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원이 진지하게 말했다.“결혼해도 우리 수정 씨는 나에게 저러지 않을 거야.”그러더니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냈는데 스위스 모 은행이라고 적혀있었다. 유찬혁은 수많은 세계적 부자들이 돈을 이 은행에 넣는다는 걸 알고 있었고 오성에는 이 카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이건 수정 씨가 준 거야.”배경원은 입이 귀에 걸렸다.“이 안에 우리 둘의 적금이 들어있어. 매달 이 카드 안에 돈을 저축하는데 나더러 보관하라고 했어. 나중에...”그런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경섭이 고함을 질렀다.“연준 씨, 경원 씨에게 돈이 있어요!”배경원은 화들짝 놀란 나머지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손목을 푸는 육경섭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서 빼앗을 기세였다.최연준은 지금 자신보다 돈이 많은 사람을 가장 질투했다. 설령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형제라도 말이다. 하여 육경섭을 더욱 부추겼다.“돈이 있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거예요? 조직 보스였던 그 위엄이 다 어딜 갔죠?”그러자 육경섭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럼... 어디 한번 해볼까요?”“갑시다!”“으악!”룸 전체에 순식간에 배경원의 처참한 비명으로 가득 찼다.유찬혁은 그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려 이마를 짚었다...나약한 배경원은 그렇게 두 맹수에게 완전히 제압당했다.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었다.“찬혁아, 너 변호사잖아. 두 사람이 지금 대놓고 빼앗는데도 가만히 있을 거야?”“그게...”유찬혁은 그저 웃기만 했다.“누가 너더러 돈 자랑을 하랬어?”배경원은 말문이 막혀버렸다.그런데 그때 유찬혁의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줬다. 룸 안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최연준은 배경원을 옆으로 밀어내고 유찬혁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유찬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도련님... 제대로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어떻게 됐어?”최연준
배경원은 눈살을 찌푸리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최지한이 그 정도로 널 믿는다고? 왜? 네가 연준 형 옆에 오래 있은 것도 분명 알 텐데...”“최지한은 자기가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그럴 수 있어요.”육경섭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나도 예전에 최지한을 만난 적이 있잖아요. 그 사람은 안하무인이라서 세상 사람들은 전부 바보고 자기만 똑똑한 줄 알아요. 지금 성설연을 이용하여 유찬혁을 협박하고 있다는 생각에 아주 좋아 죽을걸요? 이런 사람을 상대하는 건 일도 아니죠.”최연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걔가 작은삼촌의 절반만이라도 눈치가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되진 않았을 텐데.”“연준 형.”유찬혁이 눈살을 찌푸렸다.“강명원이 그 레시피를 훔치러 온 거라면 미리 가짜 레시피로 바꿔놓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럴 필요 없어.”최연준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넌 강명원과 계속 내통해. 그때가 되면 강명원을 상대할 사람이 나타날 거야.”...그날 강서연은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전날 밤에 늦게까지 장부를 본 바람에 허리도 아프고 삭신이 쑤셨다. 최연준이 억지로 끌고 가서 재우지 않았더라면 아마 밤을 꼬박 새웠을 것이다.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최연준은 없었고 그가 남긴 쪽지가 있었다.「나 먼저 회사 나가. 어진 엔터테인먼트에는 내가 당신 대신 휴가 냈어. 오늘 하루 집에서 푹 쉬면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강서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카디건을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박경실이 이미 아침을 차려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쪽지를 남기셨어요.”“네, 봤어요.”“아 참, 도련님이 나가시기 전에 오늘 본가에 들리겠다고 했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갔다가 금방 온다고 했어요.”강서연은 순간 멈칫했다. 본가 얘기만 꺼내면 그곳에 갇혀 있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강유빈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강서연, 아빠가 오면 넌 전부 다 잃게 될 거야.”‘전부 다
그녀는 사진을 한장 한장 찍고 상자를 다시 잠근 후 오성대로 부리나케 달려갔다.강서연이 오성대에 도착했을 때 마침 수업 시간이었다. 교내에서 지나가는 학생 몇 명에게 물어 겨우 의학원을 찾았다. 학생은 윤찬이 수업이 없을 때면 보통 실험실에 있으니 실험실로 한번 가보라고 알려주었다.그녀는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 곧장 실험실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윤찬은 실험실에 있었다. 그녀가 윤찬을 부르려던 그때 누군가의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바로 윤정재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강서연은 화들짝 놀랐다.두 사람은 벽에 걸린 커다란 경맥도 앞에 서 있었고 윤정재가 한창 윤찬에게 설명하고 있었다.한 사람은 열심히 강의했고 다른 한 사람은 열심히 귀담아들었다. 둘의 표정이 어찌나 비슷한지 멀리서 보면 그야말로 판박이였다.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숨도 쉴 수가 없었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그런데 그때 윤찬이 그녀를 발견했다.“누나? 누나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강서연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억지로 미소를 쥐어짰다. 윤정재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누나.”윤찬은 폴짝폴짝 뛰며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정말 미안해요. 누나가 혼인 신고한 날에 엄청 중요한 실험이 있어서 교수님이 놓아주질 않았어요. 그래서...”“괜찮아. 나 다 이해해.”강서연은 그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당연히 학업이 더 중요하지.”“내가 보낸 선물은 받았어요?”“응.”윤찬은 연구 성과를 얻은 후 특허를 신청하여 꽤 많은 특허 비용을 벌었다. 적어도 의학원에서 돈이 많기로 소문이 자자했다.결혼 선물로 돈을 주긴 했지만 그의 마음을 가득 담아 봉투에 두둑하게 넣어주었다. 그러면서 그 돈은 매형에게 주는 것이라고 특별히 강조하기도 했다.하지만 매형이 그 돈을 써보기도 전에 강서연에게 전부 상납했다는 사실을 윤찬은 모르고 있었다.강서연은 동
