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박유진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말해도 강지한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할 말이 없었다.“전에는 내가 이혼하려고 일부러 당신과 온지유 동영상을 휴대폰으로 찍었다고 하더니, 이제는 내가 다음 남자를 찾는 데 급급하다고 하네. 강지한, 그렇게 한가해?”생각이 단순하다고 욕하고 싶었지만 아직 이 남자를 화나게 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심미연, 내가 원하지 않는 한 네가 나와 이혼하고 싶어도 소용없어! 내겐 이노하이브 법률팀 전체가 있는데 너 혼자 소송에서 어떻게 날 이겨? 결국 고생하는 건 너야.” 강지한은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비웃었고 그의 눈은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 여자가 그의 법률팀을 우습게 보고 있으니 자신과 싸우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심미연은 남자의 고고한 눈매를 바라보며 가슴속에서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강지한, 당신과 온지유는 아이까지 있으면서 왜 이혼을 안 해, 왜 날 안 놔주는 건데? 대체 날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만들 생각이야?”최대한 침착하려 했다. 남자가 아무리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여도 다른 여자들처럼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강지한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아무리 미쳐 날뛰어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았다.그의 눈엔 한낱 웃음거리일 뿐이겠지.생각하니 서글펐다.9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인데 왜 이렇게 됐을까.“왜겠어?”강지한의 눈동자에 싸늘한 서리가 내려앉았다.“3년 전 나를 속여 결혼을 강요했으면 남은 인생 시달릴 각오를 했어야지. 이제 겨우 3년이 지났는데 벌써 보내주면 너만 좋은 일이 되잖아.”홧김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3년 전 심미연에게 당했던 게 강지한의 마음속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벽이었다.심미연은 평생 자신을 괴롭히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가슴이 저도 모르게 저릿했지만 굳이 3년 전 일을 그에게 다시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여러 번 설명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어차피 중요하지도 않으니 원하는 대로 생각하라지.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두 사람을 위해서?” 강지한의 얼굴에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빨리 이혼해서 박유진과 함께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 그래!”조금 전 식당에서 달려들어 박유진을 때리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히 봐줬다.“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얘기 다 끝났어? 그러면 택시 타고 로펌으로 가.”차를 몰고 왔지만 강지한이 전에 그녀의 차가 편하지 않다고 싫어한 이후로 다시는 차에 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강지한이 인상을 찌푸렸다.“택시는 많은 사람들이 타서 더럽잖아. 안 타!”심미연은 어이가 없었다. 참 모시기 힘든 남자다.‘됐다, 그냥 기다리지 뭐.’그 순간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오자 강지한은 심미연을 차로 끌고 갔다.“집으로 가!”심미연의 심장이 철렁했다.대낮에 집으로 돌아간다니, 또 그런 짓을 하려고?아까 화장실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걸 이어가려는 거다.강지한과 3년 동안 부부로 지내오면서 그가 밤일에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았다.처음 결혼했을 때는 매일 밤부터 새벽까지 지칠 줄 모르고 달리다가 나중엔 서서히 줄어들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누울 때면 그는 매번 원했다.과거에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임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원한다면 기꺼이 응했지만 이제 그녀는 임신과 함께 이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하지만...강지한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외할머니 약은 어떡하나.“지한 씨, 나 로펌에 출근해야 해. 오후에 할 일이 많아서 지체할 여유가 없어!” 그녀가 서둘러 말하자 강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심미연, 나 화난 거 안 보여? 온지유라면 벌써 눈치챘어.”온지유는 눈치챌 뿐만 아니라 그를 달래줬을 거다.“안 보여, 나 눈이 멀었어.”심미연은 사랑하고 달래주는 사람이 있다고 과시하는 남자에게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비열해!’강지한은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계속 고집부려봐. 이따가 울면서 빌게 될 거니까.”그와 심미연 사이의 갈등은 대부분 침대에서 해결됐다.그게 이젠 두 사람의 암
