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예형을 바라보며, 강솔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 많은 일을 겪고 나서, 그녀도 변했고, 예형도 변했다. 예형은 이제 더 다정해졌고, 더 따뜻해졌지만, 문제는 강솔이 더 이상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예형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심서진이 나중에 한 짓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었어. 사실 난 이미 분명하게 말했어. 내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고, 사귈 생각도 없다고. 그날 밤은 실수였어.” 그러고는 손을 모으며 말했다. “걔가 나한테 돈을 요구했었어. 난 그 돈을 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뒤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꾸민 거야!” 강솔은 조용히 말했다. “걔는 그날 밤 이후로 너를 얻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네가 사귀고 싶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 원한을 품었을 거야.” 예형은 화가 난 듯 말했다. “걔가 나에게 원한을 품는 건 괜찮지만, 왜 너까지 해치려 했을까?” 강솔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그건 걔가 널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야.” 예형은 잠시 멍해졌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나는 사랑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더더욱 사귈 수 없어.” 잠시 말을 멈춘 예형은 깊은숨을 내쉬고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강솔, 요즘 나는 많은 생각을 했어. 우리가 어떻게 시작됐고, 어떻게 지내왔는지. 그리고 결국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아마 너는 설 이전부터 이미 나에게 실망했던 거지?” “내가 심서진을 챙기는 걸 네가 못마땅해했을 때, 나는 네가 괜히 화를 내는 거라고 생각했어.”“하지만 네가 진석과 함께 있는 걸 보고서야, 내가 서진과 있을 때 네가 느꼈던 감정을 이해하게 됐어.” “나는 항상 회사와 프로젝트만 신경 썼지, 우리 관계를 돌아볼 시간도, 너의 생각을 헤아릴 시간도 전혀 없었어. 정말로 난 형편없는 남자친구였어.” 강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배운 게 있다니 다행이네. 나도 한때 너를 동경하고, 좋아해서 네 뒤를 쫓아다녔
강솔은 잠시 멍해졌다. 이전에 진석도 강솔에게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형 앞에서 마음속 답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이에 강솔은 솔직하게 예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제가 됐든, 10년 전이든, 그 이후든, 네가 아니라 진석을 선택했을 거야.” 강솔은 한때 예형을 정말 좋아했고, 그를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예형은 그녀에게 이상적인 존재였다. 반면에 진석은 강솔의 삶의 일부였고, 뼛속 깊이 스며든 사람이었다. 진석을 잃으면, 강솔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다. 예형의 눈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줄기 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강솔은 휴대폰을 내려다봤지만, 여전히 진석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평소라면 이 시간쯤, 진석은 그녀에게 여러 메시지를 보냈을 텐데, 오늘은 아무것도 없자, 조금 불안해졌다. 서빙 직원이 음식을 가져오자, 강솔은 말했다. “음식은 필요 없어요. 이분께 포장해 주세요.” 예형은 강솔을 의아하게 바라보았고, 강솔은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할 말은 다 했어. 더 이상 같이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이제 집에 가고 싶어.” 강솔과 진석이 함께하는 그 집으로. “내가 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했어. 우리 관계에서 부족했던 걸 보완하고 싶었어. 아마 이게 우리 마지막 식사일 수도 있어. 끝까지 같이 먹어줄 순 없어?” 강솔은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끝난 관계야. 감정을 잘못된 곳에 쏟지 마.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꼭 잘 대해줘.” 예형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늦은 깨달음을 비웃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나와 줘서 고마워. 이제야 모든 걸 명확히 알았어. 더 이상 너를 괴롭히지 않을게. 네 말대로, 우리 평화롭게 헤어지자.”“나중에 나를 떠올릴 때, 좋은 기억만 남았으면 좋겠어.” 강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럴 거야.” 그러고는 일어나며 말했다
