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현경의 동공이 흔들렸다."오늘은 원래 소나은의 취임식이었는데 소이연 씨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어서 소나은이 아주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해요."이명진은 계속 보고했다."하지만 소승영과 소나은이 은하를 지켜온 만큼 소이연 씨가 은하를 성공적으로 승계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어요."육현경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사무용 책상을 톡톡 쳤다.‘대표님은 확실히 소이연 씨를 특별하게 생각하시네.그렇지 않으면 죽기 살기로 소이연 씨를 화재 현장에서 구하지 않았을 거야.하지만 여자라면 질색하던 대표님이 장안시에 돌아오자마자 생각이 바뀌셨다고?!’이명진은 의아했지만 육현경에게 직접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대표님, 조용히 뒤에서 도와드릴까요?"육현경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자신 있으니 혼자 갔겠지. 소이연 씨를 믿어보자고.""네."이명진은 공손히 대답했다.이명진은 소이연이 아무래도 육현경의 눈에 든 여자이기에 대단한 능력을 갖췄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소이연은 은하 그룹에서 나왔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소이연은 휴대폰을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이연아, 너 왜 나은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문서인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사이는 나은이랑 상관없으니 나은이 난처하게 하지 말고 불만 있으면 나한테 말해."보나 마나 소나은이 그새를 못 참고 문서인에게 일러바친 것이다.그녀는 소나은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익숙했다."문서인, 착각하지 마. 나는 단지 내 것을 되찾으려고 한 것뿐이야."문서인은 가증스럽게 말했다."이연아, 돈 필요하면 말해. 그리고 우리는 단지 헤어졌을 뿐이지 내가 너한테 회사에 나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잖아? 난 널 해고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마! 일만 잘하면 월급 서운하게 안 줄 테니까."소이연은 정말 문서인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문서인,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니까 잘 들어! 우선 은
잠시 후.이명진은 육현경을 이사회에 초대했다.이내 육현경은 회의실을 나섰다.휴게실에서 기다리던 문서인은 휴게실 통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일행을 보았다."저기 지나가는 사람이 혹시 육현경 대표님인가요?"문서인이 물었다.비서는 바로 대답했다."네. 지금 이사회 때문에 회의실을 옮기고 계십니다."문서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자세히 보았다.때마침 이명진이 고개를 돌렸다.문서인은 이명진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명진은 눈살을 찌푸렸다.이어, 예의상 턱을 살짝 끄덕였다.그러고는 재빨리 육현경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이명진은 문서인의 각도에서는 육현경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 단지 모든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가는 것만 볼 수 있었다.문서인은 다시 의자에 앉아, 육현경을 기다렸다.육씨 그룹은 조만간 장안시에 전국 최대의 국제 상류 상권을 건설할 계획이다. 문씨의 주업은 고급 의류이므로 상권에 입점해야 했다. 그러니 일찍 관계를 맺으면 황금 위치를 계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문서인은 오전 내내 기다렸고 육현경은 계속 이사회를 열고 있었다.점심에 물어보니 육현경은 협력사와 함께 식사 중이니 오후에 돌아올 거라고 했다.오후에 다시 물어보니 육현경은 공사장에 가서 현장을 시찰하고 돌아올 거라고 했다.어느덧 회사 모든 직원이 퇴근했다. 육현경을 포함해서 말이다!문서인은 얼굴이 새파래졌다.어찌 되었든 그도 장안시 상층 그룹의 문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자 대표인데, 이렇게 하루 종일 육현경에게 바람을 맞았다니. 비서는 연신 사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육형경에게 한바탕 농락당한 것 같았다!그는 육현경과 원한이 없다….문서인은 분노하여 육씨 그룹을 떠났다."나은아."차에 타자마자 소나은에게서 연락이 왔다."오빠, 하루 종일 육씨 그룹에 있었네. 대화는 즐겁게 나눴어?"소나은이 애교를 부렸다.문서인은 안색이 더 나빠졌다."나 지금 서아랑 밥 먹으러 나왔는데 여기로 올래? 설마 육현경 대표님이랑 식사 같이하
