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 씨, 이건 딱히 관련 없는 서류들이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얼른 가서 커피 한잔하세요.”안용준이 아양을 떨면서 말했다.말인즉슨 회사의 그 어떤 업무도 간섭하지 말라고 도아영에게 으름장을 놓는 식이었다.이에 도아영이 손을 쭉 뻗었다.“이리 줘요.”“아니 그건...”“안 상무, 이제 슬슬 우리 집안 세대주 행세를 하려고 드네요?”강압적인 그녀의 태도에 안용준이 재빨리 대답했다.“제가 어찌 감히요. 아영 씨가 보시겠다면 당연히 드려야죠. 저는 단지 아영 씨가 제대로 보실 줄 모를까 봐 그런 겁니다...”“이렇게 하죠. 라운지에 갈 필요도 없고 우리 그냥 대표이사실로 가요. 이참에 최근 회사에서 서명이 필요한 문서들도 싹 다 가져오세요.”“아영 씨...”도아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용준의 말을 자르고 주연우에게 시선을 옮겼다.“주연우 씨? 주 비서가 대신 서류들 챙겨오고 안 상무는 번거롭겠지만 저랑 함께 사무실로 가시죠.”“네... 네.”안용준은 대답만 척척 할 뿐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이 여자가 회사엔 대체 뭐 하려고 나온 거야?’만에 하나 회사 장부의 문제점이라도 발각된다면 안용준은 끝장날 것이다.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도아영과 함께 대표이사실로 들어왔다. 이곳은 그녀의 아빠 도석진이 생전에 쓰시던 사무실이다. 도아영은 아빠가 생전에 절제되고 심플한 인테리어를 선호하셨던 걸 아직 기억하고 있다.하지만 지금 사무실은 유정연의 손을 거쳐 엉망진창이 돼버렸다.몇백만 원대의 게임 컴퓨터, 담배와 시가, 사치스러운 와인 캐비닛까지...심지어 전시용 신발장까지 만들어서 그 안에 죄다 한정판 축구화를 넣어두고 있었다.유정연과 도지호에게 회사를 맡긴 이후로 사무실마저 이토록 황당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아영 씨, 사모님과 지호 도련님이 아직이시니 두 분 오시거든...”“안 상무, 도원 그룹 상속권은 내 손에 있어요. 전에 아줌마가 회사 운영에 관심이 있다고 하셔서 잠깐 맡겼을 뿐이에요. 당분간 믿고 맡겼는데 운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볼게요.”도아영은 말하면서 꼼꼼하게 장부를 훑어보는 척했다.그녀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면서 첫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 페이지로 아주 천천히 펼쳤다.맞은편에 서 있는 안용준은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수십억 원의 회사 공금 횡령이란 게 무엇을 의미할까?남은 생은 줄곧 감방에서 지내야 한다는 뜻이겠지...탁.문득 도아영이 수중의 장부를 책상 위에 내던졌다.화들짝 놀란 안용준은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는데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투덜대는 것이었다.“이게 대체 다 뭐야? 숫자만 빽빽이 적혀 있어서 뭐가 뭔지 모르겠잖아.”그 순간 안용준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도아영이 장부를 볼 줄 몰라?’옆에 있던 주연우도 미간을 찌푸린 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도석진 회장 따님께서... 회사 장부도 볼 줄 모르다니.안용준은 땀을 쓱 닦고 가까이 다가가 아양을 떨었다.“아영 씨, 제가 말했잖아요. 회사 상황이 궁금하시다면 얼마든지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괜히 회사까지 번거롭게 나오실 필요 없어요.”“하긴. 여기 이 서류들은 전부 서명해야 하는 거죠?”도아영은 주연우를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주 비서, 이따가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만 골라내세요. 나도 이참에 회사 경영이나 배워야겠어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그녀를 향한 실망에 휩싸인 채 침울하게 대답했다.한편 안용준이 줄곧 떠날 기미가 없어 보이자 그녀가 말했다.“안 상무는 언제까지 거기 서 계실 거예요? 이만 나가보시죠.”안용준은 도아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걸 확인하고 나니 졸여왔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그럼 천천히 보세요, 아영 씨.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네.”도아영은 왠지 회사 잡무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이에 안용준도 시름 놓고 사무실을 나섰다.그는 나갈 때 잊지 않고 주연우에게 경고의 눈빛을 날렸다.회사일을 절대 도아영에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게 뻔했다.사무실 문이 닫힌 후,
