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이신은 곧바로 설명했다.“최근 회사 내부 인사이동으로 제가 최이석 대신 이 프로젝트를 맡게 됐어요. 앞으로 귀사와의 협상을 제가 담당하게 될 거예요.”유진은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저도 담당자님처럼 막 이 프로젝트를 인수한 참이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맞는 것 말씀이세요.”백이신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귀사에서 보내준 협업 제안서는 이미 검토해 봤어요. 전반적으로 아주 잘 준비하셨더군요.”“다만 몇 가지 조율할 부분이 있어서, 오늘 이렇게 만나 얘기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죠.”백이신은 눈앞의 여성이 젊음에도 불구하고 말투와 태도가 당당하고 매끄러워, 어쩐지 왜 이 나이에 부서를 맡고 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게다가 구은정의 특별한 당부도 있었기에, 그는 더욱 성의 있고 공손하게 대화에 임했다. 말투에는 조심스러운 배려와, 은근한 호감이 배어 있었다.유진은 차분히 말했다.“저희 영업팀 책임자인 임혁준 본부장남과, 이번 제안서를 만든 진소혜 씨도 함께 왔어요. 그러니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소혜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이름이 언급되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신을 차렸다.“네, 담당자님.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저한테 물어보시면 돼요!”한 시간이 지난 후양측은 협업 방향에 대해 기본적인 합의를 마쳤고, 백이신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저희 쪽도 별다른 문제는 없어요. 저희 사장님께 최종 승인만 받으면 바로 계약 체결 가능하고요.”소혜는 물론, 영업팀의 임혁준 본부장조차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토록 어렵게만 느껴졌던 프로젝트가, 어쩌다 이렇게 순식간에 결정된 걸까?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저는 담당자님의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백이신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벌써 점심시간이네요. 제가 식사 자리 준비할게요. 시간 괜찮으시면 함께하시죠.”유진은 정중히 고개를 저었다.“돌아가서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다음에 계약서 체결되면 제가
유진은 구은정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하고,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구은정 사장님, 이거 저한테 뇌물 요구하시는 건가요? 최이석의 최후, 잊으셨어요?][그렇게 쳐도 괜찮아. 너만 날 고발 안 하면 되니까.][그건 모르는 일이죠.][넌 나 고발 못 해. 내가 장담해.]유진은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뛰었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진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그렇게 힘들게 따낸 성과, 쉽게 놓칠 리 없잖아?]이에 유진은 푸흣 웃음을 터뜨렸다.[회사를 위해 내 몸 바쳐 희생이라도 하라는 말이에요? 사장님,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희생은 안 돼. 그런 건 나도 못 봐.]유진은 할 말을 잃었고, 이날 대화는 더 이상 이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도무지 사업가 같지 않아. 입만 열면 감정이 폭발해.’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유진은 콧소리를 흘리며 휴대폰을 옆으로 밀어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또다시 울리는 알림음. 보지 않으려 했지만,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해져 결국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그만 놀릴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난 기꺼이 한 일이야. 오늘 저녁엔 네가 좋아할 만한 요리 해둘게. 새로운 음식 하나 또 배웠거든.]이번에는 단순히 얼굴만 붉어진 게 아니라, 가슴 한가운데가 데인 듯 뜨거워졌다.다른 차 안, 진소혜와 정현준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혜는 내내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고, 현준은 운전대를 잡은 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그래도 구씨그룹 프로젝트 따낸 건 좋은 거잖아요. 소혜 씨 기획안도 인정받은 거고, 노력한 보람이 있었던 거죠.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소혜는 분노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근데 결국 스포트라이트는 전부 임유진한테 갔잖아요!”현준은 담담히 말했다.“그건 어쩔 수 없지. 원래부터 그 사람은 팀장이니까, 성과가 나면 당연히 앞에 서게 돼요. 그리고 그 프로젝트, 소혜 씨가 먼저 팀장님한테 넘긴
