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영이가 나 보러 오겠다면 시간 없다고 해.”“하지만... 대표님은 줄곧 아영 씨가 머리 숙이길 바라셨잖아요?”“걔가 어디에도 도움을 구할 데가 없고 기댈 곳 없이 외롭게 돼버리는 게 내 소원이거든.”이수호의 눈가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아영이는 반드시 이나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해야 할 거야.”그 시각 도아영은 어느덧 백화점에서 영양제를 몇 개 골랐고 이제 막 아래층에 내려가 커피를 사려던 틈에 곁눈질로 줄곧 뒤를 따라오는 검은색 옷차림의 경호원을 힐긋 살폈다.경호원이 워낙 눈에 띄었던지라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이를 본 도아영은 고개를 내저으며 가볍게 웃었다.이수호도 참 그녀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었다. 경호원까지 불러와서 감시하게 하는 건 도아영이 강이나를 해칠까 봐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그녀가 회사 일로 곤경에 처하길 바라서일까?한편 도아영은 여유가 넘치게 커피를 다 산 후 사람들이 가장 밀집된 구역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이를 본 경호원이 재빨리 따라갔지만 그녀가 워낙 빨리 걷고 또 일부러 인파가 몰리는 곳으로 들어가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놓치고 말았다.“안 비서, 아영 씨를 놓쳤어요!”경호원은 블루투스 장치로 안지원에게 소식을 전했다. 백화점의 소식을 접한 안지원은 즉시 이수호에게 알렸다.“놓치다니?”이수호가 미간을 구겼다.“멍청한 것! 도씨 저택 문 앞에서 지키라고 해.”그는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우리도 이만 집에 돌아가야겠어.”“네, 대표님.”이씨 저택.안지원이 운전하여 이수호를 이씨 저택까지 모셨다.“대표님, 요즘 강이나 씨 일 때문에 어르신께서 줄곧 기분이 안 좋아 보이세요. 이제 그만 어르신께 사과하시는 건 어떨까요?”“내가 알아서 해. 어쨌거나 우리 할머니시잖아.”이수호가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자 거실 등이 환하게 밝혀지고 안에서 남현숙 어르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역시 날 즐겁게 하는 건 우리 아영이밖에 없다니까.”남현숙의 웃음소리를 들은 이수호는 미간을 확
“아영아, 얘 사과한 거 맞아?”남현숙의 질문에 도아영은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수호를 힐끔 쳐다봤다.그녀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이수호는 이 여자가 나쁜 마음을 품고 있는 걸 바로 눈치채고는 확 잡아당겼다. 행여나 할머니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면 안 되니까.“할머니, 저 아영이랑 단독으로 할 얘기가 있어서 먼저 올라가 볼게요.”이수호는 말하면서 도아영을 이끌고 위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이를 본 남현숙은 미처 말리지 못한 채 손자에게 호통을 쳤다.“수호 너 이 자식! 아영이 괴롭히기만 해봐, 할미가 절대 가만 안 둬!”2층에서 이수호는 도아영을 침대에 내던진 후 침실 문을 안으로 잠갔다.“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도아영은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야릇한 눈빛으로 이수호를 쳐다봤다.“대표님 이러시는 거 강이나 씨가 알면 어떡해요? 분명 질투할 텐데.”“도아영!”이수호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녀의 목을 조르고 차갑게 쏘아붙였다.“적당히 해! 대체 무슨 낯짝으로 우리 집까지 찾아와?”“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하셔서 얼른 왔죠. 제가 뭘 잘못했나요?”도아영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한편 이수호도 힘껏 그녀의 목을 조르긴 했지만 진짜 어떻게 할 엄두는 안 났다.간사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이수호는 왠지 모를 울화가 치밀었다.“내가 목 졸라서 죽일까 봐 두렵지도 않아?”“대표님은 요 며칠 줄곧 우리 회사를 겨냥하시고 괴롭히셨죠? 내가 직접 찾아와서 용서를 구하길 바라신 거 아니었나요? 목 졸라 죽이면 내가 어떻게 무릎 꿇고 애원하겠어요?”이수호는 피식 웃더니 그제야 그녀를 놓아줬다.“눈치는 있네. 그럼 한번 빌어봐. 어떻게 용서를 구하는지 제대로 지켜볼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 와인을 들고 그녀가 애원하기만을 기다렸다.이때 도아영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천천히 말을 이었다.“서문 공장, 주성 프로젝트 개발로 매달 15일에 해외무역을 진행하고 있죠. 이경 그룹에서 아주 큰 경매장이 하나 있는 거로 아는 데 매년 수
