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원제의 넷째 아들 우문안 내외가 들어간 뒤 그 바로 다음이 우문호와 원경릉이었다. 원경릉은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결코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 “초왕, 초왕비 들어가시오”상선이 말했다.원경릉이 우문호를 따라 일어섰다. 우문호는 앞장서서 장막을 열어 젖히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우문호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어 앉았다. 원경릉도 그의 뒤에 무릎을 꿇고 앉음과 동시에 신속하게 약상자를 꺼내어 내려놓았다. 약상자는 땅에 내려놓자마자 커졌다. 원경릉은 약상자가 왜 이러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빨리 마취제를 꺼내 주사기에 주입했다.슬픔에 잠긴 우문호는 그녀의 이러한 행동도 알아채지 못한 채, 목이 메어 소리 쳤다. “황조부……”원경릉이 우문호의 손을 잡아채자, 그는 당황스러움과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원경릉을 바라보았고, 원경릉은 빠르게 그의 팔 안쪽 혈관에 약을 주사했다. 그의 깜짝 놀란 눈동자에 한순간 분노가 가득 찼다. 원경릉은 마음 속으로 ‘다 됐다’하며, 우문호의 손을 놓고 고개를 돌렸다. 원경릉은 장막 밖을 의식하듯 큰 소리로 말했다.“황조부, 손자며느리가 절을 올립니다.”마음속으로 일초, 이초, 삼초……우문호는 퍼지는 약기운에 점차 몸이 축 늘어졌지만, 두 눈은 더욱 휘둥그레졌다. 원경릉은 놀랐다. 케타민은 사람을 빠르게 마취 상태로 만들어 의식을 잃게 한다. 하지만 우문호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태상황 역시 이 상황이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고, 풀린 눈으로 천천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원경릉은 계속 태상황에게 문안을 드리는 말을 이어하며, 주사기를 꺼내 포도당과 도파민을 희석시켰다. 그리고 태상황의 소매를 걷어 올려 정맥을 찾은 뒤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말했다. “태상황, 두려워 마세요. 제가 꼭 살려드리겠습니다.”태상황이 키우는 강아지 푸바오가 원경릉이 바늘로 황제를 찌르는 것을 보고 짖어대기 시작했고, 원경릉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놀랄까봐 급히 목소
마취제의 양이 많지 않아 우문호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원경릉이 그의 옆에 앉아 시중을 들던 나인들을 모두 내보내자 궁전은 아주 조용해졌다.강철 같은 손가락이 그녀의 목을 옥죄었고, 그녀는 숨을 쉴 수 조차 없었다. 우문호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야수처럼 살기 띈 눈빛으로 읊조렸다. “감히 네가 황조부를 독살하려고 해?”원경릉의 머리는 들려있었고, 눈알은 핏줄이 터질 것 같이 충혈되었다. 그녀으 얼굴이 순식간에 검붉은 색이 되었다. 그녀는 힘겹게 그에게 말했다. “왕야, 고개를 숙여 보시옵소서.”순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우문호의 허벅지 살을 꿰뚫었다. 그 바늘에는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관이 있었다. “당신이 나를 목 졸라 죽일 수 있지만, 내가 죽기 전에 당신이 먼저 죽을테니, 제 말을 먼저 듣는게 좋지 않겠습니까?”원경릉은 힘겹게 말하면서도 강인한 기개를 보였다. 그러자 그의 손이 천천히 풀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분노로 휩싸였고, 일그러진 그의 고운 얼굴이 분노를 애써 참으려는 모습이 보였다. “이봐, 무슨 독약을 쓴거야?” 그는 지금까지 한번도 그녀가 이런 독약을 쓸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녀를 얕잡아보다 큰코 다친 기분이 들었다. 원경릉은 바늘을 뽑으며 비꼬듯 웃었다. “제가 궁에서 태상황을 독살하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말해!” 우원호는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원경릉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독이 아니라 약입니다. 태상황의 병세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단지 태상황을 구하려고 했을 뿐 입니다.”우문호는 냉소를 지으며 살벌한 기색을 보였다. “내가 세상에 둘도 없는 의술의 신과 결혼 했다는 것을 몰랐네.”라고 비꼬며 그녀의 손을 강하게 이끌었다. “당장 나와 함께 아버지에게 가서 너의 죄를 고하렸다.”그는 원경릉을 강하게 끌어당겼고, 그녀는 그의 강철같은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 갔다. 몇걸음을 끌려갔을 때 원경릉이 말했다. “좋소. 내가 가서 죄를 고하겠습니다. 허나 나는 주명취
