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궁하는 길, 우문호가 증오하게 된 사연반 주먹 정도 크기의 그 작은 함은, 다름 아닌 침대 밑에서 사라진 약 상자였다.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약 상자가 왜 작아졌고, 어떻게 소매 속에 들어 있는 거야?원경릉의 마비된 몸에 일순간 소름이 끼쳤다.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원경릉은 얼른 약 상자를 다시 소매속에 감췄다.“소인이 왕비 마마님을 모시고 가겠습니다.” 녹주가 그녀를 부축하며, “왕야께 부탁드렸어요, 마마님과 입궁할 수 있게요.”원경릉은 마음이 혼란스러워 녹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갔다.아치형 문을 지나 회랑을 돌아 이리저리 걸어간 끝에 앞마당 입구에 도착했다.마차는 이미 문 앞에 대기해 있고, 우문호는 마차에 타지 않고, 검은 준마를 타고 있다. 연 보라색 옷을 입고, 금옥 관모를 썼는데 얼굴빛이 날씨처럼 어둡고 눈은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녀를 힐끗 보더니 싸늘하게: “얘들아 가자.”“왕야, 소인도 같이 입궁해도 될까요?” 녹주는 염치 불구하고 대뜸 물었다. 우문호는 녹주를 쏘아보더니: “그러든지, 태후께서 합방 건을 묻지 않으시게, 네가 있는게 나을지도 모르겠구나.”초왕부 입구에 입궁을 돕는 하인만도 십여명으로 그 중엔 가신 탕양도 있었다. 우문호가 그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원경릉이 난처할까 배려해서가 전혀 아니다.원경릉은 무표정했다. 얼굴 근육이 굳어서 아무리 난처해도 난처한 표정조차 지을 수 없다.녹주는 원경릉이 마차에 오르도록 부축하고 마차 창문 발을 내리는 찰나, 우문호의 이글거리는 증오의 눈빛과 초왕부 하인들이 꼴 좋다며 원경릉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다. 원경릉은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귓가에 우문호의 말이 쟁쟁 울린다.몸의 원래 주인은 이쁘게 생겼는데 도대체 얼마나 그녀를 싫어했길래 약을 먹고서야 겨우 합방을 할 수 있었던 거지?이게 몸의 원래 주인에게 얼마나 큰 모욕이었을까?과연 죽음을 선택할 만 했다.마음을 안정시키는
우문호의 정인을 만나다마차는 우문호의 지휘아래 곧장 궁문으로 들어갔다. 원경릉은 지금 황궁에 호기심이 전혀 없고, 오직 휘날리는 마차의 창문 발 틈으로 한없이 긴 궁궐길과 궁궐의 붉은 담장만 보일 뿐이다.멀리 내다 볼 수 없지만 이따금 높은 누각이 눈에 들어 왔다. 금과 비취가 오색찬란하고 유리로 된 기와에 햇빛이 미끄러진다. 마차가 멈추고 원경릉은 심호흡을 한 뒤 녹주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햇살이 궁궐의 붉은 담장에 내리쬐는 가운데, 멀리 금빛 유리 기와가 반사하는 빛에 그녀는 빛에 닿으면 사라지는 유령처럼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빛을 가렸다.우문호도 말을 내려 마차와 말을 여기에 두고 걸어 갔다.소운전(霄雲殿) 밖에 도착하자 녹주가: “왕비 마마, 소인은 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원경릉은 소운전이 태상황이 거처하는 곳이라, 밖에 이미 각 황자와 공주부에서 온 하인과 노비로 가득한 것을 보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한 걸음 한 걸음 우문호를 따라 들어갔다.초목이 무성한 정원을 지나 정전으로 들어서자, 안에 서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원경릉을 쳐다 보는데 하나같이 화려한 옷차림에 위엄 있는 얼굴이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몸의 원래 주인이 남긴 기억에 의존했다.푸른 비단 옷을 입고 숙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은 기왕(紀王) 우문군(宇文君)으로 황제인 명원제의 장자다. 나이는 서른 살, 진비(秦妃)의 소생으로 마후(馬侯) 대감의 적녀를 아내로 맞아 마씨와 진비가 현재 우문군의 세력으로 슬하에 자식 둘을 두었다. 위왕(魏王) 우문위(宇文蔚), 손왕(孫王) 우문두(宇文杜), 주왕(周王) 우문안(宇文安) 모두 왕비와 자녀들을 데리고 입궁해 있었다.왕야들은 그저 가볍게 목례만 나눌 뿐 말이 없어 분위기는 시종 무거웠다.원경릉은 옆에 서 있는 우문호의 몸이 갑자기 경직되는 것을 느끼고 주변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한 쌍의 부부가 정전으로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남자는 대략 18~19살쯤 되
