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어리둥절하다가 놀랍기도 하고 기쁜 마음에 윤문희의 손을 덥석 잡았다.“엄마, 절 알아볼 수 있겠어요?”윤문희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눈빛은 여전히 풀려있었다.“엄마!”강서연은 감격에 겨워 머리를 그녀의 무릎 위에 놓고는 입을 열었다.“드디어 절 기억하신 거예요? 한동안 찬이만 기억하셔서 얼마나 슬펐는데요.”윤문희의 창백한 얼굴에 웃음기가 흘렀고 마른 손으로 살며시 강서연의 긴 머리를 쓰다듬었다.“서연이... 서연이야.”그녀는 중얼중얼 속삭였다.비록 내뱉은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강서연은 이미 너무 흡족스럽다.“엄마, 오늘 날씨도 좋은데 우리 나가서 산책이나 할까요?”윤문희는 반응이 없었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며 때때로 잘 들리지 않는 말을 얼버무렸다.강서연은 여전히 그녀 앞에 쭈그리고 앉았고 방금 전의 즐거움은 점차 상실감으로 대체되었다.“엄마...”“서연이.”윤문희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 딸 서연이, 너 강서연이야. 너... 강 씨야?”강서연은 순간 멍해졌다.갑자기 윤문희의 흐리멍덩했던 눈동자가 흉악함으로 가득 찼다.“엄마?”“너 강 씨야. 넌 강명원의 딸이야!”강서연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윤문희가 그녀의 머리채를 꽉 잡았다. 그녀는 너무도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윤문희 힘은 갑자기 신기할 정도로 강해져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고는 놓지 않으려 하였다.두피와 두골이 분열될 듯한 심한 통증이 갑자기 세게 밀려왔다.“하지 마요. 엄마, 하지 마요!”윤문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그녀를 잡아당겨 힘껏 내팽개쳤다.강서연 사람 전체가 궤짝에 세게 부딪쳤고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졌다.그녀가 일어나려고 발버둥 치는데 윤문희가 갑자기 달려와 그녀의 아랫배를 향해 세게 발길질을 하였다.“이 아이 싫어... 이 아이 싫어!”윤문희는 계속 헛소리를 하였다.“지워. 지워.”강서연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고 밖에 있던 간호사들은 인기척을 듣고 뛰어 들어왔다.그러나 윤문희가 히스테리
신석훈도 그녀를 알아보고 순간 웃음꽃이 만개했다.“강... 강유빈 씨 맞죠? 이런 우연이, 그런데 왜 여기에 있어요?”강서연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입술을 오므리고 가볍게 웃었다.신의사는 그녀와 구현수의 중매인이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강유빈을 대신해 시집간 사실을 모르고 있다.“전 강서연이예요.”그녀는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이 일은 말하자면 좀 길어요. 나중에 천천히 설명할게요.”신석훈은 멍해 있다가 바로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에이, 이름이 강유빈이든 강서연이든 강 씨 집안 딸은 맞잖아요. 중매를 괜히 선 거 아니네요. 맞다, 구현수 씨와는 어때요? 강주시로 이사 가고 나서, 저도 오성의의학원에서 한동안 연수를 하면서 연락이 뜸해진 것 같아요.”“저희 잘 지내고 있어요.”강서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아니면 퇴근하시고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현수 씨와도 한동안 못 만났잖아요. 제가 요리해드릴 테니 둘이 한잔 마셔요.”“너무 민폐잖아요.”신석훈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그리고 제가 확인해야 할 병력 차트가 아직 많아서요...”병력 차트라고 하니 그는 갑자기 방금 병실에서 발생한 일들이 생각났다.“혹시... 방금 그 분 서연 씨 어머니세요?”강서연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신석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그는 속사정을 모르지만 만약 자신에게 이런 어머니가 계시다면 너무도 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강서연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여기에 있으니 대신 잘 보살펴 드릴게요.”“고마워요.”방금도 이 친절한 의사 덕분에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기에 강서연은 그에게 고마운 감정으로 가득 찼다.“신 선생님, 혹시 이 요양센터의 의사세요?”“그건 아니에요.”신석훈은 웃으면서 설명했다.“제 전공은 외과이고 정신과는 부전공일 뿐이에요. 단지 더 많은 것을 배우려고 왔을 뿐이라 연수 기간이 만료되면 이곳에서 떠날 거예요.”“아, 네.”“그런데 저 남성에 진료
강서연이 의아한 듯 눈길을 돌렸다.‘저 사람?’임우정이 가르키는 곳을 따라가다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소진명의 옆모습이 보였다. 장내시야가 비록 밝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임우정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혹시 소 대표도 너의 신랑 팬이니?”강서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는 근래 구현수를 자꾸 수소문하던 소진명의 이상 행동이 떠올랐고 분명 여기 나타난 사실이 우연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설마 진짜 예전에 구현수랑 원수 진 적이 있나?’권투 선수가 다치는 건 흔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복싱 경기장이기에 더욱 느낌이 싸했다. 