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진, 운 좋게 법의 제재를 피했다고 해서 매번 피해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도아린은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방우진은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기울이더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잡히더라도 넌 아마 보지도 못할걸?”“글쎄?”“흠.”방우진은 눈썹을 치켜올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20억 주면 생각해 볼게.”도아린은 비웃음을 흘리더니 오만한 표정으로 머리를 넘겼다.“너도 알다시피 난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야. 20억은커녕 50억이라도 쉽게 줄 수 있는데 문제는 내가 왜?”그녀는 덤덤하게 자리에 앉더니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도발하는 듯했다.“너 배지유의 앞잡이잖아? 아, 그나저나 다리 저는 앞잡이지.”“...”방우진은 봉투를 휘두르던 동작을 그만 멈추고 도아린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도아린은 그가 격분한 것을 보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내가 죽지 않는 이상 널 반드시 감옥에 집어넣을 거야. 증거는 이미 손에 넣었거든? 다시는 빠져나갈 수 없을 거야.”도아린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며 순간적으로 앞으로 몸을 던져 피했다.방우진이 휘두른 물건이 그녀에게 닿지 않자 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누른 채 땅에 쓰러뜨렸다.“오늘 널 저세상으로 보내주지. 이제 내 죄를 어떻게 물을 거야?”그는 봉투 안에서 벽돌을 꺼내 들더니 그녀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방우진! 귀신이 되어서도 절대 널 놓아주지 않을 거야! 넌 자손도 없이 죽게 될 거야!”도아린의 독한 저주에 방우진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그는 침을 삼키며 말을 바꿨다.“원수는 원수에게 갚는 거지, 배지유 그년한테 가서 따져.”방우진이 벽돌을 내리치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목을 가로채더니 벽돌은 도아린의 등 위로 떨어졌다.“아!”곧이어 누군가 그를 옆으로 차버리자 방우진은 정자 안의 탁자에 몸을 세게 부딪히며 땅에 쓰러졌다.“아가씨!”경호원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습니다.”
‘괜히 물어봤네. 이미 물어본 걸 취소할 수도 없고.”우정윤이 라이브 방송에서 산 얼룩 제거제를 가져오자 배건후는 이미 검은 얼굴 인형을 책상에 올려놨다. 그 인형은 도아린과 약간 비슷하게 생겼는데 노란색 후드와 검은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얼굴과 다리 색이 많이 차이 나는 것도 특징이었다.우정윤은 사용법을 배건후에게 보여줬다. 배건후는 심각한 얼굴로 얼룩 제거제를 잡은 채 마치 억 단위의 계약서에 서명하려는 것처럼 진지했다. 인형 얼굴을 한참 바라본 끝에 드디어 한 방울 짜냈다. 순간 투명한 액체가 인형 얼굴 위로 떨어졌다.배건후가 브러시를 들기도 전에 인형은 이미 그 액체를 흡수해버렸다.“...”“제가 해보겠습니다.”우정윤이 다시 액체를 짜내고 배건후가 바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두 쌍의 눈이 빤히 테이블 위 인형을 주시했다. 인형 얼굴의 커피 얼룩은 지워졌지만 원래 피부색도 함께 벗겨져서 마치 백반증이 걸린 것마냥 얼룩덜룩해졌다.“보너스 깎일 줄 알아.”‘리뷰 남기고 항의해야지.’회사를 나서던 배건후는 갑작스러운 두통을 느꼈다. 우정윤은 과로 때문일 거라며 며칠 휴가 내기를 권했다.가던 중 배건후는 머리가 찌르는 듯한 통증에 병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각종 검사를 마친 뒤 두통은 가라앉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의사는 신경성 두통일 가능성을 언급하며 통증이 다시 찾아오면 바로 검사받으라고 권했다.우정윤이 사모님한테 알리려고 하자 배건후는 거절했다.그는 밤새 두통이 없었고 다음 날 오후, 회의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았다.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배석준과 남궁유민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가자, 가면서 설명하마.”두 사람은 배건후의 차에 올랐다.배석준과 배지유가 함께 쇼핑하던 중 경찰이 배지유를 찾아와 협조를 부탁했다.그는 딸이 걱정되는 마음에 함께 갔지만 경찰서에 들어서자마자 배지유는 다시 나올 수 없게 되었다.배석준은 헛웃음을 지으며 눈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