심미연은 깜짝 놀랐다.강지한은 대체 뭐 하려는 걸까.운전기사는 눈치껏 차를 세우고 곧바로 내렸다.‘도련님께서 밖에서 즐기려고 하시네, 그런 취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차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던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을 품에 안으며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운전기사도 없으니까 해도 되지?”심미연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방금 많이 먹어서 운동을 못 해! 안 그러면 차에 토해서 더러워질 거야!”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핑계를 대자 강지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심미연, 아직 이혼한 것도 아닌데 벌써 박유진을 위해 몸을 사리는 거야? 왜, 할머니 약 받기 싫어? 친구 작업실도 버리는 거야? 아, 사랑하는 박유진이 새로 차린 로펌도 문 닫게 해줄까?”속에서 분노가 이글거리던 강지한은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고 심미연은 순간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만 느껴졌다.강지한은 그녀 주위 사람들로 협박하고 있었다.“심미연, 분명히 말하는데 난 이혼 안 해! 네가 밖에서 다른 남자와 바람피우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거야. 안 그럼 내가 방금 한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게 되겠지.”그렇게 말하며 강지한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 키스하려는데 심미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격렬하게 손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때렸다.“강지한, 이건 너무하잖아!”지난 3년 동안 그의 수발을 들어준 걸로도 모자라서 이런 식으로 그녀를 대하는 걸까.강지한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이혼하기 싫다니까 이젠 폭력을 행사해? 사모님, 변호사라서 잘 알 텐데. 그러다 내가 널 고소할 수가 있어!”“강지한, 우리 둘 사이 일에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지 마. 그 사람들이 뭘 잘못했다고 그래?”심미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어깨를 살짝 떠는 모습이 무척 불쌍해 보였다.온지유였다면 강지한은 절대 그녀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이게 애정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그 사람들은 잘못이 없지. 잘못은 네가 했지.
심미연은 이제 수치심 따위 뒤로 한 채 강지한의 화를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강지한의 화가 풀리면 그녀 주변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고 수십억도 이대로 사라지길 바랐다.품에 안긴 여자의 부드러운 몸, 귓가에 들리는 여자의 홀리는 듯한 목소리, 코를 가득 채우는 특유의 향기에 강지한의 몸이 달아오르며 큰 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움켜쥐었다.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가장 친밀한 행동을 하면서 입으로는 잔인한 말을 뱉었다.“사모님 몸 파는 건가? 한 번에 얼마를 받을 생각이지? 얼마나 해야 심씨 가문에서 수십억을 갚을까?”심미연은 모든 장기가 뒤틀린 것 같고 통증이 극심해 견디기 힘들었다.필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시자 작은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번지며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몇 번이나 할 지는 강 대표님의 아량에 달렸죠. 대표님께서 너그럽게 봐주시면 한 번으로도 갚을 수 있고 인색하면 여러 번 해야죠 뭐. 그리고 또 하나, 대표님께서 너그럽게 제 주변 사람들은 봐주셨으면 좋겠는데요?”그녀의 슬픔과 연약함은 강지한의 짜증만 불러오기에 강지한 앞에서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자극받은 강지한의 눈이 새빨갛게 변하며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 여린 살을 꽉 움켜쥐었다.“지금 이 모습이 3년 전 그날 밤과 똑같네. 두 번 다 목적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나를 기쁘게 하려고 하잖아.”역시나 그의 생각이 맞았다. 주변 사람들을 건드릴까 봐 그를 기쁘게 해주려는 거다.곧 거칠게 그녀의 치마를 찢어버렸고 심미연의 작은 얼굴은 고통에 하얗게 질리더니 두 손으로 급히 배를 감쌌다.“강지한, 살살해! 아파!”그녀는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강지한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몸을 파는 거면 주인님께 뭐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지. 