강솔은 참지 못하고 진석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언제 돌아와?] 강솔은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밖에는 따뜻한 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기지개를 켜며 상쾌한 아침을 맞았다. 하지만 진석에게서 여전히 답장이 오지 않자, 강솔은 씻으러 갔다. 아침을 먹고 차를 몰고 회사로 가는 동안에도 진석의 답장은 없었다. ‘저녁을 먹고 있는 건가?' 강솔은 계속해서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그의 프로필 사진 옆에는 여전히 새 메시지 알림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마음이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 강솔은 진석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혹시 중요한 일로 바빠서 전화를 받지 못하거나, 자고 있을까 봐 망설여졌다. 그런데도 걱정이 되어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그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하지만, 어제와 똑같이 진석은 통화를 거절했다. 곧 이어온 메시지는 그저 한마디뿐이었다.[이따가 다시 연락할게.] 강솔은 급히 답장을 보냈다. [나야 괜찮아,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지?] 하지만 진석은 더 이상 답을 하지 않았다. 강솔은 소파에 힘없이 기대어 앉았다. 휴대폰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고, 평소 좋아하던 간식에도 손이 가지 않았다. 드라마를 볼 기분도 아니었다. 강솔은 소파에 누워 무심코 잠에 들었고, 한밤중에 추워서 잠에서 깼다. 휴대폰을 다시 들고 확인했지만, 강솔의 기대는 단번에 실망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진석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강솔은 혹시 두 나라의 통신망에 문제가 생겨 자신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은 것인가, 진석의 메시지가 도착하지 않은 것인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실망한 채 휴대폰을 소파에 던져버리고는, 다시 잠을 잘 수 없었다. 밤새 잠을 설치고, 다음 날 회사에 출근했을 때도 강솔은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오전 회의를 마친 후, 윤미가 강솔의 사무실로 와 웃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기운이 없어 보이네요. 인터넷에서의 문제는 다 해결됐잖아요?” “괜찮아
곧 소희에게서 전화가 왔고, 강솔은 즉시 전화를 받으며 다급히 물었다. “소희?” 소희는 말했다. [아까 선배에게 전화했어. 아무 일도 없대. 아마 아침 먹고 있어서 네 전화를 못 본 걸 거야. 강솔은 잠시 멍해졌다. “정말이야?” 소희는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이야, 내가 널 속일 리 없잖아!] 강솔은 잠깐 머뭇거렸다. “알겠어.” 강솔은 마음이 서서히 진정되었지만, 동시에 한기가 몰려왔다. 진석이 아무 일도 없었다면, 일부러 연락을 피한 게 아닐까? ‘소희의 전화를 받았는데, 왜 내 전화는 받지 않았을까? 그때는 못 받았더라도, 이후에 남긴 부재중 전화는 보지 않았을까?’ 지금까지도 진석은 한 번도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강솔은 마치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서늘해지며, 그 차가운 기운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왜 이러는 거지? 진석이 왜 갑자기 날 이렇게 외면하는 거야?' 강솔은 지난 며칠간의 일을 되짚어보며 진석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피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인터넷에서 본 그녀의 스캔들을 믿은 걸까? 아니면 경성대 포럼에서 올라온 그 사진을 봤을까?’하지만 사진은 과거에 주예형과 찍힌 것이었고, 진석은 충분히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그걸로 그녀를 멀리한다는 게 말이 될까? 진석은 지금껏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전화를 피하고 있었다. 이에 강솔은 스스로를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분노와 슬픔, 억울함이 복잡하게 얽혀 가슴을 짓눌렀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며 눈가가 붉어졌다. ‘막 사귀기 시작했는데,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거야? 이런 작은 일에도 자존심을 부리며 연락을 끊다니, 예형과 뭐가 다르지?' 강솔은 너무나도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에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안방으로 가서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가지고 왔던 그 작은 여행 가방에 자기 옷과 물건을 모두 챙겨 넣고, 강솔은 진석의
