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남현숙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도아영은 남현숙이 강이나를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강이나는 강씨 일가의 외동딸이라서 성격이 매우 오만했다. 그녀가 강씨 일가의 재산을 손에 쥐고 있지만 남현숙은 두 가문의 원한 때문에 강이나를 무척이나 싫어했다.남현숙은 그녀가 고상한 척한다면서 이수호와 만나는 걸 계속 반대했다.그런 그녀와 반대로 도아영은 철이 들었고 집안 배경도 깨끗했다. 분위기, 용모, 학벌 모두 이경 그룹의 사모님이 되기에 아주 적합했다.그리고 남현숙이 도아영에게 잘해주는 것도 이익 때문에 연기하는 것뿐이었다.그 시각 도아영은 이씨 일가의 차를 타고 이씨 저택의 마당에 도착했다.도아영이 거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남현숙이 웃으면서 말했다.“어서 와, 아영아.”남현숙이 소파 옆자리를 툭툭 쳤다. 도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현숙의 옆에 앉았다. 그런데 남현숙의 맞은편에 강이나가 앉아 있었다.강이나는 전생에서처럼 예뻤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듯한 청순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늘 도도했고 얼굴에 오만함이 가득했다.그녀는 뜨거운 차 한잔을 들고 있었는데 손이 벌겋게 됐는데도 내려놓지 않았다.도아영은 강이나의 손목에 감은 붕대를 발견했다. 그녀가 손목을 그은 일을 남현숙이 알고 있다는 걸 뜻했다.이 일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도아영은 유정연이 일러바쳤을 거라 짐작했다.이수호는 남현숙이 강이나를 귀찮게 굴까 봐 소문이 퍼지지 않게 막았다. 그런데 유정연은 남현숙에게 그대로 일러바쳤다. 사는 게 지겨워서 제 명을 재촉하는 건가?“아영아, 약혼식 날에는 수호가 잘못했어. 내가 따끔하게 혼냈으니까 그만 화 풀어.”남현숙은 자애롭게 쳐다보면서 도아영의 손을 잡았다.“네가 이경 그룹의 미래 안주인이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아.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다면 수호더러 내가 보는 앞에서 사과하라고 할게.”“할머니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약혼식 날에 있었던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야? 그건
“아영아, 수호 저 녀석 지금 강이나한테 홀려서 제정신이 아니야. 근데 걱정하지 마. 너한테 꼭 사과하라고 할 테니까. 내가 찜한 손주며느리는 너라는 걸 아무도 바꿀 수 없어.”남현숙의 자애로운 말투에 도아영이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대표님이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은데 저도 더는 할 얘기가 없어요. 두 사람이 잘되기를 축복할게요.”도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앞으로 제가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보살펴드리러 오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대표님의 혼약은 여기까지 하죠.”“아영아...”남현숙이 뭐라 설득하려 하자 도아영이 고개를 내저었다.“할머니, 집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다음 날에 또 뵈러 오겠습니다.”그러고는 이씨 저택을 나섰다.남현숙은 멀어져가는 도아영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예전에 아영이는 이렇게 분별이 없는 애가 아니었는데.’문밖, 도아영이 이씨 저택의 대문을 열자마자 누군가가 그녀의 코와 입을 막았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옷소매에 숨긴 호신용 칼을 꺼내려 했지만 상대의 몸에 이경 그룹 휘장이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이수호의 사람인 걸 알아챈 그녀는 칼을 거두고 납치를 당한 것처럼 했다. 이수호가 아무리 그녀를 싫어한다고 해도 해치지는 않을 테니까.아니나 다를까 상대는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진 않고 이수호의 다른 검은색 자동차에 태웠다.도아영은 정신을 잃은 척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누군가가 그녀를 들고 나가는 게 느껴졌다.딩동.귓가에 엘리베이터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로열 호텔의 엘리베이터 소리와 매우 흡사했다.‘날 호텔로 데려왔나?’똑똑.“대표님, 데려왔습니다.”“들어와.”방 안의 담배 냄새가 코를 찔러 도아영은 숨을 참았다. 상대는 그녀를 푹신한 침대 위에 던져버렸다.도아영의 심장이 쿵쾅거리던 그때 이수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깨워.”“네.”경호원이 차가운 물을 도아영에게 쏟자 도아영이 두 눈을 번쩍 떴다.불빛이 어두워 분위기가 더욱 야릇했다
