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의 눈앞엔 또 오래전의 일이 떠올랐다. 윤아가 강에 몸을 던져 뛰어드는 장면이었다.분명... 그렇게 위험했는데...강에 뛰어드는 윤아의 표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놀라서 벌벌 떨던 자신과는 달리...매번 이 장면이 꿈에 나타날 때, 시커먼 어둠은 그녀의 신경을 긁어 삼키면서 그때 자신과 윤아의 선명한 비교를 한번 또 한 번 알리고 있었다.그 사건 후, 소영은 만인의 칭찬을 받았다. 목숨으로 수현을 구했으니까.하지만 그녀는 사실 소인배, 하찮은 인간이었다. 고결한 윤아와 비교했을 때 더 그렇게 보였다. 윤아가 서슴없이 수현을 구할수록, 공을 가로챈 자신이 더 비열하고 파렴치하게 느껴졌다.이렇게 못된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성품이 고울 뿐만 아니라 행동거지도 단정하다고, 그래서 귀한 품격을 지녔다고 말이다.하지만 사실...‘아니야. 더는 생각하지 말자.’‘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지금 모든 사람은 내가 수현 씨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수현 씨도 그렇게 여기고 있고.’그리고 유일하게 진실을 알고 있는 윤아도 크게 앓으면서 기억을 잃어버렸으니 평생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이 합의서, 의의 있는데요.”윤아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소영을 현실로 끌어당겼다. 눈앞의 윤아의 얼굴이 예전 그때와 겹쳤다가 다시 갈라졌다. 과거의 소녀는 얼굴에 젖살이 약간 붙어 있었는지라 예쁜 동시에 깜찍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윤아는 오관도 더 또렷해지면서 청초하고 여리여리했는데, 첫눈에 숨이 딱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소영은 간신히 웃음을 지어내며 물었다.“그게 뭔데요?”윤아는 소영을 힐끗 보더니 다시금 머리를 숙여 합의서를 보았다.사실 이 합의서에 적힌 글자가 조금 많긴 하지만 내용은 결국 그 몇 가지밖에 없었다.첫째, 이혼하자마자 바로 해외로 떠날 것, 그리고 오 년 동안 귀국하지 말 것.둘째, 진수현 앞에서 절대 아이 얘기 꺼내지 말고, 또한 아이 핑계로 동정심 사지 말 것.셋째, 이혼하기 전, 진수현과
윤아는 침묵했다.그녀 맞은쪽에 앉은 소영은 가슴이 쿵쾅거리면서도 겉으론 태연자약한 척했다. 실은 소영도 잘 몰랐다. 아까 한 말들이 윤아를 겁먹게 할지 말이다.그녀는 윤아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윤아의 자부심이 대단히 높다는 점이다.그래서 소영은 이쪽으로 손을 대어 도박할 수밖에 없었다.계속 침묵하고 있는 윤아를 보는 사이, 탁자 아래에 있는 손은 이미 땀으로 가득했다. 소영은 간신히 입을 열어 말했다.“왜요? 설마 거절하겠다는 건 아니죠?”이 말을 듣자, 윤아는 덤덤하게 소영을 한눈 훑어보고는 물었다.“소영 씨 지금 많이 긴장한 것 같아요.”“내가 언제 긴장했다고. 난 그냥...”윤아에게 정곡을 찔린 소영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버럭 성질을 낼 뻔했다. 그녀는 할 수 없어 간신히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말을 끊었다. 잠시 후, 진정된 소영은 침착하게 말했다.“그래요. 천천히 고민해 봐요.”이때가 되어서야 소영은 아까 윤아가 말한 것처럼 빨리 끝내기를 원했다. 하지만 윤아는 아직도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사실 이 합의서를 체결하든 아니면 체결하지 않든 그녀에겐 별 차이가 없었다. 이 합의서를 체결하지 않아도 첫 번째 조항인 출국 및 오 년간 귀국하지 말 것 외, 모두 그녀가 원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첫 번째 조항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어디에 정착할지를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수현과 멀리 떨어질수록 좋다는 점이다.“어때요?”비록 소영이 제 입으로 천천히 고민하라고 했지만, 윤아가 너무 오래 생각하는 바람에 소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어 뜻을 물었다.윤아도 일부로 소영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었는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긴장하지 않는다면서요. 왜 이렇게 서둘러요? 이 합의서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윤아가 사인하기 전까지 소영은 그저 최선을 다해 입꼬리를 올려야 했다.“그럴 리가요. 윤아 씨 그냥 천천히 읽어봐요. 내가 조금 마음이