수요일 저녁 7시 정각 소희는 전위 호텔 앞에 나타났다.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리자 소희는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아빠 소정인이었다. [소희야, 아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차가 좀 막히네. 먼저 들어가있어.]소희는 발걸음을 늦추며 이따 임구택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까 생각하고 있었다.결혼 3년 동안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임구택이 이 결혼을 동의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부한다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그렇다고 임구택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과거 소씨 가문의 회사가 위기를 맞자 뻔뻔하게 임씨 가문을 찾아가 혼인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였고, 당시 임씨 가문의 장남은 이미 결혼을 한 터라 자연스레 그 약속은 차남 임구택이 이행하게 되었다. 그가 내키지 않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임씨 가문은 당연히 소씨 가문에 좌지우지 당하지만은 않았다. 예물로 50억 원을 건네어 소씨 가문이 난관을 이겨내게 도우면서도 조건을 제시했다. 3년 뒤에 이 혼사가 자동 해지되는 것으로.3년 전, 그녀는 아직 법정 결혼 연령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대리인이 가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결혼하자마자 임구택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결혼 해지를 석 달 앞두고 돌아왔다. 결혼을 거부한다는 태도가 너무나도 뚜렷했다.하필이면 오늘,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 때문에 그녀를 앞세워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소희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생각하였다. “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 아내에요!”그가 그녀를 거들떠보기나 할까?듣건대 임구택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성의 유명한 악질이었다고 한다. 강성의 흑과 백을 모두 통솔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매섭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지만 며칠 전 TV의 경제 채널에서 임구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명품 양복을 입고, 거만하면서도 우아하고 듬직해 보였다.그녀는
그의 손에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일을 마친 후 돈을 지불하다니. 그녀는 그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남자가 냉담한 얼굴을 하고 발코니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과연 창문이 열려 있었다.여기는 층고가 높아서 3층이 4층 높이일 텐데 그녀는 어떻게 뛰어내렸을까?그가 그렇게 무서웠나?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칠 만큼?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물을 끼얹은 듯 청량한 바람이지만 남자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화는 식히지 못하였다. 이 여인은 만 원으로 그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일이 끝난 후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잡히기만 해봐! ......택시에 앉은 소희가 재채기를 하자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괜찮아요?”이렇게 예쁘게 생겨서 홀딱 젖어있다니, 딱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소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학생이죠? 밖에 혼자 다닐 때 각별히 조심해야 되요.”“네, 감사합니다. 기사님.”소희는 대답하고 휴대폰을 꺼내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천위 호텔의 7시와 9시경에 내가 찍힌 CCTV 기록은 모두 없애!”“ok!” 상대방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남자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희는 오늘 임구택과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따위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다만 임구택이 그녀가 왔었다는 사실을 모르게만 하고 싶었다.운해로에서 내리면서 소희는 뒷좌석을 적신 대가로 택시비를 두 배로 지불했다.별장으로 돌아오자 하인은 소희의 젖은 옷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작은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일이 좀 있었어요, 일단 올라가서 샤워부터 할게요.”소희는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목욕물 준비해 드릴게요.”하녀는 더 묻지 못한 채 위층으로 올라가 준비했다.몇 분 후 소희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긴장했던 몸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리까지 물속에 파묻고 오늘 밤에 있
