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찍한 회의실에는 은하 그룹의 주요 임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소나은은 연단에 서서 취임 연설을 준비하고 있다.그녀가 입을 열자마자,문뜩 입구에 서 있는 소이연을 발견하고 온몸이 굳어져 버렸다.회의실 맨 앞줄 센터에 앉은 소승영은 소나은의 이상함을 감지하고, 뒤를 돌아봤다.소이연의 모습에 소승영도 얼굴이 시커멓게 굳어졌다.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은하의 모든 직원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소승영은 혐오에 가득한 표정으로 소이연에게 다가갔다."네가 어떻게 이곳에?!""우리 엄마가 세운 회사에 제가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요?"소이연이 되물었다.소이연의 포스는 전혀 소승영에게 밀리지 않았다."너랑 다투고 싶지 않으니 당장 나가. 너한테 낭비할 시간 없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소승영은 짜증을 내며 말했다.소이연은 소승영의 말을 뒤로하고 곧장 회의실로 들어갔다.소이연이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에 소나은의 눈빛은 악독하게 변했다. 그렇지만 이내 표정 관리를 하며 순진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언니, 어떻게 왔어? 날 축하해 주러 온 거야? 너무 기쁘다."소이연은 소나은이 배우가 되지 않는 것이 정말 아쉽다고 생각했다.소이연은 소나은의 가식적인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임원들 앞에서 서류를 꺼내 말했다."안녕하세요, 소이연이에요. 오늘 저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은하 그룹을 승계받으러 왔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은하 그룹을 관리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그녀의 말이 떨어지자.순식간에 장내가 술렁였다.“뭐라고?!”“은하 그룹이 소이연 거라고?!”“그럼, 회장님과 소나은은 어떻게 된 거야?!”소이연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놀라움을 개의치 않고 말했다."오늘부터 은하 그룹은 제가 책임집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말을 끝내고,소이연은 허리를 굽혀 직접 은하 그룹에 대한 소유권을 선포했다.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는 소나은의 손에는 그녀가 정성껏 준비한 인사말이 들려 있었다. 소이연의 말 한마디에 수많은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
육현경의 동공이 흔들렸다."오늘은 원래 소나은의 취임식이었는데 소이연 씨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어서 소나은이 아주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해요."이명진은 계속 보고했다."하지만 소승영과 소나은이 은하를 지켜온 만큼 소이연 씨가 은하를 성공적으로 승계받을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어요."육현경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사무용 책상을 톡톡 쳤다.‘대표님은 확실히 소이연 씨를 특별하게 생각하시네.그렇지 않으면 죽기 살기로 소이연 씨를 화재 현장에서 구하지 않았을 거야.하지만 여자라면 질색하던 대표님이 장안시에 돌아오자마자 생각이 바뀌셨다고?!’이명진은 의아했지만 육현경에게 직접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대표님, 조용히 뒤에서 도와드릴까요?"육현경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자신 있으니 혼자 갔겠지. 소이연 씨를 믿어보자고.""네."이명진은 공손히 대답했다.이명진은 소이연이 아무래도 육현경의 눈에 든 여자이기에 대단한 능력을 갖췄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소이연은 은하 그룹에서 나왔다.집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소이연은 휴대폰을 빤히 쳐다보다가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이연아, 너 왜 나은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문서인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사이는 나은이랑 상관없으니 나은이 난처하게 하지 말고 불만 있으면 나한테 말해."보나 마나 소나은이 그새를 못 참고 문서인에게 일러바친 것이다.그녀는 소나은의 피해자 코스프레에 익숙했다."문서인, 착각하지 마. 나는 단지 내 것을 되찾으려고 한 것뿐이야."문서인은 가증스럽게 말했다."이연아, 돈 필요하면 말해. 그리고 우리는 단지 헤어졌을 뿐이지 내가 너한테 회사에 나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잖아? 난 널 해고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마! 일만 잘하면 월급 서운하게 안 줄 테니까."소이연은 정말 문서인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문서인,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니까 잘 들어! 우선 은
