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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화

Author: 유애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10-29 19:42:56
원경릉의 입궁

약을 마시고 원경릉은 속이 따듯해 지며 한결 편안해 졌다.

“왕비 마마, 궁에서 돌아오시면 천천히 몸조리 하실 수 있게 쇤네가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우선 잠시라도 눈을 좀 붙이세요.” 기상궁이 말했다.

원경릉은 눈을 감자 머리 속에 폭죽이 끊임없이 터지는 것 같고, 과거에 들었던 말이 귓전에 울렸다.

“미워한다고? 당치도 않은 소릴. 짐은 네가 혐오스러워. 짐의 눈에 너는, 더러운 벌레만도 못한 존재야. 사람을 증오심에 불타게 한다고. 아니면 짐이 약의 힘까지 빌려 너와 합방할 필요도 없었겠지.”

초왕 우문호의 목소리다, 원한과 증오가 가득 찬 이런 매정한 말을 그녀는 난생 처음 들었다.

누가 귓가에서 엉엉 울고 있다, 머리 속의 폭죽이 터지더니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선혈로 변한다.

점점 모든 것이 차분해 진다.

마치 머리 속에 수천 수만 개의 어지러운 선들이 전부 깔끔하게 정리된 것 같은 느낌이다.

통증도 점점 사라졌는데, 정확히 말하면, 사라진 게 아니라 느낌이 없어졌다.

원경릉은 눈을 떠 녹주가 침대맡에 서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움찔거렸다.

“왕비 마마, 좀 어떠세요?” 그녀가 눈 뜬 것을 보고 녹주가 서둘러 물었다.

“안 아파.” 원경릉이 쉰 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 아프지 않다. 하지만 전신에 감각이 없는 것은 공포 그 자체다. 원경릉은 손을 뻗어 볼을 꼬집어 보았다. 역시 아무 느낌도 없다.

이건 마취약보다 효과가 강력하다.

“일으켜 드리겠습니다, 옷을 갈아 입으실 게요, 안 그러면 왕야께서 노하십니다.” 녹주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고 기상궁도 마침 옷을 가지고 밖에서 들어온다. 기상궁을 원경릉에게 “어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왕야께서 서두르라 십니다.”

원경릉이 감각없이 서있자 두 사람은 속옷을 벗기고 새 옷을 갈아 입힌다. 상처를 꽁꽁 싸매도 그녀는 아무 느낌이 없다.

옷을 갈아 입고 구리 거울 앞에 서자, 원경릉은 비로소 거울에 비친 사람을 훑어봤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희며, 길고 구부러진 속눈썹 아래 생기라곤 전혀 없는 눈이 있다.

입술은 바싹 말랐고 창백한데다 핏기가 전혀 없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볼에 어지럽게 붙어 있고 피부에 윤기가 하나도 없다.

그러나 기상궁과 녹주의 정교한 화장솜씨로 얼굴을 한바탕 훑고 나니, 구리 거울에 비친 인물이 다른 사람 같다. 버들잎 같은 눈썹에 붉은 연지, 봉황 같은 눈매가 곱다. 눈을 좀더 크게 뜨니 한결 나아 보인다.

“자금탕이 무엇이냐?” 원경릉이 입을 열자 심하게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억 안 나세요?”녹주가 의아해 했다.

기억에 없다. 머리 속엔 자신의 것이 아닌 기억이 많고 본인의 기억과 한데 뒤섞여 있는데 그걸 찬찬히 분류할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더 묻지 않기로 한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녹주가 그렇게 말한 걸 보면 자금탕이 뭔지 알 것 같다.

확실한 건, 좋은 건 아니라는 거다.

원경릉은 일어나 몇 걸음 걸어봤지만 상처가 전혀 아프지 않다. 단지 마비때문에 걸음을 내 디딜 때 느낌이 둔하다.

“왕비 마마, 통증은 없겠지만, 걸으실 때 부디 조심하세요,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요.” 기상궁이 신신당부한다.

“열이는 좋아졌어?” 원경릉이 부축을 받으며 문지방을 넘다 말고 돌아서서 묻는다.

기상궁은 당황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많이 좋아졌어요.”

원경릉은 바깥 날씨를 보니, 방금까진 해가 나더니 지금은 어둑어둑 한 게 비가 한바탕 쏟아질 모양이다.

