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진 후, 김단은 다시 영의정 저택으로 돌아갔다.소복이 앞장서 김단을 데려갔다.궁궐에서와는 달리 소복은 영의정 댁 문을 들어서자 거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였다.영의정이 직접 나와 그들을 맞이했고, 소복은 깍듯하게 영의정에게 예를 표하면서도 꽤나 득의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대감, 평안하셨소? 실은 공주 마마께서 사촌 분을 염려하시어 나에게 낭자를 데리고 가 살펴보라고 명하셨네.”맹영지와 서원 공주는 사촌 자매였다.소복의 말이 떨어지자 영의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이 커졌음을 직감했다.그는 곧장 옆에 있는 민태훈을 노려보았다.민태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김단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고, 이내 앞으로 나와 소복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대감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으십니다. 제 부인은 이미 병세가 깊어 낭자가 오늘 아침에 와서 보았음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중전 마마와 공주 마마께서도 이미 낭자가 다녀갔다는 것을 알고 계시오!” 소복은 미소를 지으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심지어 낭자는 그 때문에 중전 마마의 맥을 짚어 드리는 일정에도 늦었소! 하지만 중전 마마께서도 조카 분을 가엾게 여기시어 꾸짖지 않으셨네.”꾸짖지는 않았지만, 민씨 가문 때문에 중전 마마의 일을 그르쳤다고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격이었다.민태훈의 표정은 이미 매우 험악해져 있었다.사실 그는 시간을 계산해 두었었다. 김단이 매번 사시쯤 중전의 맥을 짚으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청하면 전혀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더욱이 그는 김단이 궁궐에 먼저 다녀와 일을 본 뒤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렇게 부르자마자 냉큼 올 줄이야!아무래도 역시 영의정 가문의 병을 고치면 자신의 명성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서둘러 온 것일 것이다!그 생각에 민태훈의 음흉한 눈빛이 다시 김단을 향했다.김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태연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소복이 영의정을 향해 말했다. “중전
“네 이놈! 주인을 믿고 미쳐 날뛰는구나!”참으로 익숙한 말이었다.김단은 며칠 전 자신이 소복을 보며 그렇게 욕했던 것을 떠올렸다.이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공주 마마를 믿고 감히 영의정 댁에서 날뛰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아무리 맹 부인을 치료하지 못하게 막으셔도, 저는 기어코 치료할 것입니다! 어디 한번 저를 쫓아내 보시지요, 공주 마마께서 잘난 당신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으실지 없으실지 한번 지켜보시지요! 그리고 잘난 당신의 할아버님께서도 당신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봅시다!”“네 이놈!”“지나가겠습니다!”김단은 민태훈을 밀치고 맹영지의 방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아침에 한 번 와봤기에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민태훈은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돌아서서 가버렸다.김단은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 민태훈의 분노한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바로 이거다. 더 화낼수록 좋다. 민태훈이 공주와 개처럼 싸우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일 것이다. 그들이 심하게 싸울수록 그녀는 더욱 기뻤다!맹영지의 어린 하녀는 김단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김단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김단은 그녀를 위로할 시간이 없었고, 다시 맹영지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그러다 맹영지의 뒤통수에 작은 혹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건 언제 생긴 것이냐?”김단이 물었다.어린 하녀는 앞으로 나와 한번 보고는 말했다. “오래됐습니다. 아마 3년 전쯤일 거예요. 대감...께서 찻주전자로 뒤통수를 때리셨는데, 부인께서 그 자리에서 기절하셨습니다. 나중에 깨어나셨지만 뒤통수에 혹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부인께 여쭤보니 아프지 않다고 하셔서 의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김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민태훈이 맹영지가 3, 4년 동안이나 아팠다고 말한 것과 혹이 생긴 지 3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맹영지가 지금처럼 반응