잠시 후.이명진은 육현경을 이사회에 초대했다.이내 육현경은 회의실을 나섰다.휴게실에서 기다리던 문서인은 휴게실 통유리 너머로 지나가는 일행을 보았다."저기 지나가는 사람이 혹시 육현경 대표님인가요?"문서인이 물었다.비서는 바로 대답했다."네. 지금 이사회 때문에 회의실을 옮기고 계십니다."문서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자세히 보았다.때마침 이명진이 고개를 돌렸다.문서인은 이명진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명진은 눈살을 찌푸렸다.이어, 예의상 턱을 살짝 끄덕였다.그러고는 재빨리 육현경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이명진은 문서인의 각도에서는 육현경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을 몰랐다. 단지 모든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가는 것만 볼 수 있었다.문서인은 다시 의자에 앉아, 육현경을 기다렸다.육씨 그룹은 조만간 장안시에 전국 최대의 국제 상류 상권을 건설할 계획이다. 문씨의 주업은 고급 의류이므로 상권에 입점해야 했다. 그러니 일찍 관계를 맺으면 황금 위치를 계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문서인은 오전 내내 기다렸고 육현경은 계속 이사회를 열고 있었다.점심에 물어보니 육현경은 협력사와 함께 식사 중이니 오후에 돌아올 거라고 했다.오후에 다시 물어보니 육현경은 공사장에 가서 현장을 시찰하고 돌아올 거라고 했다.어느덧 회사 모든 직원이 퇴근했다. 육현경을 포함해서 말이다!문서인은 얼굴이 새파래졌다.어찌 되었든 그도 장안시 상층 그룹의 문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자 대표인데, 이렇게 하루 종일 육현경에게 바람을 맞았다니. 비서는 연신 사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육형경에게 한바탕 농락당한 것 같았다!그는 육현경과 원한이 없다….문서인은 분노하여 육씨 그룹을 떠났다."나은아."차에 타자마자 소나은에게서 연락이 왔다."오빠, 하루 종일 육씨 그룹에 있었네. 대화는 즐겁게 나눴어?"소나은이 애교를 부렸다.문서인은 안색이 더 나빠졌다."나 지금 서아랑 밥 먹으러 나왔는데 여기로 올래? 설마 육현경 대표님이랑 식사 같이하
"마감요? 이제 6시 좀 넘었을 뿐인데요?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소나은은 의아했다."아닙니다. 두 분은 여기서 당장 나가주십시오.""우리가 왜 그래야 하죠? 우리 식사 아직 안 끝났어요."문서아는 늘 그랬듯이 펄쩍 뛰며 말했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이유는 없습니다. 우리 레스토랑은 두 분을 환영하지 않습니다.""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얘기야?!""모릅니다."종업원이 대답했다."문서아 몰라요? 톱스타이자 문씨 그룹 큰 아가씨예요."소나은이 옆에서 말했다."네."하지만 종업원은 여전히 냉담하기 그지없었다."손님, 나가는 문은 이쪽입니다."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온 문서아와 소나은이 어금니를 깨물고 떠날 준비를 하려던 찰나.문득 옆 테이블에 앉은 소이연이 보았다.‘이 여자도 여기에 있었다니?!’문서아는 그녀 옆에 있는 낯선 남자와 어린아이를 뚫어지게 보았다.육현경은 문서아처럼 눈이 높은 여자도 놀라게 할 비주얼의 소유자이다.‘장안시에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었어?!’그녀는 연예계에서도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다."언니?"소나은이 소이연을 불렀다.소이연은 마치 못 본 척, 못 들은 척했다.소나은은 육현경을 보았다. 그녀는 육현경의 외모에 깜짝 놀라 괜히 질투를 느꼈다.‘소이연이 어떻게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만날 수 있지? 서인이 오빠보다 부족한 게 하나도 없잖아.’소나은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갑자기 문득 뭔가 생각난듯 황급히 말했다."혹시 이쪽이 언니가 좋아한다는 그 소방관?!"문서아는 저도 모르게 실망했다.어쩐지 본 적 없더라니, 같은 계층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옆에는 이 남자 아들이야? 아무리 서인이 오빠랑 헤어졌어도 그렇지, 어떻게 복수를 위해 애 딸린 남자를 만나서 언니 자신을 더럽혀!"소나은의 시선은 육민에게로 향했다.육민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적의가 가득 찬 눈길로 소나은을 노려보았다.얼핏 듣기에 소나은은 호의적인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비꼬는 말이었
