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그날 직접 두 눈으로 봤는데 오해라니. 윤아는 수현이 낯짝도 두껍다고 생각했다.수현은 눈앞의 이 여자가 갑자기 이리 화를 내는 이유가 자신과 소영이 함께 밤을 보냈다고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자 왠지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걸 느꼈다. 그러자 방금까지도 흙빛이던 낯빛이 훨씬 나아졌다. 수현은 입술을 앙다물더니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어. 그날 밤은…”수현은 그날 있었던 일을 설명하려고 했으나 그가 그날 밤 일을 말하려 하자 윤아가 잽싸게 그의 말을 끊었다.“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전혀 궁금하지 않아. 그러니까 굳이 알려줄 필요 없어.”생각하는 그런 일이 없었다니. 윤아는 수현이 그날 자신이 현장에 없었다고 생각해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넘어가려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날 그녀는 현장에 있었고 두 눈으로 직접 소영이 그를 데리고 떠나는 걸 봤다.밤새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도 모자라 이튿날 요양원에까지 늦게 오지 않았던가.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윤아는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일이 언제 이렇게까지 꼬여버렸는지… 윤아는 점점 자신이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수현을 좋아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러나 윤아는 사랑에 눈이 먼 미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수현에게 발정 났냐고 하던 자신의 모습은 정말 그녀가 봐도 끔찍했다. 전혀 그녀답지 않았고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을 순간이었다.마음이 진정되자 윤아는 바로 전에까지 그녀를 열 오르게 하던 복잡한 감정들이 차분해지며 점차 종적을 감추는 것을 느꼈다. 수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도 다시 맑고 잔잔하던 모습을 되찾았다.수현도 윤아의 변화를 단번에 눈치챘다. 그녀의 차분함과 막연함 모두 수현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그는 윤아의 이런 모습에 가슴이 갑갑해나며 갉아 먹히는듯한 고통을 느꼈다.한참 후, 수현이 자소 섞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나 이혼 절차도 끝내지 않고 다른 여자랑 놀아나는
수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윤아를 바라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감돌며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수현에게서 전해지는 압박감에 윤아는 그가 또 뭔갈 하려는 줄 알았으나 예상외로 수현은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윤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문밖에 서 있는 소영은 초조하게 두 손을 꼼지락대며 기다리고 있었다. 소영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조금 전 수현의 목소리에는 분명 짜증이 섞여 있었다. 마치 중요한 일이 그녀 때문에 끊긴것미냥.소영은 현재 몹시 초조했다. 자신이 왔다는 얘기를 듣고도 한참이 지났는데도 수현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그녀는 더욱 불안해졌다.도대체 방 안에서 뭘 하고 있었길래 한참이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단 말인가?그때,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소영의 앞에 문을 열고 나타난 수현.소영은 고개를 발딱 들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방금과 같은 옷에 외투도 벗지 않은 걸 보아 별일은 없었던 듯싶다. 비록 전보다 옷매무새가 많이 흐트러졌지만, 소영은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애써 자신을 이해시킨 후 그녀는 시선을 돌려 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그의 입가의 붉은 핏자국. 소영은 순간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핏자국이 옅어 자세히서 관찰하지 않으면 못 알아챌 정도였지만 소영의 눈을 피하진 못했다. 수현은 소영의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듯 무뚝뚝하게 물었다.“왜 왔어?”소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머쓱하게 입술을 깨물었다.“나... 나 입을만한 잠옷이 없어서 윤아 씨 옷 좀 빌리려고 했지.”윤아의 옷을 빌린다고?수현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올렸다.“도우미 아줌마가 준비해주지 않았나?”소영은 고개를 저었다. 수현은 소영의 말에 언짢은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그 낌새를 눈치챈 소영이 다급하게 말했다.“수현 씨. 화내지 마. 내가 오늘 너무 갑작스레 찾아왔으니 못 준비했을 만도 하지. 윤아 씨 옷 빌리면 돼. 그래도 될진 모르겠지만.”수현은 악에 받쳐 있던 방
