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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4화

작가: 유애
저녁에 명원제가 건곤전에 문안하러 왔다. 그는 태상황의 상태가 전보다 호전된 것을 확인 한 후 돌아갔다. 원경릉은 명원제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줄곧 한 구석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명원제가 자리를 떠난 후, 상선은 늘 그래왔듯 자기 전 태상황의 몸을 정성스레 닦았고, 원경릉은 외전으로 자리를 피했다.

이 틈을 타 그녀는 자신에게 주사를 놓았다. 상처가 난지 꽤 되었기도 하고 계속해서 자극이 있었던지라 고름이 잡히려고 하는 것 같았다. 주사를 놓은 후, 그녀가 잠시 엎드려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녀의 목구멍에서는 비릿한 맛이 느껴졌으며 입술 사이로 핏물이 흘렀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 나무 아래에 피를 토하고는 나무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기위해 애썼다.

“왕비님, 왜그러십니까?” 등뒤로 상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경릉은 손을 저으며 “체한 것 같습니다. 별일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상선은 그녀의 안색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원경릉은 ‘왜 피를 토한거지’ 하는 의구심을 꾹 참고 궁으로 돌아갔다. 침상에 반쯤 걸터 앉은 태상황의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전보다 훨씬 좋아진 모습이었다.“태상황님, 주사를 맞으셔야 합니다.”원경릉이 말했다.

태상황은 팔을 걷어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인이 상전을 내보냈으니, 너는 네 일에만 집중하거라.”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태상황의 심장박동과 호흡을 확인해보았다. 호흡이 약간 불안정했다. 원경릉은 도파민을 꺼내 링거를 놓았다. 그녀는 설저환 한 병을 꺼내 태상황에게 주면서 “이 약은 응급시에 드셔야 합니다. 가슴이 아프거나 숨이 막히면 혀 아래에 넣으십시오” 라고 말했다. 태상황은 손을 내밀어 설저환을 한움큼 받았다. 잠시 후, 원경릉이 한손에 각양각색의 약을 한움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물을 가지고 왔다. 태상황은 조금 짜증나는 목소리로 “이게 다 뭐야?”라고 말했다.

“다 드셔야 할 약입니다.”원경릉이 약을 내밀었다. “안 먹는다!”태상황은 약의 색깔을 보고 거부감이 들었다. “반드시 드셔야 합니다.” 원경릉이 단호한 어투로 태상황에게 말했다. “이걸 드셔야 좋아지십니다. 이 약들은 쓰지도 않습니다.”

태상황은 내키지 않는 눈빛으로 원경릉을 보았다. “귀찮다!”라고 말하면서도 몇알을 집어 입에 넣자 원경릉이 물을 가져다 주었다. 태상황은 입에 들어온 약들을 씹기 시작했다. 한순간 그의 얼굴이 소금덩어리를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씹지 말고 삼키십시오!” 원경릉이 급히 물 잔을 내밀었다. 어찌 약을 씹어 삼킬 생각을 하지? 설마 이런 약들이 궁에는 없었나?

물 한잔을 다 마시고 나서야 입안에 쓴 맛이 사라졌다. 태상황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회복하기만 하면, 널 가만 안둘 것이야.” 원경릉은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네.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태상황의 저런말을 듣고 웃음이 나온다니 자신의 간이 배밖으로 나온건 아닌가 생각했다.

태상황은 자신의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중얼중얼 몇마디를 덧붙이고는 천천히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원경릉은 베개를 들어 그가 누울 수 있게 도왔다.

링거를 다 맞는데 한시간 정도가 걸렸을까 원경릉이 바늘과 링거 병을 정리하자마자 상선이 어의를 데리고 들어왔다. 상선은 원경릉에게 “태상황께서 잠이 드셨으니, 왕비는 외전에서 쉬고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오시지요.” 라고 말했다. 원경릉은 몹시 지친 상태였고, 태상황의 상태를 보니 오늘 밤은 별일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원경릉은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엎드려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잠이 깬 그녀는 조심스레 건곤전 안을 살폈다. 상선은 땅바닥에 앉아서 졸고 있었고, 태상황은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다시 외전으로 돌아온 그녀는 눈을 비비며 약을 한알 삼키고 다시 잠에 들었다.

날이 밝기도 전에 그녀는 심한 통증에 잠에서 깨었다. 피를 토하고 오장육부가 당기는 듯한 통증이 계속 되었다. 그녀는 소염제 몇 알을 되는대로 삼키고 통증이 완화되자마자 내전으로 들어갔다. 잠에서 깬 상선은 밖에 있는 궁인에게 따듯한 물을 길러오라고 하며, 길러오는 김에 원경릉이 쓸 물도 길러오라고 하였다. 원경릉은 궁인이 길러온 물로 세수를 하였다.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잠에서 깨어난 태상황을 상선이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낡이 밝자 태후가 문안을 하러 왔다. 원경릉은 자신의 양 볼을 치며 정신을 차리기위해 애썼다. 태후의 청색 비단 위에 만수무강 무늬가 새겨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하얀 얼굴이 참 깨끗해보였다. 태후 옆에는 주명취가 서있었다. 원경릉이 태후에게 예의를 차려 인사를 하는데 주명취가 그녀이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고생하셨어요. 초왕비.”