도아영은 고개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신문을 확인했다. 신문에 큼지막한 몇 글자가 적혀있었다.[이경 그룹, 도원 그룹과 계약 해지, 천억 프로젝트 투자 철회 발표.]도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천억 프로젝트는 도원 그룹에서 현재 개발 중인 부동산 사업이고 벌써 절반 정도 진행되었다. 이런 때에 이수호가 투자를 철회한다면 집을 지을 수 없게 된다.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려면 다른 투자자를 찾아야만 했다.그런데 이경 그룹이 도원 그룹과 계약을 해지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강주에 도원 그룹과 계약하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천억 프로젝트가 어그러질 위기에 놓였고 자칫하다간 도원 그룹도 많은 돈을 잃을 수 있다.도아영이 허리를 숙여 신문을 만져보았다. 아직 따뜻한 걸 봐서는 신문을 찍어내자마자 가져온 게 분명했다. 이수호가 빨리 움직인 걸 보면 그녀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고 강주에서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려주려는 듯싶었다.“도아영, 도씨 일가의 딸로서 이 집안을 위해 공 좀 세우라는데 왜 그래? 남자 마음 하나 잡으라고 한 게 그렇게 억울해? 반반하게 생겨서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유정연은 자신의 불만을 쏟아냈다.“네 주제에 도원 그룹을 이끌어가겠다고? 충고하는데 하루빨리 도원 그룹을 네 동생한테 줘. 그리고 남현숙의 마음도 잘 구슬려.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이씨 일가에 시집가는 거야.”“얘기 다 했어요?”도아영이 유정연을 싸늘하게 쳐다보았다.“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가만히 있을 건가요? 그렇게 급하면 아줌마가 그 집안에 시집가요, 그냥.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춰주는 건 아줌마가 나보다 더 잘하잖아요.”“너 이 녀석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야?”유정연은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도아영은 신문을 챙기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수호가 투자를 철회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전생에 이 프로젝트가 대박이 났다. 그런데 이수호가 천억을 투자한 대주주이기에 마지막에 도원 그룹이 나눠 가진 돈은 얼마
이수호는 도아영을 무섭게 째려보았고 말투마저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기세였다.“수호 씨, 이러지 말아요. 아영 씨를 오해했어요. 내가 꿇고 싶어서 꿇은 거예요...”“이나야, 넌 너무 착해서 문제야. 이러니까 자꾸 괴롭힘을 당하지. 내가 분명히 말했었지, 이 사람 만나지 말라고.”이수호가 강이나를 감싸고 돌 거라는 걸 도아영은 진작 예상했다.강이나는 항상 이수호가 나타날 때마다 다쳤다. 사실 강이나가 무릎을 꿇은 순간부터 도아영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하지만 알면서도 맞춰줬다. 어쨌거나 이수호가 그녀를 미워하면 더 쉽게 파혼할 수 있으니까.“도아영, 전에는 네가 그냥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악랄하기까지 하구나. 몸이 약한 이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널 가만두지 않아.”그러고는 강이나와 함께 나가려 했다.그사이 설명할 시간이 충분했지만 강이나는 침묵을 택했고 그저 미안한 눈빛으로 도아영을 쳐다보았다.강이나의 두 눈에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잠깐 스친 우쭐함을 도아영이 포착했다. 그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둘이 약혼하면 뭐? 그래봤자 수호 씨 마음에는 나밖에 없는데.”도아영은 바닥에 떨어진 은행카드를 주워 두 사람을 불렀다.“강이나 씨, 카드 놓고 갔어요.”강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이수호도 그제야 도아영이 들고 있는 은행카드를 발견하고는 얼굴을 찌푸렸다.“이나야, 쟤한테 돈을 줬어?”강이나가 입술을 깨물었다.“나 때문에... 파혼하는 걸 가만히 볼 수가 없어서요.”이수호가 대답하기 전에 도아영이 먼저 말했다.“강이나 씨, 난 무조건 파혼할 겁니다. 대표님도 아마 겉과 속이 다르고 마음이 악랄한 여자와 약혼할 생각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 돈도 필요 없어요.”그러고는 강이나에게 은행카드를 돌려주었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도아영이 아니었다.강이나는 일부러 은행카드를 두고 갔다. 만약 도아영이 받아서 나중에 이수호가 알게 된다면 일이 더 커질 게 분명했다.
