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이 창문 밖의 풍경을 보며 물었다.“어머니, 여긴 집 가는 길이 아닌 것 같은데...”“밥부터 먹고 돌아가자!”“밥이요?”강서연은 그 말의 뜻을 곧바로 알아채고는 생긋 웃으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어머님이 쏘시는 건가요, 아니면 미래의 아버님이 쏘시는 거예요?”“얘도 참! 이제 나와 농담도 하는 거야?”“어머니, 그분은 대체 어떤 사람이에요? 너무 궁금해요.”김자옥은 그녀를 흘깃 보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아직은 비밀이야.”얼마 뒤 그들이 탄 차는 김중 호텔에 도착했다. 맨체스터 시티의 상징물인 김중 호텔은 호화로운 외관부터 최상의 서비스까지 온갖 좋은 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오늘 김중 호텔은 이들 부부를 위해 다른 손님들을 모두 거부했다. 호텔 이사가 직접 차 문을 열어 이들을 맞이했다.“대표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꼭대기 층으로 가시죠.”김자옥이 만족스러운 듯 대답했다.“응. 변 선생님은 오셨어?”“네, 기다리고 계십니다.”강서연과 최연준이 눈빛을 교환했다. 곧 아저씨를 만나게 된다니, 두 사람은 궁금하기도, 긴장되기도 했다.강서연은 최연준의 손을 꼭 잡은 채 김자옥과 함께 꼭대기 층의 식당에 도착했다. 창가에 풍채가 좋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의 모든 행동에서 우아함과 귀티가 뿜어져 나왔다.남자는 일어나 그들에게 영국 신사처럼 인사했다.김자옥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소개할게. 여긴 우리 아들 최연준, 여긴 내 며느리 강서연, 그리고 여긴 내 손자 최군형이야! 그리고 이쪽이 바로 너희 아저씨...”김자옥이 남자를 한 번 보고는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말했다.“변덕수야!”강서연이 깜짝 놀라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최연준도 어쩔 바를 몰라 했다.방금 만날 때만 해도 남자에 대한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명문가 사람 같은 것이, 김자옥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 이름은... 김자옥이 열정적으로 말했다.“다들 서있지만 말고 앉아! 밥 먹자! 덕수야, 너도 앉아!”강서연이 참지 못하고
강서연이 입을 열었다.“아저씨, 저희 둘 다 아저씨의 책을 읽은 적 있어요. 연준 씨가 정말 좋아해요. 매일 몇 페이지라도 읽어야 잠이 들 정도로요.”변덕수는 쑥스럽게 머리를 긁적이며 사람 좋게 웃었다.“아니야, 내가 운이 좋아서지.”강서연이 생긋 웃었다.운은 실패한 자의 핑계이기도, 성공한 자의 겸손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변덕수는 겸손하고 온화한 사람인 것 같았다. 어쩐지 김자옥을 사로잡았더라니, 두 사람의 성격이 잘 맞아 가능한 일이었다.변덕수는 김자옥에게 굉장히 잘해줬다. 그녀가 최근 일 때문에 몸이 약해져 있는 걸 알고는 일부러 자극이 덜한 요리를 주문했다. 김자옥의 허리가 안 좋은 걸 알고는 쿠션을 가져와 그녀의 허리 뒤에 받쳐주기도 했다.강서연과 변덕수는 몇 마디 더 나누었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좋은 분인 것 같았다. 성격도 좋았고 특히 모르는 게 없었기에 대화가 끊기지 않았다.식사 도중 최군형이 칭얼대자, 강서연이 그를 데리고 나갔다. 식당 안에는 최연준, 김자옥 그리고 변덕수만이 남아있었다.김자옥은 과거의 호랑이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변덕수를 바라보며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최연준은 굳은 얼굴로 앉아있다가 변덕수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김자옥에게 눈치를 주었다.“뭐 해?”“엄마, 두 분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벌써 결혼한 것처럼 굴지 마요. 변씨 집안 사람 다 됐네.”“내가 언제? 네 아빠와 이혼하기 전에도 난 최씨 집안 사람은 아니었어!”“그래요? 그럼 아저씨가 데릴사위가 되는 거예요?”“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혼인신고서 한 장 따위가 뭐가 중요해. 그리고 결혼하면 꼭 그 집안 사람이 돼야 해? 누가 뭐래도 난 김씨 집안 사람이야!”“어...”“나도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는데, 덕수랑은 정말 서로 좋아서 만나는 거야. 난 영원히 김씨 집안 사람이야!”최연준이 멍하니 김자옥을 쳐다보았다. 김자옥은 웃으며 최연준의 손등을 톡톡 쳤다.“내 성격 이런 거 알잖아.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자신