조선의 어느 음력 12월 28일.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오전에 시작했던 빨래를 간신히 마친 김단은, 얼어붙어 감각을 잃은 파랗게 질린 손을 닦을 틈도 없이 세답방의 나인에게 불려갔다.“어서 가보게. 진산군댁에서 자네를 데리러 왔네.”나인의 말에 김단은 자리에 얼어붙었다.진산군댁,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였다.한때 그녀도 그 댁의 귀한 여식으로 15년을 자랐었다. 3년 전, 자기가 진짜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정2품 진산군댁의 안주인인 정부인 임씨와 같은 해에 출산했던 유모는 임종 직전, 죄책감이라도 들었는지 자기가 두 아이를 바꿨다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김단은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부부가 자신의 친딸, 임원을 상봉한 것에 감격스러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서로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모녀와 부녀의 모습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5년간, 그녀는 자신의 부모님을 한 번도 친부모가 아니라고 의심한 적 없었다.진산군은 안색이 어두워진 김단에게 앞으로도 이 집안의 여식으로 남아 임원의 언니로서 살아가도 좋다고 했다. 임씨도 그녀를 친딸처럼 대하겠다고 약조했다.하나, 궁궐에 들어 공주자가의 유리그릇을 깨트린 임원을 발견한 부부는, 임원의 몸종이 김단을 모함할 때조차 임씨 부부는 망설임 없이 수양딸이었던 김단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웠다. 공주는 분에 겨워 그녀를 세답방의 무수리로 쫓아냈으나, 한때 부모님이었던 그들은 임원의 옆에 서서 멀뚱히 지켜보기만 했다.그날, 김단은 그들이 자신의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멍하니 서서 뭐 하시오? 그 댁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시오.”나인의 독촉 소리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세답방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희미한 햇살이 비친 문 쪽에서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사내의 얼굴을 마주한 김단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랫동안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던 가슴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은
그 목소리에 김단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래전 무감각해진 줄 알았던 그녀의 심장은 익숙한 목소리에 활력을 얻은 듯 천천히 뛰었다.그녀는 천천히 마차 안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 나이에 호국 장군이 된 그녀의 옛 정혼자, 소한이다. 그녀는 얼른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장군님이시군요.”미간을 살짝 찌푸린 소한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향했다. “낭자, 진산군댁에 가는 길이었소?”고개를 숙인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한동안 침묵이 흘렀다.소한은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알고 있던 그녀는 항상 곁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여인이었다. 시끄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집안에서 정해준 혼사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인내심을 가지고 견뎠었다. 가끔은 지치지 않고 떠드는 그녀의 입을 막기 위해 떡을 집어넣기도 했지만, 그 순간조차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던 그녀였다. 떡으로 입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반 시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활달했던 여인이었다. 못 본 사이, 김단의 입은 굳게 닫혀있었고 전처럼 떠들지 않았다. 마차에서 내린 소한은 그녀를 부축하는 대신 냉랭하게 말했다. “마침, 궐에 들던 길이었소. 이 마차를 타고 돌아가시오.”그녀가 거절하기도 전에 그가 한마디 더 했다. “다쳤으면 무리하지 마시오. 본인은 몰라도, 그 댁 큰 마님께서 속상해할 것이오.”그의 목소리에는 반박할 수 없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조모님은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무수리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조모님께서 중전마마께 간청했기 때문이다. 만약 다리를 절뚝거리며 힘겹게 돌아온 그녀를 보게 되면, 조모님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라 여긴 김단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쇤네, 장군님께 감읍할 따름입니다.”말을 마친 김단은 천천히 마차로 다가갔다.가까이선 본 소한은 3년 전과 달리 키가 훌쩍 커져 있었고 체격도 다부져졌다.최근 전쟁에서 승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직도 전