“그럼 계속해보시겠다는 거네요?”“아니면?”도아영은 이 남자가 쉽게 협박을 당할 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번에 이씨 저택으로 찾아온 건 단지 그에게 경고장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무릇 적당한 선에서 멈추라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게다가 그녀는 더 이상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란 걸 보여줘야 했다.“대표님, 나랑 내기 한 판 하실래요?”“무슨 내기?”“계속 나랑 등지면 대표님은 올해 분명 큰코다치실 겁니다.”“...”자리에서 일어난 도아영은 이제 막 나가려다가 문 앞에서 잠깐 머뭇거렸다.“아 참, 나 아직 대표님한테 괴롭힘당한 건 할머니께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이따가 다 얘기하면 할머니가 과연 내 편을 들어줄까요 대표님 편을 들어줄까요?”“도아영!”“그래 이수호! 네가 도원 그룹 공격하는 일 할머니께 말씀드리지 않은 건 너에 대한 마지막 예의야. 그러니까 유치한 짓 그만 멈춰. 난 절대 너한테 사과할 일 없어. 그리고 이 말만은 꼭 기억해. 넌 올해 반드시 큰코다칠 거야.”“너!”도아영은 그대로 이수호의 침실을 나섰고 심지어 나갈 때 문까지 꼭 잠갔다.이수호는 가슴이 꽉 막힌 듯 숨이 차오르지 않았다.‘이 여자가 날 협박하는 것도 모자라 뭐? 내가 올해에 반드시 큰코다친다고?!’‘이런 식으로 내 주의를 끌려고? 어림도 없어!’저녁 무렵, 도아영이 도씨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거실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유정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괜찮아. 여길 제집처럼 생각해.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이모한테 얘기해. 이모가 다 해줄게.”“고마워요, 이모.”소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유정연은 안으로 들어오는 도아영을 힐긋 살피더니 웃음기를 싹 거뒀다.“왔어? 또 어디 가서 헤매고 다닌 건데?”도아영은 유정연의 야박한 태도에 진작 적응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는데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청순한 외모를 지녔다. 눈매가 가늘고 날씬한 몸매까지 더하니 청초하면서도 어여쁜 소녀의 모
“아줌마가 한 약속이니 스스로 해결하시든가요.”도아영은 옆에 있는 가정부에게 말했다.“하윤아, 임규리 씨한테 호텔 예약해드려. 호텔에서 얼마든지 지낼 순 있지만 주객전도는 하지 말아야지. 안 그래, 규리 씨?”도아영은 방금 임규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을 그대로 캐치했다.도아영이 입을 열자 임규리도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며 유정연을 바라봤다. 이에 유정연이 버럭 화냈다.“야, 도아영! 집안 주도권을 거머쥐기 전부터 으스대는 거야? 이 집을 누가 이날 이때까지 이끌어왔는지 잊지 마! 대체 무슨 낯짝으로 그런 말을 내뱉어?!”“아줌마, 우리 집안은 줄곧 내가 이끌어왔어요. 전에는 어른인 걸 봐서 아줌마한테 주도권을 맡겼는데 설마 여주인이라도 됐다고 착각하시는 거예요? 규리 씨가 나가는 게 탐탁지 않으시다면 두 사람 함께 나가세요.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너!”“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상황을 지켜보던 임규리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아영 씨, 제가 섣불리 찾아왔어요. 죄송해요. 지금 바로 갈게요.”“규리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유정연은 도아영을 힐끔 째려보며 말했다.“누구처럼 인정사정없고 야박하게 구는 인간이랑 너무 대비되잖아.”도아영은 그런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윤에게 분부했다.“규리 씨 호텔로 모셔드려. 거기서 실컷 지내게 하고 집에 돌아가겠다고 하면 언제든 보내드려.”“네, 아가씨.”하윤은 임규리의 옆으로 다가갔다. 한편 임규리는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마지못해 하윤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오늘 이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앞으로 더는 이 도시에 남을 기회가 없다는 걸 임규리는 누구보다 잘 안다.그녀가 떠나가려 하자 유정연이 재빨리 쫓아왔다.“걱정 마, 규리야. 이모랑 한 약속은 반드시 이뤄줄 거야. 이틀 뒤에 우리 규리 한성대 들어갈 수 있으니 시름 놓고 기다리기만 해.”임규리는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답했다.“고마워요, 이모.”임규리가 떠난 후에야 유정연은 도씨 저택으로 돌아와 일부러 위층에 있는 도
학교 대문 옆에 주차한 후 주민서는 도아영과 함께 부랴부랴 강의1동 7층으로 달려갔다.구연준의 강의가 시작된 지 10분이 넘었고 교실 분위기는 유난히 진중했다.주민서는 문 앞에서 두어 번 쳐다봤을 뿐인데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다.“다들 너무 진지하게 듣고 있어. 우리가 지각했나 보네...”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도아영이 대뜸 문을 열고 들어갔다.이를 본 주민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쓰읍...”교실 안의 모든 이가 도아영에게 시선이 꽂혔고 그중에는 구연준도 있었다.