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는 원주(原主)의 큰형인 원륜문의 아내 최씨가 노란 꽃무늬 비단 치마를 입고 손목에는 청옥 팔찌를 차고 머리에는 진주와 청옥으로 만든 장식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교적 시건방졌는데, 지금 원경릉을 보는 표정에도 불만족스러움과 사람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물씬났다.그녀의 옆에는 원주(原主)의 여동생인 원경병(元卿屏)이 있었다. 올해 열다섯살이 된 그녀는 얄쌍한 얼굴에 동그란 두 눈은 생기가 가득했고 입술은 길게 좌우로 늘어뜨려 있었는데 누가봐도 예쁘다고 느껴지는 외모였다. 그 외에 두 명의 첩의 딸이 있었는데 첩의 소생이라 그런지 머리를 푹 숙이고 있고 옷매무새도 화려하지 않았다. 원경릉이 둘째 노마님을 보았는데 그녀는 풍만한 체구에 동그란 얼굴에는 나이에 비해 주름도 별로 없었다. 머리도 염색을 한건지 흰 머리 하나 없었다. 그녀는 한 눈에 봐도 값비싼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비단으로 둘러쌓인 사람 같았다. 머리는 높게 땋아올렸고 그 위에는 화려한 비녀가 꽂혀있었다. 모르는 누가 보면 이 집안의 안방마님으로 오해하기 쉽상이었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기가 어려 있었는데, 그 웃음에는 다소 조롱감이 있었다. 이로써 정후부에서 황실의 총애를 잃은 왕비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듣자하니 조모의 병세가 심해졌다고 하시던데, 지금은 어떠신지요?” 원경릉이 물었다. 둘째 노마님이 바깥을 한번 슬쩍 보았다. 그녀는 원경릉이 황실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을 보고 표정이 굳어졌다. “조모께서는 그냥저냥 하신다. 이번에는 네 아버지가 너를 이리로 부르신거니까 서재로 가보거라.”원경릉은 그녀의 말투에서 그녀가 자신을 반기지 않고, 접대할 생각조차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서재로 향했다. 원경릉을 만나려면 그냥 자신이 황실로 오면 되지 굳이 조모가 아프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나를 이 곳으로 부른건가? 조모가 아프시다길래 아침 밥도 먹지 않고 왔는데 말이다. 이른 아침에 공복이라 그녀는 손발이 후들거리는 것 같
아침상이 준비되었다. 원경릉은 아침에 달고 느끼한 음식을 먹지 않기에 계화떡은 먹지 않고 죽만 먹었다. 계화떡을 차려놓고 손도 대지 않은 원경릉은 일어서서 둘째 노마님에게 말했다. “둘째 노마님. 결례를 범했습니다.” 둘째 노마님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빨리 가보게. 부친이 기다리시네.” 라고 말했다. 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서재로 걸어갔다. 문 밖을 나서자마자 난씨가 뒤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허세부리는거 보셨습니까? 왕가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우리 정후부의 도움없이는 죽 한사발 얻어먹지도 못하면서! 듣자하니 왕야께서 욕은 기본이고 때리기까지 하신다던데. 다들 원경릉 이마에 난 상처를 보셨지 않습니까? 분명 초왕에게 맞은겁니다! 시집간지 1년이나 됐는데 아직 합방 소식도 없고, 쯧쯧. 비웃음 당해도 쌉니다!”이 말을 듣고 원륜문의 아내 최씨가 입을 열었다. “합방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태후께서 초왕에게 약을 먹여서 겨우 합방을 했다고 합니다. 보아하니 초왕이 원경릉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다들 그만하게. 바깥사람이야 뭐라고 떠들든 상관없지만 내부 사람인 우리가 덩달아 소란을 피울 이유가 있느냐? 다들 각자 방으로 돌아가거라.” 이를 듣고 있던 둘째 노마님이 정의로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왠지 모르게 약간 통쾌한 표정이었다. 약을 먹고 합방을 하다니, 초왕이 얼마나 그녀를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초왕과 합방을 했다고 초왕이 자기를 달리 보고 있다고 친정으로와서 왕비 행세를 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다.원경릉은 이런 말을 들으니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원경릉은 비녀를 꽂았다. 그녀는 규방에 있었던 일을 어느정도 알고 있던 원경릉은 이 말을 듣고 즉시 그녀를 따라갔다. 원경병이 원경릉의 소매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쓸모 없는 짓 하지마세요. 왕비가 됐는데도 왕야께 총애를 받지 못하니까 다들 비웃는겁니다.”원경릉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는 말했다. “비웃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태상황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태상황?” 원경릉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후가 벌떡 일어났다.예상하지 못한 인물이라 정후는 충격을 받은 듯 했다.“왜 너를 궁으로 부른 것이냐?”“병수발 때문입니다.”정후의 낯빛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태상황께서 너에게 병수발을 들라고 하셨다는 말이냐? 