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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28화

작가: 유애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0-29 19:42:56
기왕은 큰 손해를 보았지만 오히려 분수를 지킬 수 있었다.

며칠 후 기왕비가 왔을 때, 기왕부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 옆에서 듣던 사식이가 기왕이 큰일을 꾸미고 있는게 아니냐며 의심했고, 기왕비는 원경릉에게 그는 자기 코가 석자라 지금 당장 큰일 꾸밀 수 없다며 안심시켰다.

저주인형으로 모함을 받은 것은 기왕비가 은화 1만 냥을 주어 넘어갔고, 사건이 일단락 된 틈을 타서 기왕비는 은밀하게 추후의 일을 설계했다. 그녀는 그 계획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는 도중 기왕의 온 정신이 주명양에게 쏠려있었다. 그는 주명양을 통해 주씨 집안의 힘을 얻어 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주명양? 주씨 가문은 절대로 주명양의 말을 듣지 않을 겁니다.”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겠죠. 그가 주씨 가문의 힘을 얻고 싶다면 그러라고 하세요. 조정에 공을 세웠어야 힘을 싣기라고 하지, 공보다 실이 많으니 주씨 가문이 미쳤다고 기왕같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겠습니까? 초왕이야 세운 공이 많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부황께서 다섯째를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언젠가는 잘 해결될 거고요.”

원경릉은 그녀의 말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맞다, 호비(扈妃)가 입궁했다면서요?” 기왕비가 물었다.

“예, 드디어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졌네요.”

“가만 보면 호비는 참 머리가 좋습니다. 친왕과 혼인을 했으면 태자 자리를 두고 싸우기 밖에 더 했겠습니까? 태세 파악이 빠른거죠. 지금 황제를 모시는 여인들을 보세요. 하나같이 다 나이가 들었잖아요. 어리고 예쁜 호비가 들어갔으니 황제가 얼마나 총애하겠습니까?”

“예, 맞습니다.” 원경릉은 기왕비의 말에 일부분 동의했다.

친왕과 결혼해서 매일 마음 졸이며 사느니 황제의 후궁이 되어 편하게 사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

