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팀의 총괄 담당자가 부하직원한테 눈치를 주었고, 강유빈은 비웃음 가득한 눈으로 강서연을 보며 말했다.“내가 알기로는 강 매니저가 차를 그렇게 잘 탄다던데, 차 한잔 얻어 마셔도 될까?”모두의 이목이 강서연에게 집중되었다. 아무래도 그 둘의 관계는 호전될 기미가 없어 보였다. 강서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힐끗 강유빈을 쳐다보더니 탕비실로 나갔다. 이대휘만 안절부절못했고 마음이 심란해졌다. 배경원과 유찬혁을 내세워 두 회사를 병합시키려던 일만 생각하면 식은땀이 났다.그가 일어나 강서연을 말리려는 순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만약 그게 우연이 아니라면? 하필 두 회사가 합병하려던 차에 강서연한테 그런 일이 벌어진거라면?’어찌되었건 강서연의 신상은 아직 연막에 가려진 상태이고 반면 강유빈의 배후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대휘는 강서연 하나 때문에 귀한 강유빈한테 미움을 사는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다시 자리에 앉은 이대휘는 다른 이들과 다름없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서연은 찻잔을 들고 와 한 사람씩 차를 타 줬다. 그러자 은은한 녹차 향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그녀가 찻잔을 강유빈 앞에 놓았을 때였다. 강유빈은 무심코 힐끗 쳐다보면서 향을 맡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이건...”모두들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보았고 강유빈은 비웃으며 말했다.“차가 왜 이렇게 진해? 차를 우려내기 전에 한번 버려야지 않아? 강 매니저, 차를 내릴 줄 몰라? 처음 탄 물은 차를 씻어내기 위한 거라 버려야 한다고. 아니, 이런 사소한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어떻게 매니저 자리에 있어?”강유빈은 오만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나니까 망정이지, 다른 사람들 앞이었으면 사람들 웃음거리나 되는 거라고. 고객 앞에서 강 매니저의 모든 행동은 회사 이미지를 대표하는 거 모르나? 앞으로 이런 실수는 명심해. 알겠어?”강서연은 계속 차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제가 회사 이미지를 대표한다는 건 알고 있죠. 그래서 회사 최고급 차를
잠시 침묵하던 강서연은 가볍게 강유빈의 팔을 잡아당겼다.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강유빈은 그녀의 눈빛에 움찔했다.평소에 강서연이 이렇게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나약한 그녀도 아니었다.강유빈은 입을 삐죽댔지만 더 이상 소리를 내진 않았다.‘부부는 닮아간다고 원래 순하던 강서연도 구현수랑 있다가 까칠한 분위기가 닮아간 걸까?’“뭐 하자는 건데?”“언니.”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말하는 강서연의 눈동자는 한껏 엄숙해졌다.“내가 회사를 대표하는 것처럼, 언니도 강진 그룹과 아버지의 얼굴이라는 걸 잊지 마! 이렇게 무례하게 나오면 아버지 체면이 어디 가겠어!”강유빈은 그녀를 쳐다보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방금 그 차가 내 옷에 뿌려졌다면, 회사에서 사람들은 안줏거리 삶아 얘기가 돌았을 것이고,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 수도 있었어. 인터넷에서 갑질하고 모욕하고 인신공격까지 한다고 메인에 걸리고 싶어서 그래? 언니, 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버지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 같아?”강유빈은 얼굴이 붉어져 한마디도 못 하고 있었다. 그걸 본 강서연은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팔을 놔주었다.“언니, 일하면서 언행에 신경 써야 해. 그래도 같은 강씨 집안 사람인데 언니한테 짐이 되고 싶진 않아.”강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 높여 말했다.“우롱차가 언니 입맛에 안 맞나 보네요. 제가 가서 차를 새로 준비할게요.”말을 마치고는 우아한 걸음으로 회의실을 나갔다.‘거참. 좋은 차가 입에 안 맞는다면 원하는 대로 찌꺼기를 주는 수밖에.’강서연은 차가울 정도로 담담한 눈빛과는 달리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 순간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한 가지...방금 내렸던 동방미인 차, 사실 그녀도 잘 모르는 거였는데 구현수가 집에 가져와 마시면서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해줘서 들은 거였다. 차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던지라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었다. 게다가 총괄님의 말을 들어 보니 이렇게 비싼 차는 오성 최씨 가문에서 즐긴다고 했다. 이