원경릉은 머리를 숙이고 그녀의 손을 쳐다보았다. 짙은 색깔의 넓은 소매 틈으로 하얀 두손이 드러났고 꽃무늬를 덧씌운 보호 장갑을 끼고 있었다. 손가락에도 반지 몇개가 끼워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바늘이나 면도날 처럼 날카로운 물건은 없었다. 하지만 오른쪽 장갑 새끼손가락 부근에 이상하게도 까슬까슬한 무언가가 있었다. 원경릉이 손을 빼면서 무의식적으로 그곳을 스쳤는데 차갑고 딱딱한 것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역시 주명취였구나!

밖에 있던 궁인들이 들어와 태상황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태상황님 초왕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상황은 상선의 손을 밀치며 “들라하게!” 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푸바오는? 푸바오를 데리고 와라”라고 했다. 이를 본 태후가 “짐승을 찾는걸 보니 많이 좋아지셨군요.” 라고 했다. 태상황은 얼굴을 찌푸리며 태후를 바라보았다. “짐승? 그 아이가 이름이 없느냐?” 태후는 침상 옆에 앉아서 수건을 들고 그의 얼굴과 귀밑을 닦으며 말했다. “있지요. 푸바오라고 하지 않습니까. 복이 들어오는 이름이지요.”

우문호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건곤전 안으로 들어섰다. 이전에는 주명취와 원경릉이 있으면 주명취에게만 눈을 돌렸던 그의 눈길이 오늘은 원경릉에게만 향했다. 그는 원경릉을 훑어보고는 태상황에게 다가가 문안을 드렸다.

주명취는 고개를 떨구고 한걸음 물러서 올라오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고 있었다. ‘우문호가 내게 눈길조차 안준단 말이야?’

“어찌 이리 이른 아침부터 입궐을 했는가?” 태상황이 초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었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손자. 황조부가 염려되어 왔습니다.” 우문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얼굴이었다. “과인은 괜찮다!” 태상황이 손자를 위로하듯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원제와 황후, 그리고 예친왕까지 도착했다. 원경릉은 한쪽으로 물러서 있었다. 주명취는 그녀 옆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명취는 온화한 얼굴로 원경릉에게 말했다.

“어제 밤 힘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원경릉은 대꾸하기 싫은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의가 탕약을 다려왔다. 태상황은 고개를 돌리며 화를 냈다. “가져가라! 과인은 마시지 않겠다!”

이를 본 사람들이 태상황을 아무리 설득해도 듣지 않았다. 명원제와 태후도 말을 거들었지만, 그는 입도 대지 않았다. 이를 본 태후는 걱정과 근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걸 보고 있던 원경릉이 태상황에게 말을 했다.

“황조부, 약은 반드시 드셔야합니다.”어찌 존재감이 없었는지 궁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가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할 뻔 했다. 명원제는 원경릉의 말에 태상황이 노할까 걱정하며, 못마땅한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 옆에 있던 주명취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술 사이로 피식 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참으로 어리석다. 태상황이 저리 노하셨것만. 태후도, 황제도 설득하지 못하는 마당에 네까짓 것의 말을 듣는다고? 일부로 이러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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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명취는 태상황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는 안심했다. ‘태상황이 초왕을 총애해서 초왕의 부인인 원경릉보고 병시중을 들라고 한 것이지, 원경릉은 그저 병수발이나 드는 한낱 궁인보다 못한 존재지’어의는 태상황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급히 약을 들고 나가려고 하였다. 태상황은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빨리 약을 가져오지 않는게냐! 방금 초왕비가 한 말을 못들은거냐!”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특히 주명취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원경릉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태상황이 어의가 준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이 좋아진 것을 알면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살 것을 원경릉은 알고 있었다. 명원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빨리 가져오거라!”명원제가 원경릉에게 온화한 눈길을 주었다. 태상황이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 약이 매우 써서 그의 얼굴이 한순간에 찌푸려졌다. 태후는 급히 약과를 하나 건내주었다. 약과를 입에 넣은 태상황의 얼굴이 조금 풀어지는 듯 했다.우문호는 복잡한 눈빛으로 원경릉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생각치도 못하게 황조부가 그녀의 말을 듣다니, 설마 그녀의 음모는 이미 실현된것인가?태상황이 약을 마시자 태후는 기뻐하며 원경릉을 칭찬하자 옆에 있던 예친왕까지 원경릉에게 칭찬을 했다. 황후는 웃고 있는 듯 했지만, 그 웃음이 왠지 어두웠다. 보아하니 주명취의 근심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명원제는 정사를 제치고, 태황상제를 보필하러 왔다. 태상황의 병이 호전됐다고 할지라고 어제 태상황이 임종 가까이 갔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단번에 마음을 놓지 못했다. 이런 마음을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명원제와 예친왕에게 모두 돌아가라고 했다. 명원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원경릉에게 말했다. “낮에는 오는 사람이 많으니, 이 틈에 넌 들어가서 잠을 보충하거라.”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몸을 숙이며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외전으로 향하는데 상선이 다가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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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의 왕비   제 27화