임종을 앞둔 태상황원경릉은 고개를 들어 주명취의 온화하고 따스한 눈빛을 바라봤다.“앉아서 좀 쉬는 게 어때요?” 주명취가 물었다.원경릉은 고개를 흔들고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며, “괜찮아요, 고맙습니다.”제왕 우문경은 주명취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기며 불쾌하다는 듯이 원경릉의 얼굴을 흘겨보고 주명취에게: “저런 사람을 왜 신경 써?”주명취는 제왕의 곁으로 돌아가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담담한 눈빛으로 조용히: “모두 한 가족인 걸요.”“당신은 너무 착한 게 탈이야.” 제왕은 주명취의 손을 잡고 둘이 나란히 서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이 순간 원경릉은 무시무시한 냉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로 우문호에게서 이다.자신의 정인이 다른 남자 곁에 서 있는데 가슴이 미어지고 화가 치미는 것도 당연하다. 원경릉은 그렇게 생각했다. 내전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모두 놀라 일제히 내전 쪽을 쳐다봤다.발이 걷히고 머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듯한 내시감이 나왔다. 울어서 눈은 부어 있고 얼굴빛이 처연하다. 꽉 잠긴 목소리로, “황상께오서 유지를 남기시고자 하오니, 비빈 마마, 왕야, 왕비는 드시지요.”이 사람은 태상황의 시중을 든 지 45년 째인 이태감이다.모두 침통한 표정으로 이태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데, 발소리를 죽이고 숨소리도 거의 내지 않았다.원경릉은 우문호 뒤에 서서 현기증이 나지 않도록 애썼다.태상황의 곁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태후와 황제는 침대에 앉아 있고, 황후도 한 쪽에 지키고 섰다. 태상황의 형제인 분봉왕들도 모두 어제 입궁하여 계속 침상을 지키고 있다.궁중의 거의 모든 어의가 전부 와서 엄숙한 표정으로 두 줄로 서있다.원경릉이 슬쩍 보니 금색 휘장이 말려 올라가 있고, 박달나무로 만든 큰 침상에 초췌한 노인이 높은 베개를 베고 누워 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쉬니 입이 마치 검은 동굴 같고 눈두덩이가 푹 꺼졌다. 곡소리는 태후가 낸 것으로 침대맡에 앉아 있는 그녀의 헐렁한 연보라 빛 겉옷이 그녀를
태상황은 힘겹게 눈동자를 굴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앉아 있는 수 많은 자들을 보았다. 그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힘에 부쳐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애써 아쉬움의 한숨을 내뱉었다. 원경릉은 이들이 무릎을 꿇고 태상황의 임종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막 그 곳에 들어왔을 때, 태상황은 이미 임종의 문턱에 서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태상황을 가까이서 보니 이상하리만큼 뱉는 숨이 힘있고 거칠게 느껴졌다. 아마 어의들이 금방 약을 투약한 효과인 것 같았다. 태상황은 심장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병세가 심해져 풍병도 앓았다. “지금은 이렇습니다. 아마 심부전증인 것 같습니다만”심부전, 호흡곤란……그녀의 약 상자 안에 도파민이 들어있었다. 원경릉의 머릿 속이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말도 안되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세상 그 누가 그녀를 믿고, 그녀에게 황제의 병을 고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그녀는 태상황이 그녀의 눈 앞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는 그를 치료했던 사람 입장에서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15분 정도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이내 몸이 마비된 탓에 무릎을 꿇는 자세가 어색하고 뻣뻣해졌다. 상처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불편해도 무릎을 꿇은 채 버티고 있었지만, 상처는 더욱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우문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엔 거짓없는 슬픔이 보였다. 황실 안에는 혈육간의 정이 없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실속 없어보일까봐 마음을 숨기는 것이다. 명원제와 어병원의 원판이 나가더니 커튼 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원경릉은 어렴풋 그들의 대화를 몇 마디를 들었다. 명원제가 태상황의 상태가 호전된 것을 보고, 약을 다시 써야하는게 아닌지 원판에게 물었으나 원판은 태상황이 호전된 것은 임종 직전에 잠깐 정신이 돌아온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명원제가 다시 자리로 돌
