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차를 몰고 돌아가는 길에 육민이 왜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마 그녀와 루카스를 같이 있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육민은 루카스와 육현경이 잘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유를 깨달은 그녀는 육민의 흥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육민은 그녀의 삶의 이유였다. 그래서 육민이 기뻐하고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 그녀는 육민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별장으로 돌아왔다. 육민은 이미 루카스와 밥을 먹고 있었다. 육민은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재빨리 그녀를 불렀다. "엄마, 루카스가 배고프다고 해서 먼저 먹고 있었어요.” "응, 괜찮아." 소이연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향했다. 루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엄마, 방금 루카스가 점심 먹고 서울로 간다고 말했어요." 육민은 서운해하며 말했다. "응, 알고 있어." 소이연은 육민에게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루카스에게 말했다. "이따가 문씨 아저씨한테 너를 공항까지 태워다 주라고 했어.” "고마워.” 루카스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육민은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며 한숨을 쉬었다. 육민은 겨우 열 살밖에 안 되었지만, 언젠가 부모님 덕분에 연애 전문가가 될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루카스는 방으로 돌아가 짐을 싸서 떠날 준비를 했다.소이연은 사실 급한 업무도 없었고 루카스가 떠난다고 생각해니 회사에 다시 갈 생각이 없어졌다. 그녀는 방에 들어가 좀 누워있으려고 위층으로 올라가자마자 루카스가 걸어 나오는 걸 보았다. 그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 시선을 피했는지 모르겠다. 왠지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분위기가 흘렀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잘 가." 소이연은 무심한 듯 가볍게 말했다. 루카스도 소이연을 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스쳐가는 순간 소이연은 갑자기 발이 꼬였다. 그녀의 몸이 앞으로 곤두박질치려고 했
이마에 멍이 든 것 같았다. 루카스는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 세울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엄마!" 그러자 뒤에서 육민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이연이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아래층에서 뛰어온 것 같았다. 문씨 아저씨도 육민의 뒤를 따라 올라오며 소이연이 바닥에 넘어져 코피가 줄줄 흐르는 것을 보고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연 씨! 아이고, 어떻게 해요? 빨리, 빨리 주치의 불러올게요.” "엄마, 엄마 아파요? 피가 나요......" 육민은 바닥에 주저앉아 걱정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젊은 사람이 이렇게 넘어져도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돌아서서 떠났다. 소이연은 루카스의 싸늘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소이연은 평생, 평생 이 악랄한 남자를 다시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앞으로, 절대로, 죽어도 왕래하지 않을 것이다! ...... 루카스가 장안을 떠난 후 소이연은 그와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걸을 것이고 절대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떠난 후 소이연은 매일 밤 루카스가 사용했던 베개와 이불을 덮고 잤다. 정말 오랜만에 맡는 향기였다. 육현경과의 냄새와 비슷한 루카스의 냄새를 맡고 그녀는 잠을 잘 수 있었다. 숙면을 취하지는 못했지만 매일 밤 몇 시간씩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것은 큰 축복이었다. 하지만 소이연은 루카스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감사는 정말 그가 떠나던 날 그녀의 몸을 무자비하게 놓아버린 순간 바로 없어져 버렸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멍이 든 이마로 회사에 간 것을 생각하면 루카스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낄 수 있었다. 루카스가 떠난 다음 날, 소이연은 집에서 택배를 받았다. 육민에게서 온 택배였다. 평소 육민은 물건을 구입할 때도, 인터넷 쇼핑을 할 때도 다 그녀의 이름으로 구입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육민의 이름으로 택배가 와서 소이연은 조금 놀랐다. 그래서 소이연은 택배