그럼 이번 기회를 통해서 태상황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원경릉은 그의 음흉한 속내가 눈에 훤히 보여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로잡기는 커녕 제가 태상황님께 미움을 샀으니 궁에서 쫓아낸 것 아닙니까.”“너는 잘하는게 무엇이냐? 모처럼 온 좋은 기회를 다 망쳐버리고! 무엇이 태상황을 분노하게 만든것이냐? 혹시 네가 태상황과 황제 앞에서 제왕비를 폄하한 것 아니냐?” 정후가 분에 못이겨 탁자를 내리쳤다.“예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원경릉은 사건에 대해 해명하는 것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녀에게는 정후부가 왕가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네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제왕비와 잘지내지는 못할 망정! 당시에 너를 믿은 내가 바보 천치였어! 당초에 초왕이 너를 총애하게끔 할 자신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너를 초왕부로 시집을 보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을게야! 왕가에 미움을 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주씨 집안의 미움까지 사다니!”“밖에 녹주가 서 있습니다. 녹주는 왕야의 사람인건 아시지요? 제가 정후부에서 나눴던 대화와 행동 하나하나 왕야 귀로 들어갈테니 부친께서는 말을 조심하시는게 좋을겁니다.”“어찌…….” 정후는 지금 맘 같아서는 원경릉에게 욕을 한바가지 하고 싶었다. 그는 당초 원경릉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됐다. 지금 그녀는 궁에서 제왕비의 미움을 샀고, 주씨 집안에서도 그녀를 눈엣가시로 보고 있지 않는가? 현재 정세를 보니 그의 병부상서 지위를 오래 유지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일 당장 제왕부에 가서 제왕비에게 사죄하거라.” 정후가 밖에 있는 녹주를 의식한 듯 조용히 말했다.“사죄할 이유가 없습니다.” 원경
노마님이 워낙 조용한 것을 좋아해서 방 안에는 손씨 아주머니만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원경릉이 돌아온 것을 보고 손씨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왕비 오셨습니까? 어서 들어오십시오.”원경릉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가식적인 웃음이 난무하던 정후부에서 진정어린 미소를 보니 괜히 마음이 놓였다. “조모님의 건강은 어떠십니까?” 원경릉이 들어가려고 하자 손씨 아주머니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괜찮으십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도 못드셨는데 오늘은 죽도 절반 이상 드셨습니다.”원경릉은 손씨가 왜 앞을 가로막은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는 조모를 뵈어야 겠습니다.”손씨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왕비님 돌아가시는게 좋겠습니다. 노마님께서 아직 화가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며칠 전까지만해도 왕비님 이름을 들으면 치를 떠셨습니다.”원경릉은 노마님이 예전부터 원경릉이 왕궁으로 시집가는 것을 반대했고 심지어 혼인을 하기로 한 시점에도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허영심만 가득차 있다며 심하게 질책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전에도 원주(原主)가 친정집에 찾아와도 조모는 문을 닫고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았다. ‘정후부에도 이렇게 사리에 밝은 사람이 있다는게 참 다행이군’원주가 황실에 들어가려고 우문호와 혼인을 택한 것은 참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원경릉은 손씨의 만류에도 굴하지 않고 “제가 조모께 중요하게 여쭈어야 할게 있어서 어제 막 궁에서 나온겁니다.” 라고 말했다.손씨는 어제 궁에서 막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노마님께서 지금 몸이 안좋으시니 주의하세요.”라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원경릉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창문을 모두 닫아놓아 빛 한줄기 들지 않았다. 가을의 찬바람이 문과 창틈 사이로 스며들어 몸이 금방 으스스해졌다. 원경릉은 침상에 누워있는 노마님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살이 하나도 없었고, 몸은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것 같이 앙상했다. 노마님은 기력이 없는 가운데에도 원경릉을 알아보고는 그