강서연은 멈칫하다가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에요.”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윤정재는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감히 물어볼 수 없어 그저 딸의 눈치만 자꾸 살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진짜 아무 일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윤정재는 입술을 적시고 가볍게 웃었다.“그럼 다행이고요... 점심도 거의 되는데 밥 먹으러 갈까요? 내가 사줄게요. 찬이와도 얘기 좀 더 나눴으면 좋겠고. 하하... 뭐 먹고 싶어요?”그는 강서연을 보며 물었다.“서연 씨가 메뉴 정해요.”“괜찮아요.”강서연은 고개를 들고 그를 보며 말했다.“전 연준 씨에게 가보려고요. 연준 씨가 아침부터 집에 없어서 지금까지 얼굴도 못 봐서요.”“뭐라고요?”윤정재의 낯빛이 급변했다.“설마 외박한 건 아니죠?”“아니에요.”강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침 일찍 나갔어요.”“그렇군요. 외박은 절대 안 돼요.”윤정재가 카리스마 있게 말했다.“서연 씨, 만약 앞으로 최연준이 외박한다면 나에게 말해요. 내가...”“윤 회장님.”강서연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그녀의 한마디는 마치 차가운 돌덩이처럼 윤정재의 가슴팍을 짓눌렀다.“너무 간섭하시는 거 아닌가요?”순간 말문이 막혀버린 윤정재는 그저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그래. 내가 무슨 자격으로, 또 무슨 신분으로 간섭해?’지금 강서연 앞에 서 있는 그는 그저 남양에서 온 의학협회 회장이자 연합 병원 프로젝트의 파트너일 뿐이다. 그리고 더 가까이하면 어머니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남자이다. 정말 단지 그저 눈에 거슬리지 않고 괜찮은 아저씨일 뿐이다.윤정재의 낯빛이 어두워졌고 마음이 아팠지만 강서연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윤찬은 강서연을 잡아당기며 눈치를 주었다.“누나, 왜 그래요? 왜 아저씨에게 그런 식으로 얘기해요?”“만약 회장님이 우리 아빠라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연히 얘기해서 복수라도 해달라고 투정을 부렸겠지만...”강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회장님이 우리 아빠
최연준은 최재원이 직접 배양한 후계자라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판에 박은 듯 아주 비슷했다.몇몇 늙은 여우들은 이미 자신의 앞날을 예견한 듯 갑자기 충심을 표하며 가지고 있던 권력을 내려놓으면서 여생을 보낼 준비를 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방한서가 휴대 전화를 들고 최연준 옆으로 황급히 다가왔다.최연준의 낯빛이 급변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뛰쳐나갔다....방한서는 액셀을 힘껏 밟으면서 가끔 백미러로 최연준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최연준의 표정이 무뚝뚝했지만 그윽한 두 눈에 어두운 그늘이 스쳐 지나갔고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방금 걸려 온 전화는 윤문희의 전화였다.“서연이가... 방금 여기 와서 윤정재에 관해 물었어.”“혹시 다 알았나요?”윤문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최연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숨소리마저 무거워졌다.“최 서방, 나 예전에 있었던 일을 서연이에게 전부 얘기했어... 사실 내가 얘기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고 있더라고. 걔가 그 나무상자를 이미 열어봐서... 나도 더는 숨길 수가 없었어. 그런데 내 얘기를 다 듣고는 다짜고짜 뛰쳐나갔어. 최 서방이 우리 서연이 좀 찾아줘...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도련님?”방한서의 목소리에 최연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우리 애들이 지금 움직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윤 사모님 쪽에 사람을 계속 붙여놓고 있어서 애들이 사모님의 뒤를 따르며 안전하게 책임질 겁니다.”“지금 상황이 어때?”방한서는 고개를 숙여 휴대 전화를 확인하고는 최연준에게 건넸다. 화면에 강서연의 뒤를 쫓고 있는 경호원의 위치가 나타났다.“사모님이 너무 외진 곳에는 가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그래.”최연준은 강서연이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그가 힘들게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단지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 조용하게 있고 싶을 뿐이었다.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이에게 들키지 않게 좀 멀리서 따라가라고