김단이 전에 묵었던 별당은 매화당이었다.정원에 무수한 매화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꽃샘추위가 찾아올 즈음 핀 매화꽃들은 초봄까지 지지 않았다. 그녀가 어릴 적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매화라는 소리에 진산군은 조선 팔도로 사람을 보내 매화나무를 구해왔고 그 종류는 다양했다. 그 후로 매년 수백 냥의 은자를 들여가며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매화나무를 극진히 돌봤다. 하지만 매화당에 핀 매화꽃이 아름답다는 임원의 말 한마디에 매화당은 곧 임원의 별당이 되었다.그 순간에는 자기 별당을 빼앗긴 것 같아 분하기도 했으나, 지금 돌이켜보니 이 집안의 친딸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었다. 이 집안의 물건과 사람들은 전부 임원의 것이었다.김단, 그녀야말로 남의 자리를 꿰찬 외부인이었다. 길을 안내하던 몸종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전에 아씨를 모셨던 몸종이 혼인하여 출가하는 바람에 마님께서 쇤네를 아씨께 보내셨습니다. 쇤네는 숙희라 하옵고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쇤네를 불러 말씀하시면 됩니다.”숙희는 통통한 볼에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단은 그녀가 눈에 익었다.“혹 전에 오라버니를 모시지 않았더냐?”숙희가 놀란 듯 답했다.“쇤네를 알아보시겠습니까?”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예전에 임학의 외별당에 드나들면서 몇 번 마주쳤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임학의 몸종을 자기에게 붙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분명 3년 전만 해도 임학은 그녀가 임원을 해치려 한다고 오해하며 그녀에게 적대심을 품었다.그런 사람의 몸종을 붙인 거로 보아, 감시하려는 게 틀림없었다.새로 안내받은 별당은 그리 넓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연못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면 연꽃이 활짝 피어 꽤 아름다웠을 테지만, 지금은 연꽃이 다 지고 시든 가지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다행히 실내에 불을 지핀 덕에 따뜻했다.미리 따뜻한 물을 준비해 둔 숙희는 김단의 목욕을 돕기 위해 나섰으나, 김단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혼자 하면
임원이 선의로 건넨 말을 날카롭게 받아치는 김단을 본 임학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말에 씨가 있구나. 몸에 상처가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뭣 하러 숨긴 것이냐?”그녀가 미리 말만 했어도 임학은 내의원에 들러 약을 받아왔을 것이다.“도련님께서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오라버니라 칭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분개한 임혁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이 집에서 어릴 때부터 네게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더냐? 세답방에 과연 얼마나 강한 고수가 있었기에 이리도 다친 것이냐?”그의 말에 김단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걷어 올렸던 옷소매를 천천히 끌어내린 그녀도 서늘하게 대꾸했다.“처음에는 반항도 하였지요. 도련님 말씀처럼 세답방 나인들은 소인의 상대가 아닙니다. 하나 그들의 수법도 점점 다양해지더군요. 깊이 잠든 사이 차가운 물을 부어버린다거나, 밥을 먹을 때 남들은 국을 퍼가지만 소인에겐 하수구 물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게 빨래한 옷들을 뒷간에 던져버리기도 하고 자신들의 일을 소인에게 떠넘기기도 했더이다.”임학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상궁마마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소인에게 돌아온 것은 매질밖에 없었습니다. 점점 저항도 하지 않게 되었고 침구가 젖으면 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하수구 물이라도 먹었습니다. 한 번은 상궁마마께서 하도 심하게 구타하여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나, 다행히 진산군댁 수양딸이라는 신분 덕에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요. 그 뒤론 전처럼 심한 구타는 하지 않았습니다.”깜짝 놀란 임학의 표정에 김단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혹 소인이 못 된 마음을 먹고 일부러 그런 고초를 당했다고 여기신 겁니까?”“괴로워하거나 후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천한 신분을 가진 소인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괴로워할지언정, 소인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분들이라는 거 잘 알고 있나이다. 어쩌면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은 게 이 댁 아씨가 아니라 소인이라 안도하셨을 수도 있겠지요.”임학은 자신을
