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아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밖에 있던 이수호의 비서가 다급하게 달려왔다.이수호는 하늘이 무너지기 전에는 절대 얼굴색 한 번 변할 사람이 아니었다. 조금 전 도아영이 파혼 얘기를 꺼냈을 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 지금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도아영은 강이나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이수호가 어두운 얼굴로 자리를 비우려 하자 도아영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대표님, 우리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요.”“비켜.”이수호의 말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위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눈앞의 도아영은 그에게 있어서 단지 이경 그룹과 할머니를 상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기에 그녀에게 감정이라곤 전혀 없었다.도아영과 약혼할 수는 있어도 만약 오늘 강이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도아영은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조급해하는 걸 보니 강이나 씨한테 가려나 봐요?”이수호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럼 내가 어디 갈 것 같아? 이나 너 때문에 손목까지 그었어. 경고하는데 이경 그룹 사모님 자리를 너한테 줄 수는 있지만 딱 그것뿐이야. 다른 건 바라지도 마.”이수호의 말투에 도아영은 가소롭기만 했다.그녀는 강이나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무슨 짓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수호는 강이나와 함께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었고 심지어 그들 사랑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도아영이 언성을 높였다.“대표님, 오늘은 대표님과 나의 약혼식 날이에요. 만약 강이나 씨한테 간다면 우리 약혼은 없던 일로 할 겁니다.”도아영의 목소리가 그리 높진 않았지만 주변의 하객들이 다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카메라 플래시가 두 사람을 향해 계속 반짝였다.이수호가 실눈을 뜨고 말했다.“파혼으로 날 협박하려고? 도아영, 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아?”그러고는 도아영의 옆을 스쳐 자리를 떠났다. 도아영에게 이씨 일가와 파혼할 용기가 절대 없다고 확신했다.도아영은 이수호가 자리를 비우자 거만하지도 비굴하지
옆 방, 주민서는 맥주 세 병을 마시고는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휴대전화로 실검을 보던 도아영은 뭔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주민서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물었다.“내가 언제 이수호한테 성 기능 장애가 있다고 했어?”“내가 그렇게 썼어. 기사는 충격적인 내용이 있어야 사람들이 본다고.”도아영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결과가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어?”술기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주민서가 마이크를 들고 소리를 질렀다.“결과? 무슨 결과가 있겠어? 이수호가 내 목에 칼을 대고 협박이라도 하겠어?”쾅.그때 누군가가 룸 문을 발로 걷어찼다. 룸 안의 노랫소리가 삽시간에 멈췄다.도아영은 문 앞에 서 있는 이수호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이수호가 찾아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기사 내보낸 사람이 너야?”이수호의 목소리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주민서는 겁에 질려 도아영의 뒤에 숨어버렸고 도아영은 일부러 침착한 척했다.“그래요.”“진짜 너라고?”이수호는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다가오더니 주민서를 확 밀어버렸다. 그 바람에 주민서는 심정우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다 꺼져!”그를 본 순간 주민서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원래는 도아영을 지켜주고 싶었지만 심정우가 그녀를 끌고 룸 밖으로 나갔다.“알았어. 당장 꺼질게.”문이 닫혔고 룸 안에 도아영과 이수호만 남게 되었다.그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차갑게 말했다.“파혼한 이튿날에 클럽에 와? 도아영, 내가 예전에 널 너무 만만하게 봤어.”눈앞의 남자를 보고 있자니 도아영은 전생에 납치범이 그녀를 괴롭힐 때의 역겹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순간 헛구역질이 나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대표님, 약혼식 날에 날 버리고 강이나 씨한테 간 건 대표님이에요. 우리 집안은 그리 대단한 집안도 아니고 이씨 일가에 한참 못 미쳐요. 그러니까 여기서 깔끔하게 끝내요, 우리.”‘깔끔하게 끝내자고?’이수호가 코웃음을 쳤다.“깔끔하게 끝낸다는
