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가 멈춰 서자 우문호는 빠르게 마차에서 내려 원경릉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의 손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의 호의를 무시하고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식당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우문호는 원경릉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다가 그녀를 쫓아갔다. “왜 그래? 설마 내 손이 보이지 않은 거야?”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던 사식이와 원용의는 불길한 눈빛을 주고받더니 조용히 귓속말을 나눴다. “사식아…… 우린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거다. 알겠지?”우문호는 원경릉이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자 화가 났다. 그는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경릉아, 너 왜 그래?” 라고 물었다. 그녀의 까맣고 고요한 눈동자가 우문호의 발끝부터 머리까지 아래에서 위로 쓸었다. “비켜.”“너 화가 난 거야?” 그녀은 눈빛이 폭풍이 일기 전에 고요한 바다 같았다.그녀는 그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내가 왜 화를 내겠어? 태자는 생각이 깊기도 하네.”우문호는 원경릉이 자신을 태자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원경릉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감지했다. 마차에서 내린 제왕이 두 사람 쪽으로 걸어오더니 무심하게 우문호를 보았다. “다섯째 형님, 형수님께 무슨 잘못을 한 겁니까?”제왕의 말을 듣고 화가 난 우문호는 인상을 쓰고 제왕을 보았다.“잘못이라니, 우리 걱정 말고 너나 잘해. 듣자 하니 원용의가 네 성격이 별로라고 하는 것 같던데.”“왜 갑자기 나한테 시비입니까?”우문호는 제왕을 노려보더니 휙 고개를 돌리고 가버렸다.제왕은 원용의를 보며 “너 설마 무슨 얘기 했어?”라고 말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원용의가 발끈했다. “무슨 얘기를 했다고 그럽니까?”“다섯째 형님이 나한테 시비를 걸잖아. 내 성격이 뭐가 어때서 나한테 저런 소리를 하는 거야? 너 혹시 나한테 불만족스러운 게 있으면 직접 말해. 형님들 귀에 들어가면 아주 골치 아프니까.”“제가 언제 당신 욕을 했다고 그럽니까?” 원용의는 억울한 표정으로 제왕을 보았다.“다섯째
사식이는 아무도 음식을 시킬 생각이 없어 보이자 벌떡 일어나서 음식을 시켰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네 사람은 서로 말 한마디 없었고, 그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서로 눈치만 살폈다. 음식이 하나 둘 나왔다. 우문호가 닭 다리를 하나 집어서 원경릉의 그릇에 덜어 주자 원경릉은 자신의 그릇을 서일과 바꿨다. 그 모습을 본 서일은 깜짝 놀라서 우문호의 눈치를 살폈다. ‘이 닭 다리를 먹자니 태자의 눈치가 보이고, 안 먹자니 태자비의 눈치가 보이네……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서일은 한참 고민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소인,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닭 다리는 고맙습니다 태자비……”서일은 윤기가 좔좔 흐르는 닭 다리를 보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먹지를 못하다니…… 두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우문호는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식탁을 쾅 내리치며 일어나서 원경릉을 쳐다봤다. “너 정말……!”원경릉도 이에 질세라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눈동자를 희번덕거렸다. “내가 뭐!”우문호는 원경릉의 살벌한 눈빛에 기가 꺾여 자리에 앉았다.“뭐가 먹고 싶은지 말을 하라고! 내가 덜어줄게.” “나도 손 있거든?”“아……”우문호의 젓가락이 허공을 맴돌다가 이내 멈추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우문호를 쳐다보았고 그는 민망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해? 구경났어? 밥이나 먹어!”서일과 만아 그리고 사식이는 그릇에 코를 박고 음식을 먹었다. 원경릉은 속에서 천 불이 끓었지만 사람이 많아 참고 있었다. ‘주명취는 죽었어. 우문호가 친구로서 그녀의 무덤에 갈 수도 있지. 그래, 그럴 수 있어……’원경릉은 마음속으로 수십 번이나 자신을 다독였지만 그럴수록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밥을 먹다 말고 밖으로 나갔고 우문호는 얼른 그녀를 쫓아나갔다. 제왕은 원용의의 눈치를 살피다 사식이에게 조용히 물었다. “다섯째 형수님께서 왜 저러는지 넌 알지? 늘 점잖