소한이 손에 든 약재 함을 내려다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임학은 불안한 듯 재촉했다. “금일 전하께서 궐에 들라는 전교를 내린 적 없는 줄로 아네만, 혹 김단을 마중간 것이오?”임학은 소한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였고 눈빛만 봐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임학이 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제정신이오? 전에 김단이 좋다고 매달릴 땐 미동도 하지 않던 인간이, 원이의 정혼자가 된 지금 다시 김단에게 흔들리는 게 정상이오? 내 누이들을 불장난에 끌어들일 생각 마시게! 그땐 우리의 우정도 끝날 테니.”소한은 조롱 어린 시선으로 임학을 쳐다보았다.“자네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내가 보기엔 자네야말로 첫째 누이를 신경을 쓰는 것 같군.” 사실 소한의 말처럼 누구보다 김단을 신경 쓰는 것은 임학이었다. 자기 마음을 정확히 꿰뚫는 소한의 말에 임학은 목구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고고한 척하지 마시오. 3년 전 그날, 그 자리에 자네도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저 아이는 날 원망하기도 하지만, 자네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알고 있소.”소한이 서늘한 눈빛으로 대답했다.“마차 안에 있던 수정과는 건드리지도 않더군.”수정과는 고사하고 난로조차 건드리지 않았다.만약 큰 마님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소한의 마차에도 올라타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소한을 보자마자 예를 갖춰 인사하며 거리를 뒀다.전처럼 만나서 좋다며 인사하지도 않았고 그를 연모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오래전의 기억을 떠올리던 소한은 마음이 어지러웠다.누구보다 소한에게 다정했던 누이가, 소한을 연모하던 누이가 더는 그에게 미련 없이 돌아섰다는 말에 임학도 큰 충격을 받았다. 누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딴사람이 되자, 임학도 상당히 놀랐다. 그녀의 발에 가득 자리 잡은 흉터들이 떠오른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세답방 궁인에게 화가 났다. 공주자가의 명이라 할지언정, 김단은 진산군의 여식이었다. 임학은 불편한 기색을 띠며 소한을 흘겨보았다.“전쟁터에서
그날 밤, 김단은 새벽녘까지 잠에 들 수 없었다.방 안의 난로가 뜨겁게 타올라서일 수도 있고, 3년 동안 추위에 떨며 비가 새는 음침한 오두막과는 달리 너무 포근한 잠자리 때문일 수도 있었으며, 마른 이불이 너무 따뜻해서일 수도 있었다. 모든 것이 황홀하게 느껴질 만큼,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낯선 기분이 들었다.남은 생은 세답방에서 보내게 될 줄 알았으나 다행히 그곳을 벗어났다.이튿날 아침, 눈 부신 햇살이 방 안을 비췄다.그녀는 비로소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자각할 수 있었다.임씨 부인이 새로 준비해 준 옷은 그녀의 몸에 알맞지 않았지만 상처는 가려줄 순 있었다.그녀는 아침 일찍 안채로 향했다. 아침 기도를 하시는 조모님을 기다리기 위해 안채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인기척을 느낀 큰 마님은 문밖으로 나와 그녀를 마주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돌아왔느냐?”짧디짧은 말이었으나 무한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김단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안채 안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으며 문안 인사를 올렸다.“조모님, 그간 기체일향하시나이까?”“어서 할미에게 오거라.”큰 마님은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팔을 들었다.김단은 조심스레 그녀에게 다가갔다.큰 마님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많이 여위었구나.”짤막한 한마디의 말에 묵혀뒀던 설움이 밀려 온 김단은 그녀의 품에 안겼다. 몸종들도 눈시울을 붉히며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3년 전 진산댁의 모두가 친딸에게 관심을 쏟던 순간에, 한켠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던 김단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큰 마님이었다. 김단은 언제고 당신의 손녀이라며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그녀가 세답방에서 고초를 겪을 때, 중전마마께 간청을 올리려한 것도 큰 마님뿐이었다. 하지만 중전을 뵙기도 전에 이 사실을 알아차린 공주가 그녀를 궐 밖으로 내쫓는 바람에 세답방에서 바로 빼내지 못했다.진산군댁 큰 마님의 무모한 성정을 나무라 하는 나인에게 달려든 김단은 결국 그날
