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왔어?”임유진이 빠르게 거실 쪽으로 걸어오다가, 구은정을 보고 놀란 듯 말했다.“돌아오셨어요?”여진구는 곧장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애옹이는 은정을 향해 달려가, 반가운 듯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은정은 허리를 살짝 숙여 애옹이를 안아 들었다. 손엔 케이크 박스를 하나 들고 있었고, 아무 말 없이 거실로 들어섰다.진구는 은정이 아무렇지 않게 유진의 집에 들어오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놀람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조금은 당황한 기색도 엿보였다.이에 유진은 바로 말했다.“은정 삼촌이 제 옆집에 살아요.”“뭐라고?”진구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거의 충격에 찬 목소리였고, 유진은 민망한 듯 웃었다.“저도 나중에야 알았어요.”그러나 진구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나중에 알았다? 그런데 벌써 이 집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사이야?”그 말에 은정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밤의 냉기를 담은 듯한 시선이 진구를 향했다.“그 말투로 유진이한테 말하는 건가?”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당신이 나한테 따질 만한 일인가요?”진구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구은정 씨, 본인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고는 있어요? 당신은 유진이의 삼촌이잖아요!”진구는 삼촌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거의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진구와 달리 은정은 차분했고, 오히려 단호했다.“삼촌이기 때문에 더 잘 챙겨주는 거죠. 그게 문제인가요?”‘문제냐고?’진구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문제고도 남았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그때 방연하와 장효성이 다가왔다.“무슨 일이야?”“분위기가 왜 그래?”은정을 본 연하는 당황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구은정 씨!”은정은 연하와 효성을 확인하곤, 굳어 있던 얼굴을 조금 누그러뜨렸다.“모임 중이셨어요?”연하는 얼른 맞장구쳤다.“네, 지난번 유진이 이사 파티할 때 효
장효성은 구은정을 처음 본 터라, 아까 거실에서 벌어진 긴장감에 어리둥절했다.그녀는 방연하에게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 그 남자 누구야?”연하는 짧게 대답했다.“유진이 삼촌이야. 친삼촌은 아니고.”“그러면 그 사람이랑 선배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효성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자, 연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말하자면 길어.”사실 연하가 짐작한 대로라면, 상황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한편 베란다에선 유진이 인상을 찌푸린 채 여진구를 바라보고 있었다.“선배 도대체 왜 그래요? 왜 삼촌이랑 그렇게 대립하려 드는 건데? 그 사람이 선배한테 뭐라도 잘못했어요?”그러자 진구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너는 못 봤어?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떤 태도였는지! 완전히 적대적이었잖아!”유진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보기엔 선배가 먼저 시비 걸었는데요?”“하!”진구는 비웃듯 숨을 내쉬고는, 등을 돌린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언제나 그래. 네가 신경 쓰고 감싸는 건 항상 그 사람이잖아.”유진은 고개를 기울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지금 뭐라고 했어요? 좀 크게 말해 봐요.”진구는 다시 몸을 돌려 베란다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물었다.“그럼 다시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이 네 이웃이 된 게 진짜 우연이라고 믿는 거야?”유진은 살짝 당황해하며 대답했다.“그냥 우연이죠.”“그 말을 진심으로 믿어?”진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되물었고,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그러는 선배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데요?”진구는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임유진.”하지만 유진의 맑고 단단한 눈빛을 마주하자, 결국 그 뒤의 말은 꺼내지 못했다. 지금은 아직 말할 때가 아니었다.이에 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혹시 선배가 생각하기에, 내가 갑자기 이사 나오고, 하필 그 집을 고른 게 삼촌이랑 일부러 이웃하려고 그랬다는 뜻이에요?”“선배 지금 뭘 생각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삼촌이에요.”그 말에 진구는 되려 눈을 크게 떴다