커다란 드레스룸에 오직 소영과 윤아 둘만 있다.소영은 옷을 고르는 대신 윤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윤아도 소영의 시선을 느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걸 눈치채고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아니나 다를까 몇 초 후 결국 소영이 참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윤아 씨. 약속을 어겼죠.”윤아가 멈칫하더니 물었다.“제가 언제 약속을 어겼다고 그래요?”소영은 살기 어린 눈으로 그녀의 입술을 노려보며 말했다.“방에 들어가기 전엔 립스틱을 바른 상태였죠.”윤아는 그제야 소영의 말을 이해했다. 그녀는 왜 자신의 립스틱이 지워졌냐고 묻고 있었다. 소영도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숨기려 하지 않았다.“그니까 심윤아 씨는 약속을 어겼죠. 원래 이렇게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이에요?”“아니요.”윤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전 약속한 건 지켜요. 할머님을 위한 일이 아니면 전 절대 그에게 먼저 다가가지 않아요.”윤아의 그 말은 소영에게 꽤 큰 충격을 주었다. 소영은 서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윤아 씨 말은 수현 씨가 먼저 당신에게 들이댔다?”윤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장난 그만 해요. 수현 씨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요.”소영은 자신이 이렇게 돌아왔는데 수현이 어떻게 아직도 윤아를 놓지 못할 수 있겠냐 생각했다.소영의 말에 윤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소영 씨. 제가 뱉은 말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소영 씨가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만약 그랬다면 전 그저 할머님께 찾아가 전부 일러바치기만 하면 되니까요.”김선월 얘기에 소영의 낯빛이 어두워졌다.“할머님은 왜 갑자기 수술을 안 하신 거죠? 당신이 할머님께 뭐라 한 거 아니에요?”분명 멀쩡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수술을 안 한다고 한단 말인가. 소영은 윤아가 선월에게 뭔가를 슬쩍 알려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소영의 말에 윤아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말했다.“전 그 누구보다 할머님이 괜찮아지시길 바라는 사
수현의 말에 윤아는 그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무슨 상관인데?”“…”“고작 이삼 분이야. 그 새로 내가 괴롭히기라도 했을까 봐?”윤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그 말에 수현은 눈썹을 올리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그런 뜻이 아니고...”“그럼 무슨 뜻인데? 여자들끼리 얘기까지 너에게 보고해야 해?”수현은 지금 윤아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우호적이지 않다는 걸 느꼈다. 요즘 윤아는 과거 착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김선월의 앞에서 연기해야 하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수현을 완전히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고 있지 않은가.수현은 윤아의 그런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거 윤아와 수현이 이런 관계가 아니었을 땐 분명 꽤 잘 지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수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윤아는 곧장 옷을 들고 씻으러 가버렸다.윤아는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침대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물론 그 과정에 수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덕분에 수현은 잔뜩 그늘진 얼굴로 샤워를 하고 침대로 올라갔다.윤아와 수현은 비록 같은 침대 위에 있지만 가운데에 기다란 베개를 둬 선을 확실히 그었다. 둘은 마치 38선을 가운데 두고 동상이몽을 하는 듯했다.윤아는 전날 밤잠을 잘 자지 못한 탓에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마음 정리를 하고 나니 밤새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아침에 윤아가 눈을 떴을 때 옆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윤아는 어느새 여덟 시가 훌쩍 넘어버린 걸 확인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늦잠을 자버린 탓에 윤아는 부리나케 침대에서 내려와 간단히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윤아가 거실로 나왔을 땐 이미 그녀를 뺀 모든 사람이 식탁에 모여앉아 있었다.그때, 걸음을 옮기던 윤아는 선월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를 극진히 보살피고 있는 소영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강소영은 지금 그녀의 미래를 위해 선월에게 잘 보이려 하고 있다.윤아는 내키지 않았지만 어차피 곧 수현과 이혼하니 선월의 손자며느리도 더는 자신이
