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한참 있다가 갑자기 미심쩍다는 듯 원경릉에게 물었다. “태상황 폐하께서 좀 이상해, 날 주둥이 동생이라고 부른다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주둥이가 북당에서 무슨 의미가 있나?”원경릉이 난감해져서 답했다. “태상황 폐하께서 정말 주둥이 동생이라고 부르신다고요?”할머니가 말했다. “신분을 따지지 않고 나이만 놓고 따지면 동생이란 말은 맞다고 생각하는데, 주둥이가 대체 뭐더냐?”원경릉이 쭈뼛거리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어이가 없어졌다. “어쩐지 그런 거였군. 그래도 진짜 너무 곤혹스럽네, 주둥이라니 듣기 너무 거북하다.”“하하. 영어 이름이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세요. 주디(Juddy)요!”할머니가 웃으며 원경릉의 어깨를 찰싹 때리더니 말했다. “ 요 녀석 간 큰 것 좀 봐. 감히 할머니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쳐?”원경릉이 익살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잘못했어요.”할머니와 손녀가 알콩달콩 웃고 떠들었다. 할머니가 원경릉의 배에 쓸어주었다. “이제 이 아이도 태어나겠구나. 공주님이어서 태자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네!”배 속에 아이는 알았다는 듯 움찔움찔 하는 게 마치 할머니의 손바닥에 하이 파이브 하는 것 같았다.할머니가 신기해했다. “진짜 공주님일지도 모르겠네!”우문호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매일 집에 돌아오면 먼저 사탕이부터 보고 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매일 유모는 사탕이를 안고 작은 방에 있다가 우문호가 오면 안아 보도록 해야 했다.우문호는 늘 서일이 무슨 복을 받아서 노력도 안 하고 저렇게 쉽게 딸을 얻을 수가 있냐며 부러워 죽으려고 했다.원경릉은 복잡한 심경으로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아들 귀한 줄을 몰라? 다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 똑같아야 맞는 거잖아.”우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큰 소리로 얘기하지 마, 애들이 다 듣겠어.”“자기가 그랬잖아. 앞으로 편애하지 않겠다고.” 원경릉이 우문호에게 좋은 말로 경고하자 그녀가 원경릉을 끌어안았다. “편애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분명 편애는
“이거 낳기 직전인 것 같은데. 미색아, 진통이 자주 오더냐?” 할머니가 물었다.미색이 침대에 누워 손에 달걀부침을 말아 입에 넣으며 질문에 대답했다. “아직 전과 똑같은데요. 약간 무엇인가 빠질 것 같이 아파요.”“그럼, 진통은?” 할머니가 물었다.미색이 달걀부침을 꿀꺽 삼켰다. “진통이요? 진통이 어떤 거예요? 아픈 건가요? 아주 아프진 않은데. 약간 올라갔다 떨어졌다 하는 느낌이에요.”다들 어안이 벙벙했다. 미색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게 계속 달걀부침을 먹는데, 하나 먹고 나면 다음 걸 또 집어서 먹는 게 아무 일도 없는 사람 같았다. 산파와 할머니 말에 따르면 지금은 진통이 빈번하게 올 때고 초산이기 때문이라 했다. 할머니는 아이를 낳을 때 별로 힘들어하지 않는 사람을 여럿 봤지만 미색처럼 이렇게 담담한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올라갔다 떨어졌다 하는 느낌 말고 또 어떤 느낌이 있더냐?”미색이 착실하게 대답했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요..”“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할머니가 순간 눈치채고 말을 이었다. “가지 마, 가면 안 돼, 어서 누워!”“하지만 가고 싶은데요.. 진짜 못 참겠어요.” 미색은 곤혹스러워해 보였다. 그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많이 먹는 게 아니었다며 후회했다. 산파가 많이 먹어서 힘을 비축해 둬야 밤에 애 낳을 때 힘을 쓸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노비가 얼른 사람을 시켜 변기를 가져와 병풍 뒤에 두라고 하자 산파가 답했다. “아직 손가락 10개만큼 벌어지지 않았지만 열리는 게 빨라서 한 시진 안에는 낳으실 겁니다. 왕비 마마 가려면 어서 다녀오세요.”“그래!” 미색이 얼른 이불을 젖히고 내려서자 산파가 부축하려 하니 산파의 손을 뿌리치며, “됐어, 화장실 가는 건데 나 혼자 갈 수 있어.”회왕이 어쩔 줄 몰라하며 걱정되어 물었다. “배 아픈 거 아냐?”“그렇게 안 아파요!” 미색은 거친 풍파를 거쳐온 사람인데, 올라갔다가 떨어졌다 하는 느낌 정도가 뭐가 대수겠나!“그래도 역시 조심해야지. 태자비도 두 번째 출산