최연준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다들 알고 있었네요.”강서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나만 혼자 모르고 있었던 거네요?”“여보...”최연준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두 사람은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절대 서로에게 숨기지 않고 함께 헤쳐 나가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그는 똑같은 잘못을 두 번이나 저질렀다.“서연아, 내 말 좀 들어봐.”최연준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얼마 전에야 이 사실을 알았어... 복잡하기도 하고. 하지만 절대 일부러 숨긴 건 아니라는 것만 믿어줘. 이런 일은 내가 함부로 말해선 안 돼. 들어도 친부모에게서 들어야지... 내 마음 이해해 줄 수 있어?”강서연은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그래. 이게 어떻게 연준 씨 잘못이겠어? 연준 씨도 힘들었을 텐데. 만약 나였어도 숨겼을 거야. 이십여 년 동안 부성애를 느껴보지 못하다가 갑자기 친아버지가 나타났는데 진실이 드러나기 전에는 다들 당연히 비밀로 하겠지. 이런 일은 남이 아니라 당연히 당사자에게서 들어야 하지만...’강서연의 눈물 한 방울이 최연준의 손등에 뚝 떨어졌다. 그때 최연준이 그녀에게 신분을 속였을 때처럼 도리는 다 알지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여보...”최연준은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차가운 바람이 눈물로 젖은 그녀의 두 볼을 스치자 마치 칼로 베이는 것처럼 아팠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다정하게 닦아주었다.“여보, 나랑 집에 가자, 응?”강서연이 아무 대답 없자 최연준은 겉옷 지퍼를 풀어 그녀를 감싸 안았다.“괜찮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옆에 있을게. 서연아, 그만 집에 가자.”강서연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옆에 최연준이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추운 겨울에도 몸을 녹일 수 있는 곳이 생겼고 마음의 안식처가 생겼다....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최연준은 그녀의 신발을 벗겨준 후 슬리퍼까지 챙겨주고는 먼저 따뜻한 물로 샤워하라고 했다.강서연은 그의 말대로 따랐고 샤워하고 나오니 좋은 향기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이거 다 먹고 아무 생각하지 말고 한잠 푹 자.”최연준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나머지는 이 남편에게 맡겨.”강서연은 살짝 놀란 듯했다.“당신 뭐 어쩌려고요?”최연준은 일부러 툴툴거렸다.“윤 회장님 너무 하셨어. 우리 여보의 심기를 건드렸으니 당장 남양으로 돌려보낼 거야.”“그러지는 말...”강서연은 말끝을 흐렸다. 최연준은 그런 그녀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어릴 적부터 강명원은 없기만도 못한 존재였기에 그녀는 늘 부성애를 갈망했었다. 하지만 이 부성애에 대한 갈망이 너무 컸던 탓에 되레 거부감이 밀려오면서 두려웠고 이십여 년 동안 쌓였던 속상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결국 생각할수록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던 그녀는 윤정재에게 있어서 자신은 그리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어찌 자기 딸을 버릴 수 있겠는가?강서연은 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심호흡하며 억지로 참았다.“여보, 괜찮아.”최연준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당신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윤 회장님도 기다리실 테니까 천천히 생각해... 모든 게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거야. 그리고 가장 좋은 결과를 얻기 전에 난 계속 당신 옆에 있을 거고. 서연아...”최연준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두려워하지 마.”...유찬혁이 해원 별장에 도착했다. 최지한을 만나러 왔지만 뜻밖에도 성설연을 만났다.성설연은 그를 보자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활기차게 달려가 그의 팔짱을 꼈다.“찬혁아.”유찬혁은 아무 말 없이 옆으로 피했고 표정은 여전히 덤덤했다.“왜 그래, 찬혁아?”성설연은 그의 안색을 살폈다.‘예전에는 날 보면 고분고분 잘 따르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이렇게 선을 긋는 거지?’그녀는 유찬혁이 갑자기 변할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유찬혁은 그녀에게 고백한 수많은 남학생 중 한 명이었고 평생 지켜주겠다고 했었다.“찬혁아, 내가 새로
유찬혁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가에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성설연은 왠지 모르게 뭔가 달라진 것만 같았다.‘착각일 거야... 그래, 나에 대한 찬혁의 마음은 변할 리가 없어.’성설연은 요염하게 웃으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런데 어떤 힘이 어깨를 힘껏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성설연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유찬혁이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었다.“찬혁이 너...”“우리 관계도 결과를 볼 때가 됐어.”유찬혁은 멈칫하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설연아, 네가 오늘 같은 성과를 거둬서 나도 기뻐.”“이 모든 건 다 네가 준 거야.”“내가 아니라 지한 도련님이 준 거지.”유찬혁이 덤덤하게 말했다.“그러니 앞으로는 지한 도련님의 옆에 있어. 그 사람은 너에게 더 많은 걸 줄 거야.”“찬혁아...”성설연은 가슴이 움찔했다.‘저 말 대체 무슨 뜻이지?’“찬혁아.”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네가 지한 도련님을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지한 도련님도 날 띄워주지 않았을 거야.”“응. 앞으로도 계속 도련님을 위해서 일할 테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유찬혁은 웃으며 말했지만 왠지 자꾸 그녀와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그리고 우리 관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도련님의 일을 마친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그래...”성설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찬혁의 뜻을 점점 이해할 수가 없었다.‘예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인데? 하지만 그래도 최지한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했어. 아직도 날 좋아하는 게 분명해. 그러지 않고서야 왜 그렇게까지 하겠어?’그 생각을 하고 나서야 성설연은 시름이 놓였다.“그럼 넌 네 할 일 해.”성설연은 쑥스러워하며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나에게 대답을 줄 그날을 기다릴게.”그러고는 매니저에게 연락했다. 오늘 사진 촬영이 있었는데 촬영 장소가 바로 최지한의 프라이빗 클럽하우스였다.최근 그녀가 최씨 저택을 자주 드나든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다른 여자 연예인들은 뒤에서
