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순간 당황하다가 작은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방금 실수로 입술을 깨물었어.”하지만 물린 것은 강지한의 입술이었다.“자, 닦아.” 신하린은 휴지를 건넸다.박유진의 깊고 검은 눈동자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심미연은 티슈를 받아 입을 닦으며 화장실 밖에서 강지한의 무례한 행동을 떠올리고는 짜증이 밀려왔다.강지한은 대체 그녀를 뭐로 보고 틈만 나면 강제로 입을 맞추는 걸까.그녀가 남들에게 욕먹는 건 신경도 안 쓴다.온지유였다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면서!“참 미연아, 박유진 씨가 나한테 큰 프로젝트를 소개해 줬는데 시간 있으면 와서 도와줘. 나 혼자서는 힘들 것 같아.”신하린이 밝은 어투로 말하자 심미연은 휴지를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고를 끄덕였다.“좋아, 마침 나도 요즘 한가해.”온지유가 리우로 오면 분명 그녀의 사건을 빼앗을 것이기에 앞으로 담당할 사건이 줄어들 게 뻔했다.“왜, 리우 망한대? 네가 한가할 리가 없잖아.”신하린은 리우에서 심미연이 얼마나 바쁘게 보내는지 잘 알고 있었다.이혼한 부부가 왜 그렇게 많은지.“아니, 리우는 지금 강지한이 인수하고 온지유가 낙하산으로 내 상사가 됐어.”심미연이 웃었다.“그동안 소송으로 바쁘게 살다 보니 너무 피곤했는데 이제 좀 여유가 생기겠어.”몇 년 동안 이혼 사건을 맡으면서 이혼하면서 서로 얼굴을 붉히는 부부들을 너무 많이 봐왔다.그래서 자신은 강지한과 이혼을 하더라도 보기 좋게 헤어지고 싶었다.밑바닥까지 드러내는 건 너무 추하니까.“강지한 개자식이 망할 년한테 홀려서 앞뒤 구분도 못하네. 진짜 열 받아!”신하린은 씩씩거리며 달려가서 강지한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괜찮아, 휴가라고 생각하지 뭐.”심미연이 웃었다.“마침 너 일 도와주면서 돈 벌 수 있잖아. 소송보다 훨씬 쉽지.”“너는 재능이 있는데도 왜 숨겨? 네가 회사 차렸으면 내건 진작 문 닫았겠다.”신하린은 한숨을 내쉬었다.“그 개 같은 강지한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어.”“
그래서 박유진은 가족 몰래 심미연을 가르칠 전문 선생님을 모셔 왔다.피아노, 체스, 서예, 그림, 글쓰기, 격투기까지 다 해냈고 그의 눈에 그녀는 항상 반짝반짝 빛났다.그해에 강지한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쯤 그의 아내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안타까운 일이다.신하린은 어렸을 때 심미연이 겪은 일을 알고 있었기에 심미연이 박유진에게 고마워해도 별로 놀랍지 않았다.때로는 심미연이 박유진을 만난 덕분에 성장하는 과정에서 사랑과 우정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자신도 다행히 심미연을 만났기에 살 수 있었다.“재능은 무슨. 오빠가 돈을 쓰니까 오빠 성의도 있고 돈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배운 거야.”과거를 떠올려보면 심미연이 행복하다고 느낀 유일한 순간은 박유진과 함께 있을 때였다.그해 강지한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박유진의 아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박유진의 아내였으면 무척 행복하게 살았겠지.하지만 이건 현실이었고, 만일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자, 과거 얘기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신하린은 심미연의 눈이 빨개지는 것을 보고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박유진은 그릇을 들고 국을 한 그릇 떠서 심미연에게 건넸다.“먹어봐.”“고마워, 오빠.”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넨 심미연은 박유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둘은 이미 엇갈렸고 다시는 접점이 생겨선 안 된다.강지한은 박유진을 향해 미소 짓는 심미연과 박유진의 부드러운 눈빛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유난히 짜증이 났다.아직 이혼도 안 한 여자가 다른 남자를 꼬시고 있었다.온지유는 찢어진 그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는 심미연을 찢어버리고 싶었다.조금 전 강지한이 화장실에 갔을 때 심미연도 화장실에 간 것을 보았다.분명 심미연이 강지한의 입술을 깨문 거다.‘감히 화장실에서 강지한을 꼬시다니, 빌어먹을 것!’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하며 식사를 마쳤다.식사 후 심미연이 쇼핑을 가자며 신하린
심미연의 작은 얼굴이 붉어졌고 신하린은 고개를 기울여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입술에 묻은 피가 저 남자 깨물어서 생긴 거구나.”어쩐지 물어봤을 때 심미연의 얼굴이 붉어지더라니.온지유는 너무 화가 나서 이를 꽉 깨물었다.전에는 두 사람이 화장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짐작만 하고 괜한 생각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는데 강지한의 말을 직접 들으니 질투가 나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심미연 망할 년! 감히 화장실에 강지한을 꼬드겨? 뻔뻔한 것!’강지한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입가를 누른 채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심미연을 바라봤다.“왜, 책임지기 싫어?”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신하린에게 말했다.