그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우문호가 누워있는 침대에 머리를 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며칠동안 발생한 일은 아무리 상상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생각조차 할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뭔가 미로로 빠진 것 같았다. 어떤이는 과학과 신학은 돌고돌아 결국 한 지점에서 만난다고 말한다. 두뇌의 개발과 연구가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어떤 물건이든 생각으로 사물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고, 이러한 두뇌가 자동으로 정보를 수집한다. 그 개발 정도를 생각하니 약간의 신의 영역의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원경릉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소매 주머니에 있는 약상자를 단단한 촉감을 느껴보았다. 소매가 흘러내리면서 하얀 손목이 드러났고, 손목 위로는 못 보던 붉은 상처가 보였다. ‘언제 다친거지? 방금 우문호와 몸싸움을 할때? 아냐. 이미 피딱지가 생겼고, 소매에도 묻은 것을 보니 적어도 30분 전에 난 상처인데…… 30분 전에?’그녀는 멍해졌다. 원경릉은 방금 전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가 성전 밖에서 기다리던 중에 우문호가 그녀를 밀쳤고, 주명취가 와서 자신을 부축해 준것이 떠올랐다. ‘설마, 단순한 부축이 아니었던거야?’그녀는 주명취가 왕 곁으로 돌아갈 때, 그녀의 눈빛에서 놀란 기색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주명취는 고의로 그녀에게 상처를 냈지만, 그녀가 자금탕을 복용했기에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원경릉의 기억이 또렷해졌다. 만약 예전의 원경릉이라면 틀림없이 대노하여 그 당시에 욕설을 퍼부었을 것이며, 그런 숙연한 자리에서 주명취는 사형을 당하지는 않아도 옥에 갇혔다가 버려졌을 것이다.원경릉은 한순간에 마음이 차가워졌다. 사람이 행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을 하다니.원경릉은 원래 주명취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두들 그녀를 악랄하다고 보는데, 원경릉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항상 주명취는 원경릉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하며 안부를 물었다.그녀의 아름답고 부드러운 얼굴에는 이런 악랄한 마음이 숨어 있었다니
궁에 있는 모든 어의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태상황이 음식을 삼킬 수가 있다고? 방금까지도 물 한모금 삼키지 못하셨던 분이……. 이미 임종까지 가신 분께서 어찌 저렇게 될 수 있는거지?’원판은 급히 들어가 맥을 짚었다. “하늘에 계신 신께서 북당의 태황상제님을 보살피신다!”하고 울부짖었다. 태상황의 맥박이 뜻밖에도 호전된 것이였다. 모든 장막이 걷혔다. 걷힌 장막 뒤로 태상황의 권위로운 얼굴이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굴려 신하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짝 마른 입술을 열어 말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뭣들 하느냐. 모두 일어나거라!”그 소리가 낙엽 굴러가듯 힘이 없었지만 신하들은 그 마저도 너무 기뻐하며 절을 하고 일어섰다. 태상황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파랗던 입술이 점차 선홍빛으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문호는 어디갔느냐”옆에 있던 상선이 다급하게 말했다. “초왕은 태상황님을 곁을 지키다 의식을 잃어 측전에 가서 쉬고 있습니다.”“이리 오라고 하거라.” 그 말을 들은 태상황의 입가엔 실낱같은 미소가 비쳤다. 그는 푸바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서 가거라. 내가 갈 수는 없지 않느냐.”푸바오는 꼬리를 흔들며 뛰어갔다.“어서 초왕에게 전하시오!”다급해진 상선이 소리쳤다.“손자 며느리……” 태상황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는 힘에 부치는듯한 목소리라 몇글자를 내뱉었다. “함께 오라고 하거라.” 태상황의 말에 모두가 의아했다. 특히 주명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상황이 왜 원경릉을 만나려고 하는것인가?태상황의 병이 호전됐으니, 명원제는 서둘러 사람들을 궁 밖으로 내보냈고, 친왕들은 외전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궁에는 명원제와 예친왕, 상선 그리고 원판만 남아있었다. 측전.우문호는 서서히 마취에서 깨어났고, 원경릉은 태상황의 부름이 있기 전부터 깨어있었다. 우문호는 몸을 일으켰고, 눈에는 여전히 살기가 가득했다. 원경릉은 더 이상 반항할 힘이 없었다. 그저 씁쓸한