소희는 멍해졌다.남자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왜 절 따라오시는 거예요? 강성대 학생이신가요?”그는 오는 길에서부터 이 여자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멈추면 그녀도 무슨 일이 있는 척 멈추더니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소희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내 다시 냉정을 되찾고 반문했다. “여기가 당신 집으로 가는 길인가요?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왜 제가 따라다닌다고 하는 거죠?”남자의 눈동자의 싸늘한 빛이 스치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소희에게 올라오라고 눈짓했다.소희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꼬듯 말했다. “됐어요, 오해받을 만한 행동 안할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돌아서서 계단으로 걸어갔다.그녀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며 남자의 가늘게 뜬 눈을 가렸다.소희는 임구택과 다시 마주칠까 봐 아예 계단으로 9층까지 올라갔다.회의실에 도착하니 조교가 학과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교는 그녀를 보자 잠시 기다리라고 눈짓했다.그 옆에는 몇몇 학생들도 자료를 제출하러 왔는데, 그중 한 명은 따가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소희는 못 본 척 휴대폰을 꺼내 스도쿠를 했다.5분도 안 돼 한 판을 풀고 나니 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돌아온 지 얼마 안 됐죠? 출국한지 오래됐으니 돌아올 때 됐구나 싶었는데”교장선생님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교장선생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임구택도 소희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 머물지 않고 바로 지나갔다.학과장은 급히 마중 나가 교장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다.방 교장은 그에게 소개하였다. “이 분은 LS그룹의 대표이사님이십니다. 예전에 우리 학교 학생이었지요. 참, 우리 학교 여러 항목의 장학금도 임 회장님이 후원한 것입니다.”그러자 학과장은 냉큼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임구택과 악수를 나누었다. “오늘 마침 학생들에게 장학금 신청 서류를 제출
임구택은 그날 창문에서 뛰어내린 여자를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명우는 제일 먼저 천위 호텔의 CCTV를 조사했다.이상하게도 7시와 9시 두 시간대 모두 공백 상태였고 천위 호텔의 보안요원조차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당시 인터넷이 끊겼을 것이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그래도 명우는 한 사람을 찾았다. 서이연.서이연은 B급 배우로 청순하고 러블리한 이미지의 노선을 걷고 있으나 줄곧 뜨지 못했다. 어제 저녁 6시 50분쯤 그녀가 천위 호텔에 들어가 연풍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CCTV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CCTV 기록에는 공백이 있어 그녀가 어느 방으로 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9시 5분경 서이연의 매니저가 그녀를 부축하고 연풍관 밖에 나타났는데, 그녀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그 뒤로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명우는 서이연이 어떤 차를 타고 떠났는지 몰라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젯밤 그녀는 왼쪽 다리를 수술했다.명우는 이미 차트를 확인했는데 낙상이었다.그날 밤, 강성의대 부속병원.VIP706호. 병상에 누워있는 여인은 두 손을 맞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맞은 켠 소파에 앉은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임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다리 어떻게 다쳤어요?” 임구택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서이연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반쯤 늘어뜨린 눈꺼풀 아래 눈물을 반짝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 대표님과 관련이 있나요?”“숨길 필요 없어요, 사람을 시켜 이미 CCTV를 확인했으니까. 어젯밤 9시쯤 매니저가 당신을 부축해서 차를 타고 떠날 때 다리는 이미 부러져 있었죠. 그날 밤 제 방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맞나요?” 임구택의 어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손님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천위 호텔은 카메라가 객실 창문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이연이 어디서 뛰어내렸는지는 볼 수 없지만,