저녁 식사 후, 그들은 시간을 더 지체하지 않았다.육현경은 먼저 육민을 집으로 보내 메이드에게 맡긴 뒤 다시 차로 소이연을 데려다주려고 했다."번거롭게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요.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소이연이 사양했다."번거롭지 않아요. 내가 운전하는 것도 아니고."육현경이 태연하게 대답했다.기사는 어색했다.이 상황에 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소이연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그들은 조용히 노스타운에 도착했다.소이연이 차 문을 열었다.그녀는 목발을 짚고 있어서 거동이 불편하고 행동이 느렸다. 그녀가 차에서 내리려고 했을 때 육현경은 이미 차 문 앞에서 신사답게 그녀를 부축했다.소이연은 불편했지만 감사의 인사를 했다."고마워요.""아니에요."육현경은 그녀를 부축해 차에서 내렸다.소이연은 목발을 짚고 걷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대표님."소이연은 그를 바라봤다."네?""아까 그 말들 다 진짜예요."소이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열여덟에 원나잇으로 미혼모가 되었어요... 읍."소이연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육현경은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예상치 못 한 상황에 소이연은 반항할 것조차 잊었다.두 입술 사이의 낯선 촉감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러다 갑자기,소이연은 육현경을 밀쳐버렸다.그제야 육현경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알아차린 그녀는 얼굴이 뜨거워졌다.그녀는 이게 부끄러워서인지 아니면 화나서인지 구분이 안 됐다."깨끗한 사람이라 했잖아요!"소이연이 육현경에게 따졌다."행동으로 소이연 씨한테 대답하는 거예요. 나 신경 안 써요."담담하게 말하는 육현경에게서 미안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누가 행동으로 하라고 했어요! 입 없어요?"소이연은 급하게 말을 꺼낸 뒤에야 자기가 단어를 잘못 쓴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다시 말을 바꾸었다."말로 하면 되잖아요!"육현경이 웃었다.가로등 불빛이 육현경의 얼굴을 비추었다. 육현경의
"뭐야?!"문서아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문서아의 야단법석에 문씨 가문 사람들을 불쾌해졌다.매니저와 통화를 끊은 뒤, 문서아는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아직도 B급 배우에서 맴돌고 있고 이번 드라마를 통해 A급 배우로 올라설 계획이었다."왜 그래?"문서인는 귀찮은 듯 물었다."매니저한테서 전화 왔는데 투자자가 내 여주인공 배역을 다른 배우로 교체한대."문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번 드라마 육씨 그룹의 풍향 엔터에서 투자한 거지? 너 육씨 가문 사람들한테 잘못한 거 있어?""그럴 리가! 난 그 가문 사람들 만난 적도 없어."문서아는 황급히 부인했다."아, 난 몰라. 나 이거 무조건 하고 싶단 말이야. 오빠가 좀 어떻게 해줘. 이번 배역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데!"문서인도 의아했다.일반적으로 캐스팅이 끝나면 배역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이때, 갑자기 문서인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내가 알기로는 육현경이랑 하도경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랐어. 나중에 육현경은 비록 해외에서 생활했지만 두 사람 아주 사이는 여전히 좋았지. 어쩌면 하도경이 너를 괴롭히기 위해 육현경을 찾았을 수도 있어...""하도경! 이 간사한 자식!"문서아가 매섭게 말했다.그녀는 문서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네가 정 그 역할을 원한다면, 하도경과 직접 만나서 잘 얘기해 봐. 아니면 직접 육현경을 찾아가든지."문서인이 의견을 제출했다."그게 무슨 말이야?""아빠가 그랬잖아. 육현경이 너한테 관심 있으니 맞선 한번 보라고. 너 육현경과 결혼하면 앞으로 어떤 배역이든 다 쉽게 얻을 수 있는 거 아니야?"문서인이 얘기했다."아, 나 싫어! 지금 나더러 계모나 되라고? 죽어도 싫어. "문서아는 질색했다."그럴 거면 차라리 하도경이 낫겠어!"문서인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차피 문서아는 태어날 때부터 자기 멋대로였고 그녀가 하기 싫어하는 일은 아무도 강요할 수 없었다...."에취!"고급 클럽의 VIP 룸에서 하도경은
