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호는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시종일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가 매일 갑옷을 입고 회왕부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은 놓이지 않을 것 같았다.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원경릉을 보았다.“아니면 내가 궁으로 들어가 태상황님께 귀영위(鬼影卫)를 빌려달라고 할까?”“그렇게까지 할 일이야?”“당연하지!”우문호가 진실의 미간을 보여줬다.“마음대로 해라” 원경릉이 어깨를 으쓱였다.우문호는 문득 원경릉이 사식이를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서일도 있는데 사식이를 언급하다니?’우문호는 사식이와 서일 둘 다 신임할 수 없었다. 사식이와 서일은 성격이 서글서글해서 좋지만 단점은 부주의하고 경계심이 낮아 사람을 쉽게 믿는 것이다. 그러나 태상황의 귀영위는 다르다.우문호가 큰 손바닥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아기는 안에서 뭘 하고 있대?”“잠이나 자!” 원경릉이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얘기 좀 더 하다가 자자. 졸려?” 우문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원경릉은 몸을 기울여 그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글쎄, 아기는 안에서 자고 있겠지.”우문호는 오! 하고 소리를 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럼 아기는 너무 심심하겠다!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아니야.”“아기는 심심하지 않을 거야.” 원경릉은 경고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원경릉은 그의 눈빛에서 그의 생각이 읽혔다.“그럼 언제쯤 들어가서 아기가 뭐하나 볼 수 있을까?”우문호가 중얼거렸다.원경릉은 가슴에 올라온 그의 손을 떼어냈다.“아기가 태어난 이후에 볼 수 있지! 그리고 너의 그곳에…… 눈도 없잖아 들어와도 아기를 볼 수 없어!”그는 옥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참기 너무 힘들다.”“죽는소리 하기는 일러!”우문호의 입술이 그녀의 하얀 뺨을 스치더니 귓가에 닿았다.“너 대신에 아기를 품을 수 있다면 내가 품어서 너의 고생을 덜어주고 싶다. 하…… 아직도 몇 달이나 남았다니.”“그래도 넌 내가 임
“너는? 아들이었으면 싶으냐 딸이었으면 싶으냐?”우문호가 물었다.원경릉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질문에 당황했다.“음…… 아들이길 바라지.”“어? 넌 딸을 더 좋아했잖아?”“아들이고 딸이고 다 좋지. 부모로서 성별로 차별한다는 것은 말이 안 돼.”“그런데 왜 아들이길 바라?” 우문호는 원경릉이 자신과 같은 이유로 아들을 원하는 게 아닐까 추측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왜냐면 이 시대는 여성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여성의 삶이 남자에 의해 쥐락펴락 되는 이 세상에 내 딸이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우문호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슬픔을 보았다.“여자의 행복이 혼인에 의해 결정되고 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시댁의 권세를 보고 혼인을 해야 하며, 혼인 후에도 시어머니 눈치를 봐야 하고 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첩도 들여야 하고 아이를 낳아도 여자아이를 낳으면 안 되고…… 첩의 아이까지 내가 보듬어 키워야 하며 어휴…… 내가 비록 여자아이를 좋아하지만, 여자아이를 낳으면 복잡한 일이 너무 많아.”마지막 말을 하기 전에 그녀가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그리고 나처럼 운이 좋아서 너처럼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잖아.”현실적인 그녀의 말에 우문호가 깜짝 놀랐다. 그는 남자로 태어나 한 번도 여자들의 고충을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말한 모든 것들은 여성의 미덕이라고 치부하며 여자가 이를 해내지 못한다면 자격이 없는 여자라는 둥 좋은 며느리가 아니라는 둥 험담을 했다.“만약에 내가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받은 교육, 내 생각, 그리고 내 성격상 이곳에서 지내는 매일이 비참했을 거야.”“너는 무슨 교육을 받았는데?” 우문호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원경릉은 미소를 지으며 “나는 천문학도 알고 지리도 네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어.”라고 말했다.우문호는 실소를 지으며 “네가 천문과 지리를 안다고? 그럼 그날 가장 빛났던 별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라고 물었다.“금성이지.