원경릉은 살며시 우문호가 잡은 손을 뺐다. “너는 잘못한 게 없어. 난 그저 나 자신에게 화가 났을 뿐이야.”원경릉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았다. 그는 확실히 아무 잘못이 없다. 두 사람은 원경릉을 알기 전부터 오랜친구였다. 오랜친구가 죽었으면 당연히 가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주명취가 살아서 두 사람의 관계를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은 지금 사이도 좋다. 뭐가 문제인가?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원경릉은 우문호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주명취는 살아있을 때 원경릉을 많이 힘들게 했고, 하마터면 죽일 뻔했다. ‘만약 우문호가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주명취의 무덤에 간 사실을 내가 알았을 때, 내가 받을 상처를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원경릉은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했다. 한순간에 태도가 바뀐 원경릉을 보는 우문호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 ‘도대체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식당에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는 모두 마차에 올라탔다.원경릉, 원용의, 사식이 모두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원경릉은 우문호에게 원용의는 제왕에게 사식이는 서일에게 모두 제각기의 사연으로 분노에 가득 찼다.이번에는 서일과 우문호 그리고 제왕이 같은 마차에 탔다.우문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서일은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서일은 시간을 되돌려 당시 자신을 뜯어말리고 싶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당시에 사식이에게 그 얘기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사식이를 믿은 내가 바보 천치다! 사식이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남자는 얼마나 재수가 없는 거야? 성격도 괴팍하고 입도 가볍고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네!’저녁 무렵 마차는 서주(西洲)에 위치한 호화로운 휴양 정원에 도착했다.제왕은 왕부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서주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해 휴양 정원에서 먹고 마실 음식을 준비해두었다. 정원은 매우 아름답고 넓어서 많은
우문호는 서일의 말을 듣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고, 원경릉은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지우고 있었다.우문호는 청동 거울에 비친 그녀의 차가운 표정에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일단 의자 하나를 가져와 그녀 옆에 앉았다. “경릉아, 무슨 일이 있으면 다 얘기하기로 했잖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내가 설명을 할 것 아니냐. 네가 하루 종일 입을 꾹 닫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으면 일이 해결되는 줄 아는 것이냐? 방금 서일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네가 왜 화가 났는지 몰랐을 것이야.”“아냐, 괜찮아. 주명취는 이미 죽었고 이미 끝난 일이야.”“정말로 그렇게 생각해?”원경릉은 머리를 말리고 젖은 수건을 화장대로 던지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속에서 천 불이 끓어! 주명취의 무덤에는 도대체 왜 간 거야? 내가 주명취 손에 죽을 뻔한 것을 잊기라도 한 거야?”우문호는 혀를 끌끌 찼다. “거봐, 이렇게 화가 났으면서 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건데? 화가 나면 차라리 화를 내라고 속으로 썩히고 있으면 해결이 되냐고!”“대답하라고! 왜 주명취의 무덤에 갔냐니까?” 원경릉은 우문호가 동문서답을 하는 것을 보고 분명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분에 못 이겨 힘껏 우문호의 정강이를 발로 찼고, 우문호가 큰 손으로 원경릉의 허리를 감싸 품에 안았다. 그는 그녀에게 벌을 주듯 거칠게 입을 맞추었고, 두 손으로 그녀의 등과 허리를 세게 감쌌다. 그녀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역부족이었다.“감히 태자를 발로 차다니, 네가 간이 아주 부었구나!”“이거 놔!” “네가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해도 남자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원경릉은 순식간에 그의 밑에 깔렸고, 거칠게 물어 뜯긴 입술이 퉁퉁 부어 고통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우문호가 아직도 주명취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우문호는 붉어진 그녀의 두 눈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왜 울어? 아까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그래? 아
“화 안 났다니까? 맹세해!” 원경릉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래 그럼 됐어.” 우문호는 두 손으로 그녀를 껴안았다.원경릉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화가 났든 안 났든 지금은 괜찮다는 거잖아. 그럼 됐어.”“…….”“할 건 마저 해야겠지?”우문호는 원경릉을 번쩍 들어 침상 위로 던졌고 원경릉도 아까와는 다르게 반항하지 않았다.*제왕과 원용의의 방 안에는 냉기가 흘렀다. 두 사람은 어쩌다가 싸우게 됐는지 영문도 모른 채 서로에게 화가 나있었다. 원용의는 침상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제왕은 뒷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시를 읊었다. 그녀는 제왕이 일부러 그녀의 주의를 끌기 위해 시를 읽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사식이랑 잘게요.” 