두 사람이 집에 들어서자, 강솔은 바로 물었다. “말해봐, 왜 그렇게 한 거야?” 진석은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며 소파에 앉았다. 그의 등 뒤로는 미국식 흰색 나무창이 있었고, 저녁 햇살이 따뜻하게 그의 뒤에 금빛으로 드리워져 있었다. 그 온화하고 눈 부신 빛이 그의 안경테에 반사되면서, 차갑고 금속성의 냉기를 풍겼다. 그리고 진석은 깊은 눈빛으로 강솔을 응시하며 말했다. “네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어.” 그 말에 강솔은 냉소를 지었다. “당연히 물어야지. 이렇게 혼란스럽게 넘어갈 수는 없잖아.” 진석은 잠시 강솔을 응시한 뒤, 휴대폰을 꺼내 강솔에게 보여주었다. 그 사진은 강솔과 주예형이 석양 아래 함께 서 있는 장면이었다. “이 사진, 왜 또 그를 만난 거야? 내가 떠날 때 너는 나한테 뭐라고 약속했지?” 강솔은 사진을 보고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이 사진이 자신이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날 밤, 예형과 그 동창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찍힌 사진임을 기억했다. 사진은 아주 선명했고, 촬영 각도를 보니 작업실 맞은편 카페에서 찍힌 것이 아니었다. 분명 배석류가 몰래 찍은 사진이었다. 석류가 이 사진을 심서진에게 넘겼고, 서진이 마지막으로 이간질을 시도하며 진석에게 보낸 것이 분명했다. 강솔은 변명하려 했으나, 이내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 사진 한 장 때문에 날 외면한 거야?” 진석은 어둡고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강솔, 지난 10년 동안 내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두 번 너를 포기하려 했어.”“한 번은 네가 주예형을 따라 M국에 왔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설날에 네가 제사를 지내고 나서 돌아와 나와 만두를 빚기로 했을 때였어.”“그런데 윤미래 이모가 네가 주예형 때문에 다시 강성으로 갔다고 말했지.”“그 두 번 모두 나는 너무 힘들어서, 이제 그만하자, 더는 기다리지 말자라고 스스로 말했어.” 강솔은 고개를 숙이며, 아픈 기억이 떠올라 눈물이 맺혔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강솔은 고개를 기울여 진석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을 그의 셔츠에 문지르며 훌쩍거렸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갑자기 나를 무시하고...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가 여기서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정말로 많이 걱정했어, 진짜 알기나 해?” 강솔은 진석의 어깨에 엎드려 울면서 몸이 떨렸다. 진석의 마음은 마치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 그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진석은 고개를 돌려 강솔의 얼굴에 키스했다. 진석은 그 사진을 보고 단순히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혼란스러웠고, 강솔이 주예형을 만나 그에게 다시 마음이 흔들릴까 봐 두려웠다. 더욱이 강솔이 전화를 걸어 영상 통화로 자신의 혼란과 불안함을 보일까 봐 걱정했다. 그는 강솔을 놓아주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끝까지 붙잡고 있어야 할지 확신이 없었다. 한참 동안 강솔은 천천히 진정되었고, 진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과 함께 아름다운 석양이 창문에 비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고, 슬픔도 조금씩 옅어졌다. 강솔은 코를 훌쩍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넌 여전히 날 믿지 않는 거야, 그렇지?” 진석은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강솔, 넌 나를 사랑해?” 강솔은 입술을 깨물고, 마치 반항하듯 대답했다. “안 사랑해!” 진석은 약간 찡그렸지만, 강솔의 부은 눈을 바라보며 더는 그를 추궁할 힘을 잃었다. 강솔은 벽에 기대어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씻겨 더 맑고 투명해진 눈이 단단한 결심을 내비쳤다. “다시 말하지만, 나 주예형이랑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야. 우린 이미 모든 걸 끝냈고, 다시는 연락하지도, 만나지도 않을 거야.” “비록 우리가 처음에 네가 강제로 밀어붙여서 사귀게 된 거지만, 내가 원치 않았다면 누구도 날 억지로 어쩌지 못했을 거야. 그걸 이해하겠어?” “게다가 우리 이미...” 강솔은 얼굴이 붉어지며 시선을 피했다.진석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고,
