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연의 코끝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손발에 힘이 탁 풀려 쓰러지지 않으려고 방청석 난간에 겨우 기대고 있었다.그리고 손을 들어 머리 위로 삐뚤어진 왕관을 바로잡으려 했지만 실수로 머리카락이 걸리고 말았다.왕관이 ‘쿵’ 소리와 함께 떨어지면서 커다란 보석이 굴러 나왔다.“왕후...”송이수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왜 그랬어?”“폐하, 저는...”“도대체 왜?”인내심을 잃은 송이수는 그녀의 목을 확 졸랐다!가연은 눈을 부릅떴다.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그녀는 온몸이 경직되고, 심지어 숨 쉬는 것조차 멈추게 되는 것 같았다.송혁준은 송이수를 말리며 낮은 목소리로 타일렀다.“숙부님, 이곳은 법정입니다. 절대 충동하시면 안 됩니다!”송이수는 그제야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하지만 분노로 그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위아래 이까지 덜덜 떨렸다.“폐하.”윤정재가 천천히 말했다.“왕후 마마께서 이러시는 이유는 딱 한 가지가 있습니다...”말을 마친 후 그는 DNA 검사 결과를 내밀었다.“왕후 마마께서는 이걸 두려워하고 계시지요?”고개를 들어 검사 결과를 확인한 가연 왕후는 동공이 흔들렸다.그 위에 적힌 ‘99%’라는 숫자는 그야말로 돌풍 같은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마치 돌풍처럼 재판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말을 이어나갈 수 없게 했다.서지현도 꿈을 꾸는 것처럼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99%라니? 그녀와 송임월의 유전자가 99% 일치하다니?이럴 수가!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서지현은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이내 슬럼가에서 생활했던 그 18년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불법 체류자의 딸이고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는 쥐새끼만도 못한 사람이었다.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하는 그녀는 습하고 음산한 지하실에서 살아왔다.그녀는 집시들과 함께 광장에서 춤을 추며 용돈을 벌면서 매일 어떻게 배를 채울지, 어떻게 경찰을 피할지만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그녀가 송임월의 딸이라는 DNA 검사 결과를 보여주다니?서지현은 철썩 바닥
서릿발에 걸친 달은 위엄 있는 황궁에 한기를 드리웠다. 청석판 계단에는 이슬이 맺혀 사람들에게 한 줄기 서늘함을 안겨줬다.궁전 중앙에 서 있던 가연 왕후는 눈꺼풀이 축 처졌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그녀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사람은 송이수뿐이었다.송이수가 더는 그녀를 믿지 않고, 오히려 그녀를 미워하고 증오한다면 그녀의 세상은 더 이상 빛나지 않을 것이다.“폐하.”가연 왕후는 한참의 침묵을 지키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배고프시죠? 제가 만든 약과를 좋아하시던 걸 기억합니다. 지금 바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그럴 필요 없어.”송이수가 잠긴 목소리로 말하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아마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달고 느끼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 내가 약과를 좋아한다고 계속 착각했던 건 당신이야!”가연 왕후의 눈빛은 어두워지더니 그녀는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자신을 바라보는 송이수의 날카로운 눈빛에 가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당신은 항상 당신의 취향대로 나의 모든 것에 관여했지. 나를 사랑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이수 씨...”“나도 인정해. 그때 왕위에 마음이 혹한 걸.”송이수는 후회막심했다.“임월이가 잘못을 저질렀으면 오빠로서 도와줬어야 했는데 내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동생을 해쳤어.”“당신.”송이수는 그녀에게 점점 다가가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풍겼다.“난... 당신이 그 아이에게라도 잘해줄 줄 알았어. 당신이 정말 그 아이를 변호사 부부에게 맡겼다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그 아이뿐만 아니라 내 동생에게도 손을 대다니!”가연 왕후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였다.그녀는 문득 송이수와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렸다.열네 살의 나이에 옷을 차려입고 대황궁에 국경일 행사에 참석했는데, 한눈에 바로 중앙에 서 있는 왕자를 발견했다. 그는 마치 태양처럼 눈 부셨다.첫눈에 반하게 된 송이수는 그렇게 평생 그녀
