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씨 자선회 현장.연회장 밖은 이미 인산인해로 들끓었다.기자, 팬, 경호원 그리고 둘러싼 군중들로 시끌벅적했다.이런 자리는 어떤 연예인의 콘서트에도 뒤쳐지지 않았고 오히려 지나치기까지 했다.검정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레드 카펫 끝자락에 멈춰 섰다.심문헌은 옆에 앉은 소이연을 바라봤다.병원에서 나온 뒤 그녀를 따라 드레스르 갈아입으러 갔다.지금 그녀는 연두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그 모습이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자꾸 시선이 갔다.“내릴까요?”심문헌이 물었다.하지만 그는 보통 사람처럼 정신력이 나약하지 않았다.소이연에게 매우 담담하게 대했다.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도 여전히 불안했다.육현경이 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는 온갖 수단을 써가며 와버렸다.그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네.”소이연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희미한 불빛이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비추었다.마치 수많은 별들이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았다.“뭐예요?”소이연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그제야 심문헌이 정신을 차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하지만 그 웃음은 희미해서 눈에 띄지 않았다.그가 눈짓을 하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차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오더니 공손하게 문을 열어줬다.심문헌이 가슴을 쭉 펴며 차에서 내렸다.내리자마자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카메라 플래시가 그의 주변에서 요란하게 반짝거렸다.심문헌은 반대편 차문에 다가가더니 신사처럼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가늘고 흰 손이 그의 손바닥에 살포시 얹혀졌다.현장은 1초 동안 정지되었다.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차에서 내리는 여주인공을 기다렸다.심씨 큰 도련님이 직접 현장에 데려오고 직접 허리를 굽혀 손을 잡으려고 하는 여자가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다.왜냐면 그동안 심문헌은 공식적인 자리에 여자 파트너를 데려온 적이 없고 그 흔한 스캔들도 없었기 때문이다.어떤 사람들은 심문헌의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지 않는지 의심했다.필경
심문헌은 항상 옅은 미소를 짓고 있어 사람들에게 점잖고 예의 바른 인상을 주었다.“이연 씨 덕분에 레드 카펫을 걷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처음 알게 됐어요.”그는 웃음을 머금고 소이연의 귀에 속삭였다.“아마도 지금 육현경은 나를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겠죠?”“걷기나 하세요.”소이연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말투는 상당히 차가웠다.심문헌의 미소가 점점 더 번졌다.기자들은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모두 사진으로 찍었다.두 사람이 기자들 앞에 서자,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심문헌 씨. 어떻게 소이연 씨와 함께 오게 되었습니까? 두 사람 혹시 특별한 사이입니까?”“심문헌 씨. 할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셨다던데 사실입니까? 오늘 저녁에 할아버지는 자선 파티에 오십니까?”“심문헌 씨. 듣자니 이번 자선 파티에 자선 모금을 하는 외에 심씨 가문에서 깜짝 발표할 것이 있다고 하던데 미리 알려주면 안 되겠습니까?”…”“소이연 씨는 심문헌 씨와 어떤 관계입니까? 오늘은 심문헌 씨의 여자 파트너 신분으로 오신 건가요? 아니면 심씨 감문에서 특별히 초대를 받았습니까?”“소이연 씨. 오늘 저녁에 입은 드레스는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겁니까? 아니면 주문한 겁니까?”“소이연 씨. 최근 은하 패션에서 출시한 고급 브랜드가 다른 브랜드를 훨씬 앞서고 있는데 혹시 글로벌 시장으로 발전할 의향은 없습니까? 앞으로 브랜드 마케팅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기자들이 정신없이 질문을 들이댔다.심문헌이 먼저 대답했다.“저와 소이연 씨가 같이 행사에 참석했다고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는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입니다.”“그니까 심문헌 씨와 소이연 씨가 공동으로 은하 패션의 고급 브랜드를 경영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말씀입니까?”“절반은 사실입니다.”심문헌이 대답했다.“절반이요?”기자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공동 협력은 맞지만 공동 경영은 아닙니다. 저는 투자만 책임지고 모든 브랜드의 디자인과 마케팅 전략, 판매 등 문제는 소이연