그는 흰색 셔츠에 소매를 살짝 걷고 늘씬한 체구를 뽐내고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금테 안경 코디는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때 도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지각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너무나도 우렁찬 목소리에 뭇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대체 누가 지각하고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앉아.”구연준은 담담하게 말하고 그녀한테서 시선을 떼더니 계속 강의를 이어갔다. 마치 좀전의 에피소드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그 시각 문 뒤에서 벌벌 떨기만 하던 주민서는 어느새 넋이 나가버린 상태였다.‘아영이가 대체 언제 이렇게 용감해진 거지?’이전의 그녀는 나긋나긋하고 매사에 조심스러운 아이였는데 왜 갑자기 터프한 여장부로 변한 걸까?그녀는 더 이상 도아영의 수업 중 돌발행동을 감당할 수가 없어 몸을 숙인 채 도망쳐버렸다.한편 도아영은 교실 안으로 들어가 맨 앞줄에 앉았다.40분 동안 진행되는 수업, 그녀는 줄곧 구연준만 빤히 쳐다봤다.중도에 구연준이 두어 번 곁눈질했는데 도아영이 오히려 더욱 단호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는 것이었다.결국 구연준이 수중의 책을 내려놓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이상 수업 끝.”그가 떠나려 하자 도아영은 번개 같은 속도로 그의 앞에 달려갔고 다른 학생들은 재미난 구경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구연준은 그런 그녀를 힐긋 살폈다.“왜?”“봐둔 땅이 하나 있는데 경매가가 600억이었어요. 제가
도아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애초에 그녀는 이수호를 위해 일부러 이브닝 파티에서 몇몇 사모님들과 함께 구연준을 의논했었다.하지만 이 남자가 이토록 뒤끝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게다가 이런 말들은 대체 어떻게 구연준의 귀에 들어가게 된 걸까?도아영은 마음을 다잡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대표님, 골든하임의 가치는 고작 천억이에요. 이수호가 자료를 조작하여 대표님이 손해를 보도록 미끼를 던진 거라고요.”구연준은 그녀를 놓아주고 소파에 앉아 차를 한 잔 따를 뿐 머리도 들지 않았다.“계속해.”“골든하임 경매가는 분명 600억일 겁니다. 이수호가 사람을 시켜서 8천억까지 올리겠죠. 그럼 대표님은... 6천억이나 손해 볼 테고 구호 그룹도 타격을 받을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수호만 대표님께 복수하는 꼴이 됩니다. 지난번에 대표님이 이수호 건축 프로젝트를 뺏어갔잖아요. 바로 그 일을 겨냥한 복수예요 이건.”구연준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이수호가 너한테 얼마 줬어?”“네?”“무슨 혜택을 줬길래 나한테까지 찾아와서 설득하려는 거야?”“...”“하긴, 이해할 만도 하지. 도씨 일가 따님께서 이수호를 향한 마음이 지극하니 돈 따위 뭐가 필요하겠어. 걔를 위해서라면 선뜻 나를 음해하고도 남을 인간이잖아 넌.”도아영은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아주 좋아. 선심 써서 미리 알려줬더니 되레 내 정곡만 찌르네?’다만 그녀도 구연준이 믿어줄 거란 희망은 거의 품지 않은 상태였다.도아영은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저 이미 수호 씨랑 파혼했어요. 대표님께서 못 믿으시겠다면 방법 없죠 뭐. 기어코 손해 보시겠다는데 제가 뭘 더 어떻게 도와드리겠어요? 그럼 이만.”“잠깐.”구연준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왜 널 믿어줘야 하는지 이유를 대봐.”“그런 이유 없어요.”도아영이 답했다.“하지만 대표님, 저랑 내기 한판 하실래요?”“무슨 내기?”“만약 진짜 제 말처럼 된다면 제가 이긴 거고 그땐 저희 도원 그룹에서 구호 그룹과 5
이 돈은 틀림없이 빌릴 수 있다.“헐, 대박! 강사한테 돈을 빌려? 전에는 그렇게 구연준 험담만 해대더니 이제 와서 빌려달라고 하니까 또 바로 빌려주는 거야?”“이수호랑 구연준은 앙숙이야. 내가 구연준 도와주겠다는데 당연히 빌려주지 그럼.”“일리 있는 말이네.”주민서는 뒤늦게 깨달았다.“아니, 잠깐. 그래서 네가 뭘 도와줬는데?”“구연준 도와서 이수호 상대하겠다고 했어.”“뭐? 너 진짜 이수호랑 틀어질 생각이야?”주민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도아영이 이수호를 얼마나 깊게 사랑했는지 옆에서 줄곧 지켜봐 온 일인이니까.이번에도 단지 투정만 부릴 줄 알았는데 진짜 파혼할 생각이었다니.‘아영아, 너 드디어 쿨해졌네!’주민서가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자 도아영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절친마저 그녀가 이수호를 떠날 수 없다고 여겼으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명색이 도씨 일가 따님이란 자가 이수호 때문에 남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그야말로 가소로울 따름이었다.저녁 무렵, 유정연은 풀 세팅한 임규리를 데리고 이경 그룹에 도착했다.대표이사실 안.유정연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있는 이수호를 바라보며 아양을 떨었다.“수호야, 앞서 우리 아영이가 철이 없어서 네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아. 그 아이가 하도 고집이 세서 사과하러 안 오네. 그래서 오늘 이렇게 아영이 사촌 동생을 대신 데려왔어. 얼른 대표님께 사과드려.”그녀의 말을 들은 이수호는 쓴웃음을 지었다.“그래요? 아영이가 사모님을 회사까지 보내시던가요?”“물론이지.”유정연이 재빨리 대답했다.“아영이는 이미 잘못을 뉘우치고 있어. 게다가 파혼할 마음도 없대. 애가 아직 어려서 철없는 행동을 한 거니 수호 네가 한 번만 용서해줘.”도아영이 잘못을 뉘우쳤다는 말에 이수호는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그래도 아직 제 분수를 알긴 아네요.”“당연하지!”유정연은 이때다 싶어 임규리에게 곁눈질했다.그 시각 임규리는 이수호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사무실에
