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팀의 총괄 담당자가 부하직원한테 눈치를 주었고, 강유빈은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강서연을 보며 말했다.“내가 알기로는 강 매니저가 차를 그렇게 잘 탄다던데, 차 한잔 얻어 마셔도 될까?”모두의 이목이 강서연에게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그 둘의 관계는 호전될 기미가 없어 보였다. 강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힐끗 강유빈을 쳐다보더니 탕비실로 나갔다. 이대휘만 안절부절못했고 마음이 심란해졌다. 배경원과 유찬혁을 내세워 두 회사를 병합시키려던 일만 생각하면 식은땀이 났다.그가 일어나 강서연을 말리려는 순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만약 그게 우연이 아니라면? 하필 두 회사가 합병하려던 차에 강서연한테 그런 일이 벌어진거라면?’어찌되었건 강서연의 신상은 아직 연막에 가려진 상태이고 반면 강유빈의 배후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대휘는 강서연 하나 때문에 귀한 강유빈한테 미움을 사는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다시 자리에 앉은 이대휘는 다른 이들과 다름없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서연은 찻잔을 들고 와 한 사람씩 차를 타 줬다. 그러자 은은한 녹차 향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그녀가 찻잔을 강유빈 앞에 놓았을 때였다. 강유빈은 무심코 힐끗 쳐다보면서 향을 맡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이건...”모두들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보았고 강유빈은 비웃으며 말했다.“차가 왜 이렇게 진해? 차를 우려내기 전에 한번 버려야지 않아? 강 매니저, 차를 내릴 줄 몰라? 처음 탄 물은 차를 씻어내기 위한 거라 버려야 한다고. 아니, 이런 사소한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어떻게 매니저 자리에 있어?”강유빈은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나니까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 앞이었으면 사람들 웃음거리나 되는 거라고. 고객 앞에서 강 매니저의 모든 행동은 회사 이미지를 대표하는 거 모르나? 앞으로 이런 실수는 명심해. 알겠어?”강서연은 계속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제가 회사 이미지를 대표한다는 건 알고 있죠. 그래서 회사 최고급 차를
잠시 침묵하던 강서연은 가볍게 강유빈의 팔을 잡아당겼다.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강유빈은 그녀의 눈빛에 움찔했다.평소에 강서연이 이렇게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나약한 그녀도 아니었다.강유빈은 입을 삐죽댔지만 더 이상 소리를 내진 않았다.‘부부는 닮아간다고 원래 순하던 강서연도 구현수랑 있다가 까칠한 분위기가 닮아간 걸까?’“뭐 하자는 건데?”“언니.”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하는 강서연의 눈동자는 한껏 엄숙해졌다.“내가 회사를 대표하는 것처럼, 언니도 강진 그룹과 아버지의 얼굴이라는 걸 잊지 마! 이렇게 무례하게 나오면 아버지 체면이 어디 가겠어!”강유빈은 그녀를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그 차가 내 옷에 뿌려졌다면, 회사에서 사람들은 안줏거리 삶아 얘기가 돌았을 것이고,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 수도 있었어. 인터넷에서 갑질하고 모욕하고 인신공격까지 한다고 메인에 걸리고 싶어서 그래? 언니, 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 같아?”강유빈은 얼굴이 붉어져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그걸 본 강서연은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팔을 놔주었다.“언니, 일하면서 언행에 신경 써야 해. 그래도 같은 강씨 집안 사람인데 언니한테 짐이 되고 싶진 않아.”강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 높여 말했다.“우롱차가 언니 입맛에 안 맞나 보네요. 제가 가서 차를 새로 준비할게요.”말을 마치고는 우아한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갔다.‘거참. 좋은 차가 입에 안 맞는다면 원하는 대로 찌꺼기를 주는 수밖에.’강서연은 차가울 정도로 담담한 눈빛과는 달리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 순간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한 가지...방금 내렸던 동방미인 차, 사실 그녀도 잘 모르는 거였는데 구현수가 집에 가져와 마시면서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줘서 들은 거였다. 차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던지라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었다. 게다가 총괄님의 말을 들어 보니 이렇게 비싼 차는 오성 최씨 가문에서 즐긴다고 했다. 이
