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의 부상은 회복이 필요했기 때문에 구현수는 강서연을 집으로 데려와 돌봐주었다.처음에 강서연은 구현수가 집안일을 할 줄 모르고 요리하는 것조차 서툴렀기 때문에 그녀가 다쳤을 때 집안이 엉망이 될까 봐 걱정했다.하지만 구현수가 그녀를 안고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앞이 반짝 빛이 났다.집은 깨끗했고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그녀가 다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나쁘지 않지?”구현수는 웃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는 선생님의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 소년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강서연은 생긋 웃었다.그녀는 늘 남편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지만, 평소에 그가 여러 언어로 된 경제 뉴스를 훑어볼 때뿐이었다.집안일에서도 유능한 사람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잠시 후 구현수는 요리 두 접시를 들고 왔다.강서연이 맛을 보았는데 소금을 조금 많이 친 것 빼고는 맛이 괜찮았다.이 정도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놀랐고 만족했다.“내가 말했잖아요, 내 남편이 제일 유능하다고!”그녀는 고개를 들어 귀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다친 것도 좋은 일이네요.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 해주기를 기다리면 되고!”“좋아.”구현수는 담담하게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약간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오늘 밤에도 잘 모실게, 어때?”강서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고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쳤다.구현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으면서 음식을 크게 베어 물었다.강서연에게는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샤워하는 것이 힘든 일이었다.구현수는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단번에 거절했다.구현수는 가볍게 웃었다.“우리는 이제 부부인데 아직도 그게 신경 쓰여? 지금 다리가 불편하니까 당신이 샤워할 때 내가 도와주는 게 맞아.”강서연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작은 두 손으로 옷의 모서리를 잡아당겼다.구현수는 그녀가 긴장한 것을 보고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그저 그녀의 처진 눈꺼풀과 앵두 같은 입
강서연은 혼란스러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몰라서 그의 말에 수줍게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고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으며 남자의 뜨거운 키스를 느꼈다... 그녀는 천천히 마음을 열었다.........이른 아침 구현수는 천천히 눈을 떴다.예전에 최씨 가문에 있을 때 그는 가끔 새벽 4시에 일어나 공무를 처리했다. 그는 항상 일찍 일어났고 수년 동안 변함없는 습관이 되었다.그러나 어젯밤 그녀 때문에 그는 난생처음으로 늦잠을 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는 고개를 돌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서연은 달콤한 잠에 빠져있었는데 자는 모습이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 달콤한 향기가 또다시 그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그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억제했다. 어젯밤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지쳤을 것이다.구현수가 일어나자 갑자기 휴대폰 화면이 밝게 켜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는 티셔츠를 입고 침대에서 일어나 조용히 베란다로 걸어갔다.“형님, 이렇게 이른 시간에 혹시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유찬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유찬혁이 가볍게 웃었다.“형님네 어르신께서 최근에 최진혁 밑에 있는 계열사를 다시 회수하셔서 지금 최씨 가문에서 형님이 그에게 한 방 먹였다고 소문났어요.”구현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그가 한 방 날린 것이 맞았다.할아버지는 그를 예뻐하셨다. 그리고 최진혁이 장부를 아무리 완벽하게 위조해도 할아버지는 그 틈을 알아보셨다. 게다가 최씨 가문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최진혁보다 더 오만한 사람들도 많았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있으시지만 노쇠하지는 않으셨다.그래서 그는 최진혁을 처벌함으로써 실제로는 다른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날린 것이었다.“둘째 삼촌은 어때?”구현수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어르신 앞에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해요.”유찬혁은 웃었다.“둘째 삼촌 몰라
