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아, 수호 저 녀석 지금 강이나한테 홀려서 제정신이 아니야. 근데 걱정하지 마. 너한테 꼭 사과하라고 할 테니까. 내가 찜한 손주며느리는 너라는 걸 아무도 바꿀 수 없어.”남현숙의 자애로운 말투에 도아영이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대표님이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은데 저도 더는 할 얘기가 없어요. 두 사람이 잘되기를 축복할게요.”도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앞으로 제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보살펴드리러 오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대표님의 혼약은 여기까지 하죠.”“아영아...”남현숙이 뭐라 설득하려 하자 도아영이 고개를 내저었다.“할머니, 집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다음 날에 또 뵈러 오겠습니다.”그러고는 이씨 저택을 나섰다.남현숙은 멀어져가는 도아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예전에 아영이는 이렇게 분별이 없는 애가 아니었는데.’문밖, 도아영이 이씨 저택의 대문을 열자마자 누군가가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았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옷소매에 숨긴 호신용 칼을 꺼내려 했지만 상대의 몸에 이경 그룹 휘장이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이수호의 사람인 걸 알아챈 그녀는 칼을 거두고 납치를 당한 것처럼 했다. 이수호가 아무리 그녀를 싫어한다고 해도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진 않고 이수호의 다른 검은색 자동차에 태웠다.도아영은 정신을 잃은 척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누군가가 그녀를 들고 나가는 게 느껴졌다.딩동.귓가에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로열 호텔의 엘리베이터 소리와 매우 흡사했다.‘날 호텔로 데려왔나?’똑똑.“대표님, 데려왔습니다.”“들어와.”방 안의 담배 냄새가 코를 찔러 도아영은 숨을 참았다. 상대는 그녀를 푹신한 침대 위에 던져버렸다.도아영의 심장이 쿵쾅거리던 그때 이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깨워.”“네.”경호원이 차가운 물을 도아영에게 쏟자 도아영이 두 눈을 번쩍 떴다.불빛이 어두워 분위기가 더욱 야릇했다
도아영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확인했다. 신문에 큼지막한 몇 글자가 적혀있었다.[이경 그룹, 도원 그룹과 계약 해지, 천억 프로젝트 투자 철회 발표.]도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천억 프로젝트는 도원 그룹에서 현재 개발 중인 부동산 사업이고 벌써 절반 정도 진행되었다. 이런 때에 이수호가 투자를 철회한다면 집을 지을 수 없게 된다.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려면 다른 투자자를 찾아야만 했다.그런데 이경 그룹이 도원 그룹과 계약을 해지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강주에 도원 그룹과 계약하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천억 프로젝트가 어그러질 위기에 놓였고 자칫하다간 도원 그룹도 많은 돈을 잃을 수 있다.도아영이 허리를 숙여 신문을 만져보았다. 아직 따뜻한 걸 봐서는 신문을 찍어내자마자 가져온 게 분명했다. 이수호가 빨리 움직인 걸 보면 그녀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고 강주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려주려는 듯싶었다.“도아영, 도씨 일가의 딸로서 이 집안을 위해 공 좀 세우라는데 왜 그래? 남자 마음 하나 잡으라고 한 게 그렇게 억울해? 반반하게 생겨서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유정연은 자신의 불만을 쏟아냈다.“네 주제에 도원 그룹을 이끌어가겠다고? 충고하는데 하루빨리 도원 그룹을 네 동생한테 줘. 그리고 남현숙의 마음도 잘 구슬려.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이씨 일가에 시집가는 거야.”“얘기 다 했어요?”도아영이 유정연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가만히 있을 건가요? 그렇게 급하면 아줌마가 그 집안에 시집가요, 그냥.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는 건 아줌마가 나보다 더 잘하잖아요.”“너 이 녀석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유정연은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도아영은 신문을 챙기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수호가 투자를 철회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전생에 이 프로젝트가 대박이 났다. 그런데 이수호가 천억을 투자한 대주주이기에 마지막에 도원 그룹이 나눠 가진 돈은 얼마
이수호는 도아영을 무섭게 째려보았고 말투마저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다.“수호 씨, 이러지 말아요. 아영 씨를 오해했어요. 내가 꿇고 싶어서 꿇은 거예요...”“이나야, 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이러니까 자꾸 괴롭힘을 당하지. 내가 분명히 말했었지, 이 사람 만나지 말라고.”이수호가 강이나를 감싸고 돌 거라는 걸 도아영은 진작 예상했다.강이나는 항상 이수호가 나타날 때마다 다쳤다. 사실 강이나가 무릎을 꿇은 순간부터 도아영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하지만 알면서도 맞춰줬다. 어쨌거나 이수호가 그녀를 미워하면 더 쉽게 파혼할 수 있으니까.“도아영, 전에는 네가 그냥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악랄하기까지 하구나. 몸이 약한 이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널 가만두지 않아.”그러고는 강이나와 함께 나가려 했다.그사이 설명할 시간이 충분했지만 강이나는 침묵을 택했고 그저 미안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쳐다보았다.강이나의 두 눈에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잠깐 스친 우쭐함을 도아영이 포착했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둘이 약혼하면 뭐? 그래봤자 수호 씨 마음에는 나밖에 없는데.”도아영은 바닥에 떨어진 은행카드를 주워 두 사람을 불렀다.“강이나 씨, 카드 놓고 갔어요.”강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이수호도 그제야 도아영이 들고 있는 은행카드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이나야, 쟤한테 돈을 줬어?”강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나 때문에... 파혼하는 걸 가만히 볼 수가 없어서요.”이수호가 대답하기 전에 도아영이 먼저 말했다.“강이나 씨, 난 무조건 파혼할 겁니다. 대표님도 아마 겉과 속이 다르고 마음이 악랄한 여자와 약혼할 생각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 돈도 필요 없어요.”그러고는 강이나에게 은행카드를 돌려주었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도아영이 아니었다.강이나는 일부러 은행카드를 두고 갔다. 만약 도아영이 받아서 나중에 이수호가 알게 된다면 일이 더 커질 게 분명했다.
