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복도로 나왔다.조용한 복도에서,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진수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심윤아가 고개를 들어 먼저 물었다.“무슨 말 하려고.”고개를 드니 진수현의 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칠흑 같은 눈동자는 속내를 알 수 없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 눈빛에 심윤아는 숨이 막혔다. 그의 눈을 마주하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 심윤아는 눈을 피하며 조용히 말했다.“계속 말 안 하는 거 보니 아직 마음의 결정이 안 된 것 같네. 나 먼저 훈이 놀아주러 갈 테니까 마음 정리 잘하고 다시...”“그 사람 보고 싶어?”그가 갑자기 심윤아의 말을 끊고 물었다.심윤아가 멈칫하며 귀를 의심했다.진수현이 자신에게 그 사람이 보고 싶냐 묻는다.그녀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잔뜩 침울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혹시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응. 맞아.”진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 사람이 맞다고 확인사살한 것이었다.심윤아도 그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진수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줄 몰랐기 때문에 심장이 매우 빠르게 뛰었다.대략 다른 추측이 있었지만 심윤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진수현이 뒷말을 이어서 할 것 같았다.“만나고 싶으면 오늘 저녁에 바로 돌아가자. 내가 만나게 해줄게.”진수현의 말에 따뜻함이라곤 내비치지 않았다.심윤아가 입술을 오므리고 고개를 떨구었다.“아냐. 됐어.”그 의외의 대답은 진수현의 잃었던 생기를 순식간에 되찾게 했다.“뭐라고?”이 집에 있는 동안 늘 표정이 우울했고 진수현의 전화벨이 울리기만 하면 관심을 가졌다. 누가 봐도 그 사람의 안위를 매우 걱정하는 모습이었다.그런데 안 만나겠다고?진수현은 심윤아가 바로 승낙하고 빨리 만나고 싶어 할 줄 알았다.그는 심지어 이미 심리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심윤아가 승낙한다 해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기도 했다.그녀가 이선우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하는 이유도 그거 전에 심윤
어쩌면 이선우에겐 잔인한 일일지도 모른다.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심윤아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일지도.두 사람의 뜻을 모두 이루어줄 수는 없다. 그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그동안 심윤아는 많이 힘들었다.이대로 세상을 떠나면 이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하지만 이제 깨달았다. 그녀는 살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지키고 싶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모두에게 운명이라는 것이 있으므로 마구 관여할 수도 없는 일이다.“걱정하지 마. 이미 너랑 만나기로 했으니 그 사람 보러 가는 일은 없을 거야.”심윤아가 다가와 가볍게 진수현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내 감정이 우울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만 당분간은 감정조절이 조금 어려워. 그러니까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나한테 시간을 좀 줘.”진수현이 고개를 숙였다. 눈에 심윤아의 가냘픈 손이 보여 마음이 약해졌다.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를 자제하는 듯하다가 끝내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심윤아를 품에 안았다.“신경 안 써. 괜찮아.”심윤아가 그의 곁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는 하늘에 감사할 것이다.게다가 이제 심윤아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밝히고 싶어 한다. 이것만으로도 진수현은 기쁜 나머지 마음이 넓어졌다. 지금 다시 그를 만나러 가겠다고 해도 그는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진수현은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괜찮아. 그 사람 보러 가도 돼.”품에 안긴 심윤아가 깜짝 놀랐다.“뭐?”“네가 하고 싶은 일 한다고 내가 기분 나빠하진 않아. 어쨌든 내가 둘을 위해 마련하는 자리니까.”심윤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대답 안 하면 내 말대로 하는 거로 한다?”품에 안긴 심윤아가 꼼지락거리더니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진수현을 올려다보았다.“정말 만나도 기분 안 나쁘겠어? 내가 돌아온 다음 만일...”전