우문호가 경조부로 복직한 이후, 밀린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원경릉도 어느덧 임신을 한 지 6개월이 되었고, 전보다 몸이 많이 무거워져서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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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으로 들어온 우문호는 원경릉의 다리를 주물렀고 만아와 희상궁은 그녀를 부축했다. 원경릉은 물에 젖은 술빵 같은 얼굴로 엉엉 울었고, 우문호는 영문도 모른 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괜찮아. 울지 마. 내가 있잖아.” 우문호가 그녀를 다독였다.원경릉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축복해 주니, 임신은 좋은 일이라고 여기며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엄마가 되는 과정이 쉬울 리가 없지 않냐며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걱정과 불안이 터지자 눈물이 줄줄 흘렀고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내가 엄마가 될 자격이 되는 게 맞을까? 내 인생은 이제 끝인 건가? 누군가의 엄마로 살기에는 아직 난 젊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뱃속의 아이들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우문호, 내 생에 임신은 다신 없어.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다시는 없을 일이야!”“알겠어. 앞으로 절대 그럴 일 없게 할게.”우문호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얼마나 울었는지 원경릉의 두 눈이 눈물에 절어 퉁퉁 부었다. “쳐다보지 마, 나 지금 추한 거 나도 안다고!”“아냐, 넌 언제나 예뻐.”원경릉은 우문호의 입발린 말에 고개를 휙 돌렸다. “너 혼자 입궁해. 난 안 갈래.”우문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너 안 가면 나도 안 가. 그냥 단둘이 왕부에서 새해를 맞이하자.”“그건 안돼. 부황께서 분명히 뭐라고 하실 거야.”“그래서 뭐?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너야.”우문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잠시 후, 진정이 된 원경릉이 조용히 우문호에게 말했다.“아까는 감정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아…… 빨리 준비해서 입궁하자.”“갈 수 있겠어? 아무도 강요하지 않아.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돼. 궁 안에 사람도 많을 거고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우문호는 원경릉이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걱정이 됐다.“그래도 가자. 며칠 전에 상선께서 말씀하시길, 태상황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셨어. 내가 입궁해서 한 번 봐야겠어.”“너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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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가 다르게 몸이 무거워지시지 않습니까? 소인이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상선이 원경릉을 태상황 앞까지 부축했다. “다섯째, 네가 초왕비 대신에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거라.”태상황이 말했다.태상황은 원경릉의 작은 몸집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우문호는 원경릉을 대신해 태상황과 명원제에게 절을 했다. “초왕비는 몸이 무거울 테니, 움직이지 말고 저녁 식사 때까지 여기서 가만히 있거라.”태후가 말했다. “예!” 원경릉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다가 다시 앉았다.“요즘 몸은 좀 어떤가?” 명원제가 물었다.“별로 좋지 않습니다. 피곤한데도 잠을 잘 못 자고 식욕도 없습니다.”“모든 여자들이 하는 임신에 넌 참 유별나구나. 어미가 됐으면 마음가짐도 달라져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어리광 부릴 거야? 임신도 마음먹기 나름이니 마음을 굳게 먹어라.” 명원제가 말했다. 임신과 동시에 여자는 호르몬의 노예가 된다. 임신하고 출산하면 여자 몸만 망가지지 남자들이 열 달 동안 달라질 게 뭐가 있는가? 전과 같이 일하고 밥 먹고 놀고 술 마시고 남자들은 부인이 애 낳는데 기분만 내지, 뭘 안다고 훈수질인가?원경릉이 명원제의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자 그걸 본 우문호가 명원제에게 말했다.“부황께서는 꼭 임신을 해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임신을 해보지 않은 저희 남자들이 어떻게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알겠습니까?”우문호의 말에 명원제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그럼 너는? 너도 남자 아니냐?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네가 아느냐?” 명원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소자, 매일 밤 자리가 불편해도 배 때문에 뒤척이지 못하고 한 자세로만 자야 하는 초왕비를 보니 마음이 아픕니다. 퉁퉁 부은 다리로 소자의 신발도 맞지 않는 그녀의 발을 보고 있으면 소자가 아이를 낳을 수만 있다면 대신 낳아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 세상에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것을 초왕비를 보고 깨달았습니다.”“위대하다고? 여자로 태어나 아이를 낳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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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상황은 명원제를 보는 원경릉의 눈빛을 보고 기분이 언짢았다. “눈빛이 왜 그러느냐?”“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원경릉이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태상황은 헛기침을 하더니 원경릉을 보았다. “몸이 무거울 텐데, 짐의 건강상태를 봐줄 수 있겠느냐?”“예! 당연하죠!”태상황은 심근경색에 고혈압이 있는 편이라 건강상태가 좋다고 할 수 없었지만, 원경릉은 늙은이에게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해봤자 자극만 될 뿐이라고 생각해 말을 아꼈다.그녀는 태상황의 상태를 보고 약을 처방했다.“시간이 있으며 정화군주에게 가서 말동무를 해주거라. 그 상태로 혼자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원경릉은 태상황이 정화군주에 대해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는 듯 깜짝 놀랐다. 원경릉은 태상황에게 시간을 내서 가보겠다고 하며, 만약 시간이 없다면 사람을 시켜서라도 정화군주의 안위를 확인하겠다고 약속했다.원경릉이 건곤전에서 나오는 데 중년의 남자가 원경릉에게 인사를 했다. “왕비를 뵈옵니다.”원경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보았지만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았다.“저…… 누구시죠?”*섣달 그믐날 성대한 만찬이 펼쳐진 광명전(光明殿)에 원경릉이 조금 늦게 참석하는 바람에 사람들과 인사를 할 기회를 놓쳤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저 멀리 혼자 참석한 제왕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모습은 다소 쓸쓸해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주명양이 기왕의 옆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명양은 원경릉을 노려보며 기싸움을 하려고 들었지만 원경릉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주명양과 상반되게 기왕비는 평온한 표정으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초연하게 앉아있었다. 구황자(九皇子)와 열여덟 공주도 있었는데, 구황자의 모습은 활력이 넘쳐 보였지만 눈빛에는 뭔지 모를 불안함이 보였다. 열여덟 공주는 덕비(德妃) 옆에 앉아 그녀의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공주에게서 나오는 맑은 기운이 마치 해바라기 꽃 같았다. 황후는 인자한 미소를 띠며 광명전에 온 사람들 하나하나를 보았고, 태후는 손자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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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의 왕비   제 833화