태상황이 하사한 물품이라고 하자 노마님이 천천히 몸을 돌려 원경릉을 보았다.“태상황님을 만나셨습니까?”“예. 며칠 전까지도 태상황님의 시중을 들다가 어제 막 궁을 나왔습니다.” 원경릉이 미소 띈 얼굴로 말했다. “왕비께서 노마님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여기로 온 것 입니다.”손씨가 급히 말을 덧붙였다.노마님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지더니 벌떡 일어나 부들거리는 손으로 원경릉의 뺨을 내리쳤다.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태상황님의 병시중을 들었다고?”원경릉은 뺨을 맞았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노마님은 온 힘을 다해 말을 뱉어내고는 숨을 헐떡였다. 노마님은 목에서 가래가 올라오는 듯 구룩거리는 소리를 냈다.그녀의 얼굴이 점점 파래지더니 피가 안통하는 듯 입술이 하얘졌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침상에 누웠다. 원경릉은 다급하게 약상자 안에 천식 흡입기를 꺼냈다. 그녀는 호흡기를 노마님의 입과 코에 대고는 다급하게 외쳤다. “힘껏 들이마시세요. 이것은 황실에서 쓰는 효과가 좋은 약입니다!”노마님은 인상을 찌푸린채로 어쩔 수 없이 깊게 흡입기를 들이마셨다. 원경릉은 흡입제가 한 칸 내려오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천천히 숨을 쉬세요.”노마님의 호흡이 차츰 부드러워졌고 백지장 같던 그녀의 얼굴에도 핏기가 돌았다. “이게 무슨 약입니까? 정말 신통합니다!”이를 본 손씨가 놀란 듯 말했다.“궁에서 쓰는 약입니다. 태상황님께서도 이것과 비슷한 약을 쓰십니다.” 원경릉은 흡입기를 침상 머리맡에 두며 “나중에 조모께서 발작을 일으키시면 이걸 쓰십시오.” 라고 말했다. 노마님이 점차 안정되자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심장과 폐 주위를 살폈다. 그녀는 노마님이 천식을 앓았고 그 이후에 폐기종까지 앓았기에 그녀의 몸이 성치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만약 여기서 병세가 더 악화된다면 죽을 수 있었다.천식은 이미 손을 쓰기 어려운 상태였고 폐기종은 만성병이기에 오랜 기간 치료를 하지 않으면 쉽게 호전되기 어려웠다. 노마님은 병으로 쓰러진 이후 지금
원경릉이 노마님의 곁을 지키고 있는데, 소나라(苏国)의 삼촌이 찾아왔다. 소국구(苏国舅)은 태후의 친동생으로 황제의 처남이다. 소가(苏家)는 몇 년 동안이나 특출난 인재가 없었는데, 부자는 망해도 3대가 먹고 산다고 하지않는가. 태후, 현비 모두 조정에서 한가닥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소국구가 정후부에 와서는 단도직입적으로 초왕이 후궁을 맞이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말을 하는 내내 태후를 들먹이며 정후부와 초왕비도 후궁을 맞는 일에 나서서 축복하라고 했다.정후가 초왕이 후궁을 들인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했다. 진작 알았더라면 공주부의 일을 꾸미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초왕의 총애를 얻지도 못하고, 주씨 가문에게도 미움을 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딸도 잃고 권력도 잃은 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소국구의 강력한 요구에 그는 진심으로 축하하는 척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국구야(国舅爷). 안심하세요. 왕비도 기뻐할 것 입니다. 주씨 가문에서 후궁을 들이시면 왕비도 자매처럼 지내며 왕야를 잘 모실겁니다.”“후작나리께서는 머리가 좋으신 분이니 제가 말에 핵심을 짚으셨으리라 믿습니다. 후궁을 들이면 태후마마와 현비마마가 마음을 놓으실 겁니다. 안심하시지요. 후작나리의 일은 현비마마가 기억하고 있으니 억울한 일을 겪지는 않을 겁니다.” 국구는 담담하게 말했다.정후가 쓴 웃음을 지었다. 그의 일은 어찌 현비가 돕겠는가? 지금 북당의 강산 절반을 주씨 가문이 꽉 잡고 있는 마당에 소씨 가문이 힘을 쓸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는 일부러 기쁜 척하며 연신 읍했다. “태후마마, 현비마마 황송하옵니다!”소국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갔다. 노마님의 집 밖으로 나온 원경릉은 두명의 시위(侍卫)에게 가로막혀 서재로 끌려왔다. 정후부에서는 녹주를 원경릉과 따로 떼어 놓기 위해 불러다가 간식을 먹였다.정후는 원경릉을 보자 대노하였다. “묻는 말에 대답하거라. 네가 초왕이 후궁을 들이는 것을 반대하다가 현비의 노여움을 사 궁에서 쫓겨난 것이냐?”원경릉
이 일은 정후가 주동적으로 나서서 처리해야만 했다. 황실과 정후부의 체면을 차리면서도 초왕의 심기를 살펴야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초왕과 정후부의 체면을 위해서는 딱 한가지 방법 뿐, 바로 원경릉을 희생시키는 길 밖에 없었다.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리오거라! 둘째 노마님을 불러오거라." 원경릉이 정후부로 돌아온 후 사흘 정도 됐을 무렵, 둘째 노마님에게 좋은 어의를 불러 임신을 하기 위한 검사를 진행했지만, 선천병이 있어 임신할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는 소문이 항간에 파다하게 퍼졌는데, 정후부의 둘째 노마님의 주변인이 퍼뜨린 것으로 알려졌다. 원경릉이 이 소식을 들은 것은 사흘이 지난 뒤였다.녹주는 시내에 바늘을 사러 나갔다가 이 소문을 듣게 됐다. 소문을 들은 녹주는 몹시 화가 났다. 원경릉이 친정에 온 순간부터 녹주가 곁에 있었는데 어의는 커녕 환대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말을 들은 원경릉은 그저 담담하게 웃기만 했다. 그녀는 이미 마음속으로 정후부가 일부러 이 소문을 퍼뜨린 것을 알아차렸다. 원경릉이 이미 왕부와 주씨 가문의 눈 밖에 난 이상, 주씨 가문에게 아부하기위해 이런 소문을 퍼뜨린게 분명했다.