유정연은 도아영과 이수호가 화해하기만을 애타게 바랐다.도아영이 이씨 일가에 시집가면 앞으로 유정연 모자에게도 이로울 테니까.초조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도아영은 피식 웃었다.“네.”“진짜? 너무 잘됐다!”유정연이 흥분하며 말을 이었다.“수호가 너한테 감정이 남아있을 거라고 했잖아. 안 그러면 뭣 하러 데이트 신청을 하겠어?”“아줌마, 오해하셨어요.”도아영이 말했다.“대표님은 파혼 얘기로 저를 불러내신 거예요.”“아니 그럼...”유정연이 불안감에 휩싸여 눈동자가 파르르 떨릴 때 도아영은 한 글자씩 또박또박 대답했다.“네, 이미 파혼했어요.”“뭐라고?! 파혼을 해?”그 순간 유정연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옆에 있던 도지호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도아영에게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야, 도아영! 너무 한 거 아니야? 어떻게 집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혼자 선뜻 파혼하는 거야? 대체 우리가 안중에 있긴 해?”“내 혼사야. 나 스스로 결정하면 될 일이지 뭣 하러 상의를 해? 오늘부로 회사일 정식으로 이어받을 거야. 아줌마, 이경 그룹에서 투자 철회한 거 더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도아영이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자 유정연은 울화가 치밀어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도아영 이년이 진짜 무슨 자극을 받은 거야?’도원 그룹.처음 회사에 나온 도아영은 이미 회사의 초점으로 거듭났다.그녀는 평상시에 거의 회사에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 경우 유정연이 안용준 상무에게 회삿일을 맡겼다.그 시각, 안용준이 헐레벌떡거리며 도아영의 앞으로 달려왔다.“아영 씨가 어쩐 일로 회사까지 나오셨어요? 용건 있으시면 바로 저한테 전화해서 분부하시지 그랬어요.”“안 상무?”“네, 아영 씨, 분부하세요.”도아영은 눈앞의 안용준을 힐끗 살펴보았다. 그나마 반듯한 얼굴에 40대쯤 돼 보이는 나이였는데 평소에 나름 관리를 잘 한 듯싶었다. 다만 웃을 때 살짝 느끼한 모습은 피면할 수가 없었다.전생에 도아영은 도원 그룹을 유정원 모자에게 맡
“아영 씨, 이건 딱히 관련 없는 서류들이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얼른 가서 커피 한잔하세요.”안용준이 아양을 떨면서 말했다.말인즉슨 회사의 그 어떤 업무도 간섭하지 말라고 도아영에게 으름장을 놓는 식이었다.이에 도아영이 손을 쭉 뻗었다.“이리 줘요.”“아니 그건...”“안 상무, 이제 슬슬 우리 집안 세대주 행세를 하려고 드네요?”강압적인 그녀의 태도에 안용준이 재빨리 대답했다.“제가 어찌 감히요. 아영 씨가 보시겠다면 당연히 드려야죠. 저는 단지 아영 씨가 제대로 보실 줄 모를까 봐 그런 겁니다...”“이렇게 하죠. 라운지에 갈 필요도 없고 우리 그냥 대표이사실로 가요. 이참에 최근 회사에서 서명이 필요한 문서들도 싹 다 가져오세요.”“아영 씨...”도아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안용준의 말을 자르고 주연우에게 시선을 옮겼다.“주연우 씨? 주 비서가 대신 서류들 챙겨오고 안 상무는 번거롭겠지만 저랑 함께 사무실로 가시죠.”“네... 네.”안용준은 대답만 척척 할 뿐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이 여자가 회사엔 대체 뭐 하려고 나온 거야?’만에 하나 회사 장부의 문제점이라도 발각된다면 안용준은 끝장날 것이다.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도아영과 함께 대표이사실로 들어왔다. 이곳은 그녀의 아빠 도석진이 생전에 쓰시던 사무실이다. 도아영은 아빠가 생전에 절제되고 심플한 인테리어를 선호하셨던 걸 아직 기억하고 있다.하지만 지금 사무실은 유정연의 손을 거쳐 엉망진창이 돼버렸다.몇백만 원대의 게임 컴퓨터, 담배와 시가, 사치스러운 와인 캐비닛까지...심지어 전시용 신발장까지 만들어서 그 안에 죄다 한정판 축구화를 넣어두고 있었다.유정연과 도지호에게 회사를 맡긴 이후로 사무실마저 이토록 황당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아영 씨, 사모님과 지호 도련님이 아직이시니 두 분 오시거든...”“안 상무, 도원 그룹 상속권은 내 손에 있어요. 전에 아줌마가 회사 운영에 관심이 있다고 하셔서 잠깐 맡겼을 뿐이에요. 당분간 믿고 맡겼는데 운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볼게요.”도아영은 말하면서 꼼꼼하게 장부를 훑어보는 척했다.