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나흘째.모든 것이 생각만큼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또 소이연이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각 부서의 부장들은 이튿날 아침 모두 업무보고를 마쳤지만 대충 얼버무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도 이건 소승영의 지시인 것 같다.다행히도 소이연은 오래전부터 유정하와 연락하면서 지속해 회사에 대한 상황을 요해해 왔었다. 그녀가 회의를 소집한 이유도 이 사람들을 더 깊게 알아가고 대처하기 위해서이다.그러다 갑자기 소이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이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상대방은 욕설부터 퍼부었다."소이연, 어미도 없고 근본도 없는 년, 감히 내 전화 안 받아?""내가 안 받았나요?!"소이연이 차갑게 말했다."소이연, 이젠 눈에 뵈는 게 없어?! 감히 나한테 또박또박 말대꾸야? 벼락 맞을 거야 너!"유백희의 목소리는 더욱 날카로웠다."근처에 얼씬도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같이 벼락 맞을 일은 없을 거예요!""너, 너, 너!"유백희는 화가 나서 말문이 막혔다."그만해, 소이연. 할머니가 직접 전화하셨는데 너 이게 무슨 태도야?"소승영이 벌컥 화를 냈다."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어릴 때부터 자기를 욕하고 때리고 엄마한테도 못되게 했던 사람한테 웃는 얼굴이라도 보여야 하는 건가?!소승영은 소이연과 쓸데없는 대화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내일이 마침 할머니 생신이야. 할머니가 널 집으로 부르셨어. 그러니까 고맙게 생각하고 내일 와."소이연은 웃었다.‘작년 칠순 잔치에도 나만 쏙 빼놓아서 장안시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71살 생일 축하해 주러 그 집으로 가라고?!"그러죠."소이연은 거절하지 않았다.마침, 그녀도 소씨 가문의 사람들한테 볼일이 있다!소이연이 흔쾌히 대답하자 소승영은 의아했지만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소이연은 휴대폰은 내려놓았다. 그녀는 소씨 가문 사람들의 차가운 태도에 이미 익숙해졌다
하도 친척들이 있는 자리라 소이연은 소나은의 체면을 뭉개지 않았다.소파 한구석에 앉아있는 그녀는 유난히 이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다."소이연, 할머니 생신인데 넌 선물도 준비 안 했어?"소승영의 친동생인 소명희가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소명희네 가족들은 모두 소씨 그룹에서 소승영의 덕을 보며 살고 있고 또한 양화랑와도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 당시 양화랑이 소승영과 결혼할 수 있었던 건 소명희의 공이 크다고 한다.소이연은 차갑게 웃었다.소나은과 문서인이 사귀게 된 건 문서아의 공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기 때문이다.‘역시 소나은은 그 피를 제대로 물려받았구나!’"쟤 선물 따위는 바라지도 않아!"유백희는 시큰둥하게 말했다."쟤 꼴에 무슨 돈이 있어서 선물을 하겠어? 궁상맞아서!""할머니,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언니 지금 은하 그룹 회장이에요. 은하 그룹이 얼마나 승승장구하는데요. 저번에도 우연히 언니를 보았는데 친구들과 함께 '더 청담'에서 식사하더라고요. 그곳은 워낙 비싸기로 유명한 곳이에요. 한 끼 식사에 2백만 원은 거뜬히 넘는 곳이라 평소 같으면 저도 부담되어서 잘 안 가요. 그날은 수아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는 바람에…"소나은은 말을 내뱉다가 갑자기 자기가 말실수를 한 듯 입을 틀어막았다."소이연, 인제 보니 너도 즐길 줄 아는 애였구나!"유백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소이연, 네가 잘못했네. 그렇게 비싼 레스토랑에서 친구한테 밥을 사줄 돈은 있고 할머니 생신 선물 준비할 돈은 없어? 내가 보기에도 너무 한다."소명희가 집안 어른 행세를 하며 혀를 찼다."그러니까. 소이연, 넌 어쩜 그리 양심도 없어? 어찌 됐든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할머니 생신인데…""나은이 봐봐. 할머니한테 직접 옷 디자인해 드렸어. 얼마나 귀티 나고 보기 좋아."거실에 있던 친척들은 소이연을 비웃었다.예전의 그녀라면 아마 묵묵히 참았을 것이다.그러나 이제 그녀는 남한테 당하기만 하던 나이를 훌쩍 넘겼다."내 기억이 틀리지