막말로 여기서 구현수한테 맘먹고 손을 대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거란 생각에 강서연은 걱정이 앞섰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경기장은 이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곧 경기가 시작될 타이밍에 사람도 붐비었을뿐더러 경기장의 지리를 잘 모르는 그녀가 당장 백스테이지를 날아가 알려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급한 마음에 망설이나 싶더니 휴대폰을 꺼내 밖으로 나가면서 신석훈에게 전화를 걸었다....경기는 넘치는 열기에서 진행되고 있었다.상대가 연속 챔피언을 했던 경력 있는 선수라고 하지만, 구현수의 상대라고 하기엔 너무 시시한 정도였고 경기 시작해서 몇 라운드는 잘 치렀다.구현수는 경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실력을 내보였고 경기장 분위기도 점점 들끓어 갔다.관중석에서는 깃발까지 흔들어 대며 응원했다.구현수는 철갑 맹수같이 흉맹했고, 그저 사나운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이 공격했다. 몇 번의 멋진 훅 동장은 시원시원했고 정곡만 찔렀다.한 라운드 진행되니 상대 선수는 로프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구현수를 바라보았고 그 눈빛은 조금 겁먹은 모습이었다. 심판이 타임을 외쳤고 양측은 잠시 숨을 고르면서 상태조정을 했다. 구현수는 그 틈에 링 아래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구현수는 이내 눈썹을 찡그렸다. 백스테이지에 있을 때 분명 그 자리에 서 있는 그
“그러네. 저놈이 앞에 라운드를 날아다녔던 건, 먹으면 안 되는 약을 먹은 게 아닌가 싶은데. 약발이 떨어지니까 맹해진 거지!”그 소리에도 소진명의 의심은 먹구름처럼 짙어져 갔다.구현수를 지켜보던 배경원과 유찬혁도 손에 땀을 쥐었고, 특히 배경원은 발을 동동 구르며 유찬혁을 향해 끊임없이 물으며 걱정을 토했다.“저 형, 왜 저러는 거야!”유찬혁은 방방 대는 그를 자리에 앉히며 조용히 하라고 눈짓했고, 주위 눈치를 살피다가 흐릿하게 소진명의 모습을 보았다.“쉿! 형이 저런 행동하는 건 분명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 소리 지르지 마!”“설마 형수가 안 본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현장은 또 한바탕 소란스러웠고 비명까지 들렸다. 구현수는 무릎을 꿇은 채 왼쪽 갈비뼈 위치에 손을 대고 아파했고 이마엔 피가 땀에 섞여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현수 씨...”강서연은 그 시점에 빠른 걸음으로 경기장에 들어와 하필이면 그 모습을 봤고 어안이 벙벙했다.그녀의 눈에 구현수는 싸우면 질 줄 모를 것 같던 존재일뿐더러 다른 사람에게 얻어맞아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제대로 충격받아 놀랐다.강서연은 눈물이 솟구쳐 올라왔고 애간장을 타며 링을 향해 뛰쳐나가다가 가까이 있던 보안요원에게 저지당했다. 그녀의 애타는 외침마저도 경기장의 소란 속에 묻혀버렸다.강서연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어떻게 버텼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였고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나기 전까지 거의 링 위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승부 판정이 나자 가장 먼저 인파를 뚫고 뛰쳐나갔다.“강서연 씨,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아는 구현수 씨는 기본이 깔려있어서 저 정도 상처에는 크게 다치지 않았을 거예요!”신석훈이 마침 도착했다.“신 의사님, 제발... 잘 부탁해요. 저 너무 무서워요.”강서연은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눈물을 머금은 채 부탁했다.“괜찮아요, 괜찮아! 백스테이지 어떻게 가요? 같이 가보죠.”소진명도 두 사람을 데리고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
소진명은 멈출 생각 없이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석훈이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미소를 건네며 그를 막아섰다.“소 대표님, 이건 ...”소진명의 옆에 선 이들도 속수무책인 모습을 보였고,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배경원과 유찬혁은 소진명이 분해서 발을 구르고 검푸른 낯빛을 하고 떠나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소진명이 뒤돌아서지 않는 것을 보고서 배경원이 바로 달려 나가려 했고 이내 유찬혁에게 목덜미를 잡혔다. “뭐 해?”“연준 형 보러 가야지!”“가지 마, 저기 서연 씨도 있고 의사 양반도 있으니 충분해!”유찬혁이 눈치를 줬고 배경원은 조급해했다. 유찬혁은 배경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연준 형을 돕고 싶다면, 차라리 소 대표 저 사람 내막을 조사해 내는 게 빨라.”배경원은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빠른 걸음으로 유찬혁과 같이 경기장을 빠져나갔다....서서히 눈을 뜬 구현수의 시야에 들어 온 것은 온통 흰 배경이었다.방 안에는 약 냄새가 진동했다. 어렴풋이 간헐적으로 들리는 여자의 울음소리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몸을 일으키려 하자 부드러운 작은 손에 의해 어깨가 눌려 힘을 쓰지 못했다.“움직이지 말아요! 몸을 다쳤으니 잘 돌봐야 해요. 힘쓰지 마요.”강서연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얘기했다.