"육현...""미안해, 늦었어."육현경이 말했다.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착각일까?지금 이 순간, 육현경은 평소 딱딱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갑자기 그에게도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감정과 욕망이 생긴 것 같았다."혹시 잘못 찾아온 거 아니에요? 우선 나 좀 나줘요..."소이연은 몸을 뒤틀며 말했다.그녀는 그가 뭐라고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앞으로 네 곁에는 내가 있어."육현경은 소이연의 저항을 전혀 느끼지 못하듯 그녀의 귓가에 진지하게 말했다.마치 약속이라도 하는 듯."육현경... 으악!"소이연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육현경은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이 사람, 이게 습관인가?!’"발 조심해."육현경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그녀는 육현경이 많이 취한 줄 알았다. 하지만 육현경은 멀쩡하게 그녀의 발을 걱정하고 있다.‘안 취했나?!’육현경이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소이연은 바로 미친 듯이 저항하기 시작했다.육현경은 비록 많이 취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래도 취기가 올라와 몸을 비틀거렸다.하여 소이연을 안고 있는 정도는 문제없지만 바둥거리는 소이연을 감당하기는 조금 힘들다."움직이지 마."육현경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내려놔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소이연이 반항하며 말했다.그녀는 누군가 자기를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깨끗한 사람이라며?!다 거짓말이지!’소이연은 계속해서 육현경의 품에서 바둥거리며 벗어나려 했다.육현경은 소이연을 안고 힘들게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겨우 침대 앞까지 왔건만 소이연이 온몸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육현경은 발을 비틀거렸다."아야!"소이연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그 순간 눈앞이 어지러워지며 정신이 아찔 해났다.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너무 무거워 그녀가 아무리 밀어도 꿈쩍하지 않았고 그녀에게서 떨어지려고도 하지 않았다."이봐 소이연, 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지 않는 게
"소이연, 네가 여긴 어떻게?"문서인은 뒤에 있는 소나은을 감싸며 말했다."물건 정리하러."소이연은 냉담한 태도로 말했다.이젠 놀랍지도 않다.개 같은 남녀 때문에 기분이 흔들리는 것도 귀찮다.소이연은 둘이 사무실에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넌 중고가 그렇게 욕심났어?"소이연이 소나은을 향해 말했다."내 물건 다 정리하고 새것으로 쓰면 얼마나 좋아"말속에 숨은 뜻이 있었다.그 말을 알아들은 소나은은 얼굴이 붉어졌다."나은이 우리 이번 시즌 제품 체크하러 온 김에 내가 네 사무실 보여준 거야. 오해하지 마."문서인이 해석했다."오해? 어떤 상황이면 오해가 아닐까? 같은 침대에서 누워있으면?"소이연이 코웃음을 쳤다."소나은과 내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야."문서인은 표정이 변했다."네 업무를 말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비꼬지 마.""어제도 말했다시피 넌 언제든지 돌아와도 돼. 네 자리는 남겨져 있어. 너에게 주는 보상이라고 할 수 있지."문서인은 잘난 척하며 말했다.소이연이 웃었다.‘문씨 그룹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누구 덕인데?’그는 소이연이 여전히 문씨 그룹에 의지할 것이며 문씨 그룹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의 "선심"에 감격해 눈물을 흘릴 거라고 생각했다."필요 없어."소이연은 문서인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이미 인사팀에 퇴사서류 제출했어. 앞으로 너 그리고 문씨 그룹은 나 소이연과 아! 무! 상! 관! 없! 어!""소이연. 너 좋은 게 좋은 건 줄 알아!"문서인이 협박했다."언니. 서인 오빠처럼 좋은 전 남친은 어디에도 없어. 헤어지고도 상대방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런데 서인 오빠에 대한 반감이 너무 큰 거 아니야?""나도 나은의 얼굴을 봐서 서로 난감하지 않으려고 그러는 거야. 앞으로 다 가족인데."둘은 서로 맞장구를 쳤다.소이연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너를 보니까 창녀가 정절 패방을 세운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다."
