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연우는 깜짝 놀란 눈빛으로 그들 형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부러움이 들어있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형수님 참 좋으시겠어요.”최군형이 동생에게 눈치를 줬다. 최군성은 곧바로 육연우의 손을 잡고 웃었다.“네가 같은 일을 당했다면 나도 그렇게 할 거야.”“군성 오빠...”그녀는 말하려다 말고 입술을 깨물며 손을 빼냈다. 그녀는 최군성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녀는 육명진의 딸이었다. 육명진은 육씨 가문을 해한 악의 축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어떻게 최군성과 사귈 수 있겠는가?최군성이 괜찮다 해도 그 부모님들은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하지만 감정이란 참 이상해서 절제하려 할수록 걷잡을 수 없었다.육연우는 최군성을 살짝 보고는 급히 눈을 돌렸다. 그녀의 두 손이 옷자락을 만지작대고 있었다.최군형이 입을 열었다.“연우더러 하수영에게 접근하려 한댔지? 모든 걸 다 준비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시간표도 최대한 비슷하게 짜줄게.”정신을 차린 육연우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요, 잘할 수 있어요. 정말 육소유가 맞다면 돌아가자마자 사실대로 얘기할래요!”최군형은 눈앞의 이 아이에게 동정심마저 들었다. 그녀는 분명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육씨 가문의 모든 걸 가질 수 있었다. 힘들게 살고 있는 그녀에게 육씨 가문은 좋은 디딤돌이 될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이 모든 걸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기를 고집하고 있었다.그러니 육명진이 어떻게 그녀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있겠는가?최군성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연우야, 하수영 정말 독하대. 접근할 때 조심해!”“독하다고요? 누가 그래요?”“우리 형이!”최군형이 힘껏 헛기침했다. 그 말을 들은 육연우가 살짝 웃었다.“군형 오빠, 하수영 씨가 형수님을 괴롭혀서 그러는 거예요?”“어... 당연히 아니지! 난 그렇게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최군형은 비아냥대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육연우와 함께
육연우는 눈앞의 사람이 하수영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부드러운 소리로 물었다.“제가 책을 안 가져와서 그러는데... 잠깐 빌려주실 수 있어요?”하수영이 그녀를 째려보고는 읽고 있던 책을 육연우에게 밀어주었다. 어차피 보고 싶지도 않았으니 상관없었다.육연우가 웃으며 연신 감사를 표하다가 갑자기 소리쳤다.“어!”“왜 그래요? 방해하지 마요!”“아, 교실을 착각했네요... 죄송해요, 선배님!”하수영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 학교 학생들은 모두 있는 집안 자식들인데, 보아하니 부잣집 자식들이 모두 똑똑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처럼!교실도 찾지 못하면서 학교는 어떻게 다닌다는 거지?육연우는 옷자락을 잡고 울상을 지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하수영은 묘하게 쾌감이 들었다.다른 사람, 특히는 명문가 자제들이 그녀보다 못한 것을 보는 게 좋았다. 하수영은 몸을 일으켜 팔짱을 끼고는 거만하게 물었다.“저기, 새로 왔어요?”육연우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입학 시즌 아닌데 어떻게 온 거에요?”“저... 전 머리는 나빠도 돈은 있어요. 집에 있는 재산을 관리해야 하는데 부모님은 너무 바빠서... 그냥 아무 대학이나 졸업하고 재산을 상속받으라고... 그런데 입시에서 실패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청강생으로 들어온 거예요.”육연우는 하수영의 질문을 예상하고 미리 답변을 준비해 왔다. 그녀는 한껏 몰입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청강생?”그 말을 들은 하수영의 허영심이 더욱 커졌다. 한낱 청강생이라니! 그녀는 입시를 치르고 정정당당하게 차석으로 입학했다. 수석은 강소아였다.하수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강소아의 이름을 생각하자 또다시 기분이 나빠졌다.하지만 눈앞의 재벌 2세는 꽤 순수해 보였다. 이용하기 딱 좋은 모양새였다. 하수영이 종이를 육연우에게 건네며 말했다.“됐어, 울지 마. 어느 교실인지는 기억해?”“음... 저... 302호요!”“여긴 301호야.
