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수를 배웅하고 난 뒤 유찬혁은 사무실에 앉아 홀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최연준은 그 누구에게도 온정 한 점 베풀지 않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냉혈인이었다.하지만 강서연을 위해 소송을 맡기를 강요하고 있는 이 구현수에게선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다.변호사로서의 그는 구현수가 강서연에게 정을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필경 그들은 언젠가 헤어질 것이니 말이다. 오성 최씨 가문에서 어떻게 강서연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하지만 우애 좋은 형제로서는...유찬혁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하는 수 없이 자세히 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며칠 후 그는 연구 결과를 구현수에게 알려주었다.“제 견해는 저번과 다르지 않아요. 이 서류들은 강서연 씨에게 조금의 도움도 안 돼요.”구현수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유찬혁이 두 번 헛기침을 하고 난 뒤 말을 이어갔다.“다른 루트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말해.”“강서연 씨의 모친이 살고 있는 그 아파트 단지 말이에요. 예전엔 작은 마을이었는데 도시화 정책이 실행되어 아파트 구역으로 개조됐다고 해요.”구현수가 그를 쳐다보았다.“그래서?”“그 집은 사면 안되는 집이었어요.”유찬혁이 설명했다.“당시 법률상 매매를 금지한 시기가 잠깐 있었는데 시간이 급했는지 하필이면 그사이에 샀더라고요.”“그러니까, 강명원이 매매를 진행한 자체가 위법이라는 거지?”유찬혁이 익살스런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엄지를 세워 보였다.구현수는 진지한 얼굴로 한참 생각하다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아주 좋아.”그가 유찬혁을 보며 말했다.“그쪽으로 공략해.”“하지만...”유찬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송을 진행할 때 그는 항상 깔끔하고 간단하게 정면으로 부딪쳤었다. 이런 비겁하게 빙빙 돌아가는 건 그가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었다.더욱이 이런 어린아이들 말싸움같이 사소한 사건이라니.“형, 저같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이 일을 맡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구현수의 입꼬리가 살짝 경련했다.강서연은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구현수가 또다시 예전처럼 망나니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부정당한 수단으로 협박해 강명원으로부터 집을 얻어냈을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일시적으론 성공으로 보이겠지만 앞으로 어떤 고난이 찾아올지 모른다.그녀는 정말이지 구현수가 다시 불필요한 일에 휘말리는 걸 원하지 않았다.“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구현수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걱정하지 마. 정당한 방법으로 한 거니까. 내가 다시는 나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난 내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야.”“하지만 우리 아빠는...”“나 변호사한테 부탁했었어.”그가 덤덤히 말했다.“그 변호사는 내가 예전... 구치소에 있을 때 알게 되었는데 안타까운 상황에 처한 범죄자들을 돕는 좋은 사람이야. 내가 구치소에서 나온 이후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어.”“그랬었군요.”강서연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그럼 그분한테 감사 인사를 해야겠네요. 우리 집에 초대해 밥 한 끼 대접하는 거 어때요?”“지금은 그럴 필요 없어. 변호사님 요즘 바빠. 기회가 생기면 다시 얘기하자.”강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집문서를 잘 보관해두었다.구현수가 그녀의 등 뒤에서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며칠 동안 그녀의 가족 일 때문에 바삐 돌아치느라 뜨겁게 키스를 나눈 지도 꽤 오래되었다.마침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와 분위기를 후끈 달아 올렸다. 거기에 그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향긋한 향까지 코끝을 간지럽혔다.구현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목덜미에 파묻고는 아래위로 얼굴을 비비며 그녀를 탐했다.그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할 때 강서연이 작은 손을 뻗어 그를 막고는 미안한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저기... 오늘은 좀 불편해요.”“뭐가 불편한데?”“그...”강서연의 작은 얼굴이 발그레해졌다.“배가 아파요.”그 말은 뜨거워진 구현수의 몸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