이튿날 우문호는 태상황에게 문안을 드릴 준비를 했다.남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는 빈손으로 갈 수 없는 법. 그는 거리를 돌다가 좋은 담뱃잎 몇 개를 사서 궁으로 들어갔다. 우문호가 입궁하자 태상황은 그가 들고 온 담뱃잎을 곁눈질했다. 태상황은 상선에게 소요공이 보내온 담배를 꺼내더니 비교했다. 우문호는 태상황의 모습을 보며 뻔뻔한 표정으로 “잎담배는 색깔과 냄새만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럼 어떻게 비교해야 하느냐?”태상황이 물었다.“비교라니요. 제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십시오. 그렇다고 너무 많이 피시지는 마시고요. 그래야 건강하게 오래 사시지요.” 우문호가 허리를 굽히고 태상황의 어깨를 주물렀다.“왜 이렇게 아첨하는 거냐? 무슨 일이야 말해봐.”우문호는 히죽히죽 웃으며 “혹시…… 한두 명만 빌려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누구를?”“귀영위 말입니다. 초왕비가 매일 회왕부에 가는데 태상황님의 귀영위가 보호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왜?”태상황이 놀랐다.우문호는 노비가 기왕비에게 약을 팔았다고 태상황에게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태상황은 노비의 잘못으로 여섯째의 상태가 나빠졌다고 짐작했다.“날씨가 추워지면서 병이 더 나빠질까 봐 가는 겁니다.”낌새를 챈 우문호가 변명했다.태상황 손을 들어 상선을 불러 담배에 불을 붙였다. 노인은 살짝 눈을 감고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내뱉는 담배 연기에 우문호는 기침이 뿜어져 나왔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늙은이가 담담하게 말했다.“부탁할 필요 없다. 저번에 사고 났을 때, 과인이 이미 초왕비를 보호하도록 귀영위를 보냈다.”태상황의 말을 듣고 우문호가 깜짝 놀랐다.“그걸 손자는 왜 몰랐죠……?”늙은이는 콧방귀를 뀌었다.“네가 그걸 알았다면 귀영위를 보내달라고 부탁하러 왔겠느냐?”우문호는 멋쩍은 표정으로 “아…… 예.”라고 말했다. “됐다! 이제 그만 가보거라!” 태상황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우문호는 공손하게 절을 하고는 “손자가 황조부께 감사의 말씀
기왕비의 제안원경릉은 이렇게 질질 끄는 것도 답이 아니란 생각에: “들어오세요, 할 말이 있으면 분명히 하죠.”원경릉은 방으로 돌아온 뒤 엽산제를 먹고 마스크를 쓰고 나서야 밖으로 나가 기왕비를 만났다.“사람들은 나가 있으라고 하세요, 단 둘이 얘기하고 싶으니까요.” 기왕비가 안에 있던 사식이와 희상궁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안됩니다. 저흰 안 나갑니다.” 사식이가 말했다.기왕비가 원경릉을 보고 담담하게 웃으며, “설마 내가 지금 당신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난 걸음도 몇 걸음 못 걷는 상태예요.”“희상궁, 사식아 문밖에서 기다려줘.” 원경릉이 말했다.“왕비마마!” 희상궁은 조심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괜찮아, 가줘요.” 원경릉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바오를 들여보내 주세요.”다바오를 들이란 말에 희상궁은 비로소 안심했다.신성한 개 다바오가 안으로 들어오고 원경릉 발치에 엎드려서 기왕비를 호시탐탐 쳐다본다.기왕비가 웃으며: “이렇게 삼엄하게 경계하다니 이거 인정받는 기분인데요.”“반드시 인정해 드려야 지요. 기왕비의 수완은 제가 겪었거든요. 우리 오늘은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죠.” 외부인이 없으니 원경릉도 인사치레 하기 귀찮다.기왕비는 등을 곧추세우고 원경릉에게, “오늘 온 건 당신과 조건을 상의하기 위해서예요. 나한테 약을 주면 우문호가 태자의 지위에 오르도록 돕도록 하죠.”원경릉은 상당히 의외였다. 기왕비 입장에서 태자의 지위는 기왕이 반드시 획득해야만 하는 게 아닌가?“못 믿겠어요?” 기왕비가 담담하게 웃더니 표정이 점점 고통스러워지며, “목숨도 지킬 수 없는 영광이 무슨 소용인가요?”“이 조건은 동의할 수 없어요.” 원경릉이 말했다.기왕비는 원경릉을 보고 확고한 표정으로, “동의할 거예요. 태자비가 되지 싶지 않을 리 없잖아요? 태자비 다음은 황후로,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되는 거예요, 되고 싶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나요? 허세 부리지 말자고 했으니 우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기왕비의 제안에 대한 우문호의 생각우문호는 원경릉이 계속 기왕비를 상대할까 걱정이 돼서 잔소리하며: “기왕비가 다시 오면, 네가 직접 만나지 마. 어쨌든 기왕부 사람을 우린 상대도 안할거고 만나지도 않을 테니까.”우문호의 생각은 분명했다. 아바마마께서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하든, 큰형에게 어떤 희망을 품고 계시든 우문호는 상관하지 않는다.지금 중요한 일은 원경릉과 아이뿐이다, 모든 건 아이가 태어나고 다시 얘기하자.“알았어, 맞아, 사건은 어떻게 처리 했어?” 원경릉이 물었다.우문호는 요즘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온다. 장강부 사건의 실마리를 잡았는데 이 사건은 우문호가 궁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경조부 관아 사람들이 전부 실수없이 처리했다. 