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네. 저놈이 앞에 라운드를 날아다녔던 건, 먹으면 안 되는 약을 먹은 게 아닌가 싶은데. 약발이 떨어지니까 맹해진 거지!”그 소리에도 소진명의 의심은 먹구름처럼 짙어져 갔다.구현수를 지켜보던 배경원과 유찬혁도 손에 땀을 쥐었고, 특히 배경원은 발을 동동 구르며 유찬혁을 향해 끊임없이 물으며 걱정을 토했다.“저 형, 왜 저러는 거야!”유찬혁은 방방 대는 그를 자리에 앉히며 조용히 하라고 눈짓했고, 주위 눈치를 살피다가 흐릿하게 소진명의 모습을 보았다.“쉿! 형이 저런 행동하는 건 분명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 소리 지르지 마!”“설마 형수가 안 본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현장은 또 한바탕 소란스러웠고 비명까지 들렸다. 구현수는 무릎을 꿇은 채 왼쪽 갈비뼈 위치에 손을 대고 아파했고 이마엔 피가 땀에 섞여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현수 씨...”강서연은 그 시점에 빠른 걸음으로 경기장에 들어와 하필이면 그 모습을 봤고 어안이 벙벙했다.그녀의 눈에 구현수는 싸우면 질 줄 모를 것 같던 존재일뿐더러 다른 사람에게 얻어맞아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제대로 충격받아 놀랐다.강서연은 눈물이 솟구쳐 올라왔고 애간장을 타며 링을 향해 뛰쳐나가다가 가까이 있던 보안요원에게 저지당했다. 그녀의 애타는 외침마저도 경기장의 소란 속에 묻혀버렸다.강서연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어떻게 버텼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였고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나기 전까지 거의 링 위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승부 판정이 나자 가장 먼저 인파를 뚫고 뛰쳐나갔다.“강서연 씨,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아는 구현수 씨는 기본이 깔려있어서 저 정도 상처에는 크게 다치지 않았을 거예요!”신석훈이 마침 도착했다.“신 의사님, 제발... 잘 부탁해요. 저 너무 무서워요.”강서연은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눈물을 머금은 채 부탁했다.“괜찮아요, 괜찮아! 백스테이지 어떻게 가요? 같이 가보죠.”소진명도 두 사람을 데리고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
소진명은 멈출 생각 없이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석훈이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미소를 건네며 그를 막아섰다.“소 대표님, 이건 ...”소진명의 옆에 선 이들도 속수무책인 모습을 보였고,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배경원과 유찬혁은 소진명이 분해서 발을 구르고 검푸른 낯빛을 하고 떠나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소진명이 뒤돌아서지 않는 것을 보고서 배경원이 바로 달려 나가려 했고 이내 유찬혁에게 목덜미를 잡혔다. “뭐 해?”“연준 형 보러 가야지!”“가지 마, 저기 서연 씨도 있고 의사 양반도 있으니 충분해!”유찬혁이 눈치를 줬고 배경원은 조급해했다. 유찬혁은 배경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연준 형을 돕고 싶다면, 차라리 소 대표 저 사람 내막을 조사해 내는 게 빨라.”배경원은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빠른 걸음으로 유찬혁과 같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서서히 눈을 뜬 구현수의 시야에 들어 온 것은 온통 흰 배경이었다.방 안에는 약 냄새가 진동했다. 어렴풋이 간헐적으로 들리는 여자의 울음소리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부드러운 작은 손에 의해 어깨가 눌려 힘을 쓰지 못했다.“움직이지 말아요! 몸을 다쳤으니 잘 돌봐야 해요. 힘쓰지 마요.”강서연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얘기했다.구현수는 눈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몰라도 그녀를 볼 수 없던 시간은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지금 그녀가 눈앞에 있다는 안도감에 그녀의 손을 잡았고 여느 때처럼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매만졌다. 원래도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이어서 그녀는 더욱 수척해 보였고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또 두 눈은 얼마나 울었는지 빨갛게 부어있었다.“마누라...”“나랑 했던 약속은 다 잊었어요?”강서연이 안타까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현수 씨, 내가 말했잖아요. 죽을 지경으로 하지 말라고.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요. 난 당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싹 다 잊은 거죠?”