원용의가 침상에서 일어났다. 제왕은 후다닥 문으로 달려가 그녀를 막아섰다. “가지 마.”“이거 비켜요!” “도대체 왜 화가 났는지 말을 해줘야 알지! 다섯째 형님 내외랑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너까지 덩달아 나한테 성질을 부리는 거야?”“나 화 안 났어요.” 원용의가 바닥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제왕은 차가운 원용의의 표정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용의야, 본왕이 너에게 믿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너도 느끼는 게 있을 거야. 하지만 가끔 네가 이럴 때면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딱 한 번만 물을게.”“……”“진심으로 나를 떠나고 싶은 거야?”원용의는 제왕이 이별에 대해 묻자 깜짝 놀라 머리가 멍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녀도 자존심을 굽힐 수가 없었다. “맞습니다! 난 당신을 떠나려고 해요. 그래도 당신은 아무렇지 않겠죠? 우리는 진짜 부부도 아니니까요.”제왕의 어깨는 축 내려앉았고, 얼굴에는 실망과 슬픔이 가득했다. “넌 어쩜 그렇게 모진 거니…… 우리가 겪은 수많은 나날들이 물거품이 되는구나. 진심으로 떠나고 싶은 거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안 되겠니?”원용의는 눈물을 머금고 제왕을 보았다. “나보고 모질다고요? 그럼 당신은 나에게 모
제왕은 원용의 입에서 주명취의 이름이 나오자 인상을 찌푸렸다. “죽은 사람을 왜 들먹이는 거야?”“제왕은 제가 왜 이러는지 알 리가 없지요. 어쩌면 제가 쪼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꼭 제왕에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요. 당신은 주명취를 못 잊고 있는 거죠?”제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 여자 얘기는 안 하면 안 되겠어? 도대체 죽은 사람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가 뭐야?”“그건 제왕이……”“용의야 왕부로 돌아가면 너를 정비로 맞이할게. 난 앞으로 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어.”“제가 지금 정비가 되려고 이러는 것 같아요?”제왕은 화를 억누르고 원용의의 어깨를 잡았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네가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든 다 해주려고 그러는 거야.”“그 말 참 모순적이네요. 제가 묻는 말에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제 믿음을 얻으려는 거죠? 제왕이 저에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모두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네요.”원용의는 고개를 돌려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내가 그녀를 잊고 못 잊고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냐?”“그럼 제왕은 제가 다른 남자를 그리워하고 있어도 괜찮겠네요?”“뭐? 감히 어떤 새끼야?”원용의는 눈을 흘기며 제왕을 보며 허탈한 듯 웃었다. “거봐요. 역지사지를 해보니 제 마음이 좀 이해가 되나요?”원용의는 제왕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제왕이 대답을 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원용의는 사식이가 있는 방으로 가기 위해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만 우리 나가서 얘기를 하는 건 어때?”제왕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제왕, 당신은 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거 잊지 마세요.”“일단 나가서 얘기를 좀 하자고.”“간단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당신입니다! 간단명료하게 대답해 주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사람을 지치게 합니까?”“……”“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왕은 원용의가 항상 자신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명취가 아무리 악녀라고 해도 제왕과는 부부였던 사이인데, 제왕이 그녀를 어찌 그리 쉽게 잊겠는가?그가 주명취를 한순간에 잊어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냉혈한이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원용의가 상심한 얼굴로 사식이의 방에 들어오자 사식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언니, 왜 우는 거야?”“아무것도 묻지 마. 나 오늘 너랑 잘 거야.”사식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뜻한 물을 한잔 건네었고, 원용의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원용의는 아무리 제왕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1년이 길면 얼마나 길다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 주명취를 아직도 그리워하다니……’주명취가 제왕부에 불을 질러 제왕이 죽을 뻔했을 때도 원용의가 제왕을 데리고 손왕부에 가서 보살폈다. 그가 가장 아프고 힘들어할 때 누가 그의 곁을 지켰는가? 바로 원용의다. 원용의는 그와 관련된 모든 일에 밤낮으로 최선을 다했다. 주명취가 다른 남자에 빠져 제왕을 등한시하는 동안에도 원용의는 그의 곁을 지켰다. 