구현수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는 편한 자세로 고쳐 눕고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첫째, 자신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면 안 돼요. 난 부귀영화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에요. 돈이야 얼마를 벌든 상관없어요. 살 수 있을 만큼 벌면 되는 거죠. 가장 중요한 건 당신이 편히 일하는 거예요. 알겠죠?”그가 고개를 끄덕였다.“둘째, 위험한 일을 하면 안 돼요.”강서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경기에서 너무 안간힘을 쓰지 말라는 얘기예요. 우린 상금 같은 거 필요 없어요. 항상 당신의 안전이 보장된 조건에서만 백 프로 당신을 지지할 수 있어요.”“셋째는...”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다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여자 학생에게 당신의 근육을 만지게 하면 안 돼요!”구현수는 참지 못하고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강서연은 새빨개진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파묻고는 그를 톡톡 두드렸다.“정말이에요!”그녀가 말했다.“저도 여자라 여자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아요! 아무튼... 아무튼 절대 만지게 하면 안 돼요. 정상적인 접촉은 괜찮지만 선을 넘는 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당신이 약속해주지 않으면 나가지 못하게 할 거예요! 어디도 가지 말고 그냥 얌전히 집에만 있어요!”씩씩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순간 구현수의 마음에 연민의 감정도 피어올랐다.그는 그녀를 꼭 껴안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대고 맹세했다.“알았어. 뭐든 네 말대로 할게.”강서연의 팽팽했던 긴장감이 그제야 가라앉았다. 그녀는 빙그레 웃음 짓고는 얼마 되지 않아 그의 품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꿈나라를 거닐면서 말이다....다음날은 주말이었다.강서연은 구현수의 팔짱을 끼고 나가 쇼핑을 했다.그는 쇼핑엔 조금의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꼭 그에게 그럴듯한 옷을 사주어야 한다는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이곳저곳 바삐 돌아쳐야 했다. 한동안 떠돌아다니다 드디어 남성복 브랜드숍을 찾아낸 강서연이
구현수는 의아한 얼굴로 강서연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어느새 강유빈이 매장으로 들어와 조롱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며 피식거리고 있었다.강서연이 구현수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려고 한 순간, 강유빈이 한 발자국 나서며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이런 우연이 있나!”강유빈이 아니꼬운 표정으로 말했다.“보아하니 우리 동생 꽤 잘나가나 본데? 승진하고 월급도 올랐다며? 이제 남편을 데리고 이런 브랜드숍에도 오고 말이야!”“아참, 새로 산 아파트는 어때? 반드시 깨끗이 잘 써야 할 거야! 그 집은 아빠가 고뇌에 고뇌를 다 한 끝에 고른 거니까!”강서연은 그녀의 말에 뼈가 있음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들어 강유빈과 시선을 맞추었다. 강유빈 눈 속의 분노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처럼 날카로웠다.“맞아요. 장인어른이 우릴 위해 애써주셨어요.”구현수가 담담히 웃으며 강서연을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겼다.“좋은 집을 골라주셨을 뿐만 아니라 집문서에 우리 서연이의 이름까지 넣었다니까요! 안타깝게도 누구는 이제 작업실을 다시 찾아야 할 것 같네요. 젊고 창창한 나이에 문제 있는 집에 들어갔다가 콩밥을 먹으면 안 되잖아요?”“당신...”강유빈이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반면 구현수는 한없이 평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유빈 따위가 뭘 하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말이다.“당신 둘 과하게 나대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강유빈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우리 강씨 가문이 아량을 베풀어 거지한테 남는 집 하나 던져준 것뿐이니까!”“강씨 가문 큰 아가씨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네요!”구현수는 그녀와 더는 말을 섞기 싫어 강서연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강유빈이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강서연, 거기 서!”강서연이 뒤돌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무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나 요즘 너희 회사와 프로젝트 하나를 하고 있어.”강서연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일었다.강유빈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이어