하수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승리를 예측한 듯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머릿속에 그 말이 맴돌았다.“연우 씨 오빠가 있대!”세연 그룹은 엄청난 실력을 갖춘 그룹이었다. 그 집안 자식과 결혼한다면... 하, 최군형 따위는 짓밟아버릴 수 있었다.하수영이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녀는 무엇이든 강소아보다 잘하고 싶었다. 결혼 상대도 강소아보다 좋아야 했다. 강소아를 밟아버리고 싶었다!하수영은 사악하게 웃고는 책을 들고 교실을 나섰다.......교실에서는 수학 시간이 한창이었다. 모두가 피하는 수업이었지만 육연우는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다. 교수님이 강의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한 번만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추론 과정부터 결과까지 모두 그랬다.하지만 이는 그녀의 연습장에만 존재했다. 교수가 문제를 물어보자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눈에는 어느새 눈물까지 고였다. 그 모습에 교실의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교수도 그녀를 비웃고는 수업을 끝냈다.수업이 끝난 교실은 텅 비어있었다. 육연우는 몰래 연습장을 찢고 있었다.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어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연우야!”육연우가 고개를 돌렸다. 하수영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이거 마셔.”“감사합니다...”육연우는 뻔히 알고 있었다. 하수영이 그녀를 뒤쫓아온 건 그 학생들의 의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학생들도 최군형이 심어둔 배우라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육연우는 커피를 쭉 들이켜고는 심하게 기침했다.“너무 써요, 맛없어요!”“응? 난 괜찮은 것 같은데. 이게 써?”하수영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선배...”“그렇게 격 차리지 마. 편하게 수영 언니라고 불러!”하수영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육연우는 작은 소리로 대답한 뒤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수영의 웃음을 보니 그녀의 재산과 오빠를 노리고 온 게 분명했다.육연우는 계속해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우리 오빠랑 아는 사이세요?”“아니...
“그러네! 형 정말 똑똑하다!”최군성이 눈을 반짝이며 최군형에게 팔을 벌렸다. 하지만 최군형은 인상을 쓰고 최군성을 막았다.“뭐 해! 어릴 때 우리 자주 안았는데, 다 잊은 거야?”“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저리 떨어져!”“싫어!”최군성이 헤헤 웃으며 최군형에게 몸을 들이밀었다. 또다시 전쟁이 폭발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육연우가 소리 내 웃었다.최군형이 그제야 알아챘다.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친형도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이다. 육연우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이런 장면을 연출한 게 분명했다.최군형이 큰형의 위엄을 지키며 말했다.“이제 그만해! 지금 급선무는 빨리 병원에 가 검사하는 거야. 강주에 아는 병원이 있어. 다들 믿을 만 한 사람이니 괜찮을 거야. 검사도 빠르고.”최군성과 육연우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곧바로 그 병원으로 향했다.검사는 이틀이 걸렸다. 그들 세 사람은 또다시 그 카페에서 보였다. 최군성이 검사 결과를 그에게 보여주었다.“형, 이것 좀 봐!”최군형은 곧바로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일치 확률 0%라는 글이 적혀있었다.최군형이 멍해졌다. 가슴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군형 오빠, 죄송해요... 제가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했어요. 하수영이 육소유인 줄 알고...”“너 때문이 아니야! 연우야, 네가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조사하지도 못했을 거야.”“맞아, 지금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늘었어. 하수영은 육연우가 아니라는 거.”“그럼 어떻게 육소유의 DNA를 하수영에게 넘겨준 거예요?”그 말에 최군형의 표정이 변했다. 그와 최군성이 눈빛을 교환했다. 뭔가 알아버린 것 같았다.하수영은 육소유가 아니지만 육소유의 DNA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진짜 육소유는 하수영이 접근하기 쉬운, 그녀의 주변 사람일 것이다.설마...그의 상상이 맞다면?최군형은 숨을 참고 두 손을 꼭 맞잡았다. 그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최군성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형, 형수님도... 조사해 봐야 하지 않아?”최군