명원제의 넷째 아들 우문안 내외가 들어간 뒤 그 바로 다음이 우문호와 원경릉이었다. 원경릉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결코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 “초왕, 초왕비 들어가시오”상선이 말했다.원경릉이 우문호를 따라 일어섰다. 우문호는 앞장서서 장막을 열어 젖히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문호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어 앉았다. 원경릉도 그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음과 동시에 신속하게 약상자를 꺼내어 내려놓았다. 약상자는 땅에 내려놓자마자 커졌다. 원경릉은 약상자가 왜 이러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빨리 마취제를 꺼내 주사기에 주입했다.슬픔에 잠긴 우문호는 그녀의 이러한 행동도 알아채지 못한 채, 목이 메어 소리 쳤다. “황조부……”원경릉이 우문호의 손을 잡아채자, 그는 당황스러움과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원경릉을 바라보았고, 원경릉은 빠르게 그의 팔 안쪽 혈관에 약을 주사했다. 그의 깜짝 놀란 눈동자에 한순간 분노가 가득 찼다. 원경릉은 마음 속으로 ‘다 됐다’하며, 우문호의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원경릉은 장막 밖을 의식하듯 큰 소리로 말했다.“황조부, 손자며느리가 절을 올립니다.”마음속으로 일초, 이초, 삼초……우문호는 퍼지는 약기운에 점차 몸이 축 늘어졌지만, 두 눈은 더욱 휘둥그레졌다. 원경릉은 놀랐다. 케타민은 사람을 빠르게 마취 상태로 만들어 의식을 잃게 한다. 하지만 우문호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태상황 역시 이 상황이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고, 풀린 눈으로 천천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원경릉은 계속 태상황에게 문안을 드리는 말을 이어하며, 주사기를 꺼내 포도당과 도파민을 희석시켰다. 그리고 태상황의 소매를 걷어 올려 정맥을 찾은 뒤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말했다. “태상황, 두려워 마세요. 제가 꼭 살려드리겠습니다.”태상황이 키우는 강아지 푸바오가 원경릉이 바늘로 황제를 찌르는 것을 보고 짖어대기 시작했고, 원경릉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놀랄까봐 급히 목소
마취제의 양이 많지 않아 우문호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원경릉이 그의 옆에 앉아 시중을 들던 나인들을 모두 내보내자 궁전은 아주 조용해졌다.강철 같은 손가락이 그녀의 목을 옥죄었고, 그녀는 숨을 쉴 수 조차 없었다. 우문호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야수처럼 살기 띈 눈빛으로 읊조렸다. “감히 네가 황조부를 독살하려고 해?”원경릉의 머리는 들려있었고, 눈알은 핏줄이 터질 것 같이 충혈되었다. 그녀으 얼굴이 순식간에 검붉은 색이 되었다. 그녀는 힘겹게 그에게 말했다. “왕야, 고개를 숙여 보시옵소서.”순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우문호의 허벅지 살을 꿰뚫었다. 그 바늘에는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관이 있었다. “당신이 나를 목 졸라 죽일 수 있지만, 내가 죽기 전에 당신이 먼저 죽을테니, 제 말을 먼저 듣는게 좋지 않겠습니까?”원경릉은 힘겹게 말하면서도 강인한 기개를 보였다. 그러자 그의 손이 천천히 풀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분노로 휩싸였고, 일그러진 그의 고운 얼굴이 분노를 애써 참으려는 모습이 보였다. “이봐, 무슨 독약을 쓴거야?”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녀가 이런 독약을 쓸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녀를 얕잡아보다 큰코 다친 기분이 들었다. 원경릉은 바늘을 뽑으며 비꼬듯 웃었다. “제가 궁에서 태상황을 독살하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말해!” 우원호는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원경릉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독이 아니라 약입니다. 태상황의 병세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단지 태상황을 구하려고 했을 뿐 입니다.”우문호는 냉소를 지으며 살벌한 기색을 보였다.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의술의 신과 결혼 했다는 것을 몰랐네.”라고 비꼬며 그녀의 손을 강하게 이끌었다. “당장 나와 함께 아버지에게 가서 너의 죄를 고하렸다.”그는 원경릉을 강하게 끌어당겼고, 그녀는 그의 강철같은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 갔다. 몇걸음을 끌려갔을 때 원경릉이 말했다. “좋소. 내가 가서 죄를 고하겠습니다. 허나 나는 주명취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우문호가 누워있는 침대에 머리를 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며칠동안 발생한 일은 아무리 상상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뭔가 미로로 빠진 것 같았다. 어떤이는 과학과 신학은 돌고돌아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고 말한다. 