여인이 달려들며 손에 들고 있던 꽃들은 소희의 몸에 던져졌다. 힘껏 소희를 뒤로 밀치고는 소연을 품에 끌어안았다.진원은 긴장한 채 소연의 몸을 살펴보며 물었다. “다친 거야? 혹시 피났어? 어디 아프니?”이슬을 머금은 꽃잎이 온 바닥에 흩어지고 꽃의 가시가 소희의 목덜미를 찔러 따끔거렸다. 그녀는 여인의 긴장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소정인은 이내 다가와 소희에게 물었다.“안 다쳤니?”진원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무서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소연이를 죽이려는 거니?”소희는 여인의 눈에 비친 혐오와 원한을 보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소연은 소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급히 진원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엄마, 오해예요. 제가 언니한테 머리 좀 잘라달라고 했어요. 언니는 절 다치게 하지 않았어요.”“그렇구나!”소정인은 ‘하하’하고 웃으며 진원을 원망했다. “당신은 항상 너무 급해서 문제야.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화부터 낸단 말이야. 당신 때문에 소희 옷이 다 더러워졌잖아.”진원은 자신이 소희를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무안해하며 변명했다. “들어오자마자 소희가 가위를 소연이의 목에 대고 있길래... 머리를 자르는 건줄도 모르고...”“그만 해!”소정인은 진원에게 눈짓을 하고는 소연에게 말했다. “언니 데려고 가서 옷 좀 갈아입혀. 옷이 다 더러워졌네.”“언니, 이리 와!”소연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희는 어깨의 꽃잎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2층 침실로 들어가자 소연이 사과했다. “언니, 정말 미안해, 엄마가 이 시간에 돌아올 줄 몰랐어. 나 때문에 언니가 다쳤네.”“너 때문이 아니야!”소희의 순수한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를 띠고 있었다.소연은 옷방에 가서 흰색 티셔츠를 가져와 소파에 놓았다. “언니, 이건 새거야, 한 번도 안 입었어. 옷 갈아입어, 난 내려가서 기다릴게.”“응.”소연이 문을 닫자 소희는 소파 위의 옷을 보며 안색이 흐려졌다. 한쪽에서는 머리를 잘라달라
임구택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에든 서류를 보고 있었다.임유림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 “소희야, 과외하러 온 거야?”그녀는 소희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곳이 부자동네여서 당연히 과외 하려 온 줄 알았다.소희는 웃어 보였다.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그녀는 임유림이 임구택 형의 딸, 즉 그의 조카라는 걸 어떻게 잊었단 말인가?거의 3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최근에만 일주일에 3번을 만났다. 그들을 주선해 준 중매쟁이가 드디어 깨어난 건가요?임유림은 돌아보며 소희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내 둘째 삼촌이야!”소희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임구택은 목소리가 익숙한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또 있어 눈을 가늘게 떴다.소희는 손에 들고 있는 우산 손잡이를 꽉 쥔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임유림은 열정적으로 소희와 대화를 나눴다. “주경이가 고석 좋아하는 거 아니야?”소희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답하였다. “그런 것 같아!”소희는 무의식적으로 임구택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나와 고석은 그냥 친구야, 그가 누구와 함께 있는 나랑 상관없어.임유림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눈치를 보내니 소희의 마음속이 불안해졌다. 그녀가 결혼을 합의 때문에 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그녀는 결혼한 신분이다.시내로 들어서자 앞쪽에 사고가 나 차가 막혔다. 임유림은 고픈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길 언제 뚫리지, 배고픈데 먼저 밥 먹으러 갈까?”소희는 답혔다. “나 여기서 내릴게 나 학교 가야 해.”“학교는 무슨, 점심인데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임유림은 이미 스스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아무 말도 하지 않던 임구택은 시계를 보고 명우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세 사람은 프렌치 레스토랑에 들어가 앉았다. 임유림은 소희가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와본 적이 없을까 봐 소희에게 물어본 뒤 대신 주문해 주었다.임유림이 음식을 주문하고 화장실에 가자 자리에는 임구택과 소희 둘만 남았다.소
