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형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오늘은 아빠랑 같이 씻자, 앉지 말고, 서서!”“응? 그러면 안 돼요. 그럼...”강서연이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녀가 말릴 틈도 없이 최연준은 아들을 데리고 샤워실로 들어가 문을 철컥 잠가버렸다.강서연은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얼마 뒤 물소리가 들려왔다. 최군형이 칭얼댔지만 최연준은 엄격한 아버지의 방식으로 그를 위로했다.“사나이가 이 정도로 무서워하면 어떡해? 머리 감는 거잖아! 왜 우는 거야? 최군형! 다시 한번 울었다가는 우유 없을 줄 알아!”강서연은 문을 따지 못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최군형은 이내 적응한 듯 깔깔 웃어댔다.얼마 후...“악!”최연준의 비명에 강서연이 깜짝 놀랐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문을 두드렸다.“왜 그래요? 넘어졌어요?”그 말이 끝나자 욕실 문이 열리더니 최연준이 수건을 두르고 굳은 얼굴로 걸어 나왔다.“여보? 왜 그래요?”“괜찮아, 이 자식이 날 꼬집어!”“네? 어디를요?”최연준이 입을 꾹 다물고는 허리에 두른 수건을 꼭 잡고 있었다. 어디긴 어디야, 당연히...이때 최군형이 거품도 닦지 않은 채 흥분해 달려 나왔다.“응가, 응가! 가지고 놀래!”최연준이 최군형을 흘겨보고는 도망갔다. 강서연은 이제야 상황을 깨닫고는 웃으며 아들을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잘 씻기기나 하지, 왜 같이 씻겠다고 해서는!사실은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군형이 손힘이 센데, 다친 건 아니겠지?......늦은 밤, 황궁에는 온통 불이 켜져 있었다.옥이는 특제 복숭아 향 향초를 켰다. 가연은 이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송이수가 이를 좋아했기에 계속 켜두고 있었다.향이 온 궁전에 퍼졌다. 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마마, 이제 쉬시지요.”옥이가 천천히 말했다. 가연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맨체스터 시티의 일은 잘 해결된 거야?”“네, 그 둘을 찾아냈습니다. 서지현의 양부모더군요.”“어떻게
가연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뭔데?”옥이가 침을 삼켰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열여덟 살부터 가연을 모셨기에 그녀에 대한 감정이 깊었다. 하지만 가연에게 그녀는 중요한 사람이 아닌 듯싶었다.“제 아들 학교 말인데요...”“이미 해결해 줬잖아?”“마마, 그 학교는 꼴통 학교에요! 학생들은 패싸움하고, 선생들도 제대로 일하지 않고, 아무것도 배울 수 없어요!”“하지만 호적이 필요 없는 건 거기뿐이잖아. 옥아, 네 아들은 사생아야. 호적도 없는 애가 어떻게 공립학교를 다녀?”옥이가 멍해졌다. 그녀는 조용히 가연의 비웃음 어린 눈길을 쳐다보았다. 십여 년의 충성이 한낱 종이조각이 된 기분이었다.호적?왕후의 시녀가 제 아들의 호적도 만들지 못한다니,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가연이 입만 열면 해결될 문제였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하지만 가연은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가연에게 옥이는 딱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옥이는 맨체스터 시티에 있을 때 강서연에게 똑같이 말했었다.“제 아들은 사생아라서 호적에 없어요. 그래서 공립 학교를 못 다니는데, 사립 학교를 보내려니 학비가 너무 비싸네요.”“걱정 마요, 제가 해결해 줄게요.”강서연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저 해보는 말인 줄 알았는데, 사흘 뒤 남양 최고의 공립학교 교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멍하니 뭐 해?”가연의 질책에 옥이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숙여 붉어진 눈시울을 가렸다.“옥아, 만족하지 못하는 건 알겠지만, 이게 내 최선이야. 내가 왜 한낱 시녀 때문에 학교 교장에게 부탁해야 해? 심지어 사생아잖아. 치욕스러운 사생아 말이야!”“마마! 사생아가 뭐 어때서요? 사생아는 이 세상에 살아갈 자격도 없는 거예요? 교육받을 권리도 없는 건가요?”가연은 서지현만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흥분했다.“사생아는 방해만 되는 존재야. 됐어, 여기까지 하자. 경고하는데, 여기저기 내 이름 대고 다니지 마. 들켰다가는 너고 네 아들이고 모두 끝이야!