두뇌의 개발과 연구가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어떤 물건이든 생각으로 사물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고, 이러한 두뇌가 자동으로 정보를 수집한다. 그 개발 정도를 생각하니 약간의 신의 영역의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원경릉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소매 주머니에 있는 약상자를 단단한 촉감을 느껴보았다. 소매가 흘러내리면서 하얀 손목이 드러났고, 손목 위로는 못 보던 붉은 상처가 보였다. ‘언제 다친거지? 방금 우문호와 몸싸움을 할때? 아냐. 이미 피딱지가 생겼고, 소매에도 묻은 것을 보니 적어도 30분 전에 난 상처인데…… 30분 전에?’그녀는 멍해졌다. 원경릉은 방금 전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가 성전 밖에서 기다리던 중에 우문호가 그녀를 밀쳤고, 주명취가 와서 자신을 부축해 준것이 떠올랐다. ‘설마, 단순한 부축이 아니었던거야?’그녀는 주명취가 왕 곁으로 돌아갈 때, 그녀의 눈빛에서 놀란 기색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주명취는 고의로 그녀에게 상처를 냈지만, 그녀가 자금탕을 복용했기에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원경릉의 기억이 또렷해졌다. 만약 예전의 원경릉이라면 틀림없이 대노하여 그 당시에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며, 그런 숙연한 자리에서 주명취는 사형을 당하지는 않아도 옥에 갇혔다가 버려졌을 것이다.원경릉은 한순간에 마음이 차가워졌다. 사람이 행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을 하다니.원경릉은 원래 주명취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두들 그녀를 악랄하다고 보는데, 원경릉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항상 주명취는 원경릉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하며 안부를 물었다.그녀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얼굴에는 이런 악랄한 마음이 숨어 있었다니
궁에 있는 모든 어의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태상황이 음식을 삼킬 수가 있다고? 방금까지도 물 한모금 삼키지 못하셨던 분이……. 이미 임종까지 가신 분께서 어찌 저렇게 될 수 있는거지?’원판은 급히 들어가 맥을 짚었다. “하늘에 계신 신께서 북당의 태황상제님을 보살피신다!”하고 울부짖었다. 태상황의 맥박이 뜻밖에도 호전된 것이였다. 모든 장막이 걷혔다. 걷힌 장막 뒤로 태상황의 권위로운 얼굴이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굴려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짝 마른 입술을 열어 말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뭣들 하느냐. 모두 일어나거라!”그 소리가 낙엽 굴러가듯 힘이 없었지만 신하들은 그 마저도 너무 기뻐하며 절을 하고 일어섰다. 태상황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파랗던 입술이 점차 선홍빛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문호는 어디갔느냐”옆에 있던 상선이 다급하게 말했다. “초왕은 태상황님을 곁을 지키다 의식을 잃어 측전에 가서 쉬고 있습니다.”“이리 오라고 하거라.” 그 말을 들은 태상황의 입가엔 실낱같은 미소가 비쳤다. 그는 푸바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서 가거라. 내가 갈 수는 없지 않느냐.”푸바오는 꼬리를 흔들며 뛰어갔다.“어서 초왕에게 전하시오!”다급해진 상선이 소리쳤다.“손자 며느리……” 태상황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는 힘에 부치는듯한 목소리라 몇글자를 내뱉었다. “함께 오라고 하거라.” 태상황의 말에 모두가 의아했다. 특히 주명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상황이 왜 원경릉을 만나려고 하는것인가?태상황의 병이 호전됐으니, 명원제는 서둘러 사람들을 궁 밖으로 내보냈고, 친왕들은 외전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궁에는 명원제와 예친왕, 상선 그리고 원판만 남아있었다. 측전.우문호는 서서히 마취에서 깨어났고, 원경릉은 태상황의 부름이 있기 전부터 깨어있었다. 우문호는 몸을 일으켰고, 눈에는 여전히 살기가 가득했다. 원경릉은 더 이상 반항할 힘이 없었다. 그저 씁쓸한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냉정언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 의원을 부르지 않은 것이냐?" 역 일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돈이 없다고 하셔서 해열에 좋은 약초를 조금 달여주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의원을 부르고 진료하고 약을 짓는 데에는 모두 돈이 필요했지만, 역에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예산이 따로 없었다. "오계부의 부승이 상경하여 직무를 보고하러 왔는데, 돈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냐?" 