오후가 되자, 육민은 학교에서 돌아왔고,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문씨 아저씨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오늘 저한테 온 택배가 있나요?” "택배요?" 문씨 아저씨는 의아해했다. "네 방 책상 위에 있어. 마침 엄마가 집에 있을 때 와서 네 방에 가져다 놨어." 소이연은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엄마!" 육민이 예의 바르게 말하며 재빨리 위층으로 뛰어올랐다. "아기 도련님, 조심해요.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해요. 엄마 이마에 있는 멍도 아직 안 풀렸어요!" 문씨 아저씨는 아래층에서 큰소리로 육민에게 주의를 주었다. 소이연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렸다. 이마에 생긴 큼지막한 멍 때문에 그녀는 출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루카스가 다시 생각났고 오전에 봤던 그 친자확인서가 생각났다. 소이연의 감정은 순간순간 정말 끊임없이 변했다. 육민은 책상 위의 택배를 신이 나서 쳐다보았다. 원래 작은 것 하나까지 신경을 많이 쓰는 예민한 육민이었지만 너무 신이 나서 택배가 개봉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재빨리 봉투를 집어 들고 그 안의 친자확인서를 꺼내며 흥분한 얼굴로 결과지를 보았다. 결과지를 본 육민은 마치 돌기둥처럼 오랫동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소이연은 육민이 걱정되어 그의 방 문 앞으로 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육민을 가만히 지켜보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는 기적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지 않아.” 육민은 소이연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분명 아빠인데, 어떻게 아닐 수가 있지? 하지만 친자확인 결과지에는 루카스가 육민의 친부가 아닐 가능성이 99.99%라고 적혀있었다. 사실 소이연도 그 결과지를 봤을 때 가슴이 아팠다. 루카스가 육현경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결과지를 보는 순간 육현경이 한 번 더 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결과지는 그녀의 눈앞에서 멀어져
육민이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루카스는 정말 아빠가 아니라는 소리인가!그도 과학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검사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 유일한 경우는, 샘플 오류밖에 없습니다.” "뭐가 오류라고요?" 육민은 순간 긴장했다. "저희에게 보내신 검사 샘플이, 의뢰인께서 검사하고 싶은 두 사람의 샘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예를 들어, 의뢰인과 A의 샘플을 검사하려고 했는데, 의뢰인과 B의 샘플을 제출했다면 검사 오류가 날 수 있어요. 이전에 이런 사 오류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쪽에서는 설명했다. "그 외에는 아직까지 검사 오류가 있었던 사례는 없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육민은 전화를 끊고 자신이 보낸 머리카락을 생각했다. 그는 차라리 자신이 머리카락을 잘못 보냈다고 믿고 싶지, 루카스가 자신의 아빠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맞다! 육민은 무엇인가 떠올랐다. 루카스의 머리카락을 들고 가다가 문씨 할아버지와 부딪혔던 기억이 났다. 그때, 문씨 할아버지의 몸에서 머리카락을 찾았는데 그 머리카락이 루카스의 것이 아니면 문씨 할아버지의 것이었을 수 있다. 이것이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이다! 생각을 마친 육민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 소이연을 찾았다. 소이연은 벌써 감정을 추스른 육민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역시 어린이의 회복력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매우 강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걱정했다. 육민은 물었다. “엄마, 루카스가 또 올까요?"소이연은 미간을 좁혔다. 육민은 목표를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안 올 거야, 엄마랑도 우연히 만난 사이라 앞으로는 만날 기회가 없을 거야. 민민, 엄마도 네 아빠가 살아 계시기를 바라지만......” "엄마, 나 정말 못 믿어요?" 육민이 약간 감정이 격해진 듯 말했다.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했잖아.” "실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 "민민." 소이연은 굳은 표정으
소이연의 마음은 또 한 번 아팠다.그녀는 육민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약속했다. "엄마가 널 잘 돌봐줄게.” "저도 엄마를 잘 보살펴 줄게요!" 육민은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소이연과 육민은 암묵적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 루카스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보름이 지났다. 천우진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에 언제 갈 것인지 물었다. 지난번에 그녀는 외할아버지에게 이번 달에 얼마동안 서울에 지내겠다고 약속했다. 역시 약속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그녀는 정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약속을 어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육민도 겨울방학중이라, 천우진은 특히 육민을 데리고 오라고 강조했다. 소이연은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는 했지만, 다행히 육민이 며칠 동안 겨울 캠프에 참가해서 일주일 후에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약속을 다음 주로 미룰 수 있었다. 소이연은 오늘 장안 방송국에 일정이 있었다. 그녀의 회사는 '《배우님 자리에 앉아주세요》 '의 의상을 협찬으로 제공했기에 소이연은 프로그램 녹화가 진행 중인 지금, 그들의 광고 시간과 장소를 다시 결정하기로 결심했다. 이전에 협의된 내용과 약간의 차이가 있고, 회사의 고위 경영진이 이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녀가 직접 나서야 했다. 