원경릉은 태상황의 안색을 살폈다. 전보다 청색증도 많이 사라졌고, 호흡도 순조로워 보여 원경릉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상황은 우문호를 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를 본 우문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등에 베개를 덧대어 반쯤 눕혔다. “다섯째야, 내가 너의 부인을 오늘 처음 보는 구나.” 태상황은 건강할 때보다는 못하지만, 이전보다 총기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문호의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황조부가 정신이 드시자마자, 왜 원경릉에 대해 물어보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해 내내 태상황은 병상에 있었다. 그들이 혼인을 맺은 후, 궁에 들어가 문안을 드리려고 했는데, 태상황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원경릉을 보여드리지 못했다. 원경릉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태상황이 자신 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의 눈빛은 사람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지닌 듯해 보였다. 태상황의 재위 38년, 그는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었던 시대에 장기집권 했다. 그는 그 세월동안 사람을 꿰뚫어보는 내공이 생긴 것 이다.“황조부, 그녀는…… 황조부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니, 손자가 미처 부인을 데리고 오지 않았습니다.” 우문호는 이렇게 밖에 변명할 수 없었다.“과인이 곧 죽을 사람이라, 병이라도 옮을까 데려오지 않은게냐?” 태상황이 부드러운 말투로 웃었다.원경릉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다가 태상황의 날카로운 눈빛을 느끼자 놀라서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황조부께서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만수무강하실겁니다.” 우문호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묻어났다.명원제와 예친왕이 옆에서 “하늘이 태상황을 도우셨습니다.” 라고 말했다.궁인이 좁쌀죽을 가져왔다. 상선이 죽을 받아 올리려고 하자, 태상황이 상선을 바라보았다.“왜? 과인은 젊은 궁인이 가져다 주는 것은 먹으면 안되는 것이냐? 네 눈 좀 봐라 시커먼 것이! 내가 네 눈 밑 시커먼 것에 놀라 죽겠다. 가서 잠이나 자거라! 여기는 초왕비가 남아서 내 시중을 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우문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원경릉이 바늘로 황조부를 찌르는 것을 보았지만, 그 안에 독이 들었는지 무엇이 들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왕조부의 병세가 호전되기는 했지만, 만약 바늘로 찌른게 독이라면 정신을 잃거나 몸을 가누지 못한다거나, 혹은 다른 증상이 있을 수도 있다. 원경릉은 도대체 이런걸 어떻게 알았으며, 누가 가르쳐준 걸까? 그녀의 아버지인 정후 원팔룡? 허나 그는 그렇다할 배짱이 없다. 그저 권세에 붙어 이리저리 휘둘리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원경릉이 행한 일을 태상황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분명 우문호를 배후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는 생각할 수록 불안해져서 탕양에게 녹주와 기상궁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했다. 그들 두 사람은 원경릉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그녀가 어떤 이상한 행동을 했다면, 이 둘이 모를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녹주는 항시 붙어있는 궁인인데, 원경릉이 태상황이 있는 건곤전에 남아 병수발을 한다는 말을 전해듣고 놀랐다. 바쁜 걸음으로 돌아와 기상궁에게 알려주었더니 기상궁도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두 사람은 왕야의 부름을 듣고, 급히 달려갔다. “왕야!” 두 사람이 왕야 서재에 있는 왕야를 향해 절을 했다. 우문호는 기상궁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손자가 생각이 났다. “열이는 요즘 어때요?”“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제 별일 없습니다.” 우문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의원이 의술이 좋으신가보네”라고 말을 했다. 기상궁은 잠시 망설이다가 “네…… 그렇습니다!”라고 했다.우문호가 기상궁이 망설이는 것을 느끼자 그녀를 담담하게 보며 “기상궁 지금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지 않은가?” 라고 물었다. 기상궁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제가 어찌 감히!” 하며 고개를 숙였다.우문호는 차가운 얼굴로 담담하게“본래 기상궁은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보필했으며, 본왕에 대한 충성을 다 했으므로, 어떤 일도 나에게 숨기지 않을 것이야.” 라고 말했다.싸늘함을 느낀
