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황제와 태상황은 모두 매우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이 분노도 잠시, 왕비를 내쫓고 나니 궁 안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정후부의 성화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득될 것이 많았다.“주씨 집안의 아가씨 일 말입니다. 왕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탕양이 물었다. 우문호는 이런 말을 나누는 것 자체가 짜증이 났지만 부황과 모비가 계속 몰아세우니 언제까지 피할 수 만은 없는 문제였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는 탕양에게 되물었다.“현재 국면으로는 왕야께 확실히 유리한 일입니다. 비록 주씨 집안에 장녀가 제왕과 혼인을 했지만 주수보(褚首辅)는 제왕쪽을 지지한다고 입장을 표명하지는 않았습니다. 태후의 사정으로 인해서 주수보는 항상 걱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태상황께서 줄곧 왕야를 총애하고 있기에 주수보에서도 선뜻 손을 쓸 수 없었을 겁니다. 일단 왕야께서 주씨 집안의 둘째 아가씨와 혼인을 한다면 주씨 집안에서 어느 정도 왕야에게 도움이 될 것이고, 만약 어느날 제왕의 세력이 약해진다면 주수보에서는 왕야께 전념할 것 입니다.” “보아하니 자네도 모비의 말에 동의하는군.” 탕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국적으로 보면 그렇지만, 소인은 왕야께서 권력을 쫓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주씨 집안의 둘째 아가씨가 후궁도 개의치 않는다면, 왕야께서 주씨 집안과 혼인을 하셨으면 합니다.”“어찌 말의 앞뒤가 안맞는구나.”우문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앞뒤가 맞지 않는게 아니라 현비마마께서는 조정에 세력을 되찾으라는 의미로 혼인을 하라고 하는거지만, 소인은 그저 주씨 가문이 왕야를 보호해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본왕이 보호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왕야. 간혹 어떤 일들은 왕야께서 할 수 없어도, 주씨 가문에서는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번처럼 기왕에게 당했을 때, 주씨 가문이 왕야의 편이라면 그들이 기왕에게 압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왕도
옆에는 원주(原主)의 큰형인 원륜문의 아내 최씨가 노란 꽃무늬 비단 치마를 입고 손목에는 청옥 팔찌를 차고 머리에는 진주와 청옥으로 만든 장식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교적 시건방졌는데, 지금 원경릉을 보는 표정에도 불만족스러움과 사람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물씬났다.그녀의 옆에는 원주(原主)의 여동생인 원경병(元卿屏)이 있었다. 올해 열다섯살이 된 그녀는 얄쌍한 얼굴에 동그란 두 눈은 생기가 가득했고 입술은 길게 좌우로 늘어뜨려 있었는데 누가봐도 예쁘다고 느껴지는 외모였다. 그 외에 두 명의 첩의 딸이 있었는데 첩의 소생이라 그런지 머리를 푹 숙이고 있고 옷매무새도 화려하지 않았다. 원경릉이 둘째 노마님을 보았는데 그녀는 풍만한 체구에 동그란 얼굴에는 나이에 비해 주름도 별로 없었다. 머리도 염색을 한건지 흰 머리 하나 없었다. 그녀는 한 눈에 봐도 값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비단으로 둘러쌓인 사람 같았다. 머리는 높게 땋아올렸고 그 위에는 화려한 비녀가 꽂혀있었다. 모르는 누가 보면 이 집안의 안방마님으로 오해하기 쉽상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기가 어려 있었는데, 그 웃음에는 다소 조롱감이 있었다. 이로써 정후부에서 황실의 총애를 잃은 왕비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듣자하니 조모의 병세가 심해졌다고 하시던데, 지금은 어떠신지요?” 원경릉이 물었다. 둘째 노마님이 바깥을 한번 슬쩍 보았다. 그녀는 원경릉이 황실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조모께서는 그냥저냥 하신다. 이번에는 네 아버지가 너를 이리로 부르신거니까 서재로 가보거라.”원경릉은 그녀의 말투에서 그녀가 자신을 반기지 않고, 접대할 생각조차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서재로 향했다. 원경릉을 만나려면 그냥 자신이 황실로 오면 되지 굳이 조모가 아프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나를 이 곳으로 부른건가? 조모가 아프시다길래 아침 밥도 먹지 않고 왔는데 말이다. 이른 아침에 공복이라 그녀는 손발이 후들거리는 것 같
