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명원제가 건곤전에 문안하러 왔다. 그는 태상황의 상태가 전보다 호전된 것을 확인 한 후 돌아갔다. 원경릉은 명원제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줄곧 한 구석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명원제가 자리를 떠난 후, 상선은 늘 그래왔듯 자기 전 태상황의 몸을 정성스레 닦았고, 원경릉은 외전으로 자리를 피했다. 이 틈을 타 그녀는 자신에게 주사를 놓았다. 상처가 난지 꽤 되었기도 하고 계속해서 자극이 있었던지라 고름이 잡히려고 하는 것 같았다. 주사를 놓은 후, 그녀가 잠시 엎드려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녀의 목구멍에서는 비릿한 맛이 느껴졌으며 입술 사이로 핏물이 흘렀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 나무 아래에 피를 토하고는 나무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기위해 애썼다.“왕비님, 왜그러십니까?” 등뒤로 상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경릉은 손을 저으며 “체한 것 같습니다. 별일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상선은 그녀의 안색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원경릉은 ‘왜 피를 토한거지’ 하는 의구심을 꾹 참고 궁으로 돌아갔다. 침상에 반쯤 걸터 앉은 태상황의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전보다 훨씬 좋아진 모습이었다.“태상황님, 주사를 맞으셔야 합니다.”원경릉이 말했다. 태상황은 팔을 걷어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인이 상전을 내보냈으니, 너는 네 일에만 집중하거라.”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태상황의 심장박동과 호흡을 확인해보았다. 호흡이 약간 불안정했다. 원경릉은 도파민을 꺼내 링거를 놓았다. 그녀는 설저환 한 병을 꺼내 태상황에게 주면서 “이 약은 응급시에 드셔야 합니다. 가슴이 아프거나 숨이 막히면 혀 아래에 넣으십시오” 라고 말했다. 태상황은 손을 내밀어 설저환을 한움큼 받았다. 잠시 후, 원경릉이 한손에 각양각색의 약을 한움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물을 가지고 왔다. 태상황은 조금 짜증나는 목소리로 “이게 다 뭐야?”라고 말했다. “다 드
주명취는 태상황의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는 안심했다. ‘태상황이 초왕을 총애해서 초왕의 부인인 원경릉보고 병시중을 들라고 한 것이지, 원경릉은 그저 병수발이나 드는 한낱 궁인보다 못한 존재지’어의는 태상황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급히 약을 들고 나가려고 하였다. 태상황은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빨리 약을 가져오지 않는게냐! 방금 초왕비가 한 말을 못들은거냐!”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특히 주명취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원경릉은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태상황이 어의가 준 약을 먹지 않고도 병이 좋아진 것을 알면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살 것을 원경릉은 알고 있었다. 명원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빨리 가져오거라!”명원제가 원경릉에게 온화한 눈길을 주었다. 태상황이 단숨에 약을 들이켰다. 약이 매우 써서 그의 얼굴이 한순간에 찌푸려졌다. 태후는 급히 약과를 하나 건내주었다. 약과를 입에 넣은 태상황의 얼굴이 조금 풀어지는 듯 했다.우문호는 복잡한 눈빛으로 원경릉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생각치도 못하게 황조부가 그녀의 말을 듣다니, 설마 그녀의 음모는 이미 실현된것인가?태상황이 약을 마시자 태후는 기뻐하며 원경릉을 칭찬하자 옆에 있던 예친왕까지 원경릉에게 칭찬을 했다. 황후는 웃고 있는 듯 했지만, 그 웃음이 왠지 어두웠다. 보아하니 주명취의 근심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명원제는 정사를 제치고, 태황상제를 보필하러 왔다. 태상황의 병이 호전됐다고 할지라고 어제 태상황이 임종 가까이 갔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단번에 마음을 놓지 못했다. 이런 마음을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명원제와 예친왕에게 모두 돌아가라고 했다. 명원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원경릉에게 말했다. “낮에는 오는 사람이 많으니, 이 틈에 넌 들어가서 잠을 보충하거라.”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몸을 숙이며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외전으로 향하는데 상선이 다가와 원