최군형은 코를 긁적거리며 잠깐 망설이고는 강소아의 손을 잡고 가게로 걸어갔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심경이었다. 정말이지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그는 자신이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뛸 듯이 기뻤다. 그 뒤에는 또다시 말로 형용하지 못할 슬픔이 밀려왔다.어릴 때도 그는 이렇게 육소유의 손을 잡은 채 금방 걸음마를 뗀 육소유와 함께 걸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 곁에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 목소리들은 최군형의 머리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다.“형, 형수님이랑 우정 아줌마랑 엄청나게 닮았어!”“저 둘을 봐, 초면일 텐데 친자매 같아!”“소아는 저들 부부가 훔쳐 온 아이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생각에 빠진 최군형의 심장이 점점 거세게 뛰었다. 그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강소아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아파요!”“아, 미안해요. 너무 세게 쥐었나요?”“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안 좋은데.”강소아가 붉어진 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최군형이 숨을 깊이 들이쉬며 입을 열었다.“소아 씨,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진짜요? 나도요! 나도 할 말이 있어요.”최군형이 흠칫했다. 강소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이끌고 가게에 들어섰다. 마침 손님이 없었다. 그들은 함께 계산대 뒤에 앉았다.“할 말이 뭔데요?”강소아가 최군형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는 웃으며 말했다.“엄마가 말하는데, 며칠 뒤에 집을 나한테 주겠대요. 이 가게도 나한테 줄 테니 우리 둘이 잘 경영해 보래요.”“네?”최군형이 깜짝 놀라 물었다.“그러니까, 알려주는 게 어때요? 우리 엄마는 이런 것들로 당신을 여기 남기려고 하는 것 같아요. 아직도 당신을 데릴사위로 생각하는걸요.”최군형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강우재 부부가 강소아를 아낀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에게 이 정도로 잘해줄 줄은 몰랐다.강소아가 최군형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그냥 사실대로 얘기
최군형은 인상을 쓰고 입술을 다시며 침묵하다 물었다.“그러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뭔데요?”“소아 씨, 이 집에서... 행복해요?”강소아가 어리둥절해졌다. 최군형을 향한 시선이 조금 변했다.최군형이 변한 건 눈치채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디가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눈빛이 조금 어두워지고, 말을 더듬으며 그녀와의 눈 맞춤도 피했다.자신의 신분 외에 감추는 일이 더 있는 건가?“군형 씨, 그게 무슨 뜻이에요?”최군형이 부드럽게 강소아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먼저 대답해 줘요.”“그게 무슨 문제에요! 물어볼 가치가 있어요? 당연히 행복하죠! 뭐 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한테 시집간다고 친정에는 오지 말라 이거에요? 재벌가에는 그런 규칙도 있나 보죠? 그럼 난 결혼 안 해요!”“아니, 그게 아니라...”최군형이 급히 그녀를 따라가 팔을 붙잡고는 혹시나 도망갈세라 그녀를 꼭 껴안았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아내를 잃을 수는 없었다.강소아는 그를 두어 번 치고는 최군형의 눈을 보고 말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제 친구 얘긴데요, 어릴 적에 가족을 잃어버렸는데 다행히 좋은 양부모님을 만났어요. 그런데 지금 그 친구 친부모님이 그 친구를 찾고 있어요. 나한테 어떻게 할지 물어보는데, 나도 알 수 없어서요.”“그렇구나...”강소아는 반신반의하며 최군형을 한참 쳐다보았다.“소아 씨, 만약 소아 씨라면 친부모님한테 돌아갈 거예요? 친부모님도 정말 좋은 분들이세요. 예전엔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됐고요. 어쩔 수 없이. 정확히 말하면 양부모님이 몰래 그 친구를 데려온 거예요. 그리고... 친부모님은 엄청난 부자라서 아무 걱정 없이 좋은 교육을 받으며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어요. 소아 씨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강소아가 인상을 썼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한참 생각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모르겠어요.”그 말을 들은 최군형이 멍해졌다. 강소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정말 모르겠어요! 제 일이 아니니 감히
구자영에게 괴롭힘당하면서도 두려움 없이 맞받아치던 그녀를 생각했다. 하수영에게 배신당하고도 금세 슬픔을 뒤로하던 그녀를 생각했다.한 사람의 용기와 자존심은 모두 그 사람의 가정이 준 것이다. 부모님이 지지해 준다면 아이는 한 마리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아갈 수 있었다.강우재와 소정애가 그녀를 부족함 없이 사랑해 줬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평범한 집안 출신인 강소아가 재벌 2세들이 가득한 학교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최군형이 강소아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웃었다.“방금 그 말, 나 떠보려는 거예요?”“네? 아니요!”“흥, 난 또 뭐라고. 오성에 시집가면 강주에는 평생 못 온다는 말인 줄 알았잖아요!”“네? 아니요! 그럴 리가요...”최군형이 씁쓸하게 웃었다. 강소아가 최군형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최군형 씨, 말은 똑바로 해두죠. 우리가 결혼한 뒤에도 내가 친정에 가는 걸 막으면 안 돼요.”“당연하죠. 