“먼저 작업실로 가서 협업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줘. 다 보고 통화로 얘기할게.”“근데 너...”신하린은 심미연이 강지한과 단둘이 있는 것이 불안했다.“괜찮아, 보배둥이가 옆에 있으니까 나한테 무슨 짓 못 해.”심미연은 무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낮추며 신하린에게 말했다.“알았어, 그럼 조심해!” 신하린은 낮게 당부하며 자리를 떠났다.심미연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심미연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신하린이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벤틀리 쪽으로 걸어갔다.성무진은 차 문을 열고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가 다가오자 정중하게 손짓하며 말했다.“타세요, 사모님.”심미연이 그를 향해 담담하게 웃었다.“고마워요.”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차에 타자 성무진은 차 문을 닫았다.심미연은 창가 자리에 앉아 중간에 앉은 온지유를 조용히 바라봤다.온지유는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이 년이 진짜 타?’온지유의 매서운 눈빛을 받은 심미연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형님께서 여기 계시니까 상처를 치료할 방법이 없네.”남자의 입가에 난 상처는 조금만 지나면 아물 테지만 온지유를 불쾌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너!”온지유는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빌어먹을
언제는 차에 타라고 하더니 이제는 내리란다. 미친놈!강지한은 입술을 다물고 허리를 굽혀 그녀를 품에 안더니 옆에 있던 성무진에게 말했다.“지유 데려다줘.”심미연은 남자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온지유가 바람이 많이 불어 춥다고 하니 그녀를 내리게 하고 성무진에게 온지유를 데려다주라는 거다.배려하는 모습에 칭찬을 해줘야 할까?성무진은 심미연의 핏기 없는 얼굴을 슬쩍 보고 머뭇거렸다.강지한은 이렇게 하면 아내가 슬퍼할 거란 걸 모르는 걸까.그는 강지한이 점점 더 파국을 초래하는 것 같았다.“지한 씨, 나랑 같이 안 가요?”온지유는 남자가 품에 안고 있는 심미연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질투에 미쳐 날뛰었다.혼자 차를 타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강지한과 함께 추위에 떠는 게 나았다.심미연은 온지유의 말을 듣고 그녀의 살기 어린 눈빛을 마주하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허, 질투에 화까지 내네?’생각 끝에 그녀는 남자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싸며 나지막이 불렀다.“여보...”‘연기? 누군 못해서 안 하는 줄 아나.’온지유는 화가 나서 쓰러질 지경이었다.‘심미연 이 빌어먹을!’여자의 나긋하면서도 유혹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넋이 나간 강지한은 순식간에 머리에 적나라한 화면들이 떠올랐다.여자가 가느다란 다리로 그의 허리를 옭아맨 채 나지막이 ‘여보’라고 불렀다.그때마다 그는 그녀 위에서 죽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강지한은 몸이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성무진이 여전히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안 가고 뭐 해!”목소리가 눈에 띄게 잠겨 있었다.성무진은 놀라서 황급히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어쩐지 강지한이 매일 밤 잠은 꼭 집에 가서 자더라니, 저런 이유가 있었다.저렇게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다면 그였어도 매일 잠은 꼭 집에서 잤을 거다.온지유는 너무 화가 나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고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심미연을 영원히 사라지게 해야지!’그러면 심미연에게 강지한을 빼앗길 걱정을 하지
심미연은 박유진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말해도 강지한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할 말이 없었다.“전에는 내가 이혼하려고 일부러 당신과 온지유 동영상을 휴대폰으로 찍었다고 하더니, 이제는 내가 다음 남자를 찾는 데 급급하다고 하네. 강지한, 그렇게 한가해?”생각이 단순하다고 욕하고 싶었지만 아직 이 남자를 화나게 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심미연, 내가 원하지 않는 한 네가 나와 이혼하고 싶어도 소용없어! 내겐 이노하이브 법률팀 전체가 있는데 너 혼자 소송에서 어떻게 날 이겨? 결국 고생하는 건 너야.” 강지한은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비웃었고 그의 눈은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 여자가 그의 법률팀을 우습게 보고 있으니 자신과 싸우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심미연은 남자의 고고한 눈매를 바라보며 가슴속에서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강지한, 당신과 온지유는 아이까지 있으면서 왜 이혼을 안 해, 왜 날 안 놔주는 건데? 대체 날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만들 생각이야?”최대한 침착하려 했다. 