우문호의 마음이 요동쳤다. 죽어도 초왕비는 하지 않겠다니 기가 막혔다. 우문호는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는 그녀의 뺨을 내리치며“일어나서 똑바로 말해!” 라고 말했다.희상궁은 화가 나서 원경릉의 몸을 감쌌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이오, 왕야! 어째 이렇게 모질게 변했소! 부부의 정은 고사하고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고해도 이렇게는 못하겠소! 초왕비를 꼴을 보시오. 한치의 동정심도 없습니까?”우문호는 창백한 얼굴의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지만 그 눈빛에서 강한 의지와 고집이 보였다. 결국 그는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 밖으로 나갔다. 측전 밖 회화나무 아래에 서서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보니 마음속에도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초왕!”뒤에서 제왕비 주명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문호는 표정을 가다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툇마루 앞에 서 있었다. 치맛자락이 뒤로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 선녀가 강림한 듯 기품 있어보였다.그녀의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잃었다. 소꿉친구였던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자 우문호의 마음 한켠에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다. 주명취는 우문호의 어두운 눈빛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주명취는 그의 눈빛에서 그는 자신을 잊을 수 없다는 확신에 어딘가 의기양양한 기분도 들었다.“지금 태상황의 병세가 호전되었고, 부황께서 당신을 대하는 태도도 바뀌셨으니, 제가 더 기쁩니다!” 그녀는 눈을 번뜩이며 우문호에게 말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우문호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우문호는 눈꺼풀을 내리며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그냥 살아가는거죠”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주명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좋을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살아가는 거죠. 전 그저…… 제가 염려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 입니다.”우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뭐가 두렵습니까?”주명취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엔
우문호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는 냉랭한 얼굴로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황조부에게 무슨 약을 드린거야.”“심장마비나 호흡곤란에 쓰이는 약을 드렸습니다.”“누가 너에게 준거야?”“아무도 준 적이 없습니다. 모두 제것입니다.”“진실을 말하고 싶지 않은게 분명하군.” 우문호는 원경릉이 이럴거라는 것을 예상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당신이야말로 내가 하는 말은 믿지 않는 군요.”우문호는 원경릉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약들이 원경릉에게 있다는 말인가. 그녀가 누군가에게서 약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그럼 나에게 주사한 독약은 무엇이냐? 어찌하여 내 의식을 잃게하고, 몸도 가눌 수 없게 한거지?”“그건 독약이 아니라. 마취제입니다. 마치 자금탕과 비슷한 것 입니다.”그 말은 들은 우문호는 차갑게 말했다. “자금탕은 독약이야.”원경릉은 그를 보며 “그럼 당신이 전에 나에게 독약을 먹인거네요.”우문호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침묵했다. 원경릉은 그의 침묵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됐어요. 독약이든 약이든 나는 신경 쓰지 않아요. 정 제가 거슬린다면 그냥 죽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살아있는 한 제가 하는 일을 방해하지 마세요. 적어도 제가 태상황을 치료하는 동안은 왕야께서 너그럽게 이해해주길 바랍니다. 이전의 일들은 궁 밖을 나가면 차차 설명해드리겠습니다.”원경릉은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만약 황조부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너의 행동에 책임을 물을 것이야.”우문호는 원경릉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원경릉은 날카로운 말투로 “그럼 태상황의 건강이 좋아진다면, 그때는 제 공로를 인정해 주실 건가요?” 우문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아, 본왕은 공과 사가 분명하다.”그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탁자에 단약을 놓았다. “나중에 희상궁보고 먹여달라고 하거라.” 우문호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원경릉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과 사를 분명히 한다고? 퍽이나’그는 은혜는 나