굳이 힘들게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돼요. 그때가 되면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오성에 모셔 와요. 소준이도 열심히 하면 오성대에 합격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을 가족들과 갈라놓지 않을게요.”강소아가 웃으며 최군형의 품을 파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급한 강우재의 목소리가 들렸다.“소아야! 빨리... 빨리 병원에 와! 엄마가...”“엄마가 왜요?”......최군형과 강소아는 급히 병원에 달려갔다. 그녀는 연속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소정애의 부상 경위를 알아냈다.오전, 소정애는 공원에서 산책하다가 우미자를 만났다. 얘기를 나눈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싸움이 붙었다. 하지만 그 시간에 공원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중노년층이었기에 누구도 말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소정애와 우미자는 서로 머리채를 잡은 채 연못에 떨어졌다. 그곳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솟아있었다. 다행히 우미자는 찰과상만 입었지만 소정애의 부상은 꽤 심했다.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 피를
“왜냐면... 왜냐면...”강우재가 우물쭈물했다. 수혈하면 모든 게 들통날 것이었다. 강소아가 그들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이!“직계 친족 사이에는 수혈할 수 없어요.”이때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강우재가 깜짝 놀라 최군형을 바라보았다.“소아 씨, 직계 친족 사이에는 수혈할 수 없어요. 위험 부담이 커지거든요. 그러니 당신뿐만 아니라 소준이도 수혈은 못 해요.”“그럼 어떡해요?”“제가 하죠, 저도 B형이에요.”최군형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옆의 간호사가 거들었다.“이분 말이 맞아요. 먼저 간단한 검사를 하죠. 수혈할 수 있다면 바로 진행해요!”“네.”강우재가 멍해졌다.“군형아, 괜찮아. 내가 할게. 난 O형이야. 누구에게도 피를 줄 수 있어!”최군형이 복잡한 시선으로 강우재를 바라보았다.“아뇨, 제가 할게요. 전 젊고 튼튼해서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강우재가 말을 잇지 못하며 최군형을 바라보았다. 그는 최군형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 깊고 서늘한 눈은 모든 가식을 잡아낼 것 같았다.검사 결과가 나왔다. 최군형은 기준에 부합했다. 그는 간호사를 따라 수술실로 들어갔다.강소아가 벽에 기댔다. 마음이 한결 놓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최군형이 걸어 나왔다. 그는 수혈한 반대쪽 팔로 강소아를 가볍게 안았다.“걱정 마요, 아줌마는 괜찮아요.”최군형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강소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품에 안겨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소정애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모두가 숨을 돌릴 때 우미자가 머리에 붕대를 감고는 비틀거리며 병실에서 나왔다. 강씨 일가를 보고 얼른 지나가려는데, 강소아가 이를 딱 잡아냈다.“우미자 아줌마!”우미자가 흠칫하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강소아를 쳐다보았다.“우리 엄마에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아니야, 소아야. 내 말 좀 들어봐...”“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요! 맞다, 내가 우리 부모님 친딸이 아니라는 것도 아줌마가 퍼뜨린 헛소문이죠? 이렇게 하는 이
송윤지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날 선 목소리가 송윤지의 귓가를 스쳤다.“우수 교사라니? 참, 그런 상 따위는 다 가짜야. 아무 의미도 없는걸.”잠시 걸음을 멈춘 송윤지는 그 말에 반응하지 않고 곧장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허운주의 자리는 송윤지의 자리와 가까웠다. 송윤지는 허운주의 눈빛에서 질투와 증오가 서린 눈길을 느꼈다.며칠 전, 원장이 송윤지를 오성시 우수 교사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발표한 이후로 허운주는 완전히 송윤지를 적대하기 시작했다.겉으로는 그런 상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원장을 찾아가 분노를 터뜨렸다.“송윤지는 경력도 짧고 교직 생활을 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왜 우수 교사 후보로 추천되는 겁니까? 저는 이렇게 오랫동안 가르쳤는데, 이번에는 제 차례여야 하지 않나요?”그날, 원장실 밖에서는 여러 교사가 웅성거리며 허운주의 불만을 엿들었다.이후로 사무실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바뀌었다.건강을 회복하고 복귀한 송윤지는 동료들의 태도가 예전과는 전혀 달라졌음을 느꼈다.과거에는 송윤지가 배씨 가문의 도련님과 약혼한 사실만으로도 모두가 존중하고 떠받들었다. 하지만 이제 송윤지는 배씨 가문의 도련님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있었고 아이가 있는 이혼녀와의 경쟁에서도 패배했다는 소문까지 퍼지며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되었다.이런 변화가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그리고 이렇게 노골적인 태도로 찾아올 줄은 몰랐다.“그러게요, 정말 불공평한 것 같아요.”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허 선생님이 훨씬 자격이 있는데 경력도 없는 신입이 후보라니, 말이 안 되죠.”송윤지는 아무 말 없이 컴퓨터를 켜고 수업 준비를 시작했다.그때, 문 앞에 원장이 나타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휴대전화를 흔들었다.“송 선생님! 송 선생님! 보세요, 선생님께서 이미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어요!”사무실 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송윤지도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유독 허운주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원장은 가볍