살살해? 그럼 난 즐겁지 않잖아!”심미연은 몸도 마음도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강지한, 움직이지 마. 아프다고!”강지한은 그녀가 꽉 조이는 것을 느끼며 숨이 막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배가 무척 아파서 심미연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강지한이 차에서 내린 뒤 황급히 통증을 참으며 일어나 옷을 입었다.우연히 차창 밖의 남자가 택시를 타는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조금 전까지 그녀가 택시를 타자고 했을 땐 더럽다더니 서둘러 온지유를 만나러 갈 땐 더럽지 않나 보다.이중적인 남자.심미연은 몸을 정리하고 몸에 걸친 옷을 모두 입었는지 확인한 후 차에서 내리려고 문을 열었다.운전기사가 그녀를 보고 서둘러 다가왔다.“사모님, 왜 차에서 내리셨어요? 도련님께서 집까지 모시라고 했어요.”“됐어요, 택시 타고 갈게요.”강지한의 차는 전부 온지유가 탔기에 역겨운 데다 조금 전 안에서 남자에게 이리저리 휘둘렸기 때문에 더욱 메스껍고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하지만 사모님...”운전기사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어 감히 그녀 혼자 보낼 수 없었다.배가 아픈 심미연은 손을 뻗어 택시를 부르며 말했다.“강지한이 뭐라고 하면 온지유가 탔던 차라 역겹다고 전해요.”“사모님, 그건...”운전기사는 감히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심미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그렇게 얘기하세요.”그렇게 말해도 어차피 사실이기에 강지한이 어쩌진 못할 거다.“사모님, 안색이 좋지 않은데 제가 모셔다드릴게요.”강씨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 중 강지한과 온지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운전기사는 심미연을 말릴 수는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려고 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됐어요.”운전기사가 다른 말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한 차가 심미연 앞에 멈추더니 창문이 열리고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연아, 차에 타.”그 목소리를 들은 심미연은 시선을 들어 박유진의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했고 잠시 마음속으로 고민하다가 기사에게 말했다.“친구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면 돼요. 먼저 갈게요.”운전기사는 그녀가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심미연이 차에 앉자 박유진은
“마침 로펌에서 시니어 파트너를 구하는데 할 생각 있어?” 박유진의 말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다.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정말로 로펌 파트너 변호사가 된다면 심씨 가문 사람들이 죽이려고 칼을 들고 쫓아올 텐데, 그렇게 위험한 짓은 할 수 없었다.“내가 자리를 비워둘 테니 생각나면 언제든지 와” 박유진은 강요하지 않았다.그저 그녀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데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그래.” 심미연은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의 슬픔을 본 박유진은 음악을 틀어놓고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익숙한 멜로디를 듣던 심미연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박유진이 잘해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하지만 이미 놓친 사람이라 고개를 돌리지 말고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박유진은 얼굴을 옆으로 돌려 차 유리창에 비친 여자의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자 누군가 무딘 칼로 자기 심장 부위를 하나하나 베는 듯한 고통이 극심했다.그는 3년 전의 결정을 정말 후회하고 있다.그때 고집을 부렸다면 심미연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가는 동안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을 했고 곧 차는 병원 앞에 멈췄다.박유진은 차를 주차하고 내려 심미연에게 문을 열어주었다.“걸을 수 있어?”심미연은 울고 난 후 살짝 눈이 부었지만 박유진에게 들킬까 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걸을 수 있어. 오빠, 먼저 가. 나 혼자 들어가면 돼.”박유진은 얼굴을 찡그렸다.“몸이 안 좋은데 내가 챙겨주는 게 뭐 어때서? 왜 나를 자꾸 밀어내? 미연아, 우리 이렇게 서먹한 사이 아니잖아.”심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오빠, 나 혼자서도 괜찮아. 가서 일해.”그녀와 박유진 사이에는 더 이상 접점이 없어야 했다.아니면 강지한이 그 모습을 봤다가 또 성가시게 굴 텐데 자신 때문에 박유진이 강지한의 표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조용히 한숨을 쉰 박유진