유정연은 도아영과 이수호가 화해하기만을 애타게 바랐다.도아영이 이씨 일가에 시집가면 앞으로 유정연 모자에게도 이로울 테니까.초조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도아영은 피식 웃었다.“네.”“진짜? 너무 잘됐다!”유정연이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수호가 너한테 감정이 남아있을 거라고 했잖아. 안 그러면 뭣 하러 데이트 신청을 하겠어?”“아줌마, 오해하셨어요.”도아영이 말했다.“대표님은 파혼 얘기로 저를 불러내신 거예요.”“아니 그럼...”유정연이 불안감에 휩싸여 눈동자가 파르르 떨릴 때 도아영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대답했다.“네, 이미 파혼했어요.”“뭐라고?! 파혼을 해?”그 순간 유정연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옆에 있던 도지호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도아영에게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야, 도아영! 너무 한 거 아니야? 어떻게 집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선뜻 파혼하는 거야? 대체 우리가 안중에 있긴 해?”“내 혼사야. 나 스스로 결정하면 될 일이지 뭣 하러 상의를 해? 오늘부로 회사일 정식으로 이어받을 거야. 아줌마, 이경 그룹에서 투자 철회한 거 더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도아영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자 유정연은 울화가 치밀어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도아영 이년이 진짜 무슨 자극을 받은 거야?’도원 그룹.처음 회사에 나온 도아영은 이미 회사의 초점으로 거듭났다.그녀는 평상시에 거의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 경우 유정연이 안용준 상무에게 회삿일을 맡겼다.그 시각, 안용준이 헐레벌떡거리며 도아영의 앞으로 달려왔다.“아영 씨가 어쩐 일로 회사까지 나오셨어요? 용건 있으시면 바로 저한테 전화해서 분부하시지 그랬어요.”“안 상무?”“네, 아영 씨, 분부하세요.”도아영은 눈앞의 안용준을 힐끗 살펴보았다. 그나마 반듯한 얼굴에 40대쯤 돼 보이는 나이였는데 평소에 나름 관리를 잘 한 듯싶었다. 다만 웃을 때 살짝 느끼한 모습은 피면할 수가 없었다.전생에 도아영은 도원 그룹을 유정원 모자에게 맡
“아영 씨, 이건 딱히 관련 없는 서류들이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얼른 가서 커피 한잔하세요.”안용준이 아양을 떨면서 말했다.말인즉슨 회사의 그 어떤 업무도 간섭하지 말라고 도아영에게 으름장을 놓는 식이었다.이에 도아영이 손을 쭉 뻗었다.“이리 줘요.”“아니 그건...”“안 상무, 이제 슬슬 우리 집안 세대주 행세를 하려고 드네요?”강압적인 그녀의 태도에 안용준이 재빨리 대답했다.“제가 어찌 감히요. 아영 씨가 보시겠다면 당연히 드려야죠. 저는 단지 아영 씨가 제대로 보실 줄 모를까 봐 그런 겁니다...”“이렇게 하죠. 라운지에 갈 필요도 없고 우리 그냥 대표이사실로 가요. 이참에 최근 회사에서 서명이 필요한 문서들도 싹 다 가져오세요.”“아영 씨...”도아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용준의 말을 자르고 주연우에게 시선을 옮겼다.“주연우 씨? 주 비서가 대신 서류들 챙겨오고 안 상무는 번거롭겠지만 저랑 함께 사무실로 가시죠.”“네... 네.”안용준은 대답만 척척 할 뿐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이 여자가 회사엔 대체 뭐 하려고 나온 거야?’만에 하나 회사 장부의 문제점이라도 발각된다면 안용준은 끝장날 것이다.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도아영과 함께 대표이사실로 들어왔다. 이곳은 그녀의 아빠 도석진이 생전에 쓰시던 사무실이다. 도아영은 아빠가 생전에 절제되고 심플한 인테리어를 선호하셨던 걸 아직 기억하고 있다.하지만 지금 사무실은 유정연의 손을 거쳐 엉망진창이 돼버렸다.몇백만 원대의 게임 컴퓨터, 담배와 시가, 사치스러운 와인 캐비닛까지...심지어 전시용 신발장까지 만들어서 그 안에 죄다 한정판 축구화를 넣어두고 있었다.유정연과 도지호에게 회사를 맡긴 이후로 사무실마저 이토록 황당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아영 씨, 사모님과 지호 도련님이 아직이시니 두 분 오시거든...”“안 상무, 도원 그룹 상속권은 내 손에 있어요. 전에 아줌마가 회사 운영에 관심이 있다고 하셔서 잠깐 맡겼을 뿐이에요. 당분간 믿고 맡겼는데 운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볼게요.”도아영은 말하면서 꼼꼼하게 장부를 훑어보는 척했다.