진석은 강솔에게 키스를 하며 말했다. “그러면 이번이 내가 투정 부릴 유일한 기회야. 나 좀 달래줄 수 있겠어?” 강솔은 그의 말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오빠, 그날 주예형을 만난 건 그가 다른 동창과 함께 나를 동창회에 초대하러 왔을 때야. 난 초대에 응하지 않았어. 사진 속 상황은 실제와 달라.”“그건 배석류가 몰래 찍은 거야. 그리고 심서진에게 넘겼고, 심서진이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한 거야.” 진석은 강솔의 말에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비서 그 배석류 말이야?” “그래, 심서진에게 매수당했어.” 강솔은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심서진의 일이 끝난 후에, 예형과 한 번 만나서 우리 사이의 모든 걸 정리했어. 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고, 그 사람도 더는 날 찾지 않겠다고 약속했어.”“그 사람도 오빠랑 똑같은 질문을 했거든.” “무슨 질문인데?” 진석이 묻자, 강솔이 말했다. “만약 그 10년 동안 그와 네가 동시에 나에게 고백했다면,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 선택할 거냐고.” 이에 진석은 초조하게 강솔의 답을 기다리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넌 뭐라고 대답했어?” 강솔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어. 당신이 아니라 오뻐를 선택할 거라고. 남자친구는 없어도 되지만, 진석 오빠는 없어선 안 된다고.” 아마도 예형에게 그 답을 내린 순간부터, 강솔은 자신이 진석에 대해 얼마나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해 얼마나 확고해졌는지를 깨달았다. 진석은 강솔의 대답에 눈빛이 흔들리며 마음속 깊이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강솔은 깊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알겠어? 네가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강솔은 주저 없이 진석에게 다가가 키스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오빠와 함께 있고 싶어. 이제 확신해. 그건 감동 때문이 아니야. 그저... 난 누구도 잃을 수 있
진석은 이마를 찡그리며 칼과 포크를 내려놓고 휴대폰을 꺼내 국내 뉴스를 확인했다. 이전의 사진들은 이미 삭제되었지만, 고하선과 조길영의 공개 사과문은 여전히 인터넷에 남아 있었다. 진석은 그들의 사과문을 읽으며 강솔이 그들로부터 입은 상처가 얼마나 큰지 점점 더 분명히 느꼈다. 진석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강솔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자 한 조각을 물고 대답했다. “일이 금방 해결됐거든. 소희가 나를 도와줬어.” 진석은 강솔의 말에 이어 경성대 포럼을 열어 관련된 글들을 다시 확인했다. 심서진이 올린 글은 이미 삭제되었지만, 주예형이 올린 해명 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댓글을 훑어보면서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고, 진석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심서진은 어디 있어?” “잡혀갔어. 소희 말로는 몇 년 동안은 못 나올 거야. 감옥에서 썩게 될걸.” 강솔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한테 뭐라 하는 건 참을 수 있는데, 오빠를 모욕한 건 용서할 수 없어. 경찰서에 가서 한 번 더 걷어차고 싶을 정도였어.” 진석의 마음은 원래 무거웠지만, 강솔의 말을 듣고 그의 눈에 부드러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었어?” 강솔은 큰 한 모금의 채소 수프를 마시며 자연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강솔은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잠시 멈추었고, 눈을 살짝 굴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다시 고기를 먹었다. 진석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까는 말이 없더니, 이제 와서 솔직하네.” 강솔은 얼굴이 더욱 붉어지며 말했다. “대화 주제나 흐리지 마.” 진석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었으나 목소리는 여전히 조금 무거웠다. “내가 없는 동안 이렇게 많은 일이 있었구나.” “사실 별거 아니야.” 강솔은 낙천적인 성격답게 대답했다. “조길영과 유사랑의 일은 겉보기엔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심서진이 뒤에서 조종한 거야.