“그러니까 아영 씨는 지금 일부러 실력을 감추고 어리석게 보이는 거라고요?”“바로 그거예요.”도아영이 말을 이었다.“섣불리 적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요. 증거들은 천천히 수집해야 하거든요. 저 두 사람이 회사 자산을 남용했으니 이미 주주들 이익에 영향을 미치고 있겠죠. 모든 증거를 확보하고 저 두 인간의 회사 인맥을 싹 다 자른 후에 감방으로 보내버리면 돼요.”주연우는 도아영을 빤히 쳐다봤다.“아영 씨... 예전과 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이전의 도아영은 조신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물론 똑똑하긴 하지만 상업계에서 한 실력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다만 아까 그녀가 했던 말들은 전부 일리 있는 말이었다.주연우는 참지 못하고 감탄을 연발했다.“주 비서도 우리 회사 다닌 지 몇 년은 됐죠? 아빠가 전에 후원해주신 거로 아는데 이번에 나 한번 도와주길 바라요.”“물론입니다. 안 상무랑 사모님이 회장님께서 남겨주신 회사를 망치게 내버려 둘 순 없어요.”“좋아요.”“하지만...”주연우가 잠시 머뭇거렸다.“안 상무가 조금 오버한 건 있지만 요즘 이경 그룹에서 확실히 우리 회사만 공격하고 있어요. 특히 오늘은 더 유별나고요.”“오늘이요?”주연우가 머리를 끄덕였다.“오늘 이경 그룹에서 우리 회사 프로젝트들을 몇 개나 철회했어요. 이제 우리 회사는 자금이 부족해 더는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든 상황이에요. 재무팀에서 장부를 맞춰보기 시작했는데 현재 남은 자금으론 7일밖에 버티지 못한다네요.”7일이라...도아영은 쓴웃음을 지었다.이수호가 강이나를 위해 이딴 방식으로 그녀가 머리를 숙일 때까지 궁지에 몰아붙이려나 보다.“자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 지금 은행 대출을 고민하고 있어요.”이에 주연우가 미간을 찌푸렸다.“네? 그건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썩 동의하기 어렵네요.”“방법을 생각해서 은행에 천억 정도 대출받고 전에 수호 씨가 철회한 천억짜리 부동산 프로젝트부터 해결해요. 그 뒤에 융자에 관한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아영이가 나 보러 오겠다면 시간 없다고 해.”“하지만... 대표님은 줄곧 아영 씨가 머리 숙이길 바라셨잖아요?”“걔가 어디에도 도움을 구할 데가 없고 기댈 곳 없이 외롭게 돼버리는 게 내 소원이거든.”이수호의 눈가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아영이는 반드시 이나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할 거야.”그 시각 도아영은 어느덧 백화점에서 영양제를 몇 개 골랐고 이제 막 아래층에 내려가 커피를 사려던 틈에 곁눈질로 줄곧 뒤를 따라오는 검은색 옷차림의 경호원을 힐긋 살폈다.경호원이 워낙 눈에 띄었던지라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이를 본 도아영은 고개를 내저으며 가볍게 웃었다.이수호도 참 그녀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경호원까지 불러와서 감시하게 하는 건 도아영이 강이나를 해칠까 봐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회사 일로 곤경에 처하길 바라서일까?한편 도아영은 여유가 넘치게 커피를 다 산 후 사람들이 가장 밀집된 구역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이를 본 경호원이 재빨리 따라갔지만 그녀가 워낙 빨리 걷고 또 일부러 인파가 몰리는 곳으로 들어가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놓치고 말았다.“안 비서, 아영 씨를 놓쳤어요!”경호원은 블루투스 장치로 안지원에게 소식을 전했다. 백화점의 소식을 접한 안지원은 즉시 이수호에게 알렸다.“놓치다니?”이수호가 미간을 구겼다.“멍청한 것! 도씨 저택 문 앞에서 지키라고 해.”그는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우리도 이만 집에 돌아가야겠어.”“네, 대표님.”이씨 저택.안지원이 운전하여 이수호를 이씨 저택까지 모셨다.“대표님, 요즘 강이나 씨 일 때문에 어르신께서 줄곧 기분이 안 좋아 보이세요. 이제 그만 어르신께 사과하시는 건 어떨까요?”“내가 알아서 해. 어쨌거나 우리 할머니시잖아.”이수호가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자 거실 등이 환하게 밝혀지고 안에서 남현숙 어르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역시 날 즐겁게 하는 건 우리 아영이밖에 없다니까.”남현숙의 웃음소리를 들은 이수호는 미간을 확