구현수는 눈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몰라도 그녀를 볼 수 없던 시간은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지금 그녀가 눈앞에 있다는 안도감에 그녀의 손을 잡았고 여느 때처럼 엄지로 그녀의 손등을 매만졌다. 원래도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이어서 그녀는 더욱 수척해 보였고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또 두 눈은 얼마나 울었는지 빨갛게 부어있었다.“마누라...”“나랑 했던 약속은 다 잊었어요?”강서연이 안타까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현수 씨, 내가 말했잖아요. 죽을 지경으로 하지 말라고.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요. 난 당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싹 다 잊은 거죠?”
구현수는 마음이 철렁거렸고 강서연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한 말들을 마음에 담아두면 안 돼요? 몇 번을 얘기하지만, 나는 당신이 다치지만 않으면 돼요. 다른 건 신경 안 써요! 현수 씨, 다신 다치지 마요!”늘 온순한 모습의 강서연이 어쩌다 이런 막무가내식의 태도를 보였다.구현수는 그런 그녀가 되레 더 좋았다. 가만히 강서연을 바라보는 그의 입꼬리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한테서 보기 쉽지 않은 순수한 웃음이었다.그 순간 그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뭐가 되었든 내 남편이라던 그녀의 말에 용기를 내서 말이다.‘구현수가 아니라 최연준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여전히 남편으로 받아들이겠지?’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사실을 꺼내 놓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삼촌 최진혁과의 기나긴 전쟁이 예고돼 있기에, 결과를 알 수 없는 복싱 경기처럼 승부가 선명해지기 전까지 그녀를 이 시비에 휘말리게 할 수 없었다.그는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서 살짝 웃어 보였다.“여보. 날 믿어줘. 내가 멋지게 이기는 모습을 보여줄게.”두서가 없는 말에 강서연은 어리둥절했다.“내가 내뱉은 말이니까 꼭 지킬게.”구현수는 진지하게 약속했다.“그래요.”그녀는 웃어 보이며 답했지만, 구현수의 말속의 말을 알아채지는 못했다.링거가 다 떨어졌고 강서연은 간호사를 부르러 나갔다. 바로 그때 구현수의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구현수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고, 병실을 들어오는 강서연을 기다렸다가 속닥이듯 물었다.“여보, 뭐 먹을 게 없을까?”강서연은 핸드폰의 시간을 들여다보며 얘기했다.“배고파요? 석훈 씨가 죽 같은 걸 먹는 게 좋다고 했어요. 이렇게 해요. 내가 나가서 영양죽을 금방 챙겨 올 테니 기다려요.”“그래.”구현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강서연은 서둘러 집으로 달려갔다. 그녀가 병실을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배경원과 유찬혁이 병실을 기웃거렸다. 구현수가 헛기침하고서야 두 사람은 히죽거리며 걸어 들어왔다.“형, 놀랬잖아요!”구현수는 두 사람을
배경원은 어깨를 추키며 말했다.“그거까진 모르지, 난. 형네 집안일을 내가 세세히 알 수가 없네요. 그런데 최근에 형 할아버지가 기분이 좀 변화무쌍한 것 같긴 해요. 영국으로 사람을 보내 형 외가 쪽 5대 재단을 몰래 방문했다고 하고. 돌아온 뒤 형 아버지를 혼도 냈던 것 같아요.”구현수는 표정이 어두워졌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할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항상 두말하지 않으시지만, 늘 생각도 깊고 의심도 많으신 분이라, 암만 최진혁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해도, 최진혁이 옆에서 어르신 귀에 말을 자꾸 하면 분명 불리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유찬혁은 인상 쓰며 말했다.“그렇다면. 연준 형, 시간 내서 오성에 다녀오는 게 좋겠어요. 오해가 있으면 직접 할아버지와 풀어버리고 잘 설명해 드리는 게 좋지 않겠어요. 할아버지께서 화가 나셨다면 아마도 최 씨랑 임 씨 가문 간의 혼사 때문일 텐데...”배경원이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말했다.“에이, 됐네요. 그것 때문이면 차라리 강주에 가만히 있는 게 낫지. 가면 서연 씨 의심이나 샀지. 만에 하나 임나연이 여기 쫓아오면 난리지.”“흠흠!”유찬혁이 크게 기침을 해 보였다. 긁어 부스럼 만들기에는 배경원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어, 나도 생각이 다 있어.”구현수는 피곤한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잡았다. 유찬혁은 눈치 빠르게 배경원을 끌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혼자 침대에 누운 구현수는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고 몸에 상처가 이따금 아파졌다. 그는 비행기 사고를 떠올렸고 그때 죽을 줄 알았던 상황에 구사일생으로 운 좋게 목숨을 부지했고 완강하게 살아 돌아왔다.한 번 죽음을 마주했던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 의미가 더 깊기에 소중한 걸 더 잘 안다. 구현수도 예전에는 최상 후계자 타이틀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면, 지금은 최선을 다해보기로 결심했다. 제일 꼭대기에 서 있어야만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킬 수 있음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구현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았고 눈앞에 강서연의 모
