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아심이 미소를 지었다.“수업해, 나는 혼자서 도도희 이모를 찾아볼게. 이모가 정원에 있는 것 같아서.”한결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좋아. 선생님이 휴대폰을 교실에 두고 가신 걸 보니 근처에 계실 거야. 만약 못 찾으면 다시 나를 찾아와.”“응.”아심은 미소로 대답하고, 도서관의 측문을 지나 정원으로 향했다. 측문을 나오자, 강아심은 도도희가 벤치에 앉아 작은 여자아이의 그림을 보며 분석해 주는 모습을 발견했다.그 옆에는 커다란 치자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흰 꽃들이 만개해 있어 짙은 향과 함께 우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마치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도도희처럼, 그녀는 부드럽고 고요하며,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존재였다.아심을 발견한 도도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그 아이는 그림책을 안고 교실로 돌아갔다.“아심아!”도도희가 다가오자, 아심도 다가가 그녀와 가볍게 포옹했다.“저 왔어요!”도도희의 머리카락은 설 때보다 조금 길어져 있었고, 흰 옥비녀로 뒤에서 단정하게 묶여 있어, 지적이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너무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지만, 여기까지 온 김에 며칠 더 머물러 줘.”도도희가 웃으며 말하자, 아심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보통 사람은 이모 강의를 듣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인데, 나는 초청받아 왔으니 큰 영광이죠!”도도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입꼬리를 올렸다.“한 사람 소개해 줄게.”도도희는 그렇게 말하고, 도서관 2층을 향해 소리쳤다.“시언! 시언아, 내려와 봐.”아심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일까 두려워했지만, 곧 측문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심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시언의 강인하고 잘생긴 얼굴이, 불시에 아심의 시야에 들어왔다. 시언 또한 아심을 보자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검은 눈동자가 순간 수축하였고,
도도희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시언아, 심문하는 듯한 말투로 아심에게 말하지 마. 여긴 네가 지휘하는 삼각주가 아니야. 모든 사람을 첩자로 의심하지 말라고!”시언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냥 대화를 좀 나누고 싶었을 뿐이에요.”도도희는 헛웃음을 지었다.“대화를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러니 삼십이 넘도록 여자친구가 없는 거지!” 아심은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참았다. 그 모습은 따뜻한 봄바람에 흔들리는 하얀 치자꽃처럼 청아하고 순수했다.시언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스쳐보며 말했다.“이모, 아심 씨와 계속 얘기 나누세요. 이모가 부탁하신 걸 아직 다 못 고쳤으니, 다 고치고 다시 올게요.”“그래, 고생이 많다. 다 끝나면 맛있는 거 해줄게!”도도희는 익숙한 말투로 그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시언은 다시 한번 아심을 쳐다본 뒤, 돌아서서 걸어갔다.그가 떠난 후, 도도희는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얘는 어려서부터 부대에서 자랐고, 커서도 주위에 남자들뿐이라 여자와 교류가 별로 없어서 말투가 좀 딱딱해. 너무 신경 쓰지 마.”아심은 웃었다.“괜찮아요. 익숙해요.” “익숙해?”도도희가 의아해하며 묻자, 아심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런 성격의 사람들에게 익숙하다는 뜻이에요.”“사실 정말 좋은 사람이야. 익숙해지면 알게 될 거야.”도도희는 아심의 팔짱을 끼고 집 안으로 걸어갔다.“숙소는 봤어? 불편한 점 있으면 말해줘.”“괜찮아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도도희는 웃으며 말했다.“아이들 옷이랑 운동기구를 좀 샀는데, 내 학생 둘이 차로 읍내에서 가져오는 중이야. 이제쯤 도착했을 테니, 내가 가서 한 번 봐야겠어.”“제가 도울까요?”“아니야, 넌 장거리 운전하고 왔으니 먼저 좀 쉬어.”도도희는 그렇게 말하며 2층을 힐끔 쳐다보았다.“만약 쉬지 않겠다면 2층에 가서 시언이 좀 도와줘. 내가 고풍스러운 축음기를 하나 찾았는데 소리가