서지현은 진작 마음의 준비를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이 일을 떠벌린 거잖아요.”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래서 가연 왕후께서 저더러 법정에 출석하라고 했죠, 전하를 해친 사람이 윤정재 회장님인 걸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죠.”송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하지만 왕후의 바람대로 할 생각은 없어요. 법정에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지현 씨도 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송혁준은 멈칫하다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어갔다.“재판 과정이 복잡할 테니 단단히 마음 준비를 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죠.”“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고요?”서지현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떴다.송혁준은 더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서지현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드러났다.서지현은 그와 함께 자랐어야 하는, 무척 사랑스럽고 귀여운... 동생이었을 텐데 말이다.“전하.”서지현이 더 물었다.“무슨 일이 발생하는데요?”송혁준은 옆에 있던 나석진을 바라봤다.그는 오늘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두 사람 모두 이 일을 어떻게 서지현에게 말해야 할지 망설여졌다.윤정재는 진작 서지현의 혈통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걸 확인했으니 그는 기회를 빌려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대중에게 알리길 바랐다. 그래야 가연 왕후든 송지아든 더는 서지현에게 손을 쓰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기회는 바로 이 사실을 재판할 때 알리는 거였다.“아, 아니에요.”송혁준은 팔꿈치로 나석진을 툭툭 치며 말했다.“무슨 말이라도 해봐. 오늘 밤도 네가 꼭 와야 한다고 해서 온 거잖아.”나석진이 고개를 들었다.서지현과 눈을 마주쳤을 때, 그의 마음은 복잡미묘했다. 그리고 머릿속에는 그녀와의 추억들이 떠올랐다.맨체스터 시티 슬럼가에서의 첫 만남, 병원에서 생겼던 오해, 호텔에서 함께 지냈던 시간들, 그리고 스테이지 위에서 그녀와 같은 꽃차에
“서지현.”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지난번에 내가 술에 취했을 때 네가 내 손에 반지를 끼워줬잖아. 그때 반지 사이즈도 딱 맞는 것 같았어. 나, 나 그렇게 잘 맞은 반지를 낀 적이 없었던 것 같아.”“네?”서지현은 이 상황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나중에 네가 다시 가져갔잖아. 내 손가락이 텅텅 빈 것 같아 너무 괴로워!”“...”“서지현, 넌 내가 괴로운 게 좋아?”서지현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나석진이 이렇게까지 조바심이 난 모습은 처음 봤다.그는 조급해 보였으나 또 그녀에게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유달리 인내심이 있었고, 말투는 상냥함을 넘어서 비굴하기까지 했다.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서지현은 문득 누군가에게서 들은 남양의 주술을 떠올렸다. 그 주술은 사람의 성격을 바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한다.심장이 쿵 내려앉은 그녀는 바로 나석진에게 물었다.“아저씨, 혹시 주술에 걸렸어요?”...송혁준은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서궁은 원래도 외딴곳이었지만 정원 안은 더욱 조용해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그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이 평온한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하지만 이때, 반대편에서 흥분한 듯한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서지현의 목소리, 나석진의 목소리.그러다가 서지현과 나석진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오기도 했다.‘뭐야? 두 사람 데이트하는 거 아니었어? 왜 싸우고 있어?’다시 돌아가려고 고개를 들자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면서 핑크색 가발을 쓰고 있는 나석진의 모습을 발견했다.그리고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반짝이는 뭔가가 하나 더 생겨 송혁준은 흠칫했다.‘끝내 반지를 뺏어온 거야?’“서지현, 감히 나에게 반지를 안 주려고 해? 흥, 이제 내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잘 알겠지?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정말 만만한 사람인 줄 아나 봐!”송혁준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석진을 보며 미처 반응을 하지 못했다.이때, 반대편에서
