몸종도 매우 괴로워했다. “부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고통도 며칠이면 그럭저럭 지나가서, 그동안도 그렇게 지내셨잖아요?”“며칠이면 뭐 그럭저럭 지나가나?” 소여쌍이 잔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네가 이 고통을 안 당해봐서 그래. 이게 다 이리봉청 그년 짓이야. 오빠가 그년을 쫓아가서 죽이게 한 걸 정말 후회해. 그년을 잡아 와서 가두고 내가 한 번씩 아플 때마다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나보다 수천 수백 배 고통스럽게 해야 했어.”늙은 몸종이 소여쌍의 손을 쥐었다. “부인 그런 생각 마세요. 벌써 죽은 사람을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성주님과 자꾸 다투지 마세요. 자꾸 다투시다 보면 감정이 사라집니다.”소여쌍이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진작부터 나한테 아무 감정 없어.”“성주님은 이리봉청에게 아무 감정 없으세요. 감정이 있을 리도 없고요. 안 그러면 당시 부인을 위해 이리봉청을 죽이고 천문 세가 사람을 다 죽이셨을 리가 없죠.”소여쌍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전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 몇 년간, 성에 들어온 여자들 생긴 걸 보라고. 전부 이리봉청을 쏙 빼닮았잖아? 오빠는 역시 후회하고 있는 거야. 날 위해 이리봉청을 죽인 걸.”소여쌍은 늙은 몸종의 손을 잡는데 고여서 썩
안지여는 소야쌍을 놓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이틀 뒤가 내 생일인데, 당신 몸 상태는 어때?”그러자 소여쌍은 시녀의 손을 뿌리치고 얼른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 했는데, 몇 걸음 만에 휘청거리더니 하마터면 안지여 뒤로 넘어질 뻔했다.안지여는 소여쌍을 잡아줄 수 있었지만, 손을 뻗지 않고 그녀를 등지며 보이지 않는 척했다.시녀는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얼른 소여쌍을 부축해 바닥에 넘어지는 것까지 막았다.소여쌍이 숨을 돌리고 살짝 웃었다. “몸이 많이 좋아져서 오빠 곁에 있을 수 있어요. 오빠 생일에 당연히 제가 곁에 있어야죠.”안지여는 그제야 소여쌍을 돌아봤다. “생일엔 손님이 많이 올 거야, 올해는 다른 어떤 해보다 성대하게 하니까 당신도 잘 차려입어. 내가 내일 사람을 시켜 장신구를 보내도록 하지.”“네, 알았어요!” 소여쌍이 기쁜 듯이 말하며 안지여를 한없이 바라봤다.하지만 안지여는 소여쌍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정 설명했고 체면도 차렸으니 됐다 싶어 말했다. “난 아직 일이 있어서. 당신 쉬는 걸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잘 쉬고 있어.”안지여는 말을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려고 했다.이때 소여쌍이 갑자기 닭발 같은 손을 뻗어 안지여의 팔을 붙잡으며 서둘렀다. “오빠, 어렵사리 왔는데 저랑 얘기 좀 더 해요.”안지여가 고개를 숙이고 소여쌍의 마르고 늙은 손을 바라봤다. 손등에 주름이 자글거리는 것이 구겨진 비단 뭉치처럼 너무 흉해서 혐오감이 든 나머지 쓱 손을 뺐다. “말했잖아, 일이 바쁘다고.”소여쌍의 눈빛이 갑자기 매서워지며, 늙고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이 바쁜 거예요, 아니면 그 여우 년을 찾아가는 거예요?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여자를 성에 얼마나 숨겨놨는지.”안지여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소여쌍이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축 처진 눈에서 원한이 쏟아져 나왔다. “제가 늙었다고 싫어하는 거잖아요, 아녜요? 잊지 마세요. 오빠의 동안도 결국 늙는다고요. 이리봉청이 아직 살아있어도 지금 저보다
안지여의 생일잔치에 상인, 인근 주와 현의 관리, 무림 사람들, 강호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안지여는 그동안 사교의 폭이 넓고, 각계각층 인사들과 교분을 맺고 있어 이번에 생일잔치란 이름을 빌려 그들 모두 한자리에 모아 대사를 논의하고자 했다.안지여는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 전에 시기를 놓치고 이제 우문호가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이때가 대사를 치를 적기였다.우문호가 몇 년 더 북당을 다스리고 나면 그에게 더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몰랐다.그래서 조정이 사람을 파견한다는 소식에 그는 기뻤다. 이를 빌미로 조정에 본때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천문 세가의 무덤도 생일잔치 후 태워버릴 계획으로, 물론 완벽한 구실을 붙여 백성들에게 설명할 생각이었다.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온 건, 안지여에게 아주 완벽한 빌미를 제공해 주는 셈이었다. 모든 것을 이리 부마 탓으로 돌리고 백성들에게 조정이 저지른 일이라고 알리면 천문 세가를 그토록 떠받들던 풍도성 백성들은 조정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안지여는 부마 이리율을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그의 내력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부이자 늑대파 문주라고 했으나 그건 전부 민간에 있을 때 신분에 불과했다. 결국 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는 길을 택한 이 사람은 극도로 지위와 재산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을 다루기 어렵지 않은 건, 안지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부마 이리율의 마음 저 밑엔 상인이란 출신을 벗어던지고 상류 계층에 들어 후작 세가가 된 후 2~3세대가 지나면 철저하게 이전 상인의 신분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목표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생일까지 아직 이틀 남았다.안지여는 두번 다시 소여쌍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한번은 가야 했다. 그의 생일잔치에 소여쌍이란 성주 부인이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성주 부부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해서,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허상을 심어주려는 것뿐이었다.소여쌍은 풍도성 동쪽 무쌍거에 살고 있었다. 혼인하던 그해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