강서연이 귀를 쫑긋 올리고 신경을 곤두세웠다.뒤돌아 살펴보니 야한 차림의 여자가 구현수에게 매혹적인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 손으론 와인잔을 살랑살랑 흔들었고 다른 한 손으론 치마 아래 자락을 확 찢어 새하얀 다리가 드러나게 했다.강서연은 돌연 그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서빈?”그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강유빈은 어디든 저 친구와 함께 다니는구나...예전 학창시절 서빈은 늘 강유빈과 함께 강서연을 괴롭혔었다. 그 후 성적이 바닥을 치는 데다, 술집을 드나드는 것까지 밝혀져 퇴학을 당했다.서빈은 강주시에서 평판도 그리 좋지 않았는데도 강유빈이라는 뒷배를 등에 업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으스대고 있었다.강서연은 답답함에 견딜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객 접대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단호히 방향을 돌려 구현수에게로 걸어갔다.“혼자 술 마시면 재미없잖아요?”서빈이 얇은 허리를 흔들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우리 같이...”“나랑 같이 마시는 게 어때?”돌연 한기가 가득 실린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서빈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강서연의 날카로운 눈매가 눈에 들어왔다.구현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이어 흥미롭다는 듯 씩 웃음을 지었다.강서연은 등으로 구현수를 막아서고는 정면으로 서빈의 도발적인 얼굴과 마주하며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나 기억 안 나? 학창시절엔 매일 내 숙제를 빼앗아 베끼더니 이젠 내 남자까지 빼앗으려고?”“어머, 강서연 동생이네!”서빈이 손으로 입을 막고 쿡쿡 웃어댔다.“그게 무슨 말이야? 난 그냥 이 멋진 남자분이 알고 싶었을 뿐인데 네 남자를 빼앗으려 한다니. 거기다 조금 전 넌 여기에 없었잖아. 내가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알겠어!”“그럼 이젠 알겠지?”강서연이 그녀를 노려보았다.“알았으면 얼른 가!”구현수는 얌전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눈앞의 이 여자는 작은 주먹을 꼭 움켜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의연한 표정과 단호한 태도로 서빈
그녀는 구현수가 넓고 따뜻한 품에 자신을 껴안아 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일분일초가 속절없이 흘러감에도 그녀가 기대하는 안정감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현수를 쳐다본 순간, 구현수는 서빈을 향해 걸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강서연의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봤죠? 남자는 역시 현실적이라니까요.”누군가 피식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서빈 씨가 평판이 좋지 않긴 하지만 강서연 씨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부자잖아요.”“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다른 여자에게 유혹당하는 남편을 지켜만 보고 있다니... 강서연 씨 너무 불쌍해요. 평소 남편을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더니 지금은...”“이래서 남자들을 너무 오냐오냐해주면 안 된다니까요!”강서연은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저 멍한 얼굴로 제자리에 굳어있을 뿐이었다.“현수 씨, 당신...”“여보, 하마터면 서빈 씨를 다치게 할 뻔했잖아.”구현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서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괜찮아요?”그 말에 서빈은 환희와 불안감이 섞인 얼굴로 구현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이토록 멋진 분이 걱정해주는데 당연히 괜찮죠!”서빈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저랑 춤 한 번 추실래요? 손을 잡아보니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구현수!”강서연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구현수는 그런 강서연을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서빈을 밀어내기는커녕 도리어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이에 강서연을 보는 서빈의 눈동자엔 득의양양함이 한층 더 짙어졌다.“서빈 씨, 제 손이 좋아요?”구현수가 여자를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한 감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서빈은 이미 그에게 푹 빠져버린 듯했다.“당연하죠!”“예전 이 손으로 누군가를 죽였다 해도요?”순간 서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구현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하늘 높은 줄 모르고
