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나 말입니다! 강진이야 업계에서 손꼽히고, 우리같은 회사는 명함도 못 내밀죠. 저희는 강씨 그룹을 잘 따라다니면서 열심히 할게요. 그러면 떡고물이라도 떨어지겠죠.”강유빈은 그들을 바라보았다.“별말씀을, 과찬이에요. 사실 오기 전에 아버지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아무래도 가업을 물려받을 거라 이번 협력은 경영 수업이라고 생각 해주세요. 미숙한 부분은 여러 선배님께 많은 가르침 부탁드릴게요.”미팅실에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강서연은 타인의 의아한 눈빛을 느낄 수 있었고 그녀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강유빈이 이러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강진 그룹은 혼외자식인 강서연과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강진 그룹의 딸이라고는 하지만 한 푼도 건지지 못 하게 말이다.그렇다면, 앞으로 그녀가 이 회사에서 한자리하기는 힘들게 뻔했다. 사람들은 실세에 따르기 마련, 강씨 집안에서는 찬밥신세라는 걸 알게 되면 기본적인 대접받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강유빈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 강서연은 깊은숨을 내쉬었다.“언니가 못하는 게 뭐가 있겠어요. 어릴 적부터 똑똑한 데다 뭐든 했다 하면 열심히 하니까. 이번 일도 잘할 거라 믿어요.”“하하, 칭찬 고마워!”“사실을 말한 거예요. 언니는 충분히 강진 그룹을 이끌어갈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그때 기자회견에서 아버지가 한평생 회장직을 맡겠다고 호언장담 하셨는데, 약속을 지키시려나 몰라요.”강서연은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강 회장님도 이젠 자리를 물려주실 때가 되셨나 보네요. 언니를 정말로 아끼시는 것 같아요. 아니면 가업을 이어받으라는 말을 꺼내셨겠어요?”“야...”강유빈의 안색이 순간 바뀌었다.강명원이 권력에 목매는 탐욕스러운 사람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 강진은 쭉 독재 체제나 다름없었다.권력의 맛을 즐기는 강명원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또한 권력을 빼앗길 거라는 사실이었다.더군다나 강유빈이 대중 앞에서 ‘가업을 이어받겠다’ 는 얘기를 했으니 큰 금기를 범한 거나 다름없
마케팅팀의 총괄 담당자가 부하직원한테 눈치를 주었고, 강유빈은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강서연을 보며 말했다.“내가 알기로는 강 매니저가 차를 그렇게 잘 탄다던데, 차 한잔 얻어 마셔도 될까?”모두의 이목이 강서연에게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그 둘의 관계는 호전될 기미가 없어 보였다. 강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힐끗 강유빈을 쳐다보더니 탕비실로 나갔다. 이대휘만 안절부절못했고 마음이 심란해졌다. 배경원과 유찬혁을 내세워 두 회사를 병합시키려던 일만 생각하면 식은땀이 났다.그가 일어나 강서연을 말리려는 순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만약 그게 우연이 아니라면? 하필 두 회사가 합병하려던 차에 강서연한테 그런 일이 벌어진거라면?’어찌되었건 강서연의 신상은 아직 연막에 가려진 상태이고 반면 강유빈의 배후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대휘는 강서연 하나 때문에 귀한 강유빈한테 미움을 사는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다시 자리에 앉은 이대휘는 다른 이들과 다름없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서연은 찻잔을 들고 와 한 사람씩 차를 타 줬다. 그러자 은은한 녹차 향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그녀가 찻잔을 강유빈 앞에 놓았을 때였다. 강유빈은 무심코 힐끗 쳐다보면서 향을 맡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이건...”모두들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보았고 강유빈은 비웃으며 말했다.“차가 왜 이렇게 진해? 차를 우려내기 전에 한번 버려야지 않아? 강 매니저, 차를 내릴 줄 몰라? 처음 탄 물은 차를 씻어내기 위한 거라 버려야 한다고. 아니, 이런 사소한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어떻게 매니저 자리에 있어?”강유빈은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나니까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 앞이었으면 사람들 웃음거리나 되는 거라고. 고객 앞에서 강 매니저의 모든 행동은 회사 이미지를 대표하는 거 모르나? 앞으로 이런 실수는 명심해. 알겠어?”강서연은 계속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제가 회사 이미지를 대표한다는 건 알고 있죠. 그래서 회사 최고급 차를