남자가 아무리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여도 다른 여자들처럼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강지한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아무리 미쳐 날뛰어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았다.그의 눈엔 한낱 웃음거리일 뿐이겠지.생각하니 서글펐다.9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인데 왜 이렇게 됐을까.“왜겠어?”강지한의 눈동자에 싸늘한 서리가 내려앉았다.“3년 전 나를 속여 결혼을 강요했으면 남은 인생 시달릴 각오를 했어야지. 이제 겨우 3년이 지났는데 벌써 보내주면 너만 좋은 일이 되잖아.”홧김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3년 전 심미연에게 당했던 게 강지한의 마음속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벽이었다.심미연은 평생 자신을 괴롭히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가슴이 저도 모르게 저릿했지만 굳이 3년 전 일을 그에게 다시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여러 번 설명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어차피 중요하지도 않으니 원하는 대로 생각하라지.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두 사람을 위해서?” 강지한의 얼굴에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빨리 이혼해서 박유진과 함께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 그래!”조금 전 식당에서 달려들어 박유진을 때리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히 봐줬다.“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얘기 다 끝났어? 그러면 택시 타고 로펌으로 가.”차를 몰고 왔지만 강지한이 전에 그녀의 차가 편하지 않다고 싫어한 이후로 다시는 차에 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강지한이 인상을 찌푸렸다.“택시는 많은 사람들이 타서 더럽잖아. 안 타!”심미연은 어이가 없었다. 참 모시기 힘든 남자다.‘됐다, 그냥 기다리지 뭐.’그 순간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오자 강지한은 심미연을 차로 끌고 갔다.“집으로 가!”심미연의 심장이 철렁했다.대낮에 집으로 돌아간다니, 또 그런 짓을 하려고?아까 화장실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걸 이어가려는 거다.강지한과 3년 동안 부부로 지내오면서 그가 밤일에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았다.처음 결혼했을 때는 매일 밤부터 새벽까지 지칠 줄 모르고 달리다가 나중엔 서서히 줄어들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누울 때면 그는 매번 원했다.과거에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임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원한다면 기꺼이 응했지만 이제 그녀는 임신과 함께 이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하지만...강지한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외할머니 약은 어떡하나.“지한 씨, 나 로펌에 출근해야 해. 오후에 할 일이 많아서 지체할 여유가 없어!” 그녀가 서둘러 말하자 강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심미연, 나 화난 거 안 보여? 온지유라면 벌써 눈치챘어.”온지유는 눈치챌 뿐만 아니라 그를 달래줬을 거다.“안 보여, 나 눈이 멀었어.”심미연은 사랑하고 달래주는 사람이 있다고 과시하는 남자에게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비열해!’강지한은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계속 고집부려봐. 이따가 울면서 빌게 될 거니까.”그와 심미연 사이의 갈등은 대부분 침대에서 해결됐다.그게 이젠 두 사람의 암
심미연은 깜짝 놀랐다.강지한은 대체 뭐 하려는 걸까.운전기사는 눈치껏 차를 세우고 곧바로 내렸다.‘도련님께서 밖에서 즐기려고 하시네, 그런 취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차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던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을 품에 안으며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운전기사도 없으니까 해도 되지?”심미연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방금 많이 먹어서 운동을 못 해! 안 그러면 차에 토해서 더러워질 거야!”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핑계를 대자 강지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심미연, 아직 이혼한 것도 아닌데 벌써 박유진을 위해 몸을 사리는 거야? 왜, 할머니 약 받기 싫어? 친구 작업실도 버리는 거야? 아, 사랑하는 박유진이 새로 차린 로펌도 문 닫게 해줄까?”속에서 분노가 이글거리던 강지한은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고 심미연은 순간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만 느껴졌다.강지한은 그녀 주위 사람들로 협박하고 있었다.“심미연, 분명히 말하는데 난 이혼 안 해! 네가 밖에서 다른 남자와 바람피우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거야. 