“아영아, 얘 사과한 거 맞아?”남현숙의 질문에 도아영은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수호를 힐끔 쳐다봤다.그녀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이수호는 이 여자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확 잡아당겼다. 행여나 할머니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면 안 되니까.“할머니, 저 아영이랑 단독으로 할 얘기가 있어서 먼저 올라가 볼게요.”이수호는 말하면서 도아영을 이끌고 위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이를 본 남현숙은 미처 말리지 못한 채 손자에게 호통을 쳤다.“수호 너 이 자식! 아영이 괴롭히기만 해봐, 할미가 절대 가만 안 둬!”2층에서 이수호는 도아영을 침대에 내던진 후 침실 문을 안으로 잠갔다.“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도아영은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야릇한 눈빛으로 이수호를 쳐다봤다.“대표님 이러시는 거 강이나 씨가 알면 어떡해요? 분명 질투할 텐데.”“도아영!”이수호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목을 조르고 차갑게 쏘아붙였다.“적당히 해! 대체 무슨 낯짝으로 우리 집까지 찾아와?”“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하셔서 얼른 왔죠. 제가 뭘 잘못했나요?”도아영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한편 이수호도 힘껏 그녀의 목을 조르긴 했지만 진짜 어떻게 할 엄두는 안 났다.간사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이수호는 왠지 모를 울화가 치밀었다.“내가 목 졸라서 죽일까 봐 두렵지도 않아?”“대표님은 요 며칠 줄곧 우리 회사를 겨냥하시고 괴롭히셨죠? 내가 직접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길 바라신 거 아니었나요? 목 졸라 죽이면 내가 어떻게 무릎 꿇고 애원하겠어요?”이수호는 피식 웃더니 그제야 그녀를 놓아줬다.“눈치는 있네. 그럼 한번 빌어봐. 어떻게 용서를 구하는지 제대로 지켜볼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 와인을 들고 그녀가 애원하기만을 기다렸다.이때 도아영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천천히 말을 이었다.“서문 공장, 주성 프로젝트 개발로 매달 15일에 해외무역을 진행하고 있죠. 이경 그룹에서 아주 큰 경매장이 하나 있는 거로 아는 데 매년 수
“그럼 계속해보시겠다는 거네요?”“아니면?”도아영은 이 남자가 쉽게 협박을 당할 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번에 이씨 저택으로 찾아온 건 단지 그에게 경고장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무릇 적당한 선에서 멈추라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게다가 그녀는 더 이상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란 걸 보여줘야 했다.“대표님, 나랑 내기 한 판 하실래요?”“무슨 내기?”“계속 나랑 등지면 대표님은 올해 분명 큰코다치실 겁니다.”“...”자리에서 일어난 도아영은 이제 막 나가려다가 문 앞에서 잠깐 머뭇거렸다.“아 참, 나 아직 대표님한테 괴롭힘당한 건 할머니께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이따가 다 얘기하면 할머니가 과연 내 편을 들어줄까요 대표님 편을 들어줄까요?”“도아영!”“그래 이수호! 네가 도원 그룹 공격하는 일 할머니께 말씀드리지 않은 건 너에 대한 마지막 예의야. 그러니까 유치한 짓 그만 멈춰. 난 절대 너한테 사과할 일 없어. 그리고 이 말만은 꼭 기억해. 넌 올해 반드시 큰코다칠 거야.”“너!”도아영은 그대로 이수호의 침실을 나섰고 심지어 나갈 때 문까지 꼭 잠갔다.이수호는 가슴이 꽉 막힌 듯 숨이 차오르지 않았다.‘이 여자가 날 협박하는 것도 모자라 뭐? 내가 올해에 반드시 큰코다친다고?!’‘이런 식으로 내 주의를 끌려고? 어림도 없어!’저녁 무렵, 도아영이 도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거실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유정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 여길 제집처럼 생각해.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이모한테 얘기해. 이모가 다 해줄게.”“고마워요, 이모.”소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유정연은 안으로 들어오는 도아영을 힐긋 살피더니 웃음기를 싹 거뒀다.“왔어? 또 어디 가서 헤매고 다닌 건데?”도아영은 유정연의 야박한 태도에 진작 적응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는데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청순한 외모를 지녔다. 눈매가 가늘고 날씬한 몸매까지 더하니 청초하면서도 어여쁜 소녀의 모