아침상이 준비되었다. 원경릉은 아침에 달고 느끼한 음식을 먹지 않기에 계화떡은 먹지 않고 죽만 먹었다. 계화떡을 차려놓고 손도 대지 않은 원경릉은 일어서서 둘째 노마님에게 말했다. “둘째 노마님. 결례를 범했습니다.” 둘째 노마님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빨리 가보게. 부친이 기다리시네.” 라고 말했다. 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서재로 걸어갔다. 문 밖을 나서자마자 난씨가 뒤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허세부리는거 보셨습니까? 왕가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우리 정후부의 도움없이는 죽 한사발 얻어먹지도 못하면서! 듣자하니 왕야께서 욕은 기본이고 때리기까지 하신다던데. 다들 원경릉 이마에 난 상처를 보셨지 않습니까? 분명 초왕에게 맞은겁니다! 시집간지 1년이나 됐는데 아직 합방 소식도 없고, 쯧쯧. 비웃음 당해도 쌉니다!”이 말을 듣고 원륜문의 아내 최씨가 입을 열었다. “합방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태후께서 초왕에게 약을 먹여서 겨우 합방을 했다고 합니다. 보아하니 초왕이 원경릉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다들 그만하게. 바깥사람이야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지만 내부 사람인 우리가 덩달아 소란을 피울 이유가 있느냐? 다들 각자 방으로 돌아가거라.” 이를 듣고 있던 둘째 노마님이 정의로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왠지 모르게 약간 통쾌한 표정이었다. 약을 먹고 합방을 하다니, 초왕이 얼마나 그녀를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초왕과 합방을 했다고 초왕이 자기를 달리 보고 있다고 친정으로와서 왕비 행세를 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다.원경릉은 이런 말을 들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원경릉은 비녀를 꽂았다. 그녀는 규방에 있었던 일을 어느정도 알고 있던 원경릉은 이 말을 듣고 즉시 그녀를 따라갔다. 원경병이 원경릉의 소매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쓸모 없는 짓 하지마세요. 왕비가 됐는데도 왕야께 총애를 받지 못하니까 다들 비웃는겁니다.”원경릉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말했다. “비웃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태상황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태상황?” 원경릉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후가 벌떡 일어났다.예상하지 못한 인물이라 정후는 충격을 받은 듯 했다.“왜 너를 궁으로 부른 것이냐?”“병수발 때문입니다.”정후의 낯빛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태상황께서 너에게 병수발을 들라고 하셨다는 말이냐? 그럼 이번 기회를 통해서 태상황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원경릉은 그의 음흉한 속내가 눈에 훤히 보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로잡기는 커녕 제가 태상황님께 미움을 샀으니 궁에서 쫓아낸 것 아닙니까.”“너는 잘하는게 무엇이냐? 모처럼 온 좋은 기회를 다 망쳐버리고! 무엇이 태상황을 분노하게 만든것이냐? 혹시 네가 태상황과 황제 앞에서 제왕비를 폄하한 것 아니냐?” 정후가 분에 못이겨 탁자를 내리쳤다.“예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원경릉은 사건에 대해 해명하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녀에게는 정후부가 왕가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네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제왕비와 잘지내지는 못할 망정! 당시에 너를 믿은 내가 바보 천치였어! 당초에 초왕이 너를 총애하게끔 할 자신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너를 초왕부로 시집을 보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을게야! 왕가에 미움을 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주씨 집안의 미움까지 사다니!”“밖에 녹주가 서 있습니다. 녹주는 왕야의 사람인건 아시지요? 제가 정후부에서 나눴던 대화와 행동 하나하나 왕야 귀로 들어갈테니 부친께서는 말을 조심하시는게 좋을겁니다.”“어찌…….” 정후는 지금 맘 같아서는 원경릉에게 욕을 한바가지 하고 싶었다. 그는 당초 원경릉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됐다. 지금 그녀는 궁에서 제왕비의 미움을 샀고, 주씨 집안에서도 그녀를 눈엣가시로 보고 있지 않는가? 현재 정세를 보니 그의 병부상서 지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일 당장 제왕부에 가서 제왕비에게 사죄하거라.” 정후가 밖에 있는 녹주를 의식한 듯 조용히 말했다.“사죄할 이유가 없습니다.” 원경