아이가 이미 나와버린 것이다. 머리가 비친 게 아니라 아이가 완전히 다 나온 것으로 미색은 탯줄을 늘어뜨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었다.노비는 혼절할 것 같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쭈그리고 앉아 부들부들 떨며 아이를 받아 들었고, 할머니는 손에 가위를 들고 들어왔다.할머니가 오랫동안 의사 생활을 보냈는데 산전수전 안 겪어 본 게 있을까? 하지만 임산부가 다리 사이에 아이를 받쳐 들고 있는 장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한편 아이를 노비 손에 넘겼는데 뜻밖에도 울지 않았다. 산파는 미색을 들쳐 안고 얼른 침대로 갔는데 얼떨결에 괴력을 발휘하는 모습에 다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노비는 아이 성별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얼른 침대에 눕히자, 할머니가 와서 탯줄 상처를 처리했다. 뜨거운 물이 아직 준비되지 않아 일단 닦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노비는 전신에 식은땀을 흘리며 새삼 벌벌 떨었다. 만약에 변기에 아이를 낳았으면 태자비 때 아리를 낳던 것보다 더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노비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러다 할머니가 아이를 배냇저고리로 감쌀 때 쓱 보고 노비의 가슴은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아들이다!후사를 이을 수 있다니! 회왕이 출산 준비 분부를 마치고 산실로 들어서려 하자 노비가 소리 질러 쫓아냈다. 회왕이 다급한 듯 얼른 물었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낳았어, 낳으려고 해!” 노비는 정신이 없다는 듯 답했다. “뜨거운 물은 준비 됐어? 얼른 가지고 들어오너라 아들아, 아랫사람들에게 일 좀 빠릿빠릿하게 하라고 해”회왕이 순간 당황해서 물었다. “낳을 거라고요? 뜨거운 물을 막 준비시켜서 이렇게 빨리는 안 되는데.... 아니다, 제가 직접 가서 볼 게요!”회왕은 이 뜨거운 물을 도대체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지만 뜨거운 물이 없으면 아이를 못 낳는 줄 알고 뜨거운 물이 엄청 중요한 거니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했다. 다른 건 도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지만 뜨거운 물은 반드시 제대로 준비해 놓을거라 다짐했다. 회왕이 얼른 달려 나
원래는 미색이 침대에 초췌한 모습으로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자연스레 앉아서 달걀부침을 먹고 있었다. 머리가 약간 흐트러진 걸 제외하면 안색 조차 그다지 창백하지 않았다.심지어는 아이를 낳지 않았을 때와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미색아, 괜찮아? 안 아파?” 회왕이 걱정되어 껴안으려 했으나 미색은 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회왕의 두 손을 뿌리치고 투덜댔다. “일단 좀 먹고요, 배고파 죽겠어요.”“이거 먹지 마. 탕을 끓여오라고 할게!’ 회왕이 얼른 고개를 돌아서 분부했다. “왕비에게 삼계탕을 끓여오너라. 어서!”시녀가 당황했다. ‘막 아이를 낳았는데 삼계탕을 먹으신다니? 노비 마마는 전에 그렇게 분부하지 않으셨는데 말이다.’ 노비 마마 말로는 아이를 낳으면 적어도 한참 있어야 음식을 먹을 기력을 차릴 수 있고, 너무 일찍 탕을 끓이면 졸아서 맛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이제 막 재료를 솥에 넣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미색이 답했다. “뜨거운 거 먹기 싫어요. 지금 전신에 열이 나서 시원한 게 먹고 싶으니까, 물 좀 어서 가져다주세요. 차가운 물로!”미색은 시녀의 동작이 너무 굼뜨다고 느껴서 직접 이불을 걷고 회왕을 밀치고 내려왔다. 회왕도 자신보다 행동이 더욱 빠른 미색을 보고는 머리카락이 쭈뼛해져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산파가 처리를 마치고 와서 축하 인사를 올렸다. “왕야 감축드립니다. 