그녀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면서 첫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 페이지로 아주 천천히 펼쳤다.맞은편에 서 있는 안용준은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수십억 원의 회사 공금 횡령이란 게 무엇을 의미할까?남은 생은 줄곧 감방에서 지내야 한다는 뜻이겠지...탁.문득 도아영이 수중의 장부를 책상 위에 내던졌다.화들짝 놀란 안용준은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는데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투덜대는 것이었다.“이게 대체 다 뭐야? 숫자만 빽빽이 적혀 있어서 뭐가 뭔지 모르겠잖아.”그 순간 안용준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도아영이 장부를 볼 줄 몰라?’옆에 있던 주연우도 미간을 찌푸린 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도석진 회장 따님께서... 회사 장부도 볼 줄 모르다니.안용준은 땀을 쓱 닦고 가까이 다가가 아양을 떨었다.“아영 씨, 제가 말했잖아요. 회사 상황이 궁금하시다면 얼마든지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괜히 회사까지 번거롭게 나오실 필요 없어요.”“하긴. 여기 이 서류들은 전부 서명해야 하는 거죠?”도아영은 주연우를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주 비서, 이따가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만 골라내세요. 나도 이참에 회사 경영이나 배워야겠어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그녀를 향한 실망에 휩싸인 채 침울하게 대답했다.한편 안용준이 줄곧 떠날 기미가 없어 보이자 그녀가 말했다.“안 상무는 언제까지 거기 서 계실 거예요? 이만 나가보시죠.”안용준은 도아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걸 확인하고 나니 졸여왔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그럼 천천히 보세요, 아영 씨.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네.”도아영은 왠지 회사 잡무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이에 안용준도 시름 놓고 사무실을 나섰다.그는 나갈 때 잊지 않고 주연우에게 경고의 눈빛을 날렸다.회사일을 절대 도아영에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게 뻔했다.사무실 문이 닫힌 후,
“그러니까 아영 씨는 지금 일부러 실력을 감추고 어리석게 보이는 거라고요?”“바로 그거예요.”도아영이 말을 이었다.“섣불리 적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요. 증거들은 천천히 수집해야 하거든요. 저 두 사람이 회사 자산을 남용했으니 이미 주주들 이익에 영향을 미치고 있겠죠. 모든 증거를 확보하고 저 두 인간의 회사 인맥을 싹 다 자른 후에 감방으로 보내버리면 돼요.”주연우는 도아영을 빤히 쳐다봤다.“아영 씨... 예전과 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이전의 도아영은 조신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물론 똑똑하긴 하지만 상업계에서 한 실력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다만 아까 그녀가 했던 말들은 전부 일리 있는 말이었다.주연우는 참지 못하고 감탄을 연발했다.“주 비서도 우리 회사 다닌 지 몇 년은 됐죠? 아빠가 전에 후원해주신 거로 아는데 이번에 나 한번 도와주길 바라요.”“물론입니다. 안 상무랑 사모님이 회장님께서 남겨주신 회사를 망치게 내버려 둘 순 없어요.”“좋아요.”“하지만...”주연우가 잠시 머뭇거렸다.“안 상무가 조금 오버한 건 있지만 요즘 이경 그룹에서 확실히 우리 회사만 공격하고 있어요. 특히 오늘은 더 유별나고요.”“오늘이요?”주연우가 머리를 끄덕였다.“오늘 이경 그룹에서 우리 회사 프로젝트들을 몇 개나 철회했어요. 이제 우리 회사는 자금이 부족해 더는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든 상황이에요. 재무팀에서 장부를 맞춰보기 시작했는데 현재 남은 자금으론 7일밖에 버티지 못한다네요.”7일이라...도아영은 쓴웃음을 지었다.이수호가 강이나를 위해 이딴 방식으로 그녀가 머리를 숙일 때까지 궁지에 몰아붙이려나 보다.“자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 지금 은행 대출을 고민하고 있어요.”이에 주연우가 미간을 찌푸렸다.“네? 그건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썩 동의하기 어렵네요.”