이 소식을 들은 주씨 가문은 손 안대고 코푼격이 되었다. 원경릉이 스스로 구실을 찾아 황실을 나가주겠다니. 주씨 가문에서는 줄곧 우문호와의 혼사를 미뤄왔는데 이는 둘째 딸인 주명양이 후궁으로 시집을 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그닥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주명양이 초왕의 정비로 시집을 간다면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과연 정후의 잔머리는 알아줄 만 했다. 이런 머리를 나라와 국민을 위해 썼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왕비님, 왜 화를 내지 않으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두 헛소문을 믿고 있습니다."비록 녹주는 이전에 왕비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 왕비는 예전과 많이 바뀌었다. 지금의 녹주는 진심으로 왕비를 생각하고 있었다. 녹주는 사람들이 왕비를 욕하는 것이 용납할 수 없이 화가 났다.그러자 원경릉은 웃으면서 "
첩을 들이는 문제로 입궁한 원경릉원경릉 생각에 측실을 맞이하는 일은 벌써 며칠째 입질에 오르내렸다. 바깥엔 원경릉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고, 이 얘기가 궁에 전해지면 원경릉을 궁으로 불러 내칠 것이 분명하다. 원경릉은 기상궁에게 오늘이나 어젯밤에 궁중에서 사람이 온 적이 없었냐고 물었다.기상궁은: “목여태감이 직접 한 번 오셨습니다.”바로 그거다, 분명 황제 폐하께서 초왕의 뜻을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인 게 분명하다. 주씨 집안의 여식을 아내로 맞는 것이 우문호의 소원이었는데, 우문호가 흔쾌히 응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원경릉은 태연하다. 비록 황실 가문에서 내쳐지지만, 분명 그녀에게 충분히 배상해 줄 것이고, 원경릉은 앞으로 생계로 걱정할 필요 없으며, 차용증도 한 장 있으니, 이 차용증으로 자신을 위한 작은 집 한 칸은 마련할 수 있다.드디어 해방이란 마음으로 원경릉은 마차에 올랐다.궁 입구에서 원경릉은 마차의 가리개를 걷고 끝없이 늘어선 황금빛 자개 추녀를 바라보며, 어쩌면 이게 그녀의 마지막 입궁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또한 그녀의 마음속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자유가 있었다.원경릉은 마차에세 내려 어서방으로 걸어가며 심미안을 가지고 궁중의 경치를 감상했다.북당의 황궁은 정말 아름답다. 강남의 건축물처럼 우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북당의 황궁은 위풍당당한 아름다움, 유구한 고탑, 넓은 전당, 금박을 칠한 둥근 기둥, 황권의 위세가 드러나지 않은 곳이 없다. 원경릉은 어서방 문 앞에서 안에서 나오던 사람과 마주쳤다.이 사람은 청색 학창의를 입고, 관모에 홍보석을 박았는데 대략 6~70세 정도로 수염과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얼굴이 홀쭉하고 말랐으나 눈빛만은 상당히 예리해서 그가 나갈 때 한번 원경릉의 얼굴에 눈길을 주었을 뿐인 데도 마치 두 줄기 번개로 훑는 것 같아 원경릉은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이 사람이 바로 북당의 산천 절반을 손에 쥐고 있으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주재상이다.주재
안지여에게 구원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리 나리 일행이 성을 제압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대오가 경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안풍 친왕비가 미리 사람을 풍도성으로 보내 각처, 특히 성 수비군과 군대에 잠입시켜, 음식에 효과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을 풀어, 오늘 중독 증상이 나타나도록 독의 분량을 조절했다.적어도 내일까지는 안지여를 도우러 올 사람은 없었다. 독성은 적어도 이틀이 지나야 깨끗해지기 때문에 이틀 동안 그들은 설사와 전신 무기력으로 성에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도 와서 도울 수 없었다.그리고 그들이 기력을 회복할 때쯤이면, 안지여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안풍 친왕과 이리 나리는 성을 통제하고, 안지여 부부를 제압해 두 사람을 줄로 묶고 지혈시켜 주었다.안지여는 요 몇 년 동안 자신이 상당히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는 풍도성이 부유하기 때문으로, 돈으로 많은 사람을 살 수 있었으며, 여러 곳에서 추켜세워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처절하게 패배한 적이 없었던 이유는 진정한 적이 없기 때문으로, 주변의 떠돌이 비적은 작은 마을 규모로 너무 작아서 소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코 그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적이 너무 약해서였다.조정 사람과 비교했을 때, 그는 제대로 훈련받은 적 없는 비적었기에 일격도 감당할 깜냥이 못됐다.이리 나리는 둘을 중정에 묶어 두었다. 온 바닥에 남은 음식과 깨진 기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본 안지여는 마음속 깊이 분노가 일었다. 