소승영은 모두가 그의 영상에 놀란 줄 알고 득의양양했지만, 이내 모친의 안색이 어둡게 변한 것을 발견했다.소나은은 다급히 단상으로 올라가 초조하게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아빠, 아빠…"소나은의 귀띔에 소승영은 고개를 돌렸다.스크린을 확인한 그는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그것은 그와 이현아의 불륜관계를 폭로하는 영상이었다. 화면에는 그들의 사진, 동영상뿐만 아니라 오글거리는 채팅 기록도 있었다. 하도 노골적이어서 그는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소승영은 직원들한테 화를 벌컥 냈다."당장 꺼, 당장 끄라고!"직원들은 놀라서 얼른 동영상을 껐다.허나 때는 이미 늦었다. 사람들은 똑똑히 다 보았다…"누구 짓이야? 누가 그런 거야?!"소승영은 단상에서 노발대발했다.유백희는 화가 나서 얼굴이 창백해졌다.생일잔치에서, 그것도 이렇게 많은 친인척 앞에서 체면을 구기다니!한편, 유백희 옆에 앉아있던 양화랑은 이런 모욕적인 일을 겪어도 감히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아빠…"소나은은 소승영을 끌어당기며 진정하라고 타일렀다.소승영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친인척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다들 식사하세요. 조금 전 영상은 분명 누군가가 절 모함하기 위해 만든거에요. 다 조작된 거라고요! 고작 이런 일로 우리 어머니 생신에 영향을 주면 되겠어요?"말을 마친 그는 씩씩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은 그는 여전히 안색이 어두웠다."소승영, 네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던 난 상관 안 해. 하지만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아무튼 저 여자는 내 눈에 띄게 하지 마!"유백희는 화가 나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어머니, 이게 다…""핑계 대지 마."유백희는 화를 잔뜩 냈다."화랑아, 저 여자는 네가 처리해. 다시는 얼씬도 못 하게!"양화랑은 눈시울을 붉히며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네, 어머님.""다들 식사하세요!"유백희가 사람들한테 손짓했다.오늘 유백희의 생
소이연의 대꾸에 소나은은 말문이 막혔다."소이연. 나은이는 네 걱정해서 그러는 건데 너는 왜 항상 이렇게 쌀쌀맞고 공격적이야. 아무리 우리가 헤어져서 마음이 불편하다고 해도 앞으로는 다 친척일텐데...""문서인,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너는 널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나한테 넌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소나은을 싫어하는 건 너랑 상관없어. 아니네, 조금은 상관있네."소이연이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버프가 더해져서 더 싫긴 하지.""언니, 나를 얘기하는 것까진 괜찮은데 서인 오빠한테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지..."소나은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지만 소이연은 먼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정말 못 봐주겠네.’멀어져가는 소이연의 뒷모습에 소나연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문서인도 크게 다를 바 없다.소이연은 점점 더 그를 안중에 두지 않는다."소이연!"소승영이 성난 목소리로 불렀다.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굉장히 짜증 나지만 그래도 아빠가 부르는 거라 예의상 몸을 돌렸다.소이연은 지금 소씨 가문 사람들을 잘 대응하지 않으면 자리를 뜰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따라와."소승영은 말 한마디만 남기고 뒤돌아갔다.소이연은 마지못해 따라갔다.소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에게 집으로 오라고 한 것은 단순히 비웃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반드시 또 다른 음모나 계략이 존재할 것이란 걸 진작에 짐작했다.그들은 소씨 별장 2층 테라스로 왔다.소승영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차갑게 물었다."네 짓이야?""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소이연이 시치미를 떼자 소승영은 화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아까 그 영상!""아빠, 나 너무 대단하게 봐주시는 거 아니에요? 저 이제 막 은하 그룹에 왔는데 아빠랑 비서 사이를 어떻게 알겠어요...""그만해!"소승영은 듣기 거북한 진실에 화를 벌컥 냈다. 처음에는 물론 소이연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와 이현아 사이의 비밀스러운 일을 어떻게 금방 회사에 들어온 소이연이 알 수