송이수는 눈만 끔뻑끔뻑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가연 왕후가 바닥에 쓰러진 순간, 그의 마음은 잠깐이나마 뒤틀렸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물결처럼 번져 나가다가 결국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송이수는 감정이 없는 냉혈한이 아니었기에 그녀와 함께한 세월 때문에 그래도 정이 남아있었다.초라한 모습의 가연 왕후를 보며 송이수는 자신에게 잘해줬던 그녀의 과거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일단 의사를 불러와 왕후에게 붕대를 감아주라고 하세요.”나도훈은 잠시 멈칫하더니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가연 왕후는 치료를 받아 머리의 피가 멈추었다. 그녀는 침전에 누워 휴식을 취했지만 침전 주위에는 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어 그녀는 더 이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나도훈은 송이수를 바라봤다.늙은 왕의 얼굴엔 피로한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눈에는 광채 대신 괴로움과 자책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폐하.”나도훈이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왕후 마마의 건강이 좋아지면 검찰에서 마마를 데려갈 겁니다. 이 사건에 대한 많은 세부 사항은 아직 심사가 필요하기 때문에...”“몇 년을 선고받게 될까요?”나도훈은 흠칫하더니 솔직하게 대답했다.“30년이 최선의 결과입니다.”송이수는 눈을 감은 채 숨을 깊게 내쉬었다.“최악의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무기형을 선고받을 겁니다.”송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벌로도 모자라죠.”“네?”나도훈은 조금 의외였다.송이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 사람은 내 여동생과 조카를 해쳤어요. 나를 거의 20년 동안 감쪽같이 속였다고요! 왕후는 임월이의 평생을 망쳤어요.”“방금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는 걸 나도 인정해요. 어쨌든 오랜 부부 사이였으니 조금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겠죠.”“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왕후를 방관하고, 심지어 용서까지 한다면 그건 내 부모님, 그리고 송씨 집안에게 못 할 짓이에요. 더구나 내 여
깊은 밤, 만물이 침묵 속에 잠들었을 때.서궁에는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송이수는 아무도 곁에 두지 않고 혼자 내전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송임월의 침대 앞에 도착한 그는 손으로 건조한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서지현도 똑같은 색깔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목이 메이기 시작했다.시간이 참으로 빠르지, 그때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던 그 남매가 벌써 중년이 되고 모든 것이 변해버렸으니.깊게 잠든 송임월은 꿈속에서라도 그 작은 베개를 끌어안고 있었다.송이수가 움직여 보았지만 송임월이 워낙 꽉 끌어안고 있어 전혀 꺼낼 수가 없었다.그는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알아, 내가 왕위를 지현이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하지?”송이수의 눈에는 다시 빛이 반짝였고 그의 표정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그는 송임월 침대 앞에서 혼잣말을 이어갔다.“난 정말 지현이가 네 딸이자 내 조카일 줄 몰랐어. 내 왕위는 너에게서 뺏어온 것이니 지금 너에게 돌려주는 것도 마땅하지만...”“하지만 임월아, 너도 알다시피 한 나라의 군주는 절대 가벼운 자리가 아니야. 남양의 군주는 실권이 없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거든. 그래서 복잡한 국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해.”“혁준이는 어려서부터 내 옆에서 자랐으니 내가 손수 가르쳐준 것도 많아. 그리고 혁준이가 매번 잘 해냈거든. 하지만 지현이는... 슬럼가에서 살면서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지. 심지어 남양에 처음 왔을 때는 자신의 이름도 쓸 줄 몰랐다고. 그런 지현이에게 군주의 자리를 넘겨줄 수는 없어.”송임월은 움찔하더니 몸을 돌려 송이수를 등졌다.어렸을 때 오빠와 사이가 틀어졌을 때도 송임월은 이렇게 그에게 등졌었다. 그럴 때마다 송이수는 한참을 달랬어야 했고, 결국 인형까지 하나를 선물해 줘야 송임월은 제대로 화가 풀리곤 했었다.송이수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지금 그가 아무리 많은 인형을 선물한다고 해도 송임월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