자신의 생일날, 그를 다치게 한 것이 바로 그의 친자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오늘 이렇게 많은 고수가 현장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런 결말을 맞다니 너무 불쾌했다. 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을 부축하고 안지여 부부 앞으로 가서, 그녀가 안지여 부부를 내려다보자, 그들은 낭패에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으로, 이리봉청은 분노하는 마음과 함께 서글픈 마음도 들었다. 그들을 죽이면 커다란 복수는 이뤄 천문 세가 망자의 원혼은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저들을 이렇게 쉽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리 나리가 검을 휘두르며 안지여를 겨누자, 안지여가 공중으로 뛰어올라 후퇴했다.공자들은 돕고 싶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에게 바로 제압당했다. 안지여는 이리율 것으로 그들은 주변 사람을 제압하기만 할 뿐 옆에 서서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이리율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가르친 안풍 친왕 부부를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이리율의 검법은 신속하고 맹렬해서 안지여는 상대하느라 쩔쩔매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성안의 호위들은 늑대 무리와 늑대파, 홍매문 사람들에게 막히는 바람에 안지여는 홀로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하지만 30분을 못 가서 안지여는 질게 틀림없었다.놀란 나머지 계속 실성해 있던 소여쌍이 갑자기 이리봉청을 향해 바싹 마른 손을 뻗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광적인 집착과 분노에 사로잡혀 성질을 부렸다. “멈춰, 다들 멈추라고. 안 그러면 내가 이년을 죽여버릴 것이니까!”소여쌍은 무공을 할 줄 알았지만 잘하지 못한 것이 어릴 때부터 계속 중병을 앓아 무공 연습에 소홀했고 성주 부인이 된 뒤로는 더욱 병기에 가까이할 일이 없었지만, 공력만큼은 아직 약간 있었다.소여쌍은 증오의 힘으로 이리봉청의 목을 졸랐는데, 소여쌍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이리봉청의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았다.안풍 친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서려 하자, 안풍 친왕비가 말리며 고개를 살짝 흔들었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뜻으로 뒤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참으라는 눈짓을 하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모두가 이리봉청이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손가락으로 뭔가를 쥐고 있어 소여쌍의 어깨 위를 휘감고 팔을 눌러 소여쌍이 머리를 돌리게 했다. 이리봉청 손에 쥔 것은 바늘로, 그대로 소여쌍의 오른쪽 눈을 찌르고 들어갔다.소여쌍이 절규하며 이리봉청을 놔주고 선혈이 흐르는 눈을 움켜쥔 채 비틀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데굴데굴 구르며 새된 소리를 지르는데, 원망과 저주의 말을 끊임없이 쏟아
풍도성 중정에는 안지여의 아들들과 사위가 그의 곁에 남았는데,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점점 공포에 질려가고 있었다.‘이 사람들, 아주 대단하구나!’안지여는 이리봉청을 보고 비록 조금 냉정해 보였지만, 여전히 놀라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갑자기 소여쌍이 큰 소리로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들며 눈물을 찔끔거리더니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리봉청을 가리키며 원망했다. “뜻밖에 네가 안 죽었단 말이지? 게다가 아들까지 있고. 참으로 황당하구나. 정말 너무 황당해. 원래 죽어야 했을 인간은 죽지 않고, 잘 살아야 할 사람은 36년간 괴로움을 당했어. 이리봉청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넌 이제 지옥에 떨어져야 해.”이리봉청은 소여쌍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했는데, 그녀 눈에는 지금 안지여만 들어왔다.안지여는 36년을 살아왔지만, 이리봉청에게 있어 36년은 마치 사라진 시간처럼 멸문지화의 원한이 어제 일 같았다.안지여도 이리봉청의 눈에서 분노와 악랄함을 보고, 처음으로 마음속에 두려움을 느꼈다.안지여는 억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네 사람을 데리고 가. 지난 일을 묻지 않을 테니. 그렇지 않으면 풍도성에서 곧바로 10만 대군이 올 것으로, 살아서 도망갈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아.”이리봉청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우리는 이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로 네 성으로 쳐들어갈 수 있어. 