자금단을 먹고 한시간 가량 잤을까. 깨어난 후 상처의 통증도 많이 줄고 고름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서 몇 걸음 걸어보았다. 확실히 통증이 줄었다는게 느껴졌다. 희상궁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깨어난 원경릉을 발견했다. “왕비 일어나셨으면 밖에 나와 좀 걷는게 어떠시겠습니까. 자금단을 먹고는 움직이셔야 활력이 생깁니다.” 원경릉은 알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갔다. “쇤네가 보필하겠습니다.”두 사람이 막 뜰을 지났을 때, 젊은 태감 한 명이 창백한 얼굴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왕비님, 초왕님께서 서둘러 건곤전으로 오시라 합니다.”희상궁이 그를 붙잡고 물었다. “무슨일이길래 그리 서두르느냐.”“푸바오가 문창탑에서 떨어져 죽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태상황이 아시고 쓰러지셨습니다. 지금 궁안이 아주 난장판입니다.” 태감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희상궁은 깜짝 놀랐다. 태상황은 푸바오를 가족처럼 생각하니 푸바오가 죽게되거나 무슨일이 생긴다면 태상황님은 틀림없이 큰 상실감에 빠지실 것이 뻔했다. 희상궁이 고개를 돌려 원경릉 쪽을 보았다. 원경릉은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이미 건곤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원경릉이 도착한 건곤전 안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황후와 주명취가 바닥에 앉아 있었고 우문호와 제왕은 침상 앞에 있었다. 어의의 손이 정신없이 태상황의 맥을 짚고 있었다. 명원제와 태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빠르게 우문호 쪽으로 걸어가 고개를 숙여 우문호 귓가에 몇 마디 속삭였다. 그녀는 우문호의 눈을 한번 본 뒤 다시 어의 쪽으로 다가갔다. “어의님, 황조부님은 어떠십니까?” 원경릉이 침상으로 걸어가더니 베개 밑에서 설저환을 꺼내 태상황 혀 밑에 넣었다. 원경릉은 황후와 주명취를 등지고 있었기에 그들은 방금 원경릉이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 볼수 없었다. 하지만, 주명취는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로 원경릉을 주시했다. 사실 태상황은 별 일은 없었다. 단지 숨이 가빠져 호흡곤란에 빠졌을 뿐. 어의가 태상황에게 침을 놓자 태상
“푸바오……”우문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살릴 수 있어!” 원경릉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녀가 우문호 쪽으로 천을 한장 던졌다. 이건 방금 전 우문호가 그녀의 상처를 닦던 것이었다. “내가 비장을 꿰매고 있을테니까 당신은 지혈을 해줘요. 태상황께서 푸바오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알죠? 만약 푸바오가 죽는다면 태상황의 병세가 악화될지도 몰라요.” 우문호는 던져진 천을 주워들며 마스크를 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마스크를 낀 모습은 참으로 어색했다. 마취, 제모, 절개, 원경릉은 능수능란한 모습으로 신속하게 비장을 찾아냈다. “피를 닦으라니까!” 멀뚱거리는 우문호에게 원경릉이 소리쳤다. 정신을 차린 우문호는 천으로 절개 부분 주위를 닦아냈다. 그의 손에서는 피 비린내가 진동했다. 우문호는 피를 닦으면서 생각했다. ‘이 여자는 이게 무섭지가 않은가?’여기 저기 튀는 피로 그녀의 얼굴, 이마, 눈썹 등 온통 피가 묻어있었다. “혈관이 터졌어요!” 원경릉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먼저 혈관을 봉합해야 해요.” 우문호는 자기도 모르게 천을 꺼내 그녀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그녀의 미간에 뭉친 피자국이 마치 큰 반점처럼 요사스러웠다.“고마워요.” 원경릉은 고개를 숙인채 말했다. 그녀는 혈관을 핀셋으로 살짝 잡고 빠르게 바늘로 봉합을 시작했다. 혈관을 봉합했지만 비장 출혈은 멈추지 않았다. 원경릉의 마음이 급해졌다. “푸바오, 조금만 버텨. 넌 이겨낼 수 있어. 태상황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우문호는 자신이 개 한마리 때문에 이렇게 조마조마 하고 있다는 것에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하면 푸바오가 아프지 않을까?” 우문호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취제 투여했어!” 원경릉은 귀찮다는 듯 눈은 푸바오를 응시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우문호는 문득 자신도 예전에 이렇게 마취를 당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문호는 한겹 한겹 푸바오의 살갗을 꿰매고 있는 그녀의 능수능란한 손을 보며 마음 속에 또 수많은 의문이 생겼