노마님이 워낙 조용한 것을 좋아해서 방 안에는 손씨 아주머니만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원경릉이 돌아온 것을 보고 손씨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왕비 오셨습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원경릉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가식적인 웃음이 난무하던 정후부에서 진정어린 미소를 보니 괜히 마음이 놓였다. “조모님의 건강은 어떠십니까?” 원경릉이 들어가려고 하자 손씨 아주머니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괜찮으십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도 못드셨는데 오늘은 죽도 절반 이상 드셨습니다.”원경릉은 손씨가 왜 앞을 가로막은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는 조모를 뵈어야 겠습니다.”손씨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왕비님 돌아가시는게 좋겠습니다. 노마님께서 아직 화가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며칠 전까지만해도 왕비님 이름을 들으면 치를 떠셨습니다.”원경릉은 노마님이 예전부터 원경릉이 왕궁으로 시집가는 것을 반대했고 심지어 혼인을 하기로 한 시점에도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허영심만 가득차 있다며 심하게 질책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전에도 원주(原主)가 친정집에 찾아와도 조모는 문을 닫고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았다. ‘정후부에도 이렇게 사리에 밝은 사람이 있다는게 참 다행이군’원주가 황실에 들어가려고 우문호와 혼인을 택한 것은 참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원경릉은 손씨의 만류에도 굴하지 않고 “제가 조모께 중요하게 여쭈어야 할게 있어서 어제 막 궁에서 나온겁니다.” 라고 말했다.손씨는 어제 궁에서 막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노마님께서 지금 몸이 안좋으시니 주의하세요.”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원경릉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창문을 모두 닫아놓아 빛 한줄기 들지 않았다. 가을의 찬바람이 문과 창틈 사이로 스며들어 몸이 금방 으스스해졌다. 원경릉은 침상에 누워있는 노마님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살이 하나도 없었고, 몸은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것 같이 앙상했다. 노마님은 기력이 없는 가운데에도 원경릉을 알아보고는 그
태상황이 하사한 물품이라고 하자 노마님이 천천히 몸을 돌려 원경릉을 보았다.“태상황님을 만나셨습니까?”“예. 며칠 전까지도 태상황님의 시중을 들다가 어제 막 궁을 나왔습니다.” 원경릉이 미소 띈 얼굴로 말했다. “왕비께서 노마님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여기로 온 것 입니다.”손씨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노마님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지더니 벌떡 일어나 부들거리는 손으로 원경릉의 뺨을 내리쳤다.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태상황님의 병시중을 들었다고?”원경릉은 뺨을 맞았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노마님은 온 힘을 다해 말을 뱉어내고는 숨을 헐떡였다. 노마님은 목에서 가래가 올라오는 듯 구룩거리는 소리를 냈다.그녀의 얼굴이 점점 파래지더니 피가 안통하는 듯 입술이 하얘졌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침상에 누웠다. 원경릉은 다급하게 약상자 안에 천식 흡입기를 꺼냈다. 그녀는 호흡기를 노마님의 입과 코에 대고는 다급하게 외쳤다. “힘껏 들이마시세요. 이것은 황실에서 쓰는 효과가 좋은 약입니다!”노마님은 인상을 찌푸린채로 어쩔 수 없이 깊게 흡입기를 들이마셨다. 원경릉은 흡입제가 한 칸 내려오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천천히 숨을 쉬세요.”노마님의 호흡이 차츰 부드러워졌고 백지장 같던 그녀의 얼굴에도 핏기가 돌았다. “이게 무슨 약입니까? 정말 신통합니다!”이를 본 손씨가 놀란 듯 말했다.“궁에서 쓰는 약입니다. 태상황님께서도 이것과 비슷한 약을 쓰십니다.” 원경릉은 흡입기를 침상 머리맡에 두며 “나중에 조모께서 발작을 일으키시면 이걸 쓰십시오.” 라고 말했다. 노마님이 점차 안정되자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심장과 폐 주위를 살폈다. 그녀는 노마님이 천식을 앓았고 그 이후에 폐기종까지 앓았기에 그녀의 몸이 성치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만약 여기서 병세가 더 악화된다면 죽을 수 있었다.천식은 이미 손을 쓰기 어려운 상태였고 폐기종은 만성병이기에 오랜 기간 치료를 하지 않으면 쉽게 호전되기 어려웠다. 노마님은 병으로 쓰러진 이후 지금