원용의는 생각할수록 제왕이 괘씸했다. ‘내 마음도 모르고, 뭐? 정비로 만들어준다고?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는 거잖아.’원용의는 정비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제왕의 흔들림 없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가 원통하고 분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원용의는 주명취가 죽었을 때 바로 제왕을 떠났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때 제왕을 떠났다면 지금처럼 마음의 상처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사식이는 처음 보는 원용의의 모습에 주위를 맴돌며 손톱만 물어뜯었다. 원용의는 코를 훌쩍이며 퉁퉁 부은 눈으로 사식이를 보았다. “내가 오늘 이 모양인 거, 조모께는 절대 말씀드리지 마.”“제왕 때문에 우는 거야?” 사식이가 조용히 물었다. 원용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뭐
다음날 아침. 원용의가 아침식사시간에 나타나지 않자 원경릉은 사식이에게 물었다.“밤새 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지 아침을 먹을 기운도 없다고 합니다.”“뭐라고?” 제왕은 사식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왜냐고 묻는 겁니까? 그걸 제왕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사식이는 제왕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훑어보았다.“모르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원용의가 왜 밤새 울었냐고.”“그걸 저한테 묻는 것보다 제왕이 생각해 내는 게 더 빠를 텐데요.”“내가 이렇게 물을 이유도 없지. 제왕부를 떠난다는 사람인데 떠날 거면 하루라도 빨리 떠나라고 전해라. 다른 사람 고생시키지 말고.”“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디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우문호가 분노했다.제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우문호를 보았다.“지금 원용의는 내가 주명취를 그리워하는지 아닌지에 혈안 되어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고요!”“주명취가 네 마음에 없다고 하면 되잖아! 네 옆에 있는 여자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진정한 남자가 아니야. 원후궁이 너와 혼인을 하고 네가 힘들 때 너를 돌봐주었잖아. 그런 여자를 불안하게 하면 안 되지.”“나에게는 양심이라는 게 있습니다. 다섯재 형님처럼 여자를 기쁘게 하려고 내 양심에 반하는 말은 뱉을 수 없다고요.”“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문호는 제왕의 가시 돋친 말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원경릉 쪽을 보았다.원경릉은 제왕의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썼다. 우문호는 어렵사리 원경릉과 오해를 풀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제왕이 재를 뿌리자 화가 나서 껑충껑충 뛰었다.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이 개똥만도 못한 자식!” 우문호는 의자를 들어 제왕에게 던졌다. 순간 문 앞에 있던 사람이 빠르게 뛰어와 제왕의 옷깃을 끌어 그를 감싸 안았고, 의자는 그 사람의 머리에 떨어졌다. 의자는 바닥으로 널브러졌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아침을 먹으려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소리를 질렀고 사식이는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부축했다. “이게
혼담을 꺼낸 당일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하지만 원가는 세속적인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혼수도 원하는 대로 준비하게 했고, 잔칫상만 제대로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잔칫상은 일곱째 아가씨가 결코 시집을 못 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에 알리는 용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인 상대가 황제가 가장 신임받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자리였다.따라서 잔칫상만큼은 빠질 수 없었다.이 부분은 탕양도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름 저축해둔 돈이 있었기 때문에, 잔칫상을 준비하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하객 문제에 대해서도, 탕양은 아는 사람이 정말 많았기에 문제없었다.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성에만 백 상 이상은 문제없이 마련할 수 있었다.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자로서, 조정의 문무백관 중 그와 친분이 없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이 모든 것을 논의한 후, 탕양은 마침내 의문을 물어볼 수 있었다.“노태군, 만약 일곱째 아가씨께서 동의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동의할 것이다. 원가는 혼사를 치르거나 상을 치르거나 내릴 결정을 둘 뿐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다른 선택은 없다.”