특히 탕양은 최근 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 분명 이 일때문에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우문호가: “막문의 죄목은 확고부동하지만 목숨을 보존하느냐 마느냐는 막문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 대해 부는지 두고 봐야지.”“그 막문이란 사람, 기왕비의 사촌동생이지?” 원경릉이 물었다.“그래, 이미 조사했어, 막문은 적지 않은 뇌물을 기왕부로 보냈더군.”원경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좀 생각해 보더니: “기왕부로 보냈다고? 기왕의 수중에 보낸 게 아니라? 그럼 기왕은 피해갈 수 있잖아.”우문호가: “맞아, 큰형 방식대로 라면 분명히 기왕비를 밀어 넣겠지.”원경릉이 이해하고: “어쩐지 기왕비가 나한테 와서 왕야를 태자의 보위에 오르게 돕겠다고 하더라. 모르긴 몰라도 기왕과 기왕비가 이미 패를 주고 받은 게 분명해.”“기왕비가 온 게, 단지 그녀 자신의 뜻이었다고 만은 할 수 없어, 분명 동안(佟安)의 뜻이었겠지.”“동안?”우문호가: “동안은 기왕비의 큰오빠로 전에 호부상서(戶部尚書)였으나 지금은 내각으로 자리를 옮겼어. 이 사람은 사교 폭은 넓은데 나이가 많지 않아 세력이 강력해.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큰형을 위해 분주히 움직여서, 큰형을 위해 수많은 사람과 연을 맺었지. 만약 그가 큰형을 배신하면 큰형의 태자
원경릉을 다시 찾아온 기왕비원경릉은 피하며 만나지 않고 희상궁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희상궁이 나가서 기왕비에게: “기왕비 마마, 초왕비 마마께서 오늘 좀 피곤하셔서 나와서 뵙지 못해 쇤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은 굴뚝같으나 도울 힘이 없으니 잘 쉬시고 다시 오지 마십시요.”기왕비는 눈빛이 점점 스러지며 처량하게 웃고는, “불 난 집에 부채질 한다더니 이럴 줄 몰랐군. 초왕비도 예외가 아니네. 초왕비에게 전하게, 친구 아니면 적이라고. 곧 죽을 사람이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 앞으로 조심하라고 말이야.”말을 마치고 기왕비는 병색이 짙은 몸을 끌고 사라졌다.희상궁은 이 말을 원경릉에게 전하며 걱정돼서: “왕비마마, 기왕비는 마음이 독하고 수법이 악랄합니다. 만약 자기가 궁지에 몰려 끝이라고 생각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마께 맞설 것이 틀림없습니다.”원경릉이 화가 나서: “기왕비는 미친개야!”다바오가 불만이라는 듯 짖었다.원경릉이 얼른 달래며, “네 얘기 아냐, 시끄러워.”다바오는 그제서야 ‘컹’하더니 엎드렸다.원경릉이 씩씩거리며 약 상자를 꺼내 탁자 위에 놓고, “내가 그녀를 구하기 싫어서 그런 줄 알아? 정말 약이 없다고, 난 의사인데 약만 있으면 기왕비가 대역죄인이라도 내가……”원경릉이 깜짝 놀라 약 상자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오늘 아침에 원경릉이 엽산을 꺼낼 때 이런 약은 없었다.원경릉은 완전 뚜껑이 열렸다. 기왕비가 그저께 왔을 때는 약 상자에 아무 반응이 없다가, 오늘 와서 위협을 하니 바로 약이 한 뭉치 준비되다니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한 약 상자다.“왜 그러세요?” 원경릉이 갑자기 멍하니 서있는 것을 보고 희상궁이 다가와 물었다.원경릉이 천천히 앉아 호흡이 약간 곤란하다고 느껴 희상궁에게 손짓했다. 원경릉이 첫째공주에게 얘기한 것처럼 약이 없어 기왕비를 치료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지금 갑자기 약이 생겼다. 전에는 고의로 못살게 군 게 분명하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기
놀라운 약 상자희상궁에 묻고 우문호는 돌아와 원경릉의 손을 끌고 마당을 걸었다.원경릉의 기분이 눈에 띄게 안 좋아서 우문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겨도 몇 걸음 움직이지 않았다.“피곤해?” 우문호가 원경릉을 부축해 정자에 앉혔다. 바람이 거세서 바람막이를 벗어 걸쳐주며, “돌아갈까?” 원경릉이 고개를 젓고 우문호를 자리에 앉히고는 소매속에서 약 상자를 꺼냈다. 약 상자가 커지며 그녀가 열어서 우문호 앞으로 밀었다. “봐.”우문호는 다가가서 보고, “멀 봐?”이 물건은 우문호도 모르는 것으로 심지어 상자 위에 써 있는 글자도 읽을 수 있는 게 별로 없고, 소 곱창 같은 글자가 많다. 원경릉은 약을 하나하나 꺼내는데 꺼내면 꺼낼 수록 많아져 몇 종류로 분류해 놓고, 마지막엔 안경상자에 눈이 가서 안경상자를 들어내니 아래에 아직도 물건이 한층 더 있는데 이 층의 물건엔 자물쇠가 잠겨 있다.우문호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말문이 막혔다.“너……너 상자가 크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많은 걸 담고 있을 수 있었지?”원경릉은 우문호가 얘기하니 그제서야 비로소 탁자 위에 가득한 약을 보고 경악했다. 이 상자안에 약으로 탁자 하나를 꽉 채운 것이다.그리고 그녀가 상자를 다시 보니 약을 아직 반도 꺼내지 않았다.원경릉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웅얼거렸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우문호는 원경릉이 꺼내는 걸 돕는데 꺼내면 꺼낼 수록 많아졌다. 상자 바닥 쪽엔 물건이 한층 더 깔려 있는데, “뭐야, 웬 칼이야? 이건 뭐지? 겸자? 집게?”원경릉이 다가와 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이다. 하다하다 이젠 수술도구까지 다 있다.그리고 그 아래 아직 물건이 있는데 뭔 지 알 수 없고 하얀 막으로 쌓여 있는데 원경릉도 하얀 막을 뜯어서 내용물을 볼 용기가 없다.우문호가 기겁해서 원경릉에게, “원선생, 진짜 진지하게 묻는데, 이 상자 도대체 어디서 난 거야?”원경릉 가엽게: “나도 모르는 걸.”우문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원경릉에게, “무슨 신선을 만났다는