넌 이미 졌어.”안지여가 웃었다. “졌다고? 그래?”안지여는 수하의 대장군이 믿음직해서, 그들을 당하게 놔줄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장군의 부대는 분명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아마 지금쯤이면 궁수들이 이미 배치를 마치고 그들을 전부 쏴 죽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리 나리가 이리봉청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자와 말 섞으실 필요 없어요. 앉아서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말을 마치고 의자를 올리더니 이리봉청을 부축해서 앉혔다.안지여가 이리 나리를 보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안지여가 퍼뜩 눈을 돌려 이리 나리를 보았다.‘이리봉청이 저자를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건러니까?이리 나리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더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안 성주와 좀 오래된 원한을 따져야 하는데, 관련되기 싫으신 분은 자리를 피해 주시지요!”그때 한 사람이 검을 짚고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넌 도대체 어떤 놈이냐? 무슨 자격으로 자리를 피해라 마라야? 안 성주를 귀찮게 할 생각이면 일단 나부터 통과해 보시지!”그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장검을 뽑아 파죽지세로 이리 나리를 향해 휘둘렀다.이리 나리는 손을 살짝 움직여 손바닥으로 칼자루를 밀자, 검이 날아가며 그 사람의 귀를 베어 한 줄기 피가 공중에 뿌려지더니, 방금까지 기고만장하던 자가 비명을 지르고 귀는 바닥에 떨어졌다.검이 다시 이리 나리 수중으로 정확히 돌아왔다.이 모든 게 3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회선검?” 검법을 아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현장은, 숨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회선검은 검마의 검법으로, 그렇다는 건 저 사람이 검마의 계승자?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리에서 검마를 찾았다. 과연 두 손으로 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도 차가운 안광이 느껴졌다.과연 진짜 검마구나, 사람들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검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리 나리를 흘끔 보더니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 자식, 언제 내 비장의 검법을 배운 거야?’이리 나리의 검 끝에선 아직 선혈이 떨어지는데,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말했다. “이 아수라장에 끼고 싶은 거라면, 제가 무례하다고 원망할 생각 마세요.”“무엄하도다!” 안지여가 몹시 놀랐다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치켜뜨며 이리 나리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네 아버지다!”이리 나리가 코웃음을 쳤다!안지여의 몇몇 아들이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버지, 저희가 지켜드리겠습니다.”안풍 친왕이 젓가락을 던지고 일어나 차갑게 명을 내렸다
오늘은 성주의 생일이기에 경사라 섣불리 피를 볼 수는 없으므로 칼은 빼 들었지만 먼저 나서서 늑대를 죽이는 사람은 없었다.안지여는 어두운 눈빛으로 ‘늑대 무리라고? 척후병의 보고로는 안풍 친왕이 늑대 무리를 끌고 온다고 했는데, 저들이 의외로 성으로 직접 쳐들어 왔다 이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지여는 잔을 들고 꿈적도 하지 않은 채, 무너지기 직전까지 미동도 없는 태산처럼 냉정하고 침착했다. 늑대 무리는 안으로 들어온 뒤로 두 패로 나뉘어 서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호시탐탐 엿보며 으르렁거렸다.“성주님, 성주님, 저들이 기어코 쳐들어오겠다고….” 문지기가 외치는 소리는 들렸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더니, 그보다 조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먼저 들이닥쳤다.앞에 걸어들어오는 두 사람을 안지여는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안풍 친왕 부부로 예전에 그들이 천문 세가 사람들을 조사하러 왔을 때 그에게 속은 적이 있었다. 비록 당시 일면식 뿐이었으나 천문 세가 일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 탓에 그들의 얼굴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째서 별로 변한 게 없는 거지?’