구현수는 마음이 철렁거렸고 강서연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한 말들을 마음에 담아두면 안 돼요? 몇 번을 얘기하지만, 나는 당신이 다치지만 않으면 돼요. 다른 건 신경 안 써요! 현수 씨, 다신 다치지 마요!”늘 온순한 모습의 강서연이 어쩌다 이런 막무가내식의 태도를 보였다.구현수는 그런 그녀가 되레 더 좋았다. 가만히 강서연을 바라보는 그의 입꼬리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한테서 보기 쉽지 않은 순수한 웃음이었다.그 순간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뭐가 되었든 내 남편이라던 그녀의 말에 용기를 내서 말이다.‘구현수가 아니라 최연준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여전히 남편으로 받아들이겠지?’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사실을 꺼내 놓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삼촌 최진혁과의 기나긴 전쟁이 예고돼 있기에, 결과를 알 수 없는 복싱 경기처럼 승부가 선명해지기 전까지 그녀를 이 시비에 휘말리게 할 수 없었다.그는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서 살짝 웃어 보였다.“여보. 날 믿어줘. 내가 멋지게 이기는 모습을 보여줄게.”두서가 없는 말에 강서연은 어리둥절했다.“내가 내뱉은 말이니까 꼭 지킬게.”구현수는 진지하게 약속했다.“그래요.”그녀는 웃어 보이며 답했지만, 구현수의 말속의 말을 알아채지는 못했다.링거가 다 떨어졌고 강서연은 간호사를 부르러 나갔다. 바로 그때 구현수의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구현수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고, 병실을 들어오는 강서연을 기다렸다가 속닥이듯 물었다.“여보, 뭐 먹을 게 없을까?”강서연은 핸드폰의 시간을 들여다보며 얘기했다.“배고파요? 석훈 씨가 죽 같은 걸 먹는 게 좋다고 했어요. 이렇게 해요. 내가 나가서 영양죽을 금방 챙겨 올 테니 기다려요.”“그래.”구현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강서연은 서둘러 집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병실을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배경원과 유찬혁이 병실을 기웃거렸다. 구현수가 헛기침하고서야 두 사람은 히죽거리며 걸어 들어왔다.“형, 놀랬잖아요!”구현수는 두 사람을
배경원은 어깨를 추키며 말했다.“그거까진 모르지, 난. 형네 집안일을 내가 세세히 알 수가 없네요. 그런데 최근에 형 할아버지가 기분이 좀 변화무쌍한 것 같긴 해요. 영국으로 사람을 보내 형 외가 쪽 5대 재단을 몰래 방문했다고 하고. 돌아온 뒤 형 아버지를 혼도 냈던 것 같아요.”구현수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할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항상 두말하지 않으시지만, 늘 생각도 깊고 의심도 많으신 분이라, 암만 최진혁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진혁이 옆에서 어르신 귀에 말을 자꾸 하면 분명 불리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유찬혁은 인상 쓰며 말했다.“그렇다면. 연준 형, 시간 내서 오성에 다녀오는 게 좋겠어요. 오해가 있으면 직접 할아버지와 풀어버리고 잘 설명해 드리는 게 좋지 않겠어요. 할아버지께서 화가 나셨다면 아마도 최 씨랑 임 씨 가문 간의 혼사 때문일 텐데...”배경원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했다.“에이, 됐네요. 그것 때문이면 차라리 강주에 가만히 있는 게 낫지. 가면 서연 씨 의심이나 샀지. 만에 하나 임나연이 여기 쫓아오면 난리지.”“흠흠!”유찬혁이 크게 기침을 해 보였다. 긁어 부스럼 만들기에는 배경원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어, 나도 생각이 다 있어.”구현수는 피곤한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잡았다. 유찬혁은 눈치 빠르게 배경원을 끌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혼자 침대에 누운 구현수는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고 몸에 상처가 이따금 아파졌다. 그는 비행기 사고를 떠올렸고 그때 죽을 줄 알았던 상황에 구사일생으로 운 좋게 목숨을 부지했고 완강하게 살아 돌아왔다.한 번 죽음을 마주했던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 의미가 더 깊기에 소중한 걸 더 잘 안다. 구현수도 예전에는 최상 후계자 타이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면, 지금은 최선을 다해보기로 결심했다. 제일 꼭대기에 서 있어야만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음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구현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고 눈앞에 강서연의 모