똑똑.문밖에서 강이나가 두 번 노크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그녀는 화이트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는데 우아하고 고고한 기품이 차 넘쳤다. 허리까지 드리운 긴 생머리는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를 선사해주었다.“수호 씨, 경매 곧 시작해요. 얼른 가죠 우리.”강이나를 본 유정연은 표정이 살짝 부자연스러워졌다.그녀만 해코지하지 않았다면 도아영이 진작 이수호의 와이프가 됐을 테니까. 이제 와서 경매까지 함께 가다니? 이수호는 도씨 일가의 체면을 아예 무시한 채 강이나와 함께 참석하기로 한 걸까?이건 대놓고 도씨 일가에게 창피함을 안겨주는 일이다.“도 회장님댁 사모님 되시죠? 수호 씨한테 얘기 들었어요. 이분은...”강이나는 자신과 스타일이 너무 비슷한 임규리를 보더니 가볍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도아영만으로 모자라서 또 한 명 더 내세우는 걸까?몇 명이 와도 전혀 문제 될 건 없다. 결국 다 대체품일 테니까.강이나가 임규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자 유정연은 마음이 찔렸는지 얼른 조카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그럼 우린 용건 끝났으니 이만 가볼게!”그녀는 결국 임규리를 이끌고 사무실을 나섰다.한편 이수호는 가까이 다가오는 강이나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상처도 다 낫지 않았을 텐데 뭣 하러 나왔어?”“수호 씨랑 경매장 가려고 나왔죠. 오늘 경매가 수호 씨한테 엄청 중요한 자리란 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자리를 비우겠어요?”강이나는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설마... 다른 사람이라도 초대한 거예요?”이수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그는 오늘 확실히 도아영에게 이브닝드레스를 보냈다.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할머니의 뜻일 뿐 절대 그가 원해서 한 일은 아니다.옆에 있던 안지원이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대표님, 아영 씨는 오늘 안 오신답니다...”‘안 오다니? 이 여자 점점 더하네?’평상시에 이런 기회가 생기면 그녀는 참석하지 못해서 안달인데 오늘은 되레 안 온다고 고집을 피우는 걸까?그의 표정을 살펴보던 강이나가 언짢은 듯 되물었다.“아
“웃기는 사람이네.”도아영이 말했다.“수호 씨가 날 집으로 데려온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CCTV 영상을 지울 이유가 뭐 있지? 설령 3개월 동안 살았더라도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영상 자료의 위치까지 어떻게 알겠어? 따지고 보면 오늘 온종일 집에 혼자 있었던 미소 씨가 더 의심스럽지 않아? 더욱이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고작 도우미에게 누명을 씌울 명분도 없잖아.”“저 아니에요. 진짜 오해예요.”김미소는 초조한 얼굴로 이수호를 향해 설명했다.“대표님, 전 억울해요.”“그만!”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렸다.그동안 집안 도우미들이 몰래 도아영을 괴롭힌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단지 매번 나서서 시비를 따지기 귀찮았을 뿐이었다.게다가 도아영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하지만 이번에 김미소는 선을 넘었다.이수호가 싸늘하게 말했다.“우리 집에 너처럼 행실이 나쁜 도우미는 필요 없으니까 이번 달 월급 받고 돌아가. 내일부터 출근 안 해도 돼.”갑작스러운 불호령에 김미소는 사색이 되었다.“대표님! 진짜 저 아니에요. 정말 억울해요.”이수호는 이런 사소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후 김미소는 안지원에게 끌려 밖으로 나갔다.도아영은 몸에 걸친 타월을 정리하며 말했다.“이제 올라가서 옷 갈아입어도 될까요?”팔다리를 훤히 드러낸 그녀를 발견한 이수호는 외투를 벗어 던져주며 싸늘하게 말했다.“옷 입고 내려와. 물어볼 게 있어.”도아영은 손에 든 외투를 힐긋 내려다보더니 다시 이수호를 향해 휙 던졌다.“마음만 받을게요.”얼떨결에 외투를 붙잡은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간덩이가 부었군!’도아영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이내 소파에 앉아 그녀를 잠자코 기다리는 이수호를 발견했다.그러다 문득 전생에 멀리서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자기 모습이 떠올랐다.워낙 그녀에 대한 적대감이 강해서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항상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랑하는 감