이튿날 아침 이수호가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도우미가 짐을 챙기는 걸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지금 뭐 하는 거지?”“대표님, 전부 도아영 씨 물건들이에요. 어제 도아영 씨가 전화 와서는 다시는 오지 않겠다면서 물건들을 정리해서 보내 달라고 하더라고요.”눈앞의 캐리어를 보던 이수호의 머릿속에 도아영의 모습이 스쳤다.평소 이 시간이면 도아영은 아침상을 차려놓고 기대에 찬 얼굴로 그가 내려오기를 기다렸었다. 그러고는 의자까지 빼주었고 재미도 없는 화제를 꺼내곤 했다.그런데 오늘 그 모습이 보이질 않으니 어딘가 허전한 것 같았다.자신이 도아영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문득 알아차린 이수호가 싸늘하게 말했다.“그럼 얼른 정리해서 치워. 눈에 거슬리니까.”“네... 대표님.”이수호는 거실 의자에 앉았다. 텅 빈 테이블을 보고는 불만을 드러냈다.“아침 아직 안 됐어?”“죄송합니다, 대표님. 평소에는 도아영 씨가 아침 식사를 준비해서 새로운 도우미가 아직 시간을 잘 몰라요...”“빨리 준비해. 출근해야 하는데.”손목시계를 확인하던 이수호는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우미가 빵과 계란 후라이, 그리고 소시지를 가져왔다.이수호는 빈약한 아침상을 보고는 도우미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이게 뭐지?”“아... 아침 식사입니다.”겁에 질린 도우미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난 한쪽만 익힌 계란 후라이는 안 먹어. 그리고 아침에 고기도 안 먹어. 내가 이런 아침이나 차리라고 한 달에 그 많은 월급을 주는 줄 알아?”“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정말 몰랐습니다...”“대표님, 새로 온 도우미라서 잘 몰라서 그랬어요. 다시 준비하라고 할게요.”“됐어.”이수호가 어두운 얼굴로 일어났다.그때 남현숙이 안방에서 나왔다.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보자마자 손자가 왜 화가 났는지 바로 알아챘다.남현숙이 말했다.“평소에는 항상 아영이가 아침을 차렸었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디저트에
양도 계약서를 보자마자 유정연의 눈빛이 바로 바뀌더니 말투도 다정해졌다.“아영아, 뭐라 해도 지호는 네 동생이야. 회사를 물려받는 것도 앞으로 도씨 일가의 대를 이어가기 위해서고 누나인 너의 든든한 백이 되기 위해서야. 그럼 너도 마음 편히 이수호랑 결혼할 수 있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아니겠어?”유정연은 도지호를 옆으로 잡아당겼다.“빨리 누나한테 사과하지 않고 뭐 해? 누가 아침 댓바람부터 허락도 없이 누나 방에 들어가라고 했어?”도지호가 싫은 티를 팍팍 냈다.“어차피 도원 그룹이 언젠가는 내 손에 들어오잖아요. 파혼해서 내 앞길을 방해했으니 당연히 따져 물어야죠.”도아영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도지호가 이때부터 도씨 일가의 재산을 욕심내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어린 나이인데도 벌써 자신이 도씨 일가의 미래 주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이게 다 유정연의 치밀한 계획이었다.“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아영아,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 계약서는 나한테 맡겨. 내가 대신 보관해줄게.”유정연의 신경은 온통 계약서에 있었다. 계약서에 도지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회사를 물려받는다는 내용이 정확하게 적혀있었다. 두 모자가 오랜 시간 참고 기다렸는데 절대 계약서가 망가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도아영은 유정연을 보면서 가볍게 웃었다.“이 계약서를 가지고 싶어요?”“응...”그런데 유정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아영은 들고 있던 계약서를 가차 없이 찢어버렸다.유정연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도지호가 노발대발했다.“도아영, 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찢으라고 했어?”도지호가 빼앗으려 했지만 도아영은 계약서를 갈기갈기 찢어 두 사람 앞에 던졌다. 도아영이 덤덤하게 말했다.“도원 그룹을 절대 지호한테 넘길 일은 없으니까 두 사람 괜한 욕심 부리지 말아요.”“뭐라고? 회사를 지호한테 안 주면 누구한테 줄 건데? 도씨 일가에 아들이라곤 지호밖에 없잖아. 너...”도아영이 말했다.“지호는 아빠 친아들도 아니잖아요. 이 회사 내가 직접 맡