그녀는 승용차를 타고 방송국 입구에 도착했다. 방송국 사람들은 이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소이연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앞으로 나와 그녀를 방송국 안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방송국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소이연은 익숙한 사람을 본 듯했다. 그녀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다시 보니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소 이사님, 왜 그러세요?" 방송국 고위 경영진이 재빨리 물었다. "방금 지인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잘못 보았나 봐요." 소이연이 담담하게 말했고, 고위 경영진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 소이연은 여전히 미심쩍어 하며 물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어디로 가는 건가
《배우는 자리에 앉으세요》 녹화장, 무대 뒤의 공동 분장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메이크업을 수정하며 말했다. "야, 봤어? 계지원, 계 감독이 왔어. 계 감독이 출연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안 믿었거든. 그동안 계 감독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역시 우리 장안 방송국이 잘 나가긴 하나 봐.” "나도 봤어, 방금 그 앞을 지나쳤는데 정말 잘생기고 키도 크더라. 연예인을 해도 정말 멋질 것 같은데, 정말 아쉬워.” "뭐가 아쉬워! 계 감독이 감독을 안 했어 봐, 우리가 이렇게 많은 재미있는 영화를 볼 수 있겠어? 영화랑 드라마도 재미있고, 계 감독이 카메라로 찍은 여배우는 더욱 아름다워진다고. 업계 사람들이 계 감독 카메라 속에 못생긴 여배우는 없다고 말할 정도야. 그야말로 여배우들의 축복이지.” "맞아. 내가 예전에 평범해 보이는 배우를 만났었는데 계 감독 눈에 띄어 단숨에 스타가 됐어. 심지어 계 감독 영화에 출현한 덕분에 여우주연상 후보까지 올라서 상도 탈 뻔했는데.....!." 말을 하던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하면 실제 이름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분장실안에 듣는 귀가 여럿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쯤 되면 다들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육가희. 육가희는 최근 몇 년 동안 가장 빨리 떠오른 여자 스타였다. 그녀의 뒤에는 강력한 배경이 있다고 한다. 계지원의 많은 주요 영화, 드라마도 모두 육가희가 여주인공을 맡았고, 그녀를 홍보하는데 완전히 열을 올리고 있었다. 물론 계지원이 육가희를 밀어주는 것도 당연했고, 많은 사람들이 질투하는 것도 당연했다. 육가희는 육씨 가문의 딸이다. 육씨 가문이 육현경의 죽음으로 자산을 재정비하여 그룹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육씨 가문은 어쨌든 장안의 가장 큰 재벌그룹이다.지금까지도 육씨 가문과 비교할 만한 자산을 갖고 있는 기업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육씨 가문의 삼대까지 평생 먹고 놀고 살아도 갖고
"그냥 좀 쉬었어." 예수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연예계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다. 갑자기 모든 게 방송들이 취소되고, 모든 작품에서 하차가 되고, 캐스팅이 전면 금지 되었다는 것은 연예계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는 얘기다. 그때 한채영이 화제를 바꾸었다. "야, 나 연예계 생활 10년 만에 이렇게 긴장한 건 처음이야. 수진이 너도 긴장돼?” 예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말했다. "나 어제 몇 차례 실수를 해서 밤에 잠도 잘 못 잤어.” "나도 그래. 어제의 리허설 때 잘 못했는데, 오늘도 그럴까 봐 걱정돼.” 한채영은 예수진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이번 대회 규칙은 1차 때, 심사위원들이 직접 후보를 뽑고, 예선 끝난 뒤 본선에 들어가서 관중 투표를 한대. 정말 예선도 통과 못 할까 봐 걱정돼.” "이번 시즌에서 감독이 차기작에 들어갈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왔다고 들었어. 분명 이미 생각해 놓은 주인공은 있을 테니 여주를 캐스팅하는 것은 아닐 거고, 화려한 조연들을 캐스팅하겠지? 정말 계지원 눈에 띄고 싶다!" 한채영이 말을 이어 나갔다. "참, 너 예전에 계 감독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어?" 한채영이 물었다."그거 방송도 안 됐어." 예수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그런 것 같더라." 한채영은 떨면서 말했다. "그래도 계지원이랑 친분이 있지 않아?” "아니, 없어.” 예수진은 바로 선을 그었다. “오늘 이렇게 많은 심사위원들 중, 나를 뽑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그 사람이야.” "왜? 왜 그렇게 생각해?” 예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설마 원한이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한채영이 불쑥 내뱉었다. 예수진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채영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지원이 예수진을 뽑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걸 들으니 조금은 다행스러웠다. 한채영이 예수진과 이야기를 나눈 것도 자신이 본선에 진출할