본업을 언급하자 변덕수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음... 아예 그런 건 아니고, 로맨스 요소가 들어간 추리소설을 써볼까 해.”“진짜 재미있겠네요! 줄거리를 조금 알려주실 수 있어요?”“서연아!”최연준이 웃으며 강서연을 저지했다. 작가들은 작품의 뒤 내용을 알려주기 꺼린다는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변덕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책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이건 실화를 바탕으로 쓴 거야. 찾아봤는데, 남양의 공주가 맨체스터 시티에서 한 유랑하는 예술가와 사랑에 빠졌대.”“네?”강서연과 최연준은 동시에 흠칫하고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그 예술가는 집시였는데, 엄청난 재능이 있었나 봐! 얼굴도 잘생겼고. 아니면 어떻게 공주의 마음에 들었겠어?”“그래서요?”“황실은 이를 반대했는데, 공주는 그 예술가를 사랑한 나머지 그와 자식까지 낳았대! 하지만 누군가 이를 모두 지워버려서 별다른 자료는 남아있지 않아. 황실의 치부라서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게 싫은가 봐.”강서연은 포크를 내려놓고 최연준과 눈을 맞췄다. 무언가를 알아낸 듯했다.공주, 유랑하는 예술가, 집안의 반대, 사생아...모든 단서가 송임월을 가리키고 있었다.“그 예술가는 어떻게 됐어요?”“죽었대. 공주가 황실에 잡혀 돌아간 뒤, 그 예술가는 배를 타고 남양에 가서 공주를 찾으려 했대. 그런데 배가 전복된 모양이야. 이건 누군가의 음모일 수도 있어. 이게 내 소설의 중요한 사건이야.”강서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변덕수가 작게 웃었다.“이건 다 소설을 쓰려고 사처에서 긁어모은 정보야. 그러니 너무 믿지는 마. 다른 작가가 지어낸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난 이 결말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내 작품에서는 다른 결말로 갈 거야. 모두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로!”“네 스타일은 아닌데? 전에 썼던 작품은 모두 새드엔딩이었는데, 어쩌다 해피엔딩을 다 쓰고?”김자옥이 웃으며 말했다. 변덕수가 김자옥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인생 짧은데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살 수는
윤정재는 최근 남양의대에서 초청 교수로 특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송임월을 돌보러 갈 수 없었다.하지만 서지현은 그 대신 서궁에서 본분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송지아는 가끔 대황궁의 높은 곳에 서서 망원경으로 서궁 안의 상황을 살피곤 했다. 서지현을 그 안에 가두면 송임월은 분명 미친 듯이 서지현을 괴롭힐 줄 알았다.그래서 비명을 지르거나 괴롭힘에 시달리는 서지현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녀의 상상과 정반대였다.서궁은 한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송지아는 망원경으로 질서정연한 서궁의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가끔 서지현이 마당에 나타나곤 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얼굴색이 불그스름한고 혈색이 좋아 보였다. 몸이 조금 말라진 것 외에는 전혀 괴롭힘을 당한 것 같지 않았다.송지아는 미간을 구기더니 짜증이 몰려와 어금니를 깨물었다.‘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송임월은 사람만 보면 미친개처럼 무는 거 아니었어? 저번에도 포크로 서지현을 찔러 유혈사태가 발생했었잖아.’“전하...”시녀가 살금살금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막 찻잔에 차를 부으려고 하자 송지아는 팔을 휙 들더니 찻잔과 받침까지 모두 내동댕이쳤다. 바닥에는 산산조각이 난 유리 조각으로 가득했다.송지아가 주먹을 꽉 쥐고는 벽을 ‘쿵’ 내리찍더니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전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건강도 생각하셔야지요.”“쓸모없는 것. 그 미련한 년 하나를 해결하지 못해?”송지아는 시녀에게 화풀이를 했다.“송임월은 왜 갑자기 얌전해진 거야? 미친 사람 아니었어? 서지현 그년을 보고서도 왜 발작을 하지 않아?”“전하, 목소리를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시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전하의 고모님이시잖아요. 그대로 이름을 부르시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럽니까...”“들으면 들으라고 하지. 어차피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는 사람인데.”“하지만 윤정재 회장님께서 치료에 성공한다면요?”송지아는 날카로운 눈