한순간 그녀는 주삿바늘을 잡고 구현수를 향해 찔렀고 다행히 구현수가 반응이 빨라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도 질세라 민첩한 동작으로 남은 손으로 그와 맞섰다.몇 차례 맞서서야 구현수에게 진압되었고 그는 쉽게 그녀의 두 손을 뒤로 묶어두고 몸을침대에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아! 아파! 이거 풀어 줘!”여자는 크게 소리쳤고 구현수는 그녀의 마스크를 벗겨냈다. 여자는 뽀로통한 모습으로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안 해, 안 해! 매번 어떻게 그렇게 한 치 양보도 없이 나를 대해!”구현수는 살짝 웃어 보이더니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여자는 얼른 일어나 그에게서멀찌감치 떨어져 섰고 억울함이 가득 찬 눈을 하고 붉어진 손목을 가볍게 문질렀다.구현수는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여긴 왜 왔어?”“다쳤다고 하는데 내가 와 봐야지.”“이렇게 찾아오면 아버지랑 은 대표는 알아?”여자는 개구쟁이 모드로 익살스럽게 말했다.“필요 없거든. 오빠만 있으면 됐지. 최연희는 영원히 최연준을 따라다니는 찰거머리잖아. 잊었어?”구현수는 놀라듯 하더니 이내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졌다.최연희는 그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그때는 아버지의 재혼에 대해 다소 불만도 있었고, 또 수년간 계모에 대해서도 겉치레뿐인 예의를 지켜왔던 그였다. 최연희는 최씨 가문에서 그가 드물게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안식처였다. 남매가 나이 차이는 꽤 나지만, 어렸을 때부터 최연희는 오빠를 많이 따랐고 좋아했다. 뭘 하든 오빠만 졸졸 따라다녔다. 엄마 아빠의 백 마디 말보다 오빠의 말 한마디를 더 따르던 동생이었다.가끔 그는 이 또한 특별한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녀 이름 ‘연희’ 처럼 그녀는 그에게 행복을 끌어다줬다.최연희는 장난기 어린 눈을 깜박이며 놀렸다.“이보소. 구 씨. 구 씨로 오래 살다보니, 오빠의 진짜 성을 잊은 건 아니지?”구현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최연희는 메롱 하고 혀를 내밀고는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강주까지 온 건, 오
“뭐라고요? 10억 원이요?”백시연은 깜짝 놀라서 외쳤다.강소아는 슬쩍 백시연을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왜 그래? 고작 10억 가지고. 게다가 가원이에게 큰 선물을 주겠다고 네가 먼저 약속한 거잖아. 혹시 후회라도 하는 거야?”“그럴 리가!”배윤아가 옆으로 걸어오며 백시연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렸다.“우리 인서는 분명히 선물을 줄 거야, 그렇지? 너희 둘 사이에 보석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백시연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고 입술이 굳게 닫혔다.10억? 조순영에게서 받은 카드에는 고작 10억 원뿐이었다.백인서가 이때까지 이렇게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돈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걸까?그래서 강소아가 그렇게 말한 것일까?“어머, 저 사람은 육 아가씨와 친하다던 백인서 아니야?”그때, 근처에 있던 여배우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방금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어?”“예전에... 둘이 약속했나 봐, 백인서가 육 아가씨의 딸에게 선물을 주기로.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바뀐 것 같아!”“정말? 풉! 상류층 자매라는 것도 결국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봐! 백인서는 육 아가씨와 둘도 없는 사이처럼 보였는데. 육 아가씨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잖아... 이제는 최씨 가문의 아들과 친해지니까, 가식적인 행동도 하기 싫어졌나 봐.”“그 선물이 10억 원짜리라고 하던데... 역시 두 사람 우정은 10억 원도 안 되는 거였어!”백시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뒤돌아 그들에게 따지려던 찰나, 강소아가 재빠르게 백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됐어, 인서야.”강소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저 사람들은 평소에도 입만 살았어. 나중에 제대로 혼내 줄 거야.”“그래야죠, 저 사람들은 정섭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이잖아요. 제대로 가르쳐야 해요!”백시연은 화를 내며 말했다.“소아 언니, 저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 나온 건 정섭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해서이기도 하지만 결국 언니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저렇게 뒤에서