    우문호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냉랭한 얼굴로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황조부에게 무슨 약을 드린거야.”“심장마비나 호흡곤란에 쓰이는 약을 드렸습니다.”“누가 너에게 준거야?”“아무도 준 적이 없습니다. 모두 제것입니다.”“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은게 분명하군.” 우문호는 원경릉이 이럴거라는 것을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당신이야말로 내가 하는 말은 믿지 않는 군요.”우문호는 원경릉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약들이 원경릉에게 있다는 말인가. 그녀가 누군가에게서 약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그럼 나에게 주사한 독약은 무엇이냐? 어찌하여 내 의식을 잃게하고, 몸도 가눌 수 없게 한거지?”“그건 독약이 아니라. 마취제입니다. 마치 자금탕과 비슷한 것 입니다.”그 말은 들은 우문호는 차갑게 말했다. “자금탕은 독약이야.”원경릉은 그를 보며 “그럼 당신이 전에 나에게 독약을 먹인거네요.”우문호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침묵했다. 원경릉은 그의 침묵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됐어요. 독약이든 약이든 나는 신경 쓰지 않아요. 정 제가 거슬린다면 그냥 죽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살아있는 한 제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마세요. 적어도 제가 태상황을 치료하는 동안은 왕야께서 너그럽게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이전의 일들은 궁 밖을 나가면 차차 설명해드리겠습니다.”원경릉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만약 황조부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너의 행동에 책임을 물을 것이야.”우문호는 원경릉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원경릉은 날카로운 말투로 “그럼 태상황의 건강이 좋아진다면, 그때는 제 공로를 인정해 주실 건가요?” 우문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아, 본왕은 공과 사가 분명하다.”그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탁자에 단약을 놓았다. “나중에 희상궁보고 먹여달라고 하거라.” 우문호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원경릉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한다고? 퍽이나’그는 은혜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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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금단을 먹고 한시간 가량 잤을까. 깨어난 후 상처의 통증도 많이 줄고 고름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서 몇 걸음 걸어보았다. 확실히 통증이 줄었다는게 느껴졌다. 희상궁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깨어난 원경릉을 발견했다. “왕비 일어나셨으면 밖에 나와 좀 걷는게 어떠시겠습니까. 자금단을 먹고는 움직이셔야 활력이 생깁니다.” 원경릉은 알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갔다. “쇤네가 보필하겠습니다.”두 사람이 막 뜰을 지났을 때, 젊은 태감 한 명이 창백한 얼굴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왕비님, 초왕님께서 서둘러 건곤전으로 오시라 합니다.”희상궁이 그를 붙잡고 물었다. “무슨일이길래 그리 서두르느냐.”“푸바오가 문창탑에서 떨어져 죽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태상황이 아시고 쓰러지셨습니다. 지금 궁안이 아주 난장판입니다.” 태감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희상궁은 깜짝 놀랐다. 태상황은 푸바오를 가족처럼 생각하니 푸바오가 죽게되거나 무슨일이 생긴다면 태상황님은 틀림없이 큰 상실감에 빠지실 것이 뻔했다. 희상궁이 고개를 돌려 원경릉 쪽을 보았다. 원경릉은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이미 건곤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원경릉이 도착한 건곤전 안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황후와 주명취가 바닥에 앉아 있었고 우문호와 제왕은 침상 앞에 있었다. 어의의 손이 정신없이 태상황의 맥을 짚고 있었다. 명원제와 태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빠르게 우문호 쪽으로 걸어가 고개를 숙여 우문호 귓가에 몇 마디 속삭였다. 그녀는 우문호의 눈을 한번 본 뒤 다시 어의 쪽으로 다가갔다. “어의님, 황조부님은 어떠십니까?” 원경릉이 침상으로 걸어가더니 베개 밑에서 설저환을 꺼내 태상황 혀 밑에 넣었다. 원경릉은 황후와 주명취를 등지고 있었기에 그들은 방금 원경릉이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볼수 없었다. 하지만, 주명취는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로 원경릉을 주시했다. 사실 태상황은 별 일은 없었다. 단지 숨이 가빠져 호흡곤란에 빠졌을 뿐. 어의가 태상황에게 침을 놓자 태상