“방법을 생각해서 은행에 천억 정도 대출받고 전에 수호 씨가 철회한 천억짜리 부동산 프로젝트부터 해결해요. 그 뒤에 융자에 관한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아영이가 나 보러 오겠다면 시간 없다고 해.”“하지만... 대표님은 줄곧 아영 씨가 머리 숙이길 바라셨잖아요?”“걔가 어디에도 도움을 구할 데가 없고 기댈 곳 없이 외롭게 돼버리는 게 내 소원이거든.”이수호의 눈가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아영이는 반드시 이나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할 거야.”그 시각 도아영은 어느덧 백화점에서 영양제를 몇 개 골랐고 이제 막 아래층에 내려가 커피를 사려던 틈에 곁눈질로 줄곧 뒤를 따라오는 검은색 옷차림의 경호원을 힐긋 살폈다.경호원이 워낙 눈에 띄었던지라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이를 본 도아영은 고개를 내저으며 가볍게 웃었다.이수호도 참 그녀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경호원까지 불러와서 감시하게 하는 건 도아영이 강이나를 해칠까 봐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회사 일로 곤경에 처하길 바라서일까?한편 도아영은 여유가 넘치게 커피를 다 산 후 사람들이 가장 밀집된 구역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이를 본 경호원이 재빨리 따라갔지만 그녀가 워낙 빨리 걷고 또 일부러 인파가 몰리는 곳으로 들어가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놓치고 말았다.“안 비서, 아영 씨를 놓쳤어요!”경호원은 블루투스 장치로 안지원에게 소식을 전했다. 백화점의 소식을 접한 안지원은 즉시 이수호에게 알렸다.“놓치다니?”이수호가 미간을 구겼다.“멍청한 것! 도씨 저택 문 앞에서 지키라고 해.”그는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우리도 이만 집에 돌아가야겠어.”“네, 대표님.”이씨 저택.안지원이 운전하여 이수호를 이씨 저택까지 모셨다.“대표님, 요즘 강이나 씨 일 때문에 어르신께서 줄곧 기분이 안 좋아 보이세요. 이제 그만 어르신께 사과하시는 건 어떨까요?”“내가 알아서 해. 어쨌거나 우리 할머니시잖아.”이수호가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자 거실 등이 환하게 밝혀지고 안에서 남현숙 어르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역시 날 즐겁게 하는 건 우리 아영이밖에 없다니까.”남현숙의 웃음소리를 들은 이수호는 미간을 확
“약혼식에서 일부러 파혼 선언을 하고 주씨 일가에 시켜서 재미도 없는 신문 기사를 내더니 이제 와서 구연준 꼬시면서 경매에서 그렇게 도발을 해? 너 이거 다 내 주의를 끌려고 그런 거잖아. 좋아, 이제 드디어 소원성취했어.”이수호는 그녀의 턱을 잡고 당장이라도 몸을 기울일 것만 같았다.그때 도아영이 뜬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대표님 이러는 거 강이나 씨한테는 떳떳해요?”강이나라는 이름 석 자에 이수호는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다.이때다 싶어 도아영이 재빨리 손을 빼내고 그의 목을 껴안더니 한결 매혹적인 눈길로 넌지시 말을 이었다.“대표님 말이 맞았어요. 내가 이렇게 한 거 대표님께 관심받고 싶어서예요. 그래도 소파는 영 비좁을 것 같은데 우리 이참에... 내 방으로 갈까요?”그녀가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자 이수호는 짜증 섞인 표정으로 가차 없이 밀쳐내고 차갑게 쏘아붙였다.“이런 저질스러운 수작은 나한테 안 통해. 그러니까 적당히 해, 도아영!”“에이 왜요? 대표님 아주 좋아하시잖아요. 나의 이런 저질스러운 수작...”도아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내빼는 척하지 말아요. 남자들은 진짜 사랑하는 여자랑 하룻밤 즐기는 여자가 따로 있잖아요. 충분히 이해하고 전혀 충돌될 것 없다고요.”그녀가 몸을 배배 꼬면서 이수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걱정 마세요. 오늘 밤 일은 강이나 씨한테 무조건 비밀로 할게요.”“꺼져!”이수호는 드디어 그녀를 밀쳐내고 혐오에 찬 눈길로 째려보며 경고장을 날렸다.“내 앞에서 이런 수작 그만 부려! 너 같은 여자 수없이 봐왔어. 할머니만 아니었다면 난 절대 너랑 결혼할 일 없다고!”한편 도아영은 증오에 찬 그의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일부러 홀가분한 척하며 말했다.“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대표님, 이만 가보시죠.”위층에서 줄곧 엿듣던 유정연은 대화가 이렇게 흘러가자 당황하기 시작했다.이수호가 그들의 돈줄인데, 이경 그룹의 뒷받침이 없다면 도원 그룹은 이제 어떡하란 말인가?유정연은 부랴부랴 아래층