“열이 일은 미안했어.” 원경릉은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기상궁과 녹주는 서로 바라보며 아연실색했다.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왕비가 자기 입으로 미안하다고?

원경릉은 천천히 걸었다. 이런 옷은 익숙하지도 않은데다 다리에 감각이 없어 걸음걸이가 서툴러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다. 두 손을 소매 속에 집어 넣는데 소매 속에서 뭔가 만져졌다. 그녀는 멈춰 서서 소매 안의 것을 꺼냈다. 온 몸의 피가 일순간 얼어붙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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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우문호는 역시 직접 계란이를 봐야 안심이 돼서, 그들에게 밖에 서 있으라고 하고 원경릉과 살금살금 문을 밀고 들어갔다.방안이 하도 캄캄해서 조심조심 들어가던 우문호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한밤중에 가끔 올 때, 계란이가 밤중에 일어나 밤 수유하기 편하도록, 방에 등을 켜져 있었는데 오늘 밤은 어째서 등이 켜져 있지 않은 거지?우문호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얼른 나가서 풍등을 가지고 들어와 막 문을 들어서는데 원경릉이 발아래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원 선생, 당장 발 들어!”원경릉이 무의식적으로 발을 들고 고개를 숙여보니, 발 아래는 영양실조에 걸린 깃털 하나가 있었다. 원경릉이 의아해하며 집어 들으며 물었다. “계란이의 신조 털이네, 어? 신조는?”신조는 원래 방 안 새장에서 살고 있는데, 낮에 계란이가 일어났을 때나 내보내 주지만 지금은 새장이 열려있고 신조는 보이지 않고, 깃털 하나만 바닥에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우문호의 안색이 돌변해 서둘러 풍등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침실 안에선 유모들이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다가, 발소리를 듣고 황송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황제 폐하? 황후 마마께서…?!”황제와 황후가 늘 밤에 오곤 하기에 별생각 없이 일어나 예를 취하는데, 황제가 벌써 쏜살같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침대엔 이불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문호는 얼른 방안을 살펴보다가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이성을 잃고 계란이를 부르며 바로 달려 나갔다.“맙소사!” 유모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할 말을 잃었다. “공주마마? 공주마마는?”원경릉이 새장을 자세히 본뒤 우문호가 계란이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말할 겨를도 없이 우문호가 뛰쳐나가는 것을 보고, 순간 안색이 돌변하며 따라가 보았는데, 계란이는 보이지 않았고 유모들은 울고 있었다.“어떻게 된 겁니까? 누가 들어온 겁니까?!” 원경릉이 다급하게 물었다.하지만 유모들은 모두 얼이 빠져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

  • 명의 왕비   제 3048화

    안풍 친왕비는 재검을 받으러 주 재상을 데리고 가고, 무상황과 소요공은 원래 집에 있으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걸 돕거나 가끔 휘종제에게 효를 다하곤 했다.북당 쪽은 박원과 소홍천이 이미 풍도성에 도착했다. 부임하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잔당을 진압한 것이 효과가 있었으나, 일부 잔당은 도망쳐서 경성으로 떠났다.박원은 어쨌든 신임 관리인이라, 안지여의 결사대만큼은 그 땅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그들도 풍도성에 나름대로 인맥이 있었다. 잔당들이 도주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그들이 경성으로 가서 황제를 암살하려 들까 걱정된 나머지, 바로 서신을 써 경성으로 전서구를 보냈다.우문호는 전서구를 받은 뒤, 경성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엄중하게 조사하도록 성지를 내리고, 성문에 검문소를 설치해 바깥에서 경성으로 들어오거나, 풍도성에서 온 무공을 하는 사람은 전부 밀착 조사를 받게 했다.이리 나리 말에 따르면 그날 안지여의 생일잔치에 참여한 다수가 무림 사람들이였다. 그들이 당일엔 안지여를 보호하지 않았던 게, 일이 이렇게 심각할 거로 생각하지 못했었기에 나중에 안지여에게 일이 터지자 풍도성도 안풍 친왕에게 제압당해 그들도 한순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어쨌든 장기적으로 안지여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 강호인의 특징이 의리를 중시하므로 반드시 안지여를 위해 복수할 것이며, 특히 안지여의 결사대 부하 전부를 재판에 회부한 것이 아니라 그게 결국 복병이 될 것이라고 했다.우문호가 이렇게 걱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 선생이 늘 의대를 가느라 출궁하는데다가 곁에 사람들 데리고 다니는 것을 싫어해서, 자객을 만나면 원경릉 무공이 허접해 사고가 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검열을 강화하라는 성지를 내린 뒤, 서일과 구사 두 사람에게 원경릉과 출입을 함께 하며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도록 했다.사실 우문호도 아내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예전에 솜방망이 같은 주먹과 발차기가 익숙해져 사람을 몇 명이라도 더 보내 지키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다.