배현진은 잠시 멍해졌다. 배현진의 입술이 떨렸다.1조?배현진이 운영하는 자회사는 지금 당장 천억의 유동 자금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조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본사에 지원을 요청해야 하고, 이는 이사회에서 논의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이사들은 모두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의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이 금액을 승인해 줄 리가 없었다.“배 도련님?”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배씨 가문의 대단한 도련님도 이런 돈 때문에 고민하시네요?”소피아는 급히 팔꿈치로 배현진을 찔러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조 회장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럴 리가 있겠어요! 조 회장님께서 이미 최저 가격을 제시하셨으니 우리 현진 씨가 반드시 잘 처리할 겁니다.”“그렇습니까?”조 회장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제가 최저 가격을 제시한 건 제 진심의 표현인데 두 분의 진심은 아직 보이지 않네요.”“조 회장님...”소피아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배현진이 그녀를 제지했다.배현진은 깊은숨을 내쉬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하고 입을 열었다.“조 회장님, 저도 진심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제가 운영하는 자회사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1조는 저의 아버지를 놀라게 할 금액입니다. 그분이 아시면...”“아, 그게 걱정이었군요?”조 회장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배 도련님, 솔직히 이야기해 봅시다. 지금 그 돈이 없으신 거죠?”배현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이 일을 아버님께 들키고 싶지 않은 거고요?”“네.”“그렇다면 간단합니다!”조 회장은 담배를 입에서 뗀 뒤, 부하가 건넨 명함을 내밀었다.배현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이게... 뭔가요?”“돈이 없으시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면 되죠.”조 회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이 사람은 저와 친한 사이이고 은행에서 꽤 영향력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찾아가면 당신의 자금 문제를 해결해 줄 겁니다.”소피아는 크게 기뻐하며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하지만
임지강은 약간 실망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띠고 송윤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송윤지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임지강의 눈을 보는 순간, 송윤지는 심장이 마구 뛰는 기분이 들었다. 송윤지는 급히 고개를 숙여 밀크티를 마시며 마음속의 동요를 숨기려 했다.“임 대표님, 제 뜻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임지강은 부드럽게 말했다.“윤지 씨를 좋아하는 건 제 마음이에요, 윤지 씨가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저도 부탁이 있어요...”“무슨 부탁이죠?”“그동안은 절 거절하지 마세요.”임지강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윤지 씨에게 잘할 기회는 좀 줘야죠.”송윤지는 부끄러워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공기 중에 묘한 설렘이 감돌았다.하지만, 이 남자가 자꾸 송윤지의 꿈에 나타나는 건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임 대표님.”송윤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 있나요?”임지강은 잠시 멈칫했다.송윤지는 머리를 긁적이며 약간 어색하게 말했다.“임 대표님이 참 익숙하게 느껴져요... 사실 저는 예전에 큰 병을 앓은 적이 있는데 병이 나은 후로 모든 걸 잊어버렸거든요. 만약 임 대표님이 저를 알고 있었다면, 솔직히 말해 주세요. 우리 가족은 왜 그러는지 제 과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임지강은 마음이 조여드는 듯했다.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오랜 침묵 이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는 모르는 사이에요.”송윤지는 멍하니 임지강을 바라보았다.“윤지 씨가 저를 익숙하게 느끼는 건, 아마 사람들 사이의 특별한 인연 때문일 거예요.”임지강은 가볍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가족이 과거를 말하지 않는 건, 정말로 특별히 말할 게 없어서일 수도 있어요.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다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죠?”“윤지 씨.”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윤지 씨와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요. 제가