“아니요, 틀리셨어요. 이 돈은 도원 그룹 자금이 아니에요.”구연준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아니라고?”“아빠가 남겨주신 혼수거든요.”전생에 유정연은 그녀의 혼수에 눈독을 들이고 어떻게든 이 집안의 주인 행세를 하려고 했다. 일단 도아영을 이씨 일가에 시집 보내면 천억의 혼수까지 본인이 챙기게 될 테니까.남현숙은 도아영을 며느릿감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유정연은 몰래 남현숙을 찾아가 혼수를 없애기로 논의하고 심지어 그 돈으로 회사 위기를 해결하겠다고 사정했다.하지만 정작 회사 위기는 해결하지 못한 채 유정연만 돈을 챙겨서 도망쳤다.이번 생에 유정연이 또다시 이런 반란을 일으킨다면 혼수가 아니라 도씨 일가의 재산을 일 전 한 푼 못 챙길 것이다.“대표님, 요즘은 당분간 투자 안 하시는 게 좋겠어요.”“도원 그룹이 거의 몰락 상태인데 내가 투자까지 안 하면 진짜 부도낼 생각이야?”도아영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유정연이 줄곧 제 아들에게 회사를 맡기고 싶어 했으니 요 며칠 난장판이 된 회사 장부도 전부 도지호 그 멍청이에게 맡기면 그만이다.주주들이 과연 회사가 부도나는 걸 지켜보면서까지 유정연 모자를 용납해줄 수 있을까? 도아영은 문득 궁금해졌다.저녁 무렵, 구연준이 그녀를 도씨 저택으로 데려다줬다.도씨 저택 안.문을 열고 들어서니 거실 불이 환히 비치고 누군가가 불쑥 그녀를 방안으로 끌어들였다. 도아영은 살려달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상대가 그녀의 목덜미를 잡고 벽에 밀어붙였다.“아영아, 너 한 번 만나기 참 어렵네?”이수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아찔한 기운이 스쳤다.도아영은 질식할 것만 같아 힘껏 몸부림쳤다.“이거, 놔!”이수호도 방금 너무 세게 밀어붙인 걸 알아챘는지 손을 놓아주었다. 도아영은 벽을 짚고 격하게 기침을 해댔다. 이에 이수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솜씨 좋아 도아영! 한편으론 우리 집안 며느리가 되길 넘보고 또 한 편으론 구연준을 유혹하고 있어? 어느 쪽 이익
“축하해요, 수호 씨. 골든하임을 얻게 됐으니 이경 그룹도 이번엔 엄청난 수익을 창출할 거예요.”옆에 있는 강이나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음침하게 변해버린 이수호의 안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맞은 편에서 도아영은 그 누구도 눈치 볼 것 없이 입꼬리를 씩 올리고 구연준과 나란히 샴페인을 들었다.이 광경이 이수호에겐 왜 이토록 눈꼴사납게 느껴지는 걸까?“대표님, 이제 어떡합니까?”안지원은 구연준이 여기서 멈출 줄은 몰랐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땅을 무조건 손에 넣겠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인데 왜 갑자기 양보한 걸까?“어떡하긴 뭘 어떡해?”이경 그룹에서 하는 수 없이 손해를 당하는 수밖에.이수호는 웃음기를 거두고 싸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번 일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분명 도아영 저 여자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수호 씨!”강이나가 그를 따라가려고 성급한 마음에 손목을 잡았는데 이수호가 망설임 없이 손을 홱 뿌리치는 것이었다.“먼저 돌아가 있어.”강이나는 멍하니 넋을 놓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수호는 이미 멀리 떠나가 버린 상태였다.그는 단 한 번도 강이나를 내버려 둔 적이 없는데...경매장 밖에서 이수호가 음침한 얼굴로 차갑게 쏘아붙였다.“유정연 이 인간 당장 내 앞에 데려와!”“네, 알겠습니다.”1시간 후, 이경 그룹 사무실 안.유정연이 두 명의 경호원에게 끌려서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수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수... 수호야,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아영이가 또 네 심기를 건드렸니?”“연기 그만 해요!”이수호는 차가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아영이랑 구연준 대체 무슨 사이에요?”“뭐?”도아영과 구연준이 무슨 사이라니?그 두 사람이 왜 한데 엮인 걸까?유정연은 황급히 대답했다.“수호야, 우리 아영이가 또 사고를 친 모양이네. 내가 돌아가서 따끔하게 혼낼게. 그러니까 얼른 화 풀어. 우리랑 너희 집안에서 협력하기로 한 건 변함없잖아!”“시끄럽고! 골든하임이 함