“그래.”시언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심은 이리저리 뜯겨나간 축음기를 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이모가 당신을 도와주라고 해서 왔어요. 제가 뭘 하면 되나요?”시언은 손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넌 이모랑 어떻게 알게 된 거야?”아심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꽤 오래됐어요. 아직 강성에 오기 전, 당신을 따라다니던 시절이었죠. 어느 날 PAR에서 당신을 놓치고 헤매다가 우연히 한 미술 전시회에 들어갔어요.”“그곳에서 이모를 만났고, 이후 친구가 됐어요.”아심은 말을 마친 후, 시언에게 물었다.“당신은요? 어떻게 알게 됐어요? 꽤 가까워 보이던데.”시언은 짧게 대답했다.“어릴 때부터 알았어. 우리 할아버지와 도도희 이모의 아버지는 옛 친구 사이거든.”시언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아심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심의 눈매를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네 등 쪽의 태어났을 때부터 있던 그 반점을 다시 한번 보자.”“음?”아심은 시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리둥절해하자 시언은 진지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그 반점, 다시 확인해 보고 싶어.”아심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더니 별로 개의치 않으며 어깨의 소매를 살짝 내리고 등을 돌려 그에게 보여주었다.“그건 왜요?” 아심은 느슨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소매를 내리자 어깨 일부가 드러났다. 등의 어깨 쪽에는 이미 선명한 만다라 문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시언은 검은색 속옷 끈을 손으로 내려, 문신이 완전히 드러나도록 했다. 아심은 그의 손길에 몸을 살짝 굳히며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응?”아심은 시언이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자기 입에서 나온 소리가 어딘가 부드럽고 애교 섞인 소리라 스스로 놀랐다. 그리고 시언의 시선을 느끼자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살짝 돌렸다.시언의 눈빛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시언은 아심의 옆모습을 잠시 응시하다가 얇은 입술을 다물었다.마음속 생각을 곧바로 정리한 그는 문신을 세심하게 살펴보았지만, 태
강시언은 앞선 대화를 넘어 다시 축음기를 고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물었다.“설날에 네가 인가마을에서 만났다고 한 친구, 그 친구가 급히 떠났다고 했지? 그게 도도희 이모였어?”설날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강아심의 마음 한구석이 미묘하게 아려왔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당시 도도희가 갑작스러운 일로 떠나지 않았다면, 셋이 일찍이 서로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번 만남이 오히려 덜 어색해졌을지도 모른다.아심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봐요.” “네가 뭘 도울 수 있는데?” “뭐든지!”아심은 대답한 뒤, 다소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그렇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요. 내가 할 줄 아는 일만 시켜요.”이에, 시언은 가볍게 웃었다.“네가 도와줄 건 없어. 제발 방해나 하지 마.”아심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내가 언제 당신을 방해한 적 있나?”그 말에 시언은 차분히 아심을 한 번 흘겨보며 말했다.“하나하나 다 얘기해줄까?”아심은 살짝 눈썹을 올리며 다소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요.”시언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아심은 그의 방해가 되지 않으려 조용히 방을 둘러보다가, 책장에 있는 책을 한 권 꺼냈다. 방에는 탁자나 의자가 없었기에, 아심은 벽에 기대어 바닥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몇 장을 넘기다가 문득 눈을 들어 시언을 바라보았다. 시언의 집중된 옆모습은 차분하고 고요해 보였다.가끔 시언도 아심을 힐끗 쳐다보곤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아심은 급히 고개를 돌리며 책에 집중하는 척했다.축음기는 오래된 탓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다. 시언은 잠시 밖으로 나가서 필요한 새로운 도구와 부품을 가져와서 또 한 시간가량을 더 수리했다.시언은 이 낡은 잡동사니 방에 익숙한 듯, 오래된 서랍장에서 LP 판을 찾아내어 턴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부드럽고 낮은 음색이 조용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이에 아심은 책을 안고서 감