사진 속 낯익은 여자가 유난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지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지한 씨, 누가 메시지를 보냈어요? 뭐래요?”방금 메시지를 슬쩍 확인한 그녀는 사진 속 인물을 명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강지한에게 보여줬다.심미연이 바람을 피웠다면 강지한은 당연히 이혼할 것이다.곧 온지유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두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이혼할 수 있도록 부추겨야 한다.강지한은 빠르게 사진을 자기 휴대폰에 전송하고 지워버렸다.“스팸이야. 내가 지웠어.”온지유는 당황하다가 이내 그의 말을 알아듣고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아, 그래요. 고마워요.”강지한은 전화기를 다시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담배가 당기네. 나가서 피고 올게.”온지유는 전화기를 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다녀와요.”강지한은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온지유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담배를 피우긴, 전화를 걸어 심미연을 욕하려는 거겠지.’그녀는 두 사람이 최대한 많이 다투기를, 차라리 빨리 싸우고 당장이라도 이혼하기를 바랐다.강지한은 병동 밖으로 걸어 나와 육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한이?”육현성은 온지유와 강지한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온지유가 강지한에게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보여준 것도 몰랐기에 강지한의 전화를 받고 살짝 당황했다.“심미연 어디서 봤어?” 강지한이 곧바로 묻자 육현성은 당황하다가 정신을 차렸다.“지금 큰형수님과 같이 있어?”“네가 찍은 사진 봤어.”“병원 앞에서.”강지한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육현성은 전화기에서 들리는 신호음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무슨 뜻이지?’고민 끝에 그는 황급히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성 오빠, 무슨 일이에요?”“방금 지한이한테 전화가 왔는데 내가 보낸 사진 보여줬어요?”“손이 부
“긴장하지 말고 힘 푸세요. 아니면 검사할 수 없어요.”의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초보 엄마들은 다 그래요. 그래도 배 속의 아기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기는 생각보다 강해서 쉽게 유산되지 않아요.”심미연은 의사의 말에 겨우 안심했다.의사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진찰하고 배를 만지며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이렇게 말했다.“바지 입고 내려오세요. 약 처방해 드릴게요.”그러고는 장갑을 벗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손을 씻고 닦은 다음 책상 앞에 앉았다.심미연은 바지를 입고 침대에서 일어나면서도 여전히 배가 아파서 문지르며 의자에 앉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선생님, 제 아기는 괜찮아요?”그때 문 앞에서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연아, 휴대폰을 차에 두고 내렸어.”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서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온화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유진을 발견했다.“남편분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들어오시라고 해요.”의사의 눈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심미연에게 말을 건넸다.“저 사람은...”심미연이 막 설명하려던 찰나, 박유진이 다가와 전화기를 건네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괜찮아.”의사는 박유진에게 진단서를 건네며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부인께서 아직 임신 3개월이 채 안 됐으니까 부부 관계는 절제하시고 도저히 못 참겠으면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해야 해요. 오늘은 작은 출혈이지만 다음엔 유산할 수도 있어요. 임신 초기 3개월은 성관계를 피하는 것이 좋으며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으면 각방을 쓰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 3개월 지나면 괜찮을 거예요.”의사로서 정력이 넘치는 젊은 부부를 수없이 만났고 잦은 성관계를 가진다는 걸 알지만 임신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임신했다면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해야 했다.의사의 말에 심미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박유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여전히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의사에게 말했다.“네,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