최연준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송혁준은 담담하게 웃더니 나지막이 말했다.“사실... 연준 씨도 진작 알고 있었겠죠? 서연 씨가 워낙 똑똑하니 이 일에 대해 얘기했었겠죠.”“연준 씨.”송혁준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얘기는 여기까지예요. 앞으로 다시는 꺼내지 않을 겁니다.”“만약 제가 즉위하고 다시 만나게 되면 우리는 군주와 서민의 관계로 변하겠죠. 그때면... 규칙대로 움직입시다!”송혁준은 웃으며 그와 악수하려 했지만 최연준은 망설이며 그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송혁준의 손은 허공에 떠 있었다. 조금 무안하긴 했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었다.“괜찮아요.”송혁준이 손을 내려놨다.“하고 싶은 얘기는 다 해서 여한이 없네요. 연준 씨가 이렇게 잘 사는 것을 보니 정말 진심으로 기뻐요. 서연 씨를 소중히 여기세요, 아주 좋은 여자니까.”“저도 알고 있어요.”최연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아드님은 앞으로 남양에서도 매우 존귀한 존재가 될 겁니다.”“전하...”“제가 지켜드릴게요.”송혁준이 나지막이 말했다.“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서연 씨와 아드님을 지킬 겁니다.”최연준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아무 생각도 없이 송혁준을 도와줬던 것뿐인데 그가 마음속에 이렇게 오래 기억할 줄은 몰랐다.“전하, 마음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최연준이 정색하며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제 아들은 오성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겁니다.”“이렇게 거절할 필요는 없는데.”송혁준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거절이 아니라...”최연준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말이 나온 김에 전하께 제 속마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전하를 도운 건 저에게는 누워서 떡 먹기이니 이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그놈들이 잘난 척하며 사람 괴롭히는 것도 정말 못 봐주겠더군요.”“알아요, 다 알고 있어요.”송혁준이 말을 가로챘다.“하지만... 다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제 잘못이죠.”“연준 씨, 저는 어려서부터 남들과 달
송혁준은 머리가 하얘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앞에는 웃는 얼굴의 최연준이 보였다.방금의 포옹은 우정의 상징이었으나 그에게는 평생 기억할 만큼 좋은 기억이 될 것이다.송혁준이 크게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몇 미터 걸어 나가다 다시 뒤돌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최연준은 그곳에 잠깐 서있다가 찬바람이 불어오자 심호흡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실내로 들어갔다. 아내를 품에 안고 그녀의 내음을 느끼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언뜻 비친 검은 그림자가 카메라 렌즈를 서서히 내렸다.......최연준이 집으로 들어오자 그를 맞이한 건 강서연의 모습이 아닌 부엌에서 풍겨오는 향기였다. 그는 씩 웃으며 걸어들어가 바삐 돌아치는 이 작은 여인을 꼭 끌어안았다.“아!”강서연은 깜짝 놀라 그녀의 허리께에 감싸진 두 팔을 팡팡 쳐댔다.“기척 좀 내고 다녀요!”“여보.”“왜요?”“여보.”“왜 그래요?”“여보!”“미쳤어요?”강서연이 인상을 쓰며 손을 최연준의 이마에 갖다 댔다. 최연준이 크게 웃으며 그녀를 꼭 안았다. 그저 강서연을 부르고 싶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혁준 씨랑 하루 종일 얘기하더니, 왜 갑자기 이래요?”“서연아, 혁준 씨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알고 싶지 않아요.”“혁준 씨가 날 좋아한대.”“그래서, 그거 자랑하려고 온 거에요?”“네 생각이 어떤지 궁금해서.”강서연이 흠칫했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최연준은 구현수 행세를 할 때를 제외하곤 강서연을 속인 적이 없었다. 어떤 일이 있든 그녀만은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했다.제법 약속을 잘 지키는 모양새였다. 송혁준에게 고백받은 일까지 강서연에게 알려주다니...강서연은 웃으며 조금 생각한 뒤 진지하게 대답했다.“혁준 씨 좋은 사람 같아요, 우리 사이를 망치지도 않고 오히려 나서서 지켜줬으니, 우리가 혁준 씨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최연준은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담담하고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서연이 다시 입