“아줌마가 한 약속이니 스스로 해결하시든가요.”도아영은 옆에 있는 가정부에게 말했다.“하윤아, 임규리 씨한테 호텔 예약해드려. 호텔에서 얼마든지 지낼 순 있지만 주객전도는 하지 말아야지. 안 그래, 규리 씨?”도아영은 방금 임규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을 그대로 캐치했다.도아영이 입을 열자 임규리도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며 유정연을 바라봤다. 이에 유정연이 버럭 화냈다.“야, 도아영! 집안 주도권을 거머쥐기 전부터 으스대는 거야? 이 집을 누가 이날 이때까지 이끌어왔는지 잊지 마!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내뱉어?!”“아줌마, 우리 집안은 줄곧 내가 이끌어왔어요. 전에는 어른인 걸 봐서 아줌마한테 주도권을 맡겼는데 설마 여주인이라도 됐다고 착각하시는 거예요? 규리 씨가 나가는 게 탐탁지 않으시다면 두 사람 함께 나가세요.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너!”“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상황을 지켜보던 임규리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아영 씨, 제가 섣불리 찾아왔어요. 죄송해요. 지금 바로 갈게요.”“규리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유정연은 도아영을 힐끔 째려보며 말했다.“누구처럼 인정사정없고 야박하게 구는 인간이랑 너무 대비되잖아.”도아영은 그런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윤에게 분부했다.“규리 씨 호텔로 모셔드려. 거기서 실컷 지내게 하고 집에 돌아가겠다고 하면 언제든 보내드려.”“네, 아가씨.”하윤은 임규리의 옆으로 다가갔다. 한편 임규리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마지못해 하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오늘 이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이 도시에 남을 기회가 없다는 걸 임규리는 누구보다 잘 안다.그녀가 떠나가려 하자 유정연이 재빨리 쫓아왔다.“걱정 마, 규리야. 이모랑 한 약속은 반드시 이뤄줄 거야. 이틀 뒤에 우리 규리 한성대 들어갈 수 있으니 시름 놓고 기다리기만 해.”임규리는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답했다.“고마워요, 이모.”임규리가 떠난 후에야 유정연은 도씨 저택으로 돌아와 일부러 위층에 있는 도
학교 대문 옆에 주차한 후 주민서는 도아영과 함께 부랴부랴 강의1동 7층으로 달려갔다.구연준의 강의가 시작된 지 10분이 넘었고 교실 분위기는 유난히 진중했다.주민서는 문 앞에서 두어 번 쳐다봤을 뿐인데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다들 너무 진지하게 듣고 있어. 우리가 지각했나 보네...”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도아영이 대뜸 문을 열고 들어갔다.이를 본 주민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쓰읍...”교실 안의 모든 이가 도아영에게 시선이 꽂혔고 그중에는 구연준도 있었다.그는 흰색 셔츠에 소매를 살짝 걷고 늘씬한 체구를 뽐내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금테 안경 코디는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때 도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각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너무나도 우렁찬 목소리에 뭇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대체 누가 지각하고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앉아.”구연준은 담담하게 말하고 그녀한테서 시선을 떼더니 계속 강의를 이어갔다. 마치 좀전의 에피소드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그 시각 문 뒤에서 벌벌 떨기만 하던 주민서는 어느새 넋이 나가버린 상태였다.‘아영이가 대체 언제 이렇게 용감해진 거지?’이전의 그녀는 나긋나긋하고 매사에 조심스러운 아이였는데 왜 갑자기 터프한 여장부로 변한 걸까?그녀는 더 이상 도아영의 수업 중 돌발행동을 감당할 수가 없어 몸을 숙인 채 도망쳐버렸다.한편 도아영은 교실 안으로 들어가 맨 앞줄에 앉았다.40분 동안 진행되는 수업, 그녀는 줄곧 구연준만 빤히 쳐다봤다.중도에 구연준이 두어 번 곁눈질했는데 도아영이 오히려 더욱 단호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는 것이었다.결국 구연준이 수중의 책을 내려놓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이상 수업 끝.”그가 떠나려 하자 도아영은 번개 같은 속도로 그의 앞에 달려갔고 다른 학생들은 재미난 구경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구연준은 그런 그녀를 힐긋 살폈다.“왜?”“봐둔 땅이 하나 있는데 경매가가 600억이었어요. 제가