건곤전 내.태상황이 명원제와 예친왕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힘이 들었는지 모두 내보냈다. 옆에 있던 어의도 내보내고 나니 전 내에는 원경릉과 태상황만 남았다.명원제가 나가기 전에 의미심장한 눈으로 아무말 없이 원경릉을 훑어 보았다. 건곤전은 고요했으며 감싸고 있는 장막이 두꺼운 것이 바람 한점 통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침대 옆에 서서 무엇을 해야할지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태상황이 감고 있던 눈을 번 쩍 뜨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원경릉을 훑어보았다. “앉거라!”그가 소리쳤다. 원경릉은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미 자금탕의 효력이 다 떨어진 후인지라 몸이 찢어질 듯 아팠다. “네 죄를 알고 있느냐.” 태상황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원경릉은 태상황이 그녀는 자신을 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속세에 미련이 없지 않는 한 그녀는 그에게 생명을 줄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들고 “알고 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죄는 어디에서 오는가?”“제 의술이 비록 서투르나 옥체를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원경릉은 수박 겉핥기 식의 대답을 했다.“너의 의술이 서투르다니, 너는 태의원의 의원들을 모두 돌팔이로 만들 작정이냐!”태상황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원경릉은 이 말을 듣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태상황이 자신의 의술을 믿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 같았다.아니나 다를까 태상황은 원경릉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리 와서 앉거라. 과인에 병에 대해 말해보거라. 이게 죽을 병이냐?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느냐?”원경릉은 천천히 일어나며 “아직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제게 태상황을 검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라고 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는게냐. 진맥을 해보거라.” 태상황은 어디선가 이상한 것을 꺼내 귀에 매달고 있는 원경릉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 먼저 심장 소리를 들어 보겠습니다.” 잠시 후 태상황이 입을 파르르 떨며 “지금 과인에게 뭐하는 짓
저녁에 명원제가 건곤전에 문안하러 왔다. 그는 태상황의 상태가 전보다 호전된 것을 확인 한 후 돌아갔다. 원경릉은 명원제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줄곧 한 구석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명원제가 자리를 떠난 후, 상선은 늘 그래왔듯 자기 전 태상황의 몸을 정성스레 닦았고, 원경릉은 외전으로 자리를 피했다. 이 틈을 타 그녀는 자신에게 주사를 놓았다. 상처가 난지 꽤 되었기도 하고 계속해서 자극이 있었던지라 고름이 잡히려고 하는 것 같았다. 주사를 놓은 후, 그녀가 잠시 엎드려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데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속에서 울컥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녀의 목구멍에서는 비릿한 맛이 느껴졌으며 입술 사이로 핏물이 흘렀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 나무 아래에 피를 토하고는 나무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기위해 애썼다.“왕비님, 왜그러십니까?” 등뒤로 상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원경릉은 손을 저으며 “체한 것 같습니다. 별일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상선은 그녀의 안색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원경릉은 ‘왜 피를 토한거지’ 하는 의구심을 꾹 참고 궁으로 돌아갔다. 침상에 반쯤 걸터 앉은 태상황의 모습이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전보다 훨씬 좋아진 모습이었다.“태상황님, 주사를 맞으셔야 합니다.”원경릉이 말했다. 태상황은 팔을 걷어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과인이 상전을 내보냈으니, 너는 네 일에만 집중하거라.”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태상황의 심장박동과 호흡을 확인해보았다. 호흡이 약간 불안정했다. 원경릉은 도파민을 꺼내 링거를 놓았다. 그녀는 설저환 한 병을 꺼내 태상황에게 주면서 “이 약은 응급시에 드셔야 합니다. 가슴이 아프거나 숨이 막히면 혀 아래에 넣으십시오” 라고 말했다. 태상황은 손을 내밀어 설저환을 한움큼 받았다. 잠시 후, 원경릉이 한손에 각양각색의 약을 한움큼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물을 가지고 왔다. 태상황은 조금 짜증나는 목소리로 “이게 다 뭐야?”라고 말했다. “다 드