냉정언이 놀라서 물었다. "나리께서 돈이 든 보따리를 도둑맞았다고 하셨습니다." "혼자 온 것이냐?" 냉정언이 물었다. "예. 관속이나 아전도 없이 혼자입니다." 경성과 꽤 멀리 떨어진 오계부의 부승이 그 먼 길을 수행 인원도 없이 홀로 와, 직무를 보고하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원경릉이 말했다. "내가 확인하겠소." "부인께서 의원이십니까?" "그렇다. 길을 안내하거라." 원경릉이 답했다. 역 일꾼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북당에서는 여인이 의술을 익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황후가 의학원을 세운 이후, 해마다 여인들이 입학하여 의술을 배우고 있었다. 우문호가 미색을 돌아보자, 미색이 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원경릉은 약상자를 챙겨 들고, 역 일꾼의 안내를 받아 한 객실로 향했는데, 문이 세게 잠겨져 있었다. 일꾼이 문을 두드렸다. "제 대인, 제 대인. 의원께서 오셨습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하지만 방은 일꾼의 부름에도 여전히 잠잠했다. 이내 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한참 기침을 하다,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마." 말이 끝나자, 침대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솜으로 만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채, 핏발이 선 눈만 드러낸 관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문턱을 잡고 서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른 뒤
이번 순행에 서일이 동참하면서 사식이도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러나 고된 여정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원가에서 사식이가 서일과 함께 순행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원가는 서일 부부가 3년이든 5년이든 돌아오지 않더라도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해주었다. 그 역시 아이들과 떠들썩하게 지내고 싶어 했던 터라 기뻤다.탕양도 순행에 참여했으나, 그의 부인은 맡은 직책이 있어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미색 또한 당연히 회왕을 따라갈 예정이었으나, 오랜만의 외출인 만큼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시어머니인 태비도 흔쾌히 아이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이제 아이도 다 컸으니 힘들게 돌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신나게 순행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원경릉은 순행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숙왕부의 노인들이 걱정되었다. 비록 삼대 거두는 여행을 떠난 상황이긴 하지만, 숙왕부에는 아직 흑영 어르신들이 계셨다. 그리고 안정을 찾은 추 할머니마저 지속해서 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온갖 걱정에 흽싸인 원경릉 때문에 오히려 원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성가시다고 느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편히 놀러 가면 되지, 뭘 그렇게 걱정하냐? 내가 있지 않느냐?"그 말에 원경릉은 할머니를 껴안으며 웃었다."맞아요. 제가 몸이 열 개라도 할머니는 못 이길 테니까요!"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원경릉이 비록 황후라고 해도, 숙방부에서의 위세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는 바로 주사기를 꺼낼 때 뿐이지만, 원 할머니는 달랐다. 그녀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빛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을 제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그녀의 성격이 점점 난폭해져서, 틈만 나면 사람을 끌고 가서 주사를 놓았다. 원 할머니가 손수 만든 약이 한가득 담긴, 원경릉의 약상자에는 없는 귀한 약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약들은 수토불복, 고