"마감요? 이제 6시 좀 넘었을 뿐인데요?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소나은은 의아했다."아닙니다. 두 분은 여기서 당장 나가주십시오.""우리가 왜 그래야 하죠? 우리 식사 아직 안 끝났어요."문서아는 늘 그랬듯이 펄쩍 뛰며 말했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이유는 없습니다. 우리 레스토랑은 두 분을 환영하지 않습니다.""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얘기야?!""모릅니다."종업원이 대답했다."문서아 몰라요? 톱스타이자 문씨 그룹 큰 아가씨예요."소나은이 옆에서 말했다."네."하지만 종업원은 여전히 냉담하기 그지없었다."손님, 나가는 문은 이쪽입니다."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문서아와 소나은이 어금니를 깨물고 떠날 준비를 하려던 찰나.문득 옆 테이블에 앉은 소이연이 보았다.‘이 여자도 여기에 있었다니?!’문서아는 그녀 옆에 있는 낯선 남자와 어린아이를 뚫어지게 보았다.육현경은 문서아처럼 눈이 높은 여자도 놀라게 할 비주얼의 소유자이다.‘장안시에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었어?!’그녀는 연예계에서도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다."언니?"소나은이 소이연을 불렀다.소이연은 마치 못 본 척, 못 들은 척했다.소나은은 육현경을 보았다. 그녀는 육현경의 외모에 깜짝 놀라 괜히 질투를 느꼈다.‘소이연이 어떻게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만날 수 있지? 서인이 오빠보다 부족한 게 하나도 없잖아.’소나은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문득 뭔가 생각난듯 황급히 말했다."혹시 이쪽이 언니가 좋아한다는 그 소방관?!"문서아는 저도 모르게 실망했다.어쩐지 본 적 없더라니, 같은 계층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옆에는 이 남자 아들이야? 아무리 서인이 오빠랑 헤어졌어도 그렇지, 어떻게 복수를 위해 애 딸린 남자를 만나서 언니 자신을 더럽혀!"소나은의 시선은 육민에게로 향했다.육민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적의가 가득 찬 눈길로 소나은을 노려보았다.얼핏 듣기에 소나은은 호의적인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비꼬는 말이었
저녁 식사 후, 그들은 시간을 더 지체하지 않았다.육현경은 먼저 육민을 집으로 보내 메이드에게 맡긴 뒤 다시 차로 소이연을 데려다주려고 했다."번거롭게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요.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소이연이 사양했다."번거롭지 않아요. 내가 운전하는 것도 아니고."육현경이 태연하게 대답했다.기사는 어색했다.이 상황에 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소이연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그들은 조용히 노스타운에 도착했다.소이연이 차 문을 열었다.그녀는 목발을 짚고 있어서 거동이 불편하고 행동이 느렸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려고 했을 때 육현경은 이미 차 문 앞에서 신사답게 그녀를 부축했다.소이연은 불편했지만 감사의 인사를 했다."고마워요.""아니에요."육현경은 그녀를 부축해 차에서 내렸다.소이연은 목발을 짚고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대표님."소이연은 그를 바라봤다."네?""아까 그 말들 다 진짜예요."소이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열여덟에 원나잇으로 미혼모가 되었어요... 읍."소이연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육현경은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예상치 못 한 상황에 소이연은 반항할 것조차 잊었다.두 입술 사이의 낯선 촉감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러다 갑자기,소이연은 육현경을 밀쳐버렸다.그제야 육현경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알아차린 그녀는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녀는 이게 부끄러워서인지 아니면 화나서인지 구분이 안 됐다."깨끗한 사람이라 했잖아요!"소이연이 육현경에게 따졌다."행동으로 소이연 씨한테 대답하는 거예요. 나 신경 안 써요."담담하게 말하는 육현경에게서 미안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누가 행동으로 하라고 했어요! 입 없어요?"소이연은 급하게 말을 꺼낸 뒤에야 자기가 단어를 잘못 쓴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다시 말을 바꾸었다."말로 하면 되잖아요!"육현경이 웃었다.가로등 불빛이 육현경의 얼굴을 비추었다. 육현경의
"뭐야?!"문서아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문서아의 야단법석에 문씨 가문 사람들을 불쾌해졌다.매니저와 통화를 끊은 뒤, 문서아는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아직도 B급 배우에서 맴돌고 있고 이번 드라마를 통해 A급 배우로 올라설 계획이었다."왜 그래?"문서인는 귀찮은 듯 물었다."매니저한테서 전화 왔는데 투자자가 내 여주인공 배역을 다른 배우로 교체한대."문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번 드라마 육씨 그룹의 풍향 엔터에서 투자한 거지? 너 육씨 가문 사람들한테 잘못한 거 있어?""그럴 리가! 난 그 가문 사람들 만난 적도 없어."문서아는 황급히 부인했다."아, 난 몰라. 나 이거 무조건 하고 싶단 말이야. 오빠가 좀 어떻게 해줘. 이번 배역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데!"문서인도 의아했다.일반적으로 캐스팅이 끝나면 배역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이때, 갑자기 문서인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내가 알기로는 육현경이랑 하도경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어. 나중에 육현경은 비록 해외에서 생활했지만 두 사람 아주 사이는 여전히 좋았지. 어쩌면 하도경이 너를 괴롭히기 위해 육현경을 찾았을 수도 있어...""하도경! 이 간사한 자식!"문서아가 매섭게 말했다.그녀는 문서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네가 정 그 역할을 원한다면, 하도경과 직접 만나서 잘 얘기해 봐. 아니면 직접 육현경을 찾아가든지."문서인이 의견을 제출했다."그게 무슨 말이야?""아빠가 그랬잖아. 육현경이 너한테 관심 있으니 맞선 한번 보라고. 너 육현경과 결혼하면 앞으로 어떤 배역이든 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거 아니야?"문서인이 얘기했다."아, 나 싫어! 지금 나더러 계모나 되라고? 죽어도 싫어. "문서아는 질색했다."그럴 거면 차라리 하도경이 낫겠어!"문서인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차피 문서아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 멋대로였고 그녀가 하기 싫어하는 일은 아무도 강요할 수 없었다...."에취!"고급 클럽의 VIP 룸에서 하도경은