강서연은 어깨와 목을 주물렀다. 금방 걸음마를 뗀 최군형이 걷기 싫어졌는지 매일 엄마 주변만 맴돌았다. 최군형이 부쩍 살이 오른 지라 매일 최군형을 안고 있는 강서연은 죽을 맛이었다.최연준은 급히 강서연을 소파에 끌어다 앉히고는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강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왜 혁준 씨가 싫지 않냐면... 혁준 씨는 정말 좋은 사람 같아서요. 김유정, 임나연 씨는 모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당신에게 접근했지만, 송혁준 씨는 정말 당신에게 진심이에요. 아무리 둔하다 해도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요.”“응? 어떻게 구분한 건데?”“송혁준 씨는 당신이 날 대하는 것처럼 당신을 대하니까요!”강서연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최연준은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며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결이 비슷한 사람끼리는 눈빛 하나로도 알아볼 수 있잖아요. 송혁준 씨는 김유정, 임나연 같은 사람들과 아예 달라요. 그리고 난 송혁준 씨가 당신을 좋아해도 상관없어요.”“왜?”“당신은 언제나 내 옆에 있을 거니까요!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다다음 생에도...”강서연이 몸을 돌려 최연준의 목을 끌어안았다.최연준은 순간 너무나 기뻐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애틋한 눈길로 강서연을 쳐다보며 엄지손가락으로 강서연의 볼을 어루만졌다. 창문 너머로 별이 반짝였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그런데 너무나 기뻐서였을까, 최연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언제나 네 옆에 있는다고? 여보, 자신감이 대단한걸?”“그게 무슨 뜻이에요?”강서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최연준이 순간 정신을 차렸다. 한기가 척추를 타고 온몸에 퍼졌다.강서연이 최연준의 손을 뿌리쳤다.“최연준 씨, 그게 무슨 뜻이에요? 자신감이 대단하다니?”“...”“나는 그 정도 사람이 못 된다 이거에요?”“아니, 그게 아니라...”“그럼 뭔데요!”강서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최연준은 후회막심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숙이는 몸을 벌벌 떨면서 두려운 눈길로 송지아를 쳐다보았다. 좋은 기회였다.계속 고집부렸다가 정말 그 약물을 맞기라도 한다면 큰일 날 터였다. 송지아는 이 약물로 그녀를 통제하려 할 것이고, 뜻대로 안 되면 약물을 과량 주사해 숙이를 처참하게 죽게 할 것이다.죽으면 안 돼, 숙이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꿇어앉아 송지아에게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전하, 열다섯 살부터 전하를 보필하면서 갖은 일은 모두 겪어왔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지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도 사정이 있었어요!”“그래? 어떤 사정?”“윤씨 집안 아가씨가 제 동생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대신 옥이 언니와 저더러 증인이 돼 달라고...”“그럴 줄 알았어!”“폐하,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하겠습니다!”“무엇이든?”“네!”송지아가 웃으며 그녀에게 편지봉투 한 장을 던져줬다. 숙이는 떨리는 두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편지봉투를 열었다. 어두운 불빛을 빌어 그녀는 사진 속의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혁준 폐하? 최연준 씨?”“눈썰미 있네.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했으니, 날 도와 이것만 좀 처리해 줘. 일이 성사되면 섭섭하지 않게 챙겨줄 거야.”숙이가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서지현은 머리가 흐리멍덩한 것이 마치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잠깐 사이에 그녀는 황궁의 보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남양왕이 직접 그녀에게 왕관을 씌워줬고, 공작과 백작들이 모두 그녀를 전하로 모셨다.과거 궁에서 그녀를 쉽게 봤던 시녀들도 지금은 그녀 앞에 납작 엎드린 채 아부하고 있었다.서지현은 이 상황이 썩 편하진 않았다. 그녀는 왕관의 보석들과 옷에 새겨진 수놓이들을 매만지며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실감하고 있었다. 게다가 서궁의 정신 나간 임월 전하가 그녀의 어머니라니...서지현은 천천히 걸어가 송임월의 앞에서 몸을 숙였다. 송임월은 아직도 침대에 앉아 그 베개를 끌어안은 채 아가, 아가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