  • 명의 왕비   제 29화

    “푸바오……”우문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살릴 수 있어!” 원경릉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가 우문호 쪽으로 천을 한장 던졌다. 이건 방금 전 우문호가 그녀의 상처를 닦던 것이었다. “내가 비장을 꿰매고 있을테니까 당신은 지혈을 해줘요. 태상황께서 푸바오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알죠? 만약 푸바오가 죽는다면 태상황의 병세가 악화될지도 몰라요.” 우문호는 던져진 천을 주워들며 마스크를 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마스크를 낀 모습은 참으로 어색했다. 마취, 제모, 절개, 원경릉은 능수능란한 모습으로 신속하게 비장을 찾아냈다. “피를 닦으라니까!” 멀뚱거리는 우문호에게 원경릉이 소리쳤다. 정신을 차린 우문호는 천으로 절개 부분 주위를 닦아냈다. 그의 손에서는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우문호는 피를 닦으면서 생각했다. ‘이 여자는 이게 무섭지가 않은가?’여기 저기 튀는 피로 그녀의 얼굴, 이마, 눈썹 등 온통 피가 묻어있었다. “혈관이 터졌어요!” 원경릉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먼저 혈관을 봉합해야 해요.” 우문호는 자기도 모르게 천을 꺼내 그녀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그녀의 미간에 뭉친 피자국이 마치 큰 반점처럼 요사스러웠다.“고마워요.” 원경릉은 고개를 숙인채 말했다. 그녀는 혈관을 핀셋으로 살짝 잡고 빠르게 바늘로 봉합을 시작했다. 혈관을 봉합했지만 비장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원경릉의 마음이 급해졌다. “푸바오, 조금만 버텨. 넌 이겨낼 수 있어. 태상황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우문호는 자신이 개 한마리 때문에 이렇게 조마조마 하고 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하면 푸바오가 아프지 않을까?” 우문호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취제 투여했어!” 원경릉은 귀찮다는 듯 눈은 푸바오를 응시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우문호는 문득 자신도 예전에 이렇게 마취를 당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문호는 한겹 한겹 푸바오의 살갗을 꿰매고 있는 그녀의 능수능란한 손을 보며 마음 속에 또 수많은 의문이 생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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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경릉은 그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당신을 모함하려는 거죠? 당신이 문창탑 위에 있었나요?”우문호는 대꾸도 하지 않고 천천히 앉아 푸바오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 분노했다. “나를 모함하려고 했던 사람은 황조부를 해하고 나까지 쳐내려고 했네.” 라고 말하며 냉소를 띄었다. “태상황제가 살아 계시니 반드시 이 일에 대해 조사를 하실겁니다. 다만 제가 걱정이 되는 건 왕야께서 이 일에 관여했다고 생각하실거고 그렇게 된다면 태상황께서 실망하……”원경릉을 차마 마지막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말은 우문호가 다시는 태자 자리에 오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우문호는 한동안 말 없이 골똘히 생각을 했다. 그의 낯선 모습에 원경릉은 그를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였다. 이런 지저분한 사건에 그녀는 손톱만큼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문호가 관여된 자신도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문창탑에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었습니까?” 우문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주명취!” 원경릉이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그 입 다물라!” 우문호의 눈에는 분노가 일었다. “누가 너더러 함부로 입을 놀리라고 했느냐!” 원경릉은 그를 피해 푸바오 곁으로 자리를 옮겨 푸바오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왕야 서둘러 태상황 곁에 가 계십시오. 태상황이 깨어나시면 분명 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하실겁니다. 지금 가 계시는게 좋습니다.”우문호는 싸늘한 얼굴로 돌아섰다. 원경릉은 푸바오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가 푸바오를 해하려고 했다니. 원경릉은 머릿 속이 복잡했다. ‘푸바오가 안전하려면 태상황 곁에 있어야해’그녀는 푸바오를 이불에 싸서는 건곤전으로 향했다. 이번 일에 대해 태상황이 명을 내릴 것이다. 태상황은 푸바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푸바오는 높은 곳을 두려워했고, 계단을 내려갈 때에도 다리를 떨었다. 이런 푸바오의 성격 상 문창탑 같이 높은 곳에는 올라갈리가 만무했다. 깨어난 태상황은 이 일에 대해 철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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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에서 떨어진 푸바오와 자금단“그러면 왕야께서 문창탑(文昌塔)을 떠나실 때 푸바오가 따라 나왔습니까?” 구사가 물었다.우문호는 고개를 저으며, “그땐 신경을 안 써서 모르겠네.”“너는 태생이 명민하고, 아바마마가 푸바오를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정녕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명원제의 이 말은 정곡을 찔렀다. 옛날 우문호가 태상황의 환심을 사려고 강아지를 어르던 것을 기억하고 하는 말이다. 분위기가 일순간 얼어붙어 태후조차 당황할 정도였다.태후가 말하길: “됐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자식에게 화풀이해서 무엇 하겠느냐, 다섯째가 데려갔다 치더라도 어쨌든 다섯째가 개를 던진 건 아니니 않느냐, 다섯째와 푸바오 사이도 아직 좋고 말이다.”태후는 명원제의 마음에 다른 생각이 싹 트고 있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저 명원제가 중요한 걸 예사로 처리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고작 개 한 마리때문에 태상황의 비위를 맞추려고 취조를 하게 되면 이 많은 사람들 면전에서 다섯째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태후는 명원제가 말없이 얼굴빛이 어두운 것을 보고 태상황 쪽을 돌아보며: “태상황 폐하,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푸바오가 죽었어요. 푸바오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친왕에게 벌이라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태상황은 우문호를 보며, “네가 간 뒤에 또 누가 문창탑에 갔는냐?”우문호의 눈에 한 줄기 의심의 빛이 스쳤으나, “할바마마의 하문에 답하기로, 없었습니다.”원경릉은 안으로 들어오다 태상황의 질문과 우문호의 대답을 듣고, 문창탑에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우문호가 지키려는 사람이다. 원경릉은 둘러보니 주명취는 황후의 곁에 서 있다. 손을 늘어뜨리고 서서 우문호가 답하는 것을 듣고 분명 눈꼬리를 움찔거렸다. 상선은 눈이 예리해서 원경릉이 이불을 안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부자리가 푸바오의 것이며, 핏자국이 얼룩진 것이 심상치 않다고 여겼다. 초왕비는 또 무슨 일인가? 태상황