"육현...""미안해, 늦었어."육현경이 말했다.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착각일까?지금 이 순간, 육현경은 평소 딱딱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갑자기 그에게도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감정과 욕망이 생긴 것 같았다."혹시 잘못 찾아온 거 아니에요? 우선 나 좀 나줘요..."소이연은 몸을 뒤틀며 말했다.그녀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앞으로 네 곁에는 내가 있어."육현경은 소이연의 저항을 전혀 느끼지 못하듯 그녀의 귓가에 진지하게 말했다.마치 약속이라도 하는 듯."육현경... 으악!"소이연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육현경은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이 사람, 이게 습관인가?!’"발 조심해."육현경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녀는 육현경이 많이 취한 줄 알았다. 하지만 육현경은 멀쩡하게 그녀의 발을 걱정하고 있다.‘안 취했나?!’육현경이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소이연은 바로 미친 듯이 저항하기 시작했다.육현경은 비록 많이 취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취기가 올라와 몸을 비틀거렸다.하여 소이연을 안고 있는 정도는 문제없지만 바둥거리는 소이연을 감당하기는 조금 힘들다."움직이지 마."육현경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내려놔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소이연이 반항하며 말했다.그녀는 누군가 자기를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깨끗한 사람이라며?!다 거짓말이지!’소이연은 계속해서 육현경의 품에서 바둥거리며 벗어나려 했다.육현경은 소이연을 안고 힘들게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겨우 침대 앞까지 왔건만 소이연이 온몸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육현경은 발을 비틀거렸다."아야!"소이연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그 순간 눈앞이 어지러워지며 정신이 아찔 해났다.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너무 무거워 그녀가 아무리 밀어도 꿈쩍하지 않았고 그녀에게서 떨어지려고도 하지 않았다."이봐 소이연, 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지 않는 게
"소이연, 네가 여긴 어떻게?"문서인은 뒤에 있는 소나은을 감싸며 말했다."물건 정리하러."소이연은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이젠 놀랍지도 않다.개 같은 남녀 때문에 기분이 흔들리는 것도 귀찮다.소이연은 둘이 사무실에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넌 중고가 그렇게 욕심났어?"소이연이 소나은을 향해 말했다."내 물건 다 정리하고 새것으로 쓰면 얼마나 좋아"말속에 숨은 뜻이 있었다.그 말을 알아들은 소나은은 얼굴이 붉어졌다."나은이 우리 이번 시즌 제품 체크하러 온 김에 내가 네 사무실 보여준 거야. 오해하지 마."문서인이 해석했다."오해? 어떤 상황이면 오해가 아닐까? 같은 침대에서 누워있으면?"소이연이 코웃음을 쳤다."소나은과 내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야."문서인은 표정이 변했다."네 업무를 말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비꼬지 마.""어제도 말했다시피 넌 언제든지 돌아와도 돼. 네 자리는 남겨져 있어. 너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할 수 있지."문서인은 잘난 척하며 말했다.소이연이 웃었다.‘문씨 그룹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누구 덕인데?’그는 소이연이 여전히 문씨 그룹에 의지할 것이며 문씨 그룹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의 "선심"에 감격해 눈물을 흘릴 거라고 생각했다."필요 없어."소이연은 문서인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이미 인사팀에 퇴사서류 제출했어. 앞으로 너 그리고 문씨 그룹은 나 소이연과 아! 무! 상! 관! 없! 어!""소이연. 너 좋은 게 좋은 건 줄 알아!"문서인이 협박했다."언니. 서인 오빠처럼 좋은 전 남친은 어디에도 없어. 헤어지고도 상대방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서인 오빠에 대한 반감이 너무 큰 거 아니야?""나도 나은의 얼굴을 봐서 서로 난감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야. 앞으로 다 가족인데."둘은 서로 맞장구를 쳤다.소이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너를 보니까 창녀가 정절 패방을 세운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다."