권욱과 조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벅찬 기쁨에 눈물이 터져 나왔고 이내 서로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권 대표님, 사모님, 정말 큰 경사입니다!”의사는 골수 검사 결과를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드디어 아가씨를 살릴 수 있게 됐습니다!”“맞아요, 정말 기쁜 일이네요.”최지용이 권욱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한심하긴, 그만 울어요!”권욱은 흐느끼면서도 반박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네 딸이 아픈 게 아니니, 넌 당연히... 당연히 이 고통을 알 리가 없지!”최지용은 기가 차 웃으며 권욱의 등을 두 번 세게 두드렸다.백인서는 마음 한편의 큰 짐을 덜어낸 듯 병실 안에 있는 권온유를 바라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그나저나.”조순영이 문득 입을 열었다.“백시연의 골수 결과는 어떻게 됐나요?”“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습니다.”의사가 고개를 저었다.“대부분의 지표는 일치했지만 몇 가지 중요한 항목이 맞지 않아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정말 신기한 인연이네요.”최지용이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쌍둥이라고 해도 신체의 세포가 다를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네요.”한 명은 강인하고 선량했고 다른 한 명은 어리석고 악랄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라도 서로 다른 개성과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누구도 타인의 성격과 운명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그러게 말이야.”권욱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다른 쌍둥이였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힐 때가 된 것 같네.”...축하 연회 날, 손님들로 붐비는 연회장은 떠들썩하고 활기가 넘쳤다. 오성에서 유명한 대가문은 물론, 연예계의 반 이상이 모인 듯했다.정섭 엔터테인먼트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했기에 대상 수상 경력이 있는 배우들조차 강소아의 초대를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연회장에 들어선 백시연은 평소 TV에서만 보던 유명 여배우들이 서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광경에 기가 죽고 말았다.백시연은
차 안에서 백인서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앉아 있던 두 남자는 서로를 힐끔거리기만 할 뿐,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조금 전 나눈 대화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백인서는 갑작스레 쏟아진 진실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권씨 가문의 사생아라니.“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지가 꽤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야.”“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 있었어. 바로 회중시계인데, 그걸 백시연이 가지고 온 거지.”“인서야, 너와 백시연이 쌍둥이 자매란 거 알고 있었어?”백인서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가 깨질 듯 욱신거렸다.어머니가 이렇게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인서야?”최지용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백인서의 손을 잡았다.그러자 앞좌석에 있던 권욱이 뒤를 돌아보며 싸늘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쏘아보았다.“놔라!”“뭐요?”권욱은 입을 삐죽이며 최지용이 꼭 잡은 백인서의 손을 가리켰다.참 이상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매형이 된 순간부터 그가 갑자기 거슬리기 시작했다.“인서는 좀 쉬어야 해!”권욱은 찡그리며 말했다.“손은 왜 자꾸 붙잡고 있는 거야?”최지용은 순간 멍해서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권욱을 쳐다보았다.“무슨 상관이에요?”“난 인서 오빠야! 당연히 내가 상관해야 할 일이지.”“웃기지 좀 마세요!”“너...”“그만 좀 싸울래요?”백인서가 뒤돌아 두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머릿속이 이미 복잡할 대로 복잡한데 이 두 사람은 백인서를 편히 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최지용과 권욱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눈싸움을 벌였다.“온유는 아직 병원에 있어요?”백인서가 갑자기 물었다.“응...”“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요!”“뭐라고?”권욱은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백인서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진짜 동생이라면 온유 고모가 되는 거잖아요. 아직 적합한 골수를 찾지 못했다면서요? 제가 한번 해볼게요!”권욱은 잠시