원경릉은 그의 표정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당신을 모함하려는 거죠? 당신이 문창탑 위에 있었나요?”우문호는 대꾸도 하지 않고 천천히 앉아 푸바오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 분노했다. “나를 모함하려고 했던 사람은 황조부를 해하고 나까지 쳐내려고 했네.” 라고 말하며 냉소를 띄었다. “태상황제가 살아 계시니 반드시 이 일에 대해 조사를 하실겁니다. 다만 제가 걱정이 되는 건 왕야께서 이 일에 관여했다고 생각하실거고 그렇게 된다면 태상황께서 실망하……”원경릉을 차마 마지막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 말은 우문호가 다시는 태자 자리에 오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우문호는 한동안 말 없이 골똘히 생각을 했다. 그의 낯선 모습에 원경릉은 그를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였다. 이런 지저분한 사건에 그녀는 손톱만큼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문호가 관여된 자신도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문창탑에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었습니까?” 우문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주명취!” 원경릉이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그 입 다물라!” 우문호의 눈에는 분노가 일었다. “누가 너더러 함부로 입을 놀리라고 했느냐!” 원경릉은 그를 피해 푸바오 곁으로 자리를 옮겨 푸바오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왕야 서둘러 태상황 곁에 가 계십시오. 태상황이 깨어나시면 분명 이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하실겁니다. 지금 가 계시는게 좋습니다.”우문호는 싸늘한 얼굴로 돌아섰다. 원경릉은 푸바오를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가 푸바오를 해하려고 했다니. 원경릉은 머릿 속이 복잡했다. ‘푸바오가 안전하려면 태상황 곁에 있어야해’그녀는 푸바오를 이불에 싸서는 건곤전으로 향했다. 이번 일에 대해 태상황이 명을 내릴 것이다. 태상황은 푸바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푸바오는 높은 곳을 두려워했고, 계단을 내려갈 때에도 다리를 떨었다. 이런 푸바오의 성격 상 문창탑 같이 높은 곳에는 올라갈리가 만무했다. 깨어난 태상황은 이 일에 대해 철저하게
탑에서 떨어진 푸바오와 자금단“그러면 왕야께서 문창탑(文昌塔)을 떠나실 때 푸바오가 따라 나왔습니까?” 구사가 물었다.우문호는 고개를 저으며, “그땐 신경을 안 써서 모르겠네.”“너는 태생이 명민하고, 아바마마가 푸바오를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정녕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명원제의 이 말은 정곡을 찔렀다. 옛날 우문호가 태상황의 환심을 사려고 강아지를 어르던 것을 기억하고 하는 말이다. 분위기가 일순간 얼어붙어 태후조차 당황할 정도였다.태후가 말하길: “됐다, 개 한 마리 때문에 자식에게 화풀이해서 무엇 하겠느냐, 다섯째가 데려갔다 치더라도 어쨌든 다섯째가 개를 던진 건 아니니 않느냐, 다섯째와 푸바오 사이도 아직 좋고 말이다.”태후는 명원제의 마음에 다른 생각이 싹 트고 있는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저 명원제가 중요한 걸 예사로 처리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고작 개 한 마리때문에 태상황의 비위를 맞추려고 취조를 하게 되면 이 많은 사람들 면전에서 다섯째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태후는 명원제가 말없이 얼굴빛이 어두운 것을 보고 태상황 쪽을 돌아보며: “태상황 폐하,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푸바오가 죽었어요. 푸바오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친왕에게 벌이라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태상황은 우문호를 보며, “네가 간 뒤에 또 누가 문창탑에 갔는냐?”우문호의 눈에 한 줄기 의심의 빛이 스쳤으나, “할바마마의 하문에 답하기로, 없었습니다.”원경릉은 안으로 들어오다 태상황의 질문과 우문호의 대답을 듣고, 문창탑에 다른 사람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우문호가 지키려는 사람이다. 원경릉은 둘러보니 주명취는 황후의 곁에 서 있다. 손을 늘어뜨리고 서서 우문호가 답하는 것을 듣고 분명 눈꼬리를 움찔거렸다. 상선은 눈이 예리해서 원경릉이 이불을 안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이부자리가 푸바오의 것이며, 핏자국이 얼룩진 것이 심상치 않다고 여겼다. 초왕비는 또 무슨 일인가? 태상황
장 선생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목이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자, 모두 조용! 오늘 너희들한테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하려고 한다. 이번 기초 시험 평가에서 우리 반 학생이 무려 전교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뒀다. 전 과목 만점, 우리 성화 고등학교 개교 이래 처음 만점을 받은 학생이다!"조용히 수군거리던 학생들은 순간 정적에 휩싸이며 놀란 눈으로 장 선생을 바라보았다.학생들은 그의 말이 장난이라 생각했다. 설령 만점을 받을 사람이 있다고 해도, 성화고 학생일 리가 없었고, 더군다나 6반일 리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 장 선생은 다시 물을 한 잔 마신 후, 부드러운 시선으로 우문황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만점을 받은 학생은, 바로 새로 전학 온 우문황 학생이다. 전 과목 만점!"