노태군이 단호하게 말했다.“그건...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탕양이 초조해하며 말했다. 왠지 일곱째 아가씨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혼사는 본디 두 사람이 마음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돌아가는 길에 탕양이 여전히 불안했해 하자, 원경릉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말고, 그저 신랑이 될 마음의 준비만 해두시게. 일곱째 아가씨는 원가 식구들이 설득할 것이오.”“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곤란하게 하거나, 억지로 결혼하게 해서 그녀가 상처받는 건 싫습니다.”“아가씨도 동의할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약도성에서 자네를 뿌리치고 떠났을 것이네. 하지만 곁에 남아 자네를 보살폈잖나? 그것만 봐도 자네에 대한 마음이 있는 것이오.”“정말입니까?”탕양이 놀랐는데, 얼굴에 은은하게 빛이 맴돌았
원경릉은 원가에서 이 혼사를 분명히 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노태군이 일곱째 아가씨를 시집보내고 싶어 안달이 난 상황에서 혼담을 꺼내는 것은 단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원가의 유일한 문제는 일곱째 아가씨 본인이었는데, 그녀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 일은 십중팔구 성공할 것이다.역시나, 다음 날 탕양과 함께 원가로 향한 원경릉은 원가에서 심지어 점쟁이까지 청해 두 사람의 사주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다.두 사람의 사주를 본 점쟁이는 한참 확인하더니,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두 사람의 사주가 다소 상충합니다.”원 노태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디가 상충하는가?”“한 사람은 닭띠, 한 사람은 개띠입니다. 이는 닭과 개가 편치 않은 사주라, 혼사를 치른 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노태군은 탁자를 쾅 치며 말했다.“그럼 바꾸면 되지! 이제 보니 우리 딸은 말띠다. 방금 헷갈렸었다.”“말띠요? 말띠라면 괜찮습니다. 말띠는 올해 연분이 따르는 해 입니...”노태군은 점쟁이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다니 됐다. 이제 길일을 골라주게.”그러자 점쟁이는 다시 손을 펴고 계산하더니 말했다.“올해 좋은 날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라도 연말쯤이어야...”“좋다. 이번 달 15일로 하지. 보름달이 뜨는 날, 사람도 오붓이 모이는 날이니, 좋지 않겠나?”점쟁이가 책자를 닫고,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예.”혼사는 원가에서 준비하니, 제시간에만 준비 된다면 안 될 것도 없었다.15일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 원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는 일을5일 안에 끝낼 수 있을까 걱정 되었다. 준비할 시간도 아직 부족했는데, 혼례복을 만드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원가는 이미 일곱째 아가씨를 위해 혼례복을 준비해 두었다. 3년마다 한 번씩 새로 만들었기에, 지금껏 서랍 속에 쌓여 있는 혼례복만 해도 7~8벌이나 되었다.혼수도 일찌감치 마련해 두고, 혼담을 꺼낼 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
사식이는 다들 일곱째 고모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는 것이 이상해 의아해하며 물었다.“일곱째 고모께서 편지를 보내신 겁니까?”그러자 셋째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그래. 편지가 왔단다. 며칠 놀다가 곧 경성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구나.”사식이는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일곱째 고모께서 돌아오고 나서 혼담을 꺼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일곱째 고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일이 난감해질 텐데요.”노태군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이미 모든 일을 저질렀느넫 이제 와서 동의하지 않는다니? 감히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냥 목을 매겠다!”노태군은 일곱째 고모가 열여덟 살이 되던 때부터 그녀의 혼사를 기다려 왔다. 계속 기다리다가 이미 머리카락이 다 하얘져 버렸지만, 그녀는 아직 혼인 기약조차 없었다. 이번에도 혼사를 정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게 더 나았다.그녀 뿐만 아니라 모두가 일곱째 아가씨가 빨리 시집가기를 바라고 이씩 때문에, 이 일은 서둘러 진행하기로 했다.“사식아, 네 고모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갑작스레 병에 걸려 거의 죽게 생겼다고 전해라!”노태군이 단호히 명령했다.딸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스스로 저주까지 불사하는 그녀는 정말 독한 늙은이었다.서일은 탕양을 데리고 서둘러 궁으로 향했다. 중매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바로 황후를 찾아가야 했다.소월궁에서 우문호 부부는 탕양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우문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짐이 보기엔, 일찍 일곱째 아가씨에게 네 마음을 고백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이리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탕양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고,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갔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지 못한다면 불안에 휩싸여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폐하,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가 아닙니다… 제발 사람을 보내 그녀가 어디 있는지