종수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백인서에게 내밀었다.“통화해.”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최 도련님의 번호는 분명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굳이 조언을 하나 하자면... 먼저 육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연락하는 게 좋을 거야.”백인서는 종수를 노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왜냐하면 백인서도 강소아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강소아는 위치 추적 장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전화를 걸면 곧바로 이곳이 추적될 터였다.그렇게 되면 종수와 백시연은 피해 갈 수 없을 터였다.“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종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어젯밤, 소아 아가씨가 시연이와 통화했는데 평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던 아가씨가 시연이와 한참 동안 통화를 하더군. 내가 생각하기론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컸어.”백인서의 표정이 점점 풀렸다.백인서는 천천히 손을 옮기고 종수가 움직이기 전에 재빨리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달려갔다. 종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했다.종수는 그저 가만히 백인서를 바라볼 뿐, 뒤쫓으려는 기색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백시연을 용서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백인서는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를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저는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아요. 그런데 당신들이 먼저 나타나 저를 해치려 들고선 이제 와서 자매애를 말하다니, 우습지도 않나요?”백인서는 말을 마치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종수는 백인서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종수의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백인서는 저택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걸은 끝에 조용한 길 한가운데에 다다랐다. 지친 몸을 이끌며 주위를 둘러봤지만, 화려한 시내는 여전히 멀어 보였다.오성은 너무 넓었고 모든 곳을 다 가본 게 아니었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추정할 수 있을 뿐, 휴대전화도 없어서 난감하기만 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던 순간, 고요한 길
종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깊은 씁쓸함이 서려 있었다.종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백인서는 문밖 풍경을 바라보았다.때마침 오전의 화창한 햇살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작은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였다.백인서는 무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종수를 바라보았다.“어서 가.”종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인서야, 내가 한 가지 부탁해도 될까?”“뭔데요?”“네 남자 친구에게 시연에 대한 얘기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백인서는 미간을 찌푸렸다.종수는 한 걸음 다가서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시연이는 내가 키운 아이야. 내겐 딸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약속할게, 시연이를 데리고 이곳 오성을 떠나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결국, 저보고 용서하라는 말이군요?”“인서야, 그 아이는 네 쌍둥이 동생이야. 네가...”종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인서는 빠르게 식탁 위의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부분을 종수의 목에 단숨에 들이댔다.종수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급히 손을 뻗어 백인서의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목 깊숙이 차가운 위협이 스며든 후였다.백인서가 누르고 있는 곳은 동맥이 위치한 곳이었다.“백인서, 너...”“아저씨.”백인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제가 조금만 힘을 주면, 아저씨는 여기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어요. 방금 확인했는데, 이 저택은 넓지만, 따로 감시카메라는 없더군요.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떠나도 아무도 알지 못할 거란 얘기예요.”종수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경찰이 너를 추적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흥!”백인서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역추적 능력에는 꽤 자신 있거든요.”“백인서!”“아저씨, 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들은 왜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요?”“전부 시연이 잘못이야!”