왕자님과 공주님이시랍니다!”“헉......” 회왕은 주름이 지도록 웃는 산파의 얼굴을 보며 이게 정말 꿈인가 싶었다. 용과 봉황이라니 정말 그럴 수 있는 거였다니!다행히 노비가 사전에 미리 준비해 두었다. 이런 일은 산파에게 감사 봉투를 듬뿍 주는 게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봉투를 찔러주니 산파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사 인사를 하고는 다시 일을 보러 갔다.미색이 아이를 곧 낳을 거라고 기다리던 동서들이 회왕부에 왔을 때는 용과 봉황 쌍둥이가 이미 태어난 뒤로 심지어 벌써 초유도 먹기 시작했다.미색도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사람들과
진비는 냉궁에 갇힌 뒤로 울고불고 소리치며 요 부인에게 군주들을 데리고 자신을 보러 오라고 했다. 요 부인은 원래 가고 싶지 않았지만 진비가 심하게 난리를 쳐서 군주를 연루시킬까 봐 입궁할 수 있도록 성지를 청했다.명원제는 목여태감에게 요 부인과 함께 냉궁으로 가서 사단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목여태감이 같이 냉궁으로 가서 문밖에서 기다리고, 요 부인 혼자 안으로 들어갔다.요 부인은 원래 진비가 그런 짓을 한 뒤 이미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더 심하게 죽기를 두려워하며 요 부인을 보더니 한 마디로 명령 질이었다. “네가 어떤 방법을 쓰든 반드시 폐하께서 내 죄를 면해주셔야만 해. 넌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아.”요 부인이 한참을 당황해서 쓴 웃음을 지으며, “진비 마마께서 절 정말로 과대평가하셨습니다. 전 그런 능력이 없을뿐더러 황자를 독살한 사람을 구할 방법은 더욱 없습니다.”진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감히 내 말을 안 듣느냐!”마치 여전히 자신이 저 높은 자리에 있는 진비 마마이고, 요 부인은 그저 고개도 들지 못하던 과거의 며느리라고 여전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과거의 요 부인은 도리상 진비에게 효를 다했을 뿐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들만 남았다. 하지만 그래도 두 군주의 할머니라는 생각에 요 부인은 참을성 있게 대꾸했다. “이건 말을 잘 듣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그리고 사안이 엄중한 만큼 황자를 독살했으면 사형이라, 누구도 사정할 수 없습니다.”진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죽은 건 호비의 아이야. 황귀비의 딸은 아무 일도 없잖아? 호비는 죽어 마땅해. 그러니 넌 호비를 증오해야지.”요 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왜 호비 마마를 증오해야 하죠? 진비 마마도 왜 호비 마마를 증오하셔야 합니까? 호비 마마께서 마마를 해친 적이 있나요? 호비 마마께서 누구를 해쳤나요? 우문군이 죽은 뒤 원망하는 마음을 더는 고집하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왜 더 심해지셨나요? 그런 행
요 부인이 망토를 두르고 한 걸음씩 냉궁이란 황폐한 곳을 떠나는 길이였는데, 장문전을 지나자 잠시 망설이다가 도리는 도리라는 듯 황귀비에게 가 문안을 올리기로 했다.그런데 호비가 이 곳에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한편 호비는 마치 올 것을 알기라도 했다는 듯 요 부인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부인, 진비 일은 고민할 필요 없네, 폐하께서 처리하실 거야.”요 부인이 답했다. “전에 고부간이었기에 마지막으로 한 번 뵀을 뿐입니다.”황귀비가 요 부인을 바라보더니 진비 일은 언급을 피하며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미색이 아이를 낳았다드던데 아주 수월했다고. 정말 잘 됐어.”요 부인이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제가 갔을 때는 벌써 아이를 낳았지 뭡니까? 저희 모두 다 깜짝 놀랐어요.”“잘 됐어. 고생할 필요도 없고!” 황귀비가 말했다.호비는 꼬마 공주님을 안고 와서 요 부인이게 보여주는데 호비 눈에서 사랑이 뚝뚝 떨어졌다. “공주님은 오늘 내내 손가락만 빨았어. 요 개구쟁이!”“어머 귀여워라!” 요 부인은 아기를 보자 순간 희성이 희열이 어릴 때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방금 진비의 가시 돋친 악담은 완전히 기억에서 이미 날아갈 정도였다. 