이 말을 듣자, 윤아는 오히려 웃었다.“그래요? 그런데 지금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건데요.”“두려워한다니요!”소영은 윤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수현 씨 생명의 은인이라면서요. 그런데 수현 씨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없으면 나더러 이런 합의서에 사인하라고 하겠어요.”순간, 소영의 얼굴엔 독기가 스쳤다. 윤아가 생명의 은인이고 뭐고를 직접 입에 담을 때면 소영은 피가 말라 드는 것 같았다. 윤아가 그 말을 하면서 잃어버린 기억이라도 되찾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화를 억누르고 있어서 그런지 평소에 평온하면서도 아름다운 이목구비는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윤아 씨가 기어코 이 아이를 낳겠다 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왜 이걸 준비했겠어요.”이 말을 마친 소영은 또 다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윤아에게 말했다.“아무튼 나 믿어봐요. 절대 윤아 씨 엿 먹이는 일을 없을 거니까.”윤아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오늘 얼굴이 바뀌는 ‘공연’을 보게 될 줄은 말이다.전에는 몰랐으니 망정이지 오늘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나니 정말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소영의 얼굴이 바뀌는 속도가 가히 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그럼 소영 씨도 나 믿어봐요. 합의서에 사인하지 않더라도 소영 씨가 말한 일들, 내가 다 해낼 테니까.”“윤아 씨!”소영은 윤아가 정말 단호하게 사인하지 않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만약 윤아 씨가 사인하지 않으면 나중에 이 조항들을 지킬지 말지를 누가 알겠어요?”“사인해도 꼭 지킬 거란 보장은 없어요. 내가 정말 뭘 하려고 한다면 합의서에 적힌 위약금쯤은 아무 것도 아니에요.”소영은 윤아를 쏘아보며 물었다.“도대체 뭘 하겠다는 거예요? 아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도 난 허락했어요. 그러니까 윤아 씨도 사인이라도 해서 날 안심시켜 주면 안 돼요?”윤아는 이 말을 듣자, 눈썹을 찡그렸다.“강소영 씨, 알아둬야 할 게 있어요. 아이 일은 소영 씨가 허락해서가
이 말을 마친 윤아는 더는 소영과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 물건을 챙기곤 빠르게 카페를 떠났다.윤아가 떠난 후, 주원이라는 남자는 소영의 맞은 쪽에 앉은 채, 윤아에 관한 것을 시시콜콜 캐어묻기 시작했다. 윤아는 당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윤아는 카페에서 나온 뒤, 집에 돌아가는 대신 길옆에 서서 오고 가는 차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커다란 돌멩이가 드디어 사라진 느낌이었다.윤아는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시라도 빨리 소영에게 진 신세를 갚았다고 알려드리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울리고 있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시간을 한눈 본 후, 아버지가 아마 일 하느라 바쁘실 거라고 짐작하고는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남은 시간 동안, 윤아는 요양원에 있는 김선월을 보러 갔다. 소영과 얘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지체된 바람에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요양원에 도착하게 되었다.윤아가 도착한 것을 보자, 간병인은 말을 걸어왔다.“사모님, 오늘은 평소보다 반 시간 늦으셨네요. 어르신께서 오래 기다리셨어요.”이 말을 들은 윤아는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약속이 있어서 조금 늦었어요.”“빨리 들어가 보세요.”“네.”윤아는 빠른 걸음으로 병실에 도착했다.간병인들은 마침 다 밖에 나갔고 병실엔 선월과 윤아만 남았다. 윤아가 병실에 들어가려던 순간, 그녀는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선월이 사진 한 장을 손에 들고는 넋을 잃은 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비록 거리를 두고 있어 선월의 옆모습만 간간이 보였지만 윤아는 선월에게서 전해져오는 무거운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할머님...”윤아는 나지막하게 부르며 들어갔다. 이 소리를 듣고 문득 정신을 차린 선월은 윤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는데, 얼굴에 담겨있던 슬픔은 이미 사라져있었다.“어머, 윤아 왔구나.”윤아는 선월 앞에 걸어가서 죄책감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 할머님. 오늘 약속이 잡히는 바람에 이제야 뵈러 왔어요. 오래 기다리셨죠