“제인 호텔로 가자고.”구현수가 웃으며 말했다.어쩜 매번 외식할 때마다 제인 호텔이라니...강서연은 그가 다 호전된 기념으로 몸보신해 준다 생각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구현수와 제인 호텔로 향했다.제인 호텔을 드나드는 손님이 적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창가 쪽 자리는 전부 비어있었다. 직원은 그들이 들어오자 기다리기라도 한 듯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현수 씨, 전에 우리가 앉았던 자리네요! 여기 서비스가 좋네요, 두 번 밖에 와보지 않았는데 우리가 앉던 자리를 알고 있었던 걸까요?”그러자 구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직원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눈짓했고 직원은 그를 알아보고 배경원과 친한 사이인 걸 알고서 주방에 알리러 갔다.잠시 후 음식이 올라왔고, 강서연은 맛에 감탄해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단맛을 좋아하는 그녀의 입에 맞춰지기라도 한 듯 달달하게 요리되었지만 느끼하지도 않아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큰 호텔은 뭔가 달라도 다르네요! 서비스도 정말 신기하고요! 요리사들이 모든 손님의 취향을 어떻게 다 알까요?”강서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기분이 조금 나아졌어?”“음?”어떻게 알았는지 강서연은 흠칫 놀라며 말했다. 강서연을 바라보는 구현수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꿀 떨어질 것 같았다.“기분... 훨씬 좋아졌어요.”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구현수는 반쯤 뜬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그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 달래기 너무 쉬운데?”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어쩌겠어요, 별수 있나요.”“힘든 일이 생긴다고 속에 담아두고 끙끙대면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럴 바엔 차라리 하루하루 행복하게 보내겠어요.”그녀가 이렇게 긍정적인 성격이라 구현수는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참돔구이 가시를 발라줬다.강서연은 먹으면서 오늘 일어난 일들을 모두 구현수에게 쏟아냈다.“아무래도 이런 상황이 앞으로 자주 일어날 것 같아요. 강유빈을 잘 알아서 말인데 어릴 적부터 제가 잘되는
구현수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자기 사업?”“그래요! 일하면서도 투자해도 되고 부업을 시작해도 되고. 할 수만 있다면 그것 또한 수입이 되는 거니까!”강서연은 열심히 계획했다.“작은 구멍가게나 하나 꾸려도 되고 그런 것도 사업이라면 사업이죠. 그럼 나 혼자 하니까 사장님이잖아요, 얼마나 좋아요.”“만약 투자금이 생기면 어떤 사업을 하고 싶어?”잠깐 생각하던 강서연은 얼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만약 돈이 생긴다면, 백화점 하나 사서 매일 손님들로 붐비게 할 텐데 말이죠. 하하,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요. 좀 현실적인 걸 말하자면, 돈 좀 마련해서 작은 커피숍 하나 운영하고 싶어요. 큰 창문이 달리고 아름다운 아이리스꽃으로 가득 찬 작은 마당이 있는 곳. 그리고 그곳에서 커피를 내리고 베이킹을 하며 방 안이 커피와 디저트 향기로 가득 차게 하고 싶어요!”“그게 다야?”“네!”구현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좋아. 그래. 알겠어.”금방이라도 꿈에서 깨어난 듯한 강서연은 먹먹해 있었다.구현수는 무심한 듯 말했지만, 담담한 그의 얼굴에서는 한껏 진지함이 묻어났다.강서연은 갑자기 떠올랐다. 그녀가 손지창과 방진영에게 괴롭힘당해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도 구현수는 초능력이 있다면 어떻게 처벌하고 싶냐고 물었었다.그녀는 홧김에 그들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란다고 대답했다. 그 덕분인지 회사에서 다시는 그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강서연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와 가슴이 두근거렸다.“왜 그래?”구현수는 수프를 담아 그녀 앞에 놓았다. 그런데 멍때리던 강서연의 손에 하마터면 수프가 엎어질 뻔했다.“음식이 따뜻할 때 얼른 먹어.”구현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심연처럼 깊고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넋이 나갈 것 같았다. 그녀는 황급히 수프를 그릇째 꿀꺽꿀꺽 들이켰다.저녁 식사를 마친 둘은 해변을 따라 산책했다.강서연은 작은 새 마냥 그의 옆에 기대여 조용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남편이 세계 갑부가 되길 바란다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다.강서연은 맑은 눈을 깜박이며 구현수를 올려다보았다.“평범한 사람이 좋지 않아요? 왜 평범하지 않은 걸 원하겠어요?”“아냐. 내 말은 남편인 내가 더 능력이 있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을까 싶어서지.”