도도희가 말했다.“집으로 가져올 짐이 있으면 내가 같이 가서 챙길게.”강심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요. 제가 혼자 해도 돼요. 짐이 많지 않거든요.”도경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러면 일이 끝나면 꼭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너랑 상의할 일이 있어.”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요.”그러자 양재아가 말을 받으며 웃었다.“아심이 집에 오면 내 옆방에서 지내면 어때? 우리 같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도도희는 잔잔히 웃으며 거절했다.“괜찮아요. 내가 이미 내 옆방을 정리해 두었어요. 재희와 좀 더 가까이 있고 싶거든요.”그 말에 재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그것도 괜찮네요.”아침 식사가 끝난 뒤, 강시언은 아심을 회사까지 데려다주었고, 도경수는 끝까지 마당 문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재아는 도씨 집안의 운전사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도경수가 시언의 차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며 차가운 기운이 들었다.‘역시 친자식은 다르구나.’ 재아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내가 몇 달 동안 도씨 집안에서 도경수를 모셨는데도, 강아심이 하루 있는 것만 못하네.’“가요, 늦겠어요.”재아는 시선을 거두며 운전사에게 말했다....시언은 앞을 응시한 채 운전하며 물었다.“저녁에 정말 약속이 있는 거야?”아심은 나른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부드러운 햇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떨어져 따뜻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아심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정말이예요.”그러자 시언은 그녀를 힐끔 보며 말없이 운전했고, 아심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저녁에 제가 운전해서 갈 테니 굳이 데리러 오지 않아도 돼요.”“그래.” 시언은 담담히 대답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심은 가벼운 질문을 하였다.“강재석 할아버지랑 언제 강성으로 돌아가세요?”시언이 물었다.“왜 그러는데?”“그냥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아심은 잠시 멈추었다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강재석 할아버지가 제 일
“‘강’ 씨 성이면 어때? 아심이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이야.”강재석이 논리적으로 반박했다.“그건 아심이 예전에 도씨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지. 이제 돌아왔으니 성은 반드시 바꿔야 해요.”도경수는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재희로?”도경수는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재희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도도희는 계속 다퉜어. 얼마 후 도도희는 재희를 데리고 강성을 떠났고, 그저 재희라는 예비 이름만 붙여줬어.”“나중에 집에 돌아와서야 재희로 이름을 지어주자고 했지만, 나와 도도희의 의견이 매번 엇갈려 결국 이름을 정하지 못했어.”강재석은 기뻐하며 말했다.“그 말은 재희의 운명적인 이름이 이미 강아심이라는 뜻이니 바꿀 필요가 없다는 거야!”도경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그건 절대 불가능해. 내일 바로 도도희와 상의해서 재희를 우리 도씨 가문의 호적에 올릴 거야.”“그 문제는 아심의 의견을 물어봐야지.”강재석이 말했다.“네 멋대로 결정하면 아심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어.”그 말을 듣고 도경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말했다.“물론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하지.”그는 위층을 올려다보며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밤은 도도희와 아심이가 한방에서 지내고 있어.”강재석이 웃으며 말했다.“모녀가 이미 서로를 알게 되었으니, 그만큼 거리감도 줄었겠지.”“맞아!” 도경수가 감탄하며 말했다.“볼수록 아심은 우리 도씨 가문의 사람처럼 보여.”강재석이 비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사람 깎아내릴 때는 아니었나 봐?”도경수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그때는...”“그때는 뭐? 양재아의 한마디에 휘둘려, 본 적도 없는 아가씨를 편견으로 대했잖아.”강재석이 차갑게 말했다.“그러니 아심이가 당신을 무시하는 게 당연하지.”도경수는 주름이 가득 한 얼굴로 당황하며 말했다.“그건 내 잘못이야!”“잘못을 인정한다니 다행이네!”그 말에 도경수는 찡그리며 말했다.“지금까지 재희가 날 외할