어쨌든 그녀는 심미연을 믿었다. 믿지 못한 건 자신이었다. “자, 이제 앉아서 다시 얘기해 봅시다.” 심미연은 커피잔을 들고 숟가락으로 천천히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임현은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심미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은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에 들어갔다. 한참이 지난 후 논의를 마친 두 사람은 임현이 자료를 정리한 뒤 사무실을 나섰다. 심미연이 경성을 떠난 지 거의 4년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법정에서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면 모두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임현은 심미연의 두터운 인맥을 보며 자신이 처음 법정에 섰을 때의 긴장된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손끝까지 떨릴 정도로 너무 긴장했었다.심미연은 임현을 자리에 앉혔다. 곧 재판이 시작되었다. 법정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양측 변호사들이 날카로운 언어로 치열하게 맞섰다. 두 차례의 격렬한 변론 끝에 결국 판결이 내려졌다. 두 명의 피고는 고의로 타인의 생명을 빼앗은 행위로 고의 살인죄가 성립된다고 판시되었다. 임현은 그 판결을 듣고 나서 긴장 속에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심미연은 자료를 정리한 후 일어나 가방을 챙기며 밖으로 향했다. “변호사님, 잠깐만요.” 임현이 급히 뒤따랐다. 두 사람이 법정을 나서자 갑자기 한 남자가 옆에서 달려들며 돌진해왔다. “네가 내 아들을 평생 감옥에 처넣었어. 이 악랄한 년, 죽여버릴 거야.” 심미연은 순간적으로 임현을 밀쳐내며 몸을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남자가 쥐고 있던 칼이 그녀의 팔을 스치며 옷을 찢고 그 아래 피부를 깊게 긁으며 길고 선명한 상처를 남겼다. 순식간에 피가 쏟아져 팔을 적셨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발을 들어 남자를 향해 힘껏 차며 그를 밀어냈다. 남자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손에서 칼이 떨어지며 큰 소리로 굴러갔다. “변호사님, 다치셨어요.” 임현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스러
심미연은 그의 반응이 다소 과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도 스스로 너무 놀랐다는 걸 눈치챘는지 급히 감정을 누르고는 심미연에게 물었다. “신 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왜 입원하신 거죠?” 며칠째 신하린과 연락이 닿지 않길래 출장이라도 간 줄 았았는데 설마 병원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미연의 시선이 도진혁의 얼굴에 멈췄다.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심미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통사고가 났어요. 다리가 부러져서 당분간 병원에 있어야 해요.” 도진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다리가 부러졌다니...’‘엄청 아팠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을까.’그런데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겉으론 괜찮아 보였어요. 그래도... 속은 많이 힘들 거예요.” 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진혁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평소와는 달랐다. 순간적인 반응, 흔들리는 눈빛. 뭔가 이상했다. ‘혹시 하린이를 좋아하는 거야?’ “병원에 가서 직접 봐야겠어요.” 도진혁은 말을 끝내자마자 서류를 안고 황급히 돌아섰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문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미연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노트북을 꺼내 도진혁의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클릭 끝에 검색 결과가 뜨자 손이 멈췄다. 도진혁, 진성 최고 재벌가의 아들.심미연은 놀라움에 숨이 턱 막혔다. 그가 서류를 정리하거나 일을 처리할 때 유난히 능숙했던 이유가 그제야 이해됐다. ‘그런데 이런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 어떻게 하린이의 비서 자리에 만족할 수 있지?’심미연은 갑자기 예전 이야기가 떠올랐다. 은성이 막 설립된 초기에 신하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정말 능력 있는 비서를 뽑았어. 뭐든지 잘하고 서류 처리도 완벽하게 해.’ 그때 신하린이 말한 대로 도진혁은 은성을 하나하나 키워가며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가 회사에