  • 명의 왕비   제 32화

    태상황과의 독대내전 사람은 전부 나가고 태상황이 상선을 마뜩찮게 쳐다본다. 어째 나무토막처럼 움직이지도 않나 그래? 즐기는 것도 없나?상선은 원망의 눈초리로 원경릉을 흘끔 쳐다봤다. 초왕비가 입궁한 이래 상선은 태상황 곁에 설자리가 없고 원경릉과 초왕이 푸다오를 살려내는 걸 지켜보고 있을 뿐이라니, 아니다, 푸념은 그만두자.상선이 문 밖을 지키는 궁인들을 내쫓자 내전은 일순간 조용해졌다.태상화은 원경릉을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푸바오 배에 있는 건 무엇이냐?”“….수…..수컷지네….인가봐요!” 원경릉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했다.방금 전 다른 사람들은 푸다오의 배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그것이, 푸다오의 전신이 피투성이였기 때문이다.오직 진정을 푸다오를 사랑하는 주인만은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이실직고 하지 못하겠느냐? 다섯째를 데려다 문초를 해야 사실을 말할테냐?” 태상황이 엄하게 꾸짖는다.초왕을 문초하는 게 원경릉이랑 무슨 상관인가? 솔직히 문초가 아니라 아예 곤장을 그냥, 삼십대 때려주면 딱 통쾌할 텐데 말이다.하지만 태상황이 준엄한 눈빛 앞에서 감히 그렇게 말할 순 없었다. “푸다오는 비장이 파열되어, 배를 열어 꿰매야 했습니다, 여기 보시는 것처럼 지네 같은 자국은 봉합한 자리입니다.”태상황은 입을 다물고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한 건지 묻고 싶지만 존엄한 체면상 물어보지도, 이런 치료 방식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자금단은 누가 먹었느냐?” 태상황이 물었다.원경릉은 “제가 먹었습니다.”“다섯째가 너한테 제법 하는구나.” 태상황은 고개를 끄덕였다.원경릉은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걸 이해해 주길 바란다. 걸핏하면 매질을 하고, 따귀를 갈겨 대는 게 제법 하는 거라고?“상처는 어쩌다 생긴 것이냐?” 태상황이 다시 물었다.이번엔 원경릉도 감히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어쩌다 넘어졌습니다.”“바른대로 입을 열지 않으면 매를 들 수 밖에, 아직 매가 모자란 모양이구나.” 태상황이 코웃음을 쳤

최신 챕터

  • 명의 왕비   제3205화

    량주는 금나라의 수도가 된 이후 지난 2년간 크게 발전했다. 또한,금나라와 북당이 우호적인 교류를 시작하면서, 북당 변방 도성의 백성들도 장사를 위해 많이 찾아왔다.이전에 택란도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위해 금나라에 왔었다. 하지만 그때의 량주는 지금처럼 북당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 택란은 객사에 머문 뒤 주 아가씨와 냉명여를 데리고 거리로 나가 량주의 풍습과 문화를 살폈다.여기도 어쨌든 금나라의 수도 아닌가!진국왕은 물러나기 전까지 나라를 잘 다스렸고, 특히 발전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야망이 지나친 탓에 늘 약도성을 되찾겠다고 욕심을 부렸다.그리고 동시에 북막을 두려워하기도 했다.경천이 즉위한 후, 광산 자원 개발 외에도, 그는 농경지와 산지를 개간하려고 노력했다. 금나라의 서북부에는 농사에 적합한 땅이 있었지만, 사람이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북당의 다른 도성을 본받아 사람들을 개간지로 보내고 그들에게 이익을 나누어주었다.나라가 상승세일 때, 그 분위기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백성의 긍정적인 에너지는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택란은 경천이 황제로서 매우 적합하다고 느꼈기에, 그가 이끄는 금나라는 분명 빠르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발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기에,그가 광산을 함께 개발하자는 제안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았다.택란은 이내 자신감을 얻었다. 궁에 들어가 알현하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량주 백성들이 북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과거, 약도성과 량주의 관계는 다소 안 좋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금나라가 약도성에 사람을 침투시켜 많은 폭동을 일으켰기에, 약도성 백성들도 그들을 매우 싫어했다.그렇기에 지난 2년간의 교류를 통해, 택란은 그들의 원한이 천천히 사라지기만을 바란 것이었다.이제 북당 쪽은 문제가 없으니, 량주 백성들의 생각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에, 택란은 물건을 사면서 점포 주인과 상인들에게 북당 약도성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곤 했다.그 중, 다

  • 명의 왕비   제3204화

    원경릉은 뒤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사식이가 정말 좋은 남자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서일이 비록 평범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마음과 눈에는 오직 사식이만 있었다.그야말로 진실한 남편이다.물건을 산 뒤, 서일은 계속 계산기를 두드리며, 여기서 쓴 금액을 북당으로 돌아가 황후에게 얼마만큼의 금으로 바꿔 드려야 할지 열심히 계산했다.계산을 마친 후, 지갑형편이 다소 여유롭다고 느껴지자, 그는 귀걸이와 금팔찌까지 더 구매했다. 이곳의 디자인은 북당보다 훨씬 아름다웠다.한편, 금나라에서는 완안경천이 혼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웃 나라 사신들도 연이어 축하해주기 위해 도착했다.택란은 냉명여와 주 아가씨를 데리고 량주로 갔는데, 그들이 량주성에 도착하자마자, 누군가가 경천 황제에게 보고했다."폐하, 초상화 속의 아가씨가 이미 도착하여 객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근처에서 감시 중이며, 가까이 다가가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경천 황제는 어서방에 앉아 이 보고를 들으며 눈매를 약간 올리고는, 온화하고 잘생긴 얼굴에 빛을 발했다. "그녀가 왔구나. 마침내 그녀가 왔다!""폐하, 바로 부를까요?""아니. 사람을 보내 그녀를 계속 감시하도록 하거라. 절대 그녀를 놓쳐서는 안 된다."경천 황제 또한 손끝이 떨릴 정도로 감격했다. 수많은 밤, 그는 초상화를 보며 멍하니 그녀가 살아있기를 바라고 또 바랬기 때문이다.그 초상화는 그가 직접 그린 것이었다. 원래 그는 서화에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화가의 그림이 그녀와 닮지 않아, 직접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었다.그렇게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그녀를 자신의 그림으로 완성했다.그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사람을 보내 북당에서 한 부녀를 데려왔다. 그 중 딸이 자신이 란이의 언니라고 주장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택란과 닮은 점이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 분위기도 전혀 닮지 않았다.친자매가 어찌 조금도 비슷한 부분이 없다는