도아린은 말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숙여 타자하기 시작했다. 배건후는 주머니에 넣은 손가락을 움켜쥔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제 돌아가서 또 무슨 짓을 한 거야?”‘또?’도아린은 메시지를 전송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녀의 표정은 덤덤하다 못해 거리가 느껴졌다. 도아린은 입꼬리를 살짝 휘어 올리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잖아.”그녀에게 묻는다는 건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배건후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 안에서부터 화가 잔뜩 난 아버지를 떠올리며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가 지유를 애지중지하시는 거 너도 알잖아? 며칠만 사이좋게 지내.”“그건 네 가문의 일이야.”배건후는 눈썹을 찌푸린 채 반박하려 했지만 남궁유민이 다가오더니 그를 데려갔다.“개나 소나 감히 내 딸과 엮이려고 하다니! 지유야, 울지 마라. 네가 울면 아빠는 가슴이 아프단다. 남궁 변호사도 왔으니 곧 나갈 수 있을 거야. 아빠가 반드시 해결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하지만 오빠가...”“감히 남의 편을 들었다간 아예 직책을 빼앗아버릴 거야.”배건후는 들어서자마자 그 한마디를 들었다. 그는 분노로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눈가에 눈물이 고인 아버지를 지나 울면서 자신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배지유에게 시선을 옮겼다.남궁유민은 배건후에게 의자를 빼주었다.“말해봐, 이번엔 또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배건후가 자리에 앉았다.“오빠...”배지유는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배석준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이게 무슨 태도냐, 지유가 무슨 짓을 했겠어? 우리 지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도아린이 마음대로 엮어대는 거야!”배건후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두드리며 울고 있는 배지유를 빤히 바라봤다.배석준은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다. “동생이 울고 있는데 오빠라는 게 그냥 보고만 있니?”“방우진이 다시 체포되었습니다.”남궁유민이 설명했다. “살인 미수 혐의로 고소당했습니다.”순간 배건후의 눈빛
“말해 봐야 소용 있어?”도아린은 천천히 밀크티 토핑을 씹으며 평온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너한테 얘기한다고 해서 지유의 카드를 정지시키거나 외출을 금지할 수 있어?”“난 이미 지유한테 기회를 줬어. 근데 전혀 뉘우치지도 않고 점점 심하게 행동하잖아.” 도아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네가 오빠로서 지유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대신 통제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게 맞다고 생각해.”배건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열었다. “너 그렇게 지유가 미워? 꼭 지유를 망신당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건후야...”“우리 부부끼리 하는 말에 끼어들지 마.”육하경이 말을 꺼내려 하자 배건후가 단호하게 끊어버렸다.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알고 있는 그는 다들 배지유의 편을 들며 도아린을 괴롭히는 모습에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도아린의 얼굴에 서운함이나 실망하는 기색이 엿보일 줄 알았지만 마치 제3자인것마냥 아무런 표정도 없이 덤덤했다.도아린이 불쌍해진 육하경은 배건후가 자신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아린을 위해 말을 꺼냈다. “건후야, 아린 씨가 여기 왜 왔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비난부터 하는 거야?”배건후는 비웃음을 흘리더니 육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우진이 널 다치게 한 건 지유를 대신해 보상할 거야. 배씨 그룹 연말 행사와 접대 장소를 모두 세인트존스 호텔로 지정할 테니까 다른 요구 있으면 말해.”그러고는 도아린을 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만족하겠어?”도아린은 밀크티를 원샷하더니 빈 컵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넌 내가 배지유를 고발한 게 하경 씨 때문이라고 생각해?”“아니야?” 배건후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 “너와 지유 사이가 나쁜 걸 왜 먼저 나한테 말하지 않고 육하경한테 알렸겠어? 육하경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야?”육하경은 옆에서 급히 해명했다. “그런 게 아니야, 오해야. 유 경관이 방우진이 다시 체포되었다고 알려주면서 나한테 비밀을 말하는 대신 보석을 조건으로 연락
