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서는 옆문으로 나가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임구택이 돌길 한쪽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얇은 흰색 스웨터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는 임구택은 벤치를 등지고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그의 옆모습의 윤곽은 짙고도 아름다웠다.지극히 평범한 자세였지만 임구택이 하고 있으니 어딘가 나른하고 귀티가 배어 있어 보였다.구은서는 걸음을 늦추고 멀지 않은 곳에서 그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소년 시절의 앳된 모습을 벗어던진 남자는 진중함은 물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숙한 남자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어른이 되었다. 무표정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을 선사하는 어른 말이다.구은서는 예전에는 소년 시절의 임구택에게만 호감을 가졌다면, 이제 그녀는 임구택이라는 이 남자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그녀는 앞으로 임구택보다 더 나은 남자를 절대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그를 다른 여자에게 양보하지 않을 거라고 마음먹었다.임구택은 휴대폰을 쳐다보다가 누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그렇게 적게 입으면 춥지 않아?”구은서는 아무 일도 없었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임구택은 눈을 내리깔고 휴대폰으로 문예 야회를 검색하며 말했다.“괜찮아.”“네가 나를 보자마자 피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야.”구은서는 임구택 옆에 앉았다.임구택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오늘은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온 거니까.”그의 말에 구은서는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난 손님이고, 그럼 소희는?’“엄마가 하도 같이 가자고 하셔서. 네가 날 보고 기분 나빠할까 봐 안 오려고 했는데, 나도 오랜만에 아주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왔어.”구은서가 말했다.“난 기분 나쁘지 않아. 그리고 너도 이젠 나랑 소희 씨 마음을 추측할 필요도 없고.”임구택은 미적지근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구은서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싫어요. 전 야회를 볼 거예요.][야회가 저보다 더 좋아요? 선택하세요. 저예요? 야회예요?][야회는 설날 밤에만 볼 수 있는데 구택 씨는 꼭 오늘이 아니어도 매일 볼 수 있잖아요.]“••••••”순간, 그녀의 답장에 임구택은 뭐라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야회도 보고 채팅도 하니 시간은 점점 11시가 되어갔다. 소희는 할아버지와 함께 새해 카운트다운을 세고 싶어서 임구택을 먼저 자게 할 심산이었다.[전 안 졸려요. 소희 씨가 언제 자면 저도 언제 잘게요.]임구택에게서 문자가 왔다.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마도 구씨네 가족이 이제 막 집으로 가는 것 같았다.소희는 매년 설 카운트다운을 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번엔 임구택과 문자를 주고받은 덕분에 예전보다 더 쉽게 밤을 지샐 수 있었다.12시가 거의 가까워지자 오 씨는 폭죽을 터뜨릴 준비를 했다. 어느새 야회 사회자도 설 카운트다운을 하며 새해를 맞이하기 시작했다.밖에서는 폭죽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텔레비전에서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2가 되기 바쁘게 소희는 임구택으로부터 계좌이체를 받았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숫자 뒤에 붙은 0을 샜다. 몇 번이나 금액을 세어보던 소희는 경악했다.[이건 뭐예요?][세뱃돈.]띠링-그때, 임구택에게서 문자가 또 하나 날라왔다.[세뱃돈을 줬으니 저를 점점 더 좋아해 주세요.]소희는 오글거림을 참지 못해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애정 표현을 할 때도 이렇게 오글거리는 편이구나.’소희는 그가 보낸 문자를 보며 피식 웃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씨 노인이 한마디 했다.“왜 그렇게 실없이 웃어?”소희는 이내 휴대폰을 감추고 다급히 변명했다.“새해니까요. 새해여서 기분이 좋은 거죠.”“내가 보기에 임씨 가문 그 자식 때문에 이렇게 기뻐하는 것 같은데?”강씨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식 웃었다. “가서 자. 나랑 함께 있어 줄 필요 없어. 내일 아침엔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안 졸려요.”소희는 고개를 가