“제인 호텔로 가자고.”구현수가 웃으며 말했다.어쩜 매번 외식할 때마다 제인 호텔이라니...강서연은 그가 다 호전된 기념으로 몸보신해 준다 생각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구현수와 제인 호텔로 향했다.제인 호텔을 드나드는 손님이 적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창가 쪽 자리는 전부 비어있었다. 직원은 그들이 들어오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현수 씨, 전에 우리가 앉았던 자리네요! 여기 서비스가 좋네요, 두 번 밖에 와보지 않았는데 우리가 앉던 자리를 알고 있었던 걸까요?”그러자 구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직원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눈짓했고 직원은 그를 알아보고 배경원과 친한 사이인 걸 알고서 주방에 알리러 갔다.잠시 후 음식이 올라왔고, 강서연은 맛에 감탄해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단맛을 좋아하는 그녀의 입에 맞춰지기라도 한 듯 달달하게 요리되었지만 느끼하지도 않아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큰 호텔은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 서비스도 정말 신기하고요! 요리사들이 모든 손님의 취향을 어떻게 다 알까요?”강서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기분이 조금 나아졌어?”“음?”어떻게 알았는지 강서연은 흠칫 놀라며 말했다. 강서연을 바라보는 구현수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꿀 떨어질 것 같았다.“기분... 훨씬 좋아졌어요.”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구현수는 반쯤 뜬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 달래기 너무 쉬운데?”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어쩌겠어요, 별수 있나요.”“힘든 일이 생긴다고 속에 담아두고 끙끙대면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럴 바엔 차라리 하루하루 행복하게 보내겠어요.”그녀가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이라 구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참돔구이 가시를 발라줬다.강서연은 먹으면서 오늘 일어난 일들을 모두 구현수에게 쏟아냈다.“아무래도 이런 상황이 앞으로 자주 일어날 것 같아요. 강유빈을 잘 알아서 말인데 어릴 적부터 제가 잘되는
구현수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자기 사업?”“그래요! 일하면서도 투자해도 되고 부업을 시작해도 되고. 할 수만 있다면 그것 또한 수입이 되는 거니까!”강서연은 열심히 계획했다.“작은 구멍가게나 하나 꾸려도 되고 그런 것도 사업이라면 사업이죠. 그럼 나 혼자 하니까 사장님이잖아요, 얼마나 좋아요.”“만약 투자금이 생기면 어떤 사업을 하고 싶어?”잠깐 생각하던 강서연은 얼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만약 돈이 생긴다면, 백화점 하나 사서 매일 손님들로 붐비게 할 텐데 말이죠. 하하,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요. 좀 현실적인 걸 말하자면, 돈 좀 마련해서 작은 커피숍 하나 운영하고 싶어요. 큰 창문이 달리고 아름다운 아이리스꽃으로 가득 찬 작은 마당이 있는 곳. 그리고 그곳에서 커피를 내리고 베이킹을 하며 방 안이 커피와 디저트 향기로 가득 차게 하고 싶어요!”“그게 다야?”“네!”구현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좋아. 그래. 알겠어.”금방이라도 꿈에서 깨어난 듯한 강서연은 먹먹해 있었다.구현수는 무심한 듯 말했지만, 담담한 그의 얼굴에서는 한껏 진지함이 묻어났다.강서연은 갑자기 떠올랐다. 그녀가 손지창과 방진영에게 괴롭힘당해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도 구현수는 초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처벌하고 싶냐고 물었었다.그녀는 홧김에 그들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란다고 대답했다. 그 덕분인지 회사에서 다시는 그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강서연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와 가슴이 두근거렸다.“왜 그래?”구현수는 수프를 담아 그녀 앞에 놓았다. 그런데 멍때리던 강서연의 손에 하마터면 수프가 엎어질 뻔했다.“음식이 따뜻할 때 얼른 먹어.”구현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심연처럼 깊고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넋이 나갈 것 같았다. 그녀는 황급히 수프를 그릇째 꿀꺽꿀꺽 들이켰다.저녁 식사를 마친 둘은 해변을 따라 산책했다.강서연은 작은 새 마냥 그의 옆에 기대여 조용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세계 갑부가 되길 바란다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강서연은 맑은 눈을 깜박이며 구현수를 올려다보았다.“평범한 사람이 좋지 않아요? 왜 평범하지 않은 걸 원하겠어요?”“아냐. 내 말은 남편인 내가 더 능력이 있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을까 싶어서지.”“지금의 생활도 아주 좋은데요!”강서연은 팔을 감싸안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화려한 부와 명예보다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쉽게 만족할 줄 아는 그녀였다.“사실 나는 부자들을 부러워하지 않아요.”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어릴 적부터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엄마의 비극을 직접 목격했고 부자들은 모두 차갑고 무정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화목한 가정에서 평생 그렇게 늙어가는 게 제일 큰 소원이에요.”구현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깊은 사색에 잠겼다.“만약...”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그러니까. 