소이연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빤히 보았다.약간 통통한 외모는 지극히 평범하며 별로 기억에 남을 만한 포인트는 없었다.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말했다."기왕 이렇게 된 이상 그쪽을 난처하게 할 일은 없겠네요""너 내가 육씨 그룹에서 어떤 사람인지 알아? 나 육씨 그룹에서도 알아주는 사람이야! 연봉이 무려 2억도 넘는다고!"장지원은 잘난 척하며 소리를 질렀다.소이연은 "풉"하는 소리와 함께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뒤돌아 떠나갔다.장지원은 소이연의 뒷모습을 보며 어리둥절해졌다.이 정도 조건이면 소이연이 매달릴 줄 알았는데,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사실 장지원은 소씨 가문이 장안시에서 그나마 영향력이 있어 거절하기 힘들었을 뿐 소이연에 다른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소이연을 직접 보니 사진보다 훨씬 예뻤다. 하여 장지원은 이런 여자와 결혼하지 않더라도 대충 데리고 놀기엔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소이연은 장지원의 생각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빨리 소씨 별장을 떠나고 싶었다."언니."뒤에서 징글징글한 소나은의 부름 소리가 또 들렸다.소이연은 낯빛이 어두워졌다.‘죽고 못 사는 문서인과 붙어있을 거지, 왜 내 주위를 맴도는 거야?’"장지원 씨가 얼굴은 평범해도 알고 보면 성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야. 수입도 안정적이라 소방원과 사귀는 것보다 훨씬 나아! 어차피 새엄마가 될 운명이라면 안정적인 사람을 택하는 게 좋지 않겠어?"소나은은 마치 선심을 쓰는 듯 말했다."얼굴이 못나면 꼭 성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야?"소이연은 머리를 돌려 소나은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소이연의 눈빛에 소나은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그렇다고 하기엔 넌 너무 잔꾀가 많은데?"소이연은 쌀쌀한 말투로 한마디 던지고 떠났다.한참 뒤에야 소나은은 비로소 소이연이 자기를 못생기고 잔꾀가 많다고 욕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녀는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지만 소이연은 벌써 저만치 떠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소나은은 혼자 이
이현아를 보낸 뒤 소이연은 유정하의 도움으로 새로운 남자 비서, 정민기를 찾았다. 그는 나이도 많지 않고 학력도 적당하며 은하 그룹에 입사한 시간이 길지 않아 어느 라인에도 서지 않았다.화요일, 원래 계획에 따라 소나은은 다음 시즌 디자인 초안을 보고했다.넓은 회의실에서, 소나은은 자기의 디자인을 설명했다. 하지만 소이연의 뜨거운 눈빛에 그녀는 점점 더 자신감이 없어졌다.아무리 앞으로 한 주일의 시간을 더 준다 한들 그녀는 좋은 디자인을 내놓을 수 없다. 기껏해야 지금의 기초하에서 조금 더 수정만 할 뿐."소 부장은 이 디자인이 통과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소이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회장님, 개인적으로 트렌드의 흐름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행을 따르지만 우리 브랜드의 개성을 잃지 않고 브랜드만의 독특한 포인트는 유지했는데 안 될 게 뭐가 있어요?"소나은은 이미 핑계를 준비했다."개성? 포인트? 우리 은하 로고 외에 뭐가 특별한 지 하나도 안 보여요. 내 눈에 지금 은하의 옷들도 단지 유행하는 요소들을 짜깁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더 웃기는 건 이번엔 짜깁기도 똑바로 못했네요."소나은은 소이연으로 인해 자존심이 팍팍 구겨졌다.하지만 소나은과 함께 온 디자인팀 차장, 팀장 등 모두는 소나은의 편이다.팀장 유혜주가 말했다."우리 팀 실력은 그냥 이 정도라 회장님의 요구와 기준을 만족시켜 드릴 수가 없어요. 그렇게 불만족스러우면 직접 코치하는 건 어때요?"업종이 다르면 서로 이해하기도 힘들거니와 설령 볼 줄 안다고 해도 직접 조작할 줄은 모른다.그녀는 소이연이 정말 디자이너들에게 코칭을 할 거라는 걸 믿지 않았다."좋아요."소이연은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유혜주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소나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소이연을 쳐다봤다."디자인 팀의 요구에 따라 오늘부터 디자인 팀은 제가 직접 관리할게요."말을 끝낸 소이연은 시선을 돌려 소이연을 쳐다보았다."그렇다면 소 부장은..."소나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승영은 그녀의 말이 미심쩍었다.회사 임원들은 모두 소승영 라인이라 소이연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이에 소이연도 은하 그룹을 관리하는 데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은 건 사실이다.