  • 명의 왕비   제 3047화

    원경릉이 오늘 출궁하지 않은 대신 안풍 친왕비가 원경릉을 보기 위해 입궐했다.원경릉은 어젯밤 이리 나리 저택에서 본 그림자를 떠올리자, 자기가 잘못 본 게 아니란 걸 알고, 어쩌면 몇 년 후의 안풍 친왕비가 그리운 사람을 보기 위해 돌아온 것일지도 몰랐다.안풍 친왕비에게 안으로 들어와 앉으라고 한 뒤 차를 대접하는데 안풍 친왕비가 바로 얘기를 꺼냈다. “우리 내일 현대에 돌아갔다 올 건데, 전할 거나 할 말 있으면 전해 줄까?”“돌아가시게요?” 원경릉이 놀라서 물었다. ‘자기 입으로 여기 남겠다고 하지 않았나?’“일이 좀 있어서 한 번 다녀와야 해. 곧바로 돌아올 거야.”“아하.” 원경릉이 안심했다. 정말 현대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어르신들은 열받아서 돌아가실 수 있었다. “다섯째에게도 한 번 물어봐, 아이들에게 전할 말 있는지. 네 큰할아버지 말로는 어젯밤 얘기하는데 다섯째는 줄곧 애들 얘기뿐이었데. 굉장히 그리워하는 거 같더라며.”“알았어요. 있다가 물어볼게요. 언제 가셔서 뭐 하시는 거예요?”“주 꼬맹이 데리고 가서 검사받으려고, 어젯밤 머리가 아프다고 소리치더라고. 자세히 물어보니 요즘 머리가 자주 아팠다고 해서, 좀 일찍 가서 재검을 받아 보려고 해. 할머니와 상의해 봤더니 돌아가서 검사해 보는 게 좋겠다고 하시니 시간 끌지 말고 바로 가야지.”“두통이요? 심해요?” 원경릉은 긴장이 됐다.“더 심해질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가서 검사받으려고. 문제를 알면 바로 치료할 수 있을 테니까.”원경릉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렇죠. 주 재상은 마마께 맡길게요. 고마워요.”안풍 친왕비가 원경릉을 흘겨봤다. “그런 말 듣는 게 영 익숙해 지지가 않네. 주 꼬맹이는 내가 아기 때부터 키운 아인데…. 됐어. 그만하자. 어쨌든 결석한 시기가 있으니까.”원경릉은 안풍 친왕비가 뭔가 아쉬워한다는 걸 눈치챘다. 이 아쉬움은 계속 주 재상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다.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지금 같이 편안한 만년을 보내고 있

  • 명의 왕비   제 3046화

    원경릉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했다. “어?”‘진짜 귀도 밝네.’그러자 우문호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야말로 둘째 형을 놀려먹어야지. 형은 약을 먹는다고. 말로는 정력을 보강하는 거라는데, 둘째 형수가 주야장천 그 얘기라는 걸 나도 모르진 않아.”원경릉이 웃었다. “둘째 형님의 음담패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니까.”우문호가 원경릉을 끌어안으며 귀밑머리를 만져주었다. “최근 애들 일로 고민하느라 그런 거지, 일부러 당신을 차갑게 대한 거 아니야.”“자기가 그랬다는 게 아니…” 그 순간 뜨거운 입술이 원경릉의 말을 막고,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자신의 몸쪽으로확 끌어당기더니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하여간 독특하다니까. 그래도 지금 달리고 있는 마차 안이란 사실은 잊지 않아서, 우문호는 부드럽게 원경릉의 반쯤 벗겨진 옷과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더니, 엷게 화장기가 남은 볼에 다시 키스하고, 정열의 불꽃이 여전히 타오르며 그윽한 눈으로 원경릉을 바라봤다. “곧 도착해.”원경릉은 우문호의 가슴에 엎드려 있었는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궁으로 돌아가자 계란이는 이미 잠들었고, 부부는 살금살금 들어가 계란이를 보는데, 자는 아이는 정말 천사구나.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며 나가는 게 아쉬워, 다가가 얼른 계란이 얼굴에 뽀뽀하고 싶었지만 깰까 봐 꾹 참았다.결국 둘은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갔다.술을 마셔서 땀이 났으므로 곧바로 옷을 가지고 목욕하러 갔다.궁중에는 온천이 있었는데, 소월전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라 부부는 기라와 녹주에게 따라올 필요 없다고 하고, 둘이 손잡고 갔다.온천에서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가운데, 옷을 벗고 둘은 미끄러지듯 물속으로 들어가, 우문호는 원경릉의 가는 허리를 안고 자기 몸 앞으로 바짝 당겼다.황제가 된 후 이렇게 감미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별로 없어서, 우문호는 원경릉의 입술에 다시 입맞춤을 했고, 원경릉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우문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단단하고 힘