순간 반 전체 50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우문황에게 향했다.‘만점을 받았다고? 사람이야?!’‘아니, 쟤 예전에 한 자릿수 점수 받지 않았었나? 거기에 소수점까지 있는 황당한 성적이었잖아?’이지혁은 잠결에 우문황이 만점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만점? 너 커닝했지?!"하지만 커닝을 해서라도 만점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지혁은 책을 펼쳐놓고 답을 찾아봐도 합격선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6반에도 간혹 성적이 잘 나오는 학생이 있었지만, 대부분 간신히 합격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오르내릴 뿐이었는데, 만점에 심지어는 전교 1등이라니.부러움과 질투, 경외의 눈빛이 모두 우문황에게 쏟아졌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만점이 그에게는 너무나도 쉬운 일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충격적인 소식에 반 전체가 이내 조용해졌고, 그 후로 장 선생님이 반복해서 들려주는 감동적인 격려의 말도 학생들은 그저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이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말들이었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수업이 끝난 후 장 선생이 우문황을 불렀다."우문황, 잠시 나와봐."그러
하지만, 이건 너무 대단한 일이었다.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다니? 심지어 국어까지도 만점이었다. 앞부분의 이해 및 분석 문제를 다 맞혔다고 해도, 작문에서 만점을 받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교사로서 이런 성적을 보니, 장 선생은 정말 기뻤다. 비록 그가 담당하는 반 학생은 아니지만, 모든 학생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나라 발전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교사로서의 작은 소망이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런 학생이 나오면 학교에도 큰 영광이었다.교장 선생님이 둥근 안경을 살짝 밀어 올리며 그를 바라보았다.“장 선생, 이 성적표는 장 선생 반 우문황 학생의 것이네.”그러자 장 선생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까지 떡 벌어졌다.“네…? 우문황 학생…? 그 학생 것이라고요?!”교장 선생님은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살짝 닦으며, 약간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맞네. 우리가 보물을 발견했어! 이렇게 많은 세월이 지나 드디어 한 명의 천재가 나왔군.”“그 애가요? 하지만 그 학생은 그전까지 성적이…”장 선생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조만간 부모님과 상담할 생각이네. 이전 성적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앞으로의 성적이지. 장 선생, 오늘은 중요한 일을 의논하러 자네를 오라고 했네. 우문황 학생을 계속 6반에 둘 수는 없지 않는가? 그래서 1반으로 옮기려고 하네.”장 선생은 순간 멍해졌다. 조금 전까지 기쁨에 차 있던 얼굴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그러자 방 선생이 급히 말했다.“장 선생님, 오해하지 마세요. 선생님의 뛰어난 학생을 빼앗으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도 재능 있는 아이를 아끼는 분이시잖아요? 이런 성적을 가진 학생이 계속 6반에 머문다면 성적이 크게 떨어질 겁니다. 그것은 정말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죠.”장 선생이 착잡한 마음으로 성적표를 꼭 쥐었는데, 문득 그도 방 선생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6반은 솔직히…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학
방 선생은 아내와 영화를 보며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지만, 영화도 포기하고 바로 차에 올라타 학교로 돌아갔다.장 선생은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추가 근무를 하지 않았는데, 오후가 되자 더 이상 버티기 힘든듯 병원에까지 다녀왔다. 그러자 의사는 성대와 목이 염증이 생겼고 약간 열이 난다고 했기에, 그는 약을 먹고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한 후 바로 잠에 들었다.한밤중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 그는 어렴풋이 머리맡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방 선생에게 여러통의 전화가 걸려왔었지만, 늦은 시간이라 다시 전화하지는 않기로 했다.그는 몸이 아프니, 마음도 유난히 약해지는 것 같았다. 점점 더 이 일을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직하고 싶은 마음 또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월요일이 되어, 장 선생은 여전히 목이 아팠지만, 죽을 마신 후 핸드폰을 들어 방 선생에게 전화를 걸 준비를 했다. 