유진은 구은정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하고,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구은정 사장님, 이거 저한테 뇌물 요구하시는 건가요? 최이석의 최후, 잊으셨어요?][그렇게 쳐도 괜찮아. 너만 날 고발 안 하면 되니까.][그건 모르는 일이죠.][넌 나 고발 못 해. 내가 장담해.]유진은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뛰었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진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그렇게 힘들게 따낸 성과, 쉽게 놓칠 리 없잖아?]이에 유진은 푸흣 웃음을 터뜨렸다.[회사를 위해 내 몸 바쳐 희생이라도 하라는 말이에요? 사장님,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희생은 안 돼. 그런 건 나도 못 봐.]유진은 할 말을 잃었고, 이날 대화는 더 이상 이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도무지 사업가 같지 않아. 입만 열면 감정이 폭발해.’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유진은 콧소리를 흘리며 휴대폰을 옆으로 밀어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또다시 울리는 알림음. 보지 않으려 했지만,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해져 결국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그만 놀릴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난 기꺼이 한 일이야. 오늘 저녁엔 네가 좋아할 만한 요리 해둘게. 새로운 음식 하나 또 배웠거든.]이번에는 단순히 얼굴만 붉어진 게 아니라, 가슴 한가운데가 데인 듯 뜨거워졌다.다른 차 안, 진소혜와 정현준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혜는 내내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었고, 현준은 운전대를 잡은 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그래도 구씨그룹 프로젝트 따낸 건 좋은 거잖아요. 소혜 씨 기획안도 인정받은 거고, 노력한 보람이 있었던 거죠.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소혜는 분노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근데 결국 스포트라이트는 전부 임유진한테 갔잖아요!”현준은 담담히 말했다.“그건 어쩔 수 없지. 원래부터 그 사람은 팀장이니까, 성과가 나면 당연히 앞에 서게 돼요. 그리고 그 프로젝트, 소혜 씨가 먼저 팀장님한테 넘긴
백이신은 곧바로 설명했다.“최근 회사 내부 인사이동으로 제가 최이석 대신 이 프로젝트를 맡게 됐어요. 앞으로 귀사와의 협상을 제가 담당하게 될 거예요.”유진은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저도 담당자님처럼 막 이 프로젝트를 인수한 참이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맞는 것 말씀이세요.”백이신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귀사에서 보내준 협업 제안서는 이미 검토해 봤어요. 전반적으로 아주 잘 준비하셨더군요.”“다만 몇 가지 조율할 부분이 있어서, 오늘 이렇게 만나 얘기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죠.”백이신은 눈앞의 여성이 젊음에도 불구하고 말투와 태도가 당당하고 매끄러워, 어쩐지 왜 이 나이에 부서를 맡고 있는지 이해되는 듯했다.게다가 구은정의 특별한 당부도 있었기에, 그는 더욱 성의 있고 공손하게 대화에 임했다. 말투에는 조심스러운 배려와, 은근한 호감이 배어 있었다.유진은 차분히 말했다.“저희 영업팀 책임자인 임혁준 본부장남과, 이번 제안서를 만든 진소혜 씨도 함께 왔어요. 그러니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소혜는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이름이 언급되자,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신을 차렸다.“네, 담당자님.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저한테 물어보시면 돼요!”한 시간이 지난 후양측은 협업 방향에 대해 기본적인 합의를 마쳤고, 백이신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저희 쪽도 별다른 문제는 없어요. 저희 사장님께 최종 승인만 받으면 바로 계약 체결 가능하고요.”소혜는 물론, 영업팀의 임혁준 본부장조차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토록 어렵게만 느껴졌던 프로젝트가, 어쩌다 이렇게 순식간에 결정된 걸까?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저는 담당자님의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백이신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벌써 점심시간이네요. 제가 식사 자리 준비할게요. 시간 괜찮으시면 함께하시죠.”유진은 정중히 고개를 저었다.“돌아가서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다음에 계약서 체결되면 제가
정현준은 생각에 잠기듯 말했다.“팀장님은 어디까지나 우리 여씨그룹을 대표해서 협상하러 가는 거니까, 곧 구씨그룹 도착하면 너무 공격적으로 나가진 마요. 어느 정도 체면은 지켜줘요.”진소혜는 얼굴을 굳히며 쏘아붙였다.“뭐죠? 후배가 그렇게 안쓰러워요?”현준은 황급히 웃었다.“회사 이익과 체면을 위한 말이죠.”소혜는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걱정 마요. 나도 상황 봐가면서 행동해. 밖에서까지 창피 주진 않을 거니까요. 근데 영업팀 임혁준 본부장님이 안 봐주는 건 내 알 바 아니고요.”현준이 뭐라 말하려던 찰나, 곽시양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시양은 바로 시선을 피하며 소혜를 향해 말했다.“소혜 씨, 어제 기획안 말인데요. 몇 군데 체크할 부분 있어서 말씀 좀 드릴게요.”소혜는 오늘 기분이 좋아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부드럽게 대답했다.“좋아요. 지금 시간 돼요.”현준은 나가려는 그녀를 향해 일러두었다.“30분 후에 구씨그룹으로 출발이니까, 잊지 마요.”“알았어요!”소혜는 짜증 섞인 말투로 대답한 뒤, 시양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시양은 그녀의 왼쪽 뒷편에 서 있다가, 걸음을 옮기며 살짝 고개를 돌려 현준을 한 번 바라보았다.