  • 명의 왕비   제3203화

    원경릉은 병실로 돌아간 뒤, 서일을 따로 불러내서 물었다.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했던 탓에 서일이 어떻게 그 약을 가져왔는지, 약상자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두 번째 약은 어디서 꺼낸 것이냐?"원경릉이 약상자를 열며 묻자, 서일이 약상자 두 번째 칸을 가리켰다."이쪽이였습니다. 그 당시 약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주삿바늘에 뚜껑도 씌워져 있었습니다."원경릉은 약을 세 번째 칸에 넣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세 번째 칸은 자동으로 수축하는 구조여서, 사용하지 않는 약을 넣고 약상자를 닫는 순간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반면 두 번째 칸은 평소 사용하는 약으로 꽉 차 있어, 추가로 주사를 넣을 공간조차 없었다.게다가 약상자를 10년 넘게 사용해 온 그녀였기에, 약을 어디에 두는지 몸이 기억할 정도로 익숙했다. 그녀가 약을 잘못 넣었을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다. 설령 잘못 넣었다 하더라도, 약상자는 위험성을 자동으로 감지하는 기능이 있어, 그 약이 서일 앞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서일은 원경릉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우문호의 병세가 다시 악화한 줄로 착각하며 구석에 쪼그려 앉아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 참고 또 참아왔지만, 이제는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그가 울기 시작하자, 원경릉이 깜짝 놀라 물었다."왜 그래? 설마 또 무슨 약이라도 먹인 것이냐?""아닙니다..."서일은 빨개진 눈에 머리도 헝클어진 채로 원경릉을 바라보며 처량하게 말했다."마마, 폐하께서 아직 낫지 않은 것입니까? 혹시 제가 폐하를 죽게 만든 것입니까?"원경릉은 웃음을 터뜨리며, 서일의 반응 속도가 정말로 느리다고 생각했다."그런 소리 하지 말거라. 그런 일 없다. 그저 사실을 알아보는 것뿐이니, 괜히 걱정하지 말거라. 다섯째도 아주 좋아졌다. 단지 조금 더 검사가 필요할 뿐이다."서일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녀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서일은 우문호에게 가서 울며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 뻔했다.

  • 명의 왕비   제3202화

    "다섯째가 예전에 물을 다스리는 술법을 아는 사람한테서 편지를 받은 적 있는데, 혹시 그 편지에 얼음 벌레가 묻어 있었던 건 아닐까요? 그 벌레가 다섯째 몸에 숨어있다가, 수영 후 뭔가에 물려서 생긴 미세한 상처를 통해 몸속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어요.""네,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에요!""그리고 요즘 다섯째가 일이 너무 바빠 밤낮없이 일한 탓에 몸 상태도 좋지 않았어요. 면역력이 떨어지고, 폐렴에 비까지 맞아 고열이 났던 데다가, LR까지 잘못 사용했으니..."원경릉은 멈칫하다 약상자를 꺼내고는, 겹겹이 쌓인 약상자 안의 디자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왜 그래요?"양여혜가 그녀가 멍하니 있는 걸 보고 물었다.원경릉은 폐 치료제를 꺼냈는데, 지금은 쓸 필요가 없는 약이라 다시 약을 넣고 상자를 닫았다. 그리고 다시 열어보니, 그 약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정말 이상하네요. 제 약상자는 제 통제 외에도 자율적으로 작동이 가능해요. 약을 꺼낸 후 사용하지 않거나, 약상자가 스스로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경우 맨 아래 칸으로 내려가요. 그리고 상자를 다시 열어서 직접 꺼내야만 나타나죠. 방금 그 약도 그랬는데, 예전에 제가 LR를 실험용 쥐에게 주사하려고 꺼냈다가 서일이 오는 바람에 약을 다시 넣었거든요? 그럼, 그 약은 원래대로라면 맨 아래 칸으로 내려갔어야 해요. 그런데 서일이 다섯째에게 주사할 때, LR를 바로 꺼냈는데, LR이 내려가지 않았어요."양여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상자는 확실히 프로그램으로 제어되고 위험성이 높은 약은 자동으로 내려가는 방식이니, 쉽게 꺼낼 수 없어요. 그래서 우문호 씨를 데려와, 시위가 약을 주사했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급한 상황이라 묻지 않았어요. 그런데 원경릉씨 말을 들으니, 더 신기하네요. 약상자가 이렇게 통제가 불가능하게 된 적이 있었나요?""아니요.""그렇다면 위험한 약은 직접 꺼내야 하거나 본인이 자리에 있어야만 보일 수 있는 거네요?"원경릉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 명의 왕비   제3201화