배건후는 그제야 반응하고 물었다.“뭐라고? 누가 너를 협박했다는 거야?”육하경이 답했다. “방우진이 죽이려고 한 사람이 바로 아린 씨야. 진씨 가문의 보디가드가 제때 도착하해서 다행이지...”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더니 빠르게 도아린을 쫓아갔다.배건후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오른 채 배석준을 노려보았다.“처음부터 알고 계셨어요?”그는 단호하게 말했다.배석준은 오히려 당당하게 대답했다. “남궁이 그녀가 증인이라고 말할 때 너도 자리에 있었잖아. 난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배건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담배를 태우려 밖으로 나가자 배석준은 그의 뒤를 따르며 다그쳤다. “자기 아내도 제대로 관리 못 해서 지금 이 사달이 나게 했어? 지금 네 동생이 울고 있는데 하나도 걱정 안 되는 거니?”“아버지...”배건후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시더니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확실히 지유가 잘못했어요.”“네 동생이야.”“내 동생이라면 살인을 사주해도 되는 건가요?”“죽지 않았잖아.”배건후는 사늘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배석준은 잔뜩 화가 치밀어오른 채 말을 이어갔다. “지유는 아직 아이야. 나쁜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너무 화가 나서 교훈이라도 주려고 했던 것뿐이잖아. 그 정도 분별은 있는 아이야. 도아린은 지금 멀쩡하잖아. 다치지도 않았고.”배건후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배석준은 아들의 눈빛에 불편함을 느끼며 손을 휘저었다. “네가 어떻게 하든 좋으니 빨리 도아린에게 고소를 취하하라고 해. 우리 지유가 울잖아. 아직도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거야!”말을 마친 그는 다시 심문실로 들어가 배지유를 위로했다.도아린은 다른 심문실에서 방우진을 만났다.방우진은 한껏 오만한 태도로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방금 비밀이 별로 흥미가 없다면 다른 비밀 하나를 말해줄까? 대신 나를 빼내 주겠다고 약속해.”이번엔 도아린을 바라보며 말했다.도아린은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도아린은 배건후가 그의 어머니 주현정의 건강을 빌미로 자신을 위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주현정은 그의 어머니이자 배지유의 어머니다.그런데 왜 배씨 가문의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을 주현정의 병세를 핑계 삼아 그녀한테 계속 양보를 구하는 거지?그녀가 마음이 약해서? 아니면 만만해서?도아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지만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차갑고 냉랭했다.“만약 오늘 피해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사람도 네 어머니의 병세를 신경 썼을까?”배건후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지유는... 지유는 분별력이 있는 애야.”“그러니까 지유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거네.” 도아린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네 어머니의 건강을 빌미로 지금 날 억누르려 하는 거야?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배석준이 복도로 다시 나왔을 때 배건후는 텅 빈 복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싸늘하게 식은 공기는 그의 주위를 무겁게 감싸고 있었다.도아린은 차에 돌아와 앉았다. 옆에 있던 보디가드는 육하경을 잠시 쳐다보더니 망설였다.육하경이 차에서 내리려 하자 도아린이 이내 그를 불러 세웠다. “제 친구예요. 따로 숨길 필요 없어요.”“네. 조사한 바로 도정국은 자신 명의로 되어 있는 공장 하나를 도유준에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주문이 없는 공장이라 곧 망할 것 같습니다. 또 도유준에게 2억 원의 카드를 줬지만 도유준은 거의 다 써버렸습니다.”도정국은 탐욕스러운 인간이라 아무리 자신의 아들이라 해도 결코 자신의 재산을 쉽게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거의 망해가는 공장을 갓 사회에 나온 도유준에게 넘겨 자신의 사업을 위해 헌신하게 하기 위한 속셈이었다.그러나 자격지심과 허영심으로 가득 찬 도유준은 이나윤과 결혼하기 위해 돈을 흥청망청 쓰다 보니 20억은은커녕 200억이 있어도 부족할 정도였다.“도정국에게 선물 하나 준비해 줘요.” 도아린이 담담하게 말했다.육하경은 창밖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그녀의 계획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아까 경