조사가 끝난 후, 목을 쳐야 할 자는 목을 치고, 옥에 보내야 할 자는 옥에 보냈다. 그리고 오씨가 챙긴 돈은 전부 피해자 가족들에게 배상되었다.우문호는 신하들 앞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그는 탐관오리를 금지하고 청렴을 장려하는 법을 내렸으며, 부정부패 전담 조사 관아를 설립해 전국을 조사하라 명했다. 부정부패를 근절해야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동시에 그는 신하들의 봉급 인상을 제안했다. "예전엔 나라가 가난해 관리들의 봉급이 적었지만, 이제는 나라도 번영하고 산업이 활성화되었으니 함께 잘 살아야 할 때다." 봉급을 높이면 부정부패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조회가 끝난 후 우문호는 수보와 친왕들을 불러 오래 전부터 품어온 생각을 털어놓았다."과인은 순행하고자 하오!"나라가 태평하지만 황제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왕과 태자 시절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았지만, 지금은 점점 백성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직접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보고 싶었고, 공무를 핑계로 원 선생과 북당 전역을 둘러보고 싶었다.냉정언이 적극 찬성하며 말했다."상소문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은폐된 사실, 억울한 사건, 고통받는 백성들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옳은 말이네." 우문호는 최근 냉정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그러나 냉정언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하지만 아직 각지에 위험한 도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안전을 위해 소신이 대신 가는 것이..."그러자 우문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수보의 말도 일리 있지만, 참 뻔뻔하구먼!" 그러고는 어명이 적힌 서찰을 건네며 덧붙였다."함께 순행할 명단이니 반포하시게!"냉정언은 자기가 제외될 줄 알았으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소신도 갈 수 있습니까?""가시게. 국정에 큰일이 없으니 내각에서 처리할 수 있네. 새로 양성한 인재들의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이기도 하고.""상산명이
제3365화공주가 웃으며 말했다."그 도적이 내 손을 만지긴 했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부마께서 그의 손을 잘라버렸으니!”원경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싸늘한 눈빛을 내뿜는 이리 나리를 올려다보고는, 속으로 생각했다.'이리 나리의 성격으로는 공주를 잡아간 자의 손만 자른 것이 아니라 고깃덩이로 만들어도 모자랄 텐데…'"걱정하지 마시오. 그리고 어머님께서 아시면 걱정하실 테니, 이 일은 밖에 알리지 말아 주시오."공주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효성이 지극한 그녀는 시어머니가 예전에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정말 너무 놀랐소."원경릉은 공주의 혈압과 심박수를 확인했고, 다행히 이상은 없었다."부마께서 분명 나를 구하러 오실 것이라 알고 있었기에, 하나도 무섭지 않았소."공주는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바라보았고,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과 존경이 가득했다.평소 두 사람의 관계는 늘 이랬다. 그녀는 그를 존경했고, 그는 그녀를 아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리 나리의 눈빛에 평소와 같은 다정함 대신 어둡고 진지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아!"공주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안색이 곧바로 어두워진 이리 나리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검을 뽑아 들었다. 원경릉은 그의 모습을 보며, 공부보다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어쩌면 이리 나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이 말했다."그저 손톱이 부러졌을 뿐입니다."그제서야 이리 나리는 천천히 검을 내리고 착잡한 눈빛을 지었다."아, 그런 것이었소."원경릉은 다시 공주를 자리에 앉히고 몇 마디 나눈 뒤, 이리 나리를 향해 말했다."잠깐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공주의 곁을 떠나기 싫은 이리 나리가 입을 열었다."할 말 있으면 이곳에서 하거라.""그저 몇 마디면 되니, 밖으로 가시지요."원경릉이 재차 권했다.이리 나리는 공주를 힐끔 보고는 말을 덧붙였다."그럼 여기서 기다리시오. 어디 가지 말고."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얌전히 의