정월 초하루.아침 일찍부터 밖에서 귀청이 터질 것 같은 폭죽 소리에 소희는 일찍 잠에서 깼다. 전날 임구택과 수다를 떨다가 새벽 2시에야 잠을 잤으니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이기 때문에 그녀는 기껏해야 겨우 3시간 남짓 잔 것이다.소희는 너무 졸린 나머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녀는 귀가 따갑게 들려오는 폭죽 소리에도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늦잠을 잤더니 다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햇빛이 나무창을 통해 온 집안에 쏟아졌고, 바닥에는 등불의 붉은 그림자가 비쳤다. 창밖에는 몇 그루의 대나무들이 축축 드리워져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온 세상이 고요한 잠에 빠진 것만 같았다.띠링- 띠링-침대 머리맡에 뒀던 그녀의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모두 카톡 단체방에서 온 메시지들이었다.조백림이 만든 단체방에서는 기프티콘을 나눠주고 있었고, “파워맨”이라는 낯선 단체 채팅방에서도 수십 개의 메시지가 울렸다.소희는 자신이 언제 이 단체 채팅방에 가입한 것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긴가민가하는 마음에 단체방에 한 번 들어가 보니 그제야 모두 서인의 샤부샤부 가게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임유림이 단체 채팅방을 만든 김에 그녀도 요청한 것이다. 처음에는 온갖 새해 인사말들로 화면을 빽빽하게 채웠었는데 임유림이 먼저 기프티콘을 보내면서부터 평화롭던 채팅방이 난리가 나기 시작했다. 서로 금액이 더 큰, 더 좋은 기프티콘을 보내겠다고 앞다투어 난리를 피웠다.[사장님, 유림… 두 사람 대체 뭐 하는 거예요?]임유림과 서인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엄청난 금액의 기프티콘을 보내기 시작했다.이문을 포함한 채팅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전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임유림이 서인에게 문자를 보냈다.[아직도 나랑 비기는 거야?][누가 너랑 비긴다고 그래? 난 사장이니까 당연히 내가 모두에게 선물을 주는 게 맞다고.][감사합니다, 사장님.]이문을 포함한 직원들은 서둘러 감사 인사를 표했다.하지만 임
“소희 씨는요? 소희 씨는 제가 안 보고 싶어요?”임구택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영상 통화 가능해요?”“할아버지가 절 부르세요.”소희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묵묵히 대꾸했다.임구택은 잠시 침묵을 지킨 뒤 천천히 말했다.“할아버지한테 전화 바꿔드릴 수 있어요? 새해 인사 좀 드리려고요.”“됐어요. 설에 할아버지를 놀랠 킬 일이 있어요?”소희가 말했다.“내년에 할아버지께 직접 인사드리러 갈게요.”“그래요.”소희는 무심결에 대답하고는 잠시 주춤했다.“이만 끊을게요.”“네.”임구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베이비, 사랑해요.”임구택의 말에 소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먼저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고 나서야 소희는 그 몇 초간의 침묵이 사실 임구택이 자신이 대답하기를 기다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것을 약간 후회했다.소희는 침대에 엎드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깥은 날씨도 좋고 햇살도 따스했다. 그녀는 처마 밑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등불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 머릿속은 온통 임구택으로 꽉 차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깊은 눈동자, 그가 말하는 모습, 사랑한다고 말하는 말투까지… 소희는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갑자기, 그녀는 그가 그렇게 보고 싶어졌다.•••••잠시 후, 소희가 일어나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0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좀 이상했다. 할아버지가 뜻밖에도 그녀를 깨우지 않았던 것이다.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갔는데 복도를 지나가다 오 씨가 홍매화 화분을 들고 오는 걸 발견했다. “아가씨, 일어났네요? 배고프죠? 부엌에 닭고기 수프와 만두가 있어요.”“네.”소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홍매화를 바라보았다. “꽃이 피었네요?”“네. 어젯밤에 꽃을 피웠는데 어르신께서 아가씨가 홍매화를 좋아하신다고 아가씨 방으로 보내라고 하셔서요.”“할아버지는요?”“정원에 계십니다.”“오늘은 왜 이렇게
