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유정은 아픈 척하면서 윤슬의 머리카락을 한웅큼 뽑아냈었다. 그 중 몇 가닥은 친자검사에 사용하고 남은 건 언젠가 쓸일이 있겠다 싶어 남겨둔 그녀였다.그리고 윤슬이 진짜 고유정이란 사실이 밝혀진 뒤에는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 머리핀에 넣은 뒤 가발피스처럼 앞머리 근처에 꽂곤 했다. 언젠가 누군가 그녀의 신분을 의심하면 바로 그 머리카락을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그래서 고유정은 신분을 숨겨주겠다는 부시혁의 제안을 당당하게 거절했다. 윤슬의 머리카락만 있으면 이런 위기따위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그런데...
윤슬의 불만스러운 표정에 부시혁이 헛기침을 하더니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지어냈다.“아, 회사에서 급하게 찾는 것 같더라고. 전화받으러 나가셨어.”“아, 그래요?”윤슬이 고개를 끄덕였다.급한 전화였다면... 어쩔 수 없지 뭐.“그럼 내가 부축해도 될까?”그의 말을 믿는 듯한 눈치에 부시혁이 다시 물었다.“...”윤슬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부시혁이 그녀를 부축해 소파 앞으로 다가갔다.“이제 곧 점심시간이야. 밥 좀 주문했는데 같이 먹을래?”부시혁의 질문에 본능적으로 거절부터 하려던 윤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흘러
“어떻게 그럴 수가...”휴대폰을 잡은 윤슬의 손이 살짝 떨려왔다.이소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이 모든 걸 계획한 건데 결국 자기 무덤을 판 꼴이 되어버렸다.이소은이 정말... 고도식의 친딸이라니.“검사 결과가 다 잘못됐을 가능성은 없어요?”비록 질문은 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는 걸 윤슬도 알고 있기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한 곳이면 모를까 여러 곳에서 한 검사가 동시에 잘못됐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성준영도 역시 고개를 저었다.“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검사를 맡긴 두 곳은 대학병원이에요. 이소은이
“부 대표, 이렇게 하는 거 너무 억지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건 집안 일이야. 이런 일에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하다는 건가?”고도식의 눈동자에 불쾌한 기색이 서렸다.“대표님이 뭐라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전 이 일에 무조건 관여할 거니까요.”고고한 얼굴로 고도식을 내려다보던 부시혁이 말을 이어갔다.“슬이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십니까? 고도식 대표님, 확실하게 말씀드리지만 슬이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가 사랑하는 여자가 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 일은 제가 무조건
부시혁이 어깨를 으쓱했다.“네 말에 화가 많이 났나 봐. 쓰러졌어.”아, 그렇구나.윤슬도 입을 삐죽했다.“참 유리멘탈이네요. 그런 말에 쓰러지기까지 하고.”“그러게.”이때 병원으로 달려온 채연희와 고유정도 마침 바닥에 쓰러진 고도식을 발견하고 기겁하며 부랴부랴 달려왔다.“여보!”“아빠!”채연희와 고유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선후로 들리고 두 사람은 다급하게 뛰어와 고도식을 부축했다.채연희가 다급하게 인중을 꾹꾹 누르는 등 응급처리를 시작하고 잠시 후, 고도식은 천천히 눈을 떴다.의식도 회복하고 발작도 멈추었지만 안
윤슬이 그제야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일리가 있는 말이네요.”“이제 곧 제안에 응할 것 같은데?”부시혁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윤슬도 그들의 대화를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역시나 부시혁 말대로 고도식은 결국 2억을 주는 것으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이대섭 부부가 삼성그룹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면 2억보다 더 심한 손해를 입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계획대로라는 듯 잔뜩 흥분한 이대섭 부부를 혐오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던 고도식이 정장 마의 주머니에서 1억짜리 수표 두 장을 꺼내 던졌다.“자, 2억이야.