“지금의 생활도 아주 좋은데요!”강서연은 팔을 감싸안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화려한 부와 명예보다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쉽게 만족할 줄 아는 그녀였다.“사실 나는 부자들을 부러워하지 않아요.”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어릴 적부터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엄마의 비극을 직접 목격했고 부자들은 모두 차갑고 무정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화목한 가정에서 평생 그렇게 늙어가는 게 제일 큰 소원이에요.”구현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깊은 사색에 잠겼다.“만약...”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그러니까. 만약에 당신 남편이 아주 부자라면 어떻게 할 거야?”순간 멈칫하던 강서연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나는 아마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아요.”구현수는 당황했다.“왜?”“그렇게 되면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질 것 같아요. 나랑 당신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살아서 더 많은 갈등과 문제가 생기겠죠. 매일 싸울 바에는 차라리 헤어지겠어요.”구현수의 낯빛이 어두워졌다.“나랑 헤어지겠다고?”강서연은 웃으며 그의 옆에 기댔다.“왜 그렇게 긴장해요? 만약에라면서요. 현수 씨, 우리는 평범한 부부예요. 다른 생각 말고, ‘만약에’ 같은 비현실적인 얘기는 더더욱 말고, 하루하루 알뜰하게 돈 벌어서 아이도 낳고 흰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면 돼요. 알겠죠?”“그래, 좋아.”어렵게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였다.희미한 불빛 아래 그의 어두운 안색을 그녀는 볼 수 없었기에 그의 마음 한구석의 허전함도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다. 구현수는 당황한 마음을 숨기려 그녀를 안았다.그와 그녀의
그는 가벼운 기침과 함께 화제를 돌렸다.“방금... 어디까지 얘기했지? 연희야, 오성에서 어떤 움직임이 보인다고?”최연희는 구현수를 쳐다보며 말했다.“최근에 둘째 삼촌이 진정을 못 하고 있어. 회사 이사진들과 자꾸 아버지의 꼬투리를 잡는데, 할아버지는 신경도 안 쓰고. 그리고 하는 말이 오빠는 영국에 있으니까 외할아버지 쪽만 챙기고 최상은 신경도 안 쓴다고...”“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형네 할아버지가 믿는다고!”배경원이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대꾸했고, 구현수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한두 번 말해서야 믿지 않겠지만, 그런 거짓말이 몇백몇천 번 반복되면 진짜가 되는 법이잖아. 안 그래?”모두 쥐 죽은 듯 조용했다.“연준 오빠, 이곳에서 몸 조심해야 해야 돼. 작은삼촌뿐만 아니라 지한 오빠도 움직임이 보여. 들리는 소문에 지한 오빠가 위험한 인물들하고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라 오빠를 해치려면 가장 클래식한 방식으로 나올 거야. 오빠는 다르잖아, 절대로 저 사람 뜻대로 되게 만들지 말아야지!”“응, 그 정도는 예상해.”최지한은 최진혁의 아들인 만큼 그 둘의 성향은 너무도 닮아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최문혁은 최씨 가문의 장자임에도 가업에는 관심이 없어서 할아버지인 회장님한테는 늘 눈엣가시였다. 또한 그는 재혼이라는 풍파를 일으키면서 더더욱 회장님의 눈 밖에 났다. 하여 최근 몇 해는 둘째 최진혁이 영감님 앞에서 한마디 하면 최문혁에게는 늘 한바탕 큰 피해가 닥쳤었다.매서운 눈매를 한 구현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두 부자가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자금세탁을 해온 사실을 알아냈어.”그는 눈이 더 매서워졌다.“일단 이 사실은 누구한테도 알리지 말고. 만약 저쪽에서 움직임이 보인다면 우리가 쓸 수 있는 숨은 패야!”최연희는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응. 알겠어.”“언제 오성에 돌아갈 생각이야?”“그건...”최연희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일찍 가서 뭐 해. 아직 새언니랑 인사도 못 했는데.”구현수의