얼마 후 다리 부상이 마침내 다 나았고 강서연은 기다릴 수 없어 병원에 가서 진찰도 안 받고 서둘러 출근했다.강서연을 본 안이수는 기뻐했다. “드디어 돌아왔네요! 서연 씨가 제 옆에 앉아 있지 않으면 제가 일할 때 힘이 안 나요!”강서연은 웃으며 말했다.“한동안 못 봤더니 말을 점점 더 잘하시네요!”“서연 씨, 저 서연 씨한테 정말 죄책감이 들어요! 전에 제가 서연 씨와 함께 저녁 식사 자리에 간다고 고집했으면 서연 씨가 그 비열한 인간들한테 당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강서연의 안색이 변하더니 서둘러 안이수를 사람이 적은 복도로 끌어갔다.“이 일... 벌써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어요?”안이수는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아니요. 회사에서는 서연 씨가 갑자기 병가를 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담당자님은 서연 씨가 실수로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그 당시에도 모두가 함께 병원에 서연 씨를 보러 병문안을 가고 싶어했지만 담당자님께 제지당했어요."강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총괄 담당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단지 이치에 밝고 분별력이 있어 많은 일들에서 적절한 행동으로 넘어가고 쉽게 나서지 않는 것일 뿐이다.“그래서 누가 의심을 해도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요.”안이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미 지나간 일이니 걱정하지 말고 그냥 실수로 넘어져서 다리를 다쳤다고 해요!” “네.”총괄 담당자가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옳았다. 그녀는 여성이고, 평판이 중요했다. 이런 일이 밖으로 소문나면 듣기에 좋지 않다.“그건 그렇고, 서연 씨에게 좋은 소식 전해줄 거 있어요!”강서연은 안이수의 기쁜 표정을 보고 가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뭐가 그렇게 기쁜데요?” “손지창과 방진영 이 두 화근, 이제 우리 회사에 없어요!”“뭐요?”강서연은 충격을 받았다.“그럼 그 사람들은...”“저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연 씨가 입원한 다음 날 방진영이 상자를 안고 걸어가는 것을 봤어요. 그 인간이 떠날
윤찬은 땀을 많이 흘렸고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눈이 약간 빨갛게 충혈되었다.그는 강서연이 뛰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더 이상 눈물을 참지 못했고 너무 급한 나머지 그녀를 붙잡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누나, 집에 큰일 났어!""무슨 일이야?""누나의 언니가..." 그는 숨이 찼다.“강유빈 그 여자가 우리를 쫓아내겠다면서 많은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왔어!"강서연은 귓가가 윙윙거렸고 머릿속이 하얘졌다."그 여자가 많은 일꾼을 데려와서 집을 다시 회수한다면서 자기가 사용할 수 있게 새로 인테리어하겠다고 말했어! 누나, 저 집은 누나 아버지가 우리 엄마한테 주신 거 아니야? 그 여자가 무슨 권리로 되찾겠다는 거야!"강서연은 심장이 두근거렸고 강유빈이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해 잠시 당황했다."일단 돌아가서 보자!" 그녀는 윤찬을 진정시켰다."우리가 그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는데 바로 회수할 수는 없고, 그사이에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무슨 오해가 있을 수 있겠어? 강유빈의 나쁜 짓이 틀림없어!" 윤찬은 분노했다.“오늘 그 여자가 우리 집에 많은 사람들을 데려와서 나를 쫓아냈어... 흥,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가 그들을 이길 수 없었지만 매형은 이길 수 있잖아!""뭐라고?" 강서연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고 그녀의 작은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네 매형이 이미 이 일을 알고 있다고?""맞아!" 윤찬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큰일이라면 당연히 매형이 결정해야지!""너!"강서연은 불안하고 화가 난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그제야 윤찬은 깨달았다.구현수가 강유빈을 만나면 숨기고 싶은 모든 것을 더는 숨길 수 없을 것이다!"누나, 나...”윤찬은 스스로 잘못한 것을 알았다."내가 일부러 말한 게 아니라 급하고 무서워서 매형한테 전화한 거야!"강서연은 눈살을 찌푸렸다.“매형한테 뭐라고 말했어?”"말을 많이 하지 않았고, 누군가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린다고 말했고 주소를 보내줬어!”강서연은 잠시 말을 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