한 달 뒤, 재판이 열리는 날.황실 멤버가 연루된 만큼 이번 재판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윤정재는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지만 마치 재판을 이끌어가는 사람인 것처럼 차분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송이수와 가연 왕후는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검찰이 제기한 몇 가지 혐의를 듣자 가연 왕후의 얼굴에는 미소가 씩 스쳐 지나갔다.한편, 그녀 옆의 송이수는 무표정인 얼굴로 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쥔 그의 눈동자 속에는 분노가 감돌아 있었다.“폐하...”가연 왕후가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송이수의 손끝은 살짝 떨렸지만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이는 가연 왕후의 놀라움을 자아냈다.그동안 송임월 때문에 송이수는 그녀와의 신체적 스킨십을 피했었고, 심지어 부부 생활조차 점점 줄어들었다. 매번 그녀의 몸에 손이 닿을 때 송이수는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진 듯 미간을 잔뜩 구겼고 최근 몇 년 동안 두 사람은 아예 각방을 썼다.그래서인지 방금 송이수의 행동은 가연 왕후를 기쁘게 했다. 무심코 한 행동이었지만 가연 왕후에게는 의미가 남달랐다.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머리를 송이수 어깨에 기대려고 했다.송이수는 여전히 피하지 않았다.그런 그의 모습에 가연 왕후는 눈시울이 빨개졌고, 윤정재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 굳혔다.윤정재를 제거하면 다시는 송임월을 깨어나게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송임월이 영원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아무도 서지현의 정체를 알 수 없을 것이다.이런 걸림돌들을 모두 제거하면 송이수는 온전히 그녀의 것으로만 된다.“윤정재 씨.”검사가 엄숙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이 혐의들, 다 인정합니까?”윤정재가 코웃음을 쳤다.“재판에서는 반드시 증거에 의해서만 사실인정을 허용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아무 증거도 없이 혐의를 인정하라고 하니, 그 속셈이 뭐죠? 우리 남양의 법원이 우스워 보입니까?”검사는 그를 힐끔 보다가 판사에게 증인 소환을 요청
가연 왕후의 입술은 부르르 떨렸다. 송이수와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양심에 찔려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아, 아니에요.”가연 왕후는 겨우 미소를 짜내며 말을 이어갔다.“폐하, 재판 시간이 길어져서 힘드시죠? 먼저 휴식을 취하시는 게 어떻겠어요?”“사실을 꼭 들어야겠어!”송이수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도대체 누구를 찾으려고 했던 거야?”가연 왕후는 제자리에 얼어붙더니 곧이어 시선을 옥이에게도 돌렸다.“이게 어떻게 된 거야?”그녀는 어금니를 깨물며 물었다.“옥이야, 지금... 도대체 뭐 하려는 거야?”“왕후 마마.”옥이가 덤덤한 얼굴을 유지했다.“마마께서 주신 단서로 이 두 사람을 찾았을 뿐입니다.”“너...”옥이가 교활한 미소를 씩 지었다.“마마께서 그러셨잖습니까.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마약하고, 다른 한 사람은 몸을 판다고요. 제가 찾은 두 사람은 마마께서 주신 단서와 딱 맞아떨어집니다.”“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마!”가연 왕후는 분노의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분명 내가 알려준 다른 단서도 있었잖아!”“그때 마마께서 직접 친왕 전하를 저 두 사람에게 보내셨잖습니까. 제 말이 틀렸습니까?”“옥이야!”가연 왕후는 가슴이 벌렁벌렁 뛰더니 이내 온몸의 피가 굳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옥이야, 뭐라고 한 것이야?”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송이수는 충격이 가시지 않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얼마 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가연 왕후를 바라봤는데 가슴은 비수에 꽂히듯 아프기 시작했다.“옥이야, 네 말이 다 사실이야?”그는 숨을 몰아쉬더니 한참 가연 왕후를 주시하다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그때 나에게 아이를 변호사 집안에 맡겨 잘 살 거라고 거짓말했잖아! 그리고 또 말을 바꿨었지. 아이가 슬럼가에 있지만 집시 부부에게 입양되었다고 말이야! 당신, 나를 또 속였어! 나를 또 속였다고! 아이를 어떻게 이런 두 사람에게 맡길 수 있어? 입이 있으면 어디 한번 말해보라고!”송이수가 확 밀어내