소나은도 현장에 도착했다.그녀는 소씨 그룹의 회장 신분으로 참가했다.예전 같으면 소씨 그룹은 낙성에서 1년에 한번 열리는 최대 규모의 자선 파티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다. 바로 심아윤이 단독으로 그녀에게 초대장을 준 것이다.협력 관계인 이상 심아윤은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소나은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소나은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일부러 소씨 가족들 앞에서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았다.지금 그녀는 소씨 별장에 살지 않고 자신의 명의로 된 별장을 사서 지낸다.양화랑이 사적으로 그녀를 찾아왔었다.“드디어 우리 모녀가 소씨 가문에서 발언권이 생겼어.”그녀는 겉으로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그 외에도 유백희는 지금 소승영에게 별장에서 나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과 계속 양화랑을 추켜세우며 소씨 재산을 나누려 한다는 말도 했다.소나은도 수완이 좋았다.어려서부터 양화랑과 같이 살아서 그녀의 속셈을 다 꿰뚫고 있었다.양화랑이 이렇게 말하는 목적은 먼저 소나은의 비위를 맞춰 주다가 천천히 소씨 주식을 가져가려는 속셈이다. 결국은 전부 소준환의 몫이 될 것이다.소나은은 양화랑에게 체면을 주지 않고 바로 집에서 쫓아냈다.양화랑이 태도를 바꾸고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그 누구도 나한테서 소씨 주식을 1전도 가져갈 생각하지 마!소나은은 지금 이 순간 심씨 자선 파티의 레드 카펫을 걷고 있다.이 기회에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엄청 신경을 써서 치장했다.이렇게 고급스러운 연회에서 미모를 발산하려고 말이다.그런데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어도 기자들이 부르지 않고 심지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전에 소씨 그룹을 인수했을 때 분명 상업계에서 파문을 일으켰지만 그 뒤로 기자와 직접 대면하여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이번에 그녀가 얼굴을 내밀면 어떻게 기자들에게 대응할지 만단의 준비를 했다.그런데 누구도 그녀를 아는 체하지 않았다.분명 천천히 걷고 다양한 몸짓을 취하며 주의를 끌었지만 누구도 인터뷰하러 다가오지 않았다
기자들은 벌떼처럼 저쪽으로 몰려갔다.심문헌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어때요? 걸을 수 있겠어요?”“괜찮아요.”소이연이 발목을 움직였다.조금 아프지만 걷는 데는 큰 지장은 없었다.“무리하지 마세요.”“무리하지 않았어요.”소이연이 단호하게 말했다.“오케이.”심문헌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육현경과 심아윤이 오면서 두 사람이 다정한 모습을 봤다.“사촌 오빠와 이연 씨 사이가 꽤 좋네.”심아윤이 무심하게 말했다.육현경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심아윤은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어차피 오늘 저녁, 모두의 앞에서 결혼 날짜를 발표할 것이다.심아윤의 할아버지가 결단력 있게 나선 덕에 육현경은 한 달 동안 낙성에 있으면서 심씨 가문의 일을 처리해 주었다.그래서 외부인들은 두 사람이 무조건 결혼할 것이라 생각했다.육현경도 의외로 반항하지 않았다. 솔직히 반항할 능력이 없었다.심지어 결혼 날짜를 발표하는 것도 반대하지 않았다.그 이유는 심아윤이 두 사람이 아무리 형식적인 결혼을 하더라도 절대 욕심내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지금 심씨 내부에 모순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육현경이 그녀의 가문을 도와 어려움을 극복해서 목적에 달성하기만 한다면 무조건 할아버지한테 비밀리에 이혼하도록 허락을 받고 더는 매달리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그가 이 약속을 어느 정도 믿는지 알지 못하지만 의의를 제기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였다.심아윤의 입장에서 육현경이 믿든 안 믿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바로 육현경과 결혼하는 것이다. 일단 결혼하기만 하면 두 가문의 신분으로 절대 이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지금은 한 걸음씩 함정을 파서 육현경이 뛰어들게 유인하고 더 깊게 들어가 나오지 못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육현경 씨. 최근에 계속 심아윤 씨와 함께 있었다고 들었는데 혹시 좋은 일이 곧 다가오는 겁니까?”기자가 물었다.“육현경 씨가
기자에게서 벗어났다. 심아윤은 로비 입구로 들어오자 육현경에게 말했다. "화난 거 아니지? 난 기자에게 민이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어.” "화 안 났어." 육현경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녀가 육현경 앞에서 뭘 하든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끔은 자신이 혼자 즐거워하는 어릿광대처럼 느껴졌다. 심아윤의 눈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육현경은 언제나 그녀의 것이고 그녀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이제 무엇이든 참을 수 있다.