기왕비를 치료하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우문호원경릉의 머리속에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그녀 자신?하지만 곧바로 화들짝 놀랐다. 이건 불가능하다, 만약 그녀라면 절대로 기왕비를 구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잠재의식이 절대로 이렇게 많은 약을 준비할 리 없다.그리고 전에 팔황자를 구할 때 원경릉이 쓰고 싶던 약이 약 상자에 나타나지 않았었지.그래서 원경릉은 약 상자를 제어하는 건 그녀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원경릉은 지금 꿈속에서 실험실로 돌아가, 약 상자가 왜 이렇게 변할 수 있는지 연구하고 싶다.하지만 원경릉은 최근 너무 잘 잔다, 꿈꿀 틈도 없이 말이다.다음날 이른 아침, 원경릉 부부는 우선 회왕부에 갔다가 마차를 타고 호국사로 갔다.“어젯밤 내가 꺼내서 왕야한테 보여준 약 중에 하나는 회왕을 치료하는데 쓰이는 약이야.” 원경릉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참지 못하고 말했다.“응.” 우문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렇게 많으니 회왕이 쓸 건 충분하겠지?”원경릉이 모호하게: “그래, 기왕비한테까지도 충분해.”우문호가 의아해하며, “뭐라고?”원경릉이 쭈뼛쭈뼛하며, “맹세해, 기왕비를 치료하고 싶은 생각 없어. 나도 모르겠어, 약 상자에 왜 갑자기 약이 이렇게 많아졌는지.”“약이 얼마나 많든 기왕비를 치료할 수 없으니까, 사적인 원한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에서야, 그리고 기왕비 자신이 독사라 몸이 낫는 날엔 반드시 널 물어 죽일 거라고.” 우문호가 진지하게 말했다.원경릉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왕비가 그런 사람이라는 거 알아, 만약 병을 치료해주면 내가 위험해 지겠지.”원경릉은 사실 자신을 걸고 모험을 할 생각은 없다. 기왕부는 늑대 소굴이 아닌가, 쳐들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우문호가: “지금 약이 많이 나온 걸 다른 사람한테 알리지 마. 여섯째한테 줄 양만 딱 주고 나머지는 전부 숨겨 놔.”“알았어.” 원경릉이 작게 대답했다.원경릉은 마음 속으로 사실 약간 뒷맛이 썼다.약이 없을 때는 마음이 안정적이었다.하지만 지금 약이 생기고
위왕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혹시 복수하려는 것이냐?”“복수가 아니라, 그저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안왕은 그에게 책임을 떠넘겨 혼자 감당하게 한 위왕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위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어찌 다섯째에게 설명할지 생각해 보거라. 보책은 아직 네 손안에 있잖냐.”안왕은 여전히 두꺼운 보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귀한 것이지만, 가만히 들고 있기도 거슬렸다.이렇게 골치 아픈 상황이 생길 줄 알았다면 차라리 꾀병을 부리고 위왕 혼자 오게 한 것이 더 나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각자 방으로 돌아가 목욕을 한 후, 막 침대에 누웠을 때 택란이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바로 택란을 만나러 나갔다.안왕은 보책을 가지려 했으나, 택란에게 넘겨받으면 곧 금나라 황후임을 인정하는 셈이 되므로, 절대 넘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어린 황제는 아직 그들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택란은 두 분 큰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말했다.“큰아버지, 오늘 일은 아바마마께 절대 말하지 마십시오.”안왕도 원하던 바였기에 다급히 답했다.“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먼저 네 아버지한테 숨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예. 저도 그것이 걱정입니다.”택란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아버지였다.“어린 황제도 참, 어린 시절의 약속마저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설령 너와 혼사를 약속했다 해도, 네가 승낙하지 않을 것 아니더냐.”안왕이 말하자 택란은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때 이미 동의했었습니다.”다만 그때는 그저 그를 달래, 그의 상처가 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승낙했다니?”안왕과 위왕은 서로 놀란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이 일은 전적으로 어린 황제의 탓도 아니다.“하지만 넌 그때 겨우 여덟, 아홉 살이었다. 그저 아이들의 장난일 뿐일 테니, 동의했다고 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위왕이 재빨