소나은은 난감했다.랭킹 1위인 러블리는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사람으로서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다. 반면, 소나은은 작년에 운 좋게 5위 안에 들었지만 두 사람 사이의 실력 차이는 현저했다.그러나 이런 성적 또한 은하 그룹에는 기적이다. 회사 직원들은 모두 소나은을 신처럼 모셨다."바질 사장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래야 다들 편할 거 아닙니까?"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임현재가 입을 열었다.그는 소이연을 한껏 조롱했다.소나은은 속으로 웃었다.‘소이연, 은하 그룹을 되찾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릴 줄 알았어?’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유정하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나은과 소승영의 심복이다. 그들은 소이연이 보나 마나 그 자리에서 3개월도 못 버티고 도망갈 거라고 생각한다."전 문씨 그룹에서..."소이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문씨 그룹이 장안시 고급 의류 업계에서는 손꼽히는 회사인 건 인정해요. 그러나 회장님은 홍보팀에서 일한 경력만 있지 디자인에 참여해 본 적은 없잖아요."임현재는 계속하여 조롱했다."디자인이라는 게 해본 사람만 할 수 있는 거니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소이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사람들은 소이연이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갈 줄 알았다.그러나 뜻밖에도 그녀는 차분하게 USB를 꺼내 회의실 컴퓨터에 꽂고 프로젝터를 연결하였다."이건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은하 그룹에서 출시한 디자인이에요. 보시다시피 시즌마다 디자인이 비슷하죠. 게다가 이번에 소나은 부장이 제출한 디자인은 작년과 거의 똑같아요. 컬러만 변했죠.""최근 트랜드가 그런 거예요..."소나은은 반박하려 했다."오늘 문씨 그룹 사내 패션쇼를 직접 보고도 전혀 생각이 없던가요?"소이연은 차갑게 비웃었다."직업윤리가 있어야지 어떻게 다른 회사 제품을 카피해요."소나은이 당당하게 말했다."올해 봄부터 트랜드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건 현재 글로벌 패션쇼의 자료 화면이에요. 소나은 디자이너의 디자인 이념과
이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둘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 숨 막힌 정적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송문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송문수는 하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을 나서버렸다.서울을 떠날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시야가 흐려졌다.하지수는 뿌얘진 시야에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이튿날, 하지수는 약속대로 송문수와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는데 송문수는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하지수가 차에서 내리며 안에 앉아있는 또 다른 이와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그 안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송승우일 것이기에 송문수는 시선을 돌리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대화를 마친 건지 종종걸음으로 송문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오래 기다렸어? 미안해.”“아니야, 내가 빨리 온 거야.”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송문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들어가자.”“그래.”그렇게 둘은 법원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송문수가 합의서를 건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작성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USB 챙겼으니까 여기서 고칠 수 있어.”사실 어젯밤 송문수가 파일을 보내와서 하지수는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싸움도 없었고 이익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니 재산분할에도 큰 문제 없었다.그럼에도 제게 40억을 주겠다는 송문수를 하지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차피 큰돈도 아니라서 헤어지는 대가로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 그저 받기로 했다.송문수한테는 정말 적은 돈이긴 하니까.그리고 돈으로서 둘 사이를 깔끔히 정리하는 걸 송문수도 원할 것 같아 하지수는 결국 그걸 받는 조건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이다.이혼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다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핸들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임에도 송문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하지수는 송승우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송승우의 몸은 껌딱지처럼 하지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그를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히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마치 매일 하던 행동인 것 마냥, 그래서 몸에 배어버린 것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하지수, 송문수, 송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 도착해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보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집이 그리웠던 허영지와 송기명은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편한 호텔에서 자도 제집만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잠부터 청했다.그리고 송승우도 피곤해해서 하지수는 휠체어를 밀며 그를 방에 데려다주었다.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송문수는 소파에 앉아 하지수를 기다렸다.