“돌아간다고요? 여기서 안 사는 거예요?”“응. 다음에 또 올 거야. 훈이 여기가 좋아?”“네. 좋아요.”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증외할머니랑 증외할아버지께서 우리한테 다 잘해주셔요.”그 말에 심윤아가 참지 못하고 웃었다.“그럼 다음에 또 오자.”“좋아요.”흔쾌히 대답한 훈이가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물었다.“그럼 다음에 올 때 엄마도 같이 와요?”“당연하지. 엄마가 너희들 데리고 와야지. 근데 겨울방학 때 여기서 오래 살 생각이면 같이 못 있을 수도 있어.”말을 마친 심윤아는 핸드폰을 꺼내 훈이가 완성한 레고 사진을 찍었다. 인스타에 올리려다 보니 자신의 계정이 없는 것을 발견했다.이것은 심윤아가 구조된 이후 진수현이 그녀에게 준 핸드폰이었다.새로운 계정이었다. 전의 핸드폰과 계정은 모두 이선우에게 있을 것이다.심윤아는 결국 게시물을 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사진만 저장했다. 나중에 진수현더러 핸드폰을 가져다 달라고 할 요량이었다.이때 진수현이 다가왔다.“잠옷은 샀고 곧 가지고 올 거야. 다들 지금 돌아오는 길이래.”심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다음에 올 때 입어야겠네.”“응.”...아이들이 저녁에 곧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명인은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녀는 사실을 확인한 후 슬프게 대답했다.“이렇게 빨리 간다고? 난 그래도 4, 5일은 더 있을 줄 알았는데.”하지만 심윤아도 어쩔 수 없었다. 무엇이나 계획대로 흘러가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이명인은 아쉬웠지만 더 이상 아쉬운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나중에 다시 놀러 오라며 나중을 기약할 뿐이었다.이에 심윤아는 그러겠노라 싹싹하게 대답했다.이명인은 말없이 남편에게 반찬들을 모두 싸서 가져가도록 했다.심윤아에게 건네주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다 외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거라 다른 집보다 맛이 못할 수도 있고 오래 두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유일한 장점은 농약 같은 화학약품을 쓰지 않았으니 건강에는 좋을게야.”“에이, 할머님. 그렇게 말씀하지
“어머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서운하죠. 우리 다 같이 한 가족인데 갈라놓는다니요!”이선희가 고마운 마음에 심윤아를 꼭 안았다.“네 말이 맞다. 우리 모두 한집안 식구이니 신경 써서 잘 대해주려 노력할 필요 없다. 그냥 다른 차를 타고 몇 시간 따로 갈 뿐인데 걱정하지 말렴. 그럼 돌아가고 밤에 보상으로 내가 두 아이들과 자게 해주려무나.”어머님께서 이리 말하니 심윤아도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결국 이선희가 혼자 따로 차를 타게 되었으므로 넘쳐난 물건들은 그녀의 차에 옮기게 되었다.돌아가는 길에 심윤아는 진수현이 자신과 이선우의 약속 자리를 만들 것이 떠올라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그러나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두 아이가 차에 타고 있었으므로 지금 물어보기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 애써 삼켜야 했다.돌아갈 때는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을 때였다. 지난번 왔던 험한 길을 지날 때, 심윤아의 눈에 일꾼들이 보였는데 그들은 마치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자세히 살펴본 후에야 심윤아는 그 사람들이 길을 닦으러 왔을 것이라 추측하게 되었다.지난번 이 길을 지날 때 진수현이 길을 보수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었는데, 며칠 만에 일꾼들이 일을 시작하는 것을 보니 그의 일 처리 속도가 정말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그저 지나가며 슬쩍 던진 말이라 생각했었다.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사람을 불러 처리하게 했을 줄이야.“다음에 오면 길이 평탄해져 있을 거야."진수현이 불쑥 말을 건넸다.길 하나를 닦는데에 걸리는 시간이 얼마이려나.심윤아는 잘 알지 못했지만, 인력이 많고 충분한 노동력을 살 돈만 있다면 틀림없이 속도가 빠를 것이다....밤이 되어서야 그들은 집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며 심윤아는 눈에 익은 건물을 쳐다보았다. 떠난 지 이틀 만에 돌아왔다.차에서 내린 이선희는 얼른 두 아이에게 달려갔다.“자, 오늘 밤 아이들은 나와 잘 거야. 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데리고 올라가서 물건이나 정리해야겠다.”