“폐하, 공주께서 폐하가 드리신 선물을 받지 않으신 것입니까?”언제 올라온 건지, 진이는 어느새 그의 곁에 서 있었다.“응.”경천은 뒤돌아 상자와 두 개의 옥패를 바라보았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배우며 수많은 옥을 망친 끝에 겨우 지금과 같은 모습을 조각해 낸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속상해하지 마십시오. 공주께서 아직 어리셔서 폐하의 노고를 다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깐요.”진이가 위로하자 경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어서 받지 않는 것이다.”진이가 잠시 멈칫했다.“너무 잘 안다니요? 그런 것 같진 않아 보였는데요.”경천은 이미 실망한 기분을 떨쳐버렸고, 대신 굳건한 의지를 다졌다.“진아, 나는 그녀의 뜻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녀는 먼저 좋은 황제가 되어주기를 바란단다. 이곳을 떠나기 전, 나에게 한 나라의 군주라 하지 않았냐? 황제로서 역할을 다하기를 바라는 것이다.”“아... 그런 것입니까!”진이는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황제가 속상해하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택란 일행은 궁을 나섰다. 냉명여가 그녀에게 물었다.“누나, 어찌 황제가 주신 옥패를 받지 않으시나요? 그를 싫어하시는 것입니까?”택란은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절대 그를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강단 있는 황제이고, 뛰어난 통치로 금나라가 정권 이양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했다. 게다가 그는 두 나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두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다.”“그럼, 어찌 그의 선물을 받지 않으셨습니까?”냉명여는 다른 사람의 선의를 함부로 거절하면 안 된다고 배웠기에, 그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택란이 답했다.“그 옥패가 약속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명여야, ‘약속’이라는 말은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약 네가 그것을 이행할 능력이 없다면, 함부로 약속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하지만 그도 누나와 혼사를 올리겠다고 한 말에 대한 약속을 지키려는 것 아닙니까?”“그래. 하지만 나
경천은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택란이 말했다."어쩌면 5년 후에는 오늘 한 모든 일이 어리석고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게 될 때, 그 감정이 단순한 사모인지 은혜 때문인지 알게 되실 것이고,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경천은 단 한 마디만 응한 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나 분명하니, 절대 그런 말로 그녀를 얽매여 부담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한 모든 일은 그의 결정이며 그의 태도였다. 그녀는 몰라도 되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는 언제나 그녀를 기다릴 것이었다.그리고 그녀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택란은 한숨 놓은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해한다니 다행입니다.""알고 있다."경천의 얼굴은 약간 창백했지만, 애써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삼 태감이 책자를 가져왔다. 경천은 그것을 택란에게 건넸고, 택란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 그가 제시한 조건은 매우 공정했으며, 심지어 약도성에 이익을 양보한 정도였다.책자를 접은 후,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우리 약도성을 생각해 줘서 고맙습니다. 두 나라의 원한을 풀기 위해 애써줘서, 그리고 약도성의 백성과 조정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습니다.""알고 있었던 것이냐?"경천이 다소 놀라며 묻자, 택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 알아봤습니다.""오해하지 마라. 그저 너를 위하여 한 일이 아니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그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해명했다.택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오해하지 마시지요. 저는 정말 부담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줘서 고마울 뿐입니다. 오늘도 사실 많이 감동했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혼사에 대해 논할 나이가 아니고, 사적인 감정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어리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아바마마