원래는 송문수를 데려다주고 나가려 했는데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하지수 때문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솔직히 하지수가 언제 내려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잠에서 깬 다음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송문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하지수가 보이자 송문수의 심장박동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몸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며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하지수가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부부인데도 부부답지 않았고 가족임에도 가족 같지 않은 둘의 애매모호한 사이 때문이었다.이렇게 보니 제 인생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것 같아 송문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뭐야?”송문수는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하지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난 충동적인 적 없어요, 그리고...”하지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송승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그럼 너 나랑 다시 사귈 수 있어?”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하지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송승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내가 아닌 송문수를 좋아한다는 걸 난 못 믿겠어. 난 아직도 네가 그때 내가 말도 떠난 일로 화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다시 사귀자. 6개월만 만나보고 그때도 네가 송문수를 선택한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하지수는 자신이 송승우를 다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완벽히 포기해야 끝나는 싸움이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하지수는 이제 송승우와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좋아요.”하지수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자신만만했던 송승우의 얼굴에는 바로 미소가 번졌다.자신이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송승우는 그래도 하지수의 사랑을 다시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송승우는 단 한 번도 송문수를 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지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저를 놔두고 멍청한 송문수를 선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건이 하나 더 있어.”“말해요.”“문수랑 이혼부터 해.”“네가 나랑 사귀겠다고 했잖아.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게 싫으니까 당당하게 너랑 만나고 싶어.”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생각에 잠겼다.송문수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송승우와 만나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존중을 깨는 거라서 하지수도 썩 내키진 않았다.“알겠어요.”하지수가 이혼만 하면 저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기에 송승우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뭐든 말만 해.”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하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송승우는 하지수는 어차피 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일주일 뒤, 송승우가 퇴원하자 드디어 가족들이 전부
“네.”“회사 일을 이제는 문수가 다 책임지고 있으니까 빨리 가는 것도 맞지, 승우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이제 매일 간호할 필요도 없잖아.”하지수를 직접 키워온 허영지는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그래서 빈말이지만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네.”그런 허영지의 노력을 보아낸 건지 하지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저 이제 중환자실에서도 나오고 의사 선생님도 별문제 없다고 했으니까 두 분은 먼저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며칠만 더 있으면 퇴원도 가능하다고 하잖아요.”“그래.”송승우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고 또 지금 하지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아들의 속내가 너무 눈에 훤해서 허영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우린 그럼 먼저 갈게. 지수야, 승우 잘 부탁해. 네가 고생이 많다.”말이야 친절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하지수의 발을 여기 묶어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네.”하지수 역시 제 시어머니의 의도를 알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하지수의 대답을 들은 허영지는 마음이 한결 놓여 송기명을 밀며 병실을 빠져나갔다.송기명은 등 떠밀려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데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허영지와 송기명이 나간 병실에는 하지수와 송승우 둘뿐이었다.“과일 좀 먹을래요?”“응, 고마워.”하지수가 먼저 그 어색한 정적을 깨며 묻자 송승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배를 집어 든 하지수는 열심히 깎기 시작했는데 송승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지나 껍질을 다 깎아낸 하지수는 배를 작게 썰어 송승우의 앞에 놓아주었다.“천천히 먹어요.”“넌 안 먹어?”“입맛 없어요.”