안 그럼 내가 방금 한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게 되겠지.”그렇게 말하며 강지한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 키스하려는데 심미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격렬하게 손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때렸다.“강지한, 이건 너무하잖아!”지난 3년 동안 그의 수발을 들어준 걸로도 모자라서 이런 식으로 그녀를 대하는 걸까.강지한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이혼하기 싫다니까 이젠 폭력을 행사해? 사모님, 변호사라서 잘 알 텐데. 그러다 내가 널 고소할 수가 있어!”“강지한, 우리 둘 사이 일에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지 마. 그 사람들이 뭘 잘못했다고 그래?”심미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어깨를 살짝 떠는 모습이 무척 불쌍해 보였다.온지유였다면 강지한은 절대 그녀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이게 애정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그 사람들은 잘못이 없지. 잘못은 네가 했지.
심미연은 이제 수치심 따위 뒤로 한 채 강지한의 화를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강지한의 화가 풀리면 그녀 주변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고 수십억도 이대로 사라지길 바랐다.품에 안긴 여자의 부드러운 몸, 귓가에 들리는 여자의 홀리는 듯한 목소리, 코를 가득 채우는 특유의 향기에 강지한의 몸이 달아오르며 큰 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움켜쥐었다.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가장 친밀한 행동을 하면서 입으로는 잔인한 말을 뱉었다.“사모님 몸 파는 건가? 한 번에 얼마를 받을 생각이지? 얼마나 해야 심씨 가문에서 수십억을 갚을까?”심미연은 모든 장기가 뒤틀린 것 같고 통증이 극심해 견디기 힘들었다.필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시자 작은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번지며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몇 번이나 할 지는 강 대표님의 아량에 달렸죠. 대표님께서 너그럽게 봐주시면 한 번으로도 갚을 수 있고 인색하면 여러 번 해야죠 뭐. 그리고 또 하나, 대표님께서 너그럽게 제 주변 사람들은 봐주셨으면 좋겠는데요?”그녀의 슬픔과 연약함은 강지한의 짜증만 불러오기에 강지한 앞에서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자극받은 강지한의 눈이 새빨갛게 변하며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 여린 살을 꽉 움켜쥐었다.“지금 이 모습이 3년 전 그날 밤과 똑같네. 두 번 다 목적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나를 기쁘게 하려고 하잖아.”역시나 그의 생각이 맞았다. 주변 사람들을 건드릴까 봐 그를 기쁘게 해주려는 거다.곧 거칠게 그녀의 치마를 찢어버렸고 심미연의 작은 얼굴은 고통에 하얗게 질리더니 두 손으로 급히 배를 감쌌다.“강지한, 살살해! 아파!”그녀는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강지한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몸을 파는 거면 주인님께 뭐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지. 살살해? 그럼 난 즐겁지 않잖아!”심미연은 몸도 마음도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강지한, 움직이지 마. 아프다고!”강지한은 그녀가 꽉 조이는 것을 느끼며 숨이 막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강지한은 미간을 꾹 누른 채 시선이 옆에 있는 심미연에게로 향했다.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심미연을 편애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이노하이브의 지분도, 강씨 가문의 가보도 툭툭 넘겨주었다.심미연 이 여자는 권모술수도 많고 악랄한데 뭐가 좋다고!“병원에 곧 도착하니까 만나서 얘기해요. 심미연이랑 같이 있어요.”심미연도 함께 있다는 말을 들은 강준형의 말투가 한층 누그러졌다.“그래, 기다리마.”전화를 끊으며 강지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준형이 갑자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낸다는 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심미연이 뒤에서 허튼수작을 부린 게 밝혀지면 그도 수단 가리지 않고 상대할 생각이었다.곧 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섰고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을 차에서 끌어 내렸다.손목이 아프게 꺾이자 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강지한, 손 놔!”강지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놓으면 도망가게?”그러면서도 손에 힘이 살짝 풀렸다.심미연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할머니 주치의가 전화해서 특효약에 대해 말해줬어. 당신이 약속 지켰으니까 나도 말한 대로 할 거야. 걱정하지 마, 억울하더라도 온지유에게 사과할 거니까.”