손에 쥐니, 차가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 옥의 차가운 느낌이 서서히 스며들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을 때, 그는 미세하게 안도하며, 그녀가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직접 만든 것입니까?"택란은 마음에 든 듯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눈동자에는 존경이 가득했다."응!"그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음에 드냐?""예. 정말 마음에 듭니다!"택란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빛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러자 그가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이걸 직접 나에게 선물해 줄 수 있느냐?""예?"택란이 잠시 멈칫하며, 놀라 물었다."저에게 준 선물이 아닙니까?"그가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으로 소매 주머니에서 또 다른 옥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내가 네게 직접 주고 싶은 것이다."택란은 그가 손에 든 것을 바라보았다. 옥질도 동일하게 맑고 투명했고, 손바닥의 선도 보일 정도였는데, 그 조각에는 경천의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옥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준수한 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색은 알 수 없었지만, 자수가 명확하게 새겨져 있었다.그녀는 기억력이 매우 좋았기에,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그녀는 두 개의 옥을 손바닥에 놓았다. 그제야 그녀는 옥에 3년 전 그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가 시간을 되돌려 3년 전 만남을 담은 것이었다!경천은 택란을 바라보며,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심장은 거의 목구멍까지 올라올 듯했다.택란이 두 개의 옥을 서둘러 상자에 다시 넣으며 말했다."두 개 모두 오라버니께서 먼저 가지고 있으세요."경천은 눈시울을 붉히며 다시 건네받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애써 실망이 드리운 눈빛을 숨겼다.삼 태감이 정교한 음식을 올려놓았고, 모두 택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알 수 없는 작은 흥분을 억누르고, 표정을 고쳐서 천천히 돌아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북당 백성인 란이 언니와의 혼사는 다 거짓인 겁니까?"경천의 동공이 흔들렸다."혹시... 화가 난 것이냐?""아닙니다."택란이 고개를 젓자, 밝은 빛이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비쳤고, 고르게 정리된 이마 밑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해졌다."그런데 어찌 사람을 시켜 저를 찾고 있다고 직접 저게 소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편지를 보냈다면, 저도 오라버니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심지어 혼사에 하객까지 청하며 일을 이렇게나 크게 벌였는데,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하십니까?"그는 갑자기 결단을 내린 듯, 천천히 그녀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수습할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천하에 나의 황후가 우문택란이라고 선언했다. 나는 그녀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택란은 순간 놀라하며,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경천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아,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눈동자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고, 이내 조심스레 물었다."응할 수... 있겠느냐?"택란은 잠시 망설였다. 기억 속의 그 소년이 지금 별빛을 받으며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이전의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10년 후 그가 죽지 않으면 돌아와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고 열정적으로 말했었다. 그 열정이 가득한 목소리는 지금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런 과거와 현재가 얽혀 버리자, 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저는..."경천은 그녀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반응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굴을 조금 숙이며 말했다."지금 바로 대답할 필요 없다. 몇 년 후라도, 10년, 아니 20년 후라도 괜찮다.""하지만...""아니, 말하지 말거라."그는 방금까지만해도 가득찼던 자신감을 더 이상 보여줄 수 없