송승우는 입맛 없다는 하지수에게 굳이 권하지 않고 천천히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도도하고 자신만만하던 송승우의 모습을 다시 본 하지수는 송승우의 말대로 거기에 자신의 공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송승우의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송문수를 기다리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그래도 작별인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차 문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송문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그냥 차에 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가 그를 불러세웠다.“문수 씨.”“장안시로 돌아가면 서울엔 다시 올 거야?”“안 올 것 같아 아마. 송승우도 많이 나았으니까 얼마 안 있으면 퇴원하겠지. 그럼 엄마 아빠가 송승우 집에 데려가서 보살피려 할 텐데 내가 뭐하러 여기까지 와 힘들게.”“그래서 나 혼자 여기 버려두겠다는 거구나.”하지수가 내뱉은 담담한 한마디에 송문수는 심장박동이 멎는 것만 같았다.숨을 내쉴 수조차도 없이 가슴이 아파와서 그는 이를 악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여전히 침묵만 유지하는 송문수에 마지막 기대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송문수 말대로 자신은 그저 그가 마음을 다잡을 때 마침 옆에 있었던 여자일 뿐이니,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도 욕심인 것 같았다.아무리 노력해봐도 송문수의 마음은 저를 향하지 않으니 하지수는 이제 그와의 사이를 끝내려 했다.“조심히 가.”이렇게라도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했으니 하지수는 그거면 된 것 같았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저 짤막한 한마디만 내뱉고 웃으며 돌아섰다.그 작은 몸통이 외로이 돌아서는 걸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왔다.정말 제가 하지수를 버린 것만 같아서, 또 하지수를 혼자만 남겨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려왔다.주먹을 꽉 말아쥔 채 온몸을 떨어대던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제 충동을 잠재우며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수에게는 송승우가 있었으니, 그녀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혼자일 리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했다.한편 한참을
송승우가 병실을 옮기고 나니 가족들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엄마, 아빠 고생 많으셨어요. 저 걱정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죠.”“너만 괜찮을 수 있다면 우린 뭐든 다 할 수 있어.”병원 침대에 누운 채 감성 어린 말을 하는 송승우를 향해 허영지는 감격에 겨워 말했다.허영지는 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더 이상 나쁜 생각은 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씩씩하게 본인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 같았다.“제가 하루빨리 마음 다잡아서 이제 엄마 아빠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넌 한 번도 우릴 실망시킨 적이 없는 애야, 넌 계속 우리의 자랑이었어.”제 손을 잡은 채 저와 눈을 맞추며 말하는 엄마를 향해 송승우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정말 눈물 나도록 다정한 모자지간이었다.송승우가 병실을 옮긴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온 송문수도 병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끼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라이터만 만지작거리는 그는 어쩐지 제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한편 허영지와 대화를 나누던 송승우는 하지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간호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물어가며 앞으로는 어떻게 재활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묻고 있었다.자신의 일에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지수야.”“아니에요, 당연한 일인데요 뭘.”“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빨리 마음 다잡을 수 있었어. 너 아니었으면 현실을 이렇게 빨리 받아들이진 못했을 거야.”“나 응원해줘서 정말 고마워.”하지수는 결국 그 감사 인사를 받아들인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다시 간호사를 보며 디테일하게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물었다.다들 제 자리를 잡은 듯한 모습에 송문수는 그만 병실을 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그때 송기명이 그를 불러세웠다.“문수야, 어디 가?”“장안시로 돌아가야죠 이제.”담담히 말하는 송문수에 송기명은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지금
허영지의 말에 다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고 그 시선 끝에는 하지수가 서 있었다.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지수야, 여긴 어떻게 왔어?”그런 하지수를 본 허영지는 다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다.하지수가 송문수의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들었다면 둘 사이에 감정이 있든 없든 마음이 아플 것은 당연지사였기에 허영지는 하지수가 안쓰러웠다.하지수는 굳어버린 고개를 힘겹게 돌리며 허영지를 향해 말했다.“일어나보니까 호텔에 아무도 없어서 왔어요.”눈 떠보니 사라져버린 송문수에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온 거지만 혹시나 송문수가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오지 말라고 말릴까 봐 연락은 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송문수가 또다시 허영지와 싸울까 봐 말도 없이 온 건데, 오자마자 하지수는 송문수가 내뱉는 차가운 말들을 모조리 들어버린 것이다.