만약에 당신 남편이 아주 부자라면 어떻게 할 거야?”순간 멈칫하던 강서연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나는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아요.”구현수는 당황했다.“왜?”“그렇게 되면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질 것 같아요. 나랑 당신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아서 더 많은 갈등과 문제가 생기겠죠. 매일 싸울 바에는 차라리 헤어지겠어요.”구현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나랑 헤어지겠다고?”강서연은 웃으며 그의 옆에 기댔다.“왜 그렇게 긴장해요? 만약에라면서요. 현수 씨, 우리는 평범한 부부예요. 다른 생각 말고, ‘만약에’ 같은 비현실적인 얘기는 더더욱 말고, 하루하루 알뜰하게 돈 벌어서 아이도 낳고 흰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면 돼요. 알겠죠?”“그래, 좋아.”어렵게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희미한 불빛 아래 그의 어두운 안색을 그녀는 볼 수 없었기에 그의 마음 한구석의 허전함도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다. 구현수는 당황한 마음을 숨기려 그녀를 안았다.그와 그녀의
그는 가벼운 기침과 함께 화제를 돌렸다.“방금... 어디까지 얘기했지? 연희야, 오성에서 어떤 움직임이 보인다고?”최연희는 구현수를 쳐다보며 말했다.“최근에 둘째 삼촌이 진정을 못 하고 있어. 회사 이사진들과 자꾸 아버지의 꼬투리를 잡는데, 할아버지는 신경도 안 쓰고. 그리고 하는 말이 오빠는 영국에 있으니까 외할아버지 쪽만 챙기고 최상은 신경도 안 쓴다고...”“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형네 할아버지가 믿는다고!”배경원이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꾸했고, 구현수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한두 번 말해서야 믿지 않겠지만, 그런 거짓말이 몇백몇천 번 반복되면 진짜가 되는 법이잖아. 안 그래?”모두 쥐 죽은 듯 조용했다.“연준 오빠, 이곳에서 몸 조심해야 해야 돼. 작은삼촌뿐만 아니라 지한 오빠도 움직임이 보여. 들리는 소문에 지한 오빠가 위험한 인물들하고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 오빠를 해치려면 가장 클래식한 방식으로 나올 거야. 오빠는 다르잖아, 절대로 저 사람 뜻대로 되게 만들지 말아야지!”“응, 그 정도는 예상해.”최지한은 최진혁의 아들인 만큼 그 둘의 성향은 너무도 닮아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최문혁은 최씨 가문의 장자임에도 가업에는 관심이 없어서 할아버지인 회장님한테는 늘 눈엣가시였다. 또한 그는 재혼이라는 풍파를 일으키면서 더더욱 회장님의 눈 밖에 났다. 하여 최근 몇 해는 둘째 최진혁이 영감님 앞에서 한마디 하면 최문혁에게는 늘 한바탕 큰 피해가 닥쳤었다.매서운 눈매를 한 구현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두 부자가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자금세탁을 해온 사실을 알아냈어.”그는 눈이 더 매서워졌다.“일단 이 사실은 누구한테도 알리지 말고. 만약 저쪽에서 움직임이 보인다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숨은 패야!”최연희는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응. 알겠어.”“언제 오성에 돌아갈 생각이야?”“그건...”최연희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일찍 가서 뭐 해. 아직 새언니랑 인사도 못 했는데.”구현수의
전화를 끊은 구현수는 잠깐 마음을 가라앉힌 후 먼저 강서연에게 전화하여 괜찮은지 확인했다.휴대 전화 너머로 달리 방법이 없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여보, 오늘 저녁에 총괄 담당자 두 분이 기어코 바이어한테 식사 대접하겠다지 뭐예요... 어휴, 현수 씨도 알겠지만 지금 우리 회사 최대 바이어가 강유빈이잖아요. 난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 괜찮아.”구현수는 강유빈이 그에게 전화했었다는 사실을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약속 장소 어디야? 나한테 주소 보내. 이따가 데리러 갈게.”강서연이 배시시 웃더니 이내 그에게 주소를 보냈다.강유빈이 보낸 주소와 비교해 보니 다행히 같은 주소였다. 처음에는 강유빈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건 아닌지 의심했었지만 인제 보니 그를 속이진 않은 모양이다.그런데 왜 일부러 전화까지 하면서 구현수더러 식사 자리에 나오라고 한 걸까?구현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그 이유가 뭐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참석하는 게 좋겠다....식사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몇몇 남자들은 강유빈에게 서로 술을 권하며 발림소리를 해댔다.평소 이런 술자리를 싫어했던 강서연은 벌써 슬슬 피곤이 몰려왔다.쉴 새 없이 시간을 확인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1분 1초가 이상하리만큼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술자리는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영업팀과 마케팅팀의 두 총괄 담당자는 서로 끊임없이 옥신각신했다. 참다못한 그녀가 핑계를 대고 바람 쐬러 나가려던 그때 강유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다들 잠깐 술잔을 내려놓으시죠!”사람들은 일제히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주목했다.“이따가 한 미스터리한 손님이 오실 겁니다.”