셋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 오랜 시간, 학교에서 사회로 이어지며 지금까지도 우정을 유지해 왔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그래서 방연하는 결국 더 이상 상황이 꼬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용히 장효성에게 신호를 보냈다. 부디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줬으면 좋겠다고.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꼭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야 하나. 괜찮은 남자는 많지만, 7년 8년을 함께한 친구는 많지 않으니까.그러자 효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맞아. 그럼 나도 방해 안 할게.”효성은 여진구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연하는 술병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우리 회사에 새로 들어온 남자 직원 있는데, 피부도 하얗고 꽤 잘생겼어. 너 스타일이거든. 한번 소개해 줄까?”효성은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면, 네가 먼저 노려야 되는 거 아냐?”연하는 익살스럽게 대답했다.“같은 부서라서 내가 먼저 나서기 좀 그렇지. 만약 나중에 헤어지면 계속 보기 불편하잖아.”“우리 팀장도 같은 부서끼리 연애하는 거 안 좋아해서, 너한테 넘기는 거야. 이게 바로 내 사람한테 좋은 건 안 넘긴다는 말 있잖아?”효성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지. 언제 한 번 불러줘. 얼마나 잘생겼는지 한번 보자.”“보장할게. 네 기대 안 저버릴걸!”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다시 편안한 분위기를 회복했다. 조금 전까지 흐르던 묘한 기류도, 웃음소리에 묻혀 사라졌다.곧 유진과 진구가 거실로 돌아왔다.“계속 마셔. 아직 술 남았지? 없으면 내가 더 가져올게!”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이제 그만 마시자. 내일 출근도 해야 하잖아.”효성은 진구를 흘긋 보고는 곧 시선을 돌렸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정리하자.”유진은 말했다.“치우지 마. 내일 청소 도우미 아주머니 오시거든.”“온 집안에 술 냄새가 진동하는데, 간단하게라도 정리하자.”진구는 술병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했다.“오늘 밤 창문 꼭 닫고 자.
수요일 저녁 7시 정각 소희는 전위 호텔 앞에 나타났다.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리자 소희는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아빠 소정인이었다. [소희야, 아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차가 좀 막히네. 먼저 들어가있어.]소희는 발걸음을 늦추며 이따 임구택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까 생각하고 있었다.결혼 3년 동안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임구택이 이 결혼을 동의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부한다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그렇다고 임구택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과거 소씨 가문의 회사가 위기를 맞자 뻔뻔하게 임씨 가문을 찾아가 혼인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였고, 당시 임씨 가문의 장남은 이미 결혼을 한 터라 자연스레 그 약속은 차남 임구택이 이행하게 되었다. 그가 내키지 않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임씨 가문은 당연히 소씨 가문에 좌지우지 당하지만은 않았다. 예물로 50억 원을 건네어 소씨 가문이 난관을 이겨내게 도우면서도 조건을 제시했다. 3년 뒤에 이 혼사가 자동 해지되는 것으로.3년 전, 그녀는 아직 법정 결혼 연령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대리인이 가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결혼하자마자 임구택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결혼 해지를 석 달 앞두고 돌아왔다. 결혼을 거부한다는 태도가 너무나도 뚜렷했다.하필이면 오늘,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 때문에 그녀를 앞세워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소희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생각하였다. “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 아내에요!”그가 그녀를 거들떠보기나 할까?듣건대 임구택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성의 유명한 악질이었다고 한다. 강성의 흑과 백을 모두 통솔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매섭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하지만 며칠 전 TV의 경제 채널에서 임구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명품 양복을 입고, 거만하면서도 우아하고 듬직해 보였다.그녀는
그의 손에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일을 마친 후 돈을 지불하다니. 그녀는 그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남자가 냉담한 얼굴을 하고 발코니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과연 창문이 열려 있었다.여기는 층고가 높아서 3층이 4층 높이일 텐데 그녀는 어떻게 뛰어내렸을까?그가 그렇게 무서웠나?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칠 만큼?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물을 끼얹은 듯 청량한 바람이지만 남자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화는 식히지 못하였다. 이 여인은 만 원으로 그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일이 끝난 후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잡히기만 해봐! ......택시에 앉은 소희가 재채기를 하자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괜찮아요?”