오래전의 악몽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나, 탕양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녀가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스스로 뺨을 몇 대 때리고는 다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따라잡으려 죽자고 달려도, 끝내 그녀를 볼 수 없었다.그렇게나 빨리 도망간 건가?그렇게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쉬지도 않고 곧장 원가로 달려갔다.마침 서일과 사식이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와 있던 참이었는데, 대문 앞에 도착하니, 탕 대인이 거지처럼 문지기 앞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먼지투성이의 얼굴에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문지기의 옷깃을 움켜쥔 채 다급히 묻고 있었다. “일곱째 아가씨는? 너희 일곱째 아가씨는 대체… 어디 있느냐?”그러자 문지기는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는 이렇게나 사나운 탕 대인을 본 적이 없어 더듬거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일곱... 일곱째 아가씨께서... 탕 대인과 함께 약도성에 가신 거 아니셨습니까…?”“그럼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탕양이 소리쳤다.“아직... 아직 못 뵈었습니다…!”바로 그때, 서일이 다가와 문지기한테서 탕 대인을 떼어놓으며 말했다.“무슨 일이십니까?! 우선 손부터 놓으십시오. 옷이 다 찢어지겠습니다.”탕 대인은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큰일이야… 내가 그녀를 망쳐 버렸네! 죽어도 이 죄를 씻을 수 없을 것이네…!”“무슨 일입니까? 저희 고모께서 지금 어디 계십니까?”사식이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탕 대인은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 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네… 나는 돌아온 줄 알고 있었네...”바로 그때,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원가의 노태군이 부축을 받으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탕양이 고개를 들자, 노태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탕
냉정언은 자기도 모르게 죄책잠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에 정말 큰일을 저지른 것인가?’그는 그저 탕양에게 술을 먹여 일곱째 아가씨에게 진심 어린 말을 꺼낼 용기를 주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동안 탕양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황제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다들 그를 안타까워했었다.탕양은 다섯째가 초왕이었을 때부터 초왕부와 다섯째, 그리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그렇게 반평생을 북당을 위해 헌신했으나, 그를 진정으로 주목한 이는 많지 않았다. 특히 과거에 자신도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탓에 평생을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채, 조정을 위해 뛰어난 공을 세우고도 관직이나 봉록을 거절하며 죄를 속죄하듯 살았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탕양은 이미 그 누구보다 훌륭히 잘해왔고, 게다가 정과 의리에 발목 잡힌 것은 많은 영웅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였다.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결코 그 혼자만이 저지른 행동이 아니었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와 벗이라는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하지 않은 이상, 맑은 정신으로는 절대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을 것이기에, 술에 취하게 하면, 경성이 아닌 변방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몇 마디 속마음 정도는 털어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하지만 예상외로, 탕 대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쌓였던 건지... 만취 상태에서 무슨 일을 저지른 것 같았다. 대체 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품었던 것일까?상황이 아주 복잡해졌다.‘탕 대인 아주 못 쓰겠구먼! 이를 어찌 마무리 짓는단 말이냐…?!’원가의 상대하기 쉽지 않은 여장군들을 떠올리니, 냉정언은 순간 뒷골이 땡겨 머리를 쥐어뜯었다.그러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냉명여가 눈 앞에 서 있었다. 냉명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지, 탕 대인은 어찌 일곱째 아가씨와 그런 일을 벌인