강유빈이 강서연을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서연아, 어쨌거나 우린 한 가족이야. 비록 네 남편이 별로이긴 하지만 이미 결혼한 이상 내 제부란 사실은 변함이 없어. 제부도 이런 자리를 많이 경험해 보면 좋잖아, 안 그래?”“뭐라고?”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맛 괜찮은데, 왜?”“입맛에 맞으면 많이 먹어. 먹고 말 좀 아껴!”“너...”강유빈이 두 눈을 부릅떴다.“내가 얼마를 먹든 내가 알아서 해! 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건데. 그리고 네 남편도 뭐라 하지 않는데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필요 있어?”“아이고, 유빈 씨, 진정해요.”장동민 총괄 담당자가 술잔을 들며 웃었다.“서연 씨가 좋은 뜻으로 많이 드시라고 한 거죠. 자, 이 잔 제가 비우겠습니다.”강유빈이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원샷했다.강서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테이블 밑으로 몰래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덤덤한 얼굴로 앉아있는 구현수를 본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자책했다.강유빈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구현수를 부른 게 틀림없다. 사실 구현수는 이 자리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오면 모욕이나 당할 게 뻔하니까... 게다가 이 식사 자리는 지난번 연회처럼 옆문으로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몇 명밖에 없어 대놓고 갈 수도 없었다.“현수 씨.”강서연이 속상한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정말 미안해요...”구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더니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을 집어주었다.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주식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동명 주식, 레이안, 웨스턴 등등...구현수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다들 주식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그의 매력적인 중저음이 사람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그에게 향했다.“현수 씨도 주식에 대해 알아요?”“하하, 알 리가 있겠어요?”강유빈은 대놓고 그를 무시했다.“우리가 얘기한 주식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을걸요?”“누가 그래!”강서연이 버럭 화를 내며 반박했다.“우리 남편 평소 금융에 관한 뉴스도 많이 보고 여러 나라 언어도 할 줄 알아! 그렇죠? 현수 씨?”구현수가 가볍게 웃었다.“방금 말씀하신 주식들이 그리 핫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
권온유의 질문에 정승우는 당황했다.권온유는 커다란 눈망울로 정승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던 슈퍼맨 같은 오빠가, 이제는 먹을 것 하나 구하지 못하는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다.정승우는 어색하게 입가를 씰룩이며 권온유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갔다.“너, 정말 배고파?”“네!”권온유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작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원래는 엄마랑 식당에서 밥을 먹으려 했어요. 엄마가 특별히 고등어조림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하셨거든요... 엉엉... 엉엉...”“울지 마, 울지 마! 그냥 생선 하나 가지고...”“나 배고파!”정승우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아이와 대화하는 건 그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겨우 권온유를 달래고 나서 정승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팔을 걷어붙이며 권온유에게 내밀었다.“너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배고프면, 여기 한번 물어볼래?”권온유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정승우를 바라보았다.“우리 집은 가난해서 늘 먹을 게 부족했거든. 그래서 어릴 때 너무 배가 고프면 이렇게 배고픔을 달랠 만한 걸 물곤 했어.”권온유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배고픔을 달랠 만한 것'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정승우는 웃으며 계속 설명했다.“예를 들어 쌀통 같은 거야. 한때 쌀이 들어 있던 쌀통은 비어 있어도 쌀 냄새가 남아 있거든. 그래서 쌀통 가장자리를 살짝 물면서 하얀 쌀밥을 먹는 상상하는 거야. 그러면 배가 덜 고파져.”“그리고 이웃집에서 밥하는 냄새를 맡으며 그 밥을 먹는 상상을 하는 거야. 그러면 그렇게 배고프지 않더라고.”권온유는 정승우의 이야기에 넋을 잃고 입을 벌린 채 있었다. 정승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한때 정대명이 도박과 술에 빠져 정승우를 굶겼던 시절은 그야말로 비참한 순간들이었다.잠시 후, 권온유의 눈에 다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정승우는 속으로 ‘큰일이다'라고 생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