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고 상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민이가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게 하고 싶지도, 엄마가 누구인지 불명확하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지도 않아. 나는 그런 것들이 민이 마음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워. 그리고 나는 정말 민이를 어릴 때부터 내 친아들이라고 생각했어.” "알고 있어.” 그는 이해는 하는 것 같지만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함께 홀 안으로 들어갔다. 홀 안에는 사람이 많이 있지 않았다. 심씨 그룹의 자선 행사에 참석할 자격을 갖춘 사람은 많이 없었다. 기업인이나 고위 관료, 둘 중의 하나였다. 한마디로 일반인들에게는 이 행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텔레비전 화면 밖에 없었다. 하지만. 육현경과 심아윤의 등장은 여전히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오늘 밤 그들이 주인공이다. 심태섭은 이번 자선 행사가 손녀인 '심아윤'의 이름으로 개최되었음을 분명하게 알렸다. 손주들의 이름으로 행사를 개최한 일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심태섭이 심아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이런 영광은 그녀의 오빠인 심진우도 누리지 못했었다. 그들이 등장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육현경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심아윤을 에스코트하며 연회장으로 들어와 참석한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손님들 사이사이를 누비며 그들과 친목을 다졌다. 육현경은 검은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평소 넥타이를 매
소이연과 육현경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눈빛은 복잡 미묘한 듯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침묵이 흘렀다. 그때. 심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빠, 내가 먼저 이런 행사를 개최해서 미안해요.” "그래?" 심문헌과 심아윤은 사이가 매우 좋았다. "오래전부터 이연 씨랑 협력하고 싶다고 했는데, 아직 기회를 못 잡아서 정말 속상했는데, 두 분은 마음이 잘 맞아서 다행이에요.” 심아윤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아윤아, 너무 욕심내지 마. 육 선생 한 명이 여러 사람보다 낫잖아. 난 이제 막 사업을 시작했잖아. 날 방해하지 마." 심문헌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사실, 심아윤 가족의 탐욕에 대한 비아냥거리는 것이었다. "오빠랑 저는 가족인데 방해를 왜 해요. 오빠와 이연 씨가 협력하게 되어 저도 좋은 걸요. 두 분의 협력을 축하드리는 의미에서 저랑 현경 씨가 술 한잔 올릴게요, 같이 건배해요." 심아윤은 육현경에게 다정하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녀는 육현경의 팔을 잡아당겨 술잔을 권하며 애교를 부렸다. 소이연은 덤덤하게 육현경을 보며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거절하지도 않았다. 심아윤이 그에게 술을 권했지만, 그는 술을 마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행동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심문헌은 말을 하여 어색한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육 선생이 아마 소이연 씨가 요 며칠 몸이 불편해서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런가 보다.” 육현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심문헌을 보았다. 심문헌은 보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건배는 하지 말자. 가족끼리 예의 차리면서 건배하면 오히려 남처럼 보이잖아. 오늘 밤은 네가 주인공이라 손님들 접대하느라 바쁠 텐데,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해.” "그러면 오빠 말 들을게요. 그럼 저랑 현경 씨는 이만 손님들께 인사하러 가볼게요.” "그래, 수고해.” 심아윤은 육현경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육현경은 계속 소이연을 바라보았다. 심문헌의
소이연은 찡그린 얼굴로 심문헌을 바라보았다. 심문헌은 태연하게 웃었다. 결국 소이연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심문헌 옆에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고위 관리들을 지켜보았다. 물론 소나은도 이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나은이 낙하산이기는 했지만 이런 행사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받은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또한, 그녀가 이곳에 참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주로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나은도 마찬가지였다. 심아윤은 소나은을 철저히 매수하기 위해 얼마의 돈을 써야 했다. 