    밤늦게 연구소에 돌아오자마자 양여혜는 곧바로 원경릉을 사무실로 끌고 들어갔다.“오늘 저도 함께 바닷가에 갔었는데, 우문호 씨의 특별함을 알아차리셨나요?”“혹시… 파도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건가요?”원경릉은 단번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맞아요. 오늘 바람이 그렇게 세지 않아서 큰 파도가 일어날 리가 없어요. 게다가 파도가 일던 순간, 주변에 지나가는 배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 파도는 갑자기 생겨난 거예요!”원경릉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죠?”“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혹시 물을 다스리는 술법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원경릉은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들어본 적 있어요.”하지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이 힘은 유전자의 돌연변이에서 비롯된 겁니다. 이 능력은 물에 굉장히 민감해요. 마치 약이 병에 민감한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이 능력은 물과 독특한 자기장이 형성돼서, 이 힘을 쓸 때 공기가 진동하면서 물이 그 힘을 따라 움직이게 돼요. 우리 연구소에서도 한 전문가가 이것에 대해 연구한 적 있어요. 결과가 나왔는데, 한번 볼래요?”“좋아요, 보여주세요!”양여혜가 즉시 컴퓨터에서 관련 문서를 열어 보여주자, 원경릉은 자리에 앉아 마우스를 잡고 천천히 결론 보고서를 읽어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했다.“인간이 어떻게 이런 힘을 통제할 수 있는 거죠? 여기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네요. 단지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고요.”양여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관찰 사례가 아직 부족하니까요.”원경릉은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졌다.“그럼, 혹시 제 남편을 연구하려는 건가요?”“LR 연구에 문제가 있으니, 그건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당신 남편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보는 게 어때요?”원경릉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안 된다고 할 수 없겠네요. 제가 항상 그를 지켜보니깐요.”“사실 물을 다스리는 기술을 아는 사람은 몇몇 더 있어요. 도교의 수행자들

  • 명의 왕비   제3200화

    우문호는 바다 위를 질주하며 속도와 스릴을 만끽하고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바람이 약해 큰 파도가 일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큰 파도 하나 오거라!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고 싶구나!”반면, 서일은 조금 멀미가 나는 듯해 우문호의 말을 듣고 답답한 듯 말했다.“큰 파도는 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신은 무서울 따름입니다.”하지만 서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파도가 일렁이며 다가왔다! 우문호는 제트스키를 타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신나서 소리쳤다.“가자!”제트스키가 파도를 넘어 멀리 떨어지자, 그가 흥분해하며 크게 외쳤다.“다시 한번! 또 오거라!”이내 또 파도가 일렁이며 다가왔고, 그는 파도를 향해 돌진했다. 제트스키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물에 떨어지자 우문호는 짜릿함을 만끽한듯 행복해했다.서일은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물에 빠져 죽을 것만 같은 느낌에 그는 몸을 덜덜 떨며 말했다.“폐하, 이제 돌아가시지요. 정말 겁이 나서 죽을 것 같습니다!”“겁쟁이 같으니라고!”우문호는 여전히 즐거운 표정으로 외쳤다.“조금만 더! 이번엔 연달아 파도가 오면 좋겠구나. 그래야 진짜 재밌다!”역시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다에서 연달아 거대한 파도가 밀려왔다. 우문호는 기쁨에 겨워 서일에게 말했다.“봐라, 온다, 온다! 단단히 잡아라. 물에 빠지면 널 구하지 않을 거다.”서일은 파도가 연달아 밀려오는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우문호를 꽉 끌어안으며 아미타불만 중얼거렸다. 자신이 잘못이 있다고 하여도 바다를 제일 싫어하기에, 바다에 빠져 죽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해변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원경릉은 파도가 하나둘씩 우문호에게 몰려가는 것을 보고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아까까지만 해도 잔잔했는데, 왜 갑자기 파도가 치는 것이지?바람도 강하지 않은데 말이다.그녀는 걱정되는 마음에 우문호를 향해 소리쳤다.“그만 놀고 어서 돌아오시오!”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에

  • 명의 왕비   제3199화

    양여혜는 급히 전문가 팀을 호출하고, 이전에 LR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사람들도 함께 불러 모았다.하지만 현재 데이터로는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고, 우문호가 계속해서 검사받아야 한다는 결론만 나왔다.그래서 원경릉은 우문호에게 문제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확실히 확인하자며, 이곳에 며칠 더 머물도록 설득했다. 우문호가 바로 동의하긴 했지만, 원경릉과 함께 밖에 나가 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도 어쩌다 이곳으로 왔으니,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어하는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부모님과 휘종제를 뵈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원경릉은 연구소를 떠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했지만, 우문호가 그리 협조적이지 않자, 결국 양여혜와 상의해 하루만 외출하고 돌아와 검사를 계속 받기로 했다.양여혜가 말했다."그럼 가세요. 제가 멀리서 따라가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게요""수고 많으세요."원경릉이 답했다."어쩔 수 없죠. 그의 안전을 확실히 해야 하니까요."양여혜가 말했다.그녀는 잠시 멈칫하다, 원경릉을 위로했다."상태도 좋아 보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네, 괜찮을 거예요."원경릉도 최대한 낙관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양여혜는 그들에게 차를 준비해 준 후, 집에 있는 부모님을 잠시 들러서 보게 했다.원경릉의 부모님은 이미 퇴직했지만, 다시 병원으로 불려 가, 주 3일 진료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만큼 바쁘지는 않았다.그들은 내년 계약이 끝난 후, 세계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다. 그리고 손자를 보기 위해 딸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한동안 지낼 생각이었다.사위와 딸이 돌아오자, 그들은 아주 기뻐하며 식사를 준비했다. 원경릉과 우문호가 바쁜 일정 속에서 시간을 낸 거라, 반나절만 들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마음이 아팠다."앞으로는 바빠도 이렇게 급히 돌아오지는 말거라. 식사도 편히 못 하고, 차라리 집에서 푹 쉬어. 우리가 후년에 찾아가마."우문호는 이미 그들을 자기 부모처럼 여겼고, 그들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느끼며 답했다."비록