  • 명의 왕비   제 3045화

    동서들이 마당을 거닐다가 정자에 앉아 사람을 시켜 공주를 불러오게 했다.공주는 시어머니를 챙기고 있었는데, 오늘 밤 시어머니가 기뻐서 술이 좀 과한 나머지 시어머니가 주무시도록 시중을 들고 그제야 합류했다.“하하 호호 뭐가 그리 즐거우세요?” 공주가 와서 보니 모두 얼굴이 발그레하게 웃고 있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원용의가 웃으며 말했다. “둘째 형님 입에 음담패설이 붙어서, 우리가 아무리 화제를 돌리려 해도 꿈쩍도 안 하세요.”“네?” 공주가 놀랐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요 며칠 노부인께서 오셔서 시어머니 진맥을 해주시고 몸조리를 해주셨는데, 그때 약 다리는 아이를 시켜 손왕부에 가서 약을 바꾸라고 분부하셨어요, 둘째 오빠가 한동안 먹어서 맛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다면서. 전 둘째 오빠가 어디 아픈 줄 알고 노부인께 여쭤봤더니 둘째 오빠가 몸조리가 필요하다며, 어쩌면 아이를 또 낳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다들 의아한 눈초리로 손 왕비를 바라보자, 금세 난처해하는 모습에 다들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미색이 손 왕비에게 한마디 했다. “어쩐지 계속 그 얘기만 하더라니. 알고 보니 진짜 밤마다 새색시는 따로 있었군요.”“둘째 형님, 하나 더 낳고 싶으신가요?” 원용의가 물었다.손 왕비가 얼굴을 붉히며 사람들에게 눈을 흘겼다. “뭐야? 내가 낳기는 뭘 또 낳아? 나이가 지금 몇인데. 더 낳으면 사람들한테 웃음거리밖에 더 돼? 늘그막에 자식을 본다고. 그런 건 다들 요 부인한테 물어봐야지, 요 부인은 훼천이랑 혼인한 지 얼마 안 됐고, 훼천은 아이가 없으니까. 하나 낳을 생각 없어?”요 부인이 단정지으며 말했다. “훼천은 예전에 희열이랑 희성이를 자기 딸로 대하겠다고 했고, 자기가 낳은 자식이든 아니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어요.”“요 부인도 안 늙었어요. 더 낳을 수 있죠!” 원용의가 말했다.“인연이 닿으면요, 하지만 우리는 안 낳기로 했어요!” 요 부인이 말했다.다들 웃으며 원경릉을 바라봤다.원경릉은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곤두섰다. “저