바느질을 하고 있던 서지현은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송임월은 얼굴로 베개를 쓰다듬으면서 정말 아기 재우기라도 하는 듯 부드럽게 흔들며 자장가를 불렀다.“우리 아기, 여자 아기...”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다시 서지현을 향해 웃으며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주 예쁜 여자 아기!”서지현은 코끝이 찡했다.남양에 오기 전에 그녀는 여자애가 이렇게 사랑받을 수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렸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이 많이 희미해졌는데도 말이다.열 살이 되기 전에 그들 세 식구는 더럽고 음산한 지하실에 살고 있었다. 집에 돈이 한 푼이라도 있으면 그녀의 아버지는 술과 마약을 사곤 했다.집안의 돈은 모두 그녀의 어머니가 몸을 팔아 벌어들인 돈인데 서지현은 한겨울에도 짧은 옷을 입은 어머니가 길거리에 서 있으면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냈던 게 기억이 났다.그녀의 부모님은 별로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듯 매일 음식만 조금씩 던져줬다.그리고 두 사람이 자주 하던 말이 있었다. 항상 여자애를 키워봤자 소용없다며 서지현을 비아냥거리곤 했었다.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부모님은 ‘소용없는’ 서지현을 버리고 떠났다. 그렇게 그녀는 혼자 지하실에서 살아남아야 했다.그 생각에 서지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닭똥 같은 눈물이 바느질하고 있는 옷에 뚝뚝 떨어졌다.“왜, 왜 그래?”어리둥절한 송임월은 두 눈을 크게 떴다.서지현은 눈물을 닦으며 서둘러 사과했다.“전하, 죄송해요... 제가 옷을 더럽혔네요...”송임월은 옷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그녀의 시선은 줄곧 서지현을 따라다녔다.“왜 울어?”서지현은 억지로 미소를 짜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혹시... 배고파?”“아니에요.”“그럼 왜 우는데? 말해 봐!”서지현은 그저 하염없이 송임월을 바라봤다.송임월은 조금 정신이 이상한 것처럼 보였지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상대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송임월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그녀를 품에 더 꼭 끌어안았다. 마치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처럼 말이다.“착하지, 이제 뚝 그치자?”송임월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계속 이어갔다.“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네!”서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전하, 저를 보호해 주실 건가요?”“응.”송임월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왜요?”“넌, 넌 내 아가니까.”“전하,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전하의 아기는 저기에 있습니다.”서지현은 미소를 머금은 채 저쪽에 있는 베개를 가리키며 말했다.송임월은 멈칫하더니 그녀의 뜻을 알아챘는지 멋쩍게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베개를, 다른 한 손으로는 서지현을, 그렇게 두 ‘아기’를 모두 품에 안았다.“아니야!”송임월은 소리를 높여 또박또박 말했다.“둘 다 내 아기야!”서지현은 말로 이룰 수 없는 행복감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이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서지현은 경계심을 느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대문으로 걸어가기도 전에 누군가가 들어왔다.“회장님!”서지현은 두 눈을 반짝였다.윤정재는 ‘쉿’ 제스처를 취하더니 사방을 살펴보다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낮은 목소리로 서지현에게 물었다.“내가 없는 며칠 동안 전하는 어떠셨어?”“그대로십니다.”서지현은 솔직히 대답하더니 이내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시녀들이 너무하더군요. 전하가 따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일부러 전하를 괴롭히니 말이에요.”“그건 큰 문제가 아니야.”윤정재는 덤덤한 얼굴을 보였다.지금은 송임월의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그녀를 해치려는 사람부터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면 송임월의 병도 빨리 나을 수 있을 것이다.윤정재는 지난 몇 년 동안 황실에서 송임월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투자한 많은 돈이 헛되게 쓰이지 않았나 싶었다. 어쩌면 꿍꿍이가 있는 누군가가 송임월의 치료를 방해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윤정재가 서지현에게 분부했다.“오늘 전하께서 마