강서연이 멍한 얼굴로 자리에 굳어버렸다. 너무나도 억울한 나머지 그녀의 몸은 부르르 떨려오기까지 했다.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입술을 꽉 깨물고 두 글자 내뱉었다.“안 돼.”강유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서연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여긴 우리 집이야. 아빠가 우리 엄마한테 준 거라고! 우린 이미 이곳에서 수년을 살았어. 그러니까 어림도 없는 말 하지 마!”“하하. 너 그 말을 하는 게 얼굴이 뜨겁지도 않아?”강유빈이 표독스럽게 비웃으며 소리쳤다.“네 엄마라는 그 하찮은 작자를 들먹여? 그 여자가 우리 아빠한테 집을 받을 자격이나 돼? 우리 아빠는 그저 너희들이 하도 불쌍해서 잠시 등 붙일 곳을 마련해준 것뿐이야. 그래. 백번 양보해서 너희 엄마가 우리 아빠를 한동안 보살펴준 공이 있다고 하자고. 그렇게 널 낳았고. 하지만 쟨 도대체 뭔데!”강유빈이 윤찬을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저 정체불명의 잡종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우리 강씨 가문의 집에 사는 거야!”윤찬은 자존심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이 복잡하고 괴이한 가정 관계는 늘상 그로 하여금 친구들 사이에서 당당히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조금 전 강유빈이 하필이면 그가 가장 아파하는 곳을 바늘로 찌른 것이다. 순간 그동안 꾹꾹 놀러 오던 감정이 폭발해버릴 것 같았다.“그 입 다물어!”그는 강유빈을 쏘아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시퍼런 핏줄이 툭툭 튀어 올랐고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었다. 당장이라도 팔만 뻗으면 강유빈을 날려버릴 것 같았다.강서연은 그가 사고를 칠까 봐 두려워 다급히 달려나가 그를 막아 세웠다.강유빈은 처음엔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지만 이내 강서연과 윤찬이 정말 자신에게 손을 대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에 더더욱 그들을 몰아붙였다.“내 말이 틀려? 이 집안엔 정상적인 사람 하나 없어! 다 쓰레기들이야!”“강유빈, 선 넘지 마!”“선 넘으면 어찌할 건데?”강유빈이 강서연을 확 밀치며 말했다.“하찮은 년, 빨리 네 잡종 동생을 데리고
“당신들 죽었어?”강유빈이 주위에 서 있던 몇 명의 운반공들을 향해 소리쳤다.“당신들한테 구경이나 하라고 내가 돈을 준 줄 알아? 빨리 와서 날 도와!”하지만 그들은 구현수의 날카로운 눈빛에 겁을 먹고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강유빈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녀는 눈앞의 남자를 독기 어린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 순간 자신을 짓누르는 것 같은 남자의 기세에 압도당해 간담이 서늘해졌다.“강... 강서연!”그제야 덜컥 겁이 난 그녀가 소리쳤다.“빨리 네 남편을 막지 않고 뭐 하는 거야! 똑똑히 일러두는데 오늘 감히 날 건드린다면 곧장 경찰에 신고해 다시 콩밥을 먹게 할 거야!”그녀의 말을 들은 구현수가 자신의 손에 힘을 더 거세게 가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그의 미소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금이 저려오게 만들었다.강유빈은 다리에 힘이 풀려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그의 눈앞에 꿇어앉았다.“강씨 집안 아가씨라는 사람이 말끝마다 욕설을 지껄이다니, 입이 너무 천박하고 더러운 거 아니에요?”구현수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왜 그런 거예요? 설마 강씨 집안이 당신에게 치약 하나 사주지 못할 정도로 타락한 건가요?”말을 마친 그가 힘껏 팔을 휘두르자 강유빈의 몸 전체가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강서연이 다급히 달려가 그를 막아 세우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구현수가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그는 종래로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하지만 강유빈이 끝을 모르고 도발을 해대니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그는 물은 이미 엎질러졌으니 차라리 이 지독한 여자를 끝장내 버리리라 생각했었다.하지만 강서연의 눈동자에 비친 걱정스러움과 간절함을 보고 나니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강서연은 강유빈이 아닌 그를 위해 막은 것이라는 걸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그가 정말 강유빈에게 상처를 입히기라도 한다면 정말 경찰서에 잡혀가 감옥 생활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구현수는 빙그레 미소지으며 그녀에게 안심해도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어 그가