연회장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연회장 안의 불빛이 약해지면서 무대 중앙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모두의 시선이 무대로 쏠렸다. 사회자는 앞으로 나와 진지하고 예의 바르게 개회사를 시작했다. "존경하는 내빈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바쁘신 와중에도 심씨 그룹의 자선만찬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장내에 열렬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격식 높은 연회에 사회를 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인기와 영향력을 갖고 있는 연예계 톱클래스였다. "이번 연회의 주최자인 심아윤 양이 이 자선 만찬의 개회사를 하시겠습니다. 모두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심아윤이 빨간 드레스를 입고 사회자에게 다가갔다. 사회자가 그녀에게 마이크를 건네주었다.심아윤은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고도 우아하게 말을 시작했다. "제가 자선 만찬은 처음 주최해서 귀하신 내빈 여러분들의 대접이 소홀하지 않았는지 걱정됩니다. 내빈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에게 기회를 주시고 제가 성장하고 자립할 수 있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 주신 할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할아버지의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그 말과 동시에 심아윤은 단상 아래에 앉아있는 심태섭을 향해 허리를 구부려 인사했다. "부모님, 오빠, 제가 능력 키우고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시고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아윤은 다시 고개
"자선 만찬 경매에 앞서 내빈 여러분을 위해 작은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심아윤이 일부러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멘트를 했다.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심아윤은 이어 말했다. "현장에 계신 아름다운 숙녀분들을 무작위로 선정해 오늘 밤 그분들과의 첫 춤을 경매에 추가할 것입니다. 낙착 금액은 자선단체에 기부될 것입니다.” 현장이 약간 소란스러워졌다. 춤 경매는 처음 들어보았다. 참석자들은 자선 만찬인데 더 많은 돈을 모아 기부하는 것이 중요하지 형식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자선단체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신과 기업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돈을 기부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자발적으로 무대에 오르실 용기 있는 숙녀분 계신 가요?" 심아윤이 묻자, 무대 아래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참석자둘 중 무대로 올라가고 싶은 사람도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심문헌은 소이연의 귀에 속삭였다. "이연 씨가 올라가 보지 않을래요? 제가 기부할게요.” "지금 아파요." 소이연은 심문헌을 빤히 쳐다보며 답했다. 심문헌도 화나지 않았다. 2분이 지났지만, 다들 서로를 바라볼 뿐 아무도 무대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용기가 부족하시다면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심아윤은 분위기를 식지 않도록 재치 있게 말했다."숙녀분들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두 분을 뽑겠습니다. 오늘 밤 참석하신 내빈분들은 모두 경매 번호를 가지고 계실 겁니다. 제가 무작위로 두 개의 번호를 부르면, 그 번호를 갖고 계신 숙녀분께서 무대로 올라와 주시면 됩니다. 그 숙녀분의 춤을 경매에 붙이겠습니다.” "좋아요." 누군가가 동의의 목소리를 내자, 많은 사람들도 좋다고 말했다. 심아윤은 무작위로 숫자를 불렀다. ”36번.”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번호를 확인했다. 그 순간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요.” 순간, 참석자들의 시선이 불빛을 따라갔다. 소나은이 노출이 심한 검은색 튜브톱 드레스
혼자 술을 마시던 하도경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서 먼저 나가떨어져 버린 셋을 비웃고 있었다.아무래도 평소에 술을 많이 마시지 않던 사람들이라 주량이 턱없이 약한 것 같았다.알딸딸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난 하도경은 몸은 휘청거렸지만 그래도 정신줄은 잡고 있어 다행히 두 발로 걸을 수는 있는 정도였다.입구를 향해 걸어가던 하도경은 예수진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싶어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미 끝난 사이에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 같아 그저 밖으로 나갔다.