답장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수현이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점심에 들를게.」이걸 본 윤아는 살짝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안 바빠?」수현: 「바빠. 지금도 회의 중이고. 시간 내서 갈게.」수현의 답장을 보고 윤아는 더는 묻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수현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선월을 보러 오겠다는데, 윤아가 더 할 말이 없었다.-회의가 드디어 끝났다.회의실에서 거의 몇 시간 동안 수현의 무시무시한 아우라와 날카로운 말투에 시달린 회사 고위층 직원들은 사색이 되어 밖으로 걸어나가 서로를 바라보며 동정의 눈길을 건넸다. 그러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멋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를 떴다.수현은 넥타이를 정리하고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한눈 보았다. 지금쯤 떠나면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시간이 적당할 거라 생각했다.수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회의실에서 걸어 나가는데,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여자가 그를 불렀다.“수현 씨.”여자의 목소리가 어찌나 부드럽고 맑은지, 지나가던 직원들마저 가던 길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강소영이었다.수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소영이 도시락을 손에 든 채 그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그러자 원래 한없이 차가웠던 수현의 눈동자엔 부드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발걸음을 옮겨 소영에게로 다가갔다.“무슨 일로 여기에 왔어?”기타 고위층 직원들도 아직 있었는지라 소영은 조금 쑥스러워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수현 씨 요즘 되게 바쁘잖아. 그래서 잘 챙겨 먹지 않는 것 같아서 내가 오늘 특별히 수현 씨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만들어왔어.”주위에서 작은 감탄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소영의 하얀 두 볼엔 핑크빛이 물들었다. 그녀는 수줍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주위의 사람들도 참지 못하고 멈춰서서 이 장면을 구경했다.“어휴, 대표님. 오늘 점심 맛있는 거 드시겠네요.”“그러게요. 역시 우리 대표님, 인기 되게 많아요.”수현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지만 그런데 웬걸, 그들
”어, 어?”소영은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이건, 그녀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소영은 수현을 위해 점심을 만들려다가 다친 손가락을 그에게 보여주면서 그가 감동하고 자신을 안쓰러워하는 그런 장면을 상상했다. 그러면서 둘은 사무실에서 자연스레 더 친밀한 관계로 되는 것이었다.지금처럼 이런 상황이 아니라...소영은 이대로 포기하기 싫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수현 씨, 무슨 약속인 거야? 만약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는다면 나 사무실에서 수현 씨 기다리고 있을게.”“소영아, 미안해. 오래 걸릴 것 같아. 그러니까 먼저 돌아가.”“나...”소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조수는 그녀의 앞에 다가가 말했다.“소영 아가씨, 갑시다.”“...”소영은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는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보았다.‘이러면 어때? 설마 모른 척하겠어?’하지만 소영의 예상과는 반대로 수현은 아예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보지 못한 듯했다. 조수가 다가왔을 때, 그는 이미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소영은 제자리에 서서 점점 멀어지다가 사라지는 수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러던 중, 조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가씨, 가실까요?”소영은 수현의 조수를 힐끔 보았는데, 그는 지금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나 말투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녀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녀의 느낌은 정확했다. 수현의 이 조수는 확실히 소영을 좋아하지 않았다.필경 모든 회사 사람이 수현과 윤아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영이 하필 이때 도시락을 들고 회의실 앞에 와서 수현을 기다렸다.정말이지 무슨 속셈인지 뻔히 알렸다.조수는 오랜 시간 동안 윤아와 지내면서 윤아에 대한 호감이 대단했다. 그는 윤아가 업무처리 능력도 뛰어나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소영이 이러는 것을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하지