“가시죠, 규리 씨.”“아니요! 대표님 좋은 사람인 거 알아요. 예전에 쌓아온 정을 봐서 우리 이모 한 번만 구해주세요!”“더는 우리 집에 나타나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이수호가 싸늘한 눈길로 쳐다보자 임규리는 등골이 오싹했다.며칠 전에 강이나가 찾아와서 그와 임규리에 관한 스캔들을 일러바쳤는데 고작 여자들의 수작인지라 이수호는 딱히 간섭하지 않았다.어차피 임규리와 아무 사이도 아니니 똑똑한 사람이라면 둘이 불가능하단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수호와 임규리는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니까.그 소문들은 임규리가 지어낸 거로밖에 결론이 나지 않는다.이수호는 이렇게 꼼수가 많은 여자가 딱 질색이다.한편 임규리는 아직 본인이 한 일을 이수호에게 들킨 줄 모르고 계속 유정연을 위해 사정했다.“이모도 도씨 일가 사람인데 대표님 정말 안 도와주실 거예요?”“안 비서! 내 말 안 들려?”“알겠습니다, 대표님.”안지원이 또다시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임규리 씨, 계속 이러시면 끌어내는 수밖에 없어요.”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유정연이 감방에 간 일이 한성대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그녀의 인생도 끝장이다.한성대에 들어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모든 거짓말이 들통나고 더 이상 뒷배가 없다는 게 알려지면 남은 3년은 어떻게 버텨내란 말인가?아마 학자금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다.“대표님, 제발요! 저희 이모 한 번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제가 요 며칠 시중만 잘 들어줬잖아요. 그러니까 제발요! 우리 이모 구해주세요.”임규리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한편 남현숙은 이수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그녀가 한심할 따름이었다.“네 이모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우리도 할 수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도씨 일가의 일이니 정 도움을 구하고 싶다면 아영이 찾아가 보거라.”도아영을 언급한 순간 이수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그녀가 도와줄 리 있을까?왠지 유정연이 감방에 들어간 것도 도아영과 연관이 있을 듯싶었다.다만 아직도 그녀 생각 중인 자신을 되돌아보며 이수호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넌 도씨 일가의 상속자도 아니고 우리 아빠 아들도 아니야. 법적으로 볼 때 오늘부로 너희 두 모자는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정신 좀 차려, 지호야!”도아영은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전생에 아빠가 그녀에게 회사를 물려주셨는데 마음 약한 도아영이 유정연 모자에게 고스란히 건넸다. 결국 아빠의 회사는 3년도 안 돼서 부도났고 유정연은 도지호를 데리고 안용준과 함께 도망치려 했다.그러니 이번 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정연 모자와 도원 그룹을 떼어놓아야 한다.“이 자식 끌어내.”도아영이 차갑게 분부하자 도씨 일가의 경호원들이 곧장 도지호를 이 집에서 끌어냈다.그는 슬리퍼를 신은 채 반항할 여지도 없이 처참하게 집에서 쫓겨났다.“도지호랑 유정연 물건들 싹 다 정리해서 밖에 내다 버려요!”“네, 아영 씨.”주연우는 곧바로 위층에 사람을 보내서 도지호와 유정연의 물건을 싹 다 처리했다.도아영은 다 정리한 물건들을 도지호에게 내던졌다.옷과 신발, 책까지 버려진 걸 보더니 도지호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다들 여기서 잘 지켜. 도지호는 이제 우리 집안과 아무 관련이 없어. 만약 얘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소란 피우면 그 즉시 경찰에 신고해.”“네, 알겠습니다.”도아영은 그가 소란을 피울 걸 염두에 두고 일부러 경비소를 차렸다.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호는 미친 듯이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도아영! 난 네 동생이야!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당장 문 열어! 나야말로 도씨 집안 아들이잖아!”도아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게 집으로 들어갔다.유정연 모자의 흔적이 없는 이 집안은 그제야 온화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선사했다.“아영 씨, 다음 계획은?”“유정연 전 재산을 회사 계좌로 입금했어요. 그동안 모자랐던 금액을 채운 셈이죠. 이제 드디어 도원 그룹 협력 프로젝트를 운행하게 됐으니 당분간은 위기를 벗어났다고 보면 돼요.”‘이수호만 잠자코 있다면...’도아영은 이렇게 생각했다.그녀는 오늘 이수호를 가