    사람들은 원용의가 말에 치이든 밟히든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그 말의 주인도 제왕부의 후궁을 다치게 했다는 것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원경릉은 제왕에게 내일 원용의를 보러 왕부에 가겠다고 말했다. 왕부로 돌아온 원경릉은 피곤한 나머지 간단히 씻고 침대에 누웠다. “맞다! 부황께서 어서방으로 불러서 뭐라고 하셨어?”원경릉이 우문호에게 물었다.“별일 아니었어. 빨리 자.”우문호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꺼풀을 쓸었다.원경릉은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묻지 않고 바로 잠에 들었다.출궁 한 제왕도 마차에 올라 왕부로 돌아갔다. 그는 연회 내내 원용의 걱정 때문에 음식도 몇 점 먹지 못했고, 술도 많이 마시지 못했다. 그는 우문호를 부축해 초왕부 마차에 태운 후 자신도 마차에 몸을 실었다. 제왕은 오늘따라 원용의의 부재가 크게 느껴졌다. 게다가 추운 날씨 때문에 마음도 싱숭생숭했다. 주명취 때문에 제왕부가 불타버리자 그는 한동안 손왕부에 살다가 나중에는 별당으로 이사를 했다. 별당은 담장이 높지 않았으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넘어 들어갈 수 있었다.사실 제왕의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연회에 오기 전에 원용의와 말다툼을 했기 때문이다. 원용의는 다친 다리를 치료하겠다며 원씨 집안의 소개로 용한 어의를 모셨다. 원용의는 날이면 날마다 모실 수 있는 어의가 아니라며 이왕 이렇게 된 거 제왕에게도 진료를 보라고 했다. 만약 어의가 제왕을 진맥 했다면, 제왕이 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게 발각될 것이다. 그는 그게 두려워 백방으로 거절했다. 원용의는 그런 그를 보며 화를 냈고, 제왕도 화가 나서 원용의에게 ‘진맥은 너나 해! 네가 죽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다!’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 말을 들은 원용의는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제왕은 말을 내뱉으면서 아차 싶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녀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제왕이 예전에 주명취와 지낼 때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어도 주명취의 기분이 상할까 봐 바로바로 용서를 빌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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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의 왕비   제 834화