”아무 이유 없는 대접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아악! 화 나서 죽겠어!’결국 조수는 소영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요양원.수현이 도착했을 때, 시간은 예상했던 것과 비슷했다.여기까지 올 때 답답했던 심정은 요양원에 들어서서부터 윤아가 선월의 다리에 엎드린 모습을 본 후, 신기하리만치 싹 풀리면서 마음이 평온해졌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선월은 수현을 향해 시선을 돌리면서 수현과 허공에서 눈을 맞췄다.선월은 수현에게 조용하라는 손짓을 했다. 이걸 본 수현은 그제야 윤아가 선월의 다리에 기대어 잠든 것을 발견했다.선월의 다리가 불편할까 봐 수현은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굽혀 부드럽게 윤아를 들어서 안고는 옆의 작은 침대에 눕혔다.깊은 잠에 빠져서 그런지 윤아는 이렇게 안기고도 전혀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비비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품속의 이불을 끌어안고는 다시 꿈나라로 향했다.수현은 이런 윤아를 보며 결국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부드러운 볼을 살짝 꼬집었다.‘자는 모습도 진짜 귀여워.’탱탱한 촉감에 홀린 수현은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그녀의 볼을 꼬집었다. 저쪽 손을 내밀어 계속 꼬집으려고 할 때 선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만 해. 꼬집어서 깨울 작정이냐.”이 말을 듣자, 수현은 동작을 멈추면서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할머니, 그럴 리가요.”선월은 수현더러 자신의 휠체어를 밀고 나가라고 했고, 수현도 그대로 따랐다.방을 나가서야 선월은 평소 목소리로 수현에게 말했다.“윤아가 내 이야기를 듣겠다고 하더니 절반도 못 듣고 잠들었지 뭐니. 내가 너무 지루하게 들려줘서 그런지 아니면 요즘 잘 자지 못해서 그런지 아주 피곤해 보이더구나.”“요즘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랬을 거예요.”수현은 말했다.“다크서클이 심하더군요.”아까 윤아의 볼을 꼬집을 때 발견했다. 윤아의 다크서클이 평소보다 더 심하다는 것을. 피부가 원래 하얗기 때문에 다크서클이 조금이라도
이야기...‘아... 그러네.’윤아는 생각이 났다. 그녀는 선월이 젊었을 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실 되게 재밌게 듣고 있었는데 나중엔 이상하게도 졸음이 밀려왔었다. 하지만 선월에게 말하기는 조금 미안해서 점점 내려오는 눈꺼풀과 흐릿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지탱하며 계속 들었다.언제 잠든 건지는 그녀 자신도 잘 몰랐다.여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자책에 빠졌다.“나 일부러 잔 거 아니야. 할머님께서 날 나무라지는 않으셨어?”“할머니가 널 얼마나 아끼시는데. 그럴 것 같아?”수현은 윤아에게 요양원에 왔을 때부터 선월이 윤아를 깨우지 말라고 한 것까지 전부 알려주었다. 수현의 말을 들은 윤아는 눈을 내리깔며 옅게 웃었다.“하긴.”금방 깨서 그런지 윤아는 지금 살짝 순진해 보였다. 이런 윤아의 모습을 본 수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하루 종일 무슨 생각하고 다니는 거야.”윤아는 잠시 멈칫했다. 아까는 금방 잠에서 깼는지라 살짝 흐리멍텅했는데 지금은 순간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만지면서 수현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사실 가끔 수현의 어떤 특정적인 행동은 윤아를 아리송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수현이 자신을 조금이라도 좋아하지 않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이런 착각은 이 년간 종종 나타났지만 이럴 때마다 윤아는 금방 현실을 알아차리곤 했다.하지만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의 몸이 하나로 된 후로부터 윤아는 점점 이 감정 속에 푹 빠지면서 영원히 수현과 함께 할 거라는 믿음이 들었다.그러나 현실은 항상 참혹했고 그녀에게 고된 매를 주었다.강소영이 돌아오기만 하면 수현의 선택지는 언제나 그녀 뿐이었다. 더는 윤아의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초에 없었을 수도 있다.여기까지 생각한 윤아의 마음과 눈빛은 순간 차가워졌다. 그녀는 손을 내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런 윤아를 본 수현의 웃음도 조금 옅어졌다. 비록 윤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수현은 그녀 주위의 기류가 순간 서늘해진 것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