그 순간, 조순철의 묵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오늘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매우 기쁩니다. 온유가 돌아왔다는 이유만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이유만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오늘 드디어 백인서 씨의 결백을 밝혀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뭐라고요?”영미의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났다.“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이 많았습니다. 온유의 실종이 백인서 씨와 연관되었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죠.”조순철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힘이 실려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공간을 메웠다.“심지어 경쟁자들이 저를 음해하기 위해 이런 추문을 이용하려 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조순철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시선을 돌려 영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죠, 영미 아가씨?”영미는 얼어붙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영미에게 쏠렸다. 그 시선은 바늘처럼 날카로워 영미의 온몸을 꿰뚫는 듯했다. 영미는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조... 조 시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영미 아가씨, 제 말을 정말 이해 못 하시겠습니까?”조순철의 미소 속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빛이 서려 있었다.그리고 권욱의 시선은 더욱 살기를 띠고 있었다.부모는 자신에게 닥친 모든 일은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에게 손을 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가만히 둘 수 없었다.강소아와 최군형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부하들이 정대명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영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영미는 본능적으로 정대명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정대명은 그녀를 보자마자 구원의 손길이라도 찾은 듯 온몸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아니, 영... 영미 씨! 영미 아가씨! 제발 나 좀 도와줘!”“뭐 하는 짓이에요?”영미는 분노에 차 외쳤다.“제가 왜 당신을 도와줍니까?”“영미 아가씨가 나한테...”“그래요, 제가 당신에게 돈을 줬죠.”영
연회는 여전히 그 4성급 호텔에서 열리고 있었다.손님들 사이에서 소곤소곤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장님이 정말 청렴하셔서 연회도 대단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간소하게 한다는 대화였다.“무슨 소리야? 새로 취임했으니 당연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거겠지!”“하지만 권씨 가문이나 조씨 가문 정도라면 연회를 더 화려하게 할 수도 있잖아? 아무리 시장이라고 해도, 사위는 사업가 아닌가?”“맞아. 게다가 사대 가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봐도, 좀 더 사치스럽게 해도 문제 될 건 없지.”“혹시... 이 호텔을 선택한 데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영미는 한쪽에서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특별한 이유라... 글쎄, 그런 건 없을 것 같았다. 영미는 그저 자신만 무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조순철은 무대 위에 서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음악이 멈추고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조순철에게 집중됐다.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조순철은 여전히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무대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힘 있고 우렁찼다.“먼저, 오늘 연회에 와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거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여러분의 지지 덕분입니다. 여러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오성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오성을 더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청중들은 힘찬 박수로 화답하며 잔을 들어 축하의 뜻을 전했다.“또한, 여러분께서 제 외손녀 권온유를 많이 걱정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조순철의 말이 끝나자마자 권온유가 무대로 달려 나와 외할아버지에게 안겼다. 조순철은 권온유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무대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람이 권온유가 납치당한 일을 알고 있었고 권온유가 이렇게 빨리 돌아온 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이 모든 행운이 가능했던 건 정승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순간, 정승우는 한쪽 구석에서 권온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