고기를 썰던 강서연의 손이 멈췄다. 얇은 입술을 꽉 깨문 그녀의 얼굴에 복잡함이 피어올랐다.그녀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이어 진주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미안해요... 제가 현수 씨를 속였어요. 난 강유빈이 아니라 강서연이에요. 난 강씨 집안 아가씨가 아니라 세상에 내놓을 수 없는 사생아일 뿐이에요. 그래서 돈도 없어요... 화가 난다면 어떻게든 보상해 줄게요. 어떻게 보상할지는 현수 씨 뜻에 따를게요. 그러니까 엄마와 찬이에겐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두 사람은 이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요. 난...”“정말 내 뜻에 따를 거야?”구현수가 입꼬리를 슥 올리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네?”그가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요구하는 보상은 아주 비싸.”강서연은 살짝 겁을 먹었지만 단호히 말했다.“괜찮아요. 그게 무엇이든 꼭 현수 씨를 만족시켜 줄게요.”구현수는 돌연 그녀의 가는 허리를 감싸 안고는 초롱초롱한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그가 진지한 얼굴로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넌 나와 한평생 함께 사는 거로 보상해야 해.”강서연은 의외라는 듯 눈이 휘둥그레 졌다.“왜 그래? 한평생이 짧아?”그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그럼 다음 생에도, 다음다음 생에도 함께 있어 줘.”그녀가 멍한 얼굴로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드디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얼굴로 그의 가슴에 기대고는 그를 꼭 껴안았다.구현수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다정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강씨 집안 아가씨가 아니라 너라는 사람 자체야. 그리고... 내 출신 또한 별 볼 것 없잖아. 그런데도 넌 날 밀어내거나 싫어하지 않았어. 널 얻은 건 내 인생에 가장 큰 행운이야.”“현수 씨는 내 남편인데 왜 밀어내겠어요?”“그러니까.”그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넌 내 아내인데 왜 내가 너한테 화를 내겠어?”강서연이 그제야 환한 웃음을 지었다. 두 볼에 사랑스
강서연이 잠시 멈칫하고는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실은 저도 찬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몰라요. 제가 기억하는 건 7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엄마가 저를 이웃 사람에게 맡겨두고 예쁘게 꾸민 채 나갔다는 거예요. 그로부터 한 달 뒤에야 돌아오셨어요.”“제가 엄마한테 버려진 거로 여겨 절망하려고 할 때 엄마가 돌아왔어요. 떠나기 전처럼 여전히 아름다웠어요. 다만 두 눈엔 광채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마치... 마치 살아있는 송장 같은...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해주지 않더라고요.”“그 뒤로 얼마 후 엄마는 찬이를 낳았어요.”강서연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그 사실을 알게 된 아빠는 엄마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죠. 두 사람이 싸우던 그 날, 전 엄마가 아빠를 보며 지은 웃음을 봤어요. 정말 무서웠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등골이 서늘해져요.”“그날 아빠는 수표 하나를 던져놓고 떠났어요. 그 뒤론 다시 돌아오지 않았죠. 제가 결혼하기 전까지 말이에요.”강서연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아마 그 돈으로 저랑 엄마와의 관계를 끊어낸 거겠죠.”구현수는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그는 지나간 그녀의 삶에서는 함께하지 못했다. 하지만 앞으론 절대 그녀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다....구현수가 유찬혁의 사무실에 앉아있었다.그곳에 들락거리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유찬혁은 명실공히 능력 있는 변호사이다. 때문에 그곳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사회에서 한자리하는 거물들이다.하지만 구현수는 후줄근한 차림에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있었다. 거기에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과 냉랭한 분위기까지 더해지니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의 신분을 유추하게 만들었다.“유 변호사가 어떻게 저런 사람을 아는 거죠?”“요즘 형사 안건 몇 개를 맡았다고 하던데... 설마 범죄 용의자가 찾아온 걸까요?”구현수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힐끗 시선을 돌리자 그들은 흠칫 놀라며 자리를 떴다.유찬혁의 다급한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