소희는 상품권을 주머니에 넣었다.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아 고용인이 끓여준 만두를 먹었다. 소희는 식초 접시 두 개를 가져다가 강씨 노인에게 한 접시 건넸다. “할아버지, 저랑 같이 만두 몇 개만 더 드세요.”강씨 노인은 코를 찌르는 식초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앞으로 매년 설마다 저희끼리 이렇게 보내요.”소희의 말에 강씨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내년엔 네가 임씨 가문에 가서 설을 쇠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그의 말에 소희는 정색했다.“아니요. 제가 시집을 가든지 말든지 전 매년 설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쇨 거예요.”“모든 여자아이들이 시집가기 전엔 다 그렇게 말하지. 하지만 정작 시집 가봐. 그게 네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도 알게 될 거야.”강씨 노인이 말했다.“할아버지, 절 몰라요? 전 제가 할 수 없는 일은 입 밖으로 내뱉지도 않아요.”소희의 말에 강씨 노인은 허허 웃었다.“그래, 알았어.”소희는 만두를 한 입 먹었다.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할아버지에게 속아 넘어간 것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오늘따라 만두가 유달리 맛있구나.”강씨 노인은 즐겁게 웃었다.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소희는 강씨 노인과 함께 잠시 바둑을 두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바둑 한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다.요 며칠 소희가 집에 있던 탓에 강씨 노인은 기쁜 나머지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었었다. 아침에도 만두를 먹었기 때문에 오 씨는 특별히 점심에 담백하고 식욕을 돋구는 음식으로 준비했다.점심을 먹고 난 후, 강씨 노인은 뒤뜰 연못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 소희도 그의 뒤를 함께 따랐다.날씨도 좋고 기온도 높아서 연못가의 개나리는 이미 화창하게 피었다. 제법 새봄을 맞이하는 듯했다. 두 사람은 오붓하게 연못가에 앉아 햇볕을 쬐었다.오 씨는 소희가 추워할까 봐 특별히 화로에 불을 붙여 그녀 옆에 놓았다.강씨 노인은 낚시를 하고, 소희는 난로에 기대 불을 쬐었다. 그녀는 난로의 물이 끓어오르면 강씨 노인에게 차
강씨 노인은 소희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마치 그녀의 속마음을 다 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예전에는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는데 이번에는 왜 이러는 거야? 어째 점점 더 못나지는 거 같네. 난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 혼자 집에서 잘 지내고 있어. 게다가 요 며칠은 손님이 올 거라서 네가 집에 있어도 같이 있을 시간이 없어.”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서울로 돌아가면 바로 출근해야 해요. 그럼 그때 다시 전화할게요.”“그래.”저녁, 소희는 강씨 노인과 바둑을 두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자 그녀는 강씨 노인을 방으로 데려다준 후, 자신도 방으로 돌아갔다.오 씨는 등불을 들고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아가씨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마세요. 제가 어르신을 잘 모시고 있으니 아가씨는 일에만 열중하세요.”“할아버지, 수고 많으셨어요.”“수고라니요? 어르신과 함께 있으면 저도 마음이 편합니다.”오 씨는 등불을 들고 줄곧 소희를 문 앞까지 바래다주며 자상하게 웃었다.“밖이 추우니 아가씨는 얼른 들어가세요.”“네. 할아버지도 일찍 들어가 주무세요.”철컥-소희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무틀에 놓인 홍매화는 불처럼 붉게 피었고, 온 방 안은 은은한 매화 향기로 가득 찼다. 소희는 홍매화 사진을 찍어 아무런 문구도 없이 매화꽃만 확대해서 SNS에 올렸다. 잠시 후, 샤워를 하고 나온 소희는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누웠다.조백림, 황정아, 오진수 등이 소희가 올린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소희야, 네가 SNS를 올리다니, 1년이 지났더만 어른이 다 됐구나. 감동이야.]어느새 그녀가 올린 게시물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어쩐지 누군가 엉뚱한 사진을 올린다 했더니 알고 보니 소희였구나.][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정남이 단 댓글에 대댓글이 달렸다.[다른 인사말은 없어?][돈 많이 버세요.][그래. 난 이 말이 제일 듣기 좋더라. 새