하여 윤이는 어머니가 떠난다는 소식에 잠시 당황했다. 또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자기 딸이기도 하고, 잠재의식과 아이에 대한 모성애는 여전했으므로 자신의 딸이 이렇게 긴장하며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것을 보면 아이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심윤아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져 허리를 굽혀 윤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며칠만 있고 돌아올 거야.”하지만 윤이는 쉽게 속아주지 않았다.“지난번에도 할머니가 며칠 후면 돌아온다고 했는데 계속 안 왔잖아요. 이번엔 얼마나 있다 올 거예요? 하루? 이틀?”윤이가 아예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심윤아가 침묵을 지켰다.윤이는 지난번에 자신이 속았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어머니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정확한 날짜를 알려주어야 안심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그녀 역시 정확한 날짜를 말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은 결국 진수현이 계획한 일이니까.하여 심윤아는 진수현을 보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수현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심윤아를 의식하고 아이를 향해 걸어가 허리를 굽혔다.그도 손을 윤이의 머리 위에 얹었다.“빠르면 3일, 늦어도 5일. 어때?”윤이가 눈을 크게 뜨고 순진하게 물었다.“그러니까 5일 안에는 꼭 돌아온단 말이죠?”“맞아.”그러나 윤이는 이대로 쉽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정말이죠? 나 속이려는 거 아니죠?”진수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검지 손가락으로 아이의 코를 콕 찔렀다.“거짓말 안 해. 거짓말이면 아빠가 집 돌아와서 비행기 태워줄게.”그의 말에 곁에 서 있던 심윤아가 의아한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떴고 뒤에 서 있던 진수현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아마 자기 아들이 손녀를 위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딸에게 비행기를 태워준다고?이선희는 남편과 이렇게 오래 살아오면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그럴 만도 했다. 그들에겐 아
진수현의 말투에 웃음이 가득하다. 심윤아는 그가 놀리는 것을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변명을 늘어놓았다.“안 급하다니까.”진수현이 계속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응. 알았어. 안 급해 했어.”심윤아가 대답하지 않았다.정말이지 매를 부르는 반응이었다.심윤아가 보복성으로 힘껏 그의 허릿살을 콕 찔렀다. 물론 상처는 피해서.“윽...”아프진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진수현의 안색이 돌변하며 손을 뻗어 심윤아의 가냘픈 손목을 움켜쥐었다. 갑자기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지 마.”깜짝 놀란 심윤아는 자신이 너무 세게 찔러 아픈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표정이나 몸짓이 아픈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기분이 좋아 보였다? “...”심윤아는 할 말을 잃었다.그냥 허리를 콕 찔렀을 뿐인데 이렇게까지?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진수현이 입을 열었다.“더 건드리면 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 없어.”몇 초 동안 멍하니 있던 심윤아가 손을 떼고 나지막이 욕설을 퍼부었다.“변태.”그녀의 귀가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보며 진수현은 입꼬리가 올라갔다.“우리가 부부란걸 잊지 마. 내가 아무리 변태 같은 짓을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거지.”“...”“단지 너의 몸이 약해서 내가 참고 기다려주는 거지.”진수현이 손에 힘을 주어 심윤아를 품에 안고는 귀에 대고 소곤소곤 속삭인 것이었다.심윤아는 자기 귀가 더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급히 밀쳐내려 했지만 밀쳐지지도 않았다.“몸에 상처나 낫고 말해.”진수현이 문득 무언가 깨달은 듯 얼굴이 환해졌다.“아, 그럼 아직 상처가 있어서 안 되는 거고. 나으면 괜찮다는 말이야?”심윤아가 어처구니없어하며 대꾸했다.“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어? 아까 그 말이랑 이 말이랑 같은 거 같은데?”“내 말은 상처나 낫고 다른 걸 생각하라는 거고...”설명하면 할수록 말이 이상해지는 것 같자 심윤아는 말을 멈추고 아예 돌아섰다.“