‘나은이를 이용해 일을 쉽게 진행할 계획인 건가?!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다니. 내가 그럴 줄 알았지.’"나은이 은하에서 오래 일했으니 당연히 너보다 잘할 거야. 은하를 잘 관리하려면 나은이 힘을 빌리는 게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는 하지."소승영은 아주 만족스러워했다."그렇길 바라요."소이연은 비위를 맞춰주는 척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소승영을 몇 번이고 비웃었다.소나은의 힘을 빌리는 일은 도둑놈한테 문을 열어주는 거와 다를 바 없다!"아, 그리고 저번에 봤던 장지원...""저의 사적인 일이라면 신경 안 쓰셔도 돼요."소이연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내 휴대폰이 다시 울렸지만 소이연은 받지 않았다.벨 소리가 멈추고 문서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나은이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대표로 승진시켜 줬다면서? 두 사람 화해해서 정말 기뻐. 원래 두 사람은 친자매잖아. 그런데 나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가면 내가 얼마나 미안하겠어."소이연은 바로 메시지를 삭제했다.어떤 사람들은 참 뻔뻔하다.......육씨.육현경은 회사 임원들과의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이명진은 육현경에게 블랙커피를 내려준 뒤 업무 보고를 하고 나서 말했다."방금 은하 그룹에서 소식이 왔어요. 사모님이 소나은을 대표로 승진시켰다고 해요."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멈췄다."사모님이 혹시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협박이라도 받은 건지 한번 확인해 볼까요?""아니."육현경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뭔가 생각이 떠올랐다."우선 지켜보고 있어.""네."육현경은 다시 시선을 컴퓨터로 옮기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음 달 17일, 할아버지 생신인데.""네, 회장님의 생신 초대장은 전부 보내 드렸습니다."이명진은 공손하게 말하였다."혹시 특별한 지시가 있을까요?""
소나은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고작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아직 2시간도 넘게 남았는데.""일찍 퇴근하면 안 돼?"문서아는 몹시 불쾌해했다."같이 쇼핑이나 가자."소나은은 조금 머뭇거렸다.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조퇴해도 소승영이 뭐라 하지 않았었다.그런데 지금은 소이연이 회장 자리에 있으니 만약 들키게 되면 꼬투리라도 잡힐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나 문서아한테도 미움을 사면 안 된다. 문서인과의 결혼이 순리롭게 진행될 때까지 이 시누이의 기분도 좋게 해 줘야 한다.거듭 생각한 후, 소나은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지금 바로 나갈게, 어디서 만날까?""세광국제쇼핑센터.""20분이면 도착해."통화를 종료한 후, 소나은은 직접 운전해 목적지로 향했다.같은 시각,소이연이 사무실에서 디자인 초안을 그리고 있는데 누군가에게서 연락이 왔다.그녀는 휴대폰을 힐끗 쳐다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초안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네, 대표님.""언제쯤 호칭 바꿀래?"귀에 익은 목소리는 여전히 허스키하고 매력적이다."그럼 뭐라고 불러요? 육현경 씨? 현경 씨? 아니면 뭐 별명 같은 거 있어요?"육현경은 소이연이 이렇게 말을 잘 들어줄 줄 몰랐다. 육현경은 잠시 멈칫하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듣고 보니 다 비슷하네, 딱 한 개만 빼고......""뭔데요?"“여보라고 불러.”육현경은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은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심쿵하게 만들었다."... ...""급하지 않으니까 나중에 천천히 바꾸자."그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말했다.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육현경은 너무나도 뻔뻔했다.그녀는 육현경의 "엉큼한 농담"을 무시하고 물었다. "근데 무슨 일로 연락했어요?""지금 시간 돼?""아니요.""민이가 널 찾아.""대표님......""17일 약속 잊지 않았지?!""아직 15일밖에 안 됐어요."소이연은 달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17일은 중요한 날이라 좀 차려입어야 해. 시간 나면 나 대신 민이랑 턱시도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