“그게 무슨 헛소리에요?”도아영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앞의 이수호를 바라보았다.“한창 샤워 중인데 본인이 갑자기 들이닥치고 왜 제 탓하는 거죠?”“이...!”이수호의 시선이 도아영한테서 떠나지 않았다.타월로 몸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그녀는 매끈하고 하얀 다리를 고스란히 드러냈고,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게다가 쇄골에 맺힌 물방울까지 더해 유난히 매혹적으로 느껴졌다.적나라한 이수호의 눈빛에 도아영은 타월을 위로 끌어올렸다.“그래서 제 방에는 왜 왔어요?”“누가 너 보고 유니폼을 자르래?”그녀는 이수호의 추궁에도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제가요? 언제요? 당최 무슨 말인지...”“어디서 발뺌이야!”이수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옷을 잘라버린 의도가 뭐지? 나한테 반항하는 건가? 아니면 일부러 관심이라도 끌려는 거야?”“수호 씨, 무슨 얘기인지 도통 이해가 안 가네요.”도아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니폼을 본 적이 없는데 설령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해도 그럴싸한 핑계를 대야지 않겠어요?”끝까지 오리발을 내미는 그녀를 보자 이수호는 코웃음을 쳤다.“그래? 따라 와.”이내 저벅저벅 걸어가 도아영의 팔을 붙잡고 아래층으로 끌고 갔다.손목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도아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1층에 도착하자 김미소는 아직도 바닥에 널브러진 천 쪼가리를 치우고 있었다.유니폼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상태였다. 도아영은 옷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정색하며 말했다.“내가 자른 거 아니에요.”“거짓말! 분명 아영 씨가 잘랐잖아요.”시치미를 떼는 도아영을 보자 김미소는 이수호를 향해 말했다.“아영 씨가 제 앞에서 가위로 옷을 싹둑싹둑 잘랐죠. 증언해드릴 수도 있어요!”“증언이라니? 날 고발한 사람이 미소 씨인데 어떻게 믿음이 가겠어?”도아영이 느긋하게 받아쳤다.“설령 범인이 나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도 다른 증인이 한 명 더 있어야 하지 않을까?”“그건...”김미소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짝!우렁찬 따귀 소리와 함께 도우미는 별안간 뺨을 얻어맞았다.이내 볼을 감쌌고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도아영은 싸늘한 시선으로 눈앞의 젊고 아리따운 여자를 쳐다보았다.“미소 씨 맞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까 그동안 존칭을 썼을 텐데 함부로 반말하면 되겠어?”“이...!”김미소는 이씨 저택에서 일을 오래 하고 얼굴이 예쁘장하다는 이유로 도아영이 늘 안중에도 없었다.또한, 전생에 그녀가 이 집안에서 얼마나 비굴했는지 똑똑히 지켜봐 온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했다.심지어 엉뚱한 조언을 해준 탓에 이수호 앞에서 망신당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닌 거로 기억했다.따라서 이번 생에는 얼굴만 믿고 건방지게 구는 김미소를 절대로 봐줄 생각이 없었다.“아영 씨, 한낱 도우미라고 해도 엄연히 이씨 일가의 직원이거든요? 저한테 손찌검하는 건 대표님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셈이죠. 지금 당장 보고할 테니까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잘라버린 이상 이 집에서 쫓겨나도 뭐라 하지 마세요.”김미소는 도아영을 노려보더니 너덜너덜해진 옷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저녁 무렵, 이수호는 유태범이 돌연 구연준과 손을 잡게 된 일 때문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이내 집에 도착하자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울고 있는 김미소를 발견했다.이수호는 눈살을 찌푸렸고, 옆에 있던 안지원이 다가가서 물었다.“저녁 준비는 끝났어요? 왜 울어요?”“대표님, 아영 씨가 글쎄 대표님이 준비한 유니폼을 가위로 잘라버렸어요.”말을 마치고 나서 너덜너덜해진 옷을 내밀었다.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이수호는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낮에 도아영이 강이나와 그를 두고 홀연히 떠나가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는데 엉망이 된 옷을 보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지금 어디 있어?”이수호의 화를 돋우는 데 성공하자 김미소는 속으로 의기양양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했다.“2층이요! 옷을 자르자마자 올라가서 잠을 자더라고요. 대표님이 안중에 없는 게 분명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2