그래도 우문호는 역시 직접 계란이를 봐야 안심이 돼서, 그들에게 밖에 서 있으라고 하고 원경릉과 살금살금 문을 밀고 들어갔다.방안이 하도 캄캄해서 조심조심 들어가던 우문호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한밤중에 가끔 올 때, 계란이가 밤중에 일어나 밤 수유하기 편하도록, 방에 등을 켜져 있었는데 오늘 밤은 어째서 등이 켜져 있지 않은 거지?우문호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얼른 나가서 풍등을 가지고 들어와 막 문을 들어서는데 원경릉이 발아래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원 선생, 당장 발 들어!”원경릉이 무의식적으로 발을 들고 고개를 숙여보니, 발 아래는 영양실조에 걸린 깃털 하나가 있었다. 원경릉이 의아해하며 집어 들으며 물었다. “계란이의 신조 털이네, 어? 신조는?”신조는 원래 방 안 새장에서 살고 있는데, 낮에 계란이가 일어났을 때나 내보내 주지만 지금은 새장이 열려있고 신조는 보이지 않고, 깃털 하나만 바닥에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우문호의 안색이 돌변해 서둘러 풍등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침실 안에선 유모들이 탁자에 엎드려 자고 있다가, 발소리를 듣고 황송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황제 폐하? 황후 마마께서…?!”황제와 황후가 늘 밤에 오곤 하기에 별생각 없이 일어나 예를 취하는데, 황제가 벌써 쏜살같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고,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침대엔 이불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문호는 얼른 방안을 살펴보다가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이성을 잃고 계란이를 부르며 바로 달려 나갔다.“맙소사!” 유모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할 말을 잃었다. “공주마마? 공주마마는?”원경릉이 새장을 자세히 본뒤 우문호가 계란이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말할 겨를도 없이 우문호가 뛰쳐나가는 것을 보고, 순간 안색이 돌변하며 따라가 보았는데, 계란이는 보이지 않았고 유모들은 울고 있었다.“어떻게 된 겁니까? 누가 들어온 겁니까?!” 원경릉이 다급하게 물었다.하지만 유모들은 모두 얼이 빠져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
안풍 친왕비는 재검을 받으러 주 재상을 데리고 가고, 무상황과 소요공은 원래 집에 있으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걸 돕거나 가끔 휘종제에게 효를 다하곤 했다.북당 쪽은 박원과 소홍천이 이미 풍도성에 도착했다. 부임하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잔당을 진압한 것이 효과가 있었으나, 일부 잔당은 도망쳐서 경성으로 떠났다.박원은 어쨌든 신임 관리인이라, 안지여의 결사대만큼은 그 땅에 익숙하지 않았으나, 그들도 풍도성에 나름대로 인맥이 있었다. 잔당들이 도주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그들이 경성으로 가서 황제를 암살하려 들까 걱정된 나머지, 바로 서신을 써 경성으로 전서구를 보냈다.우문호는 전서구를 받은 뒤, 경성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엄중하게 조사하도록 성지를 내리고, 성문에 검문소를 설치해 바깥에서 경성으로 들어오거나, 풍도성에서 온 무공을 하는 사람은 전부 밀착 조사를 받게 했다.이리 나리 말에 따르면 그날 안지여의 생일잔치에 참여한 다수가 무림 사람들이였다. 그들이 당일엔 안지여를 보호하지 않았던 게, 일이 이렇게 심각할 거로 생각하지 못했었기에 나중에 안지여에게 일이 터지자 풍도성도 안풍 친왕에게 제압당해 그들도 한순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어쨌든 장기적으로 안지여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 강호인의 특징이 의리를 중시하므로 반드시 안지여를 위해 복수할 것이며, 특히 안지여의 결사대 부하 전부를 재판에 회부한 것이 아니라 그게 결국 복병이 될 것이라고 했다.우문호가 이렇게 걱정하는 가장 큰 이유는 원 선생이 늘 의대를 가느라 출궁하는데다가 곁에 사람들 데리고 다니는 것을 싫어해서, 자객을 만나면 원경릉 무공이 허접해 사고가 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검열을 강화하라는 성지를 내린 뒤, 서일과 구사 두 사람에게 원경릉과 출입을 함께 하며 적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도록 했다.사실 우문호도 아내가 예전과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예전에 솜방망이 같은 주먹과 발차기가 익숙해져 사람을 몇 명이라도 더 보내 지키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다.