원경릉이 노마님의 곁을 지키고 있는데, 소나라(苏国)의 삼촌이 찾아왔다. 소국구(苏国舅)은 태후의 친동생으로 황제의 처남이다. 소가(苏家)는 몇 년 동안이나 특출난 인재가 없었는데, 부자는 망해도 3대가 먹고 산다고 하지않는가. 태후, 현비 모두 조정에서 한가닥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소국구가 정후부에 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초왕이 후궁을 맞이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말을 하는 내내 태후를 들먹이며 정후부와 초왕비도 후궁을 맞는 일에 나서서 축복하라고 했다.정후가 초왕이 후궁을 들인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공주부의 일을 꾸미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초왕의 총애를 얻지도 못하고, 주씨 가문에게도 미움을 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딸도 잃고 권력도 잃은 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소국구의 강력한 요구에 그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척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국구야(国舅爷). 안심하세요. 왕비도 기뻐할 것 입니다. 주씨 가문에서 후궁을 들이시면 왕비도 자매처럼 지내며 왕야를 잘 모실겁니다.”“후작나리께서는 머리가 좋으신 분이니 제가 말에 핵심을 짚으셨으리라 믿습니다. 후궁을 들이면 태후마마와 현비마마가 마음을 놓으실 겁니다. 안심하시지요. 후작나리의 일은 현비마마가 기억하고 있으니 억울한 일을 겪지는 않을 겁니다.” 국구는 담담하게 말했다.정후가 쓴 웃음을 지었다. 그의 일은 어찌 현비가 돕겠는가? 지금 북당의 강산 절반을 주씨 가문이 꽉 잡고 있는 마당에 소씨 가문이 힘을 쓸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일부러 기쁜 척하며 연신 읍했다. “태후마마, 현비마마 황송하옵니다!”소국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갔다. 노마님의 집 밖으로 나온 원경릉은 두명의 시위(侍卫)에게 가로막혀 서재로 끌려왔다. 정후부에서는 녹주를 원경릉과 따로 떼어 놓기 위해 불러다가 간식을 먹였다.정후는 원경릉을 보자 대노하였다. “묻는 말에 대답하거라. 네가 초왕이 후궁을 들이는 것을 반대하다가 현비의 노여움을 사 궁에서 쫓겨난 것이냐?”원경릉
이 일은 정후가 주동적으로 나서서 처리해야만 했다. 황실과 정후부의 체면을 차리면서도 초왕의 심기를 살펴야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초왕과 정후부의 체면을 위해서는 딱 한가지 방법 뿐, 바로 원경릉을 희생시키는 길 밖에 없었다.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리오거라! 둘째 노마님을 불러오거라." 원경릉이 정후부로 돌아온 후 사흘 정도 됐을 무렵, 둘째 노마님에게 좋은 어의를 불러 임신을 하기 위한 검사를 진행했지만, 선천병이 있어 임신할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소문이 항간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정후부의 둘째 노마님의 주변인이 퍼뜨린 것으로 알려졌다. 원경릉이 이 소식을 들은 것은 사흘이 지난 뒤였다.녹주는 시내에 바늘을 사러 나갔다가 이 소문을 듣게 됐다. 소문을 들은 녹주는 몹시 화가 났다. 원경릉이 친정에 온 순간부터 녹주가 곁에 있었는데 어의는 커녕 환대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그저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정후부가 일부러 이 소문을 퍼뜨린 것을 알아차렸다. 원경릉이 이미 왕부와 주씨 가문의 눈 밖에 난 이상, 주씨 가문에게 아부하기위해 이런 소문을 퍼뜨린게 분명했다.이 소식을 들은 주씨 가문은 손 안대고 코푼격이 되었다. 원경릉이 스스로 구실을 찾아 황실을 나가주겠다니. 주씨 가문에서는 줄곧 우문호와의 혼사를 미뤄왔는데 이는 둘째 딸인 주명양이 후궁으로 시집을 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그닥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주명양이 초왕의 정비로 시집을 간다면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과연 정후의 잔머리는 알아줄 만 했다. 이런 머리를 나라와 국민을 위해 썼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왕비님, 왜 화를 내지 않으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 헛소문을 믿고 있습니다."비록 녹주는 이전에 왕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 왕비는 예전과 많이 바뀌었다. 지금의 녹주는 진심으로 왕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녹주는 사람들이 왕비를 욕하는 것이 용납할 수 없이 화가 났다.그러자 원경릉은 웃으면서 "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