안풍 친왕 부부 뒤에 따라오는 10여 명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그들의 호위 무사일 것으로, 주인인 안풍 친왕 부부는 별 표정이 없었으나,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와 고개를 들자 괴팍하고 악랄한 얼굴이 안지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안지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고, 미소는 띠고 있었지만 매서운 눈빛으로 저들이 돌계단을 오르면 그때 일어나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게 그의 태도였다.하지만 안풍 친왕 부부는 돌계단을 오르지 않았고, 손님 중 건배를 권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람들 의자에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차지하고 앉아, 그들을 대놓고 밀치더니 품에서 자기 젓가락을 꺼내 옆 사람 상관하지 않고 먹기 시작해 사람들이 다 경악했다.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두 사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걸어들어오고 있었
풍도성 안은 술잔을 주고받고 건배하며 흥겨운 잔치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안지여는 오늘 황금색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에 거대한 이무기를 수놓았으며, 황실의 밝은 황색과는 약간 구별되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곤룡포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이무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는 용과 매우 흡사했다.안지여는 자신의 야심을 이미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당연히 안지여는 오늘도 야심을 감출 생각 없이 손님들에게 보란 듯이 자세를 잡았다. 심지어 인근 지역 조정 관리들이 손님으로 왔어도 안지여는 전부터 맺어온 관계였기에,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매우 두터워 산 넘고 물 건너 저 멀리 있는 황제가 그들을 시시콜콜 관리할 수 없었다.그 자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오늘 황실에서 파견한 일행이 온다는 것을 알고, 연회석에서 큰 소리로 물었다. “성주님, 듣자하니 안풍 친왕 전하와 이리 부마께서 오늘 오신다던데 어째서 안 보입니까?”안지여가 잔을 들고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생일을 축하한다면 결국 오겠지요.”“여정을 듣기론 오늘 분명 풍도성에 도착한다고 했는데, 어째서 밤이 되도록 아직 안 보입니까? 설마 성주님이 직접 나가서 맞이하셔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성주님이 가서 맞이하셔야 한다고? 아주 허세가 대단한데? 퉤!”“누가 아니랍니까? 진심으로 생신을 축하하는 거였으면 며칠 전에 풍도성에 도착해 성의를 보여야지, 오늘까지 늑장을 부리다가 늦게서야 와서, 아직도 잔치에 오지 않은 건 분명 성주님의 체면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행태입니다. 제가 보기에 못 들어오게 막고 돌려보내시지요, 마음만 받은 셈 치고요. ”“맞습니다. 그동안 조정에서는 풍도성에서 받은 공물이 적지 않았으니, 만족한 줄도 알아야죠.”“풍도성은 더 이상 조공을 바칠 필요 없어요. 뭐 때문에 그럽니까? 수백 년 전에 풍도성은 원래 북당의 영토가 아니었어요. 선을 긋고 나와 독립해야 합니다.”모두 안지여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서, 몇 잔 들어가자, 비위를
소여쌍의 욕은 거의 반 시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도 별로 드문 일이 아니라 무쌍거 사람들은 다 익숙해져 있었다. 성주가 오지 않거나 소여쌍이 아프기 시작해도 이렇게 욕을 해댔다.욕하다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늙은 몸종이 가서 달랬다. “부인 그러실 게 뭐가 있으십니까? 몸이 가장 중하십니다.”소여쌍이 의자에 기대 늘어졌다. 극도로 피곤해 풀린 눈으로 천정을 보며 비참함이 가슴 깊은 곳을 타고 내렸다. “오늘이 초엿새지?”“네!” 늙은 몸종이 대답했다.소여쌍이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곧 15일이구나. 또 내 명을 재촉하는 고통이 오겠지.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그러자 늙은 몸종도 매우 괴로워했다. “부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고통도 며칠이면 그럭저럭 지나가서, 그동안도 그렇게 지내셨잖아요?”“며칠이면 뭐 그럭저럭 지나가나?” 소여쌍이 잔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네가 이 고통을 안 당해봐서 그래. 이게 다 이리봉청 그년 짓이야. 오빠가 그년을 쫓아가서 죽이게 한 걸 정말 후회해. 그년을 잡아 와서 가두고 내가 한 번씩 아플 때마다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나보다 수천 수백 배 고통스럽게 해야 했어.”늙은 몸종이 소여쌍의 손을 쥐었다. “부인 그런 생각 마세요. 벌써 죽은 사람을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 아무 도움도 안 됩니다. 성주님과 자꾸 다투지 마세요. 자꾸 다투시다 보면 감정이 사라집니다.”소여쌍이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는 진작부터 나한테 아무 감정 없어.”“성주님은 이리봉청에게 아무 감정 없으세요. 감정이 있을 리도 없고요. 안 그러면 당시 부인을 위해 이리봉청을 죽이고 천문 세가 사람을 다 죽이셨을 리가 없죠.”소여쌍이 고개를 돌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전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요 몇 년간, 성에 들어온 여자들 생긴 걸 보라고. 전부 이리봉청을 쏙 빼닮았잖아? 오빠는 역시 후회하고 있는 거야. 날 위해 이리봉청을 죽인 걸.”소여쌍은 늙은 몸종의 손을 잡는데 고여서 썩