이렇게 예쁘게 생겨서 홀딱 젖어있다니, 딱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소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학생이죠? 밖에 혼자 다닐 때 각별히 조심해야 되요.”“네, 감사합니다. 기사님.”소희는 대답하고 휴대폰을 꺼내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천위 호텔의 7시와 9시경에 내가 찍힌 CCTV 기록은 모두 없애!”“ok!” 상대방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남자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희는 오늘 임구택과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따위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다만 임구택이 그녀가 왔었다는 사실을 모르게만 하고 싶었다.운해로에서 내리면서 소희는 뒷좌석을 적신 대가로 택시비를 두 배로 지불했다.별장으로 돌아오자 하인은 소희의 젖은 옷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작은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일이 좀 있었어요, 일단 올라가서 샤워부터 할게요.”소희는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목욕물 준비해 드릴게요.”하녀는 더 묻지 못한 채 위층으로 올라가 준비했다.몇 분 후 소희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긴장했던 몸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리까지 물속에 파묻고 오늘 밤에 있
소희는 멍해졌다.남자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왜 절 따라오시는 거예요? 강성대 학생이신가요?”그는 오는 길에서부터 이 여자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멈추면 그녀도 무슨 일이 있는 척 멈추더니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소희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내 다시 냉정을 되찾고 반문했다. “여기가 당신 집으로 가는 길인가요?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왜 제가 따라다닌다고 하는 거죠?”남자의 눈동자의 싸늘한 빛이 스치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소희에게 올라오라고 눈짓했다.소희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꼬듯 말했다. “됐어요, 오해받을 만한 행동 안할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돌아서서 계단으로 걸어갔다.그녀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며 남자의 가늘게 뜬 눈을 가렸다.소희는 임구택과 다시 마주칠까 봐 아예 계단으로 9층까지 올라갔다.회의실에 도착하니 조교가 학과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교는 그녀를 보자 잠시 기다리라고 눈짓했다.그 옆에는 몇몇 학생들도 자료를 제출하러 왔는데, 그중 한 명은 따가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소희는 못 본 척 휴대폰을 꺼내 스도쿠를 했다.5분도 안 돼 한 판을 풀고 나니 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돌아온 지 얼마 안 됐죠? 출국한지 오래됐으니 돌아올 때 됐구나 싶었는데”교장선생님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교장선생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임구택도 소희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 머물지 않고 바로 지나갔다.학과장은 급히 마중 나가 교장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다.방 교장은 그에게 소개하였다. “이 분은 LS그룹의 대표이사님이십니다. 예전에 우리 학교 학생이었지요. 참, 우리 학교 여러 항목의 장학금도 임 회장님이 후원한 것입니다.”그러자 학과장은 냉큼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임구택과 악수를 나누었다. “오늘 마침 학생들에게 장학금 신청 서류를 제출
임구택은 그날 창문에서 뛰어내린 여자를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명우는 제일 먼저 천위 호텔의 CCTV를 조사했다.이상하게도 7시와 9시 두 시간대 모두 공백 상태였고 천위 호텔의 보안요원조차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당시 인터넷이 끊겼을 것이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그래도 명우는 한 사람을 찾았다. 서이연.서이연은 B급 배우로 청순하고 러블리한 이미지의 노선을 걷고 있으나 줄곧 뜨지 못했다. 어제 저녁 6시 50분쯤 그녀가 천위 호텔에 들어가 연풍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CCTV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CCTV 기록에는 공백이 있어 그녀가 어느 방으로 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9시 5분경 서이연의 매니저가 그녀를 부축하고 연풍관 밖에 나타났는데, 그녀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그 뒤로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명우는 서이연이 어떤 차를 타고 떠났는지 몰라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젯밤 그녀는 왼쪽 다리를 수술했다.명우는 이미 차트를 확인했는데 낙상이었다.그날 밤, 강성의대 부속병원.VIP706호. 