장문전을 떠나며 뒤를 돌아보니 호비와 황귀비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황귀비가 웃으며 호비와 함께 공주를 쳐다보았다. 함께 어울린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요 부인이 출궁해서 원경릉에게 이 일을 얘기하자 원경릉이 말했다. “호비 마마가 입궁한 뒤로 황귀비 마마께서 계속 각별하게 돌봐주셨어. 매사에 일러 주시고 깨우쳐 주셨지. 안 그랬으면 과거 호비 마마의 거침없는 성격을 보면 벌써 온 후궁 마마들에게 밉보였을 거야. 호비 마마께서 총애를 받으셔서 마마를 해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중에 누군가는 목적을 이룰 수도 있잖아. 하지만 후궁 마마님들 수단이 황귀비 마마보다 못 하거든. 황귀비 마마는 계략을 못 꾸미시는 게 아니라 그럴 가치가 없다고 느끼실 뿐이야. 허나
사식이와 황귀비가 공주님을 낳고, 미색 또한 어여쁜 공주님이 있으니 우문호는 갈수록 원 선생 아이도 딸이 아닐까 바라게 되었다. 비록 다들 이미 딸이라고 말하지만 아이를 본 게 아니니 너무 큰 기대를 품어서는 안 되었기에 우문호는 매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자애든 여자애든 똑같이 사랑하고 공평하게 대할 거라는 마음의 준비 말이다. 하지만 소위 앉으나 서나 ‘아들일까? 딸일까’ 하는 생각 뿐이라 낮엔 아들을 낳을 거라고 생각하면 밤에 정말 아들을 낳는 꿈을 꿀 정도였다. 심지어는 꿈속에서 할머니가 아이를 안고 나와서 우문호에게 초왕부에 여섯째 공자님이 태어나셨다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우문호가 웃으며 아이를 받는데 마음속으로 실망이 피어나며 한 마디 말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것이었다. ‘희망이 박살 났어, 박살 났다고. 내게 평생 딸은 없을거야..’놀라서 벌떡 일어나자 그게 꿈이었다는 걸 깨닫고 심호흡을 하고는 심장을 더듬거리며 조용히 생각했다. ‘아직 희망이 있어, 아직 희망이 있다고!’우문호는 원경릉 곁을 지키기 시작한 뒤로 그녀가 갑자기 낳을 거 같다고 할까봐 두려웠다. 왜냐면 쌍둥이를 낳을 때 쉽게 순풍 낳았고 미색도 이번에 순풍 낳았다니까 우문호의 잠재 의식 속에 원 선생은 세 번째 출산이니 쉽게 낳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전에는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왔지만 지금은 점심때 나가서 해질 무렵이면 얼른 돌아왔다. 원 선생 곁을 떠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하지만 한 해가 다 저물어 원경릉은 예정일이 거의 다 되다 못해 지났는데도 아이는 아직 나올 생각을 안 했다.우문호는 물론이고 온 초왕부 모두가 속으로 궁시렁댔다. ‘왜 아직 안 태어나?’태상황 쪽에서도 매일 사람을 보내 물었다. 지금 3대 거두는 다른 일은 일정 상관하지 않지만 아이를 낳는 경사만큼은 여전히 끼고 싶어 했다.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사람을 기쁘게 하는 건 없었기 때문이다. 진비는 황귀비의 딸이 한 달
요 부인의 혼인은 완벽한 준비가 진행되어 정월을 지나 혼사날만 기다리고 있었다.정화도 너무 바쁘고 애들이 찰싹 달라붙어서 아무데도 갈 수가 없었기에 등불 축제에 오지 못했다. 그저 사람을 보내 동서들에게 즐겁게 놀고 오라는 말을 전했다.해질 무렵, 저녁 수라를 마치고 일행은 흥분된 마음으로 축제를 보러 출발했다.원경릉은 동서들만 불렀지만 각 집안 남자들도 같이 왔기에 우문호가 외로울 일은 거의 없었다.서일과 사식이도 사탕이를 데리고 외출하는데 아이가 아직 어려 사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는 게 쉽지 않았지만 서일은 딸이 흥겨운 축제를 놓치는 게 싫었다. 개인적으로든 공무를 보는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서일은 항상 딸을 데리고 다니고 싶어 했다.이렇듯 요 부인과 훼천은 군주 둘을, 손왕 부부는 희동이를, 제왕 부부는 보배를, 서일과 사식이는 사탕이를 데리고 나왔고 구사 부부는 아들 하나 딸 하나, 우문호 부부는 그야말로 아들 한 무더기를 데리고 함께 나갔다. 우문호는 다들 딸이 있는데 자기만 시커먼 남자들 뿐이라 마음이 웬지 모르게 섭섭했다. 특히 보배가 일곱째 가슴에 착 안겨서 애교를 떨며 귀여운 목소리로 ‘이거 사주세요! 저거 사주세요’!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 몸에서 질투심이 흘러 나왔다. 