원경릉이 오늘 출궁하지 않은 대신 안풍 친왕비가 원경릉을 보기 위해 입궐했다.원경릉은 어젯밤 이리 나리 저택에서 본 그림자를 떠올리자, 자기가 잘못 본 게 아니란 걸 알고, 어쩌면 몇 년 후의 안풍 친왕비가 그리운 사람을 보기 위해 돌아온 것일지도 몰랐다.안풍 친왕비에게 안으로 들어와 앉으라고 한 뒤 차를 대접하는데 안풍 친왕비가 바로 얘기를 꺼냈다. “우리 내일 현대에 돌아갔다 올 건데, 전할 거나 할 말 있으면 전해 줄까?”“돌아가시게요?” 원경릉이 놀라서 물었다. ‘자기 입으로 여기 남겠다고 하지 않았나?’“일이 좀 있어서 한 번 다녀와야 해. 곧바로 돌아올 거야.”“아하.” 원경릉이 안심했다. 정말 현대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면 어르신들은 열받아서 돌아가실 수 있었다. “다섯째에게도 한 번 물어봐, 아이들에게 전할 말 있는지. 네 큰할아버지 말로는 어젯밤 얘기하는데 다섯째는 줄곧 애들 얘기뿐이었데. 굉장히 그리워하는 거 같더라며.”“알았어요. 있다가 물어볼게요. 언제 가셔서 뭐 하시는 거예요?”“주 꼬맹이 데리고 가서 검사받으려고, 어젯밤 머리가 아프다고 소리치더라고. 자세히 물어보니 요즘 머리가 자주 아팠다고 해서, 좀 일찍 가서 재검을 받아 보려고 해. 할머니와 상의해 봤더니 돌아가서 검사해 보는 게 좋겠다고 하시니 시간 끌지 말고 바로 가야지.”“두통이요? 심해요?” 원경릉은 긴장이 됐다.“더 심해질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가서 검사받으려고. 문제를 알면 바로 치료할 수 있을 테니까.”원경릉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렇죠. 주 재상은 마마께 맡길게요. 고마워요.”안풍 친왕비가 원경릉을 흘겨봤다. “그런 말 듣는 게 영 익숙해 지지가 않네. 주 꼬맹이는 내가 아기 때부터 키운 아인데…. 됐어. 그만하자. 어쨌든 결석한 시기가 있으니까.”원경릉은 안풍 친왕비가 뭔가 아쉬워한다는 걸 눈치챘다. 이 아쉬움은 계속 주 재상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다.하지만 어쨌든지 간에 지금 같이 편안한 만년을 보내고 있
원경릉이 눈을 크게 뜨고 놀라했다. “어?”‘진짜 귀도 밝네.’그러자 우문호가 장난꾸러기처럼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야말로 둘째 형을 놀려먹어야지. 형은 약을 먹는다고. 말로는 정력을 보강하는 거라는데, 둘째 형수가 주야장천 그 얘기라는 걸 나도 모르진 않아.”원경릉이 웃었다. “둘째 형님의 음담패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니까.”우문호가 원경릉을 끌어안으며 귀밑머리를 만져주었다. “최근 애들 일로 고민하느라 그런 거지, 일부러 당신을 차갑게 대한 거 아니야.”“자기가 그랬다는 게 아니…” 그 순간 뜨거운 입술이 원경릉의 말을 막고,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자신의 몸쪽으로확 끌어당기더니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하여간 독특하다니까. 그래도 지금 달리고 있는 마차 안이란 사실은 잊지 않아서, 우문호는 부드럽게 원경릉의 반쯤 벗겨진 옷과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더니, 엷게 화장기가 남은 볼에 다시 키스하고, 정열의 불꽃이 여전히 타오르며 그윽한 눈으로 원경릉을 바라봤다. “곧 도착해.”원경릉은 우문호의 가슴에 엎드려 있었는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궁으로 돌아가자 계란이는 이미 잠들었고, 부부는 살금살금 들어가 계란이를 보는데, 자는 아이는 정말 천사구나.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며 나가는 게 아쉬워, 다가가 얼른 계란이 얼굴에 뽀뽀하고 싶었지만 깰까 봐 꾹 참았다.결국 둘은 손을 잡고 방으로 돌아갔다.술을 마셔서 땀이 났으므로 곧바로 옷을 가지고 목욕하러 갔다.궁중에는 온천이 있었는데, 소월전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라 부부는 기라와 녹주에게 따라올 필요 없다고 하고, 둘이 손잡고 갔다.온천에서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가운데, 옷을 벗고 둘은 미끄러지듯 물속으로 들어가, 우문호는 원경릉의 가는 허리를 안고 자기 몸 앞으로 바짝 당겼다.황제가 된 후 이렇게 감미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별로 없어서, 우문호는 원경릉의 입술에 다시 입맞춤을 했고, 원경릉은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우문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단단하고 힘
동서들이 마당을 거닐다가 정자에 앉아 사람을 시켜 공주를 불러오게 했다.공주는 시어머니를 챙기고 있었는데, 오늘 밤 시어머니가 기뻐서 술이 좀 과한 나머지 시어머니가 주무시도록 시중을 들고 그제야 합류했다.“하하 호호 뭐가 그리 즐거우세요?” 공주가 와서 보니 모두 얼굴이 발그레하게 웃고 있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원용의가 웃으며 말했다. “둘째 형님 입에 음담패설이 붙어서, 우리가 아무리 화제를 돌리려 해도 꿈쩍도 안 하세요.”“네?” 공주가 놀랐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요 며칠 노부인께서 오셔서 시어머니 진맥을 해주시고 몸조리를 해주셨는데, 그때 약 다리는 아이를 시켜 손왕부에 가서 약을 바꾸라고 분부하셨어요, 둘째 오빠가 한동안 먹어서 맛을 좀 바꿀 필요가 있다면서. 전 둘째 오빠가 어디 아픈 줄 알고 노부인께 여쭤봤더니 둘째 오빠가 몸조리가 필요하다며, 어쩌면 아이를 또 낳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다들 의아한 눈초리로 손 왕비를 바라보자, 금세 난처해하는 모습에 다들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미색이 손 왕비에게 한마디 했다. “어쩐지 계속 그 얘기만 하더라니. 