냉명유는 팔짱을 낀 채 검을 가슴 앞으로 옮기며, 차갑게 말했다."누님께서 어디로 가든, 저도 무조건 함께 갈 것입니다."“하… 하지만."삼 태감이 무척 난감해했다."그래. 함께 가자. 이 거월통천각이 정말 달을 딸 수 있는지 어디 가서 보자꾸나!"그러자 택란이 웃으며 말했다.주 아가씨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정말 공주가 만나고 싶다면, 어찌 공주한테 이렇게 높은 계단을 오르게 할 수 있는가?그러고는 계단 위에 새겨진 난초꽃을 힐끗 보고는 순간 멈칫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보니, 계단의 각 층마다 난초꽃이 새겨져 있었다.황제가 자신의 그리움을 돌계단에 새긴 것이었다!택란도 계단을 오르며, 이 사실을 눈치챘다.게다가 각 난초의 형태와 크기는 매우 똑같았다. 처음에는 선이 조금 거칠게 느껴지긴 했지만, 후에는 점점 더 섬세하고 부드러워 보였다.이건 분명 같은 사람이 새긴 것 같았다. 그가 직접 조각한 것일까? 금나라가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잠시 후, 그들은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다행히 냉명여는 문 앞에서 멈추고 안까지 들어가지 않았다.택란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네개의 용 모양 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네 모서리에는 각각 올라가 쉴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었으며, 가운데에는 탁자와 두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떠힌. 네 면에 걸려져 있는 대나무 커튼이 걷혀 있어, 사방에서 밖을 볼 수 있었다.그 사이에서 청색 비단옷 차림의 남자가 통천각 옆 난간에 기대어 택란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매우 긴장한 듯 손과 발을 살짝 떨고 있었다.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에 약간 숨이 가쁜 듯 보였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이 만남을 특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반짝이는 별들도 그중 하나였다.하지만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자, 경천 황제는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 푸른 비단옷으로 갈아입었다.옅은 청색 옷자락에, 소매 끝에는 난초꽃이 수놓아져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어두운 구름 문양으로 수놓아져 있었다. 이 옷감은 북당에서 온 것이었다."폐하, 꼬마 은인께서 궁문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삼 태감이 와서 보고했다."좋소."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었다."택수운천으로 가겠네."택수운천은 그가 즉위한 후, 궁궐 안에 지은 새 궁전으로,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궁전 옆에는 거월통천각이 있었는데, 이는 량주성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거월통천각 안에 있으면 마치 손바닥에 달을 담을 수 있을정도로 웅장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거월통천각에서 멀게는 약도성과 량주가 인접한 산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녀가 생각날 때면, 늘 거월통천각의 가장 높은 층으로 올라가 풍경을 멀리 바라보곤 했다."진이야, 너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느냐?"그가 준수한 옷차림으로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람이 서서히 불며 청색 옷자락이 휘날리자, 옷자락의 네 끝에 박힌 고급스러운 야명주가 그의 선명하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그때, 저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궁 시위를 따라, 아치과 복도를 지나 거월통천각으로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젊은 금군 통령 진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런 적 없습니다.""사모의 마음을 품어보거라. 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느낌만큼 좋은 것이 없다."그는 그녀를 멍하니 보며 말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탓에 그녀의 얼굴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13세 전까지의 그의 인생에는 나라와 백성들 뿐이었지만, 13세 이후 그의 인새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금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진이는 황제의 시선을 따라, 천천히 다가오는 세 명을 보며