병상에 누워있는 여인은 두 손을 맞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맞은 켠 소파에 앉은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임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다리 어떻게 다쳤어요?” 임구택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서이연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반쯤 늘어뜨린 눈꺼풀 아래 눈물을 반짝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 대표님과 관련이 있나요?”“숨길 필요 없어요, 사람을 시켜 이미 CCTV를 확인했으니까. 어젯밤 9시쯤 매니저가 당신을 부축해서 차를 타고 떠날 때 다리는 이미 부러져 있었죠. 그날 밤 제 방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맞나요?” 임구택의 어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손님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천위 호텔은 카메라가 객실 창문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이연이 어디서 뛰어내렸는지는 볼 수 없지만,
여인이 달려들며 손에 들고 있던 꽃들은 소희의 몸에 던져졌다. 힘껏 소희를 뒤로 밀치고는 소연을 품에 끌어안았다.진원은 긴장한 채 소연의 몸을 살펴보며 물었다. “다친 거야? 혹시 피났어? 어디 아프니?”이슬을 머금은 꽃잎이 온 바닥에 흩어지고 꽃의 가시가 소희의 목덜미를 찔러 따끔거렸다. 그녀는 여인의 긴장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소정인은 이내 다가와 소희에게 물었다.“안 다쳤니?”진원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무서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소연이를 죽이려는 거니?”소희는 여인의 눈에 비친 혐오와 원한을 보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소연은 소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급히 진원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엄마, 오해예요. 제가 언니한테 머리 좀 잘라달라고 했어요. 언니는 절 다치게 하지 않았어요.”“그렇구나!”소정인은 ‘하하’하고 웃으며 진원을 원망했다. “당신은 항상 너무 급해서 문제야.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화부터 낸단 말이야. 당신 때문에 소희 옷이 다 더러워졌잖아.”진원은 자신이 소희를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무안해하며 변명했다. “들어오자마자 소희가 가위를 소연이의 목에 대고 있길래... 머리를 자르는 건줄도 모르고...”“그만 해!”소정인은 진원에게 눈짓을 하고는 소연에게 말했다. “언니 데려고 가서 옷 좀 갈아입혀. 옷이 다 더러워졌네.”“언니, 이리 와!”소연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희는 어깨의 꽃잎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2층 침실로 들어가자 소연이 사과했다. “언니, 정말 미안해, 엄마가 이 시간에 돌아올 줄 몰랐어. 나 때문에 언니가 다쳤네.”“너 때문이 아니야!”소희의 순수한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를 띠고 있었다.소연은 옷방에 가서 흰색 티셔츠를 가져와 소파에 놓았다. “언니, 이건 새거야, 한 번도 안 입었어. 옷 갈아입어, 난 내려가서 기다릴게.”“응.”소연이 문을 닫자 소희는 소파 위의 옷을 보며 안색이 흐려졌다. 한쪽에서는 머리를 잘라달라
셋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 오랜 시간, 학교에서 사회로 이어지며 지금까지도 우정을 유지해 왔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그래서 방연하는 결국 더 이상 상황이 꼬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용히 장효성에게 신호를 보냈다. 부디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줬으면 좋겠다고.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꼭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해야 하나. 괜찮은 남자는 많지만, 7년 8년을 함께한 친구는 많지 않으니까.그러자 효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맞아. 그럼 나도 방해 안 할게.”효성은 여진구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연하는 술병을 들고 그녀와 가볍게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우리 회사에 새로 들어온 남자 직원 있는데, 피부도 하얗고 꽤 잘생겼어. 너 스타일이거든. 한번 소개해 줄까?”효성은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면, 네가 먼저 노려야 되는 거 아냐?”연하는 익살스럽게 대답했다.“같은 부서라서 내가 먼저 나서기 좀 그렇지. 만약 나중에 헤어지면 계속 보기 불편하잖아.”“우리 팀장도 같은 부서끼리 연애하는 거 안 좋아해서, 너한테 넘기는 거야. 이게 바로 내 사람한테 좋은 건 안 넘긴다는 말 있잖아?”효성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지. 언제 한 번 불러줘. 얼마나 잘생겼는지 한번 보자.”“보장할게. 네 기대 안 저버릴걸!”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다시 편안한 분위기를 회복했다. 조금 전까지 흐르던 묘한 기류도, 웃음소리에 묻혀 사라졌다.곧 유진과 진구가 거실로 돌아왔다.“계속 마셔. 아직 술 남았지? 없으면 내가 더 가져올게!”유진이 웃으며 말했다.“이제 그만 마시자. 내일 출근도 해야 하잖아.”효성은 진구를 흘긋 보고는 곧 시선을 돌렸다.“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정리하자.”유진은 말했다.“치우지 마. 내일 청소 도우미 아주머니 오시거든.”“온 집안에 술 냄새가 진동하는데, 간단하게라도 정리하자.”진구는 술병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했다.“오늘 밤 창문 꼭 닫고 자.