강시언은 담요를 테이블 위에 두고, 축음기를 끄며 말했다.“이모가 방금 전화했어. 저녁 준비가 다 됐으니까 우리 가자고 하시네.”“그래요!”아심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가죠!” 서로에게 미묘하게 느껴졌던 친밀감은 어둠이 내리자마자 사라졌다.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로 몇몇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보였는데, 시언을 보자마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겁에 질린 듯 꼼짝도 하지 못하는 모습에 아심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참, 저 사람은 태생적으로 남들과 어울리기 힘든 아우라를 타고났구나.’아심이 웃는 소리를 들은 시언은 그녀를 힐끔 돌아봤다. 왜 웃는지 짐작한 듯했으나, 입술을 꾹 다문 채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날씨는 따뜻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저녁은 도도희가 머무는 별장 앞 잔디밭에서 준비되었다. 아심과 시언이 도착했을 때, 도도희의 제자들 몇몇이 식사 준비에 한창이었다.길게 놓인 식탁 위에는 다양한 요리와 함께 와인이 준비돼 있었다. 식탁에 놓인 음식은 이곳 요리사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공수해 온 것처럼 보였다. 아심은 지난번 이곳에서 먹었던 해산물 무전을 발견하고 웃음을 지었다. “와, 정말 예쁜 분이시네요!”한 여자가 커다란 양다리 구이를 들고 나와 식탁에 올려놓은 뒤, 아심 쪽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앞치마에 묻은 기름을 손으로 대충 닦아낸 뒤, 아심에게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기주현이에요.”아심도 손을 내밀어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강아심이예요.”주현은 동그란 눈에 동그란 얼굴을 하고 있었고, 티셔츠에는 유화 물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다.“주한결 선배가 도도희 선생님 친구분이 정말 예쁜 사람이라고 했거든요. 저는 그냥 평소처럼 과장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진짜 천상에서 내려온 미녀시네요!”아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칭찬해 줘서 고마워요!” 이때 시언이 다가오자 기주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와, 천상에서 내려
주한결이 기주현을 향해 말했다.“기주현, 너나 먹어. 괜히 아심 핑계 대지 마.”“선생님, 선배 좀 혼내주세요! 평소에야 저를 놀리는 건 그렇다 쳐도, 오늘은 내 남신, 여신 앞에서 제 체면을 구겨버리잖아요.”주현은 도도희에게 장난스레 투덜댔고, 그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도도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집만 부수지 말고, 내 화구만 무사하면 돼. 그 외엔 네 마음대로 다투든 싸우든 상관없어.” 한결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항상 고자질로 해결하려 했지? 이제 너도 알겠지, 아무도 봐주는 사람 없다는 거.”주현은 분한 듯 고개를 홱 돌리고는 시언에게 무를 올려주며 말했다.“남신 오빠, 이 무전 좀 드셔보세요. 여기가 자랑하는 명물이에요. 전 아직 안 먹어봤지만, 오빠 먼저 드시라고요.”그러자 한결이 건너편에서 장난스럽게 말했다.“강시언 형, 저 아이 말을 믿지 마세요. 오는 길에 혼자 무전 두 상자 먹고 트림만 열 번 했어요. 덕분에 차가 덜컹거렸죠.”모두가 한결의 유머에 큰 소리로 웃었고, 아심도 웃음을 참지 못해 눈물이 고였다. 그러다 우연히 시언과 눈이 마주쳤고, 그의 미묘한 미소를 보고 다시 머리를 돌렸다. 시언은 그저 차를 마시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주현은 갑자기 술병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마을에서 직접 사 온 술이에요. 오늘은 취할 때까지 마시는 거예요!” 한결은 도도희와 아심에게 음식을 권하며 말했다.“선생님, 아심, 이건 마을에서 유명한 족발이니 한번 드셔보세요.”아심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아이들은 저녁 식사했나요?”도도희가 웃으며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주방에서 아이들 저녁을 따로 준비했어. 아이들은 이미 다 먹고 방으로 돌아갔고.”그 말에 아심은 안도하며 자신에게 과일 주스를 따르며 말했다.“저는 요즘 술을 마실 수 없어서 주스로 대신할게요. 도도희 이모의 초대에 감사드리고, 오늘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해요.”모두 함께 잔을 들어 건배했다. 유리잔이 부딪치며
기주현이 급히 말했다.“제가 잘못했네요. 정말 몰랐어요. 모르고 한 거니까, 너무 나를 탓하지는 마요. 그리고 이 술은 내가 마실게요!”주현은 시원시원한 성격의 여자였다. 자신이 강시언에게 따라준 술을 직접 마셔버리고, 그에게는 대신 과일 주스를 따랐다.시언이 이번에는 주스를 마시자, 주현은 곧바로 주변 사람들에게 승리의 표정을 짓고는, 시언을 향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따른 주스를 마셨으니, 이제 우리 친구예요!”이에 시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도희가 웃으며 말했다.“축음기는 고쳐졌어? 지금 들어볼 수 있어?”주한결이 곧바로 일어나며 말했다.“제가 가져올게요.”한결은 차를 몰고 갔고, 금세 돌아와서 조규성과 함께 탁자를 하나 더 가져와 축음기를 그 위에 놓았다. 그러고는 도도희가 가져온 바이닐 음반을 올려놓았다.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고, 도도희는 미소 지으며 시언을 바라보며 칭찬했다.“정말 고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이 축음기는 오래된 거라 부품도 일부 손상돼서 대체할 수도 없었는데, 설마 고친다고 해도 예전 음질을 되찾기 어려울 줄 알았어.”