소희는 손을 뒤로 돌려 임구택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이제 신혼여행을 어디로 갈지 생각해 볼 수 있겠네.”구택의 긴 눈매가 부드럽게 변했다.“가고 싶은 곳 있어?”그 말에 소희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사실, 아직 양재아가 조금 걱정돼.”“걱정하지 마. 형님이 있으니까.” 구택이 웃으며 말했다.“형님은 절대 아무도 아심을 해치지 못하게 할 거야.”“그건 그렇지!” 소희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우리가 돌아왔을 때, 오빠랑 아심이 사귀고 있었으면 좋겠어.”“그럴 거야.”...그날 밤, 도도희는 아심을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오늘 밤은 한방에서 지내자. 아직 너랑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아심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래요!”도우미들이 아심을 위해 새 세면도구와 잠옷을 준비해 놓았다. 아심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도도희는 침대에 앉아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손짓했다.“침대로 와.”아심은 신발을 벗고 도희 옆에 앉았다. 방 안은 냉방이 세게 틀어져 있었고, 도도희는 이불을 들어 그녀의 다리에 덮어주며 말했다.“젊은 사람들이 너무 차게 하면 안 돼. 특히 너는 위가 안 좋잖아.”아심은 스스로 이불을 위로 끌어올리며 웃었다.“이제 알았어요. 제가 위가 안 좋은 건, 알고 보니 유전 때문이었네요.”이에 도도희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드디어 원인을 찾았구나!”아심은 사진첩을 넘기다가 자신이 세 살이 되기 직전의 사진을 보고 중얼거렸다.“양부모님 댁에서도 제 어릴 적 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사진 속 모습과 거의 비슷했어요.”도도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사람들이 널 자주 때렸니?”“친자식이 아니니까, 당연히 정이 없었죠.” 아심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래도 다행히 할머니가 아주 착해서 저를 보호해 주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친아들이 병에 걸리자 저를 팔아버렸어요.”도도희는 가슴이 아파 그녀를
강재석이 말했다.“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면 다 지난 일이 된다. 재희가 돌아왔으니 기쁜 일이야. 너까지 이러면 재희 마음도 편하지 않을 거다.”“그렇지!” 도경수가 눈물을 닦으며 강아심을 향해 말했다.“앞으로 남은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지난 20년의 세월을 되찾아야지!”아심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식사가 끝난 후, 모두 거실에 모여 대화를 나눴다. 강재석이 소희에게 말했다.“너희 부부도 신혼여행을 가야 하지 않느냐? 이제 재희도 찾았으니 내일부터 떠나도록 해.”소희는 만화에서나 볼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너무 기뻐서 신혼여행이고 뭐고 갈 마음이 없어요.”그 말에 강시언이 웃으며 말했다.“임구택이 그룹 일을 전부 내려놓고 널 위해 시간을 냈는데, 하고 싶은 건 해야지.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많으니 신혼여행을 미루지 마.”구택이 소희를 한 번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세요.”“걱정하지 마.” 시언이 잔잔히 미소 지었고, 도경수도 진석과 강솔을 향해 말했다.“너희도 나를 계속 돌보려 하지 말고 할 일 있으면 하러 가라. 여기 강재석도 있고, 나와 이야기하면 충분하다.”진석이 말했다.“그러면 강재석 할아버지께서 강성에 며칠 더 머물러 주세요.”강재석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당분간은 떠날 수 없구나!”도도희가 말했다.“아저씨, 어떤 일이신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그 말에 강재석이 웃으며 말했다.“그건 너희 아빠에게 물어봐라!”도경수가 눈을 굴리며 말했다.“그 일은 신경 쓰지 마라. 난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 돌아가려면 얼른 돌아가!”도도희가 호기심에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에요?”“시언과 아심의 혼사 얘기다!” 강재석이 웃으며 말했다.“네 아버지가 전에 재희를 찾으면 두 집안이 결혼을 통해 인연을 더 깊게 맺자고 했는데, 이제 와서 약속을 취소하고 나 몰라라 하고 있어.”모두가
양재아는 그 자리에 서서 창백한 얼굴로 정원을 응시했다. 저녁노을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자, 묘한 냉랭함이 깃들었다.‘이제 겨우 첫날인데, 강아심이 나에게 벌써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분명 나를 내쫓을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거야!’재아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목이 메어,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차가운 얼굴로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재아는 두 도우미가 아심을 둘러싸고 환대하는 모습을 보았다.“아가씨, 주방에서 진귀한 홍삼 특급 탕을 준비했는데 괜찮으신가요?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다른 탕으로 바꿔 드릴게요.”“아가씨, 요리는 찜으로 드시겠어요, 아니면 다른 것으로 조리해 드릴까요? 도경수 어르신께서 아가씨의 의견을 꼭 여쭙고 준비하라고 하셨어요.”“아가씨, 평소에 단맛을 좋아하세요, 아니면 매운맛을 좋아하시나요? 말씀해 주시면 앞으로 아가씨 입맛에 맞게 요리해 드릴게요.”...그들의 말이 들려오는 순간, 재아의 가슴은 서늘하게 식어갔다. 동시에 도우미들의 태도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저녁 식사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도경수는 특별히 풍성한 식탁을 준비했고, 모든 사람이 한데 모여 앉아 웃음꽃을 피웠다.도경수는 가장 먼저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오늘 첫 잔은 시언 그리고 모두를 위해 건배하네. 