장효성은 구은정을 처음 본 터라, 아까 거실에서 벌어진 긴장감에 어리둥절했다.그녀는 방연하에게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 그 남자 누구야?”연하는 짧게 대답했다.“유진이 삼촌이야. 친삼촌은 아니고.”“그러면 그 사람이랑 선배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효성은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자, 연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말하자면 길어.”사실 연하가 짐작한 대로라면, 상황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한편 베란다에선 유진이 인상을 찌푸린 채 여진구를 바라보고 있었다.“선배 도대체 왜 그래요? 왜 삼촌이랑 그렇게 대립하려 드는 건데? 그 사람이 선배한테 뭐라도 잘못했어요?”그러자 진구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너는 못 봤어?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떤 태도였는지! 완전히 적대적이었잖아!”유진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보기엔 선배가 먼저 시비 걸었는데요?”“하!”진구는 비웃듯 숨을 내쉬고는, 등을 돌린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언제나 그래. 네가 신경 쓰고 감싸는 건 항상 그 사람이잖아.”유진은 고개를 기울이며,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지금 뭐라고 했어요? 좀 크게 말해 봐요.”진구는 다시 몸을 돌려 베란다 난간에 등을 기댄 채 물었다.“그럼 다시 생각해 보자. 그 사람이 네 이웃이 된 게 진짜 우연이라고 믿는 거야?”유진은 살짝 당황해하며 대답했다.“그냥 우연이죠.”“그 말을 진심으로 믿어?”진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되물었고,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그러는 선배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데요?”진구는 답답하다는 듯 중얼거렸다.“임유진.”하지만 유진의 맑고 단단한 눈빛을 마주하자, 결국 그 뒤의 말은 꺼내지 못했다. 지금은 아직 말할 때가 아니었다.이에 유진은 눈살을 찌푸렸다.“혹시 선배가 생각하기에, 내가 갑자기 이사 나오고, 하필 그 집을 고른 게 삼촌이랑 일부러 이웃하려고 그랬다는 뜻이에요?”“선배 지금 뭘 생각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삼촌이에요.”그 말에 진구는 되려 눈을 크게 떴다
“누가 왔어?”임유진이 빠르게 거실 쪽으로 걸어오다가, 구은정을 보고 놀란 듯 말했다.“돌아오셨어요?”여진구는 곧장 고개를 돌려 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애옹이는 은정을 향해 달려가, 반가운 듯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은정은 허리를 살짝 숙여 애옹이를 안아 들었다. 손엔 케이크 박스를 하나 들고 있었고, 아무 말 없이 거실로 들어섰다.진구는 은정이 아무렇지 않게 유진의 집에 들어오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놀람과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조금은 당황한 기색도 엿보였다.이에 유진은 바로 말했다.“은정 삼촌이 제 옆집에 살아요.”“뭐라고?”진구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거의 충격에 찬 목소리였고, 유진은 민망한 듯 웃었다.“저도 나중에야 알았어요.”그러나 진구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나중에 알았다? 그런데 벌써 이 집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사이야?”그 말에 은정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밤의 냉기를 담은 듯한 시선이 진구를 향했다.“그 말투로 유진이한테 말하는 건가?”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당신이 나한테 따질 만한 일인가요?”진구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구은정 씨, 본인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고는 있어요? 당신은 유진이의 삼촌이잖아요!”진구는 삼촌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거의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진구와 달리 은정은 차분했고, 오히려 단호했다.“삼촌이기 때문에 더 잘 챙겨주는 거죠. 그게 문제인가요?”‘문제냐고?’진구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휘두르고 싶을 만큼 화가 치밀었다. ‘문제고도 남았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그때 방연하와 장효성이 다가왔다.“무슨 일이야?”“분위기가 왜 그래?”은정을 본 연하는 당황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구은정 씨!”은정은 연하와 효성을 확인하곤, 굳어 있던 얼굴을 조금 누그러뜨렸다.“모임 중이셨어요?”연하는 얼른 맞장구쳤다.“네, 지난번 유진이 이사 파티할 때 효