그날 오후, 남현숙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도아영은 남현숙이 강이나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강이나는 강씨 일가의 외동딸이라서 성격이 매우 오만했다. 그녀가 강씨 일가의 재산을 손에 쥐고 있지만 남현숙은 두 가문의 원한 때문에 강이나를 무척이나 싫어했다.남현숙은 그녀가 고상한 척한다면서 이수호와 만나는 걸 계속 반대했다.그런 그녀와 반대로 도아영은 철이 들었고 집안 배경도 깨끗했다. 분위기, 용모, 학벌 모두 이경 그룹의 사모님이 되기에 아주 적합했다.그리고 남현숙이 도아영에게 잘해주는 것도 이익 때문에 연기하는 것뿐이었다.그 시각 도아영은 이씨 일가의 차를 타고 이씨 저택의 마당에 도착했다.도아영이 거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남현숙이 웃으면서 말했다.“어서 와, 아영아.”남현숙이 소파 옆자리를 툭툭 쳤다. 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현숙의 옆에 앉았다. 그런데 남현숙의 맞은편에 강이나가 앉아 있었다.강이나는 전생에서처럼 예뻤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듯한 청순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늘 도도했고 얼굴에 오만함이 가득했다.그녀는 뜨거운 차 한잔을 들고 있었는데 손이 벌겋게 됐는데도 내려놓지 않았다.도아영은 강이나의 손목에 감은 붕대를 발견했다. 그녀가 손목을 그은 일을 남현숙이 알고 있다는 걸 뜻했다.이 일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도아영은 유정연이 일러바쳤을 거라 짐작했다.이수호는 남현숙이 강이나를 귀찮게 굴까 봐 소문이 퍼지지 않게 막았다. 그런데 유정연은 남현숙에게 그대로 일러바쳤다. 사는 게 지겨워서 제 명을 재촉하는 건가?“아영아, 약혼식 날에는 수호가 잘못했어. 내가 따끔하게 혼냈으니까 그만 화 풀어.”남현숙은 자애롭게 쳐다보면서 도아영의 손을 잡았다.“네가 이경 그룹의 미래 안주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아.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면 수호더러 내가 보는 앞에서 사과하라고 할게.”“할머니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약혼식 날에 있었던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야? 그건
“아영아, 수호 저 녀석 지금 강이나한테 홀려서 제정신이 아니야. 근데 걱정하지 마. 너한테 꼭 사과하라고 할 테니까. 내가 찜한 손주며느리는 너라는 걸 아무도 바꿀 수 없어.”남현숙의 자애로운 말투에 도아영이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대표님이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은데 저도 더는 할 얘기가 없어요. 두 사람이 잘되기를 축복할게요.”도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앞으로 제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보살펴드리러 오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대표님의 혼약은 여기까지 하죠.”“아영아...”남현숙이 뭐라 설득하려 하자 도아영이 고개를 내저었다.“할머니, 집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다음 날에 또 뵈러 오겠습니다.”그러고는 이씨 저택을 나섰다.남현숙은 멀어져가는 도아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예전에 아영이는 이렇게 분별이 없는 애가 아니었는데.’문밖, 도아영이 이씨 저택의 대문을 열자마자 누군가가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았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옷소매에 숨긴 호신용 칼을 꺼내려 했지만 상대의 몸에 이경 그룹 휘장이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이수호의 사람인 걸 알아챈 그녀는 칼을 거두고 납치를 당한 것처럼 했다. 이수호가 아무리 그녀를 싫어한다고 해도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진 않고 이수호의 다른 검은색 자동차에 태웠다.도아영은 정신을 잃은 척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누군가가 그녀를 들고 나가는 게 느껴졌다.딩동.귓가에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로열 호텔의 엘리베이터 소리와 매우 흡사했다.‘날 호텔로 데려왔나?’똑똑.“대표님, 데려왔습니다.”“들어와.”방 안의 담배 냄새가 코를 찔러 도아영은 숨을 참았다. 상대는 그녀를 푹신한 침대 위에 던져버렸다.도아영의 심장이 쿵쾅거리던 그때 이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깨워.”“네.”경호원이 차가운 물을 도아영에게 쏟자 도아영이 두 눈을 번쩍 떴다.불빛이 어두워 분위기가 더욱 야릇했다