“네 이놈! 주인을 믿고 미쳐 날뛰는구나!”참으로 익숙한 말이었다.김단은 며칠 전 자신이 소복을 보며 그렇게 욕했던 것을 떠올렸다.이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공주 마마를 믿고 감히 영의정 댁에서 날뛰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아무리 맹 부인을 치료하지 못하게 막으셔도, 저는 기어코 치료할 것입니다! 어디 한번 저를 쫓아내 보시지요, 공주 마마께서 잘난 당신의 목숨을 가져갈 수 있으실지 없으실지 한번 지켜보시지요! 그리고 잘난 당신의 할아버님께서도 당신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지 없는지도 봅시다!”“네 이놈!”“지나가겠습니다!”김단은 민태훈을 밀치고 맹영지의 방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아침에 한 번 와봤기에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민태훈은 이미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돌아서서 가버렸다.김단은 몇 걸음 걷다가 뒤돌아 민태훈의 분노한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냉소했다.바로 이거다. 더 화낼수록 좋다. 민태훈이 공주와 개처럼 싸우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일 것이다. 그들이 심하게 싸울수록 그녀는 더욱 기뻤다!맹영지의 어린 하녀는 김단이 돌아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김단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김단은 그녀를 위로할 시간이 없었고, 다시 맹영지의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그러다 맹영지의 뒤통수에 작은 혹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이건 언제 생긴 것이냐?”김단이 물었다.어린 하녀는 앞으로 나와 한번 보고는 말했다. “오래됐습니다. 아마 3년 전쯤일 거예요. 대감...께서 찻주전자로 뒤통수를 때리셨는데, 부인께서 그 자리에서 기절하셨습니다. 나중에 깨어나셨지만 뒤통수에 혹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부인께 여쭤보니 아프지 않다고 하셔서 의원을 부르지 않았습니다.”김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민태훈이 맹영지가 3, 4년 동안이나 아팠다고 말한 것과 혹이 생긴 지 3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어쩌면 맹영지가 지금처럼 반응
한 시진 후, 김단은 다시 영의정 저택으로 돌아갔다.소복이 앞장서 김단을 데려갔다.궁궐에서와는 달리 소복은 영의정 댁 문을 들어서자 거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였다.영의정이 직접 나와 그들을 맞이했고, 소복은 깍듯하게 영의정에게 예를 표하면서도 꽤나 득의양양한 말투로 말했다. “대감, 평안하셨소? 실은 공주 마마께서 사촌 분을 염려하시어 나에게 낭자를 데리고 가 살펴보라고 명하셨네.”맹영지와 서원 공주는 사촌 자매였다.소복의 말이 떨어지자 영의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이 커졌음을 직감했다.그는 곧장 옆에 있는 민태훈을 노려보았다.민태훈은 굳어진 표정으로 김단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고, 이내 앞으로 나와 소복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대감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으십니다. 제 부인은 이미 병세가 깊어 낭자가 오늘 아침에 와서 보았음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중전 마마와 공주 마마께서도 이미 낭자가 다녀갔다는 것을 알고 계시오!” 소복은 미소를 지으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심지어 낭자는 그 때문에 중전 마마의 맥을 짚어 드리는 일정에도 늦었소! 하지만 중전 마마께서도 조카 분을 가엾게 여기시어 꾸짖지 않으셨네.”꾸짖지는 않았지만, 민씨 가문 때문에 중전 마마의 일을 그르쳤다고 면전에 대고 말하는 격이었다.민태훈의 표정은 이미 매우 험악해져 있었다.사실 그는 시간을 계산해 두었었다. 김단이 매번 사시쯤 중전의 맥을 짚으러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침 일찍 사람을 보내 청하면 전혀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더욱이 그는 김단이 궁궐에 먼저 다녀와 일을 본 뒤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렇게 부르자마자 냉큼 올 줄이야!아무래도 역시 영의정 가문의 병을 고치면 자신의 명성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서둘러 온 것일 것이다!그 생각에 민태훈의 음흉한 눈빛이 다시 김단을 향했다.김단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태연하게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소복이 영의정을 향해 말했다. “중전