파티장은 다시 원래의 질서를 되찾았고 사람들은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말이다.하지만 다들 몰래 소곤소곤 서빈을 비웃고 있었다.구현수는 강서연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강서연은 춤에 서툴렀지만 구현수가 이끌어주니 어색함 없이 부드럽게 그와 함께 음악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선남선녀의 춤이 끝나니 이곳저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서빈은 여전히 분노에 부들거리고 있었다. 강유빈은 못마땅한 듯한 얼굴로 그녀를 흘겼다.“너 정말 쓸모없어!”“강유빈, 너...”“너 스스로 마당발이라고 자랑했잖아? 남자들이 너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며?”강유빈이 씩씩거리며 말했다.“구현수 한 놈도 처리하지 못하면서! 사람을 죽였다는 말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겁을 먹다니! 쓸모없는 게 아니면 뭐야!”서빈이 괴로운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전에 그녀는 강유빈과 반드시 강서연에게 창피를 줄 거라 약속했었다. 하지만 창피를 당한 건 오히려 자신이 되었다.그녀는 처음 구현수를 보았을 때 그의 준수한 외모에 본능적으로 마음을 빼앗겼었다. 하지만 싸늘하게 웃는 얼굴로 사람을 죽였다고 말하는 순간, 눈동자에 비친 살기, 입꼬리에 깃든 뼈까지 시리게 만드는 한기, 그리고 그에게서 풍기는 압박감 모두가 그녀를 등골이 서늘해지게 만들었었다.그녀가 미쳤다고 살인범을 유혹하겠는가!“강유빈.”한동안 흐르던 침묵을 깨고 서빈이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며 말했다.“우리에게 아직 역전의 가능성은 있어.”강유빈이 분노에 차올라 먼 곳에 있는 강서연을 노려보았다.“어떤 방식이든 강서연을 눌러버리기만 하면 목적 달성 아니야?”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강서연의 남자는 별 볼 일 없지만 네 주변의 남자는 다르잖아!”강유빈이 흠칫 놀라며 물었다.“무슨 뜻이야?”“너한텐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잖아!”순간 강유빈의 얼굴에 긴장감이 차올랐다.이어 서빈은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한 장의 사진을 찾아냈다.“유빈아, 이것 봐!”
서빈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사람들을 향해 핸드폰을 흔들었다. 핸드폰 속 화면엔 확실히 강유빈과 남자 한 명의 모습이 찍혀있었다.“다들 처음 보죠? 이분이 바로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에요! 강유빈은 당시 도련님의 환영 파티에 참석한 거고요!”“오성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요?”“당연하죠!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귀공자세요!”사람들은 모두 강유빈에게 부러움의 눈빛을 보냈다.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은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매체에 공식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었다. 하여 그를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그 숫자가 적었다.그런데도 강유빈은 최씨 가문 파티에 초대받았을 뿐만 아니라 셋째 도련님과 사진까지 찍었다고 한다.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감탄과 부러움의 목소리가 파티장을 가득 채웠다.강유빈은 본래 서빈을 막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따지는 사람이 없으니 이대로 이 분위기를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그날 밤 강서연이 대신 들어간 게 뭐 어떻단 말인가. 강서연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것 또한 상대할 방법은 있다!강유빈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저 멀리 강서연과 구현수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그녀가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걸어가 서빈에게 눈빛을 보냈다. 서빈은 단번에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사진을 강서연에게 들이밀며 비아냥거렸다.“강서연 동생, 이날 밤 너도 갔지? 그런데 왜 도련님과 찍은 네 사진은 못 봤지?”강서연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강유빈을 쳐다보았다.“사생아답게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는 거지.”강유빈이 말을 보탰다.“셋째 도련님 같은 고귀한 분이 어떻게 저런 비천한 사생아와 사진을 찍을 수가 있겠어?”강서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날 밤 넌...”“왜? 설마 너 혼자 들어간 줄 알았어?”강유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널 마중 나온 건 최씨 집안의 개였지만, 나한텐 셋째 도련님이 직접 나오셨더라고!”구현수는 흠칫 놀라며 목구멍까지 올라온
영미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최지용을 지켜보았다.최지용은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구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전화를 걸기도 했다.영미는 바로 뒤를 따라갔고 최지용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찾았습니까?”“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세요... 만약 납치범의 목적이 돈이었다면 분명 전화를 걸어올 겁니다!”영미의 가슴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납치범이라니? 대체 뭘 찾는다는 거지?백인서와 통화한 걸까?그때, 최군성이 큰 소리로 외쳤다.“지용이 형, 여기서 뭐 해요?”영미는 얼른 몸을 숨겼고 최군성은 최지용에게 다가가 최지용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우리 형이 찾고 있었는데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예요? 어서 와서 먹고 즐기자고요!”