한순간 그녀는 주삿바늘을 잡고 구현수를 향해 찔렀고 다행히 구현수가 반응이 빨라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도 질세라 민첩한 동작으로 남은 손으로 그와 맞섰다.몇 차례 맞서서야 구현수에게 진압되었고 그는 쉽게 그녀의 두 손을 뒤로 묶어두고 몸을침대에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아! 아파! 이거 풀어 줘!”여자는 크게 소리쳤고 구현수는 그녀의 마스크를 벗겨냈다. 여자는 뽀로통한 모습으로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안 해, 안 해! 매번 어떻게 그렇게 한 치 양보도 없이 나를 대해!”구현수는 살짝 웃어 보이더니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여자는 얼른 일어나 그에게서멀찌감치 떨어져 섰고 억울함이 가득 찬 눈을 하고 붉어진 손목을 가볍게 문질렀다.구현수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여긴 왜 왔어?”“다쳤다고 하는데 내가 와 봐야지.”“이렇게 찾아오면 아버지랑 은 대표는 알아?”여자는 개구쟁이 모드로 익살스럽게 말했다.“필요 없거든. 오빠만 있으면 됐지. 최연희는 영원히 최연준을 따라다니는 찰거머리잖아. 잊었어?”구현수는 놀라듯 하더니 이내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졌다.최연희는 그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그때는 아버지의 재혼에 대해 다소 불만도 있었고, 또 수년간 계모에 대해서도 겉치레뿐인 예의를 지켜왔던 그였다. 최연희는 최씨 가문에서 그가 드물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안식처였다. 남매가 나이 차이는 꽤 나지만, 어렸을 때부터 최연희는 오빠를 많이 따랐고 좋아했다. 뭘 하든 오빠만 졸졸 따라다녔다. 엄마 아빠의 백 마디 말보다 오빠의 말 한마디를 더 따르던 동생이었다.가끔 그는 이 또한 특별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녀 이름 ‘연희’ 처럼 그녀는 그에게 행복을 끌어다줬다.최연희는 장난기 어린 눈을 깜박이며 놀렸다.“이보소. 구 씨. 구 씨로 오래 살다보니, 오빠의 진짜 성을 잊은 건 아니지?”구현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최연희는 메롱 하고 혀를 내밀고는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강주까지 온 건, 오
오히려 임우정이 의심의 눈초리로 유심히 보았고 볼수록 이상했다.“서연아, 저 간호사 의상을 봐. 왜 전에 간호사랑 다르지? 치마도 너무 짧아! 이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너의 남편 병실에서 나오는데, 이거 진짜 약 바꿔주러 온 거 맞아? 안 되겠다. 내가 따라가서 물어봐야겠어!”“우정 언니.”강서연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지경이었다.“약 바꿔주러 온 게 아니면, 뭐 더할 게 있겠어요. 오해면 어떡하려고요.”강서연은 평소에도 의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누가 구현수를 눈여겨 본다한들 구현수가 그들을 상대 안 해줄 게 뻔했다. 남편을 백 프로 신임하고 있었다.“너는 다 좋은데, 이런 쪽에 관해서는 사람이 너무 둔해!”임우정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최연희의 뒷모습을 다시 한번 보면서 간호사의 모습을 머릿속에 기억해 뒀다.두 사람은 병실에 들어갔다. 강서연은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구현수의 상황을 살폈다.“오늘 느낌 어때요? 아직도 아파요?”구현수는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괜찮아. 나 그렇게 약골 아니야. 신 의사도 이제 퇴원해도 된다 했고.”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요 며칠 사이, 퇴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오늘 물건을 좀 정리하려고 왔어요.”“그러니까. 출근도 하지 않고 나까지 끌고, 둘이 같이 무단결근했지, 뭐예요.”임우정은 문턱에 기대서 두 손을 가슴 앞에 팔장을 낀 채로 얼굴에서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어렸다.구현수는 강서연을 힐끔 바라보았고 강서연은 미안해하며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저 우정 언니를 짐꾼으로 같이 데려왔어요.”“서연이가 현수 씨 도와준다고, 내 차로 일부 물건을 정리해서 집으로 가져가기로 했네요.”임우정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불현듯 뭐가 생각난 듯 강서연을 향해 말했다.“서연아, 나 까먹고 립스틱을 차에 두고 온 것 같은데. 나 대신 갖다주면 안 돼? 내가 하이힐을 신어서 계단 오르내리기가 힘들어서.”임우정은 그녀에게 차키를 건넸다.“게다가 남편께서 벌써 짐 정