이 어찌 속임수가 아니란 말인가?그는 당장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싸늘해진 눈빛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김단은 황급히 말했다. “사실 소인은 부인보다 완벽한 환자를 본적이 없습니다.”말을 하면서 김단은 목소리를 낮추고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듯 조심스레 말했다. “부인은 반응이 둔하셔서 소인이 어떻게 손을 써도 아파하지 않으시니, 소인의 침술을 시험해 보기에 딱 이십니다.”이 말을 들은 민태훈은 순간 크게 소리쳤다. “어딜 감히! 공주 마마를 믿고 감히 내 부인에게 이토록 무례하게 대하시는 것이란 말이오!”김단은 민태훈의 가식적인 모습을 보며 속이 메슥거렸으나, 고개를 숙여 공손히 예를 올렸다. “대감, 부디 용서해주시지요. 다만 부인의 상태가...”“꿈도 꾸지 마시오!” 민태훈은 코웃음을 쳤다. “비록 곧 죽을지라도 내 부인인데, 어찌 자네의 장난감으로 만들 수 있겠소!”그 말인 즉, 민태훈이 김단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는 그의 체면이 구겨지기 때문이었다.맹영지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민태훈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어리석었다!김단이 다시 말을 꺼내려 하자 민태훈이 손을 들어 막았다. “됐소, 낭자도 오늘 보았으니 부인이 꺼져가는 등불과 같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오.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꺼져가는 등불이라니, 스물다섯도 안 된 아가씨를 두고 할 말이 아니었다.김단은 속으로 분노했지만, 끝내 예를 올리고 자리를 떠났다.상관없었다.민태훈이 그녀를 멸시하고 무시한다면, 그가 수긍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나서도록 만들면 된다!이에 김단은 일부러 미시에 이르러서야 중전의 침소로 향했다.그곳에는 서원 공주도 있었다.두 사람은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렸다. 김단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자 중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원 공주는 다소 화를 내며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온 것이오? 오늘 어마마마의 맥을 짚어 드려야 하는 것을 몰랐던 것이오? 아니면 아바마마 곁에 가까워지니 낭자의 재주가 대단한 것처럼
민태훈은 답례하며 말했다. “난 낭자가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올 줄 알았소.”하지만 그의 동작은 어색했고 말투도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김단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약간의 경멸감까지 느껴졌다.분명 그는 그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있었다.김단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민태훈이 그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몰래 괴롭히겠는가?맹영지의 현재 상황 역시 민태훈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민태훈의 학대가 맹영지를 정신적으로 무너뜨리고 삶의 의욕을 잃게 만들어 조금씩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명 민태훈은 맹영지에게 의원을 불러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맹영지의 상태는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한양 내에서는 맹영지에 관한 소문이 전혀 없었다.오늘 그녀가 직접 보지 않았다면 맹영지가 지금 이런 상태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아마 구 씨의 제안을 민태훈은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맹영지의 하녀를 시켜 그녀를 불러들였을 것이다.그렇게 된 데에는 분명 그녀를 향한 민태훈의 멸시도 한몫했을 것이다.그녀가 명의의 제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음에도 민태훈은 그녀 같은 하찮은 의녀가 맹영지를 치료할 의술을 갖췄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그는 김단이 차를 엎질렀다는 것을 듣고도 슬쩍 하녀를 흘겨볼 뿐 별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그는 김단이 무언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하녀를 물린 뒤 말했다. “내 아내가 3, 4년 전부터 병세가 깊어져 수많은 명의를 불렀으나, 전혀 진전이 없었소.”그의 말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그는 김단에게 명의도 고치지 못한 병이니 그녀는 더더욱 고칠 수 없을 것이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하지만 김단은 못 알아들은 척, 속으로 생각했다. 소 오라버니는 5년 동안이나 마비되어 있었고,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김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맹영지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어의원 의녀로, 부인을 진료하러 왔소.”역시나 그녀의 말을 듣고도 맹영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김단은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맹영지의 맥을 짚었다.맥은 매우 약했다. 심지어 죽어가는 듯한 맥 기운마저 느껴졌다.보통 이런 맥은 죽음을 코 앞에 둔 사람에게서 나타났다.김단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하고 손을 거두었다. 그녀 같은 젊은 나이에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때 방금 전 그 어린 하녀가 차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 “아씨, 차 드세요.”