너희가 없었다면 나와 도도희는 우리 아심이를 찾지 못했을 거야.”도도희도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저도 여러분께 감사의 잔을 드려요. 20년간 간절히 바라온 소원이 오늘에서야 이루어졌어요.”“지난 20년 동안, 저는 하루도 편히 잠든 적이 없었고, 하루도 제 딸이 어디에 있을지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이번 생에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없었는데...”도도희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시울은 붉어졌다.“이제야 제 마음이 놓이네요.”도도희의 감동적인 말에 모두가 잔을 들어 올렸다.“도도희 이모, 축하드려요!”“스승님,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시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도도희는 아심을 의미심장하게 흘낏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뒤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아심은 도도희가 시언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주려 한다는 걸 바로 눈치챘다.꽃이 가득한 정원에는 어느새 둘만 남아 있었다. 도도희가 좋아하는 꽃은 자스민이었다. 도경수의 정원에는 자스민이 가득 심어져 있었다. 오월의 따뜻한 날씨 덕에 이미 꽃망울이 터졌고, 얼음 조각처럼 하얀 꽃잎들이 싱그러운 초록 잎 사이에 피어 있었다. 작고 귀여운 꽃들이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와 함께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고요한 정원에서 시언은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아심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그녀의 눈가를 살짝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울었어?”아심은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도도희 이모가 제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엄마라고 불러야지.” 시언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오늘부터는 엄마라고 불러야 해.”아심은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매혹적인 눈동자에는 어색함이 서려 있었다.시언은 부드럽게 말했다.“첫마디는 어렵겠지만, 한 번 입을 떼면 그 다음부터는 쉬워질 거야.”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아심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언은 아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천천히 그녀를 품에 안았다.“가족을 찾은 기분이 어때?”시언의 넓은 어깨에 기대자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심은 조용히 말했다.“좋아요.”“나도 기뻐.” 시언의 거친 손끝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었다.“네가 도도희 이모의 딸이라는 사실이 정말 기쁘거든.”아심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당신은 왜 기쁜 거죠?”시언의 눈빛에는 노을이 어스름이 비쳤고, 그의 표정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네가 드디어 가족을 찾았으니까. 그리고 나도 약속을 지켰으니까.”그 말에 아심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맞았다. 아심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고, 가족이 생겼다. 아심은 시언의 팔
도경수는 상황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재아야, 어떤 상황이든 내가 한 말은 여전히 유효하단다. 네가 친부모를 찾고 싶지 않다면 계속 이 집에 살아도 돼. 우리는 언제까지나 너의 가족이야.”그러자 양재아는 눈시울을 붉히며 목이 메인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할아버지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도경수는 서둘러 달래듯 말했다.“알고 있어.”재아는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할아버지, 저도 생각해 봤어요. 저는 친손녀도 아닌데 이 집에 계속 머물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이제 진짜 손녀분이 돌아오셨으니, 제가 여기 남아 있을 이유는 더더욱 없어요.”“하지만 저는 정말 갈 곳이 없어요. 양부모님 댁에는 돌아갈 수도 없고,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없어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도경수는 재아의 말을 듣고 더욱 안쓰러운 표정이 되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우리 손녀를 찾지 못했더라면, 걔도 너처럼 집 없이 외롭게 살았을지 모른다. 어디에도 갈 필요 없어.” “그냥 여기 계속 살아. 도도희가 아심이를 찾은 지금 정말 행복해하니까, 너한테 뭐라 하지 않을 거야. 앞으로 너와 아심이가 친한 자매처럼 지낼 수도 있겠지.”재아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저는 아심이와 아무것도 경쟁하지 않을 거예요. 여기 남아서 도우미로 일해도 괜찮아요.”“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나한테 몇 달 동안이나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도우미 취급을 하겠느냐.” 도경수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마음 편히 지내렴.”그 말에 재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감사해요, 할아버지. 아마 저희는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할아버지 곁에 오게 된 거겠죠.”도경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것도 다 인연이지.”그때 강재석이 입을 열었다.“도경수, 내 생각에는 양재아의 친부모를 찾아보는 게 좋겠어. 이 아이도 자신이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이 집에서