“약혼자에 대해 꽤 아는 게 많네?”어디 그뿐일까?전생의 처참했던 3년을 돌이켜보면 그녀는 거의 이수호의 노예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수호가 힐끔 째려보면 혹여나 자신에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고, 그의 말 한마디에 드디어 자신이 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착각할 지경이었다.외조라면 이수호의 회사를 위해 대폭으로 후원해주고 내조라면 남현숙을 보살펴주는 것, 이수호를 위해 직접 도시락까지 싸주는 것 등등 헤아릴 수가 없다.그의 취미를 장악하고 있는 건 제쳐두고 그가 샤워를 몇 분에 하는지, 하루에 화장실은 몇 번 다녀오는지, 화장실에서 매번 휴지를 몇 칸 쓰는지... 마음 같아선 그의 모든 걸 장악하고 싶었다.“대표님, 두고 보세요. 오늘은 곧 대표님이 완승하는 날일 겁니다.”도아영은 테이블 위의 샴페인을 한 잔 쭉 들이켰다.경매가 곧 시작되었고 마침내 골든하임 순서가 왔다.“이번엔 도시 외곽의 골든하임입니다. 경매가 600억에 시작하겠습니다!”600억이란 경매가에 구연준은 미간을 구겼다.전에 도아영이 했던 말과 똑같았으니까.여기 경매는 전부 현장에서 가격이 공개되는 거라 사전에 비밀이 유출될 일은 없다.하여 도아영은 이 땅의 경매가가 얼마인지 절대 미리 알 수가 없다.그렇다면 골든하임이 진짜 이수호의 트릭이었단 말인가?“천억이요!”“1600억이요.”“2천억 합니다.”경매가 시작되자마자 장내에 뜨거운 열기가 차올랐다. 다들 앞다투어 골든하임을 경쟁하고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이 땅은 앞서 상승 가능성이 커서 미래에 분명 1조 원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도아영은 줄곧 지켜만 보는 구연준을 흘기더니 곧장 그의 팻말을 들었다.“4천억이요!”구연준은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구시렁댔다.“제 돈이 아니라고 진짜 겁 없이 부르네.”“그럼요.”아니나 다를까 맞은편의 이수호가 팻말을 들었다.“6천억 할게요.”갑자기 2천억이나 뛰어오르자 다른 사람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이때 이수호가 가까운
“도아영, 당장 거기 서!”잠깐 휴식 시간을 가질 때 도아영이 화장실에 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뜻밖에도 뒤에서 이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무슨 일이시죠?”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낯선 이를 대하듯 이수호에게 말했다.“너 진짜 대단해. 우리 이경 그룹에서 봐둔 땅을 두 배로 손해 보더라도 기어코 낙찰받은 거야? 왜? 일부러 날 겨냥하려는 거야 아니면 내 관심을 받고 싶어서 그래?”“오해하셨어요, 대표님. 저는 단지 그 땅이 마음에 들어서 낙찰한 거예요. 대표님이랑 전혀 상관없어요.”도아영이 진지하게 말했지만 이수호는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그 시각 강이나가 이수호를 쫓아왔다.“아영 씨, 오늘 경매에서 너무 충동적으로 나오신 거 아니에요? 그 땅은 아영 씨가 엄청 손해 볼 거예요.”강이나는 말하면서 옆에 서 있는 이수호를 힐긋 살펴봤다.“수호 씨가 오늘 나랑 함께 와서 입장이 난감해진 거 알아요. 아무리 수호 씨랑 맞서 싸우려고 해도 막무가내로 나오면 안 되죠. 나중에 손해 보면 또 수호 씨한테 도와달라고 손 벌릴 거잖아요. 내 말 틀렸어요?”이에 이수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네가 낙찰한 땅이야. 너 스스로 알아서 해.”“대표님은 농담도 참. 당연히 나 스스로 알아서 하죠. 우린 이미 파혼한 거 아닌가요? 내가 왜 대표님께 손 벌리겠어요? 이제 우리 남남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너...”이수호는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때 구연준이 경매장에서 나왔고 이를 본 도아영이 일부러 목청을 높이며 다정하게 그를 불렀다.“연준 씨!”‘연준 씨’라는 호칭이 입밖에 떨어진 순간 이수호의 표정이 더 심하게 일그러졌다.도아영은 구연준의 옆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이제 곧 2부가 시작할 테니 나랑 연준 씨는 얼른 들어가 봐야겠어요. 골든하임을 오랫동안 눈여겨봐 왔거든요. 그럼 우린 이만.”도아영은 이수호와 강이나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그 광경을 바라보는 이수호는 온몸에 음침한 기운을 내뿜었고 옆