도아영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확인했다. 신문에 큼지막한 몇 글자가 적혀있었다.[이경 그룹, 도원 그룹과 계약 해지, 천억 프로젝트 투자 철회 발표.]도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천억 프로젝트는 도원 그룹에서 현재 개발 중인 부동산 사업이고 벌써 절반 정도 진행되었다. 이런 때에 이수호가 투자를 철회한다면 집을 지을 수 없게 된다.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려면 다른 투자자를 찾아야만 했다.그런데 이경 그룹이 도원 그룹과 계약을 해지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강주에 도원 그룹과 계약하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천억 프로젝트가 어그러질 위기에 놓였고 자칫하다간 도원 그룹도 많은 돈을 잃을 수 있다.도아영이 허리를 숙여 신문을 만져보았다. 아직 따뜻한 걸 봐서는 신문을 찍어내자마자 가져온 게 분명했다. 이수호가 빨리 움직인 걸 보면 그녀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고 강주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려주려는 듯싶었다.“도아영, 도씨 일가의 딸로서 이 집안을 위해 공 좀 세우라는데 왜 그래? 남자 마음 하나 잡으라고 한 게 그렇게 억울해? 반반하게 생겨서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유정연은 자신의 불만을 쏟아냈다.“네 주제에 도원 그룹을 이끌어가겠다고? 충고하는데 하루빨리 도원 그룹을 네 동생한테 줘. 그리고 남현숙의 마음도 잘 구슬려.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이씨 일가에 시집가는 거야.”“얘기 다 했어요?”도아영이 유정연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가만히 있을 건가요? 그렇게 급하면 아줌마가 그 집안에 시집가요, 그냥.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는 건 아줌마가 나보다 더 잘하잖아요.”“너 이 녀석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유정연은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도아영은 신문을 챙기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수호가 투자를 철회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전생에 이 프로젝트가 대박이 났다. 그런데 이수호가 천억을 투자한 대주주이기에 마지막에 도원 그룹이 나눠 가진 돈은 얼마
이수호는 도아영을 무섭게 째려보았고 말투마저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다.“수호 씨, 이러지 말아요. 아영 씨를 오해했어요. 내가 꿇고 싶어서 꿇은 거예요...”“이나야, 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이러니까 자꾸 괴롭힘을 당하지. 내가 분명히 말했었지, 이 사람 만나지 말라고.”이수호가 강이나를 감싸고 돌 거라는 걸 도아영은 진작 예상했다.강이나는 항상 이수호가 나타날 때마다 다쳤다. 사실 강이나가 무릎을 꿇은 순간부터 도아영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하지만 알면서도 맞춰줬다. 어쨌거나 이수호가 그녀를 미워하면 더 쉽게 파혼할 수 있으니까.“도아영, 전에는 네가 그냥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악랄하기까지 하구나. 몸이 약한 이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널 가만두지 않아.”그러고는 강이나와 함께 나가려 했다.그사이 설명할 시간이 충분했지만 강이나는 침묵을 택했고 그저 미안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쳐다보았다.강이나의 두 눈에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잠깐 스친 우쭐함을 도아영이 포착했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둘이 약혼하면 뭐? 그래봤자 수호 씨 마음에는 나밖에 없는데.”도아영은 바닥에 떨어진 은행카드를 주워 두 사람을 불렀다.“강이나 씨, 카드 놓고 갔어요.”강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이수호도 그제야 도아영이 들고 있는 은행카드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이나야, 쟤한테 돈을 줬어?”강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나 때문에... 파혼하는 걸 가만히 볼 수가 없어서요.”이수호가 대답하기 전에 도아영이 먼저 말했다.“강이나 씨, 난 무조건 파혼할 겁니다. 대표님도 아마 겉과 속이 다르고 마음이 악랄한 여자와 약혼할 생각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 돈도 필요 없어요.”그러고는 강이나에게 은행카드를 돌려주었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도아영이 아니었다.강이나는 일부러 은행카드를 두고 갔다. 만약 도아영이 받아서 나중에 이수호가 알게 된다면 일이 더 커질 게 분명했다.