공주는 결국 비틀거리며 땅에 쓰러져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눈앞의 광경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비단 망토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얼굴과 머리를 덮은 덕분에 그녀는 이 잔인한 장면을 보지 못했다.이내 그녀는 익숙한 품속에 안겼고, 그는 그녀의 얼굴에 묻은 피를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공주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비단옷이 떨어지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고, 얼굴에 묻었던 피는 이미 닦여 있었다.그녀가 상황을 제대로 보기도 전, 그는 비단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미색아!"이리 나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그러자 미색이 곧바로 공중에서 날아와, 이리 나리의 손에서 공주의 손을 뺐다."가시지요!"혈전과 살육이 난무하는 가운데, 미색은 공주를 데리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덕분에 공주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광경을 보지 못했다.물론 서방인 이리율의 싸늘하고 무서운 표정마저도 말이다. 오 씨는 곧바로 붙잡혔고, 그와 함께 있던 녹림의 도적들은 반항을 한 죄로 모두 살해되었다. 그들은 조용히 목숨을 잃었고, 대부분 검으로 한 번에 숨을 거두었다.오직 오 씨만, 이리율의 손에 넘겨졌다.한 손이 잘린 오 씨는 염라대왕과도 같은 이리율의 모습을 보고, 벌벌 떨며 무릎을 꿇었다."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하지만 이리율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훼천, 멸지, 오늘 너희의 검을 써야겠구나."그러자 두 자루의 검이 동시에 이리 나리에게 던져졌고, 이리 나리는 검을 받아 들자마자 바로 휘둘렀다. 검이 내뿜는 싸늘한 빛에 오 씨는 겁을 먹고 뒤로 기어갔다.검이 번쩍이자, 오 씨의 또 다른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질렀고, 이리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검을 동시에 휘둘러, 오 씨의 두 발을 깔끔하게 잘라냈다.오 씨는 비명을 지르다, 기절할 뻔했다.이리 나리는 여전히 두 검을 휘두르며, 오 씨의 가슴과 배를 찔렀다. 검은 그의 몸을 관통했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이리 나리는 훼천과 멸
한편, 낭당산에서 공사를 담당했던 오 씨는 도적 무리와 함께 술을 마시며, 앞으로의 계획을 함께 논의하고 있었다.오 씨는 난폭하고 독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도적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에서 산적들을 단속하기 시작하자, 바로 도망쳐 살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얌전히 지내겠다고 맹세하며 관아의 눈을 피해 살아남았지만 그의 잔인한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법에 맞지 않는 일들을 많이 해왔지만, 용케도 파장이 크지 않아, 관아의 눈에 띄지 않았다.그는 더 이상 남들처럼 일로 돈을 벌고 싶지 않았고, 큰돈을 벌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공주를 납치하였다."형님, 돈을 받고 정말 공주를 놓아줄 셈입니까?"술을 한참 마시다가 그의 부하가 물었다.오 씨는 묶여 있는 공주를 차가운 눈빛으로 힐끗 쳐다보고는 싸늘하게 말했다."먼저 데리고 다녀야지. 방서를 붙이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경성을 떠나자마자 죽여버릴 것이다!"공주는 몸도 묶여 있고 입도 막혔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부림치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리 나리가 반드시 자신을 구하러 올 것임을 믿고 있었다.그녀는 이 일을 조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공주는 애써 가냘파 보이려 노력했다. 연약한 척해야 도적들이 그녀를 해치려는 순간 반격할 수 있었다. 무예를 배웠으니, 도망칠 기회도 있을 것이지만 지금은 적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있어야 했다.오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술을 권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다들 오늘 술 한 잔 마시고, 내일부터 보초를 서야 하네. 이리율이라는 자는 아주 소식을 얻는 것에 능한 자이네. 아마 이틀이 지나면 이곳에 찾아올 것이니, 미리 함정을 설치하고, 그자의 부하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네. 그래야 순순히 돈을 내놓을 것 아닌가? 우린 곧 떼돈 버는 거네."녹림의 도적들은 모두 일어나서 환호했다."오 대감 덕분에 우리가 돈도 벌고 좋소! 자, 마십시다!"술이 끊임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