시언은 살짝 미소 지었다.“예전에 한 번 고친 적이 있어서, 예비 부품을 조금 남겨뒀거든요.”아심은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이 정원이 강씨 집안의 소유라는 걸 알게 되었다.한결은 경쾌한 곡으로 바꿔 분위기를 더욱 즐겁고 편안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에블리와 규성은 춤을 추러 갔고, 한결은 아심에게 춤을 청했으나 아심은 정중히 거절했다. 주현도 시언에게 춤을 권했지만 거절당했다.결국 주현은 한결과 임시로 짝을 이뤄 춤을 추게 되었다. 하지만 곧 기주현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발 밟았잖아요, 춤출 줄 알아요?”“손은 왜 거기 있어? 어딜 만지려고 그래?”한결은 화가 치밀어 폭발할 것 같았지만, 주현에게 다시 잡혀 춤을 이어갔다. 이에 도도희는 두 쌍의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
아심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시언이 이전에 자신의 붉은 흔적을 봤던 것과 도도희의 가족을 찾는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도도희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잠시 화면을 바라본 뒤 전화를 받고 한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심은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는데, 서툴게 말하고 있었다.테이블 앞에는 아심과 시언 두 사람만이 마주 앉아 있었고, 시언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도도희 이모는 예전에 딸이 있었어. 하지만 잃어버렸고, 그 뒤로 찾지 못했지.”“그런데 예전에 온두리에서 소희가 한 여자를 만났어. 나이와 신체적 특징이 이모 딸과 일치했어.”“양재아?” 아심이 물었다. 온두리에서 만난 사람은 재아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중에 소희가 재아를 강성으로 데리고 온 것도 이해가 되었다.“맞아!” 시언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아심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이미 찾았다면, 왜 이모는 돌아가서 만나지 않은 거죠?”“예전에 몇 번이나 잘못 찾아서 상처받은 적이 많아. 아마 이번에도 실망할까 봐 두려운 거겠지.”시언은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덧붙였다.“딸을 잃어버린 고통은 그 누구보다도 컸을 거니까.”시언은 아직도 이재희가 사라졌을 당시, 도도희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아심은 비록 그 고통을 직접 체험한 적은 없었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픔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도도희가 전화를 받고 있는 모습을 돌아보자,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이런 아픔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자신이 갑작스레 답답해졌다.시언이 아심에게 물었다.“여기 며칠 더 있을 건가?”아심은 과일 주스 잔을 살짝 건드리며, 눈을 떨구고 말했다.“아직 생각 중이에요. 아마 며칠 더 있을 거예요.”“왜?” 시언이 아심을 응시하며 묻자, 아심은 눈빛을 피하며, 태연한 척 말했다.“딱히 이유는 없어요. 도도희 이모가 오랜만에 돌아오셨으니까,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요. 겸사겸사 그림도 배우고요.”그녀는
유진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 휴대폰을 챙겼다. 왜냐하면 유진이 가져온 것은 오직 휴대전화뿐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어둑한 복도에서,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서인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번에는 서인이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유진은 조금씩 용기를 내어 손가락을 더 깊이 엮었고, 결국 그의 손 전체를 단단히 쥐었다.서인의 손은 크고 뼈마디가 굵었으며, 손바닥에는 거칠지만 단단한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유진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촉감이 이상하게도 더 마음에 들었다.깊은 밤, 조용한 복도에서, 유진은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쿵, 쿵. 긴장과 부끄러움, 그리고 묘한 설렘이 섞여 있었다.민박집을 떠난 뒤, 서인은 차를 몰아 유진과 함께 산을 내려가 도시로 향했다. 그는 자기 외투를 벗어 유진의 어깨 위에 걸쳤다. 어둠 속에서 서인의 날렵한 얼굴선이 더욱 차갑고 도도해 보였다.“잠깐 눈 붙여. 도착하면 깨울게.”하지만 깊은 밤 도로를 달리는 이 순간이, 유진에게는 너무나도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유진은 전혀 졸리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전방을 바라보며 서인과 대화를 나눴다.“그 쥐덫, 아무 소용도 없을 거예요. 