예수진의 문자를 본 소이연은 바로 그녀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진정하고 일단 지수 씨가 뭐라고 하는지부터 봐요.][문수 씨가 꼭 서프라이즈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우리도 도와야죠.][알겠어요, 조심할게요.][수진이 너도 알고 있었어?][내가 뭘 알겠어, 난 아무것도 모르지]갑자기 달라진 예수진의 태도에 하지수는 바로 되물었다.[그럼 아까 한 말은 무슨 뜻인데?][그냥 송문수가 갑자기 딴사람이 된 것 같단 소리지, 전엔 망나니 같던 놈이 이젠 일도 잘하잖아. 지원 씨가 문수 칭찬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그러면서 하도경한테 분발하라고 맨날 뭐라 한다니까.]장문의 문자를 보내 아까의 실수를 만회한 예수진 덕분에 하지수도 더 이상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물론 말 자체는 의심스러웠지만 하지수는 오랜 친구인 예수진이 자신을 속일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일이 아니라 사생활 말이야.][사생활도 많이 정리된 거 아니었어? 둘이 잘 지냈잖아.][내 착각일 수도 있지 뭐.][그건 또 무슨 말이야?]예수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하지수가 이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이연 언니가 귀국한 날 나 사실 문수 씨랑 관계 할 뻔했거든, 그런데 그날 하필 생리가 터진 거야.][그래서?][못하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문수 씨가 엄청 아쉬워했었어. 하도 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굴어서 시한폭탄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계속해봐.][그런데 지금은 생리 끝난 지 며칠이나 됐는데 아무 말도 없는 거 있지? 내가 몇 번이나 슬쩍 말했는데 내 몸엔 손도 안 대더라.]이번에는 예수진이 답장하기도 전에 소이연이 먼저 문자를 보냈다.[혹시 문수 씨가 요즘 너무 바빠서 그런 건 아닐까요? 남자들은 상황에 따라 몸 상태도 다르잖아요. 너무 힘들면 못 할 수도 있죠.][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죠, 요즘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니까. 그런데 내가 오늘 문수 씨 보려고 회사 왔거든요? 회사에 있다던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하지수를 마주한 송문수는 바람피우다 걸린 남자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그가 들어오기 전 하지수는 송문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 한순간에 고치긴 힘들었을 거라고 애써 합리화를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또 요동치기 시작했다.사실 말은 안 해도 하지수는 그가 혹시라도 정말 중요한 일로 밖에 나간 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송문수의 표정이 꼭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 같아서 하지수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붉기였지만 그녀는 빠르게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너, 언제 왔어?”“좀 됐어.”마침내 정신을 차린 송문수의 질문에도 하지수는 고개를 떨군 채 서류를 정리하며 바쁜 척을 했다.“엄마랑 파티 준비하는 거 아니었어?”“준비 끝났어, 다음 주에 예정대로 파티할 거야.”“아.”“앞으로 매일 출근할 거야?”온 힘을 다해 태연한 척하고 있는데 저런 속 보이는 질문을 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안 왔으면 좋겠어?”“아니.”본인도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송문수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하지수가 오면 소이연, 예수진과 함께 하는 프러포즈 준비에 차질이 생길까 봐 한 질문이었지만 하지수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기에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었고 하지수도 당황한 송문수를 한번 보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하지만 송문수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하지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지수는 이제 더 이상 송문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그가 정말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만 볼 수 있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고 그런 그를 자신이 계속 사랑할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남자 곁을 지키는 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사랑에 빠지고 난 지금에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이제 송문수도 정신을 차렸으니 하지수는 본인도 원래의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송문수의 사무실이 워낙 커서 둘이 같이 쓴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그녀는 사무실을 옮기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컴퓨터를 켜기 시작했다.하지수가 OA의 서류들을 훑어보려 할 때 송문수의 비서가 마침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하지수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비추며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오셨어요?”“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송 대표님이랑 같이 회의 참석한 거 아니었어요?”“회의라니요?”“지금 회의 중 아니에요?”“저희 오전 회의 없어요, 오후 3시에 첫 회의에요.”“그럼 송 대표는 어디 갔어요? 거래처랑 계약하러 간 거예요 아니면 현장 나간 거예요?”어디를 가든 대동하던 비서도 없이 혼자 나선 송문수에 하지수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아침에 연락 오셔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좀 늦는다고 저한테 오후 회의자료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거 다 프린트해서 지금 대표님 책상에 올려두려고 들어오는 길이었고요.”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비서에 하지수의 미간은 더욱더 찌푸려졌다.집안일은 다 허영지와 하지수가 책임지고 있는데 출근 시간까지 늦춰가며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도대체 뭔지 하지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알겠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네.”서류를 송문수 책상 위에 올려둔 비서가 인사를 하며 나가자 서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곧바로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문수 씨, 지금 어디야?][나 회사에 있지, 왜 그래?]보낸 지 1초 만에 온 답장이었지만 내용은 역시나 거짓말이었다.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저를 속이는 건가 싶었던 하지수는 오락가락했던 지난날 송문수의 태도를 떠올렸다.생리가 온 그날만 해도 하지 못해서 안달 나 하던 사람이 생리가 끝났다는 데도 저를 피하는 게 안 그래도 이상했는데 하지수는 설마 송문수에게 이제 제가 필