자신이 예수진을 완전히 잊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처도 무뎌지니 전만큼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온 하도경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빠르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술기운까지 더해져 잠에 들려던 찰나, 둘둘씩 짝을 지어 제 앞을 벗어나던 친구들이 떠올랐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씩씩거렸다.여자친구 있는 게 별것도 아닌데 혼자만 없으니 괜히 더 서러운 것 같았다....다음날, 효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수진은 원활한 교류를 위해“비밀작전팀”이라는 단톡방을 개설했는데 거기에 소이연과 송문수를 초대하고 아침부터 문자를 쉴 새 없이 보내고 있었다.예수진이 보내온 로맨틱한 프러포즈 장소가 하도 많아 송문수는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뭐가 이렇게 많아? 그냥 하나로 통일하면 안 돼? 나 이거 다하다가는 힘들어서 죽어.][누가 다하래? 여기서 고르라고.][조금 복잡하긴 하네요.]송문수가 어이없어하자 소이연이 나서서 정리하기 시작했다.[일단 셋 다 별로인 것부터 빼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들로 몇 개만 추려보죠.][난 이연 씨말에 동의, 역시 이연 씨가 나서야 좀 믿음이 간다니까요.][송문수, 너 말 똑바로 안 하면 나 여기 나간다?][아, 미안해. 그놈의 성질 진짜.]예수진 앞에서는 늘 기고 들어가야 했던 송문수는 이번에도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계획 빨리 짜고 프러포즈에 필요한 도구
송문수가 나간 뒤 예수진은 계지원의 얼굴이라도 닦아주려고 수건을 가지러 가려 했는데 그 순간 갑자기 몸을 일으킨 계지원에게 손목이 잡혀버렸다.“수진아.”“깼어? 머리는 안 아파? 오늘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안 아파, 나 안 취했어.”걱정스런 아내의 질문에 계지원이 태연하게 답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진짜?”“응.”“그럼 연기였어?”“응.”“친구들 상대로 너무 한 거 아니야 당신?”“내가 취하면 너는 누가 챙겨? 배도 점점 불러오는데.”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계지원에 감동한 예수진은 잔뜩 부른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그럼 나 걱정돼서 그만 마신 거야?”“당연하지, 너 말고 내가 걱정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진 예수진은 큰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말했다.“내가 애만 낳으면 당신이랑 당신 친구들이랑 밤새 같이 술 마셔 줄게.”“...”거실에 남은 송문수와 하도경은 때를 모르고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하지수는 취하기 전에는 그만두지 그들을 알기에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하지만 소이연도 떠나고 예수진도 남편을 돌보러 들어가 버리니 심심했던 그녀는 영화나 찾아볼까 싶어 리모컨을 들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수 씨, 문수 취한 것 같은데요?”이미 테이블에 엎어져 버린 송문수는 그 와중에 하도경의 말을 들은 건지 갑자기 중얼거렸다.“나 안 취했어, 아직 더 마실 수 있다고. 하도경, 내가 오늘 너보다 먼저 취하면 나 이제 송문수가 아니야.”딸꾹질을 하면서도 오기를 부리는 송문수에 하도경이 그를 밀어내며 대꾸했다.“술도 못 마시면서 뭐 날 이긴다고 난리야, 너 한 10년은 연습해야겠다.”“너 나 무시하냐?”하도경의 말에 발끈한 송문수가 제대로 앉아보려 했지만 이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채 눈을 끔뻑이며 술잔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취했어, 이제 그만 가자.”힘겹게 송문수를 일으켜 세우던 하지수는 하도경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도경 씨는
친구인 계지원이 아니라 자신에게 물어볼 게 있다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일단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비웃지 않겠다고 약속해.”“뭔데 그래?”“나 지수한테 다시 프러포즈하려고.”망설임 없이 말하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제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송문수가 하지수한테 다시 프러포즈를 하다니, 예수진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표정은 왜 그래, 내가 프러포즈한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저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바로 입을 다물며 물었다.“너 진심이야?”“당연하지.”“진짜 지수랑 잘살아 보려고?”“응.”“밖에 나가서 이상한 짓도 안 하고?”도무지 송문수를 믿을 수 없었던 예수진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안 한다니까.”“어떻게 장담하는데.”“어떻게 하면 믿을래?”“남자들이 하는 말은 믿는 게 아니랬어.”제가 무슨 말을 해도 예수진이 믿지 않을 것 같아 송문수는 한숨을 쉬며 큰 용기를 내어 솔직한 마음을 고백했다.“나 감옥에서 나온 뒤로 여자들 만난 적 없어.”“뭐?”“그러니까 지수랑 우연히 한 거 말고는 여자 만져본 적도 없다고.”“진짜?”“내가 뭐하러 널 속여.”“그럼 맹세해, 거짓말하면 평생 남자 구실 못하는 거야.”