희열이와 희동이는 나이가 조금 있으니 확실히 얌전하고 갈수록 대가집 규수 풍모가 보였다. 희성이는 아직 활발해서 보배랑 장난치느라 여념이 없다가 어쩌다 와서 사탕이를 보더니 또 이쪽 여동생을 데리고 노느라 신이 났다.떡들과 쌍둥이는 이렇게 시끌벅쩍한 곳에 오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떡들 셋 중에서 경단이가 본인이 용돈을 저축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둘은 돈이 아예 없었다. 둘은 돈이 있으면 다 써버리는 성격으로 씀씀이가 아주 시원시원했다. 하지만 재미난 장난감이 보이면 돈이 없는 관계로 경단이 비위를 열심히 맟춰야 했다.경단이는 관념이 분명해서 동생에게는 사줄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안 되었다. 그리고 한 번 돈을 빌려주면
“우선 박원이랑 소홍천 의사부터 물어보자. 억지로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동안 그들이 날 많이 도와줬으니 전부 원하는 대로 하자고.” 우문호가 말했다.“그러자!” 원경릉이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 저녁 애들 데리고 어머님께 가서 수라를 들려면 빨리움직여야 해. 꾸물대면 늦을거야.”그러자 우문호도 계란이를 안고 일어섰다. “그래, 우리 황조모한테 가서 맘마 먹자.”우문호가 나가서 부르자 아이들이 달려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수라를 들러 황태후 전으로 갔다.황태후는 원래 우문호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식사 자리에 아이들이 있어서 기다렸다가 저녁을 다 먹은 뒤 우문호와 아이들이 나가서 놀고, 원경릉이 황태후와 얘기를 나눌 때 말을 꺼냈다.“천행이가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부마를 풍도성으로 보낼 수가 있지.. 공주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공주는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서, 이리 나리께서 풍도성에 가는 걸 지지하셨는걸요.”“말은 그렇게 해도, 출산 후에 여자 곁엔 남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이것도 단지 우리 가족끼리 하는 얘기일 뿐이고, 조정 일을 내가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노릇이지.”황태후는 이리 나리가 풍도성으로 간 진정한 목적을 전혀 몰랐으며, 단순히 어지러운 형국을 정리하러 갔다고만 알았기 때문에 순수하게 공주를 아끼는 마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어마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이리 나리는 이미 돌아오는 중이래요.” 원경릉이 위로하자 황태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거 잘됐네!”온 가족이 별빛을 받으며 천천히 소월궁을 거닐었다.계란이는 아빠 품에서 잠이 들었고, 아이들은 놀다 지쳐서 아빠 엄마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으며, 목여 태감이 궁인 둘을 데리고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가운데, 궁 안은 인적이 드물어 밤이 되자 상당히 고요했다.“어마마마께서 공주를 아끼셔서, 이리 나리가 하필 이때 풍도성에 보냈냐고 하셨어.” 원경릉이 말했다.“날 원망하셨어?” 우문호는 품에 있는 아이가 깰
늑대파 사람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질질 끌고 나가는데, 소여쌍은 여전히 미친사람처럼 웃어대기만 했다.이리봉청은 그들이 끌려 나가는 것을 보자, 눈앞에 안지여가 자신을 데리고 소여쌍의 침대 앞으로 가서 소여쌍의 그 악랄한 말을 듣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리여리하고 아름답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게 꿈처럼 느껴졌다.풍도성을 접수한 뒤 안풍 친왕은 관리들을 새롭게 임명했고, 더 이상 성주 같은 것을 두지 않고 조정과 이부에 적합한 인사를 선발해 풍도성 지부로 앉힐 것을 요청했다. 풍도성은 더 이상 이전의 독립 자치 지역이 아닌, 다른 주나 현과 마찬가지로 조정에 귀속되어 통일서 있게 다스리게 되었다.더불어 안풍 친왕은 별도로 서신을 써서 황제인 우문호에게 보냈는데, 풍도성을 추천하지만, 이건어디까지나 건의와 추천이니 황제가 생각하는 마땅한 사람이 있으면 안풍 친왕의 추천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동시에 안지여의 잔당들이 계속 나타났다.