그녀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면서 첫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 페이지로 아주 천천히 펼쳤다.맞은편에 서 있는 안용준은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다.수십억 원의 회사 공금 횡령이란 게 무엇을 의미할까?남은 생은 줄곧 감방에서 지내야 한다는 뜻이겠지...탁.문득 도아영이 수중의 장부를 책상 위에 내던졌다.화들짝 놀란 안용준은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는데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고 투덜대는 것이었다.“이게 대체 다 뭐야? 숫자만 빽빽이 적혀 있어서 뭐가 뭔지 모르겠잖아.”그 순간 안용준은 멍하니 넋을 놓았다.‘도아영이 장부를 볼 줄 몰라?’옆에 있던 주연우도 미간을 찌푸린 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도석진 회장 따님께서... 회사 장부도 볼 줄 모르다니.안용준은 땀을 쓱 닦고 가까이 다가가 아양을 떨었다.“아영 씨, 제가 말했잖아요. 회사 상황이 궁금하시다면 얼마든지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괜히 회사까지 번거롭게 나오실 필요 없어요.”“하긴. 여기 이 서류들은 전부 서명해야 하는 거죠?”도아영은 주연우를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주 비서, 이따가 서명이 필요한 서류들만 골라내세요. 나도 이참에 회사 경영이나 배워야겠어요.”“네, 알겠습니다.”주연우는 그녀를 향한 실망에 휩싸인 채 침울하게 대답했다.한편 안용준이 줄곧 떠날 기미가 없어 보이자 그녀가 말했다.“안 상무는 언제까지 거기 서 계실 거예요? 이만 나가보시죠.”안용준은 도아영이 아무것도 모르는 걸 확인하고 나니 졸여왔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그럼 천천히 보세요, 아영 씨.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네.”도아영은 왠지 회사 잡무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이에 안용준도 시름 놓고 사무실을 나섰다.그는 나갈 때 잊지 않고 주연우에게 경고의 눈빛을 날렸다.회사일을 절대 도아영에게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게 뻔했다.사무실 문이 닫힌 후,
“그러니까 아영 씨는 지금 일부러 실력을 감추고 어리석게 보이는 거라고요?”“바로 그거예요.”도아영이 말을 이었다.“섣불리 적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요. 증거들은 천천히 수집해야 하거든요. 저 두 사람이 회사 자산을 남용했으니 이미 주주들 이익에 영향을 미치고 있겠죠. 모든 증거를 확보하고 저 두 인간의 회사 인맥을 싹 다 자른 후에 감방으로 보내버리면 돼요.”주연우는 도아영을 빤히 쳐다봤다.“아영 씨... 예전과 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이전의 도아영은 조신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물론 똑똑하긴 하지만 상업계에서 한 실력 하는 정도는 아니었다.다만 아까 그녀가 했던 말들은 전부 일리 있는 말이었다.주연우는 참지 못하고 감탄을 연발했다.“주 비서도 우리 회사 다닌 지 몇 년은 됐죠? 아빠가 전에 후원해주신 거로 아는데 이번에 나 한번 도와주길 바라요.”“물론입니다. 안 상무랑 사모님이 회장님께서 남겨주신 회사를 망치게 내버려 둘 순 없어요.”“좋아요.”“하지만...”주연우가 잠시 머뭇거렸다.“안 상무가 조금 오버한 건 있지만 요즘 이경 그룹에서 확실히 우리 회사만 공격하고 있어요. 특히 오늘은 더 유별나고요.”“오늘이요?”주연우가 머리를 끄덕였다.“오늘 이경 그룹에서 우리 회사 프로젝트들을 몇 개나 철회했어요. 이제 우리 회사는 자금이 부족해 더는 앞으로 나아가기도 힘든 상황이에요. 재무팀에서 장부를 맞춰보기 시작했는데 현재 남은 자금으론 7일밖에 버티지 못한다네요.”7일이라...도아영은 쓴웃음을 지었다.이수호가 강이나를 위해 이딴 방식으로 그녀가 머리를 숙일 때까지 궁지에 몰아붙이려나 보다.“자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 지금 은행 대출을 고민하고 있어요.”이에 주연우가 미간을 찌푸렸다.“네? 그건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썩 동의하기 어렵네요.”“방법을 생각해서 은행에 천억 정도 대출받고 전에 수호 씨가 철회한 천억짜리 부동산 프로젝트부터 해결해요. 그 뒤에 융자에 관한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요.