장 선생은 방 선생의 전화가 성적 관련 이야기라는 것을 눈치챘다. 예전에도 시험을 치른 후, 성적이 이전보다 나빠지면 방 선생은 밤새 전화를 해왔기 때문이다.그는 이제 그런 일에 대응하는 것도 지쳤기에, 사직서를 꺼내 들고, 오늘은 반드시 제출하겠다고 다짐했다.그런데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교장에게서 전화가 와, 장 선생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좋은 아침입니다, 교장 선생님."전화기 너머로 교장의 다정하고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장 선생, 몸이 아프다던데 괜찮나?"그는 멈칫하다가, 무심코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전화기 너머의 사람이 분명 틀림없이 교장인데, 목소리와 말투가... 너무 부드럽지 않은가? 게다가 ‘야’가 아닌 장 선생이라고 부르다니?"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 이제 괜찮아져서 지금 학교로 가는 중입니다.""그렇다면 다행이군. 학교에 도착하면 바로 내 사무실로 오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네."교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친절하고 따뜻했다.장 선생은 바로 "네."라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교장이 이렇게나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
다음 날 학교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사직서를 작성했다. 이틀 동안의 모의고사가 끝난 후 교장에게 제출할 생각이었다.고3의 첫 번째 모의고사는 학교에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1반을 더욱 신경 썼는데, 1반이야말로 진정한 실험 반이자 특별반이었기 때문이다.1반에는 성적이 시 전체에서 1000등 이내에 드는 학생이 두 명이나 있었는데, 이는 성화고등학교의 입장에서는 매우 뛰어난 성과였다.학교는 그런 그들을 더욱 집중적으로 육성하였기에, 이번 모의고사가 시 단위의 성적에 반영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교장까지 직접 나서서1반 학생들을 격려하며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시험은 이틀 동안 진행되었고, 시험 감독은 여섯 개 반의 선생님들이 섞여 배정되었다.장불운, 장 선생은 운 좋게도 1반의 수학 시험 감독을 맡았다. 1반 학생들이 문제를 풀며 집중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가장 우수한 두 학생의 섬세한 풀이 과정을 보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와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이틀간의 시험이 끝난 후, 선생님들은 함께 식사하러 갔다. 식사 자리에서는 시험 감독을 맡은 선생님들이 각 반의 시험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2반 담임이 웃으며 말했다."우문황 학생은 시험 시작하고 30분 정도만 풀고 그냥 멈췄더라고요. 이번 시험 문제가 좀 어려웠던 모양이에요.""정말요? 저도 봤는데, 30분 정도 쓰다가 멈추더라고요. 그런데 이번 국어 시험 문제가 꽤 쉬운 편이었어요. 다만 작문이 좀 어려웠죠."수학 담당 선생님이 말을 덧붙이지자, 이에 방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그만, 그 학생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전학생이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죠."그러고는 장 선생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이번 시험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에요. 어차피 고3은 시험이 많으니까요. 앞으로도 따라잡을 기회는 충분하니 힘내세요!"장 선생은 가방 속에 사직서를 넣으며, 방 선생에게 이일을 먼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그가 허리를 곧
시끄러운 소리에 기숙사에 있던 남학생들이 모두 우르르 달려 나왔다.그런데 이건휘가 벽에 붙어서 다리를 올린 자세가 마치 강아지가 오줌을 싸는 자세와 똑같아 다들 보자마자 배를 끌어안고 웃기 시작했다.평소 이건휘는 성적은 꼴지면서 태도는 제일 오만했기에, 지금까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런 창피를 당한 적이 없었다.그는 온힘을 다해 움직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아서 너무 당황스럽고 분하며 부끄러웠다.바로 그때, 사감이 복도에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인파를 뚫고 나왔다.이건휘를 발견한 사감은 두통이 밀려왔다.“너 또 무슨 장난질을 하는 것이야?!”사감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당기고 나서야, 그는 드디어 움직일 수 있었다.이건휘는 이제 사지가 멀쩡해졌는지 한참을 움직이다가 사감을 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말썽꾸러기인 그가 우는 것을 처음 본 사감은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예전에 그가 말썽을 피울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직은 아이이기에 참았던 것이었다.“됐어. 