“하지만...”배현진은 잠시 망설였다. 소피아가 말한 두 광산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고 조건도 매우 훌륭했다. 소문에 따르면 가격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하지만 배현진은 벤처 투자의 세계에서 오랜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있었다. 매력적인 가격 뒤에는 언제나 큰 함정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자기야, 당신 나 못 믿는 거야?”소피아는 배현진의 팔을 흔들며 물었다.“미국에 있을 때 내가 당신 일을 얼마나 많이 도왔는지 알잖아. 내 능력, 못 믿어?”“그럴 리가.”배현진은 소피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소피아는 그가 가장 신뢰하는 조력자였고 배현진이 소피아에게 매료된 것도 그녀의 업무 능력 때문이었다.“그냥... 이번 일은 금액이 너무 크기도 하고, 게다가 조 회장이라는 사람과는 거의 모르는 사이잖아.”“한 번 보면 모르는 사람이지만 두 번 보면 아는 사이가 되는 거지!”소피아는 눈을 반짝이며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이번에 우리가 큰 돈을 벌게 되면, 당신 부모님도 우릴 좋게 생각해 주실 거야.”배현진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소피아는 배현진의 옆에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셔츠 단추를 장난스럽게 만지작거리며 말했다.“현진 씨, 당신은 나와 평생 함께하고 싶지 않아? 우리가 성과를 내야 당신 부모님도 우리를 인정하실 거고 우리에 대한 반대도 사라질 거야. 난 진심으로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서 이렇게 노력하는 거야. 당신 부모님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배현진의 마음이 움직였다. 배현진은 소피아를 안고는 부드럽게 소피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그는 소피아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었다. 소피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마음은 그녀에게 있었다.소피아가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은 물론, 직장에서 보여주는 강단 있고 당당한 모습이 배현진을 매료시켰다. 그것은 송윤지가 가지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배현진은 송윤지처럼 순진하고 조용한 ‘작은 토끼’ 같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배현진은 도전적인 여자를 좋아했고 소피아는
한규는 얼굴이 굳어 있었지만, 여전히 주인집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한규 아저씨, 정말 미안해요.”배현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소피아는 해외에서 오래 생활해서 모국어가 서툴러요. 그래서 표현이 거칠었던 거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도련님.”한규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도련님이 자라는 걸 지켜봤습니다. 도련님은 한 번도 부모님을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그만하세요, 아저씨. 제가 잘 처리할 테니, 쉬고 계세요.”한규는 더는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소피아는 배현진에게 불만을 털어놓으려 했지만, 배현진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소피아를 쏘아보았다.“한규 아저씨는 우리 집안 오래된 집사야. 아버지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데 네가 방금 보인 태도는 정말 부적절했어.”“뭐야, 날 탓하는 거야?”소피아는 금세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머금었다.“역시 당신도 결국 당신 부모님 편에 서서 우리 모자를 배척하려고 하는 거지! 이 집에서 우리가 얼마나 불필요한 존재인지 알겠어. 차라리 내가 아이를 데리고 나갈게. 그럼 되잖아!”“소피아...”배현진은 급히 소피아를 붙잡았다. 방금까지의 분노는 반쯤 사라졌고 배현진은 소피아를 달래며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소피아는 겨우 눈물을 거두었다.배현진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제임스를 무릎에 앉히고 다정한 아버지처럼 밥을 먹여주었다.소피아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 자신의 연기가 성공했음을 확신했다. 정말 이 집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배씨 가문 같은 명문 가문에 기대는 것이 소피아의 목표였다.“현진 씨.”소피아는 배현진의 뒤에서 팔을 뻗어 배현진을 안았다. 소피아의 얼굴이 그의 뺨에 닿았다.“미국에 있는 회사는... 정말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거야?”배현진은 잠시 멈칫하며 얼굴에 근심을 드러냈다.“아버지께 말씀드렸어?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해 줄 수 있을까?”“아버지의 뜻은 아직 명확하지 않아.”