그중에서도 이수호가 가장 한심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이런 방식으로 그의 관심을 받으려는 건 너무 저속한 표현이니까.“400억 할게요.”이수호가 천천히 가격을 외쳤다.‘도아영, 내가 널 다스리지 못할까 봐?’“500억이요.”“600억 할게요!”점점 치솟는 가격에 강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수호 씨, 저 땅은 그 정도 가치가 안 돼요.”이수호도 표정이 일그러지긴 마찬가지였다.옆에 있던 안 비서가 나지막이 말했다.“대표님, 이미 우리의 예산을 초과했습니다.”이수호는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도아영이 돈도 없으면서 이렇게 가격을 부르는 건 그와 맞서려는 게 분명했다.‘좋아, 오늘은 손해 보더라도 반드시 널 따끔하게 혼내줄 거야.”결국 이수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640억 할게요!”그 시각 구연준은 아주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고만장한 이수호의 태도가 제법 마음에 드나 보다.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현재 이수호는 벌써 100억을 손해 본 상태이다.도아영에게 이런 실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수호를 자극해서 손해를 보게 하다니.예전에는 그녀를 너무 만만하게 본 듯싶었다.구연준이 이쯤에서 멈추라고 말하려 할 때 옆에 있던 도아영이 또다시 팻말을 들었다.“천억이요!”순간 장내가 술렁거렸다.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천억이나 부른 걸까?어떻게 천억까지 치솟은 걸까?그녀의 행동에 경매사까지 어안이 벙벙해졌다.경매사는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제 귀를 의심했다. 남원 외곽의 천 평짜리 땅은 시가가 고작 200억이다.아까 분명 640억까지 올라갔는데 어떻게 천억으로 뛰어오를 수 있단 말인가?“도아영 미친 거 아니야?”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도시 외곽의 부질없는 땅을 무려 천억까지 부르다니...그녀가 뭘 믿고 이토록 담대해진 걸까?“대표님, 더는 안 되십니다. 더 부르면 손해가 너무 커요!”안지원도 바짝 긴장했다.도아영은 지금 눈에 뵈는 것 없이 미쳐 날뛰는 중이다.그동안 도시 외곽의 천 평짜리 땅은 단 한 번
강이나는 애써 도아영을 위해 변명하는 것 같지만 정작 듣고 있는 이수호에겐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나를 좋아한다고? 걔는 그저 더 높은 자리로 기어오르는 게 목적이야!’이전에는 이수호를 넘봤고 지금은 또 구연준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어쩐지 요즘 그를 향한 태도가 조금 식었더라니...여기까지 생각한 이수호는 두 눈에 싸늘한 한기가 감돌았다.‘도아영, 너 진짜 대단한 여자구나!’“가자 이만.”이수호는 두 사람한테서 시선을 떼고 강이나와 함께 경매장으로 들어섰다.한편 구연준도 자연스럽게 도아영에게 팔짱을 거는 제스처를 취하고 차분하게 말했다.“오늘 밤엔 네가 내 파트너야. 지금부턴 쭉 내 말만 들어야 해. 알겠지?”“대표님, 우리 다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인데 내가 파트너 해주면 오늘 밤 나한테 실컷 돈을 써주시는 거죠?”“넌 내 파트너야, 여자친구가 아니라.”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했다.“하지만 수호 씨는 전에 선뜻 내게 돈을 써줬어요. 인간적인 매력으로 따져도 대표님 설마 수호 씨한테 밀리고 싶은 건 아니겠죠?”“지금 날 자극해?”“제가 어찌 감히요...”“네가 이겼어.”“...”경매장 안에서 뭇사람들은 이미 자리에 착석했다.오늘 경매는 대부분 비서가 대신 나와 줬고 오직 이수호와 구연준 두 명의 빅 보스만 직접 참석했다. 다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고 있을 때 장내가 전과 달리 싸늘한 정적에 잠겼다.아무도 감히 이 두 명의 빅 보스와 가격을 경쟁할 엄두가 안 났다.“수호 씨, 아영 씨랑 구 대표님 사이가 심상치 않아 보여요...”강이나는 이수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주최 측에서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구연준과 도아영이 마침 그들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양측은 머리만 들면 눈이 마주칠 지경이었다.이수호는 웃고 떠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도아영, 아주 좋아...”처음엔 강이나를 따라 하며 그에게 접근했고 뒤이어서 할머니 앞에서 얌전한 이미지를 보여준 그녀였다. 말끝마다 파혼을 언급