알고 보니 진짜 밤마다 새색시는 따로 있었군요.”“둘째 형님, 하나 더 낳고 싶으신가요?” 원용의가 물었다.손 왕비가 얼굴을 붉히며 사람들에게 눈을 흘겼다. “뭐야? 내가 낳기는 뭘 또 낳아? 나이가 지금 몇인데. 더 낳으면 사람들한테 웃음거리밖에 더 돼? 늘그막에 자식을 본다고. 그런 건 다들 요 부인한테 물어봐야지, 요 부인은 훼천이랑 혼인한 지 얼마 안 됐고, 훼천은 아이가 없으니까. 하나 낳을 생각 없어?”요 부인이 단정지으며 말했다. “훼천은 예전에 희열이랑 희성이를 자기 딸로 대하겠다고 했고, 자기가 낳은 자식이든 아니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어요.”“요 부인도 안 늙었어요. 더 낳을 수 있죠!” 원용의가 말했다.“인연이 닿으면요, 하지만 우리는 안 낳기로 했어요!” 요 부인이 말했다.다들 웃으며 원경릉을 바라봤다.원경릉은 머리카락이 쭈뼛하게 곤두섰다. “저
비록 몇 년 전 일이지만, 원경릉에겐 그 사건이 지금도 여전히 흑역사로 남아 있었다.거의 술자리를 마칠 무렵, 원경릉과 친왕비들은 마당을 걸으며 술을 깨고 있었다.훼천은 여자들이 일어날 때 작은 소리로 요부인에게 속삭였다. “날이 어두우니 길 조심해요.”요부인 얼굴이 살짝 빨개지고 미색이 아주 살풍경하게 말했다. “다 들려.”훼천이 미색에게 눈을 흘기고 남자들과 술잔을 계속 주고받았다.여자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회랑에 올라 마당에 초목이 우거져 그늘진 곳을 보는데, 누군가 서 있는 것 같아 원경릉이 자세히 보니 아무래도 안풍 친왕비 같은 것이, 꽃나무 뒤에 서서 본관에 있는 사람을 보는 모습에 놀라서 물었다. “안풍 친왕비 마마?”“누구야?” 요 부인이 물으며 쳐다봤다. “사람이 대체 어딨는데? 안풍 친왕비 마마는 본관에 계시지 않아?”원경릉이 다시 보니 보이지 않아 헤헤거리며 웃었다. “제가 취했나봐요, 눈이 다 삼삼한 게!”“원래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오늘 밤엔 그렇게나 많이 마시더라니요.” 원용의가 말했다.사식이가 킥킥 웃어댔다. “사실 원 언니가 오늘 술주정 부릴 줄 알았는데, 마셔도 아무 일도 없을 줄이야.”그러자 원경릉이 사식이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혔다. “요 계집애가 내가 주정부리는 걸 보고 싶었단 말이지.”다들 깔깔 웃느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꽃밭으로 멀리멀리 흩어져갔다.돌아봐도 꽃나무 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은 아무에게도 안 들리게 한숨을 내쉬었다.세월은 앞으로 가고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지만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 모른다.문득 귓가에 안풍 친왕이 전에 했던 말이 울려왔다. ‘함께 할 수 있을 때 소중히 대해 줘’.원경릉은 다시 한숨을 쉬며 사식이와 요 부인의 팔짱을 꼈다. ‘그래, 아직 같이 있으니 소중히 여기자.’“훼천이랑 혼례를 치르니까 어때요?” 원경릉이 요 부인에게 물었다.손 왕비는 요 부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웃으며 답했다. “뭘 물어? 요 부인이 요즘
아이들이 없는 황궁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계란이마저 울적해 보이는 게, 전에는 매일 오빠들이 와서 서로 안아주려고 난리였는데, 이제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이 보이지 않으니 종일 시무룩해져 있었다.아빠가 안아주는 게 좋긴 했지만 그는 종일 조정 일로 바쁜탓에 자기 전에 겨우 와서 안고 놀아주는 거라 이전과 비교가 됐다. 계란이 뿐 아니라 눈 늑대와 호랑이도 심심해서 꼬마 주인들 방 복도에 엎드려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며 나가 놀지도 않는 게, 계속 이런 식이면 다들 기분이 축 처져 안 되겠다 싶었다.원경릉은 친목 이벤트를 기획해 각 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궁으로 놀러 오라고 하자, 친왕들이 알았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입궐해 궁중은 다시 시끌벅적해졌으나 우문호는 오히려 전부 다른 사람 아이란 생각에 거의 울 뻔했다.하지만 계란이는 이렇게 많은 아이를 보자 기분이 좋아졌고, 늙은 아빠 우문호도 따라서 즐거워했다. 우문호는 계란이가 종일 시무룩하게 있을까 봐 걱정이 들었다.딸이 좋으면 우문호도 뭐든 다 좋았다.천행이의 백일이 되자 보상의 의미로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천행이는 이제 할머니도 있는 몸이니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게 도리다.잔치는 굉장히 성대했다. 이리 나리는 은자를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천금으로 아내와 엄마를 즐겁게 할 수 있다면야.백일 잔치에 모두가 아주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다. 마지막에 손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간 뒤 같이 둘러앉아 술을 홀짝일 때 약간의 에피소드가 터지며 다들 웃기며 슬픈 상황에 부닥치고 말았다. 숙왕부 어르신이 그릇을 가져와서 음식을 싸서 온 것이었다. 사실 지금 숙왕부는 전혀 궁색해 보이지 않았지만, 수십 년간 몸에 밴 습관이 무서운 게 음식 낭비를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전에 원경릉은 이리 나리 일이 해결된 뒤 안풍 친왕 부부가 떠날 줄 알았는데, 백일 잔치까지 가지 않고 있길래 개인적으로 안풍 친왕비에게 물었다. 그러자, “전엔 돌아가고 싶었지, 꿈에라도 간절히 돌아가고 싶었어. 하지만 돌아간