“아니. 그래도 네가 굳이 해주고 싶다면 사양하진 않을게.”부시혁이 싱긋 미소를 지었지만 윤슬은 고개를 돌려버렸다.“싫은데요.”하지만 다음 순간, 다시 고개를 돌린 윤슬이 착잡한 표정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아까는... 고마웠어요.”“응?”“내 편 들어줘서 고마웠다고요.”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부시혁이 얄밉긴 했지만 고마운 건 사실이니 윤슬은 더 자세히 설명했다.“아니야. 고도식이 너한테 시비를 거는 걸 바라볼 수만은 없으니까.”비록 보이진 않지만 부시혁의 뜨거운 시선이 그대로 느껴지고 윤슬은 저
“슬아, 나 따로 할 일이 있어서 집까지 못 데려다줄 것 같아.”부시혁이 윤슬을 향해 말했다.“데려다줄 필요없어요. 가요, 아주머니.”윤슬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장정숙이 고개를 끄덕이고 휠체어를 끌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부시혁은 그 자리에서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다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려던 그때 성큼성큼 다가가 뜬금없이 물었다.“슬아, 너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어?”“네?”윤슬이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네?”“기회는 다른 사람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쟁취하는 거라는 거 말이야.”부시혁
“당연히 그런 일에 관한 거지!‘이 구제불능과 정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의도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게 아니었는데 부시혁은 이것마저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골치 아파.처음에 부시혁이 보던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사람들도 충분히 이상한데.거기서 배운 게 아니면 이 구제불능이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겠어?’윤슬이 말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인 선생님이라는 뜻이었다.‘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이렇게 불경스럽다니.’“그만 좀 해요, 부
부시혁의 이런 눈빛을 볼 때마다 윤슬은 마음이 굉장히 평안해졌다. 그녀는 부시혁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부씨그룹의 대표 말고 선생님이 되면 틀림없이 학생들에게 엄청 환영받는 선생님이 될 거예요.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은 바로 당신처럼 학생들에게서 잘못을 찾지 않고, 학생들에게 맞추는 선생님이라구요.”부시혁은 윤슬의 머리를 만지며 가볍게 웃었다.“어쩌지? 나는 선생님 되는 건 별로야. 그냥 너만 가르치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는 좋은 선생님이 아니야.”이 말이 너무 웃겨서 윤슬은 자기도
그렇기 때문에 윤슬은 반드시 공부하고 더 공부해서 더욱 강하고 더욱 유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자신에 대한 책임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천강그룹 경영에 대한 책임이며 천강그룹의 수백 수천의 직원들에 대한 책임이다.그렇지 않으면 천강그룹이 무너지고,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생존해야 하는 이런 종업원들 또한 앞길이 막막해진다.그래서 윤슬은 부시혁이 자신을 가르치겠다는 제의에 매우 감격하고 기뻐하며 기대했다.필경 부시혁과 같은 수준의 인물이 자신을 가르치게 되면 자신은 꿈에서도 좋아서 웃음이 나와 마땅하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이 점은 틀림없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그러나 그런 학생들과 윤슬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부시혁에게 윤슬만큼은 예외였다.윤슬을 대할 때 부시혁 역시 평소와는 달리 늘 부드러운 남자였다.비록 이 순간 잠시 윤슬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지만 부시혁은 여전히 온화하고 꽤 인내심을 발휘했다.부시혁에게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때 윤슬은 배운 내용을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해서 부시혁이 자신을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인내심을 잃으면 어쩌나 걱정했다.부시혁이 그다지 훌륭한 인내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잘
부시혁이 말했다.윤슬이 웃으며 말했다.“당신에게 알려준다는 걸 깜빡 잊었네요. 고택에 가져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부시혁이 윤슬이 이마를 살며시 눌렀다. 부시혁에게 윤슬의 이 말은 무엇이든 잊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 듯했다. “대체 얼마나 큰 뼈길래, 이모께서 직접 친정이 있는 곳까지 가서 구해오신 거야? 우리도 사고 싶다고,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부시혁이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년필을 돌리며 호기심을 표시했다.‘혹시 야생동물의 뼈는 아
윤슬이 진지한 표정과 말투로 부시혁을 향해 말했다. 부시혁은 자신이 윤슬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윤슬이 분명 본인의 마음대로 행동할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윤슬을 확실히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지금과 같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지라도, 윤슬은 부시혁으로 하여금 어떠한 이득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하면 되잖아!”부시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윤슬의 사무용 의자에 앉았다. “이제 됐지?”“됐어요.”윤슬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하지만, 이처럼 윤슬의 허락을 구한다는 것은 부시혁이 윤슬에 대한 존중뿐만 아니라, 천강그룹에 대한 존중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부시혁은 회사의 규묘가 작다는 이유로 천강그룹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부시혁은 윤슬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윤슬의 말을 듣고는 낮은 웃음을 지었다.“왜 천강그룹이 나한테 가치가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당신이 여기 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천강그룹은 나에게 가장 가치 있는 곳이지.” 갑작스러운 부시혁 말에 얼굴이 붉어진 윤슬이 부시
윤슬의 눈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이를 알아차린 부시혁이 윤슬을 놀렸다. “왜? 난 여기 올라오면 안 돼?”“아니에요.” 윤슬은 다가가서 부시혁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당신이 우리 천강그룹에 오면 직원들이 나보다 당신을 더 친절하게 대하는 거 알아요? 오죽하면 내가 당신이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려도, 직원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정도예요. 물론 당신이 몰래 올라오기도 하지만요. 그런데 내가 당신을 올라오지 못하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무 소용 없지.”부시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전화 너머에서, 윤슬이가 박희서를 언급하자 육재원의 얼굴은 삽시에 굳어졌다.윤슬이 말한 자신이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그 이야기가 바로 박희서에 관한 것이었다니. 육재원은 조금 듣고 싶지 않았다.육재원이 침묵하자, 윤슬은 자신이 박희서를 언급한 것이 육재원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임을 알고는 한숨을 쉬었다.“재원아, 박 비서가 해외로 연수를 간다는 걸 알고 있었어?”물론 윤슬은 이렇게 물었지만, 사실 그녀는 육재원이 그 사실을 알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육재원의 예상외 대답은 윤슬을 놀라게 했다.“알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