  • 명의 왕비   제 3044화

    비록 몇 년 전 일이지만, 원경릉에겐 그 사건이 지금도 여전히 흑역사로 남아 있었다.거의 술자리를 마칠 무렵, 원경릉과 친왕비들은 마당을 걸으며 술을 깨고 있었다.훼천은 여자들이 일어날 때 작은 소리로 요부인에게 속삭였다. “날이 어두우니 길 조심해요.”요부인 얼굴이 살짝 빨개지고 미색이 아주 살풍경하게 말했다. “다 들려.”훼천이 미색에게 눈을 흘기고 남자들과 술잔을 계속 주고받았다.여자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회랑에 올라 마당에 초목이 우거져 그늘진 곳을 보는데,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아 원경릉이 자세히 보니 아무래도 안풍 친왕비 같은 것이, 꽃나무 뒤에 서서 본관에 있는 사람을 보는 모습에 놀라서 물었다. “안풍 친왕비 마마?”“누구야?” 요 부인이 물으며 쳐다봤다. “사람이 대체 어딨는데? 안풍 친왕비 마마는 본관에 계시지 않아?”원경릉이 다시 보니 보이지 않아 헤헤거리며 웃었다. “제가 취했나봐요, 눈이 다 삼삼한 게!”“원래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오늘 밤엔 그렇게나 많이 마시더라니요.” 원용의가 말했다.사식이가 킥킥 웃어댔다. “사실 원 언니가 오늘 술주정 부릴 줄 알았는데, 마셔도 아무 일도 없을 줄이야.”그러자 원경릉이 사식이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요 계집애가 내가 주정부리는 걸 보고 싶었단 말이지.”다들 깔깔 웃느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꽃밭으로 멀리멀리 흩어져갔다.돌아봐도 꽃나무 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은 아무에게도 안 들리게 한숨을 내쉬었다.세월은 앞으로 가고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지만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문득 귓가에 안풍 친왕이 전에 했던 말이 울려왔다. ‘함께 할 수 있을 때 소중히 대해 줘’.원경릉은 다시 한숨을 쉬며 사식이와 요 부인의 팔짱을 꼈다. ‘그래, 아직 같이 있으니 소중히 여기자.’“훼천이랑 혼례를 치르니까 어때요?” 원경릉이 요 부인에게 물었다.손 왕비는 요 부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웃으며 답했다. “뭘 물어? 요 부인이 요즘

  • 명의 왕비   제 3043화

    아이들이 없는 황궁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계란이마저 울적해 보이는 게, 전에는 매일 오빠들이 와서 서로 안아주려고 난리였는데, 이제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이 보이지 않으니 종일 시무룩해져 있었다.아빠가 안아주는 게 좋긴 했지만 그는 종일 조정 일로 바쁜탓에 자기 전에 겨우 와서 안고 놀아주는 거라 이전과 비교가 됐다. 계란이 뿐 아니라 눈 늑대와 호랑이도 심심해서 꼬마 주인들 방 복도에 엎드려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며 나가 놀지도 않는 게, 계속 이런 식이면 다들 기분이 축 처져 안 되겠다 싶었다.원경릉은 친목 이벤트를 기획해 각 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궁으로 놀러 오라고 하자, 친왕들이 알았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입궐해 궁중은 다시 시끌벅적해졌으나 우문호는 오히려 전부 다른 사람 아이란 생각에 거의 울 뻔했다.하지만 계란이는 이렇게 많은 아이를 보자 기분이 좋아졌고, 늙은 아빠 우문호도 따라서 즐거워했다. 우문호는 계란이가 종일 시무룩하게 있을까 봐 걱정이 들었다.딸이 좋으면 우문호도 뭐든 다 좋았다.천행이의 백일이 되자 보상의 의미로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천행이는 이제 할머니도 있는 몸이니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게 도리다.잔치는 굉장히 성대했다. 이리 나리는 은자를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천금으로 아내와 엄마를 즐겁게 할 수 있다면야.백일 잔치에 모두가 아주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다. 마지막에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간 뒤 같이 둘러앉아 술을 홀짝일 때 약간의 에피소드가 터지며 다들 웃기며 슬픈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다. 숙왕부 어르신이 그릇을 가져와서 음식을 싸서 온 것이었다. 사실 지금 숙왕부는 전혀 궁색해 보이지 않았지만, 수십 년간 몸에 밴 습관이 무서운 게 음식 낭비를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전에 원경릉은 이리 나리 일이 해결된 뒤 안풍 친왕 부부가 떠날 줄 알았는데, 백일 잔치까지 가지 않고 있길래 개인적으로 안풍 친왕비에게 물었다. 그러자, “전엔 돌아가고 싶었지, 꿈에라도 간절히 돌아가고 싶었어. 하지만 돌아간