윤아가 우유를 마시려 하자 마침 도우미가 물고기 국을 가져왔다.“어르신. 오늘 아침은 이걸 드시죠.”여태까지 아침 메뉴로 주스나 우유 같은 음식들만 먹었었지 국이 나온 적은 없었다. 사실 윤아도 몸매관리를 꽤 신경 쓰고 있기에 요리사도 그녀를 위해 하는 모든 음식의 칼로리를 계산한 후에 메뉴를 선정했었다.그래서인지 물고기 국을 본 윤아는 살짝 어리둥절해 났다. 선월이 돌아왔다고 요리사가 메뉴를 조정한 듯 보였다. 이건 윤아가 요구한 일은 아니니 아마 선월이 요리사에게 부탁했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윤아가 어리둥절해서 하고 있는데 선월이 웃으며 말했다.“너 너무 말랐어.”윤아는 국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해요. 할머님.”가끔가다 한번은 괜찮을 거다. 살찌면 찌는 거지 뭐. 게다가 윤아는 지금 임신 중이라 확실히 전처럼 절제하며 먹는 것이 아닌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야 했다.아이 생각에 윤아는 숟가락을 들어 국을 한술 떴다. 그러나 윤아가 한 입 먹으려고 입에 가져다 댄 순간 속이 뒤집힐 듯 울렁거렸다.윤아는 순간 낯빛이 어두워지며 다른 반응을 보일 겨를도 없이 숟가락을 내던지고 입을 막으며 뛰쳐나갔다.윤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라서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렸다. 수현만이 가장 빨리 반응을 보이며 눈살을 찌푸린 채 일어나 뒤쫓았다.곧이어 반응이 온 사람은 선월이였다.“왜 이래? 괜찮니?”선월이 걱정스레 물었다.그제야 다른 사용인들도 정신을 차리고 얼른 뒤따라갔다. 몇몇은 마음이 급한 탓에 아예 선월이 앉아있는 휠체어를 밀고 윤아에게로 데려갔다.소영만이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있었다.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트린 바람에 국물이 옷에 튀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듯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앉아있었다. 머릿속엔 오직 한가지 생각만이 가득하였다.‘지금 입덧 한 거야? 임신 때문에?’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왜 국을 입에 가져다 대기만 했는데 헛구역질을 하겠는가. 진씨
예상치 못한 윤아의 몸 상태에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윤아는 힘없이 수현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머리가 윙윙 울리는 느낌이었다.그때, 그들을 뒤따라가던 소영이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수현 씨. 병원은 너무 멀잖아. 이 근처에 내 친구가 하는 진료소가 있어. 거기로 가지 않을래? 윤아 씨 아무래도 음식을 잘못 먹은 것 같아.”소영은 겉으로는 침착하게 조언을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지금 수현이 윤아를 데리고 병원에 간다면 임신 사실이 드러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꼭 진료를 받으러 가야겠다면 기왕이면 친구가 하는 곳으로 가는 게 소영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소영은 불현듯 일전에 윤아가 열이 펄펄 나면서도 절대 병원에 가지 않으려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윤아가 자기 때문에 일부러 수현의 앞에서 불쌍한 척 관심을 끈다고 생각했다. 그 일로 심기가 불편했던 소영은 윤아가 참으로 천박하다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야 윤아가 왜 죽어도 병원과 약 먹기를 거부했던 건지 알 것 같았다.“진료소?”수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소영의 제안을 거절했다.“그래도 병원이 더 정규적이고 좋지.”일부러 소영의 의견에 반대하려는 것은 아니다. 수현은 윤아가 그 정도로 구역질을 하는 걸 보아 아마 몸이 한계에 도달했을 거라 여겨져 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받아보게 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수현의 말에 소영은 표정을 구기더니 그의 뒤에 멍하니 서 있었다.‘지금 내가 소개하는 곳이 정규적이지 못해서 싫다 이건가?’하지만 수현의 신경은 온통 윤아에게 가 있어 소영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그때, 수현의 품에서 윤아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멈춰.”그녀의 말에 수현이 발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내려 윤아를 바라봤다.윤아는 이제 좀 괜찮아진 듯 수현의 손을 가볍게 두드리며 내려달라 했다.하지만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수현에 윤아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입을 뗐다.“내려줘.”수현은 잠시 말없이