연하의 얼굴에 아쉬움이 비쳤다.“거절당했지 뭐. 자기는 날 안 좋아한대.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말래. 내가 왜냐고 물었더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임유진은 애옹이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구은정이 말했던 자신을 짝사랑하다 떠난 여자 이야기가 떠올랐다.이에 연하는 피식 웃었다.“나는 그 말 다 핑계 같아. 그냥 나한테 마음 없어서 거절하려고 만든 말이겠지.”유진이 물었다.“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포기해야지. 더 엉겨 붙으면 보기 안 좋잖아. 어쨌든 너희 삼촌인데, 나도 자존심은 있어야지.”연하는 털털하게 웃었다.“세상에 나무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한 그루에 목 매달 필요는 없잖아!”유진은 연하의 시원시원한 태도가 부러웠다.“그렇게 생각해서 다행이네.”유지은 은정이 바로 옆집에 산다는 걸 말할까 잠시 고민했다지만 연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작게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유진아, 너 혹시 눈치챘어? 효성이 진구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유진은 놀란 나머지 본능적으로 소리쳤다.“진짜?”“거 봐, 너 전혀 몰랐지!”연하는 눈길을 식탁 쪽으로 돌려, 진구와 이야기 나누는 효성을 바라보았다.“근데 나는 선배가 효성이를 좋아할 것 같진 않더라고. 내가 효성이한테 말해볼까?”유진은 웃으며 말했다.“감정이라는 게 말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잖아. 두 사람 얘기가 잘 통하면 또 모르는 거고.”연하는 복잡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진구가 아직 고백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효성은 이미 진구가 유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연하는 생각에 잠겼다.‘이번 일 잘못하면 꼬일 수도 있겠다.’그 사이 진구와 효성은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진구의 휴대폰에 낯선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여진구 사장님, 알려드릴 게 있어요. 진소혜 씨가 뒤에서 자주 임유진 씨 험담을 해요.][지난번 유진 씨랑 집 보러 갔을 때도 일부러 다른 사람들 꼬드겨 따라간 거예요. 유진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장효성이 출장 갔다가 돌아왔거든요. 오늘 우리 집에 들른다고 했어요.”여진구는 오늘 일정을 확인하더니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도 저녁에 갈게. 술이랑 음료, 저녁까지 내가 다 챙길게!”유진은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연하랑 효성한테 단톡방에서 말할게요.”진구는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그런데 요즘 그 이웃, 또 널 귀찮게 하진 않았어? 남자야, 여자야? 얼굴은 봤어?”“그 사람은...”유진이 막 대답하려던 찰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온 사람은 기획팀 부장이었고, 업무 보고를 하러 온 참이었다.유진은 잡담을 멈추고, 진구에게 먼저 일 보라고 한 뒤, 자리를 나섰다. 사장실에서 나와 걸으면서 유진은 속으로 생각했다.‘이웃이 구은정 삼촌이라는 걸 선배가 알면 어떤 반응일까?’오후.은정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 약속이 생겨서 좀 늦게 들어간다며, 애옹이를 잘 부탁한다고 했다.은정은 예전부터 애옹이를 돌보던 도우미 아주머니를 그만두게 했고, 그 뒤로는 그가 자리를 비우면 애옹이를 돌보는 일은 자연스럽게 유진의 몫이 되었다.마침 오늘은 집에 친구들이 오기로 되어 있어 은정에게 수업할 시간도 없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유진은 메시지를 보냈다.[퇴근하고 애옹이 우리 집으로 데려갈게요. 집에 올 때 데리러 오세요.]은정이 보냈다.[응. 저녁은 밖에서 먹을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유진은 은정이 보낸 메시지를 보며, 다시 묘한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곧 누가 다가와 업무 얘기를 꺼냈고,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은 채 은정에게 답장하는 것도 잊어버렸다.퇴근 후, 진구를 포함한 몇 명이 유진의 집에서 모였다. 해외에서 돌아온 효성이 모두에게 선물을 준비해 왔고, 진구까지 빠짐없이 챙겼다.유진은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앉아 있으라 하고, 옆집에서 애옹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먼저 간식을 먹이며 애옹이를 달랬다.“고양이 너무 귀여워! 어디서 데려온 거야?”고양이를 좋아하는 연하가 애옹이