저를 물건 취급하며 송승우에게 넘겨주겠다는 송문수의 말에 하지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이제 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송문수한테 저는 여전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걸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모든 게 다 저 혼자만의 착각인 것 같아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아직도 많이 피곤해서 전 이만 호텔로 돌아가 볼게요.”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병원을 나섰다.자신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는 하지수를 보며 허영지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하지수가 친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키워왔던 아이였기에 허영지는 그녀를 친딸 이상으로 아껴주었다.부모도 잃은 아이가 저렇게 충격받은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게 가슴이 아팠지만 허영지는 끝내 송문수 더러 하지수를 위로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허영지는 이번에도 이기적이게 송승우를 위해 송문수를 희생시킨 것이다.송승우가 나을 수만 있다면 송문수와 하지수 사이에는 아무 감정도 없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송기명은 그런 아이들을 두고 볼 수만
송문수가 병실에서 나오자 허영지와 송기명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맞아주었다.아까 분명 난리를 치던 송승우였는데 그걸 어떻게 진정시킨 건지가 궁금해서 나온 눈빛이었다.“걱정 마세요, 송승우 치료에도 협조 잘하고 더 이상 난동도 안 부릴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 마음 좀 놓으세요.”높낮이가 없는 송문수의 말에 허영지와 송기명은 아들의 감정을 도통 보아낼 수가 없었다.“뭐라고 했길래 승우가 네 말을 듣는 거야?”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발언권이 없던 송문수의 말을 그 자존심 강한 송승우가 고분고분 듣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허영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수의 일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제가 계속 입을 다물면 허영지가 제 말을 믿지 않을 걸 알기에 입술을 말아 물던 송문수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지수 그만 놓아주겠다고 했어요.”지수를 송승우에게 보내겠다는 뜻의 말을 들은 허영지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송문수, 넌 결혼이 애들 장난이야?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함부로 해! 지수한테는 물어봤어? 아니면 승우 속이고 치료받게 하려고 그런 거야? 속이는 거라면 언젠가는 진실을 알게 될 텐데 그때는 어쩌려고 그래! 넌 왜 항상 이렇게 생각이...”“그만 좀 해요!”또 송문수를 타박하는 허영지에 송기명은 참다못해 큰 소리를 내었다.“당신은 왜 문수 말은 안 믿어주는 거예요? 전에 당신이 나한테 우리가 문수한테는 좋은 부모가 돼주지 못했다고 했을 때 난 사실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어요. 그런데 이제야 알겠네, 정말 우리가 애한테 못 할 짓을 하긴 한 것 같아요. 어떻게 당신은 매번 문수를 나쁜 쪽으로만 생각해요?”“나는 그냥...”허영지는 아직 화가 가라앉은 것도 아니고 송기명의 말이 서럽기도 했지만 차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송승우와 송문수 사이에 마찰이 있을 때면 그녀는 늘 송승우를 감싸주곤 했다, 그리고 그게 이젠 본능으로 자리 잡아서 허영지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더 이상 허영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송기명은
송문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던 송승우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송문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지금 이러는 거 다 지수 얻으려고 그러는 거잖아.”더 이상 상황을 회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송문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아무런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 적나라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송승우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렇게 앞뒤 재지 않는 게 또 송문수 답긴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지수를 얻으려는 게 아니고 네가 지수한테는 어울리는 짝이 아니라서 그러는 거야. 너랑 함께하는 지수만 불쌍하니까.”남의 가정을 파탄 내고 남의 아내를 빼앗으려 하면서도 송승우는 마치 자신이 옳다는 듯 당당하기만 했다.하지만 그 말에 송문수는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았다.사실은 반박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었다.한번 생각을 굳히면 절대 흔들리지 않는 송승우임을 알기에 그한테 저는 언제까지나 하지수에게 한참 못 미치는 인간일 뿐이었다.“난 지수한테 더 안정된 가정을 줄 수 있어. 너처럼 다른 여자들 끼고 다니는 게 아니라 지수만 아껴줄 거라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수만 바라보면서 다른 여자한테는 손도 대지 않았어. 그런데 넌, 너무 더럽잖아.”송승우는 제 동생의 입장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송문수를 무참히 짓밟아버렸다.송승우의 말대로 예전의 송문수는 한없이 더러운 사람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자신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하지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믿었는데 송승우의 말을 들어보니 그 모든 게 저만의 어리석은 생각인 것 같았다.“지금은 지수 찾지 말고 몸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너 다 낫고 나면 지수는 내가 알아서 놓아줄게.”그래서 송문수는 구질구질한 변명대신 확실한 약속을 했다.그 말을 들은 송승우는 의외라는 듯 송문수를 바라보았다.물론 예전의 송문수는 헤프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송승우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하지수를 향한 송문수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그 마음이 진심이라서 송승우에게는 더 위협적이게 느껴졌던 것이고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