    한밤중 경조부에서 온 비상 호출에 우문호가 원경릉이 깨지 않게 조용히 옷을 걸치고 나왔다. 그는 제왕이 암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문을 봉쇄하고 범인 수색에 착수했다. 그리고 서일, 탕양, 조어의를 데리고 제왕이 있는 별채로 향했다.숨이 붙어있는 게 용할 정도로 제왕의 모습은 참담했다. 원용의는 하인을 시켜 팔황자의 자금단을 구해오라고 한 후, 침상에 누워있는 제왕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 눈물을 닦고 따듯한 물에 수건을 적셔와 제왕의 몸을 닦았다.수건으로 피를 닦는 게 무색할 정도로 수건이 붉게 물들었고 제왕의 맥박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왕야. 칼에 찔린 곳은 총 여덟 군데입니다. 손과 발, 그리고 복부, 심장 부근에 분포되어 있습니다. 지금 상태로 보면 제왕께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입니다. 지금 상황으로는…… 초왕비를 모시고 이리로 올까요?” 조어의가 물었다.우문호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는 서일과 탕양을 불러 원경릉과 금군을 별채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 또 사람을 궁으로 보내 황상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우문호는 제왕을 이렇게 만든 자들이 누구인지 밝혀야만 했다. 그는 밖으로 나와 순찰병을 불렀다.“자객은 잡았느냐? 몇 명이야? 어떤 무기를 썼어?”“소인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자객들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들고 달아나는 모습에서 특이점을 발견했는데, 그들이 들고 있는 칼이 전부 칼등이 휘어진 칼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이 화살에 맞은 걸 보니 화살을 쏘는 데 능한 것 같습니다.”“휘어진 칼?”“예, 맞습니다. 그리고 제왕이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제왕을 지키는 호위들이 전원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자객들은 뛰어난 무공을 지녔습니다.”순찰병의 말을 들은 우문호는 분노에 찬 얼굴로 기왕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기왕부에서 그를 포위했던 자들이 모두 등이 굽은 칼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자객은 대략 예닐곱 명이었을 겁니다.”“현장에서 칼을 발견했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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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의 왕비   제 835화

    “부황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경조부에서 경중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우문호가 말했다.“넌 여기서 무얼 하느냐? 가서 자객을 잡아오든지, 증거를 찾든지 해야 할 것 아니냐!”우문호는 원경릉이 별채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부황의 불호령에 군말 없이 탕양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서일이 초왕부에 도착하자 만아가 원경릉을 깨우러 들어갔다. 곯아떨어진 원경릉은 제왕의 암살 소식을 듣고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그녀는 우문호가 이미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둔한 몸으로 일어나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꺼내 입고 약상자를 열어 약품과 기구들을 살폈다. 원경릉은 약상자를 만아에게 건네고 마차에 올라탔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해가 뜨지 않은 거리는 푸르스름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건지 다바오는 왕부의 대문 앞까지 나와서 마차를 향해 짖었다. 원경릉은 그런 다바오가 신경이 쓰여 다바오를 데리고 제왕의 별채로 향했다.마차의 앞에는 서일이 뒤에는 만아가 마차 안에는 희상궁이 다바오를 잡고 있었다. 금군과 부병들도 원경릉의 안위를 위해 마차 양 옆에 바짝 붙어 그녀를 호위했다. 마음이 조급해진 원경릉은 장막을 걷고 서일에게 물었다.“제왕이 얼마나 다쳤느냐.”“여덟 번이나 찔렸다고 합니다. 조어의가 말하길 상처가 매우 깊고 출혈이 심하다고 해요. 제가 별채에서 출발할 때는 제왕의 호흡과 맥박이 희미해지고 있었습니다.”서일의 말에 원경릉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제발 심장과 대동맥은 다치지 않았길……’원경릉이 약상자를 열자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지혈제, 마취약, 구급약, 산소마스크, 수술용 칼이 보였다. 그녀는 약상자가 수술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균실도 아니고, 수술을 어떻게 하지?’원경릉은 약상자가 자신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원경릉은 제왕의 상태도 걱정이 됐지만, 더 걱정스러운 것은 자신의 체력이 뒷받침해줄 수 있을지였다. 수술조건이 갖춰진다고 하더라도 며칠 내내 휴식을 취하지 못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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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로 돌아가 가족과 한자리에 모이니 모두 즐거워 보였다. 원경릉은 집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을 데리고 휘종제와 건종 태자를 알현하러 갔다.휘종제와 건종 태자도 매우 기뻐했는데, 특히 아이들이 유학하러 와서 앞으로 여기서 산다는 얘기에, 휘종제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앞으로 아이들에게 드는 모든 비용은 전부 자기들이 대고 방학에 북당으로 보내고, 개학 때 맞이하는 것도 자기들이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외갓집엔 모두 출근하는 분들 뿐이라 불편할 거라는 것이었다.원경릉은 일단 감사드리고 북당에서 가져온 술과 검, 궁에서 가져온 흙 한 줌과 돌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건 우문호가 준비한 것으로 고향을 오래 떠나 있는 사람은 고향의 흙과 돌이 그리운 법이라고 했다.휘종제와 건종 태자가 흙과 돌을 보더니 손에 들곤 통곡하기 시작했다.원경릉이 두 사람을 위로한 뒤, 그들은 슬퍼하며 ‘언제 한 번 가볼까, 딱 한 번 보더라도, 아무도 만날 수 없어도 좋을 텐데.’라고 한탄했다.“긴 세월 고향 강산을 꿈에도 잊지 못했으나 돌아갈 수는 없었네..”원경릉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이 시큰해졌다. 휘종제와 건종 태자의 슬픔을 원경릉은 아주 잘 아는 것이 자신도 전에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단지 그들이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원경릉도 뭐라고 단정내리기 어려웠다. 어쨌든 이건 안풍 친왕이 진행한 일로 정말 돌아가고 싶으면 아마도 안풍 친왕이 준비해 줄 수 있었다. 북당으로 돌아가면 안풍 친왕에게 상황을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입학 준비를 마친 뒤, 원경릉은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아이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충만했기에 그녀와 헤어지는 걸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그 점이 씁쓸했다.아이들이 크면 놔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얘들은 아직 다 안 컸잖아.돌아가기 전에 원경릉은 양여혜에게 만나자고 했는데 양여혜가 기화를 데리고 올 줄 몰랐다.원경릉은 기화를 보자 머리가 아픈 게, 기화는 또