‘내가 만약 아영이랑 결혼한다면 몇십 년 후에도 과연 이런 모습일까?’이때 포장을 마친 사장님이 그에게 봉투를 건네면서 활짝 웃었다.“여자친구분 쾌유를 바랄게요.”이수호도 흐뭇하게 웃으며 돈을 꺼냈다.백만 원짜리 수표를 본 순간 사장 부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수호를 쫓아서 밖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병원 병실.도아영은 어느새 죽을 한 그릇 다 비웠다.방에 들어온 이수호는 불을 켜고 텅 빈 죽그릇을 치우고는 찐빵을 선반에 내려놓았다.한가득 포장해온 찐빵을 보더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뭐가 이렇게 많아요?”“네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종류별로 두 개씩 샀어.”이수호는 그녀 대신 재빨리 어수선해진 선반을 치웠다.이때 그녀가 말했다.“너무 늦게 돌아왔잖아요. 나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그래?”이수호는 별 반응이 없었다.“화 안 나요?”“나 놀리는 거 알아. 네가 지금 환자니까 그냥 참는 거야.”그는 소파에 앉아서 담담하게 말했다.“먹고 싶으면 먹고 못 먹겠으면 다 버려.”“...”너무나도 차분한 이 남자의 모습에 도아영은 포장을 뜯고 찐빵을 한입 물었다.이수호는 침대에 누워서 찐빵을 먹는 그녀에게 물었다.“마지막으로 그 찐빵 가게에 간 게 언제야?”도아영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차갑게 답했다.“기억 안 나요.”“너희 아빠가 입원했을 때 맞지?”순간 그녀의 안색이 확 차가워졌다.“그게 대표님이랑 무슨 상관이죠? 우린 이미 파혼했으니 더는 사적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주세요.”입맛이 떨어진 그녀는 찐빵을 내려놨다.문득 아빠가 입원했을 때 그녀 홀로 바삐 돌아쳤던 기억이 났다.유정연도 오긴 했지만 아빠가 하루빨리 죽어서 도지호에게 유산을 물려주기만을 바랐다.전에 도씨 일가와 거래했거나 협력했던 대표들도 하나같이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도아영은 마치 언제든 잡아먹히게 될 토끼처럼 무기력하게 이 모든 걸 마주해야만 했다.그리고 그때 남현숙은 그녀를 손주며느리로 찜했었다.이수호는
야채죽과 삶은 계란, 그리고 밑반찬들까지 전부 담백한 음식인지라 식욕이 당기지 않았다.“음식이 별로네요.”도아영이 힐긋 내려다보며 말했다.“그럼 뭐 먹고 싶은데?”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줄줄이 설명했다.“이 병원 나가서 좌회전하고 백 미터 걸어가면 찐빵 가게가 하나 있는데 24시 가게거든요. 나 거기 찐빵 엄청 좋아해요. 대신 가서 사주실래요?”이수호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았어.”그는 곧장 병실을 나섰다.이수호가 떠난 후 도아영은 야채죽을 맛있게 먹었다.‘꽤 맛있네!’병원 밖으로 나오니 어느덧 심야인지라 주위가 어두컴컴하고 가로등 불빛만 어렴풋이 비쳤다.그는 도아영의 말대로 병원에서 좌회전해서 백 미터를 걸어갔지만 아무것도 안 보였다.이수호는 마침내 도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녀가 곧장 전화를 받자 이 남자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찐빵 가게가 대체 어디 있는데?”도아영은 일부러 난감한 척하며 되물었다.“실은 나도 이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휴대폰으로 한번 위치 찾아보시겠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꺼버렸다.‘자식, 너 이번엔 제대로 걸려들었어!’이수호는 차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휴대폰을 꺼내 검색해보았지만 근처 1킬로미터 이내에 찐빵 가게라곤 없었다.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가장 가까운 찐빵 가게로 가려고 해도 택시를 타야만 한다.심야 시간대라 택시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결국 길거리까지 나가서 힘들게 택시를 잡았다.찐방 가게까지 도착하니 20분이나 소요됐다.한편 가게로 들어갔더니 찐빵 소가 무려 일여덟 가지나 되었다. 이수호는 그녀가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다.“손님, 뭐로 해드릴까요?”이때 사장님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새벽이라 가게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이수호는 또다시 그녀에게 전화해서 어떤 맛으로 사 올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쉬는 데 방해가 될까 봐 휴대폰을 넣어두었다.“종류마다 두 개씩 포장해주세요.”사장은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오밤중에 무슨