도아린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진씨 가문에서 자신과 배씨 가문의 관계가 겉보기와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뒷일을 대비해 준 것 같았다.왜일까? 그녀는 그저 윤명희를 응급 치료한 것뿐이었고 배지유도 구급차를 부르며 도와주었는데 왜 진씨 가문에서 배지유에게는 아무런 보답도 하지 않는 거지?육하경은 도아린의 눈에 서린 의문을 보더니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사모님께서 아린 씨가 잃어버린 딸이라고 생각하세요.][전 아니에요.] 도아린이 답했다.[유전자 검사 결과도 아니라고 나왔어요. 하지만 아린 씨한테 애정을 쏟으면서 병세가 빠르게 호전됐어요. 어쩌면 아린 씨가 사모님께 약일지도 모르죠. 만약 호의를 거절하면 사모님께서 속상하실 거예요.]도아린은 첫 문장을 몇 번이고 읽었다. 진씨 가문이 자신 몰래 유전자 검사까지 했다고? 언제? 자신이 그들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잘해주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배지유가 가장 두려워하는 진씨 가문이 배씨 가문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그러나 도아린은 진씨 가문의 진심 어린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윤명희의 배려는 단순히 돈을 퍼붓고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그녀가 불공평한 대우를 받을 때마다 곁에서 지지해 주었다.도아린은 윤명희가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진씨 가문이 배지유와 자신을 다르게 대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어려웠다.[배지유 역시 진씨 가문에 도움을 준 사람인데 왜 배지유에게는 그렇게 냉정한 걸까요?] 도아린이 육하경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그건 드레스 때문이에요.]도아린이 계속해서 묻기도 전에 차는 이미 어린이 병원 앞에 멈췄다. 육하경은 먼저 차에서 내리더니 도아린의 차 문을 열어주었고 두 사람은 서로 미소를 나눴다. 도아린은 그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배지유가 그 드레스를 빼앗으려 한 건 단순히 입어보려는 게 목적이 아닌 진씨 가문에서 도아린을 딸로 입양하려는 걸 방해하려는 것이었다. 비록 그녀가 친딸이
병실에 산처럼 쌓여 있던 선물 상자들은 모두 사라졌고 꽃바구니도 치워졌으며 시든 꽃다발은 이미 버려졌다. 병실은 한층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잠깐 나갔다 올게.” 육하경은 율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병실을 나섰다.도아린은 보디가드에게 쉬라고 하고 율이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블록을 맞추기 시작했다.“유 선생님께서 율이 보러 오셨어?”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물건들은 다 유 선생님께서 가져갔어?”율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에 든 작은 부품을 응시하며 말했다. “유 선생님께서 다른 친구들이랑 같이 나눠야 한다고 가져가셨어요. 율이는 혼자 다 먹을 수 없으니까요.”어린아이가 어찌나 착한지. 자신도 먹고 싶었을 텐데 양보하도록 강요받다니.도아린은 구겨진 도면을 보더니 한편으로 조립할 수 있는 부품을 찾으며 자연스럽게 보육원에 대해 물어보았다.“며칠 전, 보육원에 갔을 때 열 살이 넘은 아이가 입양됐다는 얘기를 들었어.”“지수와 지희에요. 율이보다 병이 더 심했어요. 배가 이렇게 커졌었거든요...” 율이는 자신의 배 앞에서 크게 원을 그렸다.도아린은 손이 덜덜 떨리더니 부품을 상자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그녀는 애써 감정을 다스리며 율이를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입양될 때는 병이 나았어?”율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았어요. 수술할 때 너무 아픈지 지수는 목이 완전히 쉬어버렸어요. 간호사 이모가 버린 수건에는 피가 엄청 묻어 있었어요.”마침내 두 부품이 하나로 맞춰지며 율이는 도아린에게 조립한 것을 보여주며 칭찬을 바랐다.그러나 도아린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보고 율이는 그녀의 목을 꼭 껴안았다.“율이는 아주 용감해요. 율이는 아픈 것도 무섭지 않아요. 아린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도아린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콧등이 시큰해졌다. 그녀는 율이를 꼭 끌어안고 턱을 율이의 머리 위에 얹었다.“그럼 지희도 보육원에서 수술했어? 많이 아팠대?”율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