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은 뒤, 소이연은 계지원을 쫓아내지 않았다.계지원도 자발적으로 나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소이연은 서재에서 일을 처리하고 두 사람은 겉보기엔 화기애애했다.계지원이 소파에 앉아서 계속 하품을 했다.그동안 계속 불면증에 시달렸고 가끔 밤새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졸려서 안절부절못하지는 않았다.그냥 텔레비전을 보는 게 너무 지루해서 졸린다고 생각했다.계지원은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보다가 또 뉴스도 검색했다.뉴스에 온통 오늘 저녁 심씨 그룹에서 여는 자선 파티에 대한 소식으로 가득했다.보다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계지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쥔 채로 잠들어버렸다.그때 소이연이 서재에서 나왔다.계지원이 소파에 쓰러져 고르게 숨을 쉬는 것을 확인했다.소이연이 그에게 수면제를 먹인 것이다.평소 그녀도 불면증이 있어 수면제를 집에 챙겨 놓고 있었다.수면제의 효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랐다.적어도 30분에서 1시간은 기다려야 완전히 숙면을 취할 거라 생각했다.계지원이 엊저녁에 제대로 자지 못해서 몸이 피곤하여 효과가 빨리 퍼진 것 같았다.“지원 씨.”소이연이 그를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저 미간을 찌푸리는 게 다였다.계지원은 이미 깊은 잠에 들어서 눈을 뜨지도 못했다.소이연은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문 쪽으로 향했다.심호흡을 한 뒤 벌컥 문을 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빨리 들어와 보세요. 지원 씨가 갑자기 쓰러졌어요.”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두 남자는 서로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빨리 들어와서 병원에 데려가세요! 혹시 죽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질 거예요?”소이연이 다급하게 재촉했다.두 남자가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소이연이 잡아당겼다.그들도 따라서 집으로 들어갔다.계지원이 소파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계 선생.”한 경호원이 그를 불렀다.계지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눈을 뜰 수가 없었
앞에서 검정색 승용차에서 두 사람이 내리더니 차 앞을 막았다.“내가 나가서 볼게.”뒷좌석에 앉은 경호원이 그들을 발견하고 차에서 내렸다.귀찮은 일을 빨리 해결하고 병원에 가려고 했다.소이연은 손잡이를 잡은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경호원이 내려서 몇 걸음 가는 것을 확인하더니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운전석에 앉은 경호원이 눈치를 채고 차에서 내려 그녀를 막으려고 했다.하지만 소이연은 이미 뒤를 따라오던 검정색 차량에 앉은 뒤였다.경호원에 달려간 순간 승용차는 이미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떠나버렸다.어쩔 수 없는 경호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휴대폰을 들고 보고했다.“육 선생. 소이연 씨가 도망쳤어요.”…소이연은 심문헌의 승용차에 올라탔다.가슴이 지금도 두근거렸다.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심문헌은 옆에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싱긋 웃었다.소이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봤다.재미난 구경이라도 보는 것 같은 태도에 기분이 언짢았다.“소이연 씨의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어요.”심문헌이 입을 열었다.“육현경이 철저하게 감시해도 이렇게 쉽게 빠져나오다니.”소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쉽게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계지원이 무방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자신을 믿는 사람을 속인 것이다.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결국은 거절해버렸다.소이연은 심문헌과 같이 그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낙성시에 도착했다.심문헌은 그녀를 데리고 낙성시에서 최고급 개인 병원으로 향했다.“가시죠.”심문헌이 말했다.“당신을 믿어도 되는 거죠?”“오늘 나와 낙성시에 오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연 씨는 나를 믿었어요.”심문헌은 자랑으로 여기며 미소를 지었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며 그를 따라 병원으로 들어갔다.지금 그녀가 만나러 가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바로 심문헌의 할아버지, 심태정이다.소이연은 심태정을 본 적도 없고 뉴스에서 그의 사진을 본 적도 없다.하지만 병상에 누운 사람이 그렇게 큰 살상력이