자꾸 되묻는 것도 슬슬 짜증 나는데 저런 말까지 하는 예수진에 송문수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못하겠어?”“한다 해, 내가 한 말 다 진짜고 만약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으면 난 이제 남자 아니야.”“대박이다, 송문수.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송문수가 맹세를 하자마자 예수진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나 좀 도와줘. 전에 지수가 나랑 결혼한 건 지수를 위한 결혼이 아니었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지수가 마음에 들어 할만한 결혼식을 하고 싶어.”“진작 그랬어야지.”“나는 이런 쪽엔 워낙 소질이 없잖아, 낭만적인 것도 잘 모르고.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생각 좀 해줘.”송문수는 멋쩍은
“어머, 미리 준비하는 거야?”예수진이 또 장난을 치며 놀리자 하지수도 멋쩍게 웃어 보였다.“지수 씨도 아이 가질 마음 있으면 되도록이면 빨리 가져요.”“네, 그래야죠.”“우리 셋 다 술 못 마시게 됐으니 그냥 물이나 마셔요.”아무것도 마시지 않으면 식사가 제대로 끝난 것 같지 않았던 예수진은 물이 담긴 컵을 들어 올렸다.“우리 다...”다 순산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려 했는데 아직 임신을 하지 않은 하지수 때문에 멈칫하던 예수진은 이내 말을 바꿨다.“우리의 순산을 위하여! 물론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르는 지수 아이도 포함이에요.”“다들 원하는 일 다 이루길 기원할게요.”거기에 소이연이 한마디 덧붙이지 예수진은 웃으며 말했다.“역시 배운 사람이라니까요.”“그럼 다들 원하는 거 다 이루고 앞으로 호호 할머니가 될 때까지 서로의 가장 좋은 친구로 남길 기원하면서 우리 건배 다시 해요!”소이연과 하지수도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하며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그 뒤로 식사 자리는 한참 동안 이어졌는데 소이연, 하지수, 예수진은 진작에 식탁을 벗어났고 술을 마시는 남자들만 거실에서 예능을 보며 떠들고 있었다.오랜만에 봐도 전혀 어색함 없이 수다를 떨어대던 남자들은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말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서로 번갈아 가며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지만 취하기 전까진 집에 가지 않기로 다들 약속이나 한 건지 그들은 끊임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그 넷 중에 가장 먼저 항복을 외친 건 육현경이었다.얼굴은 원숭이 엉덩이처럼 빨개져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를 아들 육민이 힘겹게 부축하며 나갔다.소이연도 육현경이 그토록 취한 모습은 처음 보지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신났을 그를 알기에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아쉬웠다.그가 친구들을 만나 신난 것처럼 소이연도 사실 하지수와 예수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남편이 저렇게 인사불성이 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육민이 육현
“나는 지금 하연이 임신했을 때랑은 완전 달라요.”“성별이 다르면 입덧도 다르다던데.”소이연은 현재 임신 중인 예수진과 아이에 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그래요?”“가서 검사 안 해봤어요?”“당연히 검사해봤죠.”성격이 급했던 예수진은 진작에 아이의 성별이 궁금해 병원을 찾아갔었다.“그런데 매번 갈 때마다 돌려 말하면서 나한테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안 보여줘요. 답답해 죽겠다니까요 정말.”“하하하.”그럴 때마다 예수진의 표정이 얼마나 웃길지 상상하던 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아들을 원해요 아니면 딸이 더 좋아요?”“당연히 아들이죠.”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대답하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들이 더 중요하다 그런 거예요 설마?”“제가요? 그 반대죠 완전히. 지원 씨가 딸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매일 둘이 꼭 붙어 있는다니까요. 그거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나도 아들 낳아서 계지원 열 받게 하려고요.”역시나 일반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예수진이 웃겨 소이연은 이번에도 웃음을 흘렸다.“아들인지 딸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꾸만 딸 같아요.”“임산부의 촉은 보통 틀리지 않죠.”“또 아빠한테만 달려가겠네요.”“전생에 얼마나 잘 놀았으면 딸을 이렇게 줄줄이 낳아요. 다 키워야겠네.”“무슨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요.”한마디에 한 번씩 한숨을 쉬며 말하는 예수진에 소이연과 하지수 모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언니는 배 속의 아기가 남자 같아요 여자 같아요?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난 다 상관없긴 한데 솔직히 딸이 갖고 싶어요.”