이 말을 들은 소영은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을 이었다.“수현 씨가 디저트 싫어하는 거랑 비슷하잖아.”아무리 싫어해도 이렇게 구역질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수현은 품에 안겨있는 윤아는 한눈 보더니 왜인지 모르게 윤아가 자신에게 뭔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문득 집사가 저번에 말했던 그 찢어진 진단서가 떠오르자, 수현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그가 더 깊이 생각하기 전, 품에 있던 윤아는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이거 내려줘.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야?”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정말 병원에 안 갈 거야?”그 말에 깊게 숨을 들이쉰 윤아.“아픈 데가 없는데 왜 가겠어. 그냥 저 물고기국 먹기 싫어서 그런 거야.”윤아의 안색은 많이 나아졌다. 입술도 다시 선홍빛이 돌았고 창백하던 얼굴도 이젠 핏기를 회복했다. 그래서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그제야 수현은 윤아를 내려놓았다.발이 땅에 닿기 바쁘게 소영은 다가가 윤아를 부축하며 걱정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아까 속이 울렁거렸으니 조금 있다가 이 국 대신 담백한 거로 먹어요. 얼마 전에 열까지 났으니, 속이 많이 안 좋을 거예요. 그러니까 앞으론 기름진 음식은 줄여봐요.”윤아를 걱정하는 것 같지만 실은 소영이 하는 한마디마다 모두 그녀의 임신 사실을 숨겨주고 있었다.이런 소영을 보며 윤아는 잠시 의아해했지만, 곧 그 이유를 알아챘다.두 사람 사이에 한 약속이 있으니 윤아 자신뿐만 아니라 소영도 그걸 지키려는 거라고 생각했다.“네.”“내가 부축해 줄게요. 만약 나중에라도 몸이 안 좋으면 내가 함께 병원 가줄게요. 검사라도 받아 보게.”“그래요.”이 대화를 마친 후, 소영은 윤아를 부축한 채 돌아갔다.수현은 제자리에 서서 나란히 붙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자 마음속의 의혹은 더 깊어만 갔다.저 둘, 사이가 언제 이렇게 좋아졌지?-수현이 윤아를 안고 급히 밖으로 나갈 때 선월도 원해 따라가려고 했었다. “어르신, 진정하세요. 대표님께서 계시니
“네, 할머님.”선월이 의심하지 않게 하려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말을 보탰다.“전 어릴 때부터 물고기를 안 좋아했어요. 처음엔 되게 맛있는 건 줄 알고 한번 먹었다가 얼마나 토했다고요. 그래서 지금은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 나요. 트라우마 남았나 봐요.”역시, 이 말을 들으니 의심 가득 담긴 선월의 표정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어릴 때 먹고 토했다고? 그렇다면 커서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겠지.’이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선월은 아직도 조금 걱정되었다.“정말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지? 그러지 말고 병원 가서 검사 한번 받아 봐.”“아니에요, 할머님. 저 이젠 정말 괜찮아요. 저 보세요. 지금도 아파 보여요?”선월은 윤아를 훑어보았는데 안색이 확실히 아까보다 나아졌다. 아무 문제 없는 것 같다고 여긴 선월은 손을 뻗어 윤아의 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요 앙큼한 것, 물고기를 못 먹는다고 왜 말 안 했어?”“움.”윤아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애교를 부렸다.“할머님께서 좋아하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어릴 때 토했다고 커서까지 그러겠어 하는 마음에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했는데... 하핫, 잘 안되네요. 죄송해요, 할머님. 다음엔 못 먹는 게 있으면 미리 말할게요. 절대 오늘처럼 할머님 놀라게 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 그래. 알겠다. 어휴, 응석이나 부리고. 배고프지? 빨리 뭐라도 먹어야겠구나.”“네, 전 단맛 나는 죽 먹고 싶어요.”“도우미보고 만들라고 할게.”“좋아요.”이 말을 마치고 윤아는 몸을 일으켜 선월의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서있던 소영이 나긋나긋하게 말을 걸어왔다.“윤아 씨, 내가 할게요. 아까 그렇게 토하느라 힘도 다 빠졌잖아요.”윤아는 소영을 한눈 보고는 그녀가 선월의 앞에서 점수 따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결국 거절하지 않았다.소영이 선월의 휠체어를 밀고 멀리 걸어갔다. 윤아도 그들의 뒤를 따라 가려 할 때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릴 때 물고기 먹다가 토한 적 있어?”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