안풍 친왕이 이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려오고, 호랑이와 눈 늑대, 회색 늑대까지 출동시킨 건 바로 모든 세력을 강화하고, 신속하게 진압해 풍도성을 조정에 복귀시키고 보름 만에 비적을 토벌하며 기본적인 숙청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박원은 잔당의 남은 불씨가 다시 타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안풍 친왕의 영패를 가지고 부근에 5천 명의 군사를 파견시켜 풍도성을 지켰다. 이리 나리는 자금을 지원해 천문 세가의 묘를 이장하였는데, 이전 무덤은 안지여가 고른 곳으로 폐허에 가까워, 그는 천문 세가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았다.풍도성에 온지 거의 한 달가량 될 때쯤, 대군은 경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돌아가기 전에 미색이 안지여와 소여쌍을 보러 갔다가, 돼지우리에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그제야 비로소 맺혀 있던 한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미색은 이리 나리와 어머님에게 알리지 않은 것이, 두 사람은 이미 안지여가 누군지 잊은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리봉청에게 있어 모든 건 지나가지 않았고, 36년 전 일은 여전히 어제 일 같이 느껴졌다.“어머니, 그를 어떻게 처분하시겠어요?” 이리 나리는 이리봉청의 마음을 넘겨짚을 수 없어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은 어떠니?” 이리봉청이 다시 되묻자 이리 나리가 원한에 사무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게 처분하라고 하면 전 그를 죽여 버릴 겁니다.”이리봉청은 알았다며 대답만 했다가, 다시 30분쯤 걷다가 정자에 앉아 을 때 말을 덧붙였다. “난 안 죽일 거야.”이리 나리가 약간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또 마음이 약해지신 겁니까?”이리봉청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반대야. 그 인간을 죽이는 게 마음이 약해진 거지. 사실 며칠 동안 이전의 원한을 내려놓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봤는데,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인간을 백번이라도 죽이겠지만, 난 그럴 수 없더구나. 아들아, 게다가 오늘 천문 세가 대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더욱 마음을 굳혔단다.”이리봉청이 일어나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은 그녀의 가족들이 살아 원래 온통 사람 소리로 가득한 곳이였다. 그들의 웃던 광경이 눈앞에 비치는가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천문 세가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는데 멸문지화를 당했고, 가엾게도 그 중엔 아이들이 많아서 제일 어린아이는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었다.이리봉청의 얼굴에 눈물이 타고 흐르며 가슴이 미어졌다. “그자와 소여쌍을 밖에 내버리고 사람을 시켜 지켜보도록 해. 죽게 두지 말고 계속 살려둬. 36년은 더 살면서 이 세상의 고생을 모두 겪어야, 내 마음에 맺힌 한이 풀리고 억울한 망자들도 안식에 들지!”이리 나리는 온몸으로 그 마음이 느껴져, 어머니가 눈물 흘리는 것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네, 전부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안지여와 소여쌍은 버려졌다. 짧은 며칠 사이에 안지여는 의기양양하던 성주에서 시궁창 쥐로 변해, 사람들이