남자가 바람 피우는 건 지극히 정상이고, 여자는 욕심이 과하면 안 된다니?이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는가?“오늘 일은 못 본 척해줄 테니까 알아서 잘 처리해.”말을 마치고 나서 무언가를 떠올린 듯 한 마디 보탰다.“참, 전에 휴학했다고 하지 않았어?”“네.”“그렇다면 학교는 굳이 안 나가도 돼.”남현숙이 말을 이어갔다.“우리 집 손자며느리로 들어온 이상 설령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졸업증은 받을 거야.”“할머니...”“이만 가 봐. 지금은 오로지 수호의 마음을 어떻게 사로잡을지 고민하고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마. 게다가 곧 결혼할 새댁이 아직도 학교에 다니면 남들이 비웃을지도 몰라.”남현숙은 명령조로 말했다.도아영은 못마땅했지만 당장 거절할 입장이 안 되었다.만약 남현숙과 등을 돌리는 순간 도원 그룹이 이수호의 공격이라도 받게 된다면 그녀는 끌려다니기 마련이다.결국 아무 말 없이 묵인했다.그제야 고분고분해진 도아영을 보자 남현숙이 흡족하게 말했다.“우리 아영이 착하네. 내가 널 좋아하는 이유도 말을 잘 듣기 때문이지. 수호가 한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던데 아주 긍정적인 신호야.”남현숙은 도아영의 손을 토닥였다.“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입맛부터 공략해야 해. 너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요리 솜씨잖아. 수호는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으니까 제대로 만족만 시켜준다면 널 떠날 걱정은 안 해도 돼.”의미심장한 말투에 도아영은 그녀가 언급한 ‘만족’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보아하니 이수호와 이미 관계를 가졌기에 같이 살게 된 거로 단단히 오해한 듯싶었다.도아영이 피식 웃었다.“알겠어요. 할머니.”“알면 다행이고.”남현숙은 작은 병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앞으로 자기 전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무슨 효능이 있는지는 차차 알게 될 거야.”도아영은 갈색 병을 흘긋 내려다보았다.남현숙이 자리를 뜨고 나서야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는데 달콤한 향이 코를 찔렀다.지난번 이수호의 방에서
“어르신!”장서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동안 남현숙을 모시면서 말실수한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해고를 운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이 주둥이가 방정이네요. 전 단지...”“끌고 가.”남현숙은 장서남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곧이어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더니 자리를 떠났다.도아영은 남현숙의 친숙한 면만 봐왔던 지라 이렇게 무자비하게 누군가를 내치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어쩌면 이게 바로 그녀의 본모습일지 모른다. 아마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만 너그러운 척 선의를 베풀었을 수도 있다.심성이 원래 착하신 분이라면 고작 말실수를 한 번 했다고 몇 년 동안 따라다니던 직원을 가차 없이 자르지는 않을 테니까.“아영아, 혹시 기사 내용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서 오늘 널 불렀어.”“무슨 기사요?”도아영은 모르는 척 남현숙을 바라보았다.남현숙이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에 그녀가 도원 그룹의 후계자로서 구호 그룹과 손을 잡았다는 내용이 떡하니 나타났다.“구연준이 4천억을 빌려준 거야?”남현숙은 못마땅한 말투로 물었다.언젠간 물어볼 거로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녀의 귀에 흘러 들어갈 줄은 몰랐다.“할머니, 소문이 와전된 것 같은데 구호 그룹과 도원 그룹은 평범한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에요.”“평범하든 말든 둘째치고, 적어도 수호의 약혼녀로서 구연준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건 아니라고 봐.”남현숙의 말투가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게다가 이미 임자도 있는 사람이 무슨 회사를 운영한다고 그래? 이참에 남동생에게 넘겨줘. 서남의 말에 많이 불쾌하겠지만 일부는 맞다고 생각해. 어쨌거나 자기 약혼자한테 신경을 써야지 회사 일은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마. 여자는 기가 너무 세도 남자가 싫어해.”남현숙의 말에 도아영은 헛웃음이 났다.“할머니, 회사는 아빠가 물려준 유산이라 남한테 넘길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수호 씨의 마음은 애초에 딴 데 있는지라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되돌리기는 힘들걸요? 저를 설득하는 것보다 차라리