쥐는 계속 나올 거라고요.”그곳의 쥐들은 너무 대담했다. 사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창가에 올라와 그녀와 눈을 마주치기까지 했다.서인은 물었다.“그러면 왜 날 안 불렀어?”유진은 서인을 바라보며 말했다.“입을 막고 있었거든요!”유진은 서인이 피곤할까 봐 일부러 참고 있었다. 하루 종일 운전했으니, 이미 녹초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침대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냥 밤새도록 그렇게 버틸 생각이었다가 그 소리를 들었다. 바로 맞은편 방에서 들려오는 민망한 소리.그 순간, 유진은 차라리 쥐랑 함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서인이 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진은 본능적
“임유진!”서인의 목소리는 다급하고 거칠게 떨렸다. 그는 급히 옆방 문을 두드렸고, 문이 열리는 순간, 임유진이 그대로 서인의 품에 뛰어들었다.서인은 방 안을 빠르게 둘러봤으나 별다른 이상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지며 조용히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유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저, 저기 쥐가 있어요!”서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설명하고 반쯤 달래듯 말했다.“이런 곳에서는 쥐가 나오는 게 당연해. 그냥 네 방을 지나간 거야. 널 물지는 않아. 오히려 네가 더 무서울걸?”하지만 유진은 서인의 품 안에서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제야 서인은 유진의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커다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하얀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창백할 정도로 희고 매끈한 피부가 시각을 자극했다.반면, 서인은 방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나왔기에, 바지만 입고 상의는 벗은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 서인은 목이 바짝 타는 듯했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얼굴이 굳어버렸다.손을 뻗어 유진을 떼어내려 했지만, 유진은 겁에 질려 서인의 허리를 더 꼭 붙잡았다. 두 사람은 문 앞에서 그렇게 서 있었다.혹시라도 누가 지나갈까 걱정된 서인은 유진을 가볍게 안아 방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닫았다. 그러나 유진의 티셔츠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부드러운 체온이 서인의 맨가슴에 고스란히 닿았다.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느낌이 들자, 서인은 서둘러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이불로 감싸주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유진은 얼굴이 불타오르듯 붉어졌다.그녀는 이불을 꼭 움켜쥔 채 눈을 피했고, 서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안토니한테 가서 쥐 잡을 도구가 있는지 물어볼게.”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인은 곧장 방을 나섰다. 유진은 그의 넓은 어깨와 탄탄한 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가, 황급히 창밖으로 시
안토니는 서인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부모님이 여기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모든 절차는 다 정식으로 등록된 거예요. 게다가 이 땅은 호텔 부지에 포함되지도 않고요.”“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철거하라고 명령할 수 있어요? 보상금도 터무니없이 적고, 우리 부모님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죠?”“하지만 호텔 뒤에는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아무도 우리 편에 서지 않아요.”임유진은 분통이 터져 소리쳤다.“이건 완전히 강도질이잖아요! 소송이라도 걸어야 하죠!”토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소용없어요.”“사실, 보상금이 충분하다면 철거를 고려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그 옆에서 안주설이 조용히 말하자, 토니는 즉시 그녀의 말을 끊었다.“얼마를 준다 해도 안 돼. 우리 고향 집도 이미 팔아버렸어. 부모님께 남은 건 이 민박집뿐이야. 여기가 없어지면 어디로 가란 말이야?”주설은 난처한 표정으로 웃으며 변명했다.“그냥 의견을 낸 것뿐이야.”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상황은 알겠으니까 방법을 찾아볼게.”토니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정말 어쩔 수 없어서 서인 형한테 전화한 거예요. 