안지여는 풍도성 지하감옥에 갇혔다. 빛 한 줄기 없는 지하감옥에서 사방에 끝없는 어둠과 절망만이 안지여를 삼키고 있었다.훼천의 형벌은 12 시진 후면 사라져서, 앞으로 안지여는 그저 한 명의 폐인일 뿐이었다.안지여의 결사대가 성으로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 이리봉청은 오 선생을 찾아내 안지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고백하게 하고 안풍 친왕이 친필로 받아 적었다. 안지여가 당시 천문 세가를 해친 경위를 소상히 써 내려간 뒤, 오 선생과 안풍 친왕의 직인을 찍고 인쇄해서 대중에게 공개했다.안지여의 죄악은 하늘을 찔러 백성들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안지여의 결사대의 옛 부하들이 본래 성을 공격해 들어가 안지여를 구출할 계획을 세워놓았으나, 안지여의 죄상이 공포된 뒤로 많은 사람들이 해산하였다. 유일하게 무대장군만이 수천 명을 데리고 성으로 쳐들어왔지만, 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가 이미 대비해둔 덕분에, 경성에서 굴러온 돌이 무대장군의 박힌 돌을 빼내는 전투를 벌였다.풍도성에 온 지 7일째, 안풍 친왕은 풍도성을 접수하고 성에 살던 사람을 쫓아내며 서민으로 강등시켰다.안지여와 소여쌍에 대한 처분은 이리봉청에게 넘겼다.안지여는 캄캄한 지하감옥에서 6일을 지내는 동안, 처음엔 침착한 척 가장했으나 사흘째가 되자 울부짖으며 악독한 저주의 말을 내뱉더니, 나흘째가 되자 용서해달라고 애원하며 참회했다.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안지여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심지어 스스로 몫숨을 끊을 힘도 없었다.그 와중에 매일 누군가가 먹고 마시도록 해주고, 상처도 치료해 주어 살 수 있다는 부질없는 희망을 품게 했다.훼천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절망은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으로, 온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지만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안간힘을 쓴 뒤 다시 절망에 빠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사람을 한없이 죽였다 살렸다 괴롭힌다고 했다.결국 안지여를 죽일지 말지 여부는 이리봉청에게 달렸는데, 그녀는 안지여를 단번에 죽여 천문 세가
안지여의 이마에 파란 힘줄이 불끈불끈했으나 냉정을 가장했다. “내가 두려워할 줄 알았나 보지? 죽음도 두렵지 않은데 뭘 더 두려워하겠어?”“넌 두려울 것이야!” 이리봉청이 고개를 돌려 이리 나리를 보고 살짝 그의 팔을 잡았다. “내가 오는 길에 늑대파 사람이 그러던데, 천하에서 제일 잔혹한 형벌을 아는 사람이 늑대파에 있다고. 그게 사실인 것이냐?”이리 나리가 가볍게 답했다. “물론 사실이죠. 훼천이라고 합니다. 늑대골 출신이에요.”“안지여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 번 보고 싶구나.” 이리봉청이 말했다.이리 나리가 엄숙한 태도로 명을 내렸다. “훼천!”그러자 훼천이 급히 나왔다. “이리 나리, 분부하시지요!”이리 나리는 그가 짐짓 냉정한 척하고 있으나 눈빛이 조금씩 허물어져 가고, 몸까지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주 만족스러워 훼천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시작해!”안지여가 갑자기 큰 소리로 욕했다. “난 네 아버지거늘, 감히 나에게 손을 대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 같으니라고!”이리봉청이 이 말을 듣고 잠시 주저하는 눈빛으로 이리 나리를 바라봤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아버지는 오직 저를 키워주신 안풍 친왕뿐이십니다.”이리봉청이 살짝 안도했다. “저 인간이 단지 나만 해쳤으면 네 체면을 봐서 놔줬겠지만 천문 세가의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니 난 용서할 수 없구나.”“이리봉청, 너 언제 이렇게 악랄하게 변했어? 죽이려거든 그냥 죽여. 난 천문 세가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그들을 괴롭히진 않았어. 네가 날 죽이려거든 깨끗하게 단번에 죽여!”안지여가 크게 노해 몇 번 몸부림을 치다가 상처가 벌어지는 바람에 배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훼천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에 두려움이 깊어졌는데, 늑대골 출신 훼천은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뿜어져 나와 안지여를 덜덜 떨게 했다.“이리율!” 안풍 친왕비는 시ㅈ가하기 전에 이리 나리를 불렀다. “내가 여기서 네 엄마와 같이 있을 테니 넌 먼저 나가 있거라!”이리 나리가 안풍 친왕비에게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