최지용은 최군성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며 영미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동시에 잠시 멈칫했다.영미는 급히 시선을 피하며 억지 미소로 인사했다.“지용 오빠...”“어, 영미?”최군성도 배윤아처럼 물었다.“여기 웬일이야? 형님이 널 초대한 것 같지 않은데?”“그게...”영미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최군성은 영미의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지용을 끌고 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최지용은 점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영미가 도대체 여기 왜 있는 거지?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사람이, 왜 하필 오늘 온유가 사라진 날에 나타난 걸까?그때, 최군형과 강소아가 가원이를 품에 안고 나타났다.강소아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혔고 아이는 보행기 가장자리를 잡고 작은 발을 내디뎠다. 이 모습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영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자리를 떠 교외의 버려진 공장으로 향했다.그 시각, 정대명은 영미의 지시에 따라 승합차를 몰고 공장에 도착해 있었고 영미가 도착했을 때 그는 공장 문 앞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미는 핸드백을 휘둘러 정대명에게 던졌다.“정대명 씨, 감히 날 속여
“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정대명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결국엔 자기 아들이었기에 정승우에게 감출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때리고 꾸짖어도 떠날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정대명은 서랍에서 가위를 꺼내 들고는 권온유의 양 갈래머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다가 막아서려는 순간, 자신과 정대명 사이에 힘의 격차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작정 나섰다가는 역부족일 터였다.정승우는 이를 악물고 정대명에게 다가가 물었다.“아빠, 정말 이 아이를 팔 생각이에요?”“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영미라는 그 여자가 원하는 거야!”정대명은 불만스레 대꾸하며 정승우에게 옷장에 있는 헌 옷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정승우가 옷을 가져오자, 정대명은 손을 뻗어 권온유의 예쁜 드레스를 찢으려 했다. 정승우는 급히 소리쳤다.“뭐 하는 거예요!”“이 자식이!”정대명은 정승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조용히 해! 죽고 싶어?”“아빠, 이건...”“이 애한테 옷을 갈아입히려는 거야!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바로 눈에 띄잖아.”정승우는 다가가 정대명을 옆으로 밀치며 말했다.“제가 갈아입힐게요!”“이놈이...”정대명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그는 정승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아하, 아빠를 도와주고 싶구나? 역시 아들은 아들밖에 없지! 그래, 네가 손이 빠르니까 빨리 옷을 갈아입혀. 둘이 함께 가자고!”정승우는 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저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정승우는 권온유의 드레스를 벗기지 않고, 정대명의 헌 옷을 위에 입혀 단단히 감쌌다. 그런 다음 모자를 씌워 얼핏 보면 남자아이처럼 보이게 했다.“좋아, 이 정도면 되겠어!”정대명은 정승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뒷문에 승합차가 준비돼 있대. 어서 출발하자!”“아빠, 이 소녀는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예요?”“교외지!”정대명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빨리 움직
권온유는 깜짝 놀라며 정대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아저씨가 맛있는 걸 가지고 왔단다. 배고프지 않니?”권온유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달아나려 했다. 정대명은 급히 권온유 앞을 가로막았다.“아니, 가지 마!”정대명은 두 손으로 권온유를 꼭 붙들며 말했다.“그게... 네 엄마가 나한테 너를 데려오라고 부탁했어!”엄마라는 말을 듣고 권온유는 잠시 멈칫했다.“정말이야, 네 엄마가 부탁한 거라니까!”정대명은 거짓말을 이어갔다.“방금 네 엄마가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렸지? 너 보고 기다리라고 했잖아?”“네... 맞아요.”“그래!”정대명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네가 여기저기 막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엄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알 거예요. 저는 여기서 조금 놀다가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 거예요!”“오... 그렇구나.”정대명은 잠시 생각을 굴렸다.“아저씨가 휴게실이 어딘지 아니까, 내가 데려다줄게!”권온유는 경계하며 정대명에게서 몸을 빼내고 두 걸음 물러났다.“얘가! 난 정말로 네 엄마 친구라니까. 네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엄마가 널 못 찾게 되면 걱정하지 않겠어? 