그만 장난치고. 얼른 돌아가서 씻고 자.”짐승돌이 재빨리 다가와 이건휘를 부축하면서 기숙사로 돌아갔다.그 사이 우문황은 샴푸가 잔뜩 묻은 이불을 이건휘의 이불과 바꾸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이건휘가 기숙사로 들어오자 구두쇠가 다가가 속닥거렸다.“9점짜리가 이불을 바꿨어. 우린 건드리지 못하겠어.”이건휘는 샴푸가 묻은 이불을 보다가 눈을 감고도 여전히 잘생긴 우문황을 쳐다보았다.방금 몸이 움직이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철렁내려 앉았다.그는 말없이 이불을 말고는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이건휘는 기숙사의 대장이라 그가 제압당한 이상 다른 룸메이트들은 감히 우문황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지금 우문황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실험반은 그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다들 미쳤는 게 분명했다. 3학년인데도 유치한 장난을 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수능은 유일한 출로는 아니지만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출발점인데 자신의 앞날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다들 꿈
장 선생은 잘생긴 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예쁘게 생긴 아이들은 항상 그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어차피 반에서 꼴찌인데 성적이 형편없다면 한동안 웃고 지나면 될 일이었다.“알았어. 내일 시험 봐. 대신 점수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아직 일년이 있는데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면 얼마든지 따라올 수 있어.”장 선생이 그를 격려해 주었다.“선생님, 걱정 마세요. 제가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우문황의 단호한 말에 장 선생은 웃음이 나왔다.“그래. 그럼 됐어. 돌아가.”이보다 더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하기로 했다.“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우문황은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장 선생은 적어도 예의는 있는 아이라고 여겼다.저녁 자습시간이 끝나고 우문황은 기숙사로 돌아갔다.기숙사 입구에 있는 공용전화기로 집에 전화를 했더니 원 교수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선생님이 저를 엄청 이뻐하세요. 친구들도요. 오늘 저녁에 기숙사에서 환영 파티를 해준대요. 애들이 잘해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우문황은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둘러댔다.“그럼 됐어. 이제 안심해도 되겠어.”전화기 옆에서 안심하는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손자의 성적은 걱정되지 않지만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은근 걱정이었다.그런데 친구들이 다 좋아한다니 이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넷째 형이 전화 왔었어요?”우문황이 물었다.“방금 전화 왔었어. 말로는 친구들이 공부하느라 바빠서 자기한테 신경도 쓰지 않는대. 아주 그냥 밤 늦게까지 공부하나 보더라.”우문황은 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넷째 형은 엘리트 반에 들어갔다.엘리트 반의 학생들은 명문대에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할 것이다.그는 돌아서서 기숙사로 들어갔다.한 기숙사에 여섯 명이 있는데 앙숙인 이건휘과 함께 살게 되었다.게다가 짝꿍인 이지혁도 있고 나머지 셋은 이건휘와 관계가 좋아 보였다.그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별명을 불렀다.이건휘는 ‘대장’, 이지혁은 ‘
수업이 마쳤다는 종이가 울렸는데 장 선생은 나가지 않고 새 학생에게 우르르 몰려가는 여학생들을 보았다.“내 이름은 강소영이야.”“내 이름은 윤가혜.”“내 이름은 서연이야.”여학생들은 시키지도 않는 자기소개를 하더니 우문황에게 물었다.“너 어느 학교에서 전학 왔어?”“이름이 너무 멋지다. 너 복성 맞지?”“평소 취미가 뭐야? 주말에 내가 밀크티 사줄까?”그때 우문황은 머리 위에서 책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다.손을 뻗어 책을 움켜쥐고는 벌떡 일어섰다.“이건휘, 너무해! 전학생을 괴롭히지 마!”윤가혜라 부르는 여학생이 우문황의 편을 들어 책을 던진 남학생을 혼냈다.“손이 미끌어졌어. 불만이야?”이건휘는 콧방귀를 뀌며 우문황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가더니 바지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나 오줌 싸러 간다. 금사빠들과 말 섞기도 싫어.”“우문황, 저 녀석 무시해. 아주 나쁜 놈이야.”윤가혜가 다정하게 설명했다.“맞아. 우리 반에서 꼴찌야. 번마다 십 몇 점을 맞아도 창피한 줄 몰라.”“그럼 너희들 성적은 높아? 너희들도 20점 아니면 30점이잖아.”