“그러게. 강주 사람들이라면 다 알다시피 도씨 일가랑 이씨 일가의 혼약은 도아영이 애타게 쟁취한 거잖아. 진짜 본인이 뭐라도 된 줄 아나 봐! 이수호는 파혼해도 곧장 새 여자를 찾을 수 있는데 도아영은 뭐야? 강주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걸?”...경매장 밖에서 몇몇 부잣집 사모님들이 대놓고 도아영의 흉을 봤다.그 시각 그녀는 이미 경매장에 도착한 지 7, 8분이 넘었다. 이수호와 강이나보다도 좀 더 빨리 온 듯싶었다.지금쯤 경매장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빌어먹을 구연준이 한사코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니 사모님들의 험담까지 들어야만 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사서 고생이냐고?’‘구연준도 이수호보다 더 나을 건 없네. 두 인간 피차일반이야.’‘이러니까 전생이나 현생이나 너 죽고 나 죽고 티격태격하는 거지.’“아영 씨, 이 대표님은 이제 그만 미련 접으셔야겠네요. 대표님 곁에 강이나 씨가 있잖아요. 이렇게 쫓아온다고 무슨 소용이겠어요?”“그러게 말이에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대표님과 파혼하겠다고 호통치더니 왜 또 여기까지 쫓아오는 거예요? 아쉽지만 대체품은 어디까지나 대체품이에요. 대표님은 이제 진짜 운명의 반쪽을 만났으니 아영 씨한테 돌아올 일은 없어요.”“자업자득이죠 뭐. 어떻게 기어오른 대표 사모님 자리인데 막상 내주려 하니까 달갑지 않겠죠. 근데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해요. 설마 본인이 강이나 씨랑 비교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줄곧 이수호 와이프 자리를 탐내던 여자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도아영을 헐뜯었다.그도 그럴 것이 도아영이 이수호를 위해서 얼마나 비굴해지고 자존심을 다 내려놨는지 모르는 이가 없으니까. 남자들 눈에만 하찮게 보이는 게 아니라 여자들까지 그녀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수준이었다.이때 나서기 좋아하는 한 여자가 도아영에게 다가와 이상야릇하게 말했다.“아영 씨는 예쁘장하게 생겼으니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남자 마음을 사로잡는 법이나 배우세요. 안 그러면 강주에서 누가 감히 아영 씨를 만나주
똑똑.문밖에서 강이나가 두 번 노크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그녀는 화이트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는데 우아하고 고고한 기품이 차 넘쳤다. 허리까지 드리운 긴 생머리는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를 선사해주었다.“수호 씨, 경매 곧 시작해요. 얼른 가죠 우리.”강이나를 본 유정연은 표정이 살짝 부자연스러워졌다.그녀만 해코지하지 않았다면 도아영이 진작 이수호의 와이프가 됐을 테니까. 이제 와서 경매까지 함께 가다니? 이수호는 도씨 일가의 체면을 아예 무시한 채 강이나와 함께 참석하기로 한 걸까?이건 대놓고 도씨 일가에게 창피함을 안겨주는 일이다.“도 회장님댁 사모님 되시죠? 수호 씨한테 얘기 들었어요. 이분은...”강이나는 자신과 스타일이 너무 비슷한 임규리를 보더니 가볍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도아영만으로 모자라서 또 한 명 더 내세우는 걸까?몇 명이 와도 전혀 문제 될 건 없다. 결국 다 대체품일 테니까.강이나가 임규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자 유정연은 마음이 찔렸는지 얼른 조카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그럼 우린 용건 끝났으니 이만 가볼게!”그녀는 결국 임규리를 이끌고 사무실을 나섰다.한편 이수호는 가까이 다가오는 강이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상처도 다 낫지 않았을 텐데 뭣 하러 나왔어?”“수호 씨랑 경매장 가려고 나왔죠. 오늘 경매가 수호 씨한테 엄청 중요한 자리란 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자리를 비우겠어요?”강이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설마... 다른 사람이라도 초대한 거예요?”이수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그는 오늘 확실히 도아영에게 이브닝드레스를 보냈다.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할머니의 뜻일 뿐 절대 그가 원해서 한 일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대표님, 아영 씨는 오늘 안 오신답니다...”‘안 오다니? 이 여자 점점 더하네?’평상시에 이런 기회가 생기면 그녀는 참석하지 못해서 안달인데 오늘은 되레 안 온다고 고집을 피우는 걸까?그의 표정을 살펴보던 강이나가 언짢은 듯 되물었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