잠시 침묵하던 강서연은 가볍게 강유빈의 팔을 잡아당겼다.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강유빈은 그녀의 눈빛에 움찔했다.평소에 강서연이 이렇게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나약한 그녀도 아니었다.강유빈은 입을 삐죽댔지만 더 이상 소리를 내진 않았다.‘부부는 닮아간다고 원래 순하던 강서연도 구현수랑 있다가 까칠한 분위기가 닮아간 걸까?’“뭐 하자는 건데?”“언니.”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하는 강서연의 눈동자는 한껏 엄숙해졌다.“내가 회사를 대표하는 것처럼, 언니도 강진 그룹과 아버지의 얼굴이라는 걸 잊지 마! 이렇게 무례하게 나오면 아버지 체면이 어디 가겠어!”강유빈은 그녀를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그 차가 내 옷에 뿌려졌다면, 회사에서 사람들은 안줏거리 삶아 얘기가 돌았을 것이고,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 수도 있었어. 인터넷에서 갑질하고 모욕하고 인신공격까지 한다고 메인에 걸리고 싶어서 그래? 언니, 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 같아?”강유빈은 얼굴이 붉어져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그걸 본 강서연은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팔을 놔주었다.“언니, 일하면서 언행에 신경 써야 해. 그래도 같은 강씨 집안 사람인데 언니한테 짐이 되고 싶진 않아.”강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 높여 말했다.“우롱차가 언니 입맛에 안 맞나 보네요. 제가 가서 차를 새로 준비할게요.”말을 마치고는 우아한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갔다.‘거참. 좋은 차가 입에 안 맞는다면 원하는 대로 찌꺼기를 주는 수밖에.’강서연은 차가울 정도로 담담한 눈빛과는 달리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 순간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한 가지...방금 내렸던 동방미인 차, 사실 그녀도 잘 모르는 거였는데 구현수가 집에 가져와 마시면서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줘서 들은 거였다. 차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던지라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었다. 게다가 총괄님의 말을 들어 보니 이렇게 비싼 차는 오성 최씨 가문에서 즐긴다고 했다. 이
“제인 호텔로 가자고.”구현수가 웃으며 말했다.어쩜 매번 외식할 때마다 제인 호텔이라니...강서연은 그가 다 호전된 기념으로 몸보신해 준다 생각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구현수와 제인 호텔로 향했다.제인 호텔을 드나드는 손님이 적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창가 쪽 자리는 전부 비어있었다. 직원은 그들이 들어오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현수 씨, 전에 우리가 앉았던 자리네요! 여기 서비스가 좋네요, 두 번 밖에 와보지 않았는데 우리가 앉던 자리를 알고 있었던 걸까요?”그러자 구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직원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눈짓했고 직원은 그를 알아보고 배경원과 친한 사이인 걸 알고서 주방에 알리러 갔다.잠시 후 음식이 올라왔고, 강서연은 맛에 감탄해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단맛을 좋아하는 그녀의 입에 맞춰지기라도 한 듯 달달하게 요리되었지만 느끼하지도 않아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큰 호텔은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 서비스도 정말 신기하고요! 요리사들이 모든 손님의 취향을 어떻게 다 알까요?”강서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기분이 조금 나아졌어?”“음?”어떻게 알았는지 강서연은 흠칫 놀라며 말했다. 강서연을 바라보는 구현수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꿀 떨어질 것 같았다.“기분... 훨씬 좋아졌어요.”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구현수는 반쯤 뜬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 달래기 너무 쉬운데?”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어쩌겠어요, 별수 있나요.”“힘든 일이 생긴다고 속에 담아두고 끙끙대면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럴 바엔 차라리 하루하루 행복하게 보내겠어요.”그녀가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이라 구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참돔구이 가시를 발라줬다.강서연은 먹으면서 오늘 일어난 일들을 모두 구현수에게 쏟아냈다.“아무래도 이런 상황이 앞으로 자주 일어날 것 같아요. 강유빈을 잘 알아서 말인데 어릴 적부터 제가 잘되는