“앞으로 고모와 고모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도 모르겠어.”배윤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엄마는 원래 몸이 좋지 않은 데다가 아빠까지 화가 나서 쓰러질 지경이셔. 두 분의 건강 상태가 안 좋아질까 봐... 정말 걱정이야.”최군성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최군성은 배윤아를 부드럽게 안아주며 등을 다독였다.“그나저나.”최군성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배현진이 이번에 귀국한 이유가 송윤지와의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잖아. 그런데 소피아가 갑자기 끼어들다니, 도대체 또 무슨 상황이야?”“오빠는 애초에 송윤지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배윤아가 최군성을 바라보며 말했다.“게다가 이번에 돌아온 이유도 결혼 때문이 아니야. 해외 회사의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아서 돌아온 거야.”“그래?”“해외 시장은 원래부터 우리 가족의 주력 분야가 아니었어. 아빠는 그동안 해외 사업을 오빠에게 맡겼는데, 오빠가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익숙하게 운영할 거라고 생각했고 오빠가 성과를 내서 친척들 입을 막아주길 바랐던 거야. 하지만 오빠도 해외에서 고생 많이 했어. 이미 시장은 포화 상태였고 각종 장벽도 많았거든. 백인 중심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이름을 알리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야.”최군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그럼, 오빠가 이번에 돌아온 건 본사 지원을 요청하려고 한 거구나?”배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오빠가 송윤지와 결혼을 잘 성사했다면, 아빠와 엄마가 기뻐서 본사 지원을 해줬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소피아를 데리고 들어올 줄은.”“걱정하지 마.”최군성은 배윤아를 위로하며 말했다.“우리 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하면 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최씨 가문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경원 아저씨를 안심시키고 병이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거야.”배윤아는 최군성의 품에 기댔다. 이 따뜻한 품만이 배윤아를 안정시켜주는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그러나 그 시
임지강은 자신이 한 말을 되짚어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혹시 자신이 돌려서 모욕한 걸로 들린 건 아닐까?그는 황급히 해명하려 했지만, 말문이 막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그런데 송윤지는 갑자기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송윤지 씨, 저는 그저...”“말 안 해도 돼요.”송윤지는 맑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알아요. 나쁜 뜻은 없었다는 걸.”임지강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송윤지를 바라보았다.“그런데요, 앞으로는 그런 썰렁한 농담은 하지 마세요. 농담은 별로 안 웃기는데, 임 대표님 반응이 참 웃겨요!”송윤지의 말에 임지강도 따라 웃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창문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두 사람의 얼굴을 따뜻하게 비췄다.송윤지는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임지강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그리고 송윤지도 임지강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그것은 단순한 호감 이상이었다. 그에게서는 이상하게도 익숙함이 느껴졌다. 마치 전생에 알고 있었던 것처럼.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참으로 신비로운 것이었다....배윤아는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작품은 아직 절반만 완성된 상태였지만, 마감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그때 최군성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화실로 들어섰다. 최군성은 배윤아의 그림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윤아야, 이 부분의 구도가 맞지 않잖아... 그리고 여기, 앞부분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묘사되지 않았다고.”“영상 제작사에서 이미 전화가 왔어. 그쪽은 홍보까지 마쳤고 이제 우리 둘의 완성본만 기다리고 있대. 그런데 이 속도로는 안 될 것 같아.”“차라리 내가 우리 엄마한테 물어볼까? 어진 엔터테인먼트가 그래도 영상 업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가 있잖아. 우리 엄마 인맥도 넓으니까, 제작사에 부탁해서 마감일을 조금 미뤄보라고 할게.”“그만둬.”