이수호는 본인 잘못인 걸 알기에 딱히 반박할 자격이 없었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욕도 시원하게 했겠다. 무슨 보상을 원하는데? 그냥 얘기해.”“역시 통쾌하네요.”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앞으로 우리 집안을 겨냥하지도 말고 나도 더는 건드리지 말아요. 우리 이미 파혼했으니 각자 갈 길 가요. 내가 다친 건 다 대표님 때문이니 치료비는 전적으로 책임지세요.”“그게 다야?”“네.”도아영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뭐 대표님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일종의 경제적인 보상을 하고 싶다면 저도 마다하진 않을게요. 이런 건 이별 비용이라고 하죠 뭐.”이별 비용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이수호의 얼굴이 한없이 차가워졌다.그는 왠지 모르게 이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왜요? 돈 아까워요?”“줄게.”이수호가 곧장 대답했다.그녀도 너무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이수호에게 차고 넘치는 게 돈이니까 이별 비용으로 몇십억 정도 주는 건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나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치료받는 동안 전적으로 책임질게.”“오케이.”도아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양심은 있네, 그래도.’“내일 안 비서 시켜서 퇴원 수속 할 테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병 치료하는 줄 알아.”순간 그녀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내가 왜요? 왜 그리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요?”“이미 함 원장한테 말해서 해외 최고의 의료진을 모셔오기로 했어. 너 그 손 치료하지 못하면 평생 오른손을 못 쓸 거래. 그러니까 내 말 들어.”“대표님...”“이것도 다 널 끝까지 책임지는 거잖아. 5개월 후에 손이 다 낫거든 무조건 보내줄게. 만약 그때까지도 회복하지 못하면 대신 보상금 줄게. 금액은 네가 정해.”여기까지 들은 도아영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됐다. 그녀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금액을 내가 정하라고요?”“응.”“얼마든지 다 오케이?”은근슬쩍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이수호는 덜컥 겁이 났다. 보상금이랍시고 한도 제한이 없다면 이 여자는 이
같은 시각 안지원은 다음날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이수호에게 전송했다.이수호가 힘겹게 휴대폰을 꺼내 들고 내일 회의자료를 훑고 있는데 도아영이 갑자기 악몽을 꿨는지 울면서 소리쳤다.“때리지 마. 날 때리지 말라고!”이수호는 곧장 침대 옆으로 다가가 어떻게 위로할지 몰라서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그제야 도아영은 조금 진정된 모습이었다.이수호는 안쓰러운 눈길로 그런 그녀를 쳐다봤다.이토록 가녀린 여자애가 오늘 같은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그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려고 할 때 도아영이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었다.이를 본 이수호도 화들짝 놀랐다.이어서 도아영은 매우 또박또박하게 쏘아붙였다.“X발, 감히 날 때려? 넌 오늘 뒈졌어!”“...”“이수호 이 개자식!”“...”“널 목 졸라 죽일 거야!”“...”“죽어, 이수호!”“...”이수호는 휴대폰으로 내일 회의자료를 확인하려다가 어느덧 저도 몰래 네이버 검색창에 전신마취가 덜 풀렸을 때 왜 잠꼬대를 하는지에 대해 검색하고 있었다.한편 도아영의 욕설은 점점 더 험악해졌다.이수호는 회의자료를 볼 기분이 아닌지라 모두 내려놓았다.‘얘 분명 의도적이야. 틀림없어.’야간 당직을 서는 간호사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좀전의 일로 이수호에게 사과하려고 들어왔는데 이 남자가 눈길 한번 안 주고 차갑게 쏘아붙였다.“나가.”“대표님, 이건 방금 안 비서가 보내온 음식입니다.”간호사는 음식을 이수호의 옆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았다.“얘 아까까지 계속 잠꼬대했는데 전신마취 때문이야?”간호사는 당황해서 어쩔 바를 몰랐다.“전신마취요?”“왜? 아니야?”“이 환자분은 큰 수술이 아니어서 부분 마취만 했는데요?”“...”이수호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침대에 누운 도아영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이때 도아영이 기지개를 켜고 비스듬히 눈을 떴다.“어머? 대
원장은 이수호가 센트럴 병원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일부러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후 한달음에 달려왔다.이씨 일가는 의료 분야로 상당한 투자를 했고 또한 이 병원의 최대 투자자이니 섣불리 건드릴 자가 아니다.간호사는 그가 이수호인 걸 알아채고 사색이 되었다.“할 말 있으면 나가서 해. 아영이 쉬는 데 방해하지 말고.”“네, 대표님!”원장 함성민은 얼른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이수호가 나간 후 간호사도 입을 꾹 다물고 감히 더는 말을 내뱉지 못했다.병실을 나서자 원장이 곧바로 주치의를 소개했다.“대표님, 여기가 바로 오늘 아영 씨 주치의 양정원이에요! 아주 젊고 유능한 인재랍니다...”“중점만 말해!”이수호가 차갑게 쏘아붙였다.“아영이 상태가 어떤데?”함성민은 곧장 양정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이에 양정원이 안경을 올리고 이수호에게 설명했다.“도아영 씨는 사실 거의 찰과상이라 그리 심각한 건 아닙니다. 