구현수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자기 사업?”“그래요! 일하면서도 투자해도 되고 부업을 시작해도 되고. 할 수만 있다면 그것 또한 수입이 되는 거니까!”강서연은 열심히 계획했다.“작은 구멍가게나 하나 꾸려도 되고 그런 것도 사업이라면 사업이죠. 그럼 나 혼자 하니까 사장님이잖아요, 얼마나 좋아요.”“만약 투자금이 생기면 어떤 사업을 하고 싶어?”잠깐 생각하던 강서연은 얼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만약 돈이 생긴다면, 백화점 하나 사서 매일 손님들로 붐비게 할 텐데 말이죠. 하하,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요. 좀 현실적인 걸 말하자면, 돈 좀 마련해서 작은 커피숍 하나 운영하고 싶어요. 큰 창문이 달리고 아름다운 아이리스꽃으로 가득 찬 작은 마당이 있는 곳. 그리고 그곳에서 커피를 내리고 베이킹을 하며 방 안이 커피와 디저트 향기로 가득 차게 하고 싶어요!”“그게 다야?”“네!”구현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좋아. 그래. 알겠어.”금방이라도 꿈에서 깨어난 듯한 강서연은 먹먹해 있었다.구현수는 무심한 듯 말했지만, 담담한 그의 얼굴에서는 한껏 진지함이 묻어났다.강서연은 갑자기 떠올랐다. 그녀가 손지창과 방진영에게 괴롭힘당해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도 구현수는 초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처벌하고 싶냐고 물었었다.그녀는 홧김에 그들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란다고 대답했다. 그 덕분인지 회사에서 다시는 그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강서연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와 가슴이 두근거렸다.“왜 그래?”구현수는 수프를 담아 그녀 앞에 놓았다. 그런데 멍때리던 강서연의 손에 하마터면 수프가 엎어질 뻔했다.“음식이 따뜻할 때 얼른 먹어.”구현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심연처럼 깊고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넋이 나갈 것 같았다. 그녀는 황급히 수프를 그릇째 꿀꺽꿀꺽 들이켰다.저녁 식사를 마친 둘은 해변을 따라 산책했다.강서연은 작은 새 마냥 그의 옆에 기대여 조용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세계 갑부가 되길 바란다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강서연은 맑은 눈을 깜박이며 구현수를 올려다보았다.“평범한 사람이 좋지 않아요? 왜 평범하지 않은 걸 원하겠어요?”“아냐. 내 말은 남편인 내가 더 능력이 있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을까 싶어서지.”“지금의 생활도 아주 좋은데요!”강서연은 팔을 감싸안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화려한 부와 명예보다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쉽게 만족할 줄 아는 그녀였다.“사실 나는 부자들을 부러워하지 않아요.”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어릴 적부터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엄마의 비극을 직접 목격했고 부자들은 모두 차갑고 무정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화목한 가정에서 평생 그렇게 늙어가는 게 제일 큰 소원이에요.”구현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깊은 사색에 잠겼다.“만약...”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그러니까. 만약에 당신 남편이 아주 부자라면 어떻게 할 거야?”순간 멈칫하던 강서연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나는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아요.”구현수는 당황했다.“왜?”“그렇게 되면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질 것 같아요. 나랑 당신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아서 더 많은 갈등과 문제가 생기겠죠. 매일 싸울 바에는 차라리 헤어지겠어요.”구현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나랑 헤어지겠다고?”강서연은 웃으며 그의 옆에 기댔다.“왜 그렇게 긴장해요? 만약에라면서요. 현수 씨, 우리는 평범한 부부예요. 다른 생각 말고, ‘만약에’ 같은 비현실적인 얘기는 더더욱 말고, 하루하루 알뜰하게 돈 벌어서 아이도 낳고 흰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면 돼요. 알겠죠?”“그래, 좋아.”어렵게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희미한 불빛 아래 그의 어두운 안색을 그녀는 볼 수 없었기에 그의 마음 한구석의 허전함도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다. 구현수는 당황한 마음을 숨기려 그녀를 안았다.그와 그녀의