형이 강성에 있는 거 알지만, 흥성 일에는 개입하기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토니는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서인에게 연락을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서인은 그날 바로 달려와 주었다.서인은 단호하게 말했다.“토니 형과 나는 형제나 다름없어요. 걔의 일은 내 일이나 마찬가지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해결할 테니까요.”토니의 부모는 연신 감사를 표했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가 되었다. 토니는 2층에 서인과 유진을 위한 방 두 개를 준비해 주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유진은 서인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나 아무것도 안 가져왔어요.”서인은 고개를 돌려 토니에게 물었다.“새 세면도구 있어? 갑자기 오느라 아무것도 못 챙겼어.”“당연하죠! 다른 건 몰라도 세면도구는 넉넉
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비싼 건 아니네요!”서인의 품에 안겼으니, 20만원이라도 아깝지 않았다. 서인은 본래 유진을 위로하려 했는데, 그녀의 표정을 보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순간 서인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유진은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지었다.“이미 산 거니까, 그냥 먹어요. 버리긴 아깝잖아요!”그녀는 티슈로 사과를 닦아내고 서인에게 하나 건넸지만, 서인은 거절하며 고개를 저었다.“난 안 먹어.”“그럼 저 혼자 먹을게요!”유진은 사과를 입에 가져가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사과가 신선해서 아삭하게 씹히며 입안 가득 달콤한 과즙이 퍼졌다.이윽고 차 안에 오직 사과를 씹는 소리만 울렸다. 서인은 앞을 주시하며 운전을 계속했지만, 무심결에 목젖이 한 번 움찔거렸다. 유진은 연달아 몇 입을 베어 물다가 반쯤 먹은 사과를 들고 서인을 바라봤다.“정말 안 먹어요? 진짜 맛있어요!”2만원으로 이 정도 퀄리티라면 완전 대박이었다. 그러나 서인은 도로를 응시한 채 담담하게 말했다.“보통 과수원에서는 사람들이 몰래 따 먹는 걸 방지하려고 사과에 농약을 뿌려 둬.”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든 사과를 바라봤다가 곧 얼굴이 새파래졌다.“왜 이제야 말하는 거예요?”서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방금 떠올랐어.”“어떡하죠? 나 중독되는 거 아니에요?”유진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며 억울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내가 만약 중독돼서 장애라도 생기거나, 바보가 되면, 사장님이 평생 책임져야 해요!”서인은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왜 내 탓이지?”“사장님이 산 사과잖아요!”당당한 유진의 태도에 서인은 말문이 막혔다. 물론, 사과에 농약 따위는 없었다. 결국 유진은 바보가 되지도, 장애가 생기지도 않았고, 심지어 배 아픈 일조차 없었다.두 사람이 안토니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였다. 토니네 민박집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주변에는 몇 개의 민박집이 듬
산길 위로 가끔 여행객들의 차가 지나갔다. 멀리 보이는 민박집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이게 무슨 냄새지? 사과 향 같은데?”임유진은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기쁜 표정으로 돌아보며 말했다.“저기 사과나무가 있어요!”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만 가자. 이제 출발해야 해.”“딱 하나만 따면 돼요!”유진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사과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무에 열린 사과를 봤다. 달빛을 받아 가장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골라 따냈다. 그리고 서인에게 줄 사과도 하나 더 따려 했다.사과를 막 손에 쥐려던 찰나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가 내 사과를 훔쳐 가지? 거기 서요!”어둠 속에서 손전등 불빛이 깜박였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유진은 얼어붙었다. 사과나무가 야생인 줄 알았는데, 주인이 있는 나무였다니!유진은 처음에는 자리에 서서 주인을 기다려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사람의 고함과 함께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커다란 개가 사나운 기세로 유진을 향해 돌진했다.유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 본능적으로 뒤돌아 도망쳤다.“사장님!”멍! 멍멍멍! 사람 허리까지 올 법한 덩치 큰 검은 개가 빠르게 움직였다. 유진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 더욱 거칠게 그녀를 향해 뛰어들었다. 유진은 손에 사과 두 개를 꼭 쥔 채, 있는 힘껏 서인을 향해 달렸다.서인도 상황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고, 유진을 향해 달려갔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유진은 순식간에 뛰어올라 그의 품에 안겼다. 유진은 겁에 질린 채 서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순간, 개가 가까이 다가왔고, 서인은 한쪽 다리를 들어 강하게 개를 걷어찼다. 50킬로그램은 나갈 듯한 큰 개가 힘껏 날아가 땅에 쾅 하고 떨어졌다.개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몇 번 뒤틀다가 겨우 일어났지만, 아까의 사나운 기세는 사라지고 멀찍이서