심씨 자선회 현장.연회장 밖은 이미 인산인해로 들끓었다.기자, 팬, 경호원 그리고 둘러싼 군중들로 시끌벅적했다.이런 자리는 어떤 연예인의 콘서트에도 뒤쳐지지 않았고 오히려 지나치기까지 했다.검정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레드 카펫 끝자락에 멈춰 섰다.심문헌은 옆에 앉은 소이연을 바라봤다.병원에서 나온 뒤 그녀를 따라 드레스르 갈아입으러 갔다.지금 그녀는 연두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그 모습이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자꾸 시선이 갔다.“내릴까요?”심문헌이 물었다.하지만 그는 보통 사람처럼 정신력이 나약하지 않았다.소이연에게 매우 담담하게 대했다.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도 여전히 불안했다.육현경이 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는 온갖 수단을 써가며 와버렸다.그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네.”소이연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희미한 불빛이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비추었다.마치 수많은 별들이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았다.“뭐예요?”소이연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그제야 심문헌이 정신을 차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하지만 그 웃음은 희미해서 눈에 띄지 않았다.그가 눈짓을 하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차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오더니 공손하게 문을 열어줬다.심문헌이 가슴을 쭉 펴며 차에서 내렸다.내리자마자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카메라 플래시가 그의 주변에서 요란하게 반짝거렸다.심문헌은 반대편 차문에 다가가더니 신사처럼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가늘고 흰 손이 그의 손바닥에 살포시 얹혀졌다.현장은 1초 동안 정지되었다.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차에서 내리는 여주인공을 기다렸다.심씨 큰 도련님이 직접 현장에 데려오고 직접 허리를 굽혀 손을 잡으려고 하는 여자가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다.왜냐면 그동안 심문헌은 공식적인 자리에 여자 파트너를 데려온 적이 없고 그 흔한 스캔들도 없었기 때문이다.어떤 사람들은 심문헌의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지 않는지 의심했다.필경
심문헌은 항상 옅은 미소를 짓고 있어 사람들에게 점잖고 예의 바른 인상을 주었다.“이연 씨 덕분에 레드 카펫을 걷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처음 알게 됐어요.”그는 웃음을 머금고 소이연의 귀에 속삭였다.“아마도 지금 육현경은 나를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겠죠?”“걷기나 하세요.”소이연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말투는 상당히 차가웠다.심문헌의 미소가 점점 더 번졌다.기자들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모두 사진으로 찍었다.두 사람이 기자들 앞에 서자,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심문헌 씨. 어떻게 소이연 씨와 함께 오게 되었습니까? 두 사람 혹시 특별한 사이입니까?”“심문헌 씨. 할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셨다던데 사실입니까? 오늘 저녁에 할아버지는 자선 파티에 오십니까?”“심문헌 씨. 듣자니 이번 자선 파티에 자선 모금을 하는 외에 심씨 가문에서 깜짝 발표할 것이 있다고 하던데 미리 알려주면 안 되겠습니까?”…”“소이연 씨는 심문헌 씨와 어떤 관계입니까? 오늘은 심문헌 씨의 여자 파트너 신분으로 오신 건가요? 아니면 심씨 감문에서 특별히 초대를 받았습니까?”“소이연 씨. 오늘 저녁에 입은 드레스는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겁니까? 아니면 주문한 겁니까?”“소이연 씨. 최근 은하 패션에서 출시한 고급 브랜드가 다른 브랜드를 훨씬 앞서고 있는데 혹시 글로벌 시장으로 발전할 의향은 없습니까? 앞으로 브랜드 마케팅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기자들이 정신없이 질문을 들이댔다.심문헌이 먼저 대답했다.“저와 소이연 씨가 같이 행사에 참석했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는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입니다.”“그니까 심문헌 씨와 소이연 씨가 공동으로 은하 패션의 고급 브랜드를 경영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말씀입니까?”“절반은 사실입니다.”심문헌이 대답했다.“절반이요?”기자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공동 협력은 맞지만 공동 경영은 아닙니다. 저는 투자만 책임지고 모든 브랜드의 디자인과 마케팅 전략, 판매 등 문제는 소이연