백인서는 가볍게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시선을 문 쪽으로 옮겼다.종수가 방에 들어올 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신의 실력을 지나치게 믿었거나, 아니면 백인서를 단순히 어린 애로 여겨 경계를 늦췄던 게 분명했다.“어서 먹어라.”종수는 백인서를 쳐다보며 말했다.“다 먹고 나서 끝내줄게.”“네, 알겠어요.”“무섭지 않아?”“왜 제가 무서워해야 하죠?”백인서는 미소를 띠며 조용히 말했다.“겁을 내야 할 사람은... 아저씨 아닌가요.”종수는 백인서의 맑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빛의 날카로움은 마치 칼날처럼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종수는 다시금 백홍을 떠올렸다. 한평생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했는데 지금 은인의 딸을 죽이려 하고 있으니...백인서의 말이 맞았다. 겁을 내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종수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젯밤 백시연의 말에 화가 나 잠 한숨도 자지 못하다 보니 머릿속이 멍한 상태였다. 갑작스레 숨이 가빠오며 가슴이 터질 듯한 답답함이 몰려왔다. 무심코 주머니를 더듬었고 그 순간 전에 앓던 천식이 다시 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약을 가져오지 않았다.종수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물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필사적으로 공기를 삼켰다.“어서... 어서...”종수는 떨리는 손으로 백인서를 가리키며 도움을 청했다.백인서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종수를 주시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처음엔 거짓 연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인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식판을 발로 차 뒤집었다. 종수는 바닥에 쓰러져 온몸을 고통스럽게 비틀었다.백인서는 종수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어서 닫히지 않은 문을 바라보았다.지금이 탈출할 최고의 기회였다!“약...”종수는 애써 말을 이었다.“내 약이...”“배... 백인서... 부탁이야...”백인서는 이를 악물었다.“제발... 백인서, 날 좀 살려줘!”백인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곧 침착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주위를 살
종수는 무거운 표정으로 백시연을 바라보다가 TV를 켰다. 화면에는 비밀방에 갇힌 백인서의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담겨 나타났다.백인서는 어두운 방의 구석에 무릎을 감싸안고 웅크려 앉아 있었다.백인서는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여기에 갇힌 지 3일째라는 결론을 내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어둡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하루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졌다.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탈출할 수 있는 틈은 없었다. 혼자 힘으로는 밖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백인서는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며칠 동안 종수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맛은 없었지만 백인서는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어 치웠다. 백인서는 알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절망하지 말고 조용히 몸을 숨기며 힘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것은 탈출을 위한 준비였다.종수는 화면을 멈추더니 백시연을 향해 돌아섰다.“너... 정말 백인서를 없앨 생각이야?”“왜 이렇게 말이 많으세요!”백시연은 짜증을 내며 종수를 흘겨보았다.“너의 친자매이기 전에.”종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백인서는 절대 간단한 상대가 아니다. 쉽게 없앨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뭐라고요?”“방금 너도 봤잖아. 저런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쉬는 모습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모르겠니? 지금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우리를 상대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그러니까 더더욱 없애야죠!”백시연은 소리를 질렀다.“아저씨, 설마 백인서한테 마음 약해진 거 아니죠?”종수는 머리속이 하얘진 채 멍하니 백인서를 바라보았다.“어쨌든, 전 백인서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백시연은 종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저의 엄마한테 약속했잖아요. 저를 잘 돌봐주기로. 어릴 때 저와도 약속했잖아요, 제 말이면 뭐든 다 들어두겠다고.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예요?”“시연아...”“그만해요!”백시연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아저씨는 우리 엄마가 데려온 떠돌이 개일 뿐이에요. 저를 훈계할 자격