요 며칠 변덕수는 자료 찾기에 전념했고 강서연과 최연준은 서재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채 옆에서 그를 도왔다.변덕수가 모은 자료들은 대부분 영어로 된 게 아니었지만 최연준은 번역에 일가견이 있기 때문에 그 자료들을 매끄러운 표현으로 잘 번역할 수 있었다.최연준이 한 페이지의 라틴어를 다 번역하자 강서연은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와락 안겼다.“여보는 정말 대단해요!”강서연은 마치 최연준의 팬처럼 그에게서 시선을 떼려 하지 않았다.“라틴어도 할 줄 알았어요?”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사람이잖아.최연준은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사실 그도 처음에 작정해서 라틴어를 배우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다만 배경원의 말에 의하면 모든 유럽 황실 귀족들은 라틴어를 배울 뿐만 아니라 여인들도 라틴어를 할 줄 아는 남자를 더 선호한다고 했다. 그 말에 최연준은 바로 라틴어 수업을 등록했지만 세 번째 수업부터 따라가기 힘들어졌다.하지만 대학을 졸업하려면 학점을 이수해야 했기 때문에 최연준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나머지 수업을 모두 마쳤다.강서연이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그는 고급 라틴어 수업도 이수했을 것이다.“아니야, 문법을 완벽히 아는 것도 아니고.”그래도 최연준은 올라간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졸업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많이 까먹었어. 이제 시간 될 때 한 번 제대로 공부해야지.”강서연은 미소를 지은 채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댔다. 겸손한 남편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이다.최연준은 강서연의 칭찬을 만끽하며 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이내 나타난 문자를 보고 얼빠지게 되었다. 그가 전혀 본 적이 없는 언어였다.“여보, 이것도 라틴어예요?”강서연이 자료를 들여다보며 물었다.목이 바짝 바른 최연준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멋있는 모습 오래 못 가게 생겼네...’“이건 라틴어가 아니라 로마니야.”변덕수는 안경을 벗고는 두 사람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로마니가 바로 집시어야. 이건 어디서 찾았어?”“바로 이 밑에서요.”강서
남양, 황궁 밀실.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송지아는 시녀를 밖에서 기다리게 한 후 혼자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이미 안에 도착해 있던 가연 왕후는 벽을 마주하고 서 있었는데 청석 벽에는 그녀와 현 군주인 송이수의 모습이 담긴 유화가 걸려 있었다.송이수가 국왕이 되던 그날, 화려한 옷차림에 왕관을 쓴 그는 위엄 있는 기개와 카리스마 넘치는 자태를 뽐냈다. 덕분에 그의 앞자리에 앉았던 가연 왕후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졌다.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두 번 있었다. 하나는 송이수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지켜볼 때였고, 또 하나는 그의 신부가 되었을 때였다.송지아가 살며시 가연 왕후에게 다가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숙모님를 뵙니다.”가연 왕후가 정신을 차리고는 물었다.“일은 잘 해결됐어?”“숙모님, 걱정하지 마십시오.”송지아가 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방금 숙이랑 옥이에게 연락했는데 두 사람 벌써 맨체스터 시티에서 그 부부를 찾았다고 합니다.”“정말이야?”가연 왕후가 눈썹을 치켜들었다.“네!”송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와중에 가연 왕후에게 아부를 떨 생각을 했다.“역시 숙모님의 통찰력은 대단하십니다. 미리 사람 시켜 그 부부를 수소문하지 않았다면 숙이와 옥이가 이렇게 빨리 못 찾았을 겁니다.”“사람 제대로 찾은 거 확실해?”“네, 서지현 부모님인 게 확실합니다.”송지아가 자신 있게 말했다.“아이를 보면 그 부모가 보인다더니, 부모가 그 모양이니 서지현 그년도 그렇게 천박한 거죠.”가연 왕후는 말 없이 그저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녀는 단지 송지아더러 사람을 찾으라고 했을 뿐, 그 두 사람이 서지현의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가연 왕후가 서궁을 지나가던 어느 날, 갑자기 본능에 이끌려 그 안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러다 우연히 송임월의 흰색 치마를 입은 서지현을 발견했는데 그녀의 미소는 꽃처럼 아름답고 맑았다.그런 서지현의 모습을 본 가연 왕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뒷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