“너는 숙이와 함께 가서 저 두 사람을 찾아내고 남양으로 데려와... 그리고 이 증언을 외우게 해. 그러면 윤정재는 황실 멤버를 살해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친 죄로 감옥에 들어갈 거야. 서지현의 부모도 그 공범으로 될 거고.”“마마, 정말 저 두 사람이 우리의 말에 따라 움직이겠습니까?”“그 남자는 약쟁이야. 융대 가루를 조금 쥐여주면 쉽게 해결할 수 있어. 그 여자에게는 먼저 돈을 줘봐. 돈만 주면 무조건 우리의 말에 따를 거라고!”...법정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가연은 눈을 부릅뜨더니 얼굴색은 핏기 없이 새하얘졌다.“융대 가루?”어떤 외국 기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뭔데요?”“융대 가루는 마약이에요!”윤정재가 힘 있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남양의 융대는 대나무가 아니라 꽃의 일종으로 양귀비와 비슷합니다. 열 송이 융대로 1mg의 융대 가루를 추출할 수 있죠. 융대 가루의 독성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일정량을 흡입하면 단기간 내에 바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왕후 마마.”윤정재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남양에서는 융대 가루의 거래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적발된 즉시 엄중한 처벌이 내려지는데 설마 그 사실을 몰랐던 건 아니겠죠?”판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양옆의 배심원과 눈을 마주쳤다.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으니 말이다.두 증인의 정체를 밝혀내지도 못했는데, 또 가연 왕후의 융대 가루 은닉 사건이 발생하다니!만약 이게 사실로 밝혀진다면 가연 왕후는 엄청난 형량을 선고받을 것이다.“옥이야...”가연 왕후는 이마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숨을 크게 몰아쉬어 그런지 말도 힘겹게 뱉어냈다.“네가, 네가 감히 나를 배신해?”“마마, 이건 배신이 아닙니다.”옥이가 평온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마마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기억력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예전에 마마께서 분부하신 일마다 혹시나 세부 사항을 빠뜨릴까 봐 녹음해서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하곤 했
가연의 코끝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손발에 힘이 탁 풀려 쓰러지지 않으려고 방청석 난간에 겨우 기대고 있었다.그리고 손을 들어 머리 위로 삐뚤어진 왕관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실수로 머리카락이 걸리고 말았다.왕관이 ‘쿵’ 소리와 함께 떨어지면서 커다란 보석이 굴러 나왔다.“왕후...”송이수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왜 그랬어?”“폐하, 저는...”“도대체 왜?”인내심을 잃은 송이수는 그녀의 목을 확 졸랐다!가연은 눈을 부릅떴다.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그녀는 온몸이 경직되고, 심지어 숨 쉬는 것조차 멈추게 되는 것 같았다.송혁준은 송이수를 말리며 낮은 목소리로 타일렀다.“숙부님, 이곳은 법정입니다. 절대 충동하시면 안 됩니다!”송이수는 그제야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하지만 분노로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위아래 이까지 덜덜 떨렸다.“폐하.”윤정재가 천천히 말했다.“왕후 마마께서 이러시는 이유는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말을 마친 후 그는 DNA 검사 결과를 내밀었다.“왕후 마마께서는 이걸 두려워하고 계시지요?”고개를 들어 검사 결과를 확인한 가연 왕후는 동공이 흔들렸다.그 위에 적힌 ‘99%’라는 숫자는 그야말로 돌풍 같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마치 돌풍처럼 재판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말을 이어나갈 수 없게 했다.서지현도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99%라니? 그녀와 송임월의 유전자가 99% 일치하다니?이럴 수가!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서지현은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이내 슬럼가에서 생활했던 그 18년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불법 체류자의 딸이고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쥐새끼만도 못한 사람이었다.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하는 그녀는 습하고 음산한 지하실에서 살아왔다.그녀는 집시들과 함께 광장에서 춤을 추며 용돈을 벌면서 매일 어떻게 배를 채울지, 어떻게 경찰을 피할지만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그녀가 송임월의 딸이라는 DNA 검사 결과를 보여주다니?서지현은 철썩 바닥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