“흥성.”흥성은 강성의 옆도시로, 관광 도시였다. 이에 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다.“나도 같이 갈게요!”꽤 발랄하게 말하는 유진에 서인은 코웃음을 쳤다.“내가 뭘 하러 가는지도 모르면서 따라가겠다고?”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뭘 하든 상관없어요. 어쨌든 나도 갈 거니까요!”서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안 돼.”“왜 안 돼요?”“오늘 돌아오지 못할 거야. 거기서 이틀은 머물러야 하는데, 네가 따라오면 불편해.”“그냥 여행 가는 셈 치면 되잖아요!”서인은 대꾸하지 않았지만, 다음 사거리에서 임씨 저택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이에 유진은 여유롭게 말했다.“그러면 집에 데려다줘요. 집에 가서 짐 챙기고 내 차로 흥성으로 갈게요. 어쩌면 거기서 우연히 만날 수도 있겠는데요?”“임유진.”서인은 얼굴을 굳히자, 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봤다.“우리 동료들은 다 놀러 갔는데, 난 너 때문에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사장님은 나를 두고 혼자 나가겠다고요? 그게 맞는 거예요?”서인은 설명했다.“나는 노는 게 아니라, 일이 생겨서 가는 거야.”“몰라요. 어쨌든 따라갈 거예요. 나 어린애 아니니까 방해 안 할게요. 그냥 나 없는 셈 치면 되잖아요!”유진은 애타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사장님은 일 보러 다니고, 난 혼자 놀러 다닐게요. 절대 방해 안 할 거예요. 됐죠?”서인은 시간을 확인했는데, 더 미루면 해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그럼 말 잘 들어야 해.”서인이 신신당부했다.“약속할게요!”유진은 신나서 손까지 들며 맹세할 기세였다.서인은 고속도로에 올라탄 뒤 오현빈에게 전화를 걸어 가게를 잘 봐달라고 당부했다. 자신은 이틀 동안 자리를 비울 거라고 했다.유진도 노정순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 설명 없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겠다고만 말했다. 노정순은 오전에 여진구가 찾아와 회사 워크숍을 언급했던 걸 기억하고, 그녀가 회사 동료들과 함께 나가는 줄 알고는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당부했다.전화를 끊
강성의 한 묘지.홍복과 표용을 비롯한 전우들의 묘가 모두 이곳으로 옮겨졌다. 전우들은 이제 백랑의 곁에서 다시 함께할 수 있었다.서인은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씩 놓았고, 임유진도 묘지 밖에서 사 온 꽃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돌계단에 앉아, 멀리 보이는 산을 조용히 바라보았다.유진도 서인의 곁에서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이야기 좀 더 해 주세요!”서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다 얘기했잖아.”유진은 묘지를 찾을 때마다 늘 삼각주에서의 과거를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서인이 기억하는 건 이미 다 말해 준 상태였다. 그러나 유진은 질세라 다시 말했다.“이번에 전우들 묘지가 새로 생겼잖아요. 분명 더 많은 이야기가 있을 텐데요!”“없어.”서인은 한쪽 다리를 굽힌 채 느슨하게 앉아 있었고, 말투 역시 어딘가 귀찮아 보였다.이에 유진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그러면 다음에 소희한테 물어봐야겠네!”그제야 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유진을 노려봤다.“진짜 듣고 싶어?”“당연하죠!”유진은 활짝 웃으며 턱을 괴고, 이야기 들을 준비를 했다. 유진은 과거가 늘 궁금했다.서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맨날 말하는 내 229명의 여자친구들 얘기, 하나씩 다 해 줄까?”유진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곧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고는 곧장 옆에 있던 꽃을 집어 들어 서인에게 던졌다.서인은 피식 웃으며, 거친 목소리 속에 장난기가 묻어났다.“이야기 듣고 싶다며? 229개의 이야기가 있지. 아마 내년까지도 다 못 들을걸.”“아직도 그 말을 해요?”유진은 씩씩거리며 서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서인은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별다른 힘을 쓰지도 않았지만, 유진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밀어낼 수 없었다.