강지한은 경성에서 손으로 하늘도 가릴 사람이라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하지만 그가 진실을 알아내기보다는 온지유의 일방적인 말을 믿고 싶어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차라리 순순히 온지유에게 사과하면 강지후가 좋게 봐줘서 다음 약을 얻는 게 더 쉬워질 수도 있었다.부부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된 건지, 마음이 씁쓸했다.강지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할아버지 앞에서 말 제대로 해.”심미연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가슴이 아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알아.”강지한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할머니는 그의 손에 있는 약으로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강지한은 그녀를 슬쩍 보고는 앞으로 걸어갔다.심미연은 단화를 신고 있었지만 그래도 강지한보다 다리가 짧아서 빠르게 걷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지유가 임신한 몸으로 혼자 있는데 내가 좀 도와주는 게 뭐 어때서”강지한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온지유가 그를 구해줬고 이제 그녀가 어려움에 부닥쳤으니 당연히 도와줘야 마땅했다.그런데 심미연이 그가 온지유를 도와준 것에 대해 속 좁게 따지는 게 못마땅했다.심미연은 그의 무심한 표정을 보며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나랑 이혼만 하면 그 여자를 도와주든지 그 여자랑 결혼하든지 상관 안 할게.”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두 사람을 위해 꺼져주겠다는데 이 바닥에서 그녀처럼 너그러운 사람은 둘도 없으니 강지한은 고마워해야 했다.강지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심미연...”바로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고 강지한은 말을 삼켰다.심미연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당신 형수님 전화 오셨네, 받아.”그녀는 강지한이 온지유를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았다.온지유의 전화라면 둘이 관계를 할 때에도 전화를 받곤 했다.대체 온지유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면 그럴까.“나랑 지유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허튼 생각하지 마.”강지한은 심미연을 노려보았다.‘이 여자 표정은 뭐지?’“그래,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겠지. 그냥 온지유는 임신만 한 거네. 아빠가 누군지도 모를 잡것을.”그녀도 임신 중이었기에 아이를 위해서라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로 공격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강지한이 거듭해서 선을 넘지 않나.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눈빛이 갑자기 살벌해졌다.“심미연, 한 번만 더 잡것이라고 해. 내가 가만 안 둬.”심미연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당신은 날 가만 둔 적 없어.”온지유에 대해 말만 해도 그는 꼬리가 밟힌 것처럼 발끈했다.하지만 심미연은 최대한 화를 내지 않고 강지한과 싸우지 않기로 했다.임신 중이라 항상 좋은 기분을 유지하지 않으면 배 속의 아기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강지한은 그녀가 예전과 달라진 것을 느꼈다.정말 그녀의 말대로 더 이상 그를
온지유가 사고를 당한 건 그녀가 시킨 일이고, 할아버지가 화를 내며 온지유를 해외로 보내려는 것도 그녀가 일러바친 거다?한마디로 온지유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다 그녀가 했다는 뜻이다.강지한의 마음은 참 변함없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강지한이 화가 난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심미연, 제대로 설명해.”심미연은 화를 억누르며 작은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강지한, 내가 할아버지한테 전화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면서 무슨 설명을 하라는 거야?”온지유와 관련된 이야기만 나오자 강지한은 머리가 없는 사람처럼 정상적인 생각이 불가능한 듯 보였다.성무진은 황급히 차 칸막이를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그 역시 강지한이 심미연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강지한을 설득할 수도, 심미연을 도울 수도 없었다.가끔은 정말 심미연이 안쓰러웠다.강지한은 이미 온지유 일 때문에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심미연이 이런 식으로 대꾸하자 순식간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심미연의 목을 움켜잡더니 험악하게 말했다.“오늘 온지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도 죽어.”목이 잡힌 심미연은 숨쉬기가 힘들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눈동자를 크게 뜨고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강지한,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지난 3년 동안 나에게 계속 상처를 줬어! 