저녁 무렵, 도지호는 집에서 줄곧 도아영의 연락만 기다렸다.도원 그룹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그는 부리나케 달려나갔다.차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더니 도지호가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너 뭐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집에 무슨 일 생긴 줄 알아? 당장 나랑 경찰서 가서 엄마 모셔와야지!”도지호가 명령 조로 쏘아붙이며 도아영의 손목을 붙잡고 경찰서로 갈 기세였다.이에 도아영이 그를 힘껏 내팽개쳤다.도지호는 못 믿겠다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너 미쳤어? 감히 날 밀쳐?”이 집에서 줄곧 거만을 떨던 도지호였기에 그녀가 매정하게 밀쳐버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할 때 주연우가 덥석 막아서더니 가볍게 도지호를 제압했다.“너도 미친 거야? 우리 집안 따까리 주제에! 확 잘리고 싶어?”도지호는 힘으로 안 되니 고래고래 소리만 질렀다.이에 도아영이 차분하게 말했다.“잘 들어.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 아니야. 회사에서도 아무런 직급이 없으니 주 비서는 제쳐두고 이 집안 가정부도 네 멋대로 자를 순 없어.”“이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 도지호야! 왜 이 집안 사람이 아닌 건데? 엄마가 잡혀간 틈에 내 자리를 빼앗으려고? 꿈 깨! 미친X아!”그는 기세등등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째려봤다.하지만 도아영은 시큰둥하게 쓴웃음만 지었다.“네가 우리 아빠 아들이야? 쥐뿔도 아닌 게 무슨 자리까지 빼앗는다고 그래? 너희 엄마 안용준이랑 바람피운 건 알지? 안용준은 내가 직접 처리했고 너희 엄만 너그럽게 용서했어. 그런데 여태껏 회사 공금을 횡령하고 끊임없이 회사 자산에 손댔더라? 대체 언제까지 우리 집안 재산을 노릴 건데? 너희 두 모자 좀 너무하단 생각은 안 들어?”“개소리 치지 마! 우리 엄마가 어떻게 딴 남자랑 바람을 피워?”도지호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네가 아직 어리니 그동안 나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건 그냥 눈감아줄게. 하지만 너희 엄마는 우리 아빠랑 도원 그룹에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어. 그건
사채업자들은 꽤 모아진 자산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디어 도씨 저택을 떠났다.유정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채에 딱 한 번 손을 댔더니 아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릴 줄이야.한편 도아영은 도원 그룹에서 사채업자의 전화를 받았다.“아영 씨, 분부하신 일은 다 해결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현금화해서 이체해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어요.”“별말씀을요. 서 대표님 분부대로 했을 뿐입니다.”도아영은 가볍게 웃었다. 이 모든 건 서현우의 공로이니까.그의 조언대로 유정연 모자의 전 재산을 손쉽게 챙겼고 이 또한 아빠 도석진이 받아야 할 몫이다.전화를 끊은 후 도아영은 주연우에게 분부했다.“이제 다 됐어요. 시작해볼까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도씨 저택에서 유정연 모자가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문밖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랐고 도지호도 어안이 벙벙했다.‘오늘 무슨 날이야? 경찰차는 또 뭔데?’유정연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경찰이 집안으로 들어와서 다짜고짜 그녀에게 수갑을 채웠다.“신고받고 왔습니다. 유정연 씨, 당신은 금융범죄 혐의로 체포되었으니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습니다...”“네? 뭐라고요? 금융범죄라니? 그게 대체 뭔 말인데요?”유정연은 몹시 당황했지만 경찰은 그녀의 변명 따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서로 가서 조사받으시죠! 당장 끌고 가!”“당신들 뭐야? 왜 우리 엄마를 잡아가는 건데?”도지호가 쫓아가려 했지만 경찰은 아예 무시한 채 유정연을 차에 태우고 떠나가 버렸다.오늘 발생한 모든 일이 괴이할 따름이었다.도지호는 곧바로 도아영에게 연락했다.평상시에는 그렇게 연락이 잘 되던 도아영인데 오늘은 도통 받지를 않았다.“전화 좀 받아!”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유정연이 경찰에 잡혀가니 그는 가장 먼저 도아영이 떠올랐다.그녀 말곤 엄마를 구해줄 사람이 없으니까.도원 그룹에서 도아영은 쉴 새 없이
“왜 그래요 갑자기? 무슨 일 있어요?”유정연은 사채에 손을 댄 일을 죽어도 도아영에게 고백할 순 없었다.도씨 일가의 가훈이 바로 사채에 손을 대지 않는 거니까.소문이라도 나면 체면이 바닥나고 도아영에게 쫓겨날지도 모른다.한편 도아영은 그녀가 사채를 빌린 걸 진작 알고 있어 입꼬리를 씩 올렸다.“지금 바로 연락해 계약서 보낼 테니까 거기 사인만 하면 효력이 발생할 거예요. 아줌마랑 지호가 우리 아빠 재산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계좌이체 해드릴게요. 사인만 하면 재무팀에 바로 연락해서 돈 보낼게요.”기세등등한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더 이상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알았어! 사인할게. 바로 할게!”도아영이 곧장 휴대폰으로 계약서를 보내왔다.