맞지?”“자, 자!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착하지!”정대명은 권온유를 갑자기 붙들어 어깨에 둘러맸다. 권온유는 본능적으로 소리치려 했지만, 정대명의 손이 입을 단단히 막고 있어 소리를 낼 수 없었다.어린 소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정대명은 권온유의 머리 뒤쪽을 세게 내리쳐 기절시켰고, 온유가 들고 있던 인형은 땅에 떨어졌다....정승우는 익숙하게 호텔로 와서 지난번 일을 핑계로 다시 정대명에게 돈을 뜯어낼 생각이었는데, 방 안에 기절한 어린 소녀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어른 일에 참견하지 말고 신경 꺼!”정대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방금 정대명은 온유를 데려오며 보안과 호텔 직원의 눈을 피하고자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가지 않고,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속여서 안
“엄마, 우리 오늘도 여기서 밥 먹어요?”“그래. 네가 제일 좋아하는 게 고등어조림 요리잖아.”“그런데...”권온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켰다. 사실 권온유는 집에서 밥을 먹고 싶었다.어린 권온유도 느낄 만큼 엄마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방금 대답조차 어딘가 건성으로 들렸다.권온유는 어른들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걸까? 누군가 아빠와 다른 여자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내기만 하면, 엄마는 이렇게 변해버렸다.“엄마...”권온유는 엄마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그러나 조순영은 갑자기 권온유의 손을 놓고는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권온유는 깜짝 놀라 인형을 떨어뜨렸다.“엄마!”“온유야,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조순영은 급히 돌아보며 외쳤다.“엄마 금방 올게!”권온유는 엄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시야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는 아빠가 다른 여자가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통제력을 잃고 온유를 혼자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고 한참 후에야 멍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곤 했다.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던 정대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몇 번이나 이 모녀를 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이 여자는 자주 아이와 함께 식사하러 왔는데 가끔 혼자 올 때도 있었다...남편의 외도를 잡으려는 걸까?맞아, 틀림없이 그런 거다!정대명은 매일 호텔에 살면서 듣는 소문도 적지 않았다. 한 회장이라는 사람은 아내와 자식이 있음에도 바람이 잦았다고 하는데 그 회장은 차기 시장의 사위가 될 인물이라는 말도 있었다.정대명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이런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차피 남자가 바깥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정대명은 다시 어린 소녀를 주시했다. 소녀
정대명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얼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며칠을 기다린 결과가 고작 최가원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그럼에도 영미는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다.“정대명 씨, 대체 뭐 하고 있는 겁니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훔쳐 오는 게 그렇게 어렵나요?”젠장! 정대명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보석을 훔치는 게 더 쉬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하하... 영미 아가씨.”마음속으로는 욕하고 있었지만, 얼굴엔 여전히 웃음이 서려 있었다.“이게, 그렇게 쉽지 않네요! 제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 경호원들이 전부 총을 들고 있더라고요. 제가 무턱대고 나서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정말 쓸모없네요.”영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내가 사람들까지 매수해 놨는데, 일을 이따위로 하다니!”정대명은 억눌린 분노를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말해 두겠는데요!”영미는 한발 더 나아가 말했다.“이 일 못 해내면, 화려한 호텔 스위트룸도 더 이상 못 쓰게 될 테고 돈 한 푼도 못 받는 줄 아세요! 다시 그 작은 산골 마을로 돌아가서 평생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으면 똑바로 하세요!”정대명은 이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호사에 길든 사람이 다시 가난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최근 정대명은 오성에서 살아가며 화려한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이 잘 먹고 살게 도와줬고 돈까지도 넉넉히 주니 점점 체면이 생기기 시작했다.호텔에서 정대명이 매일 스위트룸에서 지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를 대단한 부자로 착각했고 그에게 예의를 갖추며 인사했다.이런 삶은 초라했던 지난날에선 꿈도 꾸지 못한 것이었다.고작 아이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걸 잃기엔 너무 아까웠다.정대명은 급히 전화기를 붙잡고 외쳤다.“영미 아가씨, 너무 흥분하지 마!”영미는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내가...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정대명은 어영부영 답했다.“겨우 아이 하나 가지고, 뭐 대단한 일도 아니지! 내가