소나은도 현장에 도착했다.그녀는 소씨 그룹의 회장 신분으로 참가했다.예전 같으면 소씨 그룹은 낙성에서 1년에 한번 열리는 최대 규모의 자선 파티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다. 바로 심아윤이 단독으로 그녀에게 초대장을 준 것이다.협력 관계인 이상 심아윤은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소나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소나은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일부러 소씨 가족들 앞에서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았다.지금 그녀는 소씨 별장에 살지 않고 자신의 명의로 된 별장을 사서 지낸다.양화랑이 사적으로 그녀를 찾아왔었다.“드디어 우리 모녀가 소씨 가문에서 발언권이 생겼어.”그녀는 겉으로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그 외에도 유백희는 지금 소승영에게 별장에서 나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과 계속 양화랑을 추켜세우며 소씨 재산을 나누려 한다는 말도 했다.소나은도 수완이 좋았다.어려서부터 양화랑과 같이 살아서 그녀의 속셈을 다 꿰뚫고 있었다.양화랑이 이렇게 말하는 목적은 먼저 소나은의 비위를 맞춰 주다가 천천히 소씨 주식을 가져가려는 속셈이다. 결국은 전부 소준환의 몫이 될 것이다.소나은은 양화랑에게 체면을 주지 않고 바로 집에서 쫓아냈다.양화랑이 태도를 바꾸고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그 누구도 나한테서 소씨 주식을 1전도 가져갈 생각하지 마!소나은은 지금 이 순간 심씨 자선 파티의 레드 카펫을 걷고 있다.이 기회에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엄청 신경을 써서 치장했다.이렇게 고급스러운 연회에서 미모를 발산하려고 말이다.그런데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어도 기자들이 부르지 않고 심지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전에 소씨 그룹을 인수했을 때 분명 상업계에서 파문을 일으켰지만 그 뒤로 기자와 직접 대면하여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이번에 그녀가 얼굴을 내밀면 어떻게 기자들에게 대응할지 만단의 준비를 했다.그런데 누구도 그녀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분명 천천히 걷고 다양한 몸짓을 취하며 주의를 끌었지만 누구도 인터뷰하러 다가오지 않았다
기자들은 벌떼처럼 저쪽으로 몰려갔다.심문헌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어때요? 걸을 수 있겠어요?”“괜찮아요.”소이연이 발목을 움직였다.조금 아프지만 걷는 데는 큰 지장은 없었다.“무리하지 마세요.”“무리하지 않았어요.”소이연이 단호하게 말했다.“오케이.”심문헌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육현경과 심아윤이 오면서 두 사람이 다정한 모습을 봤다.“사촌 오빠와 이연 씨 사이가 꽤 좋네.”심아윤이 무심하게 말했다.육현경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심아윤은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어차피 오늘 저녁, 모두의 앞에서 결혼 날짜를 발표할 것이다.심아윤의 할아버지가 결단력 있게 나선 덕에 육현경은 한 달 동안 낙성에 있으면서 심씨 가문의 일을 처리해 주었다.그래서 외부인들은 두 사람이 무조건 결혼할 것이라 생각했다.육현경도 의외로 반항하지 않았다. 솔직히 반항할 능력이 없었다.심지어 결혼 날짜를 발표하는 것도 반대하지 않았다.그 이유는 심아윤이 두 사람이 아무리 형식적인 결혼을 하더라도 절대 욕심내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지금 심씨 내부에 모순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육현경이 그녀의 가문을 도와 어려움을 극복해서 목적에 달성하기만 한다면 무조건 할아버지한테 비밀리에 이혼하도록 허락을 받고 더는 매달리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그가 이 약속을 어느 정도 믿는지 알지 못하지만 의의를 제기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심아윤의 입장에서 육현경이 믿든 안 믿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바로 육현경과 결혼하는 것이다. 일단 결혼하기만 하면 두 가문의 신분으로 절대 이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지금은 한 걸음씩 함정을 파서 육현경이 뛰어들게 유인하고 더 깊게 들어가 나오지 못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육현경 씨. 최근에 계속 심아윤 씨와 함께 있었다고 들었는데 혹시 좋은 일이 곧 다가오는 겁니까?”기자가 물었다.“육현경 씨가