안왕은 보책을 받아 든 순간, 갑자기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점이 이상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일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보책을 펼쳐 안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그는 드디어 이상한 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굳어진 표정으로 경천 황제를 바라보았다.경천 황제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사를 통해 드디어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되었소. 그녀의 이름은 우문택란이오. 금나라 황후의 이름은 우문택란이네. 난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것이오. 만약 그녀가 황후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황후의 자리는 그녀를 위해 계속 비워둘 것이네.”위왕은 온몸에 식은땀을 흐르는 탓에 두 손을 급히 움켜잡았다. 방금 황제가 보책을 그의 손에 올리지 않아, 그가 받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다섯째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안왕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자리에서 물러나 이를 악물고 낮은 소리로 위왕에게 말했다.“방금까지도 어린 황제에게 어리석다고 했건만. 이렇게 계책에 능하고 이따위 교묘한 계책으로 우리 형제를 그와 같은 편에 서게 만들다니...!”위왕은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방금 술을 두 잔 마셔 조금 취한 터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아니,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무엇이냐?”안왕은 단단한 그의 팔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했다.하지만 이 상황 속에서 연회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북당 황제의 작은 공주도 우문택란이라는 말을 꺼냈다.그 말에 다들 그 당시 금나라 황제를 구한 사람이 북당의 작은 공주가 맞는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정말 북당 공주가 맞는다면, 금나라 황제도 참 배짱이 큰 것이다. 사실상 북당 황실이 금나라 황제를 구했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만약
경천은 위왕의 말을 듣자, 마치 마음속 큰 돌덩이가 내려간 듯 후련해 보였다. 그는 그러고는 궁인에게 술을 올리게 해 술잔을 여러 차례 돌린 후, 아래를 둘러보며 말했다.“오늘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소.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오늘 정혼연이 어찌 열리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이오.”그러자 모두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말에 당황을 금치 못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혼연이든 혼례든, 이런 자리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이때, 위왕이 안왕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섯째에게 서신을 보내야겠다. 금나라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자가 황제가 아닐 수도 있다. 진국왕이 아직 살아 있고, 이 황제가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맞소. 확실히 조금 병신같아 보이네.”안왕도 동의했다.참고로 ‘병신같다’는 표현은 안왕이 조카에게서 배운 단어였다.“이 이야기는 3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오.”이내 경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담겨져 있었다.“당시 금나라는 진국왕이 집권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대신해 금나라의 군주가 되려 했소. 이 사실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오. 그때 난 진국왕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소. 진국왕이 왕위를 빼앗으려 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하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는데, 그 과정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소. 그때 나를 구해준 이가 바로 란이라는 소녀이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오. 그 당시 나는 란이의 정체도 몰랐고, 그저 약도성 사람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소. 상처를 치료하며 그녀와 며칠을 함께 보냈고, 황권을 되찾으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네. 하지만 그녀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진국왕에게 알려졌고, 진국왕이 사람을 보내 그녀의 집에 불을 질렀소. 그리고 그곳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소.”모두가 진국왕이 불을 질렀다는 말에 멈칫했다.금나라 황제가 이렇게 비극적인 황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