장서남은 도아영을 쫓아가기 위해 얼른 차에 올라탔다.부리나케 뒤따라오는 장서남을 보자 도아영은 냉소를 지었다.성격이 물러터진 고용주 때문에 일개 직원 따위가 감히 건방지게 구는 것이다.엄연히 도씨 일가 아가씨로서 어떻게 보면 손님인 셈인데 고작 운전기사가 주인 행세를 하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건 납득이 불가했다.예전에는 화가 나도 참았지만 이제는 절대 봐주지 않을 것이다.잠시 후 택시는 이씨 별장 앞에 멈추어 섰다.남현숙은 본가에서 이사한 이후로 별장에서 지냈다.창문 너머로 택시에서 내리는 도아영을 보자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뭐지? 서남한테 데리러 가라고 하지 않았어? 왜 혼자 왔대?”“글쎄요...”옆에 있던 도우미도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분명 장서남이 픽업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지금 장난해? 동네방네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할 작정이야?”남현숙은 씩씩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리고 거실로 들어선 도아영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가 물었다.“아영아, 왜 혼자 왔어? 서남이가 데리러 안 갔어?”“아니요. 픽업하러 오셨던데 저보다 강이나 씨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그냥 택시 타고 왔어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서남이 현관문을 열고 허둥지둥 뛰어왔다.남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아영을 픽업하러 보냈더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어, 어르신...”장서남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그냥 잡담을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아영 씨가 화를 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어르신의 체면이 구겨지게 택시를 타다니! 이게 다 제 탓입니다. 괜히 허튼소리를 해서 말이에요. 단지 대표님에게 신경을 좀 더 쓰면 좋을 것 같다고 했는데 정색하며 차에서 내릴 줄이야... 만약 다른 사람의 귀에 흘러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을 텐데 정말 큰 일이네요.”남현숙을 오랫동안 모셔 온 사람으로서 성격 또한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체면을 가장 중요시했다.손님이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일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없었다.따라서 도아영이
그제야 장서남은 도아영의 눈에 웃음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이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도씨 일가 아가씨라고 해도 두려울 게 뭐 있나 싶었다. 그래봤자 이수호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신세이지 않은가?그리고 말을 이어갔다.“아영 씨, 어르신에게 잘 보이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에요. 대표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성질이 고약한 여자이죠. 그에 비해 강이나 씨는 여성스러움과 착함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사모님의 자리를 양보해야 할지도 몰라요.”장서남은 도아영에게 이수호의 아내, 더욱이 강이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아니면 애초에 강이나를 따라 하며 환심을 사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도아영의 콧대를 꺾었다는 생각에 장서남은 의기양양했다. 곧이어 싸늘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차 세워요!”갑작스러운 명령에 깜짝 놀란 나머지 브레이크를 밟았다.“아영 씨...”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아영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이를 본 장서남은 겁에 질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그리고 운전석을 허둥지둥 벗어나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아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씨 일가에 어떻게 이런 무례한 직원이 다 있죠? 방금 그런 말은 대체 누가 해도 된다고 했는지 궁금하네요.”진지한 모습은 절대로 농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장서남의 안색이 순식간에 돌변했다.도아영은 워낙 성격이 순하고 소심한 탓에 방금 내뱉은 말은커녕 설령 수위가 훨씬 더 높아도 여태껏 화를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무슨 상황이란 말이지?“이게 다 아영 씨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은혜도 모르고 뭐 하는 짓이죠? 만약 강이나 씨였더라면 고참 직원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거예요.”그는 일부러 ‘고참’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도아영은 장서남이 남현숙의 최측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지라 신뢰가 두둑했다.따라서