게다가 엄마, 아빠, 휘종제 일행이 모두 여기 있어 안심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제일 큰 문제는 바로 떼어놓지 못하는 아쉬움이었다.특히 우문호는 계란이를 손바닥 위에 보석처럼 대해서 하루도 떨어져 있지를 못하는데 몇 년씩이나 떨어져야 있으면, 가끔 올 수 있다고 해도 곁에 두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 원경릉이 돌아가서 얘기하면 우문호가 울부짖을 게 불 보듯 훤했다.원경릉은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북당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밟았다.서일은 경호에서 며칠을 기다리다가 황후가 물건을 가져오는 것을 보고 감동받았다.원경릉이 트렁크를 서일에게 주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필요하다고 한 건 다 사 왔으니까. 가져가서 처자식이나 기쁘게 해 줘.”“황후 마마는 역시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이세요!” 서일은 사람을 칭찬하는 어휘가 한정적이지만 최대한의 감사와 감격을 담아 표현했다.“사식이랑 아이를 이렇게 끔찍하게 챙기다니 의왼데.” 원경릉이 엷은 미소를 띠고 농담했다. 이 멍청이는 정말이지 사람 마음을 잘 아는 좋은 남자다.궁으로 돌아오니 이미 밤이 되었다. 우문호는 아마 오늘쯤 원경릉이 돌아올 거라고 예상해서 서둘러 일을 끝내고 소월궁으로 돌아와서 그녀를 기다렸다. 저녁 수라를 들고 나자, 짧은 이별은 신혼보다 짜릿해서 격렬한 사랑을 나눈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우문호가 뒤에서 원경릉을 끌어안고 침대에서 아이들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보자, 원경릉이 뭔가 감추면서 아이들이 엄마와 헤어지며 아주 아쉬워했고 특히 아빠랑 헤어지기 아쉬워해서 방학하면 바로 아빠 보러 돌아온다 말했다고만 전해주었다. 선의의 거짓말을 해 우문호를 기쁘게 해주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역시 아낀 보람이 있네!”“애들이…. 철 들었어.” 원경릉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머릿속으로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간섭에서 벗어나 맘대로 난장판을 치는 영상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양심이라고는 없는 녀석들.우문호가 말했다. “눈앞에 닥친 일을 마치면… 얼추 며칠은 갈
현대로 돌아가 가족과 한자리에 모이니 모두 즐거워 보였다. 원경릉은 집안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을 데리고 휘종제와 건종 태자를 알현하러 갔다.휘종제와 건종 태자도 매우 기뻐했는데, 특히 아이들이 유학하러 와서 앞으로 여기서 산다는 얘기에, 휘종제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며 앞으로 아이들에게 드는 모든 비용은 전부 자기들이 대고 방학에 북당으로 보내고, 개학 때 맞이하는 것도 자기들이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외갓집엔 모두 출근하는 분들 뿐이라 불편할 거라는 것이었다.원경릉은 일단 감사드리고 북당에서 가져온 술과 검, 궁에서 가져온 흙 한 줌과 돌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건 우문호가 준비한 것으로 고향을 오래 떠나 있는 사람은 고향의 흙과 돌이 그리운 법이라고 했다.휘종제와 건종 태자가 흙과 돌을 보더니 손에 들곤 통곡하기 시작했다.원경릉이 두 사람을 위로한 뒤, 그들은 슬퍼하며 ‘언제 한 번 가볼까, 딱 한 번 보더라도, 아무도 만날 수 없어도 좋을 텐데.’라고 한탄했다.“긴 세월 고향 강산을 꿈에도 잊지 못했으나 돌아갈 수는 없었네..”원경릉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이 시큰해졌다. 휘종제와 건종 태자의 슬픔을 원경릉은 아주 잘 아는 것이 자신도 전에 이방인이었기 때문이었다.단지 그들이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원경릉도 뭐라고 단정내리기 어려웠다. 어쨌든 이건 안풍 친왕이 진행한 일로 정말 돌아가고 싶으면 아마도 안풍 친왕이 준비해 줄 수 있었다. 북당으로 돌아가면 안풍 친왕에게 상황을 봐서 물어봐야겠다고 결심했다.입학 준비를 마친 뒤, 원경릉은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아이들과 떨어지기 싫었지만, 아이들은 새로운 생활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충만했기에 그녀와 헤어지는 걸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원경릉은 그 점이 씁쓸했다.아이들이 크면 놔줘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얘들은 아직 다 안 컸잖아.돌아가기 전에 원경릉은 양여혜에게 만나자고 했는데 양여혜가 기화를 데리고 올 줄 몰랐다.원경릉은 기화를 보자 머리가 아픈 게, 기화는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