‘강서연은 어떻게 이런 남자와 매일 같이 사는 건지 적응력 한번 대단하다.’임우정이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차에 강서연이 손에 작은 꽃다발을 들고 돌아왔다. 강서연은 찬란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주차장 옆에 작은 꽃 가게가 있어서요. 병실에 생기 좀 있게 꽃을 놓아두려다가 바빠서 까먹었는데, 마침 있어서 꽃 좀 사봤어요.”그녀는 꽃병에 꽃을 꽂아 창 쪽에 놓아두었다. 그녀를 보는 구현수의 눈빛은 바로 부드러워졌고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자기 손 위에 올려놓았다.임우정은 애정 행각 가득한 이 자리에 꼽사리 끼고 싶지 않아서 바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강서연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고 맑고 두 눈으로 구현수를 지긋이 바라보며 슬며시 손을 뺐다.“당신 어제 못 씻었죠? 내가 닦아줄게요.”말하면서 그녀는 문을 나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물을 갖고 들어왔다. 며칠을 입원해 있는 사이 매번 그녀가 구현수의 몸을 씻겨주었다. 그녀는 수건을 적셔 그의 옷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의 상처는 처음보다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보기에 엄청 심해 보였다. 강서연은 심장을 졸이며 상처를 피해 열심히 그의 몸을 닦아 주면서 슬쩍슬쩍 그를 쳐다보고 바로 눈길을 거뒀다.그런 강서연을 구현수는 귀엽게 보고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아챘고,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를 장착했다. 같이 지낸 시간이 있어서 그런지 강서연은 곧바로 그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그녀는 조금 민망했고 얼굴은 타오르듯 붉게 물들었다. 얼른 손을 빼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구현수는 그녀를 잡아당겼고 그녀는 한 치 오차도 없이 그의 품 안에 안겼다.“장난치지 마요. 당신 아직 몸에 상처가 있어요.”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했고, 구현수의 거칠고 뜨거운 숨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이 정도 상처를 갖고 뭘.”강서연은 나무라듯 그를 쏘아보았다.“그래도 안 돼요. 다들 크게 다치면 백일은 몸조리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아요.”“그런데 말
“오 바로 그 신 의사님?”임우정은 빠르게 악수하고 있던 손을 뒤로 뺐다.“강서연과 구현수 씨를 중매해줬죠?”신석훈은 그녀 눈빛의 미세한 변화를 읽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이번 중매는 잘 섰다는 말로 알아듣고 본인이 좋은 인연을 잘 성사 시켰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는 흰 가운을 정리하며 자랑 섞인 말투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그게 바로 저입니다. 하, 제가 별로 한 게 없어요. 인연은 하늘이 정해준 것 아니겠어요. 저는 그냥...”“어머, 이런 걸 별로 한 게 없다고 하나 봐요? 신 의사님 정말 겸손하시네요!”임우정은 그의 말을 끊고 소리를 높여 말했다.신석훈은 그제야 임우정의 눈빛이 이상한 걸 눈치챘는지 눈썹을 찌푸렸다.“신 의사님, 의사잖아요! 사람을 구하는 게 의사의 천직인데, 그걸 아시는 분이 어찌 할 짓이 없어서 동네 아줌마같이 오지랖 중매를 서는 거예요? 아니! 그리고 중매를 서도 좀 좋은 사람을 소개해야죠!”임우정은 브레이크를 잡지 못하고 한마디 더 했다.“구현수 씨 조건에 우리 서연을 소개해 주면 어떡해요! 서연을 진흙탕에 빠뜨리고 해치는 거잖아요!”“이봐요...”신석훈은 생전 처음으로 눈앞에서 손찌검당했던 지라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정신이 좀 든 신석훈은 반격에 나섰다.“사실 이건 강 씨 집안과 구 씨 집안의 어르신들이 오래전에 정해놓은 혼사잖아요. 구씨 가문이 가세가 기울어서 그렇다지만, 사람이 신용은 지켜야 하지 않나요? 집안이 가난해졌다고 혼약을 없던 일로 할 수 없진 않잖아요?”임우정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허얼. 그 집이 가난하기만 해요? 어디. 전과까지 있는 사람이에요. 감방 갔다 온 사람이라고요! 청정 구역 서연이가 그런 집에 시집간 게 서연이의 행복을 위한 일일가요?”“그럼, 지금 서연 씨한테 물어보면 되겠네요. 지금 행복한지 안 한지?”임우정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신석훈은 입술을 앙다물며 얼굴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고 임우정의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