이 순간, 마치 자신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역시 사람은 자신이 없을 때 자기 자신을 더더욱 부정해야 한다.예수진이 등장하기 전, 육가희의 무대가 있었다.그녀의 무대는 뮤지컬 형식으로, 현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육가희는 최근 무대 위에서 아주 빠르게 성장했다.예수진도 TV를 보았는데, TV에서는 육가희가 출연한 프로그램이 자주 보였고, 그녀의 가장 처음 유치한 연기부터 지금처럼 성숙해져서 무대 위에서 여유가 있어질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육가희가 잘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심지어 그녀는 다음 순서로 자신이 무대에 올랐을 때, 육가희가 띄워놓은 현장 분위기를 망쳐버리지는 않을지 생각하고 있었다.그때 스태프가 그녀에게 준비하라는 신호를 주었다.그녀는 대기실에서 몸을 일으켰다.주변에 있던 몇 사람이 그녀를 응원해 주었다.사실 다들 멍청하지 않다. 예수진에게 미움받으면 망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예수진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모르는 한,예수진에게 쉽게 호의를 표현해서 불똥이 튀게 하지 않을 것이다.연예계는 항상 이렇게 현실적이었다.예수진은 돌아와 모든 준비를 마쳤다.그녀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꿈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컸고, 당연히 자신의 생활이 더욱 나아지길 바란 것도 배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엄청나게 가난한 건 아니였지만, 더 좋아질 수 있다.그녀는 백스테이지로 향하며 깊게 숨을 쉬었다.사회자가 무대를 소개하는 것을 듣고,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무대로 올라갔다.예선 무대이기 때문에 자기소개 없이 무대에 서자마자 공연을 시작해야 했다.많은 사람들이 무대가 끝나고도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은 없었고, 몇몇은 나중에 별도 녹화를 했고, 몇몇은 정말 준비할 시간조차 없었다. 연예계는 영향력이 전부이다.그녀는 무대 중앙에 서서 10분 동안 상황극을 했다.이때 관중석은 육가희의 연기가 끝난 뒤 아직 어수선해 있었다.심사위원들도 여전히 웃음을 띠며 현장 분위기에 물들어 있었다.장혜성이 갑자기 묻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
예수진은 빠르게 소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연 언니, 송문수 왔어요.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방금 안으로 들어갔어요!][내가 진짜 올 거라고 했잖아요.][내 매력이 그 정도일 줄 몰랐죠.]역시나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예수진에 어이없다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난 소이연은 송문수의 인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하도 큰 키 덕분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우뚝 솟아있는 송문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문수야.”마찬가지로 그를 알아본 육현경이 인사를 건네자 송문수는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언제 왔어?”“어제 오후에.”“왔는데 왜 말도 안 해? 사업 잘된다고 이젠 우리도 모른 척하는 거야?”“아무리 잘 되봤자 내가 현경이만큼 돈이 많진 않아.”볼멘소리를 하는 하도경에 맞는 말로 반박하자 하도경도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언제 가?”“모레 비행기야, 내일 집 가서 부모님만 뵙고 가려고.”“그래서 우리 만날 시간은 없다 이거지?”“이번엔 시간이 좀 빠듯해, 거기 일도 많고. 오늘 보지 뭐, 술 제대로 마시자 한번.”“너 진짜 많이 변했어 송문수, 이렇게 진지하진 말아 줄래?”적응되지 않는 송문수의 말투에 하도경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그럼 어쩌라고.”“나는...”판을 깔아주니 말하기 어려웠는지 하도경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술 마셔 그냥.”“그래.”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둘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하기도 전에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육현경이 그런 그들을 말리려 할 때 송문수의 옆에 문득 한 여자가 앉았다.그에 술잔을 들고 있던 송문수도 잠시 멈칫했다.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송문수를 한번 보던 소이연은 하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지수 씨, 왔어요?”“네.”“혼자예요?”“네.”혼자라는 말에 송문수의 손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혼자니까 더 조심해요 다닐 때.”“그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송문수는 마침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캐나다에 있는 회사도 이제 정상적으로 흘러가자 귀국한 거였지만 그도 그냥 예수진 아들의 백일을 축하하러 온 것뿐이었다.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송문수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배가 부른 채로 있던 예수진이 벌써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백일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오랜만에 온 장안시였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귀국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저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오랫동안 비워둔 집이라 그런지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일단 도우미부터 부른 송문수는 아주머니가 정리를 마친 다음에야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떠나기 전만 해도 이곳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이제는 그 모든 게 다시는 들춰선 안 될 과거가 돼버린 것 같았다.