  • 명의 왕비   제 3040화

    ‘이제 어머니가 계시니 술 먹으면 몸 상한다고 말해? 예전에는 왜 말 안 했어?’다행히 누군가 같이 마셔주는 사람이 있었다. 회왕은 벼슬에 오른 뒤로 술을 조금 하기 시작했는데, 많이는 안 마시고 한두 잔만 마실뿐, 석 잔째면 아내를 보러 집에 갔다.즐겁게 박원과 소홍천을 보낸 우문호와 원경릉은 만두와 아이들을 유학 보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비록 환타와 칠성이는 아직 어려서 2년 정도 더 남아있었지만, 유치원 다니고 싶다고 소리를 지르며,형들이랑 꼭 같이 가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 원경릉과 우문호는 골치가 아파졌다.그나마 우문호에게 약간 위로가 된 건 딸만큼은 곁에 있다는 사실로, 칠성이와 환타가 하도 졸라대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가가가, 다 가.”아이들은 기뻐했으나 눈 늑대와 호랑이도 여전히 성깔을 부리며 따라가겠다며 소란을 피웠다.현대에서 어떻게 호랑이와 눈 늑대를 키울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였다. 게다가 이 동물들은 아주 영민해서 사람 일을 이해해, 꼬마 주인들이 이번에 가면 열흘 보름이 아니라 몇 년 있다가 온다는 걸 알고 아무리 혼을 내도 말을 안 들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만두가 이리저리 구슬려서, 동물들에게 자기들에겐 여름방학, 겨울 방학이 있고 학기 중에도 쉬는 날이 있어서 1년에 합치면 적어도 4개월은 이쪽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 적어도 1년에 절반 가까이는 같이 있는 거라고 위로하자 겨우 잠잠해졌다. 비록 시공간은 떨어져 있어도 같이 자라기를 원할 것이다. 유학을 가는 일이기 때문에 원경릉이 직접 따라가서 진학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이 일은 전에 현대에서 언급한 적이 있어, 로양이 아이들에게 호적을 만들어주기로 했다. 물론 아이들을 호적에 올리려면 원경릉 부부도 호적에 올려야 하는 것이, 아이들을 오빠 이름 아래 입적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이 일은 로양이 원만하게 처리해 원경릉 가족 모두 호적을 가지게 되었다.게다가 원래 집을 사뒀기 때문에, 부근 학군에 진학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원경릉은 다섯