“약혼식에서 일부러 파혼 선언을 하고 주씨 일가에 시켜서 재미도 없는 신문 기사를 내더니 이제 와서 구연준 꼬시면서 경매에서 그렇게 도발을 해? 너 이거 다 내 주의를 끌려고 그런 거잖아. 좋아, 이제 드디어 소원성취했어.”이수호는 그녀의 턱을 잡고 당장이라도 몸을 기울일 것만 같았다.그때 도아영이 뜬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대표님 이러는 거 강이나 씨한테는 떳떳해요?”강이나라는 이름 석 자에 이수호는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때다 싶어 도아영이 재빨리 손을 빼내고 그의 목을 껴안더니 한결 매혹적인 눈길로 넌지시 말을 이었다.“대표님 말이 맞았어요. 내가 이렇게 한 거 대표님께 관심받고 싶어서예요. 그래도 소파는 영 비좁을 것 같은데 우리 이참에... 내 방으로 갈까요?”그녀가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자 이수호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가차 없이 밀쳐내고 차갑게 쏘아붙였다.“이런 저질스러운 수작은 나한테 안 통해. 그러니까 적당히 해, 도아영!”“에이 왜요? 대표님 아주 좋아하시잖아요. 나의 이런 저질스러운 수작...”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내빼는 척하지 말아요. 남자들은 진짜 사랑하는 여자랑 하룻밤 즐기는 여자가 따로 있잖아요. 충분히 이해하고 전혀 충돌될 것 없다고요.”그녀가 몸을 배배 꼬면서 이수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걱정 마세요. 오늘 밤 일은 강이나 씨한테 무조건 비밀로 할게요.”“꺼져!”이수호는 드디어 그녀를 밀쳐내고 혐오에 찬 눈길로 째려보며 경고장을 날렸다.“내 앞에서 이런 수작 그만 부려! 너 같은 여자 수없이 봐왔어. 할머니만 아니었다면 난 절대 너랑 결혼할 일 없다고!”한편 도아영은 증오에 찬 그의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일부러 홀가분한 척하며 말했다.“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대표님, 이만 가보시죠.”위층에서 줄곧 엿듣던 유정연은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자 당황하기 시작했다.이수호가 그들의 돈줄인데, 이경 그룹의 뒷받침이 없다면 도원 그룹은 이제 어떡하란 말인가?유정연은 부랴부랴 아래층
“아니요, 틀리셨어요. 이 돈은 도원 그룹 자금이 아니에요.”구연준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아니라고?”“아빠가 남겨주신 혼수거든요.”전생에 유정연은 그녀의 혼수에 눈독을 들이고 어떻게든 이 집안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했다. 일단 도아영을 이씨 일가에 시집 보내면 천억의 혼수까지 본인이 챙기게 될 테니까.남현숙은 도아영을 며느릿감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유정연은 몰래 남현숙을 찾아가 혼수를 없애기로 논의하고 심지어 그 돈으로 회사 위기를 해결하겠다고 사정했다.하지만 정작 회사 위기는 해결하지 못한 채 유정연만 돈을 챙겨서 도망쳤다.이번 생에 유정연이 또다시 이런 반란을 일으킨다면 혼수가 아니라 도씨 일가의 재산을 일 전 한 푼 못 챙길 것이다.“대표님, 요즘은 당분간 투자 안 하시는 게 좋겠어요.”“도원 그룹이 거의 몰락 상태인데 내가 투자까지 안 하면 진짜 부도낼 생각이야?”도아영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유정연이 줄곧 제 아들에게 회사를 맡기고 싶어 했으니 요 며칠 난장판이 된 회사 장부도 전부 도지호 그 멍청이에게 맡기면 그만이다.주주들이 과연 회사가 부도나는 걸 지켜보면서까지 유정연 모자를 용납해줄 수 있을까? 도아영은 문득 궁금해졌다.저녁 무렵, 구연준이 그녀를 도씨 저택으로 데려다줬다.도씨 저택 안.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실 불이 환히 비치고 누군가가 불쑥 그녀를 방안으로 끌어들였다. 도아영은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상대가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벽에 밀어붙였다.“아영아, 너 한 번 만나기 참 어렵네?”이수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찔한 기운이 스쳤다.도아영은 질식할 것만 같아 힘껏 몸부림쳤다.“이거, 놔!”이수호도 방금 너무 세게 밀어붙인 걸 알아챘는지 손을 놓아주었다. 도아영은 벽을 짚고 격하게 기침을 해댔다. 이에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솜씨 좋아 도아영! 한편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가 되길 넘보고 또 한 편으론 구연준을 유혹하고 있어? 어느 쪽 이익
“축하해요, 수호 씨. 골든하임을 얻게 됐으니 이경 그룹도 이번엔 엄청난 수익을 창출할 거예요.”옆에 있는 강이나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음침하게 변해버린 이수호의 안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맞은 편에서 도아영은 그 누구도 눈치 볼 것 없이 입꼬리를 씩 올리고 구연준과 나란히 샴페인을 들었다.이 광경이 이수호에겐 왜 이토록 눈꼴사납게 느껴지는 걸까?“대표님, 이제 어떡합니까?”안지원은 구연준이 여기서 멈출 줄은 몰랐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땅을 무조건 손에 넣겠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양보한 걸까?“어떡하긴 뭘 어떡해?”이경 그룹에서 하는 수 없이 손해를 당하는 수밖에.이수호는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번 일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분명 도아영 저 여자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수호 씨!”