아까는 앉아서도 잘만 자더니 제대로 누우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송문수는 하지수를 기다리며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보이지 않은 인영에 그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 사이로 거실 쪽을 내다보았다.그리고는 하지수가 아직도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사실 송문수는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수가 그녀가 쓰던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그게 걱정돼서 확인한 것이었다.그 뒤로도 몇 번 더 훔쳐보던 송문수는 마침내 티비를 끄는 하지수에 깜짝 놀라 침대로 달려가 자는 척을 했다.한편 드디어 티비를 끈 하지수는 먼저 본인 방으로 가 세수를 마친 뒤에야 송문수의 방안으로 들어섰다.자고 있는 송문수를 발견한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이불을 들추고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오랜만에 푹 자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싶었지만 하지수는 본능적으로 자꾸 송문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그 때문에 자는 척하던 송문수는 온몸이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하지수랑만 있으면 몸이 멋대로 긴장하는 거라 그건 송문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런데 곧이어 제 몸에 닿아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하지수의 온기가 느껴지자 송문수는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싶었다.하지수가 있으니 평범하던 세상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다음날부터는 송문수도 일 때문에 바빴고 하지수도 아버님의 생일 파티 준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사실 둘 중에 더 바쁜 건 송문수였다.그래서 하지수도 평소에는 그 얼굴도 자주 볼 수 없었다.항상 밤늦게 귀가하는 송문수는 터덜터덜 들어와 잠든 하지수를 품에 안고 자다가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렸다.밤에는 분명 온기가 느껴졌는데 일어날 때는 늘 비어있는 옆자리에 하지수는 못내 서운한 감정도 들면서 송문수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는 하지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다.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지수의 입술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엄청 부드럽네.”야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하지수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이제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꿈속에서까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여자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문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눈 좀 떠봐.”생리도 끝나지 않은 와중에 이렇게 꿈을 꾸는 남자랑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수는 이번에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무슨 꿈이 이렇게 진짜 같아?”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워진 송문수는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그럼 꿈이 아닌가 보지.”“꿈이 아니라고?!”하지수가 짚어줘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송문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꿈에 누가 나왔는데 그래?”누가 나오긴, 송문수의 꿈에 나올 사람은 늘 하지수 한 명뿐이었다.전에는 꿈속에서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어버려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어떻게 잠든 거야?”평소에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하지수 앞에만 서면...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피곤했나 봐.”진실이라는 게 알아서 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하지수도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송문수를 따라가 주었다.괜히 끝까지 캐물어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쉬는 날도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얼른 씻고 자, 내일부터 또 출근해야지.”“너는?”하지수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
“맛있어.”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남자가 이런 맛을 낸 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토록 바라는 칭찬을 결국 해주었다.사실 이미 사약 같은 맛일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달달해서 하지수도 놀라웠다.한편 원하던 칭찬을 들은 송문수는 신나서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이거 맞지?”“응.”“법률 채널이네?”여자들은 다 예능이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런 지루한 채널을 좋아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법 좋아해서 대학 때도 법 배운 거야. 난 이런 거 좋아해.”“그래.”하지수의 말에 그제야 그녀가 변호사였다는 걸 떠올린 송문수였다.그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한 번 더 감동받은 송문수는 저도 하지수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나도 같이 봐.”그의 제안이 의외였지만 이렇게 완벽한 판례분석이라면 송문수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아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접하지 않던 분야라 처음엔 싫어할 수 있어도 그 속에서 다룬 사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법률 지식까지 알게 되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역시나 하지수는 법조인답게 바로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잘 보던 송문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지루해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티비에 빨려 들어갈 듯 열중하고 있던 하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문수는 이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돌아가 있는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잘 자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지루하면 지루하다고 말이라도 하지.하지수는 미련한 송문수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담요도 덮어주었다.하지만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