오전 10시 30분임유진과 일행은 구씨그룹에 정시에 도착했다. 백이신 담당자의 비서가 유진을 15층 회의실로 안내하며 공손히 말했다.“팀장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담당자님께서 급한 일이 생겨서 처리 중입니다. 끝나는 대로 바로 오실 거예요.”유진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담당자님 일 먼저 보시라 전해주세요. 저희는 여기서 기다릴게요.”비서는 곧 차를 내오게 한 뒤 조용히 회의실을 나갔다. 소혜는 주위를 둘러보다 감탄하듯 말했다.“역시 백년 넘는 대기업은 다르긴 하네요. 분위기부터 압도적이에요!”현준은 웃으며 맞장구쳤다.“우리 여씨그룹도 뒤처지지 않죠.”소혜는 가볍게 웃기만 하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유진은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앉
유진은 놀란 듯 물었다.“이렇게 빨리요?”구은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역시 너였구나.”유진은 순간 얼굴이 조금 붉어지며 당황했다.“오해하지 마요. 사실, 저 자신을 위한 거예요.”그 말에 은정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날 일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 와서 널 위한 거라고? 그럼 나는 뭐가 돼?”유진은 한순간 말문이 막혀, 그럴듯하게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작게 중얼댔다.“어떻게 생각하든 알아서 해요.”은정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곧 유진의 핸드폰에 새로운 메시지 알림이 떴고, 그녀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은정은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이건 프로젝트 새 담당자 연락처야. 내일 전화해.”유진의 눈이 반짝이며 얼굴이 활짝 피었다.“고마워요, 구은정 사장님!”은정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장난스럽게 말했다.“천만에요. 임유진 씨와 함께 일하게 되어, 우리 구씨그룹이 더 영광이죠.”유진은 그 말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밥을 한 숟가락 크게 퍼 입에 넣자 볼이 가득 부풀어 귀엽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 더욱 도드라졌다.문득 생각난 듯 밥을 삼킨 유진이 물었다.“그, 서성이라는 사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을 잃었는데, 혹시 보복하려 들진 않을까요? 삼촌한테 괜히 시비 걸거나...”“난 임씨 집안의 외동딸을 등에 업고 있는데, 서성 따위가 뭐가 무섭겠어?”은정이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유진은 눈빛을 빛내며 그를 흘겨보았다.원래라면 있을 때 잘 붙어 있다고 농담하고 싶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런 농담을 주고받기엔 아직 어중간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진지한 척 밥만 먹었다.식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함께 수업을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은정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의 몸에서는 은은한 박하향과 연초의 잔향이 어우러져, 유진은 정신이 몽롱해질 지경이었다.그래서 유진은 애옹이를 끌어안아 두 사람 사이에 놓고, 얼굴을 단단히 굳힌 채 말했다.“더 가까이 오면,
부신명은 고영해의 표정을 보며 더 화가 치밀었다.“그럼 당신,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고영해는 급히 해명했다.“그렇게 일찍 안 건 아니에요. 최근 이틀 사이에야 겨우 소식을 들었고, 오늘도 최이석한테 전화했는데, 그 사람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어요.”“인정할 리가 있나?”부신명은 분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인정하면 지금까지 받아 챙긴 돈 다 토해내야 하니까.”그는 냉랭한 눈빛으로 고영해를 쏘아봤다.“회사가 최이석한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는지 알아요? 당신은 자신만만하게 꼭 이 프로젝트 따내겠다고 장담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게 뭐죠?”부신명은 탁자 위를 세게 내리쳤다.“내일 당장 짐 싸서 나가요!”고영해는 면박을 당해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입술을 깨물었고, 속으로는 온통 최이석에 대한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이 지경까지 만든 게 다 최이석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같이 망하자.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다음 날구씨그룹 인사부와 이사회 일부 고문들의 이메일에는 한 통의 실명 고발장이 도착했다.유지그룹 영업팀 본부장 고영해가 보낸 것으로, 그는 최이석이 먼저 뇌물을 요구하며 협상을 조건으로 걸었다고 고발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거액의 이체 기록과 녹취 증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이에 모두가 이 고발장을 받고 충격에 빠졌다.구은정은 증거의 진위를 조사하게 했고, 확인을 마친 뒤 회의석상에서 서성 앞으로 서류를 던지듯 내밀며 차갑게 말했다.“조사해 보니 더 충격이네요. 유지그룹 건만이 아니에요. 