우문호의 건너편 짝궁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그 소리에 우문황은 더 이상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여기 학생들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길래 20점, 30점을 맞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애들아. 내가 알아봤어.”그때 한 남학생이 교실로 뛰어오면서 싱글벙글 웃었다.“전학생 우문황 있잖아. 과목에서 최고인 수학 점수가 9,5점이래. 우리 반 꼴지 이건휘보다 더 꼴통이야.”“하하하, 진짜야?”남학생들이 갑자기 폭소를 터트렸다.“완전 쓰레기잖아.”그 바람에 다들 우문황에게 비웃는 시선을 보냈다.심지어 방금 그의 편을 들던 여학생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우문황은 그들을 뒤로하고 복도에 있는 온수기에 물을 따르러 갔다.그때 화장실에 다녀온 이건휘가 일부러 그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는 비아냥거렸다.“9점짜리였어? 퉷!”우문황이 얼굴에 묻은 물을 닦으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거
장 선생은 겨드랑이에 교재를 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그래. 수업 시간이 되었으니까 따라와. 학급 친구들을 소개해줄게.”“감사합니다.”우문황이 공손하게 대답했다.장 선생은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어이쿠, 키가 180은 되겠는데? 반반한 얼굴로 연애나 하지 마라.’그는 속으로 생각하다 한숨을 내쉬었다.3학년에 연애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실연하면 분명 문제가 발생했다.며칠 전에도 큰일이 날 뻔했는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3학년 6반은 6층에 있었다.4월의 날씨는 따뜻하지만 남쪽에 위치한 광원시는 벌써 여름이 된 것처럼 더웠다.6층에 도착한 장 선생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그가 돌아서서 우문황을 힐끗 쳐다보았다.옥처럼 맑은 얼굴에 땀도 나지 않고 심지어 가쁜 숨도 쉬지 않았다.6층에 올라서자 벌써 반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수업 종이 울려도 학생들은 스스로 제자리에 가지 않고 여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화장품에 대해 열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남학생들은 또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었다.장 선생이 문을 팡팡 치면서 목청을 높였다.“조용해. 수업이야!”학생들은 저마다 짜증을 부리며 제자리도 돌아갔다.그 장면을 본 우문황은 경악하고 말았다.‘실험반 아니었어? 규칙도 지키지 못하면서 실험반이라고?’“자, 전학생을 소개하겠다.”장 선생은 강단에 서서 우문황을 가리켰다.“이름은 우문황이고 수업이 끝나면 서로 인사들 나눠라!”갑자기 51명의 눈동자가 전학생에 쏠리더니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와. 개잘생겼어.”“기준 오빠보다 더 잘 생겼잖아.”“다리 길이를 봐. 연예인 뺨치는데?”여학생들과 상반되게 남학생들은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았다.“잘생기면 다야? 한 주먹거리도 안 되겠네.”그때 장 선생이 나서서 분위기를 완화시켰다.“우문황 학생, 맨 뒷줄에 가서 앉아.”우문황은 장 선생이 시키는 대로 뒤로 걸어가자 후문 옆에 책상이
얼마 전에 원 교수는 성화고등학교와 거리가 아주 가까운 푸지오파크에서 가장 높은 복층집에 이사했다.원 교수가 여기에 이사 오겠다고 고집한 이유는, 손자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보다 나이가 어린데, 성적 쓰레기들 집합소이자 학교 폭력도 끊기지 않는 학교에 다니는 것이 걱정되어서 가까이서 지켜보려고 했었다.“난 정말 학교가 마음에 안 들어요.”원 교수의 부인은 못마땅해서 한숨을 쉬었다.원씨 가문의 자식 원경주와 원경릉은 어릴 대부터 에이스 반을 다녔으니 기분이 안 좋은 것은 당연했다.”“외할머니, 저는 꽤 마음에 들어요. 형이 다니는 학교와 가깝잖아요.”칠성이 웃으면서 말했다.본인이 선택한 학교에서 얼마 안 가면 화진사립고등학교가 있었다.이 학교의 합격선은 600점이라 돈이 있어도 들어갈 수 없었다.화진고등학교의 이과가 유명하여 명문대에 입학할 확률이 50%에 달했다.이것은 사립고등학교에 있어 대단한 숫자였다.콜라가 항공과로 발전하려면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하고, 칠성은 감독이 되고 싶어서 성화고등학교의 예술반에 지원하게 되었다.그런데 실험반만 자리가 나서 어쩔 수 없었다.솔직히 실험반은 대부분 학년에서 성적이 가장 좋은 반이라 학교에서 중점적으로 가르쳤기에 괜찮았다.“망했어!”그때 모니터를 보던 원경주가 미간을 찡그렸다.“칠성의 성적표를 잘못 작성했어요. 전부 한 자릿수로 입력되었어요.”“설마? 한 자릿수로 입학도 못할 텐데.”원 교수가 다가가 확인했더니 확실히 한 자릿수였고 뒤에 소수점까지 적혀 있었다.“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내가 한 게 아니에요. 비서한테 맡겨서 수정하라고 했다고요.”원경주는 종이 한 장을 꺼내 확인했다.거기에 ‘86,75’ 숫자 사이에 확실히 소수점으로 보이는 부호가 있었다.그것은 소수점이 아니라 심전도 자료에서 사용하는 심전도의 점이었다.“회사에 가면 잘라야겠어요. 일을 너무 대충하네.”“그나저나 로 국장도 참 대단해. 이런 성적도 들여보냈어?”원 교수의 부인은 여전히 불만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