도아영의 편을 들어주는 이수호 때문에 강이나는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동안 원수를 대하는 듯 냉정한 모습만 지켜봐 왔기에 모욕은 일상이며, 더욱이 감싸주는 건 상상조차 못 했다.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이지?설마 도아영과 정말 결혼할 생각인가?한편, 주민서는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다행히 따돌렸나 봐. 이수호 장난 아닌데? 설마 경호원을 총동원한 거야? 영문을 모르는 사람은 영화라도 찍는 줄 알겠어.”그러고 나서 도아영을 돌아보며 툴툴거렸다.“너도 참, 쓸데없이 이수호는 왜 도와줘? 그냥 둘이 지지고 볶게 놔두지. 결국 너만 남의 흉내를 내서 남자나 꼬시러 다니는 여우 년이 되어버렸잖아. 본전도 못 찾았네.”“이수호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거든?”전생에 이미 교훈을 얻은 만큼 다시는 이수호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답이었다.게다가 강이나라면 죽고 못 사는 남자이니 이번 생에는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서 비운의 커플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이때, 도아영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전화한 걸까?곧이어 통화 버튼을 누르자 휴대폰 너머로 남현숙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영아, 이따가 기사님을 보낼게. 물어볼 게 있어.”왠지 모르게 딱딱한 말투에 도아영이 재빨리 대답했다.“할머니, 저 아직 학교라서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교장 선생님께 이미 말씀드렸으니 그냥 가도 돼. 기사님이 곧 도착할 거야.”말을 마치고 나서 전화를 뚝 끊었다.끊임없이 이어지는 통화 종료음을 들으면서 도아영은 조소를 머금었다.그리고 속으로 바보 같은 자신을 비웃었다.그동안 이수호가 무슨 짓을 하든 남현숙만큼은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태어나고 나서야 이씨 가문 사람은 한통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미래의 시할머니에게 진심을 바라는 자체가 사치였다.결국 모든 건 이익으로 귀결되었다.곧이어 도아영
그러고 나서 유하영과 조나린에게 둘러싸인 채 강의실로 걸어갔다.내부는 이경 그룹의 경호원들로 가득했다.유하영은 이수호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대표님!”이수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고 멀지 않은 곳에서 강이나의 모습을 발견했다.한편, 강이나는 이수호의 맞은편에 있는 도아영을 바라보았다.게다가 도아영의 팔을 잡은 이수호 때문에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아영 씨가 여긴 왜...”유하영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조나린과 시선을 주고받았다.이수호가 강이나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도아영한테 볼 일이 있을 줄이야.결국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상태까지 이르렀다.“수호 씨, 이게 무슨 상황이죠?”강이나는 불만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도아영이 이수호의 손을 뿌리치며 불쑥 끼어들었다.“이나 씨를 찾으러 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제 만나게 되었으니까 전 이만 가볼게요.”말을 마치고 나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주민서를 데리고 도망쳤다.이수호는 굳은 얼굴로 따라가려고 했지만 강이나가 그를 불렀다.“수호 씨!”이내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유하영이 불쑥 끼어들었다.“내가 뭐랬어? 대표님은 널 보러 왔다고 했지? 이게 다 뻔뻔스러운 도아영 탓이야. 예전부터 너만 따라 하기 급급하더니 어쩌면 지금도 변함이 없을까? 누가 봐도 대표님을 유혹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잖아. 흥!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유하영의 말을 듣고 있던 이수호는 표정이 싸늘하게 식어갔다.강이나는 이수호에게 다가가 물었다.“수호 씨, 하영 말이 맞아요?”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강주에서 이수호가 강이나를 사랑한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반면, 도아영은 예전부터 강이나의 스타일을 따라 하며 흡사한 외모를 무기 삼아 이수호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다.“당연하지 않겠어? 대표님은 사람을 잘못 본 게 확실해.”조나린이 맞장구를 쳤다.죽이 척척 맞는 두 여자 때문에 도아영은 본의 아니게 이수호를 유혹하기 위해 갖은 꿍꿍이를 꾸미는 여자가 되어버렸다.“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