“딸은 안돼요. 딸 낳으면 오빠가 계지원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걸요. 오빠랑 언니 둘 다 미모가 이렇게나 출중한데 딸 낳으면 얼마나 이쁘겠어요. 오빠가 죽고 못 살죠 아주.”“...”소이연은 예수진의 말이 그다지 신빙성은 없어도 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어쨌든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그건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축하드려요!”제 아내가 또 남사스러운 말을 할까 걱정됐던 계지원은 발 빠르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그래요, 정말 축하해요!”곧이어 다들 축하하자 하도경은 참지 못하고 육현경을 놀려주었다.“육현경, 아직 안 죽었다? 여행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임신이야. 문수보다 낫네, 문수는 지수 씨랑 저렇게 오래됐어도 아무 소식도 없는데. 너 진짜 어디 문제 있는 건 아니지?”“입 다물어.”“내 실력 의심하는 거야 지금?”“뭐래.”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하도경의 발언에 송문수는 어이없다는 듯 화를 냈다.“솔로인 너는 나 비웃을 자격 없거든. 나는 결혼이라도 했지 너는 있는 게 뭐야?”“뭐?!”“우리 중에 너만 솔로야. 분발해 하도경.”이미 말문이 막힌 하도경을 향해 송문수가 한마디 더 하자 하도경은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닥치고 마셔, 오늘 내가 너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먹일 거야.”“누가 쓰러질지는 두고 봐야지.”서른 살 넘게 먹은 사람 둘이 아이처럼 싸우는 것도 그들의 일상인지라 그들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때 진정한 예수진이 소이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오빠가 그거 안 하고 했어요?”“네?”“아니, 그렇게 빨리 애 갖고 싶어 하진 않을 것 같았는데. 아직 제대로 못 누렸잖아요.”예수진이 알고 있는 육현경은 소이연과의 둘만의 시간을 한 일 년은 더 누려야 직성이 풀릴 사람이었기에 아까도 그녀는 소이연이 임신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두세 달밖에 안 됐는데 덜컥 임신을 해버리면 육현경은 만족을 못 할 게 분명한데.한편 이런 질문을 받은 소이연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둘의 신혼여행을 되돌아봤다.사실 신혼여행을 갔을 때부터 소이연은 아무리 급해도 안전조치는 꼭 하는 육현경에 의아해하고 있었다.둘은 합법적인 부부이니 아이가 생긴다 해도 아무런 문제 될 것도 없고 민이도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이 동생을 원한다고 했었는데 왜 굳이 그걸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그렇게 궁금해하다가 어느 날 참지 못하
“둘이 아무 소리도 없더니 할 건 다하네.”당연히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예수진이었다.“우리 지수를 그렇게 적극적인 여자로 만들고 송문수 대단하다.”제 친구 앞이라고 빼지 않는 송문수는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내가 매력이 좀 넘치잖아.”“적당히 해.”그 모습에 예수진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언니랑 지수는 왜 술 안 마셔?”워낙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던 예수진은 술도 아주 좋아하는데 본인은 임신 중이라 마실 수가 없으니 자꾸만 주변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었다.“이연이는 안돼.”“지수도 오늘은 안 돼.”제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송문수와 육현경의 대답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왜? 두 사람도 임신했어 설마?”“아니야.”얼토당토않은 말에 하지수는 다급히 부인했다.“그런데 왜 못 마셔?”“생리니까 못 마시지.”“송문수, 언제 이렇게 다정해졌냐? 지수 생리인 것도 다 알고 기특하네 좀.”예수진의 장난에도 기분이 좋았던 송문수는 아주 환하게 웃어 보였다.“이연 언니는 왜 못 마셔?”예수진은 이번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육현경을 보며 물었다.“아무튼 안돼.”“언니도 생리야?”그렇게 우연이 겹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는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뭘 자꾸 그렇게 물어.”“언니 어디 아파요? 나 놀래키지 말고 말 좀 해봐요.”육현경까지 말을 아끼니 깜짝 놀란 예수진은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육현경의 핀잔이었다.“넌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연이가 왜 아파!”“그럼 왜 못 마시냐고.”예수진의 질문에 입술을 말아 물며 소이연을 보는 육현경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예수진은 소이연을 신 모시듯 떠받드는 제 오빠를 보며 정말 한 사람을 바꾸는 건 사랑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도대체 뭘 숨기는 거야?”예수진이 끝까지 캐묻자 소이연이 할 수 없이 숨을 한번 들이마시며 답했다.“나 임신했