어느 일요일, 정승우는 돈을 꼭 쥔 채 백인서를 찾아갔다.처음에는 백인서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백인서는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맛있는 건 이미 다 먹어봤을 테니, 한 끼 식사가 백인서에게 그다지 특별할 리 없었다.그럼에도 정승우는 이 돈으로 어떻게든 백인서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결국 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이렇게 제안했다.“백 선생님, 우리 놀이공원 가요! 제가 살게요.”백인서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정승우의 간절한 부탁에 결국 놀이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사실, 백인서도 놀이공원은 처음이었다.오랜 시간 오성에서 살았지만, 이런 곳에 대해선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여긴 웃음과 즐거움이 넘쳐흐르는 곳이었고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처럼 느껴졌다.늘 자신에겐 잿빛 하늘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최지용을 만난 후에도 이곳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커플들이 관람차를 타면 결국 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백인서는 최지용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기에 그 소문이 괜히 두려워 오지 않았던 것이다.“백 선생님, 무슨 생각 해요?”맑고 발랄한 목소리가 백인서를 현실로 끌어당겼다.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 가득한 눈을 내려다보았다.“제가 이미 자유 이용권을 사뒀어요.”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자유 이용권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자유 이용권이 뭔지 아세요? 그거 있잖아요, 놀이공원의 모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거요! 따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해요!”“생각보다 똑똑하네.”백인서는 미소를 지었다.“적응력도 빠르고.”“똑똑하지 않으면 선생님을 즐겁게 해드릴 수 없잖아요!”“그래, 오늘은 네 말에 따를게.”백인서는 정승우를 바라보며 물었다.“먼저 어떤 걸 타볼까?”남자애들은 자극적인 놀이기구를 특히 좋아하곤 했다. 정승우는 백인서를 데리고 롤러코스터, 자이로드롭, 급류타기 같은 놀이기구들을 함께 탔다.하지만 백인서는 오히려 회전목마를 타고 싶었다.두 사람은 떠들썩한 놀이공원에서 땀을
정승우는 정대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정대명은 문을 열어 정승우를 들여보냈다. 정승우는 방 안을 둘러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방은 마치 금으로 뒤덮인 듯 반짝이고 있었다.정대명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니.정승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런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여긴 왜 온 거야?”정대명은 거칠게 정승우의 등을 밀며 물었다.“지금 학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정승우는 정대명을 돌아보며 무심하게 말했다.“그냥 좀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왔죠.”“네가 날 보러 왔다고?”정대명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소리를 들은 듯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개자식이 언제부터 제 아비를 생각했다고! 흥!”정승우는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제정신이라면 주먹만 휘두르는 아버지를 그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좋아요, 그러면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술 마실 시간 뺏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정승우는 정대명의 손에 들린 술병을 힐끔 보고, 시선을 그의 바지 주머니로 옮기며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저, 다 봤어요!”“뭐?”“그 여자가 아버지에게 돈을 준 거요.”정대명은 당황하며 정승우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정승우는 재빠르게 옆으로 비껴가며 비웃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저, 다 봤고, 다 들었어요! 두 분은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이 자식아, 헛소리하지 마!”정대명은 부끄러움과 분노에 휩싸였다. 또 영미의 경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 일이 절대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헛소리 아니에요.”정승우는 이례적으로 침착한 표정이었다.“아버지는 그 여자랑 손잡고 우리 누나를 모함하려는 거잖아요!”“이 자식이!”“아버지, 제 입을 막고 싶으시죠?”“뭐?”정대명은 얼떨떨해졌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이 일은 비밀로 해 드릴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정승우는 천천히 말했다.“단, 입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