최지용은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그러니까...”최지용이 권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틀 동안 나와 함께 있던 사람이 정말 인서가 아니었단 거네요!”“그게 무슨 말이에요?”권욱도 어리둥절했다.“그 사람은 인서가 아니에요!”최지용은 흥분하며 외쳤다.“인서는 분명 지금 그 여자한테 잡혀 있을 거예요. 그 여자가 인서를 해치려 들 거예요.”“도련님, 진정 좀 하시죠. 지금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최지용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총을 꺼내 든 채 밖으로 나가려 했다.표아정이 침착하게 최지용의 앞을 가로막았다.“지금 필요한 건 대책을 세우는 거야!”표아정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처럼 감정에 휘둘려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권욱은 머리를 긁적이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표아정은 권욱을 향해 물었다.“권 대표, 백시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백시연은 제 아버지의 사생아입니다.”지금은 이 부끄러운 가정사를 숨길 때가 아닌 것 같아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하지만 수년간 찾지 않았어요. 사실 찾을 의지도 없었죠. 제 딸이 병에 걸려 골수 이식수술이 필요하기 전까지는요. 집안의 모든 친척이 골수 검사를 했지만, 적합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제야 동생을 찾게 된 겁니다.”표아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 동생은 어디서 찾았지?”“찾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남긴 단서를 따라 사람을 보내 남양에서 데려왔어요.”권욱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하지만 돌아온 백시연은 처음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어요. 얼굴이 망가졌다면서 가면을 쓴 채 진짜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어요. 다만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은 확실히 저의 아버지의 것이었죠.”“그다음은?”“백시연의 행동이 너무 이상해서 저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어머니는 누구야?”권욱은 단호하게 말했다.“백홍입니다.”최지용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표아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금세 실마리를 잡은 듯 말했다.
“결과가 바로 나오진 않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권욱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넥타이를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권욱은 마음 깊은 곳에서 답답함이 밀려오며 짜증이 치솟았다.권욱은 문득 검사실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술대 위에는 마취가 아직 풀리지 않아 의식이 없는 채로 누워 있는 백시연이 있었다.권욱은 갑작스레 백시연에 대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진짜 여동생이라면 적어도 동생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도는 봐야 하지 않을까? 혹여 얼굴에 상처가 있다면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었는지 알아야 적합한 의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결심한 듯 권욱은 발걸음을 재촉해 수술대 앞으로 다가갔다. 권욱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잠깐 주저하다가 곧 거칠게 백시연의 얼굴을 덮은 가면을 벗겨냈다.가면이 벗겨지자, 권욱의 눈동자에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처럼 충격과 경악이 번져갔다.“백... 백인서잖아?”...최지용은 초조한 기색으로 거실을 서성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표아정이 아끼는 두 명의 부하, 우일과 우민 남매가 돌아왔다. 두 사람은 전문 훈련을 받은 인물로, 뛰어난 손재주와 상황 판단력 덕분에 표아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상황은 어땠어?”표아정이 급히 물었다.우일과 우민은 보고하기 시작했다.“계속 백 아가씨의 뒤를 밟았는데 아가씨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통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에서 가면을 꺼내 쓰는 걸 보았습니다.”“가면?”최지용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네, 가면이 확실했습니다.”우민이 설명했다.“그 가면은 꽤 독특해 보였는데 금으로 만들어진 데다 보석이 박혀 있어서 꽤 값비싸 보였습니다.”최지용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인서는 가면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런 걸 쓴 적도 없고...”“또 뭘 봤는데?”“누군가 천으로 아가씨의 입을 막은 채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병원 주위를 살펴본 결과, 그들은 권욱의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