보름 정도 안정을 취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 하지만... 손목과 손등에 난 상처가 매우 심각해요. 손목은 상대가 일부러 부러트렸고 출혈이 있는 흉터도 이미 감염되었어요. 또한 오른손도 심하게 짓눌리다 보니 근골을 다쳐서 5개월 정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사이에 회복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앞으로 오른손으로 글을 쓰거나 힘쓰는 일을 하는 것도 영향을 미칠 겁니다.”이수호는 가슴이 움찔거렸다.“다른 해결책은 없는 거야?”“죄송합니다. 상처가 워낙 심해서요. 해외 전문팀을 찾아서 정기적으로 재활 훈련을 받게 된다면 나아질 확률이 있겠지만 과정이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과정은 중요치 않아. 아영이 손만 회복할 수 있다면 뭐든 다 시도해야지!”“대표님! 저희 병원에서 해외 전문팀과 줄곧 교류하고 있으니 이번 일은 저희한테 믿고 맡기세요.”함성민이 곧장 책임을 떠맡았다. 이수호에게 잘 보일 기회이니 쉽게 놓칠 리가 있을까.“다른 건 다 됐고 오늘 밤은 일단 내가 병실을 지킬 거야. 내일 바로 아영이 데려가야겠어.”“네?”양정원은
병원에서 한참 기다린 후에야 수술실 불이 파란색으로 변했다.주치의와 몇몇 간호사가 수술 침대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침대에 누워있는 도아영을 본 순간 이수호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갔지만 간호사가 그를 가로막았다.“죄송합니다. 환자분은 현재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요. 그리고... 이 대표님을 안 보고 싶다고 하네요.”도아영이 자신을 외면하니 이수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 시각 안지원은 경찰서의 전화를 받고 이수호에게 보고했다.“대표님, 우리 쪽 사람들이 방금 경찰서로 갔는데 여죄수들이 전부 죽었다고 합니다.”“누가 죽였어?”“서현우 대표님이요.”이수호는 쓴웃음을 지었다.‘누군가 했더니 서현우였어? 아영이랑 서현우 진짜 보통 사이가 아닌가 봐?’그도 그럴 것이 서현우는 불필요한 사람을 위해 직접 나서는 법이 없다.“됐어,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 지금은 아영이 상태가 관건이야.”“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얼른 돌아가셔야 어르신도 의심하지 않으실 겁니다.”그들은 병원에서 도아영의 수술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니 어느덧 자정이 다 되었다. 게다가 내일 아침 매우 중요한 회의가 하나 잡혀있다.어르신은 이수호에게 반드시 일찍 돌아와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특히 오늘 아침에는 할머니와 대판 싸우기까지 했으니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넌 일단 돌아가서 내일 회의 내용을 휴대폰으로 다 보내. 난 여기서 아영이 지킬 거야.”“직접... 말씀입니까?”안지원은 처음에 잘못 들은 줄 알았다.대표님이 언제 누군가의 병간호를 해봤을까?“닥치고, 얼른 돌아가.”“네, 대표님.”안지원이 이제 막 병원을 나서려 할 때 이수호가 갑자기 그를 불러세웠다.“잠깐만.”“네?”“이 근처에 식당이 있는지 알아봐봐.”“배고프십니까?”“...”이수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안지원이 곧장 알아챘다. 그는 지금 도아영에게 뭐라도 먹이려고 이러는 것이었다.“지금 바로 나가보겠습니다!”안지원이 떠난 후에야 이수호는 도아영의 병실에 들어갔다. 간호사와 의사 모
강주에서 이수호가 제일 아끼는 여자로 살아가면 아무도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테니까.하지만 강이나가 요즘 한 행동들은 점점 이해하기 어려웠다.손목을 그은 척 연기하지, 한성대에서 도아영을 겨냥하지, 심지어 박태오까지 불러오다니. 전에 몰래 서현우에게 가까이하려던 것까지 이수호는 다 알고 있다.예전의 그녀는 이런 비겁한 수단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왜 이렇게 변해간 걸까?“대표님, 지나간 일은 더 생각하지 마세요. 강이나 씨는 대표님이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된 마음에...”“걱정이야 되겠지. 내가 아영이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걱정됐을 거야.”이수호의 안색이 싸늘해졌다.수술실 문밖의 불은 여전히 빨간색이었고 이수호는 복도의 벤치에 앉아서 도아영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좀 전에 도아영을 안고 경찰서에서 나올 때, 이수호는 문득 깨달았다. 이 여자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말이다.같은 시각, 경찰서.“계속해!”서현우가 의자에 앉아서 그 여죄수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그는 여자에게 손을 대는 습관이 없지만 그 대신 부하를 시키면 그만이다.장윤기는 바짝 긴장해서 손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20분이나 때리고 있으니 더 하면 죄수들이 숨질 수도 있다.“대표님... 이제 그만하시는 게...”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서현우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아참, 아영이 그렇게 만들라고 명령한 사람 누구지?”“네?”장윤기는 말을 더듬거렸다. 이것 참, 이수호라고 말할 수도 없고 본인이라고 말하는 건 더더욱 안 되니까.그는 아예 감방을 가리키며 분부했다.“멈추지 말고 계속해! 더 때리란 말이야!”“네!”여죄수들의 처참한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서현우는 그 비명이 질렸는지 허리춤에서 총을 꺼냈다.“여기 있는 사람들 다 무기징역이라고?”“네? 네.”장윤기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서현우가 아예 감방 안으로 총을 몇 발 쏘았다.쩌렁쩌렁 울리는 총소리에 장윤기는 식겁하여 머리를 감싸 안고 바닥에 주저앉았다.처참하게 울부짖