나도 인간이야, 강철이 아니라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아프고 괴롭다고! 강지한, 이혼하자는 말 진심이야. 내가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진심이고.”그녀는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했다.한때는 그와 평생을 함께 할 거라는 환상을 가졌다.그러다 이 결혼 생활에서 아무리 진심을 다 바쳐도 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걸 서서히 깨달았다.과거엔 사랑하지 않아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려 했는데 이제야 자존심도 버린 사랑은 상대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뚝뚝 맑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찢어지는
심미연은 그를 돌아보며 덤덤하게 물었다.“왜요?”예전에는 강지한을 사랑해서 24시간 내내 그의 곁에 붙어 있기를 바랐던 그녀였지만 조금 전 강지한의 그런 말을 듣고도 어떻게 그의 곁에 있겠나.최대한 멀어지는 게 좋았다.성무진은 그녀의 질문에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강지한이 화가 났다고 말해야 하나.“그쪽 대표님은 안 바쁘대요? 왜 차에 안 타요? 아니면, 우리가 먼저 갈까요?”심미연이 덤덤하게 말했다.“나 일이 있어서 서둘러야 해요.”할머니에게 일주일 치 약이 있으니 일주일은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그것만으로도 기꺼이 온지유에게 사과할 수 있었다.게다가 온지유가 그녀를 해친 것에 대해서 나중에 진실을 밝히고 되돌려주면 그만이다.아무리 늦어도 복수를 하기만 하면 되니까.성무진은 두려움에 차 밖을 내다봤다.다행히 강지한은 못 들은 것 같았다. 아니면 심미연이 또 힘들어질 게 분명했다.당연히 강지한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 차갑게 콧방귀를 뀌지 않을 수 없었다.그의 비서에게 그를 놔두고 가자고 하다니, 참 대단한 여자다.허리를 굽혀 차에 앉으려던 그는 심미연을 차갑게 노려보았다.“뒤에 앉아, 물어볼 게 있어!”심미연은 짜증을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이미 사과하라고 했는데 대체 왜 화를 내는 건지.’“심미연, 다시 한번 말할게. 뒤에 와서 앉아.”강지한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심미연은 심호흡을 하고 필사적으로 마음속에 치미는 분노를 삭였다.“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물어봐, 다 들리니까!”그녀는 이제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다.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성 비서, 전화해서 약 다시 가져오라고 해.”강지한의 얼굴이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싸늘했다.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강지한은 정말 나쁜 놈이다!성무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모님, 뒤에 앉으시죠.” 한순간 홧김에 힘들게 얻은 약을 잃을 수는 없었다.심미연의 작은 얼굴이 창백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강지한은 고개를 들어 그의 뒤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심미연은?”성무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여자 화장실에 사람 시켜서 찾아봤는데 아무도 없어요!”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지한의 얼굴은 곧바로 굳어졌다.“전화해서 당장 여기로 오라고 해! 안 그러면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성무진은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심미연 대신 식은땀을 흘렸다.도대체 사모님이 무슨 짓을 했길래 대표님이 저렇게 화가 난 걸까.강지한은 극도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빨리 전화해!”강지한이 차가운 목소리로 재촉했다.그 시각 심미연은 회사 밑 정원에서 통화 중이었다.할머니의 주치의는 누군가 특효약을 일주일 치 보내왔다며 방금 할머니에게 투여해서 상태가 좋아졌다는 말을 전했다.의사의 말을 들은 심미연은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구쳤다.“이따가 할머니 뵈러 갈게요,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저한테 감사할 게 아니라 약을 전해준 분께 감사해야죠!” 의사가 겸손하게 말하자 심미연은 의사가 말하는 ‘약을 전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당연히 알았다.하지만 의사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할머니의 상태에 대해 한참을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심미연은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에게 전화를 걸려는데 성무진의 연락이 와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성 비서님, 무슨 일이세요?”사실 성무진이 왜 전화를 했는지 마음속으로는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사모님, 길 잃으셨나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성무진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직접 묻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말했다.“나 아래층 정원에 있으니까 오세요.”마음속으로는 강지한이 미웠지만 강지한의 뜻을 거스르는 순간 할머니가 쓰던 특효약은 순식간에 모두 회수될 것이기에 할머니가 더 이상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강지한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알겠습니다.”성무진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심미연의 말을 강지한에게 전달했다.강지한은 얼굴을 찡그