유정연은 꼼꼼히 읽어볼 새도 없이 바로 사인했고 계좌에 거액이 들어왔지만 모든 걸 사채업자에게 털렸다. 20초도 안 되는 사이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다만 겁에 질린 유정연은 이 과정의 수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봐! 아직도 돈 있잖아! 바로 내놓으면 될 것이지 왜 이렇게 질질 끌었어? 돈 될만한 액세서리들 당장 내놔!”유정연은 허겁지겁 위층에 올라가 보물처럼 아끼던 액세서리를 모조리 꺼냈다.이것들은 전부 도석진이 생전에 그녀에게 선물한 값비싼 액세서리들이다.수년간 아까워서 제대로 착용하지도 못했고 그저 도지호의 생일날 딱 한 번 치장하고 나갔었다.“여기 있어요. 이거면 되나요?”그녀는 액세서리를 사채업자에게 건넸다.“이년이 감히 내 앞에서 꼼수를 부려? 분명 더 있을 거야! 다 내놔! 이까짓 거로 누구 입에 풀칠하겠어?”앞장선 남자가 그녀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유정연은 화들짝 놀라서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숨긴 건 맞지만 이 사람들이 대체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낸 건지 더는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마지못해 여태껏 보관한 모든 액세서리와 명품 가방, 옷들까지 꺼냈다.“이 새끼도 있잖아! 얘 것도 싹 다 꺼내!”도지호는 평상시에 손이 커서 가격도 안 보고 물건을 사
순간 도지호는 표정이 굳어버렸다.“엄마! 이 사람들 대체 뭐라는 거예요? 빚이라니? 180억 원은 다 뭐냐고요?”유정연은 아들에게 빚진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사채업자들이 집까지 찾아오니 하는 수 없이 고백했다.“지호야, 엄마가 결혼비용으로 준 돈 얼른 내놔봐!”“네? 그건 나더러 신혼집 차리라고 준 돈이잖아요? 줬다 뺏는 게 어디 있어요?”도지호가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된 아들을 보고 있자니 유정연은 가차 없이 뺨을 후려쳤다.“죽을래 돈 갚을래? 얼른 가서 돈 가져와!”유정연이 도석진에게 시집온 이후로 매년 도지호의 명의로 목돈을 마련했는데 어느덧 십여 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60억 가까이 됐을 것이다.빚을 다 갚을 순 없지만 이 돈으로 시간을 좀 더 벌어들일 순 있다.도지호는 기세등등한 사채업자들을 보더니 마지못해 은행카드를 건넸다.카드를 본 우두머리가 먼저 말을 꺼냈다.“이것 봐. 돈 있잖아. 어디서 불쌍한 척이야! X발 년, 아직 80억 남았어. 못 갚으면 이 녀석 두 다리를 확 잘라버릴 거야!”“이미 60억 드렸고 방금 드린 60억까지 더하면 120억이잖아요! 더는 없으니까 가서 사장님께 전하세요. 3일만 더 시간을 주면 나머지 80억 무조건 갚을게요!”유정연이 간곡하게 부탁했다. 팔아치울 수 있는 건 전부 다 팔아서 온몸을 다 털어도 돈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아들의 결혼비용까지 다 내놨으니 이제 정말 빈털터리 신세였다.“3일, 3일, 대체 얼마나 더 기한을 늘여줘야 해? 오늘 또 미루면 80억이 아니라 100억으로 불어날 거야!”사채업자가 거만을 떠는 모습에 도지호는 주먹을 휘날리려고 했지만 방망이가 앞섰다.그는 가차 없이 방망이에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자식이, 감히 나한테 덤비려고?”앞장선 사채업자가 도지호에게 비아냥거렸다.아들이 한 방 맞으니 유정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줄게요! 10억 줄게요! 집에 남은 액세서리랑 집문서까지 다 합치면 80억은 될 거예요. 다 드릴게요! 전부 드린
이번엔 아무도 유정연을 지켜줄 수 없다.그 시각, 도씨 일가.도지호가 저녁 무렵 집에 돌아왔을 때 유정연은 초조한 얼굴로 거실을 서성거렸다.“엄마, 왜 그래요?”“지호야? 너 왜 왔어?”“돈 다 떨어졌어요. 문자를 해도 대답이 없으니 돈 가지러 왔죠.”유정연은 울화가 치밀었다.“돈돈돈! 넌 돈밖에 몰라? 우리 이제 다 망했어! 돈 없다고!”“뭐라고요? 장난도 참.”도지호는 집에 돈이 없다는 말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돈 걱정 없이 살아와서 한 달 용돈 1억 원도 모자랄 지경이니까.도씨 일가가 아무리 망해도 도지호의 용돈이 끊긴 적은 없으니 집에 돈이 없다는 말은 농담과도 같았다.“너 이 자식...”유정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격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사색이 되었다.사채업자들이 또다시 찾아왔으니까.상황파악이 안 된 도지호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누구야? 누가 이딴 식으로 문 두드려?”그는 얼른 문을 열고 상대에게 겁줄 기세였지만 유정연이 발 빠르게 가로챘다.“안돼, 지호야!”“왜요? 누군데 그래요?”도지호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도씨 일가 도련님 도지호는 학교에서도 위풍당당한 인물이라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드릴 자가 없었다.지금 이토록 무례하게 문을 두드리는데 가만히 지켜볼 도지호가 아니었다.하지만 유정연은 그를 의자에 앉히고 진정시켰다.“여기 가만히 있어! 절대 문 열면 안 돼!”