“수호야,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이나 의심하는 거니?”박태오가 미간을 확 구겼다.“우린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사이잖아. 이나가 어떤 애인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얘는 절대 거짓말을 할 애가 아니야.”이수호는 박태오를 흘겨보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나 지금 이나한테 묻고 있잖아.”박태오가 계속 반박하려 하자 강이나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수호 씨, 우리 집에 쳐들어온 사람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영 씨밖에 없었어요. 낮에 나린이랑 하영이가 아영 씨 심기를 건드렸고, 그리고 또 연준 씨도 아영 씨 편을 들어줬어요. 혹시... 연준 씨가 그런 건 아닐까요?”강이나는 일부러 구연준을 언급했다.이수호와 구연준이 앙숙이란 걸 강주에 모르는 이가 있을까?전에 구연준과 도아영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수호는 이미 기분이 언짢았다.강이나는 이번에도 구연준을 언급하면 이수호가 걸려들 줄 알았는데 그가 오히려 싸늘한 눈길로 쏘아붙였다.“그러니까 상대가 누군지 확실치도 않다는 거네?”그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오늘 울면서 이수호에게 전화를 걸 때 도아영과 있은 일을 의도적으로 언급했었다.그래서 이수호도 기세등등하게 도씨 일가로 찾아가 도아영을 끌어낸 것이다.상황을 살피던 박태오가 재빨리 강이나를 보호했다.“이수호, 이나한테 그게 무슨 말투야? 도아영 때문에 이나를 의심해?”“아영이가 저 안에 누워있어. 앞으로 손을 쓸 수 있을지도 미지수야. 어떤 일은 반드시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겠어.”이수호가 차갑게 말했다.“저리 비켜.”“야!”박태오는 계속 강이나를 지켜주고 싶었지만 누군가가 벌써 그를 알아보았다.“저 사람 박태오 아니야?”“잘 모르겠어. 비슷한 것 같아. 옆에 있는 여자는 여자친구인가?”“설마, 박태오 항상 솔로라고 얘기하고 다녔잖아.”...몇몇 여자애들이 박태오가 맞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귓속말을 해댔다.그도 그럴 것이 박태오가 국내 활동을 한다는 소식이 아직
여죄수가 손을 번쩍 들고 도아영을 따끔하게 혼내려 할 때 이수호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당장 멈춰!”여죄수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더니 정장 차림의 이수호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옆에 있던 장윤기는 황급히 문을 열어주었다.감방 안은 피바다가 되었고 헐뜯겨버린 머리카락이 널브러졌다.도아영은 구석에 축 늘어져서 거의 의식을 잃기 일보 직전이었고 옷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온몸에 성한 곳 하나 없었고 특히 빨갛게 물든 손목 상태가 충격의 도가니였다.이수호는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안색이 창백해졌다.이 광경을 본 장윤기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분노에 찬 표정으로 죄수들을 질책했다.“누가 이렇게 심하게 때리라고 했어?”“죽기 직전까지 때리라면서요?”여죄수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답했다.“장윤기, 너 이제 이런 개수작까지 부리는 거야?”이수호가 짙은 얼굴로 쏘아붙였다.“아, 아닙니다! 오해예요, 다 오해라고요!”그가 더 해명하려 했지만 이수호는 더 이상 들어줄 겨를이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도아영을 품에 안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는 이수호였다.“대표님!”안지원도 도아영의 몰골을 보더니 충격에 휩싸였다.단순히 취조하러 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당장 병원으로 가!”“네.”안지원은 부랴부랴 차 가지러 갔고 감방 안에서 장윤기는 한심한 눈길로 여죄수들을 바라봤다.“서장님, 우린 다 서장님 분부대로 한 겁니다... 저 여자가 워낙 고집이 세서 끝까지 자백하지 않은 거라고요. 우리도 최선을 다했어요. 형량을 줄이는 건...”“뭐? 형량을 줄여? 이것들 확 사형 판결 내려버릴라!”장윤기는 곧장 감방을 나섰다.이 여자들은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어떻게 도아영을 죽기 직전까지 쥐어 패버릴 수 있을까?이수호가 끝까지 따져 묻는다면 그들은 전부 끝장날 것이다.센트럴 병원.이수호는 조심스럽게 도아영을 침대에 눕혔다. 의사가 그녀를 수술실로 밀고 가려 할 때 이수호는 문득 가슴이 조여왔다.“대표님, 의사 선생님이 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