심미연이 교장 선생님과 대화를 마친 후 대문을 나서자 마이바흐 한 대가 일부러 그녀의 차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는 다가가 차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내려가며 강지한의 냉담한 얼굴이 드러났다.“차 좀 옮겨.” 심미연은 차분히 예의 있게 말했다. “타. 내가 데려다줄게.” 강지한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단호하게 들렸다. 심미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차로 왔어. 혼자 갈 수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심미연은 어젯밤 일이 있고 나면 강지한이 한동안 잠잠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또 다시 나타나다니. ‘정말 얼굴이 두꺼운 사람이네.’“언제 아들 데리고 나랑 같이 살 거야?” 강지한은 그녀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서 마주하며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걸 느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강지한, 너 제정신이야?” 심미연은 그와 대화하는 게 힘들었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도 전혀 듣지 않으니 점점 지치기만 했다. “제정신이지. 너랑 태하가 돌아와서 나랑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게 뭐가 이상해?” 강지한은 이게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아이가 다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말했잖아. 태하는 내 아들이야. 너랑은 아무 상관 없어.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혼했어. 같이 사는 건 절대 안 돼.” 심미연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강지한이 차를 옮길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걸 보자 그녀는 더 이상 말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두 차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 운전석에 앉은 후 바로 엔진을 켰다. 그리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아 차 앞부분이 마이바흐 운전석 문을 향해 돌진했다. 차는 크게 흔들렸고 마이바흐의 차문은 한쪽이 심하게 움푹 들어갔다.강지한은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여자는 운전석에 앉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에게
신하린은 심미연과 눈을 마주치고는 웃으며 심태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유치원 잘 다녀와.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이모가 태하 많이 보고 싶을 거야.”신하린의 다정한 목소리에 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정작 심태하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서운함에 눈가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결국 발을 쾅 구르며 토라진 채 나가버렸다. “태하 많이 화난 거 아니야?” 신하린이 걱정스럽게 묻자 심미연은 피식 웃었다. “당연히 화났지. 너는 태하가 마지막 희망처럼 붙잡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네가 그렇게 단칼에 잘라버렸잖아. 그래도 걱정 마. 태하는 금방 풀려. 살살 달래주면 금방 넘어가.” “그럼 다행이다. 얼른 가서 달래줘.” 신하린은 한심을 내쉬며 안심했다. “아침 먹고 좀 쉬어. 이따가 도진혁 씨 불러서 오라고 할게.” 심미연은 손을 흔들며 병실을 나섰고 문이 조용히 닫히자 병실엔 다시 고요함만 남았다. 간호사 스테이션 앞. 심태하는 간호사들과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 반에 진짜 뚱뚱한 친구가 있는데 다들 그 애를 뚱땡이라고 불러요.” “우리 반에는 진짜 예쁜 여자애도 있어요. 반에 있는 남자애들이 다 그 친구를 좋아해요. 어떤 남자애들은 몰래 초콜릿도 줘요.” “그 여자애가 저한테 초콜릿을 줬는데 우리 엄마가 어린이는 초콜릿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초콜릿을 선생님한테 줬어요. 그리고 선생님한테 너무 예쁘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저한테 착한 아이라고 칭찬해줬어요.” 심미연은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이 꼬맹이가 유치원에 간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이렇게 인기가 많아졌다고?’ “우리 엄마 왔어요. 예쁜 누나들, 안녕히 계세요. 우리 이모 잘 부탁드려요.” 심태하는 통통한 손을 들어 올리며 앙증맞게 손을 흔들었다. 심미연이 막 걸어가자 심태하는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잡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너무 예뻐요.” 심미연은 고개를 숙여 그를