도지호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넋을 놓았다.문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그중 한 명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X발 년!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문 열어! 집 다 부숴버리기 전에!”“누구야 X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네?”도지호가 버럭 화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때 상대가 이미 문을 부수고 들어와 버렸다.덩치 큰 체구의 남자들이 방망이를 들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동네 건달이었다.유정연은 그들이 문까지 부수고 쳐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도지호도 상대의 기세에 짓눌려
그녀는 말하면서 도아영의 손목을 만지려고 했지만 얄짤 없이 거부당했다.허공에 손이 붕 뜬 유정연은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늘 졸업인데 왜 수호랑 함께 안 온 거야?”“지금 장난해요? 다 파혼한 마당에 뭣 하러 함께 와요?”도아영은 냉랭하게 소파에 앉았다.이때 유정연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아영아, 이제 그만해도 돼. 수호가 강이나 안 좋아한다는 거 온 동네에 소문이 쫙 퍼졌는데 너희도 파혼할 리가 없겠지! 네가 착해서 전에 두 사람 위해 파혼해줬겠지만 이제 그럴 필요 없어. 강이나는 학력도 없고 배경도 없는 처지가 됐으니 더는 너한테 상대가 안 돼.”유정연이 선뜻 따뜻한 찻물을 따라주었다.‘소식은 꽤 빠르네? 강이나랑 이수호의 관계까지 벌써 알아낸 거야?’“아줌마,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그만 포기해요. 나 수호 씨랑 결혼할 리 없어요.”“얘가 끝까지 고집 피우네? 수호가 너한테 마음 있는 걸 누가 몰라? 이제 걸림돌도 제거했겠다, 네가 먼저 머리 숙이면 뭐가 덧나? 우리 집안은 이씨 일가 아니면 다 망하게 생겼어. 네 아빠 산업을 이대로 망쳐버릴 거야?”유정연의 착잡한 눈빛을 보고 있자니 사채업자들이 또다시 찾아온 게 뻔했다.안 그러면 이런 헛소리들을 퍼부으며 그녀를 이씨 일가에 시집보내려고 밀어붙일 리가 없으니까.“다 말했어요? 더 할 얘기 없으면 회사 나가볼게요.”도아영은 예외 없이 유정연의 체면을 짓밟았다.이에 유정연의 안색이 확 얼어붙었다.한성대를 졸업했으니 이제 더는 학교 근처의 아파트에서 지낼 필요가 없다.얼추 시간을 계산해보니 이제 그만 집에 돌아올 때가 되었다.궁한 쥐가 고양이를 문다고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던 유정연은 숨이 턱턱 막히고 더 이상 팔아치울 물건도 없었다.이럴 때일수록 도아영은 집에 돌아와야 한다. 유정연이 그녀 물건까지 팔아치우면 안 되니까 잘 감시해야 하는 법이다.문득 주연우한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도아영은 옷을 갈아입고 기사더러 회사로 출발하라고 했다.“아영 씨, 재무제표 다 정리
“육지우? 그게 누군데?”도아영은 의아한 눈길로 주민서를 쳐다봤다.둘은 한창 한성대 식당에서 밥을 먹는 중이었다. 주민서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그녀에게 답했다.“자, 여기. 우리 학교 선배잖아.”그녀는 도아영에게 휴대폰을 건넸다.“육씨 일가 아드님이라고 하는데 그 집안 이제 강주 떠났을 거야. 육지우가 죽은 후 온 가족이 해외로 이사했대. 지금 게시판에 강이나 폭로 글만 떠돌아다니잖아. 육지우, 이수호, 강이나 이렇게 세 명이 어려서부터 함께 커왔고 육지우랑 강이나가 성인이 되기 전에 관계가 발생해서 임신까지 했대. 두 사람 원래 속도위반으로 결혼까지 하려고 했는데 육지우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얼마 못 가 강이나도 유산했다는 거야. 그동안 이수호가 강이나한테 잘해준 건 육지우가 죽기 전에 이나 잘 부탁한다고 말한 것 때문이래. 실은 두 사람 아무 사이도 아닌 거지.”도아영은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을 둘러보았는데 강이나와 육지우가 나란히 유아용품 판매장으로 들어가는 내용이었다. 화질이 희미한 걸 보아 적어도 4, 5년 전 사진일 듯싶었다.그렇다면 설마 그 소문들이 다 가짜였다는 걸까?도아영은 미간을 구겼다.정말 그런 거라면 전생에 이수호는 왜 도아영을 버리고 공항까지 가서 강이나를 붙잡았던 걸까?“아영아, 아영아?”그녀가 멍하니 넋 놓고 있자 주민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왜 그래? 너 좀 이상하다?”“아니야, 아무것도.”도아영은 휴대폰을 돌려주었다.“그래도 이것만으론 이수호가 강이나 안 좋아했다고 증명할 순 없지.”“맞아. 그렇지만 지금 다들 이수호가 책임감 때문에 강이나한테 잘해준 거라고 말하고 있어. 아예 좋아한 적 없지. 그래서 이번에도 전혀 감싸주지 않은 거잖아?”“누가 그래? 감싸주지 않았다고?”구연준의 도움이 없었다면 강이나는 순조롭게 졸업했을 것이다.“게시판 영상 못 봤어? 이수호는 확고하게 거절했는데 강이나가 죽은 육지우까지 내세우면서 협박해서 마지못해 도와준 거야.”주민서는 감탄을 연발했다.“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