“미연 씨,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난 진심으로 얘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무슨 짓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온지유의 진지한 말투에 심미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래요, 그러면 지금 강지한 사무실로 와요. 셋이 함께 얘기하죠.”단지 수작을 부리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던 거다. 아니면 온지유가 지금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 오를 수나 있었겠나.“지한 씨한테 갔다고요? 왜 지한 씨를 찾아갔어요?”온지유가 한층 언성을 높이며 다급하게 말했다.“당연히 내 남편과 부부 사이 친밀한 일을 하려는 거죠. 왜 그렇게 불안해해요?”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온지유가 전화를 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었다.절대 사적으로 그녀와 만나지 않을 거다.전화를 끊은 그녀는 세수하고 손을 닦은 후 화장실을 나섰다.사무실 문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순간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냥 육체적 욕구 해결하려고 자는 거예요. 밖에서 만난 여자들보다 깨끗하니까. 그 여자가 이혼을 원하면 어떡하냐고요? 허, 절대 안 되죠. 3년 동안 내가 심전그룹에 얼마나 투자했고 그 여자한테 얼마를 썼는데 이혼하면 내 돈도, 청춘도 다 버리는 거잖아요. 게다가 난 아직 질리지 않았어요. 충분히 갖고 놀다가 질리면 회사 법무팀 통해 소송해서 한 푼도 안 주고 내보낼 거예요.”여기까지 들은 심미연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뒤돌아서서 황급히 엘리베이터 입구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고 그 남자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알고 보니...강지한은 단지 육체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다.그녀가 밖에 있는 여자들보다 깨끗해서!그리고 아직 충분히 갖고 놀지 못해서 이혼하지 않는 것이고 지겨워지면 그때 소송해서 빈털터리로 쫓아낼 생각이었다.영리한 사업가인 강지한은 그녀를 내쫓기 전에 마지막 남은 가치까지 쥐어짜 내려 했다.그런 남자를 9년이나 사랑했다니.참 우스웠다.그 시각 사무실에서 강지한은
어쨌든 이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모든 증거가 심미연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에 배후는 그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고소하면 심미연은 법의 심판을 받는다.이제 온지유에게 사과만 하면 될 일인데 뭐가 문제일까.심미연은 이를 악물고 분명하게 말했다.“강지한, 나한테 계속 이렇게 상처를 주면 언젠가 내가 당신한테 너무 상처받아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강지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떠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떠났어야지! 3년이나 기다릴 게 아니라!” 그의 말에는 조롱이 섞여 있었다.심미연은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강지한의 말이 맞다. 그녀는 떠나지 못한다.그에게 계속해서 상처받으면서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곁에 남아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전에는 그것이 깊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자신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강지한의 눈에 그녀의 사랑은 아무 가치도 없었다.“내가 말 바꿀까 봐 걱정되면 지금 당장 사람 시켜서 약 보내줄게. 할머니가 약 받고 사과하러 가도 돼.”강지한은 이미 자신이 많이 양보했으니 심미연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그녀가 멍청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러면 지금 전화해. 난 약을 먼저 받아야겠어.”강지한이 이렇게 말하니 심미연은 아무리 억울해도 삭힐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몸이 더 중요했기에 할머니가 고통받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건 불효였다!강지한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고 심미연은 전화를 거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남몰래 결심했다.통화를 마친 강지한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겼다.“약 곧 올 테니까 앉아서 기다려.”심미연은 그가 뻗은 손을 피해 한 발짝 물러서서 말했다.“할머니 주치의한테 특효약에 대해 말하고 올게.”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갔다.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냥 온지유에게 사과하는 건데, 무릎 꿇으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대체 뭐가