전화를 끊은 구현수는 잠깐 마음을 가라앉힌 후 먼저 강서연에게 전화하여 괜찮은지 확인했다.휴대 전화 너머로 달리 방법이 없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여보, 오늘 저녁에 총괄 담당자 두 분이 기어코 바이어한테 식사 대접하겠다지 뭐예요... 어휴, 현수 씨도 알겠지만 지금 우리 회사 최대 바이어가 강유빈이잖아요. 난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것 같아요.”“알았어, 괜찮아.”구현수는 강유빈이 그에게 전화했었다는 사실을 아예 꺼내지도 않았다.“약속 장소 어디야? 나한테 주소 보내. 이따가 데리러 갈게.”강서연이 배시시 웃더니 이내 그에게 주소를 보냈다.강유빈이 보낸 주소와 비교해 보니 다행히 같은 주소였다. 처음에는 강유빈이 또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건 아닌지 의심했었지만 인제 보니 그를 속이진 않은 모양이다.그런데 왜 일부러 전화까지 하면서 구현수더러 식사 자리에 나오라고 한 걸까?구현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그 이유가 뭐든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참석하는 게 좋겠다....식사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몇몇 남자들은 강유빈에게 서로 술을 권하며 발림소리를 해댔다.평소 이런 술자리를 싫어했던 강서연은 벌써 슬슬 피곤이 몰려왔다.쉴 새 없이 시간을 확인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1분 1초가 이상하리만큼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술자리는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영업팀과 마케팅팀의 두 총괄 담당자는 서로 끊임없이 옥신각신했다. 참다못한 그녀가 핑계를 대고 바람 쐬러 나가려던 그때 강유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다들 잠깐 술잔을 내려놓으시죠!”사람들은 일제히 술잔을 내려놓고 그녀에게 주목했다.“이따가 한 미스터리한 손님이 오실 겁니다.”강유빈이 강서연을 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서연아, 어쨌거나 우린 한 가족이야. 비록 네 남편이 별로이긴 하지만 이미 결혼한 이상 내 제부란 사실은 변함이 없어. 제부도 이런 자리를 많이 경험해 보면 좋잖아, 안 그래?”“뭐라고?”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맛 괜찮은데, 왜?”“입맛에 맞으면 많이 먹어. 먹고 말 좀 아껴!”“너...”강유빈이 두 눈을 부릅떴다.“내가 얼마를 먹든 내가 알아서 해! 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건데. 그리고 네 남편도 뭐라 하지 않는데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굴 필요 있어?”“아이고, 유빈 씨, 진정해요.”장동민 총괄 담당자가 술잔을 들며 웃었다.“서연 씨가 좋은 뜻으로 많이 드시라고 한 거죠. 자, 이 잔 제가 비우겠습니다.”강유빈이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원샷했다.강서연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테이블 밑으로 몰래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덤덤한 얼굴로 앉아있는 구현수를 본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자책했다.강유빈은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구현수를 부른 게 틀림없다. 사실 구현수는 이 자리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 오면 모욕이나 당할 게 뻔하니까... 게다가 이 식사 자리는 지난번 연회처럼 옆문으로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몇 명밖에 없어 대놓고 갈 수도 없었다.“현수 씨.”강서연이 속상한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정말 미안해요...”구현수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더니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을 집어주었다.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주식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동명 주식, 레이안, 웨스턴 등등...구현수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다들 주식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그의 매력적인 중저음이 사람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거의 동시에 그에게 향했다.“현수 씨도 주식에 대해 알아요?”“하하, 알 리가 있겠어요?”강유빈은 대놓고 그를 무시했다.“우리가 얘기한 주식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을걸요?”“누가 그래!”강서연이 버럭 화를 내며 반박했다.“우리 남편 평소 금융에 관한 뉴스도 많이 보고 여러 나라 언어도 할 줄 알아! 그렇죠? 현수 씨?”구현수가 가볍게 웃었다.“방금 말씀하신 주식들이 그리 핫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백시연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지만, 권욱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이 카드가 제 거 아니면 누구 건데요?”“난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권욱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번졌다.“그냥 문득 우리 아내도 이런 비슷한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던 게 떠올랐을 뿐이야. 