강이나가 그를 따라가려고 성급한 마음에 손목을 잡았는데 이수호가 망설임 없이 손을 홱 뿌리치는 것이었다.“먼저 돌아가 있어.”강이나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수호는 이미 멀리 떠나가 버린 상태였다.그는 단 한 번도 강이나를 내버려 둔 적이 없는데...경매장 밖에서 이수호가 음침한 얼굴로 차갑게 쏘아붙였다.“유정연 이 인간 당장 내 앞에 데려와!”“네, 알겠습니다.”1시간 후, 이경 그룹 사무실 안.유정연이 두 명의 경호원에게 끌려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수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수... 수호야,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아영이가 또 네 심기를 건드렸니?”“연기 그만 해요!”이수호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아영이랑 구연준 대체 무슨 사이에요?”“뭐?”도아영과 구연준이 무슨 사이라니?그 두 사람이 왜 한데 엮인 걸까?유정연은 황급히 대답했다.“수호야, 우리 아영이가 또 사고를 친 모양이네. 내가 돌아가서 따끔하게 혼낼게. 그러니까 얼른 화 풀어. 우리랑 너희 집안에서 협력하기로 한 건 변함없잖아!”“시끄럽고! 골든하임이 함
“약혼자에 대해 꽤 아는 게 많네?”어디 그뿐일까?전생의 처참했던 3년을 돌이켜보면 그녀는 거의 이수호의 노예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수호가 힐끔 째려보면 혹여나 자신에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고, 그의 말 한마디에 드디어 자신이 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착각할 지경이었다.외조라면 이수호의 회사를 위해 대폭으로 후원해주고 내조라면 남현숙을 보살펴주는 것, 이수호를 위해 직접 도시락까지 싸주는 것 등등 헤아릴 수가 없다.그의 취미를 장악하고 있는 건 제쳐두고 그가 샤워를 몇 분에 하는지, 하루에 화장실은 몇 번 다녀오는지, 화장실에서 매번 휴지를 몇 칸 쓰는지... 마음 같아선 그의 모든 걸 장악하고 싶었다.“대표님, 두고 보세요. 오늘은 곧 대표님이 완승하는 날일 겁니다.”도아영은 테이블 위의 샴페인을 한 잔 쭉 들이켰다.경매가 곧 시작되었고 마침내 골든하임 순서가 왔다.“이번엔 도시 외곽의 골든하임입니다. 경매가 600억에 시작하겠습니다!”600억이란 경매가에 구연준은 미간을 구겼다.전에 도아영이 했던 말과 똑같았으니까.여기 경매는 전부 현장에서 가격이 공개되는 거라 사전에 비밀이 유출될 일은 없다.하여 도아영은 이 땅의 경매가가 얼마인지 절대 미리 알 수가 없다.그렇다면 골든하임이 진짜 이수호의 트릭이었단 말인가?“천억이요!”“1600억이요.”“2천억 합니다.”경매가 시작되자마자 장내에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다들 앞다투어 골든하임을 경쟁하고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이 땅은 앞서 상승 가능성이 커서 미래에 분명 1조 원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도아영은 줄곧 지켜만 보는 구연준을 흘기더니 곧장 그의 팻말을 들었다.“4천억이요!”구연준은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구시렁댔다.“제 돈이 아니라고 진짜 겁 없이 부르네.”“그럼요.”아니나 다를까 맞은편의 이수호가 팻말을 들었다.“6천억 할게요.”갑자기 2천억이나 뛰어오르자 다른 사람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이때 이수호가 가까운
“도아영, 당장 거기 서!”잠깐 휴식 시간을 가질 때 도아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뜻밖에도 뒤에서 이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무슨 일이시죠?”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낯선 이를 대하듯 이수호에게 말했다.“너 진짜 대단해. 우리 이경 그룹에서 봐둔 땅을 두 배로 손해 보더라도 기어코 낙찰받은 거야? 왜? 일부러 날 겨냥하려는 거야 아니면 내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래?”“오해하셨어요, 대표님. 저는 단지 그 땅이 마음에 들어서 낙찰한 거예요. 대표님이랑 전혀 상관없어요.”도아영이 진지하게 말했지만 이수호는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그 시각 강이나가 이수호를 쫓아왔다.“아영 씨, 오늘 경매에서 너무 충동적으로 나오신 거 아니에요? 그 땅은 아영 씨가 엄청 손해 볼 거예요.”강이나는 말하면서 옆에 서 있는 이수호를 힐긋 살펴봤다.“수호 씨가 오늘 나랑 함께 와서 입장이 난감해진 거 알아요. 아무리 수호 씨랑 맞서 싸우려고 해도 막무가내로 나오면 안 되죠. 나중에 손해 보면 또 수호 씨한테 도와달라고 손 벌릴 거잖아요. 내 말 틀렸어요?”이에 이수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낙찰한 땅이야. 너 스스로 알아서 해.”“대표님은 농담도 참. 당연히 나 스스로 알아서 하죠. 우린 이미 파혼한 거 아닌가요? 내가 왜 대표님께 손 벌리겠어요? 이제 우리 남남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너...”이수호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때 구연준이 경매장에서 나왔고 이를 본 도아영이 일부러 목청을 높이며 다정하게 그를 불렀다.“연준 씨!”‘연준 씨’라는 호칭이 입밖에 떨어진 순간 이수호의 표정이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도아영은 구연준의 옆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이제 곧 2부가 시작할 테니 나랑 연준 씨는 얼른 들어가 봐야겠어요. 골든하임을 오랫동안 눈여겨봐 왔거든요. 그럼 우린 이만.”도아영은 이수호와 강이나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수호는 온몸에 음침한 기운을 내뿜었고 옆