김단은 감사 인사를 하고 손을 뻗어 찻잔을 받으려 했으나, 순간 찻잔이 엎어졌다.김단에게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몽땅 맹영지의 이불 위로 쏟아졌다.“아이고! 이년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어린 하녀는 그 말과 함께 어지러워진 것을 허둥지둥 치우기 시작했다.김단도 일어나 자리를 비켜주어 어린 하녀가 편히 치울 수 있도록 했다.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싸늘했다.어린 하녀는 분명 고의로 그런 것이다.맹영지를 그토록 걱정하면서 왜 일부러 침상에 차를 쏟았을까?김단은 의심을 품은 채 하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초가을의 얇은 이불은 차에 금세 젖어 들었고, 맹영지의 옷과 바지까지 전부 젖었다.어린 하녀는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외치며 옷장에서 깨끗한 옷과 바지를 꺼내 맹영지를 갈아입히려 했다.하지만 맹영지는 반응이 느리고 동작이 어설펐기 때문에 어린 하녀는 애를 먹으며 난처한 표정으로 김단을 바라보았다. “아씨, 혹시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실까요?”김단은 이를 차마 거절할 수 없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그녀가 맹영지를 부축하자 어린 하녀는 맹영지의 바지를 벗겼다.그러자 그녀의 다리에 있는 서슬 퍼런 보라색 멍 자국이 김단의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깜짝 놀라
명일.김단은 다시 어의원으로 돌아가야 했다.마차가 평양 대군의 관저에서 곧 도착하려 하자, 누군가에 의해 저지 당했다.“무엄하도다! 감히 평양 대군 관저의 마차를 막는 것이냐!”마부의 목소리는 두터워 마치 무예를 하는 자의 기운이 느껴졌다.김단은 마차 안에서, 마부가 검을 꺼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이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나으리,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노비는 도련님의 명을 받아 찾아 왔나이다. 도련님께서 관저에 들르시어, 큰 며늘 아씨의 목숨을 구해주시어라 청 하셨사옵니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차 안으로 손 하나가 들어왔다.마부가 옥패를 쥐고 있었다.옥패는 투명하여 윤기가 돌았다.마치 드문 옥패 같았다.중요한 것은 옥패 위로 ‘민’ 자가 새겨있다.곧 정승댁 민 씨 집안이 가질 수 있는 물건이다.큰 며늘 아씨 라니.김단은 소하의 말이 떠올랐다.맹영지가 이후에 정승댁의 장남과 혼인을 했다는 것이다.어제만 하여도 어찌 맹영지에게 다가갈까 머리가 아팠는데, 민 씨 집안이 자처하여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마차 안에서 대답이 들리지 않자, 민 씨 집안의 몸종이 소리를 높였다.“구 씨 집안의 셋째 아씨가 제 큰 도련님께 나으리를 소개하셨다고 하옵니다!아씨께서 이르시길, 나으리의 의술이 높고 인자하셔서, 큰 며늘 아씨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거라 하셨나이다!”몸종은 초조해하며 마차를 보고 있었다.드디어 마차 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구 아씨의 소개라면 저도 거절할 수 없소이다. 정승댁으로 가시오!”“감사하옵니다, 나으리! 감사하옵니다!”몸종의 말투에는 기쁨이 섞여있었다.김단은 순간 숙희를 떠올렸다.만일 김단이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숙희는 이 몸종 보다 더 조급할 것이 분명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정승댁에 도착했다.김단은 처음이 아니었다.어렸을 때, 민 씨 집안에서 연회를 연 적이 있었다.그 당시에 진산군과 임 씨 부인과 같이 참석했었다.어찌 된 일 인지, 민 씨 집안의 큰 도련님께
서아름의 상황을 보아, 조산을 면할 수 있다고 하나 중전의 손에 죽을 것이 분명하다.허나 서아름을 살펴야, 두 사람 모두 구할 수 있을 것이다.잠시 생각하고는 김단이 말했다.“스승님, 부디 제게 귀식환의 제조 법을 알려 주시옵소서. 저도 스승님과 같이 연구를 하겠나이다, 소하 오라버니는 제가 틈틈이 살필 터이오니, 오라버니의 팔이 차가워지면, 저와 스승님이 같이 한빙산을 연구하시는 것이 어떠시옵니까? 스승님께서도 강한 독은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나이까, 그러하면 어렵지 않을 것 이옵니다!”화월과 융골산 같은 독을 의원이 해독 법을 연구하지 않았는 가.의원은 김단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허나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그 해독 법은 그가 연구한 것이 아니다.약왕곡의 주인이 직접 연구해 낸 것이었다.독에 대해 모르는 이가 한빙산의 독성을 연구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이러한 생각에 의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곧이어 그의 시선이 바구니로 향했다.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다.“사실, 다른 방법이 있긴 하네.”김단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다급하게 물었다.“무슨 방법이옵니까?”“약왕곡의 독은 해독약과 같이 판다네. 소 총령에게 독을 푼 자가 분명 해독약을 가지고 있을 것이야.”