백인서는 웃으며 정승우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정승우는 전혀 망설임 없이 백인서의 그릇에 고기가 많은 걸 보자마자 젓가락을 뻗었다.“너 지금 내 소고기를 뺏어 먹는 거야?”“사장님이 누나만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안 돼, 내 거야. 뺏어 먹지 마.”백인서는 웃으며 말했다.“이건 사장님이 특별히 주신 사랑의 소고기야!”“저는 성장기 남자애라 많이 먹어야 해요!”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면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었다. 백인서가 정승우에게 국수를 한 그릇 더 가져다주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달콤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고모!”백인서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예쁘고 앙증맞은 작은 공주가 백인서에게 달려왔다.“온유야?”권온유는 백인서에게 달라붙어 작은 머리로 백인서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정승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정승우는 이렇게 예쁜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두 갈래로 묶은 머리에 공주 같은 퍼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아까 놀이공원에서 본 백설 공주처럼 보였다.이 아이는 정말 동화 속에서 나온 공주일까?작은 소녀는 고개를 기울여 정승우를 한 번 바라보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백인서를 보며 물었다.“고모, 이 사람은 누구예요?”“이 사람은...”백인서가 대답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권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오빠는 학교에서 우등생이야.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거든. 온유도 나중에 커서 이 오빠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해.”백인서는 권욱을 올려다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왜? 딸과 단둘이 외식하러 나오는 게 이상해?”“아니요.”백인서는 고개를 저었다.“그냥 권욱 씨가 이런 작은 가게에서 식사하실 줄은 몰랐어요...”“여기도 꽤 유명한 맛집이야!”권욱은 의자에 앉으며 사장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오늘 주말이라 온유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 녀석이 배고프다고 해서 핸드폰으로 근처 맛집을 검색해 보니 이곳 평이 좋더라고.
정승우의 머릿속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그 시절, 백인서는 낮에는 그를 등에 업고 다녔고 밤에는 재워주며 보살폈다. 따뜻함이라고는 거의 없었던 그의 삶에서 백인서는 유일하게 빛을 밝혀 준 존재였다.누가 세 살, 네 살 아이에게 기억이 없다고 했던가? 그 기억은 정승우의 성장 내내 곁을 지켜 주었고 다시 누나를 찾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누나, 제발... 울지 마세요. 백 선생님!”백인서는 깜짝 놀라 정승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에 눈물을 멈췄다.두 사람은 작은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우연히도, 이곳은 예전에 최지용이 백인서를 데리고 와 소고기 국수를 먹던 곳이었다.이번에도 그 가게 주인이 반갑게 맞이하며 다가왔다.“오, 이게 누구야! 귀한 손님이 오셨네!”그의 시선이 정승우에게로 멈췄다.“이 아이는?”“동생이에요!”정승우가 먼저 씩씩하게 대답했다.백인서는 미소를 지으며 주인에게 소고기 국수 두 그릇을 주문했다.주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한번 보고는 주방으로 돌아가 푸짐하게 고기가 올라간 소고기 국수를 내왔다.“얼른 먹어!”백인서는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여긴 정직하게 장사하는 곳이라 양도 푸짐하고 맛도 아주 좋아. 지용 씨가 나를 데리고 왔던 곳인데...”최지용을 언급하자 백인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정승우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백인서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남자, 누나한테 잘해 줘요?”백인서는 모르는 척하며 대답했다.“무슨 남자?”“그러니까, 방금 말한 그 지용이란 사람 말이에요!”정승우는 더욱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숨기지 않아도 돼요. 산에 있을 때, 두 사람이 포옹하는 것도 봤고 그 사람이 누나한테 키스하는 것도 다 봤어요!”“정승우!”백인서는 정승우를 노려보았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쏠렸다.“그만해!”백인서는 테이블 아래로 정승우의 다리를 가볍게 툭 차며 말했다.“애가 무슨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저