배윤아는 한참을 침묵하다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1년을 더 준대도 똑같아.”최군성은 걱정스러운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송윤지의 고열이 서서히 내려갔다.송윤지는 마치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서 다시 임지강의 얼굴이 나타났지만, 지난번처럼 기묘한 꿈은 아니었다.이번에는 임지강이 송윤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따뜻하고 다정했다. 마치 자신의 모든 애정과 온기를 송윤지에게 전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꿈속에서 송윤지는 호접란이 만개한 작은 정원에 있었다. 꽃들은 활짝 피어 있었고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쬐며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오성에 온 이후로 본 적 없었던 평화로운 하늘이었다.정원의 한쪽에는 작은 남자아이가 송윤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아이는 포동포동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큰 소리로 엄마라고 외쳤다.송윤지는 아이를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송윤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이 깊은 피로감에 휩싸였고 마치 물속에서 건져낸 듯 축 처져 있었다.그러나 고열로 인한 불편함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송윤지는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움푹 들어간 침대 자리에 익숙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송윤지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부엌에서는 임지강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임지강은 송윤지를 위해 뭔가를 요리하려는 듯했다.그러나 부엌일은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단순히 국을 끓이는 일이었는데도 그는 냄비를 태워버렸고 부엌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임지강은 짜증 난 듯 국자를 내던지며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는 화가 가득 차 있었다.“네가 말한 대로 했는데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그는 잠시 말을 듣더니 다시 소리쳤다.“이러고도 호텔 총주방장이야? 당장 그만둬!”“내가 주소를 보낼 테니까 음식이랑 국 좀 가져와. 1분이라도 늦으면 내일부턴 짐 싸서 나가야 할 줄 알아!”송윤지는 이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웃음소리를 듣고 갑자기 뒤돌
임지강은 막 공항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중림 그룹에서 처리할 일이 있어 오전에 운산시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선배로부터 송윤지와 관련된 전화가 걸려 왔다.송윤지는 임지강이 필요해 보였다.임지강은 주저 없이 짐을 내려놓고 부하에게 운산시로 혼자 가라고 지시했다.“대표님, 이건...”부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쪽 사람들한테 이미 지시해 두었어.”임지강은 급히 설명을 이어갔다.“운산시에 도착하면 내가 지시해 둔 대로 그 사람들과 협력해 일을 처리하면 돼. 내가 없어도 문제없을 거야.”부하가 멍하니 있는 사이, 임지강은 이미 차의 가속 페달을 밟아버렸다. 차는 화살처럼 도로 위를 질주했다.중림 그룹의 일 따위는 사소한 문제였다. 그는 송윤지와 함께 시간을 보낼 모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임지강은 금세 송윤지를 데리러 갔다.송윤지는 두통과 인후통에 시달리며 피곤한 상태였고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어 했다. 집에 도착하자, 송윤지는 문 앞에서 누군가가 이삿짐을 나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송윤지는 문간에 서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그때, 소피아가 문밖으로 나왔다. 소피아는 송윤지를 보자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돌아왔네요? 송 선생님, 그동안 우리 제임스를 잘 돌봐주셔서 감사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 없을 거예요!”소피아는 비웃는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현진 씨가 제임스에게 개인 교사를 붙여줬거든요. 앞으로는 집에서 수업할 예정이에요. 현진 씨는 제임스를 정말 친아들처럼 아껴서요. 제임스에게 돈 쓰는 걸 보면, 진짜 친아들보다 더 신경 쓰는 것 같아요!”송윤지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문틀에 기대 있었다.“아, 맞다.”소피아는 비웃으며 덧붙였다.“현진 씨가 이 집을 팔았어요. 오늘은 짐을 좀 챙겨가려고 왔어요. 이제 우리 만날 일은 없을 거예요.”“그래요?”송윤지는 조용히 말했다.“정말 다행이네요...”“현진 씨가 저를 위해 새집을 사줬어요!”소피아는 일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