탕양은 지금까지 살면서 술에 취해 저지른 잘못이 단 하나뿐이었다. 비록 그 일도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지만, 그 일로 그는 술에 취하면 정말로 이성과 기억을 잃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기에 그 후로 술을 마시더라도 되도록이면 취하지 않게 애썼다. 하지만 어젯밤은 예외였다. 그는 이곳 사람 모두를 믿고 있었기에 경계를 풀었던 것이다.남녀 간의 일도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가 되어서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의부님! 의부님!"바로 그때, 문밖에서 호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탕양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호통쳤다."일단 들어오지 말거라!"그는 급히 이불을 걷어내고, 바닥에서 옷을 찾아 황급히 입은 후, 이마를 문지르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문밖에서 호명이 물었다."이제 막 일어나신 겁니까? 아직도 취기로 힘드십니까?"탕양은 머릿속이 어지럽고 복잡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괜찮다. 무슨 일이더냐?""식사하시라고 부르러 왔습니다. 아! 일곱째 아가씨께서 경성으로 돌아간 것을 알고 계십니까? 같이 가실 줄 알았는데 먼저 떠나셨더군요.""… 돌아갔다고?!"탕양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예!"호명이 그의 얼굴을 보다가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의부님… 혹시 어젯밤 누구에게 맞으셨습니까?"탕양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는데, 그제야 얼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동경을 찾아 얼굴을 비춰보았는데, 왼쪽 뺨에 여러 개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에게 뺨을 맞은 것 같았다.그러자 어렴풋이 한 여인이 세게 뺨을 때리며 욕설을 퍼붓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떠올랐다.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텅 비어 있어 창백해진 안색으로 생각에 잠겼다.‘설마 내가 취기를 빌어... 그래서 떠난 것이었구나...’이번 사건은 목숨을 내놓고 속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말을 준비하거라! 어서!"탕양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소리
연회는 계속 진행되었고, 냉정언은 술잔을 들고 계속 탕양에게 술을 권했다. 잔을 몇 번이나 주고 받자, 탕양은 머리가 머리가 어지러워져 말조차 똑바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연회가 끝난 후, 냉정언이 일곱째 아가씨에게 말했다."술을 꽤 마셨다 보니, 탕양이 좀 취한 것 같네. 정원에 나가 산책을 조금 하면서 술기운을 가시는 것이 어떻소?"일곱째 아가씨도 약간 취한 상태였기에, 바람을 쐬며 땀을 내면 술이 깰 것 같다며 동의했다."예. 그럼 다들 돌아가서 쉬시지요. 제가 호명과 함께 탕 대인을 돌보겠습니다.""좋소. 수고하시게나!"냉정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자, 어서 돌아가시게!"그렇게 사람들은 모두 새가 흩어지는 것 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일곱째 아가씨는 호명과도 함께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빠르게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듯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고는 탕양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보고 물었다."괜찮습니까? 걸을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탕양이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났는데, 술에 많이 취한듯 몸을 심하게 휘청거렸다."어찌 못 걷겠습니까? 취하지 않았습니다!""예. 그럼, 몇 걸음 더 걸어보시지요. 정말 못 걸으시겠으면 방으로 돌아가 쉬시고요. 취기를 덜어줄 탕을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그러자 탕양은 허리에 손을 얹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갔다. 곧게 뻗은 직선을 그리며 터벅터벅 걷고는 뒤돌아 일곱째 아가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보시지요. 얼마나 똑바로 걷는지! 안 취했습니다. 이제 믿을 수 있습니까?"일곱째 아가씨는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하하하. 예, 안 취하셨네요. 그럼 이만 나가서 함께 산책하시지요."그녀는 그가 오래 걷지 못할거라고 생각해,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기로 했다.역시나 문을 나서자마자 탕양은 난간을 붙잡고 비틀비틀 걷기 시작했다. 하도 휘청거리는 탓에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기에, 일곱째 아가씨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를 부축했다.그러자