  • 명의 왕비   제3198화

    원경릉은 결국 그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이틀만 더 있지요. 혈액 검사를 한 번 더 해야 하고, 골수를 뽑아 상처도 아프지 않소?"“이미 다 나았네. 만져도 아무 느낌이 없소!”우문호는 당당하게 셔츠를 걷어 올려 상처를 보여줬다. 상처 위에는 아직 의료용 밴드가 붙어 있었기에, 원경릉은 될수록 물에 닿지 않게 그의 몸을 조심히 닦아주었다.“상처에 약을 발라야 하오.”원경릉이 말했다.그렇게 손을 뻗어 밴드를 찢었는데, 순간 화들짝 놀랐다. 상처가 거의 회복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제 밴드 갈 때는 약간의 피가 고여 있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나았다니…?“이렇게나 빨리 나았습니까?”서일도 다가가서 살펴보며 매우 놀라워했다.우문호는 골수를 뽑고 나서, 상처가 아프다고 했는데, 서일은 그의 몸에 작은 구멍이 생긴 것을 보고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그래. 많이 나았다. 이번에 앓고 나니, 오히려 예전보다 정신이 더 맑아 졌다. 서일아, 내 머리 옆에 있던 흰머리도 사라지지 않았느냐?”우문호는 머리를 숙여서 서일이 볼 수 있게 했다.서일은 그의 머리카락을 자세히 살펴본 후, 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흰머리뿐만 아니라, 눈가 주름도 없어졌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폐하, 어찌 더 젊어진 것 같습니다. 아닙니까, 마마?”서일의 말을 들은 원경릉은 깜짝 놀라, 우문호를 자세히 살폈다. 그의 피부는 훨씬 더 맑아 졌다. 하지만 병을 앓고 나서 햇빛을 거의 보지 않아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흰머리는 사실 뽑으면 그만이었다. 눈가 주름은 확실히 없어졌고, 피부의 탄력도 예전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예전에는 그가 30대 중반이었다고 느껴졌지만, 지금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맑은 눈빛과 깔끔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잘생긴 미남이었다.우문호는 거울을 보곤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급히 원경릉을 끌어당겨 조용히 물었다.“혹시 휘종제처럼 그런 것을 한 것이오? 리프팅?”“무슨 소리요?”원경릉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웃음도 섞인 말을 했다.“어찌

  • 명의 왕비   제3197화

    다음 날 아침, 우문호는 골수 검사를 마친 후, 전신 검사를 진행했다.검사팀은 야근까지 하며 최대한 결과를 빨리 얻으려 노력했다.그동안 원경릉은 우문호가 걱정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문호는 어차피 건강을 회복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검사가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일과 함께 겨룰 수 있을 정도로 몸을 회복했기에 더 이상 문제가 없다고 믿어 마음을 놓고 서일과 함께 패드로 드라마를 시청했다.결과가 나오자마자, 양여혜는 바로 원경릉을 불렀다.“골수의 유전자 검사 결과… 돌연변이가 발견됐어요. 외부 자극이 아닌, 자가 자연 돌연변이에요. 또한, 발가락에 있는 그 덩어리, 조직을 채취해 검사한 결과, 일종의 얼음 벌레와 비슷한 형태였어요. 이 얼음 벌레는 과거 사람 몸에서 발견된 적도 있어요.”“얼음 벌레? 그게 뭐죠?”원경릉은 조금 혼란스러웠다.“하지만 이전엔… 그 덩어리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요?”“처음엔 발견되지 않았죠. 하지만 주진 씨가 조직을 채취해 검사를 해보니, 그 얼음 벌레와 비슷한 결과가 나왔어요. 생명력이 굉장히 강하고 벌레라고는 하지만 사실 세균이죠. 이 얼음 벌레가 어떻게 번식하는지, 혹은 이 얼음 벌레가 그의 혈액 생성 기능에 영향을 주어 혈소판 수치를 낮추었는지는 아직 모르고, 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해요. 그래서 우리는 이 얼음 벌레 세균을 배양해서 더 나은 발견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그 후에가 되서야 어떻게 억제하는지, 죽일 수 있을지 알게 될 거예요.”“이 얼음 벌레는 얼음 속에서 사는 건가요? 하지만 그가 물린 곳은 호수였잖아요.”“아니요, 이 얼음 벌레는 처음 발견된 곳은 얼음 속이었지만, 여러 곳에서 살거나 휴면 상태로 있을 수 있어요.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기회를 엿보죠. 예를 들어 손으로 얼음 벌레를 만지거나, 작은 상처로 침투할 수 있죠. 하지만 이 얼음 벌레에 대한 많은 정보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어요. 우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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