심윤아는 여전히 진수현의 약을 바꾸어주는 임무를 잊지 않았다. 낮에 하루 종일 길을 재촉하느라 몸이 매우 지친 상태였다. 약을 바꾼 후, 진수현은 일 때문에 복도에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10분 정도 지나 방으로 돌아오니 심윤아는 침대 옆에 엎드려 잠에 들어 있었다.호텔 내부의 불빛이 심윤아의 하얀 뺨을 부드럽게 비추었다.이를 본 진수현이 침대에 눕히기 위해 심윤아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안아 들려던 순간, 자신을 꾸짖던 심윤아의 모습이 생각났다.자신의 상처를 힘들게 붕대로 싸매주고, 상처가 벌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는 그녀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몸을 아껴 걱정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진수현은 그녀를 안아 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신발을 벗긴 다음 반쯤 부축하여 침대 위에 올린 뒤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잘 자. 윤아야.”...심윤아의 세심한 치료와 신신당부 덕분에 진수현은 최근 회복 속도가 매우 빨랐다.전엔 자고 일어나면 상처가 아팠지만 오늘 깨어보니 통증이 전보다 많이 사라진 듯 했다.옷깃을 젖히고 상처 부위를 살펴보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왔다. 매일 그렇게 안정을 취하라고 고집하더라니, 효과가 이렇게 좋을 줄이야.생각하던 중, 심윤아가 몸을 뒤척이다 그를 마주 향해 누웠다. 진수현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있을 때, 심윤아가 잠에서 깨 눈을 살짝 떴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잠에 취해있던 심윤아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 괜찮아?”깨어나자마자 자신의 상처를 걱정하는 것을 보니 진수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응. 많이 좋아졌어. 다 네 덕분이야.”좋아졌다는 말에도 심윤아는 불신했다. 심윤아는 그가 자신을 속이는 것 같아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옷을 젖히며 검사하기 시작했다.진수현이 깜짝 놀라 멈칫하더니 입술을 말아 물며 대답했다.“거즈로 싸서 볼 수 없을 텐데.”보이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옷을 헤집고 두 번 들여다본 심윤아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보이지도 않으면서 좋아졌다는 건 어떻게 알아?”진수
의사의 말을 들은 후, 심윤아는 출발 전 진수현에게 약을 다시 발라주었다.뜯을 때 상처를 자세히 관찰했더니 확실히 좋아진 것이 보였다.이 결과에 심윤아는 매우 만족했다.진수현이 관찰하고 만족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썹을 으쓱했다.“봐. 거짓말 아니지?”그 말에 심윤아가 그를 슬쩍 흘겨보았다.“응.”“그래도 조심해야 해. 방심은 절대 금물. 약도 잘 발라야 하고 잘 치료해야 해. 나중에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어떡하려고.”심윤아가 거즈를 조심스레 감아주었다.“됐어.”“알겠어. 조심할게.”상처에 약을 다 바른 뒤, 둘은 이어서 길을 떠났다.아직 시간이 일렀으므로 안개가 자욱했다. 차에 탄 뒤 진수현은 작은 담요를 꺼내 심윤아의 몸을 덮어주었다.“이따 몇 시간 정도 걸어야 해. 어젯밤 충분히 못 잤을 테니 자둬. 도착하면 깨울게.”일찍 일어난 탓에 피곤했던 심윤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잠에 들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차는 이미 멈추어 있었다.심윤아는 창밖의 경치를 한 번, 옆에 앉아 있는 진수현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곤 마침 그와 눈이 마주쳤다.“도착했어?”“응.”그가 낮게 대답하고는 물었다.“잘 잤어? 더 안 자도 돼?”그의 말을 듣고서야 심윤아는 차에 운전기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 했다.“이렇게 오래 잔 거야? 왜 안 깨웠어?”심윤아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이미 점심이 되었다. 그들이 출발한 시간으로 계산하면 차가 멈춘 뒤 윤아는 아마 차에서 한 시간을 더 잤을 것이다.“...”심윤아는 황당했다.“네가 너무 잘 자길래 차마 깨울 수 없었지.”진수현의 말에 심윤아도 더 뭐라 하기가 거북했다.“그럼 계속 차에서 같이 있어 준 거야?”“그렇지 뭐. 내가 또 어딜 가겠어.”진수현이 자신의 상처를 가리켰다.“게다가 나 몸에 상처 있잖아. 네가 나 안정 취하라며.”하긴, 맞는 말이지.심윤아는 더 이상 아무 말하지 못하고 눈을 비비곤 뺨을 두드렸다. 이제야 비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