그중에서도 이수호가 가장 한심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이런 방식으로 그의 관심을 받으려는 건 너무 저속한 표현이니까.“400억 할게요.”이수호가 천천히 가격을 외쳤다.‘도아영, 내가 널 다스리지 못할까 봐?’“500억이요.”“600억 할게요!”점점 치솟는 가격에 강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수호 씨, 저 땅은 그 정도 가치가 안 돼요.”이수호도 표정이 일그러지긴 마찬가지였다.옆에 있던 안 비서가 나지막이 말했다.“대표님, 이미 우리의 예산을 초과했습니다.”이수호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도아영이 돈도 없으면서 이렇게 가격을 부르는 건 그와 맞서려는 게 분명했다.‘좋아, 오늘은 손해 보더라도 반드시 널 따끔하게 혼내줄 거야.”결국 이수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640억 할게요!”그 시각 구연준은 아주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고만장한 이수호의 태도가 제법 마음에 드나 보다.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현재 이수호는 벌써 100억을 손해 본 상태이다.도아영에게 이런 실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수호를 자극해서 손해를 보게 하다니.예전에는 그녀를 너무 만만하게 본 듯싶었다.구연준이 이쯤에서 멈추라고 말하려 할 때 옆에 있던 도아영이 또다시 팻말을 들었다.“천억이요!”순간 장내가 술렁거렸다.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천억이나 부른 걸까?어떻게 천억까지 치솟은 걸까?그녀의 행동에 경매사까지 어안이 벙벙해졌다.경매사는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제 귀를 의심했다. 남원 외곽의 천 평짜리 땅은 시가가 고작 200억이다.아까 분명 640억까지 올라갔는데 어떻게 천억으로 뛰어오를 수 있단 말인가?“도아영 미친 거 아니야?”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도시 외곽의 부질없는 땅을 무려 천억까지 부르다니...그녀가 뭘 믿고 이토록 담대해진 걸까?“대표님, 더는 안 되십니다. 더 부르면 손해가 너무 커요!”안지원도 바짝 긴장했다.도아영은 지금 눈에 뵈는 것 없이 미쳐 날뛰는 중이다.그동안 도시 외곽의 천 평짜리 땅은 단 한 번
강이나는 애써 도아영을 위해 변명하는 것 같지만 정작 듣고 있는 이수호에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나를 좋아한다고? 걔는 그저 더 높은 자리로 기어오르는 게 목적이야!’이전에는 이수호를 넘봤고 지금은 또 구연준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어쩐지 요즘 그를 향한 태도가 조금 식었더라니...여기까지 생각한 이수호는 두 눈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도아영, 너 진짜 대단한 여자구나!’“가자 이만.”이수호는 두 사람한테서 시선을 떼고 강이나와 함께 경매장으로 들어섰다.한편 구연준도 자연스럽게 도아영에게 팔짱을 거는 제스처를 취하고 차분하게 말했다.“오늘 밤엔 네가 내 파트너야. 지금부턴 쭉 내 말만 들어야 해. 알겠지?”“대표님, 우리 다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인데 내가 파트너 해주면 오늘 밤 나한테 실컷 돈을 써주시는 거죠?”“넌 내 파트너야, 여자친구가 아니라.”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했다.“하지만 수호 씨는 전에 선뜻 내게 돈을 써줬어요. 인간적인 매력으로 따져도 대표님 설마 수호 씨한테 밀리고 싶은 건 아니겠죠?”“지금 날 자극해?”“제가 어찌 감히요...”“네가 이겼어.”“...”경매장 안에서 뭇사람들은 이미 자리에 착석했다.오늘 경매는 대부분 비서가 대신 나와 줬고 오직 이수호와 구연준 두 명의 빅 보스만 직접 참석했다. 다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고 있을 때 장내가 전과 달리 싸늘한 정적에 잠겼다.아무도 감히 이 두 명의 빅 보스와 가격을 경쟁할 엄두가 안 났다.“수호 씨, 아영 씨랑 구 대표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여요...”강이나는 이수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주최 측에서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구연준과 도아영이 마침 그들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양측은 머리만 들면 눈이 마주칠 지경이었다.이수호는 웃고 떠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도아영, 아주 좋아...”처음엔 강이나를 따라 하며 그에게 접근했고 뒤이어서 할머니 앞에서 얌전한 이미지를 보여준 그녀였다. 말끝마다 파혼을 언급