다음 날 아침, 소희는 강씨 노인, 오 씨와 작별을 고했다. 강씨 가문 운전사가 그녀를 공항까지 태워다 주었다.9시 정각, 소희는 검은색 코트를 입고 VIP 통로를 빠져나오는 임구택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늘씬한 몸매에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못 본 지 며칠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아주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임구택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는 두 팔을 뻗고 그녀를 품에 꽉 껴안고 한참 동안 놓아주지 않았다.소희는 힐끔 두 사람 쪽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을 보더니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언제 가요?”“원래 10시 비행기였는데 지금은 못 가요." 임구택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난번 그 호텔로 갈까요?”그의 말에 소희는 귓불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녀는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그의 눈에 비친 절박함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져 거절할 수가 없었다.지난번 호텔의 스위트룸. 문을 닫자마자 임구택은 현관 벽에 소희를 밀쳤다. 그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조용히 물었다. “제가 보고 싶었나요?”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소희의 이마에 키스했다.소희는 그의 키스에 말문이 막혀 두 팔을 그의 목덜미에 걸쳤다. 임구택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소희 씨가 없는 동안 전 잠을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요. 자도 꿈에는 온통 소희 씨뿐이었어요. 소희 씨, 진짜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요.”소희는 촉촉한 눈망울을 하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임구택을 꽉 감싸 안고 끊임없이 키스를 했다.••••••소희는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깨어났다. 깨어나 보니 시간은 오후 1시였고 임구택은 어디로 갔는지 방에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몸이 나른하여 다시 자리에 누웠다.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고 베이지색 얇은 셔츠를 입은 임구택 들어와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소희 씨, 이제 일어나요.”얇은 담요를 뒤집어쓴
임구택은 그녀를 데리고 3층 침실로 갔다. 침실에는 커다란 발코니가 있었고, 발코니에 서면 파리의 아름다운 야경과 멀리에서 로마사 건축 양식의 대성당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겼다.“샤워하러 갈래요?”임구택이 소희에게 백허그를 하며 물었다. 소희는 몸을 돌려 임구택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발뒷꿈치를 들고 임구택에게 입을 맞추었다.임구택은 곧 그녀를 끌어안고 욕실로 향했다.욕실에서 침대까지, 소희는 어렴풋이 자신이 아직 운성의 스위트룸에 있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었다. 장장 열 몇 시간 동안 지구의 반을 건너 파리로 왔는데 단지 장소만 바뀐 채 두 사람은 서로를 쟁취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 같았다.이런 생각에 소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임구택은 그런 그녀의 팔을 잡고 그녀를 침대에 눕히며 말했다.“왜 웃어요?”소희는 그를 빤히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말해줘요. 같이 웃자고요.”임구택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농담을 하며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자신을 설레게 한 소희의 보조개도 한 입술에 삼켰다.*둘은 파리에서 하루를 보낸 뒤, 노르웨이로 날아가 오로라를 함께 봤다. 눈 속을 달리고, 한밤중에 순록 썰매를 탔다. 도심에서 멀어지니 세상 모든 것이 깨끗해 보였다. 두 사람은 이곳에 온 다른 연인들처럼 포옹하고 키스하며 연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기 바빴다.노르웨이를 떠난 임구택은 소희에게 도박의 통쾌함을 맛보게 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두 사람은 오후 내내 도박장에 머물렀고, 저녁 무렵 소희는 고급 VIP룸에서 나와 화장실을 가려고 중간 복도를 지나갔다. 한 독일 남자가 복도 창가에 서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는 소희를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온몸이 팽팽해지며 소희의 뒷모습을 빤히 노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Bach.”그의 옆에 있던 금발의 한 여자가 소희 쪽을 바라보았다. 예쁜 여자한테 자연스럽게 적대적인 감정이 들었다.독일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희가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