최이석이 맡은 프로젝트는 전부 사익을 취했어요.”“이 사람, 당신이 데리고 온 인물이죠? 어떻게 처리하실 건가요?”서성은 눈앞에 놓인 자료들을 보며 얼굴이 일그러졌다.“정말 최이석이 이렇게 대담할 줄은 몰랐어요!”그는 고개를 들고 은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회사는 최이석을 해고해야 해요. 저는 절대 감싸거나 묵인하지 않을 거예요!”“해고요?”은정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이미 법무팀에 고소 진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임유진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었고, 유진이 멀어지자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구씨그룹과의 계약은 여전히 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최이석은 최근 구은정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으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며, 여러 단계를 더 거쳐서 확실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었다.사실 잘 알고 있었다. 최이석이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속셈이라는 걸. 하지만 그는 이미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양보를 한 상태였다.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양쪽은 암묵적으로 팽팽하게 대치 중이었고 이석의 약점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이석이 몰래 여씨그룹과 접촉해 유지그룹과 여씨그룹 사이를 오가며 협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누가 더 많은 돈을 주느냐에 따라 결국 그쪽과 손을 잡을 셈이었다.고영해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자신이 최이석에게 준 돈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충동적으로 나설 수 없었다.눈동자를 굴리던 그는 일부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 4층 버튼이 눌린 걸 확인했다.그 순간, 예약해둔 고객의 전화가 울렸다.“왜 아직 안 오셨어요?”[곧 가요.]고영해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약속된 장소로 향했다.임유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에 도착했지만 내리지 않고 다시 1층 버튼을 눌렀다. 자리에 돌아온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구은정에게 말했다.“사람이 많아서 조금 기다렸어요.”음식은 이미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고, 은정은 그녀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말했다.“일단 식사부터 하자.”요리는 꽤 괜찮았다. 재료는 신선했고, 요리사의 솜씨도 뛰어났지만 유진은 많이 먹지 않았다.레스토랑 내부는 품격 있고 세련되게 꾸며져 있었다. 천장에는 중식 스타일의 조각된 펜던트 조명이 달려 있어 분위기를 한층 살려주었고, 그 아래에서 구은정의 이목구비는 더욱 짙어 보였다.은정은 유진을
유진이 요즘 운동을 안 해서 걷고 싶다고 하자, 구은정은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임유진이 중식을 먹고 싶다고 말했고, 마침 한 블록 건너편에 중식 전문점이 있어 두 사람은 걸어서 향했다.하늘은 이미 어둑해졌고, 저녁 시간대라 거리는 번화했다. 네온사인은 반짝이고, 도로 위는 차량과 인파로 북적였다.식당이 거의 다 왔을 무렵, 유진은 길 건너편에서 이벤트 중인 디저트 가게를 발견했다.가게 앞에는 커다란 케이크 조명 간판이 환히 밝혀져 있었고, 예쁘고 유혹적인 분위기였다.유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맞은편을 바라보며 물었다.“전에 삼촌이 주문해 줬던 타로 크림 롤, 여기 거예요? 맛 괜찮았어요.”은정은 곧장 눈치를 채며 말했다.“내가 다녀올게.”이에 유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고마워요, 삼촌!”은정은 말없이 길을 건너 디저트 가게로 향했고, 유진은 그 자리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5, 6분쯤 지났을까? 은정은 다시 시야에 들어왔다. 여러 명의 사람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중이었다.키 크고 잘생긴 그는, 냉철한 분위기와 독특한 존재감으로 복잡한 인파 속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이 은정을 향해 자연스레 쏠렸다.번화하고 소란스러운 거리, 은정이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나와, 손에 디저트를 들고 자신에게 곧장 다가오는 모습은 어딘지 낯익고 익숙했다.유진은 잠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느꼈다. 유진의 앞으로 다가온 은정은 타로 롤케이크를 그녀에게 곧바로 건네지 않았다.“식당 가서 먹자.”그 말에 유진은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좋아요!”식당에 도착해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고, 유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여기 새로 생긴 식당인가 봐요.”“마음에 들면 자주 오자.”은정의 말에 유진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나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할머니께 한 달만 따로 살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 시간이 거의 다 됐고요.”은정은 순간 멍해졌고, 낮은 목소리로