곧 소하에게 독을 푼 자를 찾으면, 해독약을 빼내어 더 일찍 고칠 수 있을 것 이다.허나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탓에,독을 푼 자를 찾아도 해독약을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김단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소하 오라버니는 뛰어난 무예를 가지고 있었다.다른 이가 용골산을 풀고 나서, 오 년 동안 하반신은 움직이지도 못할뿐더러,밤 마다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는 가.이토록 잔인하고, 악독한 자가 어찌 해독약을 순순히 내어 놓겠는 가.허나 시도는 할 수 있다.만일 다른 방도가 없다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맹 씨에게 해독약을 내어 놓아라 해야 할 것이다.김단은 관저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다.의원이 귀식환의 제조 법을 알려주자마자, 김
의원의 말에 김단의 얼굴이 얼어붙었다.의원은 소 총령 다리의 퍼진 독은 융골산이라 했다.“그 독은 몸 전체의 뼈를 녹이는 것이 아닌, 두 다리만 녹여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네. 더하여 독에 걸린 사람은 종종 독성이 일어나, 두 다리의 뼈가 끊어 질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하지. 초반의 소 총령의 증상과 같아.”김단은 의원의 말을 경청했다.사실 융골산은 신경 쓰지 않았다.이제 소하 오라버니는 걸을 수 있지 않은 가.그녀가 신경 쓰는 것은 소하 안의 다른 종의 독이다.의원이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말을 이었다.“소 총령 체내 안의 독은 아마도 한빙산 일 것이야.초반에는 그저 손과 발이 차가울 뿐이지,허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한기가 온몸으로 퍼져 죽고 말 것이야.”그의 말에 김단은 등에 서늘함이 느껴졌다.의원이 수염을 쓰다듬었다.“허나 그 독은 약왕곡에 있다네. 그리 위험한 독은 아니야, 하지만 독성이 쉽게 퍼져 팔 전체가 차가워 지기도 전에, 체내에 있는 독성은 사라질 거야. 그 탓에 네가 소 총령의 손이 차갑다 하였을 때, 즉시 대답을 하지 못했네.”의원의 말에 김단은 안도를 했다.“그리하면 소하 오라버니께서는 괜찮으신 것이옵니까?”“장담은 하지 못하네.”의원이 김단의 말을 끊었다.“세상 만물에는 상생상극의 이치가 있듯이, 독성도 마찬가지네. 이전에는 융골산에 억눌려 제대로 퍼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네. 오 년이야. 오 년 동안, 한빙산이 혈을 따라 소 총령의 몸 구석구석에 퍼졌을 거야. 오늘날에는 폐로 들어가서, 빼내기 어려울 것이야.”“다른 방도가 있으십니까?”김단이 서둘러 물었다.의원은 화월, 융골산 모두 침으로 해독했다.그리하면 한빙산도 침으로 해독 할 수 있지 않은가!허나 김단의 말에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퍼지기 쉬운 한빙산의 독성은 그 누구도 연구하려 들지 않았네.”그는 김단을 바라보았다.“자네는 내가 귀식환을 연구하길 바라는가, 아니면 한빙산을 연구하길 바라는가.”그는 몸이 하나였기에 두 가지를
죽음을 가장 한다니.의원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깊게 고민하고는 대답했다.“약왕곡에 귀식환이라 하는 약이 있네. 먹고 나면 한 시진 안에 숨이 멈추어 죽은 자와 같지. 허나 제조하기가 지극히 까다로워. 위의 분들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울 거야.”김단은 미간을 찌푸렸다.“혹여 다른 방법이 있사옵니까?”“있긴 하지.”의원이 말을 이었다.“폐와 심경 양쪽 혈에 침을 일촌삼푼 으로 놓으면, 숨을 멈춘 것과 같은 상태를 만들 수 있네. 허나 위험해.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곧 귀식환이 더 신뢰할 만한 수법이었다.김단은 잠깐 생각하고는 의원에게 절을 했다.“부탁드리옵니다, 스승님. 귀식환을 만들어 주시 옵소서.”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김단을 일으켰다.“고운 마음씨를 보아, 이 스승도 최선을 다할 것이야. 허나 위험한 일이라 만일 잘못된다면, 공주와 중전의 의심을 받게 될 것이야. 계획을 철저히 세워야 해. 그렇지 않으면 자네가 큰 화를 입게 될 것이야.”“예, 알겠나이다!”김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그리고 의원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스승님께서 남은 일이 있사옵니까?”의원은 단번에 김단의 뜻을 알아챘다.“맥을 배우고 싶으냐?”김단이 예, 라며 대답했다.이전에도 의원을 따라 맥을 배웠지만,소하의 맥을 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더 배우고 싶었다.날이 밝자마자 왔으니,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은가.진력하는 그녀의 모습에 의원은 은침을 꺼냈다.곧이어 두 사람은 작은 방 안에서, 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두 시진이 지난 뒤에야 멈추었다.의원도 지친 모습을 보였다.“시진도 꽤 지났지 않느냐. 배가 고프구나, 같이 식사를 하지 않으련?”김단의 손은 의원의 손목에 맥을 짚고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이때, 검지와 중지 사이에 익숙한 움직임이 느껴졌다.김단이 깜짝 놀랐다.의원이 은침을 천천히 빼려고 하자 서둘러 말했다.“움직이지 마십시오!”의원도 깜짝 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