해외에 있던 시간 동안 송문수는 부단히 하지수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물론 정말 잊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하지만 하지수와 송문수가 반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할 때도 같은 집에 살던 하지수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그저 우연히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이 화면에 스친 게 전부였다.몸을 뒤척이던 송문수는 내일의 백일잔치에 대해 생각했다.내일 가면 친구들이 무조건 술을 권할 텐데,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탓에 송문수는 지금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그래도 푹 쉬면 조금은 낫겠지 싶어 그대로 잠을 청한 송문수는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다.언제부턴지 부모님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탓에 송문수는 이젠 밤을 새우는 게 오히려 힘겨웠다.그렇게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그는 한 번 더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을 나섰다.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각에 집을 나선 그는 문득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어쩜 그리 특이하게 살아왔는지, 참으로 유치했던 것 같다.해외에서 반년 동안 혼자 살아서
“보름 넘게 준비한 건데 서두르는 건 아니지.”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떠나는 일인데도 송문수는 참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갔다가 언제 와?”“그건 몰라. 상황 봐서 잘 되면 빨리 오는 거고 잘 안되면 못 오는 거지.”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송문수에 그의 결심이 바뀔 리 없다는 걸 알아챈 송승우는 그만 입을 다물고 하지수의 손을 맞잡았다.무의식중에 눈물을 흘리던 하지수는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빠르게 표정을 감췄다.“가자.”그리고는 송승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그녀는 송문수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마지막 작별인사도 전하지 않은 채 그렇게 헤어졌다.하지수의 몸에 감히 시선을 두지 못하던 송문수도 그녀가 송승우와 함께 차에 타서야 차창 너머로 비치는 그 뒷모습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그는 한참 동안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사실 캐나다도 송문수가 직접 갈 필요는 없었다.회사에 유능한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 아무에게나 CEO라는 직급을 쥐어 보내면 될 일이었지만 송문수는 본인이 가겠다고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여기서 다정하게 지내는 둘을 보고 있는 게 더 가슴 아플 것 같아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어서.손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을 계속 보는 건 정말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는 이곳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송문수는 캐나다에 도착해서야 육현경과 소이연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자신의 출국 소식을 알렸다.그리고 언제 돌아갈지는 모른다는 말까지 남기자 다들 깜짝 놀랐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몸 잘 챙기라는 소리들뿐이었다.그리고 시간 되면 놀러 오라는 얘기들로 대화가 마무리되었는데 역시나 예수진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그녀는 굳이 송문수에게 따로 문자까지 보내며 물었다.[너 진짜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가겠다고? 다 버리고? 송문수, 너 언제부터 이렇게 나약해졌니? 내가 너였으면 당장이라도 송승우랑 싸웠어!][어차피 못 이
둘의 이혼은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고 두 사람은 각각 손에 이혼 증명서를 들고 법원에서 나왔다.“이제 끝난 거지?”“네.”하지수에게 건네받은 이혼 증명서를 들춰보던 송승우는 안에 적힌 내용을 다 확인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혹시라도 돌발상황이 생길까 봐 따라온 건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의 이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송문수는 하지수를 보고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절차대로 서류만 제출했다.아무 감정도 없는 것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송승우는 감정이란 게 저렇게 쉽게 사라질 수도 있나 싶었다.둘 사이에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이혼만 하면 그만이었기에 송승우는 다른 건 묻지 않았다.이제 두 사람이 이혼했으니 송승우는 저와 하지수도 떳떳해진 것 같았다.