  • 명의 왕비   제 3039화

    대오가 경성으로 돌아올 때 홍엽도 원숭이와 같이 돌아왔는데, 그도 풍도성에서 힘을 보탰다. 사실 홍엽이 안 가도 안풍 친왕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둬서, 안풍 친왕 능력이면 안지여 정도 상대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이리 나리 일행은 경성에 도착해, 우선 집으로 돌아가 공주와 천행이를 보고 가족이 함께 밥을 먹은 뒤 입궁해서 경과를 보고했다.사적인 원한은 한두 마디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은 지금 받아야 할 벌을 받고 있으며 아직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남은 건 정사를 논하는 것이었다.“어머니와 같이 풍도성에서 보름 정도 지내며 기본적인 민심을 파악했는데, 천문 세가는 백성들 사이에서 아직 명망이 높아 보입니다. 풍도성 백성들은 사실 세금이 너무 많고 경제가 번영한 성과가 전부 안지여 수중에 떨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어 안지여의 통치에 불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풍도성을 접수한 것에 백성들 대부분은 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천하태평이냐 하면 그럴 순 없는 것이, 일부는 성주가 자기들의 황제라 여기고, 조정이 풍도성을 접수한 것이 풍도성이 침략당했다고 여겨 나중에 약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부를 임명하실 때 신중하셔야 할 것입니다.”우문호가 말했다. “흠, 큰할아버지께서 천거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박원이라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그러자 이리 나리의 눈빛이 빛났다. “제 아버지가 추천한 사람이니 전 찬성입니다!”“아버지?” 우문호가 의아해하며 이리 나리를 쳐다봤다. ‘안풍 친왕비가 사부님이면 안풍 친왕은 사부의 남편 아닌가? 어떻게 아버지가 되지? 사부님의 배우자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지 않나?’“흠, 안풍 친왕은 제 아버지십니다!” 이리 나리는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어쨌든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그를 아버지라 부른 적 없지만, 마음속에서만큼은 진정한 아버지였다.“하하하!” 우문호도 그저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다.이리 나리가 퇴청할 때 우문호가 이리 나리를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무

  • 명의 왕비   제 3038화

    “우선 박원이랑 소홍천 의사부터 물어보자.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 전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우문호가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어머님께 가서 수라를 들려면 빨리움직여야 해. 꾸물대면 늦을거야.”그러자 우문호도 계란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우리 황조모한테 가서 맘마 먹자.”우문호가 나가서 부르자 아이들이 달려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수라를 들러 황태후 전으로 갔다.황태후는 원래 우문호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다 먹은 뒤 우문호와 아이들이 나가서 놀고, 원경릉이 황태후와 얘기를 나눌 때 말을 꺼냈다.“천행이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부마를 풍도성으로 보낼 수가 있지.. 공주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리 나리께서 풍도성에 가는 걸 지지하셨는걸요.”“말은 그렇게 해도, 출산 후에 여자 곁엔 남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이것도 단지 우리 가족끼리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정 일을 내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황태후는 이리 나리가 풍도성으로 간 진정한 목적을 전혀 몰랐으며, 단순히 어지러운 형국을 정리하러 갔다고만 알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주를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 나리는 이미 돌아오는 중이래요.” 원경릉이 위로하자 황태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됐네!”온 가족이 별빛을 받으며 천천히 소월궁을 거닐었다.계란이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놀다 지쳐서 아빠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으며, 목여 태감이 궁인 둘을 데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가운데, 궁 안은 인적이 드물어 밤이 되자 상당히 고요했다.“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아끼셔서, 이리 나리가 하필 이때 풍도성에 보냈냐고 하셨어.” 원경릉이 말했다.“날 원망하셨어?” 우문호는 품에 있는 아이가 깰

  • 명의 왕비   제 3037화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 명의 왕비   제 3036화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 명의 왕비   제 3035화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 명의 왕비   제 3034화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 명의 왕비   제 3033화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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