“그러게. 강주 사람들이라면 다 알다시피 도씨 일가랑 이씨 일가의 혼약은 도아영이 애타게 쟁취한 거잖아. 진짜 본인이 뭐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수호는 파혼해도 곧장 새 여자를 찾을 수 있는데 도아영은 뭐야? 강주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걸?”...경매장 밖에서 몇몇 부잣집 사모님들이 대놓고 도아영의 흉을 봤다.그 시각 그녀는 이미 경매장에 도착한 지 7, 8분이 넘었다. 이수호와 강이나보다도 좀 더 빨리 온 듯싶었다.지금쯤 경매장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빌어먹을 구연준이 한사코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니 사모님들의 험담까지 들어야만 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사서 고생이냐고?’‘구연준도 이수호보다 더 나을 건 없네. 두 인간 피차일반이야.’‘이러니까 전생이나 현생이나 너 죽고 나 죽고 티격태격하는 거지.’“아영 씨, 이 대표님은 이제 그만 미련 접으셔야겠네요. 대표님 곁에 강이나 씨가 있잖아요. 이렇게 쫓아온다고 무슨 소용이겠어요?”“그러게 말이에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대표님과 파혼하겠다고 호통치더니 왜 또 여기까지 쫓아오는 거예요? 아쉽지만 대체품은 어디까지나 대체품이에요. 대표님은 이제 진짜 운명의 반쪽을 만났으니 아영 씨한테 돌아올 일은 없어요.”“자업자득이죠 뭐. 어떻게 기어오른 대표 사모님 자리인데 막상 내주려 하니까 달갑지 않겠죠. 근데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해요. 설마 본인이 강이나 씨랑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줄곧 이수호 와이프 자리를 탐내던 여자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도아영을 헐뜯었다.그도 그럴 것이 도아영이 이수호를 위해서 얼마나 비굴해지고 자존심을 다 내려놨는지 모르는 이가 없으니까. 남자들 눈에만 하찮게 보이는 게 아니라 여자들까지 그녀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수준이었다.이때 나서기 좋아하는 한 여자가 도아영에게 다가와 이상야릇하게 말했다.“아영 씨는 예쁘장하게 생겼으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남자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나 배우세요. 안 그러면 강주에서 누가 감히 아영 씨를 만나주
똑똑.문밖에서 강이나가 두 번 노크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그녀는 화이트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는데 우아하고 고고한 기품이 차 넘쳤다. 허리까지 드리운 긴 생머리는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를 선사해주었다.“수호 씨, 경매 곧 시작해요. 얼른 가죠 우리.”강이나를 본 유정연은 표정이 살짝 부자연스러워졌다.그녀만 해코지하지 않았다면 도아영이 진작 이수호의 와이프가 됐을 테니까. 이제 와서 경매까지 함께 가다니? 이수호는 도씨 일가의 체면을 아예 무시한 채 강이나와 함께 참석하기로 한 걸까?이건 대놓고 도씨 일가에게 창피함을 안겨주는 일이다.“도 회장님댁 사모님 되시죠? 수호 씨한테 얘기 들었어요. 이분은...”강이나는 자신과 스타일이 너무 비슷한 임규리를 보더니 가볍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도아영만으로 모자라서 또 한 명 더 내세우는 걸까?몇 명이 와도 전혀 문제 될 건 없다. 결국 다 대체품일 테니까.강이나가 임규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자 유정연은 마음이 찔렸는지 얼른 조카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그럼 우린 용건 끝났으니 이만 가볼게!”그녀는 결국 임규리를 이끌고 사무실을 나섰다.한편 이수호는 가까이 다가오는 강이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상처도 다 낫지 않았을 텐데 뭣 하러 나왔어?”“수호 씨랑 경매장 가려고 나왔죠. 오늘 경매가 수호 씨한테 엄청 중요한 자리란 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자리를 비우겠어요?”강이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설마... 다른 사람이라도 초대한 거예요?”이수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그는 오늘 확실히 도아영에게 이브닝드레스를 보냈다.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할머니의 뜻일 뿐 절대 그가 원해서 한 일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대표님, 아영 씨는 오늘 안 오신답니다...”‘안 오다니? 이 여자 점점 더하네?’평상시에 이런 기회가 생기면 그녀는 참석하지 못해서 안달인데 오늘은 되레 안 온다고 고집을 피우는 걸까?그의 표정을 살펴보던 강이나가 언짢은 듯 되물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