안지여는 소야쌍을 놓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이틀 뒤가 내 생일인데, 당신 몸 상태는 어때?”그러자 소여쌍은 시녀의 손을 뿌리치고 얼른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 했는데, 몇 걸음 만에 휘청거리더니 하마터면 안지여 뒤로 넘어질 뻔했다.안지여는 소여쌍을 잡아줄 수 있었지만, 손을 뻗지 않고 그녀를 등지며 보이지 않는 척했다.시녀는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얼른 소여쌍을 부축해 바닥에 넘어지는 것까지 막았다.소여쌍이 숨을 돌리고 살짝 웃었다. “몸이 많이 좋아져서 오빠 곁에 있을 수 있어요. 오빠 생일에 당연히 제가 곁에 있어야죠.”안지여는 그제야 소여쌍을 돌아봤다. “생일엔 손님이 많이 올 거야, 올해는 다른 어떤 해보다 성대하게 하니까 당신도 잘 차려입어. 내가 내일 사람을 시켜 장신구를 보내도록 하지.”“네, 알았어요!” 소여쌍이 기쁜 듯이 말하며 안지여를 한없이 바라봤다.하지만 안지여는 소여쌍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정 설명했고 체면도 차렸으니 됐다 싶어 말했다. “난 아직 일이 있어서. 당신 쉬는 걸 방해하지 않을 테니 잘 쉬고 있어.”안지여는 말을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려고 했다.이때 소여쌍이 갑자기 닭발 같은 손을 뻗어 안지여의 팔을 붙잡으며 서둘렀다. “오빠, 어렵사리 왔는데 저랑 얘기 좀 더 해요.”안지여가 고개를 숙이고 소여쌍의 마르고 늙은 손을 바라봤다. 손등에 주름이 자글거리는 것이 구겨진 비단 뭉치처럼 너무 흉해서 혐오감이 든 나머지 쓱 손을 뺐다. “말했잖아, 일이 바쁘다고.”소여쌍의 눈빛이 갑자기 매서워지며, 늙고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일이 바쁜 거예요, 아니면 그 여우 년을 찾아가는 거예요? 제가 모를 줄 아세요?! 여자를 성에 얼마나 숨겨놨는지.”안지여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야?”소여쌍이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축 처진 눈에서 원한이 쏟아져 나왔다. “제가 늙었다고 싫어하는 거잖아요, 아녜요? 잊지 마세요. 오빠의 동안도 결국 늙는다고요. 이리봉청이 아직 살아있어도 지금 저보다
안지여의 생일잔치에 상인, 인근 주와 현의 관리, 무림 사람들, 강호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안지여는 그동안 사교의 폭이 넓고, 각계각층 인사들과 교분을 맺고 있어 이번에 생일잔치란 이름을 빌려 그들 모두 한자리에 모아 대사를 논의하고자 했다.안지여는 너무 오래 기다려왔다. 전에 시기를 놓치고 이제 우문호가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이때가 대사를 치를 적기였다.우문호가 몇 년 더 북당을 다스리고 나면 그에게 더는 기회가 없을 지도 몰랐다.그래서 조정이 사람을 파견한다는 소식에 그는 기뻤다. 이를 빌미로 조정에 본때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천문 세가의 무덤도 생일잔치 후 태워버릴 계획으로, 물론 완벽한 구실을 붙여 백성들에게 설명할 생각이었다.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온 건, 안지여에게 아주 완벽한 빌미를 제공해 주는 셈이었다. 모든 것을 이리 부마 탓으로 돌리고 백성들에게 조정이 저지른 일이라고 알리면 천문 세가를 그토록 떠받들던 풍도성 백성들은 조정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안지여는 부마 이리율을 별로 개의치 않았으나 그의 내력 정도는 알고 있었다. 거부이자 늑대파 문주라고 했으나 그건 전부 민간에 있을 때 신분에 불과했다. 결국 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는 길을 택한 이 사람은 극도로 지위와 재산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을 다루기 어렵지 않은 건, 안지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부마 이리율의 마음 저 밑엔 상인이란 출신을 벗어던지고 상류 계층에 들어 후작 세가가 된 후 2~3세대가 지나면 철저하게 이전 상인의 신분을 벗어던질 수 있다는 목표가 있을 게 틀림없었다.생일까지 아직 이틀 남았다.안지여는 두번 다시 소여쌍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한번은 가야 했다. 그의 생일잔치에 소여쌍이란 성주 부인이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성주 부부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해서,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허상을 심어주려는 것뿐이었다.소여쌍은 풍도성 동쪽 무쌍거에 살고 있었다. 혼인하던 그해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