“열나는 거 아니야?”구은정이 손을 들어 임유진의 이마에 닿으려 했다. 유진은 고개를 저으려다, 따뜻한 손바닥이 이마에 닿는 순간 겁이 나서 몸을 멈췄다.“괜찮아. 열은 없네.”은정은 손을 거두며, 자연스럽게 덧붙였다.“내일이나 모레 비 온대. 날도 추워질 테니까 출근할 땐 따뜻하게 입고.”“네.”유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들어가.”은정은 유진의 얼굴빛이 아직도 어두워 보이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재채기라는 건 누군가에게 마음이 생기는 것처럼 제어할 수 없는 거니까, 굳이 미안해할 필요 없어.”그는 자기 책을 정리하면서 툭 던지듯 물었다.“내일 아침엔 뭐 먹고 싶어?”은정의 담담한 태도 덕분에 유진도 점차 긴장이 풀렸다. 조금 전의 상황도 잊은 듯 웃으며 말했다.“건너편 가게의 호떡이랑, 만두요! 치즈 들어간 거로!”은정은 잔잔하게 웃었다.“알겠어. 일찍 자. 내일 아침에 내가 사다 줄게.”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전 이만 들어갈게요. 삼촌도 일찍 쉬세요!”애옹이는 눈을 반쯤 뜬 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가 나가는 걸 보고 아쉬운 듯 두어 번 울었다.“착하지, 얼른 자. 내일 보자!”유진은 애옹이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유진의 표정은 생기 있었고, 목소리는 맑고 귀에 감겼다.애옹이를 달랜 후, 유진은 은정에게 미소로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집으로 돌아갔다.이번엔 은정이 현관까지 배웅하지 않았다. 앉아 있을 때야 그나마 괜찮지만, 함께 일어나면 서로 민망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괜히 유진이 다음에 또 오기 꺼려질 수도 있었으니까.문이 닫히고 나서야, 은정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얼음물 병을 들어 반쯤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조금 전 유진이 당황하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웃음이 났다. 애옹이가 그의 무릎 위로 올라와 하품하며 몸을 늘어뜨렸다. 그는 애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유진의 생각뿐이었다.조금 전 그녀가 나갔을 뿐인데
저녁 식사를 할 때까지도 유진의 귀 끝은 여전히 붉었다.마침 은정이 자연산 농어를 쪄서 내왔는데, 아까 유진에게 다가왔던 것도 이걸 간장조림으로 할지, 찜으로 할지 물어보려던 참이었다.유진은 찜으로 조리된 생선을 한 입 먹어보았다. 살점이 부드럽고 신선해서 비린내 하나 없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생선 냄새 너무 좋아요!”은정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애옹이 간식보다 더 맛있어?”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볼이 부풀 정도로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애옹이 간식이 더 맛있거든요!”은정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다음엔 애옹이 간식 살 때, 두 봉지 사야겠네.”얼굴에 철판 깐 지 오래라고 생각한 유진도 결국 푸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고개를 든 은정은, 조금 전까지 웃음이 어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진의 반짝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며,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식사가 끝나고 나자, 은정이 식탁을 치우고, 유진도 자청해서 거들었다. 남은 재료들을 냉장고에 정리한 뒤, 유진은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오는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유진은 등을 조리대에 기대고 애옹이를 품에 안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은정이 소매를 걷은 채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은은한 회색 셔츠의 소매가 팔꿈치까지 올라가 있었고, 전완근이 드러났다. 그의 동작은 느긋하면서도 단정했고, 어딘가 나른한 멋이 묻어났다.맞춤형 정장 바지까지 갖춰 입은 모습은 단정하면서도 날렵했다. 은정의 길고 탄탄한 다리와 넓은 어깨, 단단한 상체가 균형을 이룬 체형이 눈에 띄었다.예전에 유진은 방연하에게 왜 그렇게 구은정을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방연하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거칠고 야성미가 넘치면서도 퇴폐적인 페로몬이 있다며 능글맞게 웃었다.유진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었다. 페로몬은 무슨, 그냥 몸이 좋은 거라고 하자 연하는 유진이 잘 몰라서 그렇다며 웃