마치 큰 회색 늑대 앞에 선 어린 토끼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 채 버둥거릴 뿐이었다.잠시 후, 유진은 숨을 몰아쉬며 결국 포기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임유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그러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겠네요!”문신 남자는 점점 짜증이 났다.“겨우 서빙하는 주제에 뭘 그렇게 잘난 척이야? 내가 맞팔 달라는 것도 네 급을 봐준 거라고!”유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사장님! 여기서 행패 부리는 사람이 있어요!”얼마 지나지 않아 서인이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다부진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기운은 주변 공기마저도 서늘하게 만들었다.서인의 싸늘한 눈빛이 문신 남자를 향하자, 그는 마치 얼음장 같은 시선에 찔린 듯 등골이 서늘해져,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유진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이 돈을 내기 전에 제 SNS 맞팔하라고 요구했어요.”그제야 문신 남자의 일행이 이쪽 상황을 알아차리고 하나둘 일어나 힐끗거리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인상이었고,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그때, 오현빈과 이문이 후원에서 걸어 나왔다.현빈은 본래 덩치가 크고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손에 주방칼까지 들고 있었다.문신 남자의 일행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슬그머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그때, 서인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며 문신 남자를 향해 말했다.“좋아. 내꺼를 추가해요. 나랑 얘기 좀 하자고요.”문신 남자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굴이 창백해지며 허둥지둥 휴대폰을 꺼내 결제를 마쳤다. 그러고는 재빨리 동료들을 불러 가게를 빠져나갔다.사람들이 나가자, 현빈이 비웃으며 말했다.“이런 겁쟁이 녀석들. 다음에 또 이런 쓰레기들이 나타나면 말도 필요 없어. 바로 나를 불러.”유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알겠어요!”서인은 유진을 한 번 쓱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문은 그를 따라가며 넌지시 물었다.“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임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누가 당신 찻주전자를 훔쳐 가겠어요? 안심하세요!”서인은 유진을 날카롭게 노려보며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손님이 너 찾으러 왔으면, 할 얘기 끝났으면 나가라. 가게 바쁘다.”유진은 서인의 표정이 더 이상 좋지 않자, 정말로 화를 낼까 봐 서둘러 대답했다.“별거 아니에요. 내가 그냥 먼저 보낼게요!”그렇게 말한 뒤, 유진은 황급히 돌아서서 여진구를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진구가 서인의 찻주전자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그거 내려놔요!”유진은 깜짝 놀라 뛰어가며 소리쳤다. 놀란 진구는 손을 헛디뎌 찻주전자를 떨어뜨릴 뻔했다.“왜 그래?”유진은 재빨리 찻주전자를 낚아채듯 빼앗았다.“이거 사장님이 2,000만 원 주고 산 거예요. 깨지면 감당할 수 있어요?”“뭐? 2,000만 원?”진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게 2,000만 원짜리 골동품 같지는 않은데?”유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물었다.“선배 골동품에 대해 알아요?”“아니?”“그럼 됐죠!”유진은 찻주전자를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2,000만 원인데 한 푼도 깎지 않고 샀어요. 그만큼 애착이 있다는 거죠. 깨지면 당연히 화내겠죠!”진구는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난 잘 모르지만, 우리 작은아버지는 골동품 전문가야. 가져가서 감정받아 볼까?”그리고 그는 서둘러 덧붙였다.“오해하지 마. 혹시라도 바가지를 썼을까 봐 걱정돼서 그래.”이 찻주전자가 아무리 봐도 2,000만 원짜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찻주전자를 내려놓더니, 진구를 밖으로 밀어냈다.“무슨 바가지요? 마음에 들면 2,000만 원이든 2억이든 가치가 있는 거고, 마음에 안들면 2천원도 아까운 거죠.”“그러니까 선배도 선배 할 일 하러 가요! 내 일 방해하지 말고요!”진구는 서인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마지못해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가기 직전,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유진아, 연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