어느 일요일, 정승우는 돈을 꼭 쥔 채 백인서를 찾아갔다.처음에는 백인서에게 밥을 사주고 싶었지만, 지금의 백인서는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맛있는 건 이미 다 먹어봤을 테니, 한 끼 식사가 백인서에게 그다지 특별할 리 없었다.그럼에도 정승우는 이 돈으로 어떻게든 백인서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결국 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이렇게 제안했다.“백 선생님, 우리 놀이공원 가요! 제가 살게요.”백인서는 원래 거절하려 했지만, 정승우의 간절한 부탁에 결국 놀이공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사실, 백인서도 놀이공원은 처음이었다.오랜 시간 오성에서 살았지만, 이런 곳에 대해선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여긴 웃음과 즐거움이 넘쳐흐르는 곳이었고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상처럼 느껴졌다.늘 자신에겐 잿빛 하늘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으니까.최지용을 만난 후에도 이곳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커플들이 관람차를 타면 결국 헤어진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백인서는 최지용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기에 그 소문이 괜히 두려워 오지 않았던 것이다.“백 선생님, 무슨 생각 해요?”맑고 발랄한 목소리가 백인서를 현실로 끌어당겼다.백인서는 정승우의 미소 가득한 눈을 내려다보았다.“제가 이미 자유 이용권을 사뒀어요.”정승우는 백인서에게 자유 이용권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자유 이용권이 뭔지 아세요? 그거 있잖아요, 놀이공원의 모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거요! 따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해요!”“생각보다 똑똑하네.”백인서는 미소를 지었다.“적응력도 빠르고.”“똑똑하지 않으면 선생님을 즐겁게 해드릴 수 없잖아요!”“그래, 오늘은 네 말에 따를게.”백인서는 정승우를 바라보며 물었다.“먼저 어떤 걸 타볼까?”남자애들은 자극적인 놀이기구를 특히 좋아하곤 했다. 정승우는 백인서를 데리고 롤러코스터, 자이로드롭, 급류타기 같은 놀이기구들을 함께 탔다.하지만 백인서는 오히려 회전목마를 타고 싶었다.두 사람은 떠들썩한 놀이공원에서 땀을
정승우는 정대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정대명은 문을 열어 정승우를 들여보냈다. 정승우는 방 안을 둘러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방은 마치 금으로 뒤덮인 듯 반짝이고 있었다.정대명이 이런 곳에서 살고 있다니.정승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런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건가 생각했다.“여긴 왜 온 거야?”정대명은 거칠게 정승우의 등을 밀며 물었다.“지금 학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정승우는 정대명을 돌아보며 무심하게 말했다.“그냥 좀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왔죠.”“네가 날 보러 왔다고?”정대명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소리를 들은 듯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이 개자식이 언제부터 제 아비를 생각했다고! 흥!”정승우는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제정신이라면 주먹만 휘두르는 아버지를 그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좋아요, 그러면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아버지 술 마실 시간 뺏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정승우는 정대명의 손에 들린 술병을 힐끔 보고, 시선을 그의 바지 주머니로 옮기며 눈에 장난기가 어렸다.“저, 다 봤어요!”“뭐?”“그 여자가 아버지에게 돈을 준 거요.”정대명은 당황하며 정승우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정승우는 재빠르게 옆으로 비껴가며 비웃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저, 다 봤고, 다 들었어요! 두 분은 아무도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셨나 봐요?”“이 자식아, 헛소리하지 마!”정대명은 부끄러움과 분노에 휩싸였다. 또 영미의 경고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 일이 절대 밖으로 새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급해졌다.“헛소리 아니에요.”정승우는 이례적으로 침착한 표정이었다.“아버지는 그 여자랑 손잡고 우리 누나를 모함하려는 거잖아요!”“이 자식이!”“아버지, 제 입을 막고 싶으시죠?”“뭐?”정대명은 얼떨떨해졌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이 일은 비밀로 해 드릴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정승우는 천천히 말했다.“단, 입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