“그러니까, 넌 왜 받은 거야?”은정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한 번 받으면, 그 뜻을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계속 오해하게 만들겠다는 거지?”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이제 알았어요. 다음에 여진구 선배한테 확실히 말하고, 더는 안 받을게요.”은정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칼을 들어 채소를 썰기 시작했다.“그래. 그럼 이제 나가서 놀아.”유진은 주방을 나가려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듯 걸음을 멈췄다.“잠깐만요, 삼촌, 그러면 삼촌은요?”은정은 손을 멈추고 천천히 유진을 돌아보았다.“뭐?”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나한테 잘해주는 이유는 뭐예요? 삼촌도 나한테 무슨 목적 있는 거 아니죠?”은정은 잠시 말이 없다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네가 나한테 수업해 주니까.”이에 유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와, 진짜 솔직하네.”은정은 단호하게 말했다.“너한테는 가식 떨 필요 없으니까.”유진은 은정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애써 웃으며 넘겼다.‘아냐, 원래 저 사람 성격이 저런 거야.’그러고는 애옹이를 꼭 안고 거실로 돌아갔다.유진은 퇴근길에 들른 펫숍에서 애옹이의 새 옷과 장난감을 몇 개 사 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애옹이에게 한 벌씩 입혀 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애옹이는 무척 순순히 유진에게 협조했다.마지막으로 핑크색 레이스 원피스를 입혔을 때, 은정이 부엌에서 접시를 들고 나왔다. 그는 애옹이의 차림을 보고, 한순간 멈칫했다.유진은 애옹이를 들어 올려 은정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어때요? 예쁘죠?”은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가 좋으면 됐어.”그러자 유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건 철저히 삼촌 같은 빠꾸 없는 상남자의 취향에 맞춘 코디예요.” 그러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빠꾸 없는 상남자 취향?”“그렇죠! 핑크색, 반짝이, 공주풍 스타일을 좋아하는 거.”유진이 장난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평소처럼 임진은 부서 동료들과 함께 야근했다. 유진은 자기 일을 사랑했고, 늦게까지 일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간을 확인하게 되었다.창밖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유난히 지루하게 느껴졌다.‘이거 혹시 애옹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걸까?’마침내 모든 업무를 마치고 퇴근할 시간이 되자, 유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짐을 챙겼다.그때, 여진구가 다가와 삼계탕이 담긴 보온 용기를 건넸다.“우리 엄마가 오후에 보내주신 거야. 저녁에 가서 먹어.”그러나 유진은 얼른 손을 저었다.“아니요, 선배 어머니가 주신 건데 제가 어떻게 받아요?”“뭐 이렇게 딱 잘라 거절해?”진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농담이야. 두 개 보내주셨거든. 하나는 너 주려고 한 거야. 오후에 너무 바빠서 이제야 전해주네.”그 말에 유진은 그제야 받아들었다.“그럼, 이모께 꼭 감사하다고 전해줘요!”“무슨 새삼스럽게.”진구는 일할 때 끼는 얇은 금테 안경을 썼는데, 더 똑똑하고 멋있어 보였다.“집에 가서 따뜻하게 먹어.”“알겠어요!”유진은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진구는 유진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걸 보며 가만히 미소 지었다.한편, 옆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진소혜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가방을 챙겨 다가왔다.“사장님, 오늘 차 안 가져왔어요. 혹시 태워다 주실 수 있을까요?”그러자 진구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회사 근처에 집 구한다고 하지 않았나요?”그 말에 소혜는 잠시 당황했지만, 빠르게 대답했다.“어머니가 오늘은 집으로 오라고 하셨어요!”진구의 태도는 이미 냉대하는 태도였다.“난 아직 볼 일이 있어서요. 오늘 택시비 회사에서 처리해 줄 테니까 그렇게 가요.”진구는 말을 끝내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갔다.소혜는 주변을 지나가는 동료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걸 보며 민망한 듯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유진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옆집 문이 열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