카드 색깔도 이런 파란색이었고 뒷면에는 대나무 무늬의 홀로그램이 새겨져 있었어. 조씨 가문은 학문을 중시하는 전통을 지닌 집안이라 대나무처럼 강인하고 꿋꿋한 식물을 특별히 아낀다고 하더군. 한번 뒤집어 확인해 볼래?”백시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창백해졌고 손은 카드 위에서 더욱 굳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백시연은 강소아를 찾아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약속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묘안석이 그렇게 비싼 줄 몰라서 서둘러 나오느라 준비가 부족해 지금은 이 카드밖에 없다고 둘러댔다.그러고는 억지로 친근한 미소를 띠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소아 언니, 우리 자매처럼 친한 사이잖아요. 언니 딸은 곧 제 딸이나 다름없죠! 가원이에게 쓰는 돈이라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강소아는 미소를 머금고 백시연의 손에서 카드를 슬쩍 가져가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정말? 고마워! 나중에 가원이가 크면 널 두 번째 어머니로 생각할 거야.”백시연의 얼굴 근육이 떨렸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인서야.”강소아는 다정한 눈빛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요즘 권욱의 공익 프로젝트를 도맡아 관리하고 있다면서? 잘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더라. 몇 번이나 넌 정말 유능한 관리형 인재라고 말했어.”“아... 그래요?”백시연은 속으로 긴장하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그럼!”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앞으로도 너한테 정말 잘해줄 생각이야.”그 말을 듣자 백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10억 원을 써서 강소아의 호의를 얻은 거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아 아가씨
연회장 한편에서 백시연은 마침내 잠시 자리를 빠져나갈 기회를 잡았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는 한적한 구석에 숨어 종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무언가 해답을 찾고 싶었다.긴 신호음 끝에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백시연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백시연은 알지 못했다. 종수가 이미 경찰차에 타고 있었고 간신히 경찰의 허락을 받아 전화를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아저씨! 정말 급해서 전화했어요.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종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나지막이 속삭였다.“시연아...”뭔가 말을 더하려던 종수는 경찰이 허리춤에 총구를 겨누는 바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됐어요, 됐다고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말을 끊었다.“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아까 소아 아가씨가 저한테 10억 원짜리 선물을 요구했는데, 그거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10억?”“네!”상황을 모르는 백시연은 초조한 듯 말을 더 이어갔다.“그 재수 없는 여자가 과거에 강소아와 무슨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강소아가 저를 보자마자 자기 딸이 말하기 시작했다면서 선물을 요구하더라고요. 뭐였더라... 묘안석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게 10억 원짜리래요!”종수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그건 강소아가 원하는 게 아니라 조순영을 대신해 요구한 것이라는 사실을.세상은 언제나 공평했다. 무엇을 얻었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같은 무게로 돌아오게 마련이었다.종수는 지친 듯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저씨? 종수 아저씨!”백시연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뭐라도 말 좀 해주세요! 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시연아, 이제 너도 어른이야. 이런 일은 네가 직접 판단해야 해.”“제가 알아서 할 수 있었으면, 아저씨께 묻겠어요?”백시연은 이마를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오늘의 종수는 어딘가 낯설고 이상했다.“솔직히... 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런 비싼 걸 고작 어린애한테 준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