그는 가벼운 기침과 함께 화제를 돌렸다.“방금... 어디까지 얘기했지? 연희야, 오성에서 어떤 움직임이 보인다고?”최연희는 구현수를 쳐다보며 말했다.“최근에 둘째 삼촌이 진정을 못 하고 있어. 회사 이사진들과 자꾸 아버지의 꼬투리를 잡는데, 할아버지는 신경도 안 쓰고. 그리고 하는 말이 오빠는 영국에 있으니까 외할아버지 쪽만 챙기고 최상은 신경도 안 쓴다고...”“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형네 할아버지가 믿는다고!”배경원이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꾸했고, 구현수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한두 번 말해서야 믿지 않겠지만, 그런 거짓말이 몇백몇천 번 반복되면 진짜가 되는 법이잖아. 안 그래?”모두 쥐 죽은 듯 조용했다.“연준 오빠, 이곳에서 몸 조심해야 해야 돼. 작은삼촌뿐만 아니라 지한 오빠도 움직임이 보여. 들리는 소문에 지한 오빠가 위험한 인물들하고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 오빠를 해치려면 가장 클래식한 방식으로 나올 거야. 오빠는 다르잖아, 절대로 저 사람 뜻대로 되게 만들지 말아야지!”“응, 그 정도는 예상해.”최지한은 최진혁의 아들인 만큼 그 둘의 성향은 너무도 닮아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최문혁은 최씨 가문의 장자임에도 가업에는 관심이 없어서 할아버지인 회장님한테는 늘 눈엣가시였다. 또한 그는 재혼이라는 풍파를 일으키면서 더더욱 회장님의 눈 밖에 났다. 하여 최근 몇 해는 둘째 최진혁이 영감님 앞에서 한마디 하면 최문혁에게는 늘 한바탕 큰 피해가 닥쳤었다.매서운 눈매를 한 구현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두 부자가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자금세탁을 해온 사실을 알아냈어.”그는 눈이 더 매서워졌다.“일단 이 사실은 누구한테도 알리지 말고. 만약 저쪽에서 움직임이 보인다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숨은 패야!”최연희는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응. 알겠어.”“언제 오성에 돌아갈 생각이야?”“그건...”최연희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일찍 가서 뭐 해. 아직 새언니랑 인사도 못 했는데.”구현수의
전화를 끊은 구현수는 잠깐 마음을 가라앉힌 후 먼저 강서연에게 전화하여 괜찮은지 확인했다.휴대 전화 너머로 달리 방법이 없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여보, 오늘 저녁에 총괄 담당자 두 분이 기어코 바이어한테 식사 대접하겠다지 뭐예요... 어휴, 현수 씨도 알겠지만 지금 우리 회사 최대 바이어가 강유빈이잖아요. 난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 괜찮아.”구현수는 강유빈이 그에게 전화했었다는 사실을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약속 장소 어디야? 나한테 주소 보내. 이따가 데리러 갈게.”강서연이 배시시 웃더니 이내 그에게 주소를 보냈다.강유빈이 보낸 주소와 비교해 보니 다행히 같은 주소였다. 처음에는 강유빈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건 아닌지 의심했었지만 인제 보니 그를 속이진 않은 모양이다.그런데 왜 일부러 전화까지 하면서 구현수더러 식사 자리에 나오라고 한 걸까?구현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그 이유가 뭐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참석하는 게 좋겠다....식사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몇몇 남자들은 강유빈에게 서로 술을 권하며 발림소리를 해댔다.평소 이런 술자리를 싫어했던 강서연은 벌써 슬슬 피곤이 몰려왔다.쉴 새 없이 시간을 확인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1분 1초가 이상하리만큼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술자리는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영업팀과 마케팅팀의 두 총괄 담당자는 서로 끊임없이 옥신각신했다. 참다못한 그녀가 핑계를 대고 바람 쐬러 나가려던 그때 강유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다들 잠깐 술잔을 내려놓으시죠!”사람들은 일제히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주목했다.“이따가 한 미스터리한 손님이 오실 겁니다.”강유빈이 강서연을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서연아, 어쨌거나 우린 한 가족이야. 비록 네 남편이 별로이긴 하지만 이미 결혼한 이상 내 제부란 사실은 변함이 없어. 제부도 이런 자리를 많이 경험해 보면 좋잖아, 안 그래?”“뭐라고?”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