이 모든 것을 보며 강아심의 마음이 이상해졌다. 이 순간에서야 그녀는 진짜로 자신이 이재희라는 사실을 실감했다.“이 나무 목마는 네 할아버지가 직접 만들어주신 거야. 위에 색칠한 것도 그분이 손수 한 거고.” 도도희는 눈가에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여기 달린 금방울도 네 할아버지가 금을 녹여 특별히 만들어주신 거야. 네가 어렸을 때 이 목마를 정말 좋아했거든.”아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목마 앞에 그대로 앉아 조각처럼 섬세하고 생생한 나무 목마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도 이 목마가 참 마음에 들었다.도도희는 옷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드레스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이건 네가 어렸을 때 입었던 옷들이야.”20년이 지난 옷들은 다소 낡았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눈에 익은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그리고...”도도희는 옷장 아래 서랍에서 두 권의 커다란 사진첩을 꺼냈다. 그녀는 강아심과 함께 바닥에 앉아 사진첩을 열었다.“여기에 너의 어린 시절이 담겨 있어.”사진첩은 그동안 아무도 펼치지 못한 채 20년간 봉인되어 있었다. 겉면에는 얇은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도도희가 그것을 열기 전부터 이미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사진첩을 열자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갓난아이의 사진이었다.20년 전의 사진이라 화질은 다소 흐릿했지만, 뽀얀 볼과 크고 또렷한 눈동자는 여전히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릴 만큼 사랑스러웠다.“네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사진이야. 그때 네 아빠는 이미 떠난 후였고, 넌 나에게 살아갈 유일한 이유였어.”도도희는 한 장 한 장 사진을 넘기며 설명을 이어갔다.“이건 해성에서 찍은 사진이야. 그때 네 할아버지와 다투고 나서 널 데리고 해성으로 갔었지. 우리 둘이서만 거의 1년을 해성에서 지냈어.”“그때 나는 막 졸업한 상태라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미술 선생님으로 일했어. 넌 정말 착한 아이였어.”“내가 수업할 때면 늘 조용히 잠들어 있어서 나를 한 번도 방해한 적이 없었지.”“이건 우리가 다
도경수는 차를 마시며 여유롭게 말했다.“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고 치자. 그런데 그때 너는 동의 안 했잖아? 뭐라 그랬더라, 젊은 사람들은 자유롭게 연애해야 한다고 했었지?”“요즘은 맞선이 유행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내가 손녀를 찾으니까 이제 와서 네가 자유연애를 반대하는 건가?”강재석은 시언을 향해 물으며 말했다.“누가 맞선이 유행하지 않는다고 했어?”시언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기억이 안 나요.”이에 도경수는 비웃으며 말했다.“너희 할아버지와 손자가 둘이 함께 일부러 얼버무리는 거야? 내가 한 말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고!”강재석은 웃으며 시언에게 물었다.“넌 어떻게 생각하냐?”시언은 태연하게 대답했다.“자유롭게 연애하는 걸로 할게요. 그것도 문제없거든요.”그 말에 강재석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모든 걸 예상하였다는 듯했다. 그러나 도경수는 곧바로 반대했다.“안 돼! 안 된다고! 우리 손녀를 건드리려 하지 마. 나와 도도희는 절대 그렇게 서둘러 재희를 시집보낼 생각이 없어. 최소 몇 년은 집에 두고 보고 싶단 말이야.”강재석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아까까지는 강시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감사를 표하더니, 이게 그에 대한 보답이야?”도경수는 서둘러 말했다.“시언아, 내가 너한테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말해봐라. 내 수집품 중에 골라.”“골동품이든 진품 그림이든 상관없어. 너희 할아버지가 평생 탐내던 서화도 내줄게. 원하는 건 뭐든 가져가!”그러나 시언은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도경수 할아버지, 제가 원하는 건 단 하나, 강아심뿐이예요.”당당한 시언에 도경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강재석은 흐뭇하게 웃으며 도경수를 바라보았다.“들었지? 우리 시언이 널 대신해 손녀를 찾아줬잖아?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으면 그것에 걸맞은 보답을 해야지.”도경수는 화가 난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너희 집안은 이걸 빌미로 우리 손녀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거야?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