  • 명의 왕비   제 3042화

    게다가 엄마, 아빠, 휘종제 일행이 모두 여기 있어 안심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제일 큰 문제는 바로 떼어놓지 못하는 아쉬움이었다.특히 우문호는 계란이를 손바닥 위에 보석처럼 대해서 하루도 떨어져 있지를 못하는데 몇 년씩이나 떨어져야 있으면, 가끔 올 수 있다고 해도 곁에 두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 원경릉이 돌아가서 얘기하면 우문호가 울부짖을 게 불 보듯 훤했다.원경릉은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북당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밟았다.서일은 경호에서 며칠을 기다리다가 황후가 물건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감동받았다.원경릉이 트렁크를 서일에게 주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필요하다고 한 건 다 사 왔으니까. 가져가서 처자식이나 기쁘게 해 줘.”“황후 마마는 역시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이세요!” 서일은 사람을 칭찬하는 어휘가 한정적이지만 최대한의 감사와 감격을 담아 표현했다.“사식이랑 아이를 이렇게 끔찍하게 챙기다니 의왼데.” 원경릉이 엷은 미소를 띠고 농담했다. 이 멍청이는 정말이지 사람 마음을 잘 아는 좋은 남자다.궁으로 돌아오니 이미 밤이 되었다. 우문호는 아마 오늘쯤 원경릉이 돌아올 거라고 예상해서 서둘러 일을 끝내고 소월궁으로 돌아와서 그녀를 기다렸다. 저녁 수라를 들고 나자, 짧은 이별은 신혼보다 짜릿해서 격렬한 사랑을 나눈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우문호가 뒤에서 원경릉을 끌어안고 침대에서 아이들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자, 원경릉이 뭔가 감추면서 아이들이 엄마와 헤어지며 아주 아쉬워했고 특히 아빠랑 헤어지기 아쉬워해서 방학하면 바로 아빠 보러 돌아온다 말했다고만 전해주었다. 선의의 거짓말을 해 우문호를 기쁘게 해주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역시 아낀 보람이 있네!”“애들이…. 철 들었어.” 원경릉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머릿속으로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간섭에서 벗어나 맘대로 난장판을 치는 영상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양심이라고는 없는 녀석들.우문호가 말했다. “눈앞에 닥친 일을 마치면… 얼추 며칠은 갈

  • 명의 왕비   제 3041화

    현대로 돌아가 가족과 한자리에 모이니 모두 즐거워 보였다. 원경릉은 집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을 데리고 휘종제와 건종 태자를 알현하러 갔다.휘종제와 건종 태자도 매우 기뻐했는데, 특히 아이들이 유학하러 와서 앞으로 여기서 산다는 얘기에, 휘종제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앞으로 아이들에게 드는 모든 비용은 전부 자기들이 대고 방학에 북당으로 보내고, 개학 때 맞이하는 것도 자기들이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외갓집엔 모두 출근하는 분들 뿐이라 불편할 거라는 것이었다.원경릉은 일단 감사드리고 북당에서 가져온 술과 검, 궁에서 가져온 흙 한 줌과 돌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건 우문호가 준비한 것으로 고향을 오래 떠나 있는 사람은 고향의 흙과 돌이 그리운 법이라고 했다.휘종제와 건종 태자가 흙과 돌을 보더니 손에 들곤 통곡하기 시작했다.원경릉이 두 사람을 위로한 뒤, 그들은 슬퍼하며 ‘언제 한 번 가볼까, 딱 한 번 보더라도, 아무도 만날 수 없어도 좋을 텐데.’라고 한탄했다.“긴 세월 고향 강산을 꿈에도 잊지 못했으나 돌아갈 수는 없었네..”원경릉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이 시큰해졌다. 휘종제와 건종 태자의 슬픔을 원경릉은 아주 잘 아는 것이 자신도 전에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단지 그들이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원경릉도 뭐라고 단정내리기 어려웠다. 어쨌든 이건 안풍 친왕이 진행한 일로 정말 돌아가고 싶으면 아마도 안풍 친왕이 준비해 줄 수 있었다. 북당으로 돌아가면 안풍 친왕에게 상황을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입학 준비를 마친 뒤, 원경릉은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아이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충만했기에 그녀와 헤어지는 걸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그 점이 씁쓸했다.아이들이 크면 놔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얘들은 아직 다 안 컸잖아.돌아가기 전에 원경릉은 양여혜에게 만나자고 했는데 양여혜가 기화를 데리고 올 줄 몰랐다.원경릉은 기화를 보자 머리가 아픈 게, 기화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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