강지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덤덤하게 말했다.“그래.”“그러면 미연 씨가 사과를 하면 내가 직접 경찰서에 가서 고소를 취하하는 게 어떨까요, 지한 씨?”달래는 듯한 말투였다.“지한 씨...”머뭇거리는 온지유가 난감한 듯 보였다.“할 말 있어?” 강지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심미연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았다.셔츠가 젖어 가슴에 꽉 달라붙어 있는 모습이 절제되고 섹시했다.심미연은 수년 전 강지한을 처음 봤을 때 믿기지 않는 그의 얼굴에 반해 바로 넘어갔던 걸 떠올렸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자신이 참 한심했다.온지유는 망설이다가 말했다.“미연 씨가 내 번호를 차단해서 연락이 안 돼요.”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내가 데려갈게.”“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요?”온지유가 다시 물었다.“잘못했으면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지. 됐어, 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몸조리나 잘해.”“지한 씨, 미연 씨가 원하지 않으면 너무 강요하지 마요.”“내가 이따가 데려갈게”이 말을 들은 온지유는 뜻대로 흘러가자 순순히 강지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의 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마음속으로 막연한 안 좋은 기분이 들었다.온지유가 무슨 말을 했을까.“심미연, 지금 나랑 같이 병원으로 가.”강지한은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심미연을 향해 걸어가며 강압적인 어투로 말했다.심미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온지유가 또 무슨 짓을!강지한이 말했다.“네가 사람을 시켜서 지유를 차로 쳤잖아. 다행히 지유는 다른 데는 괜찮은데 손만 부러졌고 뱃속 아기도 멀쩡해. 나랑 같이 병원에 가서 지유에게 사과하면 지유가 바로 고소 취하할 거야.”이 말을 들은 심미연은 경악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그 여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꾸민 일인데 내가 그런 거라고 모함하고 나한테 사과까지 하라는 거잖아. 어떻게 그런 허술한 연기에 속아?”이노하이브를 인수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이노하이브를 사상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심미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컵에 담긴 물을 강지한의 얼굴에 뿌렸다.“당신이랑 그래도 3년 동안 부부로서 매일 밤 같은 침대에서 잤으니까 여기 오기 전에는 내가 어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해도 당신이 내 결백을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네. 이번 일 사실대로 밝히고 싶으면 뒤에서 수작 부리지 마. 내가 꼭 진실을 밝혀줄 테니까.”지금 강지한을 찾으러 여기 올 게 아니라 바로 병원으로 가서 온지유를 한바탕 두들겨 팼어야 했다.강지한은 손을 뻗어 얼굴에 묻은 물을 닦아내고는 검은 눈동자로 심미연을 바라보며 비웃었다.“그렇게 자신 있는데 왜 나한테 와서 큰소리야?”이 여자가 무슨 배짱으로 그에게 물을 뿌리는 걸까.그와 시선을 마주한 심미연은 진작 마음이 산산조각 났다.이번에야말로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이 일이 밝혀지면 그와 온지유의 소원대로 반드시 강지한과 이혼할 거다.한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갑자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며 정적을 깨뜨렸고 강지한이 휴대전화를 꺼내자 심미연은 화면에 뜬 온지유 이름에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강지한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심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오붓하게 통화해.’강지한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불렀다.“심미연!”심미연의 발걸음이 살짝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았다.“사람 시켜서 교통사고에 대해 조사할 거야.”그가 당황했다.심미연에게 뭘 해명할 생각도 없었고 그녀가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는 것은 더더욱 신경 쓰지 않았다. 다 큰 성인인데 그녀의 감정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으니까.하지만 이번엔 심미연의 감정이 조금 신경 쓰였다.“전화 받고 얘기해.”3년 동안 심미연은 한가지 규칙을 발견했다. 강지한과의 관계가 조금이라도 풀릴 기세가 보이면 온지유는 전화를 걸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둥, 몸이 안 좋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댔고 강지한은 매번 철석같이 믿으며 심미연을 혼자 버려둔 채 온지유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