"탕 대인이 저를 예쁘다고 말해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그러니 일곱째 아가씨께도 예쁘다고 말해 보십시오. 분명히 기뻐하실 것입니다!"하지만 탕 대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다를 겁니다. 일곱째 아가씨는 이제 그런거에 좋아할 나이를 지났습니다. 지금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하면, 그저 무미건조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어찌 그럴 리 있습니까? 누구나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탕 대인, 대인께서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탕 대인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예? 하하하. 그렇습니까?""예! 모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탕 대인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미소를 지었다."과찬입니다.""기분 좋으십니까?"택란이 묻자 탕 대인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뜻을 알아차리고 멈칫하며 말했다."이 녀석!"택란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탕 아저씨도 누군가에게 꼭 사랑받으시길 바랍니다."탕 대인은 이 말에 크게 감동해서 택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예. 고맙습니다."저녁엔 계약이 성공한 기념으로 연회가 열렸다.소박한 술자리긴 했지만, 커다란 술통들이 준비되어 있어 모두 마음껏 마시며 즐길수 있었다.택란은 술을 마시지 않기에, 주 아가씨가 매실청을 대신 준비해 주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택란의 마음에 쏙 들었다.술잔을 주고받으며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모두 패기 있게 약도성을 북당에서 제일가는 도성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다.일곱째 아가씨는 벌써 독산을 어떻게 개발할지부터 고민하고 있었는데, 독산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막막했기에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기 시작했다.각자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지만 대부분이 경치를 개발하자는 내용이었다.반면, 택란은 새로운 생각을 제안했다. 독산에 온천이 있으니 오두막을 지어 온천을 끌어들여 돈을 받고 여러 개의 탕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며, 온천수가 몸에 좋다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자고 제의하였다.택란의 생각은 이 시절
탕양은 자신이 여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자부했었다. 특히 일곱째 아가씨처럼 강인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더 선호하기에 굳이 자신과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그의 큰 착각이었다.여인의 마음은 늘 갈대처럼 변덕스럽고,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다정함이 필요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곱째 아가씨는 오랫동안 혼자 외롭게 지내왔는데, 중년에 접어들며 그 외로움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누군가 곁에 있다면, 삶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지만, 물론 잘못된 연으로 나빠질 가능성도 있었다.원가의 가훈은 항상 군주에게 충실하며, 엄청난 용기도 있었다. 심지어는 원가에서 키운 닭조차 남의 집의 닭보다 더욱 용감할 정도였다.하지만 한 번의 좌절로 인해 사랑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 과연 용기있는 행동 일까?물론 그녀가 반드시 탕양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볼 수도 있었다.하지만 탕양이 먼저 용기를 내어 말한다면, 그녀 역시 그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여태껏 그녀의 마음에 들어온 사람은 오직 탕양뿐이었다.그리고 어쩌면 시도해 봐야만 서로 맞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탕양과 잘 맞는다고 느끼는 건 그녀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착각일지도 모르니 말이다.경성으로 돌아간 후에도 탕양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공개적으로 구혼에 나설 생각이었다. 한편, 택란이 주 아가씨와 함께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탕 대인이 왜 나쁜 사람인 것이오?""여인을 훔쳐봤습니다.""탕 대인이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소? 어찌 못 보는 것이오?"주 아가씨는 택란이 이런 부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공주에게 가르쳐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내가 여인을 사모하면 상대의 시선을 바라보지,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러니 탕 대인은 일곱째 아가씨를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