사실 하지수는 늘 송승우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몰랐었다.우수하지 않다고 하기엔 국가사업에 공헌할 정도로 대단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도 비비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그런데 송승우는 늘 고고한 척, 자신이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CEO들은 몸에서 돈 냄새가 난다면서 싫어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회사를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왔었다.그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마다 무의식인지 아니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뽐내며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내려 했다.이제 보니 가식적이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하도 가식적이어서 하지수는 이제 그가 짜증 날 지경이었다.“어릴 때 게임 할 때도 송승우는 옆에 앉아서 코드나 쳤고 우리가 예능 볼 때는 그런 조작된 건 안 본다면서 머리 나쁜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라고 비웃었어. 우리가 디저트를 먹으면 지능 떨어진다고 무시했고...”예수진은 송승우 때문에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쉴 새 없이 말했다.하지수와 다르게 정말 힘들어했던 그녀는 송승우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친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됐어, 그 사람 얘기 그만하자.”“너랑 문수만 잘 지내면 됐지, 송승우는 과거일 뿐이야.”“응.”이제 송승우한테는 조금의 감정도 남지 않은 하지수는 예수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때 도우미 하나가 와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주자 그들은 다 같이 테이블로 향했다.거기에는 하연이와 민이도 있었는데 민이는 육현경을 쏙 빼닮아 겉은 차가워 보였지만 사실은 동생을 아주 잘 챙겨주는 아이였다.물론 그의 다정함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 한해서만이었다.민이가 하연이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던 예수진은 감탄하며 말했다.“우리 조카가 결혼할 생각만 하면 난 벌써부터 가슴이 아파.”“제수씨도 아무 말 없는데 네가 왜 가슴이 아파.”장난을 치는 송문수의 말을 예수진 바로 맞받아쳤다.“언니는 당연히 괜찮겠지, 며느
예수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소이연은 얼굴을 붉혔다.“거봐요, 오빠는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그냥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거예요.”소이연의 반응에 예수진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대범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언니는 이제 오빠의 넘치는 사랑을 받을 일만 남았네요, 물론 침대 위에서요.”“그만 해요 수진 씨.”신나서 얘기하는 예수진에 못 말린다는 듯 웃던 소이연이 그녀를 타박하듯 말했다.“태교하는 사람이 자꾸 그런 생각 하면 어떡해요?”“아직은 그냥 핏덩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지수야,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평소에 문자 보내도 답장 늦게 하던데.”말을 하던 예수진은 임신한 뒤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계지원 때문에 요즘 부쩍 재미없어진 일상을 떠올리고는 서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그냥 회사일 처리하고 있었지. 얼마 전에 경영에 문제가 생겨서 회사 부도날 뻔했거든. 그래서 문수 씨랑 일 처리만 했어.”“송문수?”“걔가 회사 일을 한다고?”송문수가 일한다는 소리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그래, 안 믿길 거 아는데 진짜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문수 씨 정말 많이 변했어, 더 이상은 맨날 놀러만 다니던 망나니 아니야. 이번에도 문수 씨 덕분에 송씨 집안이 다시 일어서게 된 거야. 그리고 이연 언니랑 현경 씨도 많이 도와줬고.”하지수는 곧바로 소이연을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정말 고마워요 언니, 언니랑 형부 도움 아니었으면 저희 집안은 진작에 끝났을 거예요.”“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요 뭘.”“현경이가 안 그래도 문수 씨 많이 변했다는 말 하더라고요. 밤에도 전화해서 기획서 어떻냐고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래요.”“진짜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고요?”소이연까지 긍정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하지수를 바라봤다.“네가 바꾼 거야?”“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나이가 점점 드니까 본인이 알아서 바뀐 거겠지.”“송문수가 바뀐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