정현준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가끔은 실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구씨그룹 나름대로 고려가 있겠죠.”그의 말은 겉도는 이야기뿐, 전혀 실질적인 조언은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현준의 말에서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계속 의견을 나눴고, 두 사람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꽤 길게 대화를 이어갔다.곽시양의 책상은 유진의 사무실 맞은편에 있어, 현준이 유진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정면으로 볼 수 있었다.현준은 나올 때, 어딘지 모르게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시양은 직감했다. 현준은 틀림없이 유진에게 소혜를 추천하고 나왔을 것이다.소혜는 부서 신입 중에서도 능력과 학력이 가장 두드러졌고, 현준의 밀어주기가 더해진다면 부팀장 자리는 거의 따놓은 당상일 수 있었다.시양은 생각에 잠긴 듯 눈빛을 번득이며 조용히 자료를 정리했다.유진은 평소처럼 정시에 퇴근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익명의 메시지를 하나 받았다.[팀장님, 보고드릴 게 하나 있어요. 구씨 그룹이 우리와 협력하지 않기로 한 건, 담당자인 최이석 부장이 유지그룹 쪽과 친분이 있어서예요.][이미 프로젝트는 유지그룹에 넘기기로 결정됐어요. 진소혜 씨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팀장님께 알리지 않았고요.][팀장님이 실패하게 만들고, 직원들 앞에서 망신 주기 위해서요.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는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팀장님에게 떠넘긴 거예요.][자기는 책임 피하고, 팀장님을 함정에 빠지게 했죠. 이 모든 게 그 사람의 계략이에요.]유진은 메시지를 다 읽고 나서 눈을 반짝이며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은 쪽은 장난기 어린 여자 목소리였다.“삼촌,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전화를 끊은 유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갈아입고는 옆집으로 향했다. 문은 닫히지 않고 반쯤 열려 있었고, 유진은 별다른 예고 없이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구은정은 서재에서 전화를 받는 듯했고, 유진은 소파에 앉아 애옹이를 쓰다듬으며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몇 분 후, 유진의 휴대폰에
정현준이 어색하게 분위기를 풀며 말했다.“소혜 씨는 원래 목표를 정하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스타일이에요. 그런 자세는 우리가 본받을 만하죠.”그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팀장님,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팀장님도 부담스럽다면, 우리 영업팀 쪽이랑 다시 얘기해 볼까요? 그쪽도 이제 이 프로젝트 포기하고 싶어 할 수도 있으니까요.”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자료를 보고 있었다. 소혜의 도발 섞인 말투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고, 감정 기복 없이 차분했다. 속마음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상대가 당황할 정도였다.자료를 대략 훑고 나서야, 유진은 마음을 정리한 듯 고개를 들었다.“굳이 물어볼 필요 없어요. 소혜 씨의 기획서 봤는데 문제없더라고요. 이 프로젝트, 제가 직접 구씨그룹과 협의하죠.”소혜의 입가에 알 수 없는 웃음이 번졌다. 소혜는 구씨 그룹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부서와 이미 친분을 쌓아두었고, 사실 이 프로젝트는 이미 내부적으로 다른 회사와 협력하기로 내정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결코 우리 쪽으로 넘어올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유진이 이 프로젝트를 맡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래야 결국 성과를 못 내고 망신을 당하게 되니까.계획이 잘 흘러가자, 소혜는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역시 팀장님답네요. 저도 열심히 도울게요. 이번 프로젝트 꼭 함께 성공시켜요.”유진은 차분히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그래요, 잘 부탁해요.”이후 이틀 동안, 유진은 구씨그룹 프로젝트 담당자에게 전화를 수차례 걸었다. 하지만 매번 비서가 전화를 받았고, 바쁘다는 이유로 면담은 번번이 거절당했다.유진 측에서 아무런 진전이 없자, 소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조만간 유진이 자진해서 포기할 거라고 믿었고, 그렇게 되면 팀 내에서의 리더십도 자연히 무너지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소혜의 생각은 단 하나였다. 유진은 능력으로 올라온 게 아니라, 인맥으로 자리를 꿰찼다는 걸 모두에게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 그리고 유진을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