그리고 그는 송문수만 연락을 끊는다면 하지수를 다시 자기 여자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그래서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송승우가 먼저 송문수를 불러세웠다.“시간 되면 집에 와서 밥이라도 먹어. 엄마 아빠가 전화해도 안 오던데, 많이 바쁜 거야?”“응.”“바쁘다고 가족들도 다 내팽개치는 건 아니지. 워라벨도 신경 써야지.”어른스러운 말투로 나무라듯 말하는 송승우를 송문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서울에서 일할 때 1년이 넘도록 안 오던 게 누군데.부모님이 굳이 송승우를 부르지 않은 건 그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서였다.무튼 송승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고 다른 사람들의 일은 언제든지 시간을 뺄 수 있는 여유 적적한 일이라 여기는 사람.“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주면 도우미들 시켜서 너 좋아하는 거...”“나 해외에 잠깐 나가봐야 해.”“뭐라고?”송문수가 송승우의 지루한 말을 끊으며 대답하자 송승우는 당황하며 물었다.“엄마 아빠가 말 안 했어?”“무슨 말이야 그게?”금시초문이었던 송승우는 하지수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그녀 역시 처음 듣는 말인 것 같았다.“우리 회사 전기차 해외 매출이 자꾸 오르니까 전
그런데 그때, 협탁에 놓인 물과 알약 한 알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그 옆에 나란히 놓여있는 쪽지에는 “단기 피임약”이라는 말도 적혀있었다.그 약과 물을 번갈아 보던 하지수는 피가 차게 식는다는 게 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너무나도 명확한 송문수의 의사에 하지수는 가슴이 아려왔다.성인 남녀 둘이 충동적으로 서로를 원해서 가졌던 하룻밤이니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고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걸 이렇게 약으로 알려주다니.알약을 집어 든 하지수는 참으로 처량하게 웃어 보였다....그렇게 점심이 다돼서야 하지수는 별장으로 돌아갔다.핸드폰 배터리가 다 된 탓에 그녀는 송승우가 몇 통의 전화를 했는지도 모른 채 별장 안으로 들어섰는데 송승우는 아니나 다를까 어두운 얼굴로 이제야 들어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와 달리 허영지와 송기명은 살갑게 하지수를 걱정해주었다.“지수야, 어제 어디 갔었어? 전화는 왜 꺼놓고. 수진이한테 전화했는데 네가 문수랑 같이 갔다고 해서 문수한테 연락해보니까 문수는 또 너랑 같이 있는 거 아니라고 그러던데.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지?”“없어요. 어제 술을 좀 많이 마셔서 문수 씨 집에서 잔 것뿐이에요.”송문수 집에서 잤다는 하지수의 말에 송승우는 더는 못 참겠는지 언성을 높였다.“하지수, 너 나랑 한 약속 잊었어? 네가 어떻게 거기서 잠을 자!”“내가 무슨 약속을 했는데요?”송승우는 아무리 화가 났어도 저 질문에만큼은 답을 할 수 없었다.가스라이팅으로 어렵게 얻어낸 기회라는 걸 다른 사람한테는 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나 문수 씨랑 아직 이혼 안 했어요. 그러니까 아직은 뭘 하든 합법적이란 소리죠.”“하지만...”“이혼하고 나서 얘기해요. 나 피곤해서 먼저 올라 가볼 게요.”몸도 마음도 다 힘들었던 하지수는 송승우를 화를 살필 겨를이 없었기에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렇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목 끝까지 끌
“너 내일 후회할 거야.”이런 하지수를 앞에 두고 참는 건 송문수에게도 곤욕이었다.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게 더 힘들었다.“후회 안 해.”“딱 하나 후회되는 게 있다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한번 밖에 못 해봤다는 거야. 그리고 그 한 번도 진짜 별로였어.”“뭐?”아까부터 한번을 강조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그 한 번도 다 너한테 맞춘 거였잖아.”고작 한 번이라니, 그럴 리가.그런데 또 곱씹어 보니 둘이 함께 잔 건 한 번뿐인 것 같긴 했다.하지만 송승우와 그렇게 오래도록 사귀면서 송승우 방까지 들락날락하던 게 하지수인데 그런 그녀의 인생에서 저와 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번엔 내가 움직일 거야.”하지수는 잔뜩 풀린 눈으로 당차게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나 또 밀어내면 그땐 진짜 물어버릴 거야.”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닥에 눕힌 뒤 그 위에 올라탔다.“반항하지 마.”곧바로 하지수의 입술이 자신에게 다가왔지만 송문수는 정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이 상황에 그녀를 밀어내면 하지수가 정말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기에 송문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그렇게 내일 그녀의 원망도 다 받아낼 심산으로 송문수는 하지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이 밝아오자 하지수는 몸을 뒤척였다.온몸에 차에 깔리기라도 한 듯 무거웠고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던 그녀는 힘겹게 눈부터 떠보았다.익숙하고도 낯선 이곳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송문수의 집이었다.그리고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의 기억 조각들이 하나하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그것들이 마침내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대담한 모습을 그녀는 차마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술이 깬 지금에 와서는 절대 못 할 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