기자에게서 벗어났다. 심아윤은 로비 입구로 들어오자 육현경에게 말했다. "화난 거 아니지? 난 기자에게 민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 "화 안 났어." 육현경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육현경 앞에서 뭘 하든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끔은 자신이 혼자 즐거워하는 어릿광대처럼 느껴졌다. 심아윤의 눈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육현경은 언제나 그녀의 것이고 그녀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이제 무엇이든 참을 수 있다.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고 상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민이가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하고 싶지도, 엄마가 누구인지 불명확하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그런 것들이 민이 마음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워. 그리고 나는 정말 민이를 어릴 때부터 내 친아들이라고 생각했어.” "알고 있어.” 그는 이해는 하는 것 같지만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함께 홀 안으로 들어갔다. 홀 안에는 사람이 많이 있지 않았다. 심씨 그룹의 자선 행사에 참석할 자격을 갖춘 사람은 많이 없었다. 기업인이나 고위 관료, 둘 중의 하나였다. 한마디로 일반인들에게는 이 행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텔레비전 화면 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현경과 심아윤의 등장은 여전히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오늘 밤 그들이 주인공이다. 심태섭은 이번 자선 행사가 손녀인 '심아윤'의 이름으로 개최되었음을 분명하게 알렸다. 손주들의 이름으로 행사를 개최한 일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심태섭이 심아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런 영광은 그녀의 오빠인 심진우도 누리지 못했었다. 그들이 등장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육현경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심아윤을 에스코트하며 연회장으로 들어와 참석한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손님들 사이사이를 누비며 그들과 친목을 다졌다. 육현경은 검은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평소 넥타이를 매
소이연과 육현경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눈빛은 복잡 미묘한 듯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침묵이 흘렀다. 그때. 심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내가 먼저 이런 행사를 개최해서 미안해요.” "그래?" 심문헌과 심아윤은 사이가 매우 좋았다. "오래전부터 이연 씨랑 협력하고 싶다고 했는데, 아직 기회를 못 잡아서 정말 속상했는데, 두 분은 마음이 잘 맞아서 다행이에요.” 심아윤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아윤아, 너무 욕심내지 마. 육 선생 한 명이 여러 사람보다 낫잖아. 난 이제 막 사업을 시작했잖아. 날 방해하지 마." 심문헌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사실, 심아윤 가족의 탐욕에 대한 비아냥거리는 것이었다. "오빠랑 저는 가족인데 방해를 왜 해요. 오빠와 이연 씨가 협력하게 되어 저도 좋은 걸요. 두 분의 협력을 축하드리는 의미에서 저랑 현경 씨가 술 한잔 올릴게요, 같이 건배해요." 심아윤은 육현경에게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녀는 육현경의 팔을 잡아당겨 술잔을 권하며 애교를 부렸다. 소이연은 덤덤하게 육현경을 보며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 심아윤이 그에게 술을 권했지만, 그는 술을 마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행동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심문헌은 말을 하여 어색한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육 선생이 아마 소이연 씨가 요 며칠 몸이 불편해서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런가 보다.” 육현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심문헌을 보았다. 심문헌은 보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건배는 하지 말자. 가족끼리 예의 차리면서 건배하면 오히려 남처럼 보이잖아. 오늘 밤은 네가 주인공이라 손님들 접대하느라 바쁠 텐데,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해.” "그러면 오빠 말 들을게요. 그럼 저랑 현경 씨는 이만 손님들께 인사하러 가볼게요.” "그래, 수고해.” 심아윤은 육현경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육현경은 계속 소이연을 바라보았다. 심문헌의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