그때 그녀는 교장실에서 급히 나와 서둘러 걷다가 도진혁의 자전거와 부딪히며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도진혁은 자건거를 급히 세우고 그녀를 재빨리 안아 의무실로 데려갔다. 그녀는 괜찮다고 반복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도진혁은 그런 그녀를 끝까지 놓지 않고 회사까지 데려다주었다. 그 후 도진혁이 회사에 처음 출근했을 때 그녀는 그가 바로 그날 자신을 넘어뜨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도진혁은 그녀의 곁에 남게 되었고 지금까지 함께했다. 몇 년간 함께 지내면서 그녀는 그때의 결정을 정말 잘한 것이라고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그럼 도진혁 씨한테 경인대로 가서 그 사람처럼 뛰어난 인재 몇 명을 더 찾아오게 해. 우리 회사의 발전에 그들이 꼭 필요해.” 심미연은 도진혁에 대해 매우 만족했다. 어차피 그녀는 몇 명을 곁에 두고 배우게 하려던 계획이었기에 도진혁이 학교에서 사람을 구하면 훨씬 믿음이 갈 것 같았다. “그럼 내가 도진혁한테 말해둘게.” 심미연의 기분이 좋아지자 신하린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알았어. 그럼 도진혁 씨한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몇 명 더 데려오게 해.” 심미연은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신하린은 의족을 착용하더라도 예전처럼 무리해서 일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회사에는 몇몇 도움이 될 사람들을 두어야 했다. 신하린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 그녀의 의도를 어렴풋이 깨달은 뒤 회사에 관한 얘기를 잠시 나누었다.간병인이 아침을 준비해 가져오자 심미연은 그제야 자신이 죽을 사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리를 한 대 톡 치며 말했다. “내 정신 좀 봐. 죽을 사왔는데 말하다 보니 깜빡했네.” 그렇게 말하며 작은 테이블을 펼쳤다. “정담 죽이네.” 신하린은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녀는 제대로 된 아침을 먹은 지 오랜된 것 같았다. “맞아. 예전에 네가 좋아하던 걸로 기억해.” 심미연은 숟가락을 들어 신하린에게 건넸다. “먼저 먹어.”신하린은 숟가락을 들고 간병인에게 말했다.
[한 잠 자고 일어났을 때 위치 정보가 사라진 걸 알게 되었어요. 여러 번 시도했지만 도저히 위치를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동생분의 핸드폰에 접근해 통화 기록을 확인했죠.][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던 사람은 강씨 사모님이었어요.] 심미연은 눈을 반쯤 감고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심서연은 무슨 일로 문소영을 찾았을까?’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친한 관계였나?’[보스, 지금 심서연 씨가 소식이 끊긴 상태인데 계속 추적할까요?] [네. 추적하세요.] 심미연은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을 느꼈다. ‘심서연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알겠습니다. 바로 사람을 찾아서 추적하겠습니다. 그럼 신하린 씨 교통사고는 어떻게 할까요?] [제가 일이 끝나면 그 사람 정보를 다시 확인하고 진짜 신원을 정확히 파악해볼게요.] [네. 알겠습니다.]심미연은 전화를 끊고 벽에 기대 섰다.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때 병실 안에서 심태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빨리 와요!” 심미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급히 생각을 정리한 뒤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엄마, 빨리 와서 이모 다리 어디 갔는지 찾아봐요.” 심태하가 그녀를 보고 급하게 달려왔다.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들어 심미연을 애타게 바라봤다. 심미연은 허리를 굽혀 그를 부드럽게 안아 올리며 심태하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조용히 말했다. “이모는 사고로 다리를 잃었어. 이제 의족으로 대신해야 해. 그러니까 이모 앞에서 다리가 없다고 말하면 안 돼.”심태하는 눈가가 갑자기 붉어지며 목소리가 떨렸다. “이모는 다리를 잃었어. 이모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래서 이모가 요즘 그렇게 기운도 없고 얼굴이 안 좋았던 거구나.’ ‘다리를 잃은 거였어.’어린 아이는 마음이 먹먹하고 아픈 감정이 밀려왔다. “태하가 불어주면 이모가 안 아플 거야.” 신하린은 웃으며 말했다. 마음속에 슬픔이 밀려왔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간병인은 이미 출근해 신하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닦고 있었다. 심태하는 병실 문을 열자마자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모, 나 왔어요!” 짧은 다리로 종종걸음치며 병상으로 달려가자 신하린의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간병인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침 준비해 주세요.” 간병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병실을 나섰다.심태하는 침대 곁으로 뛰어가 두 눈을 반짝이며 침대에 누워 있는 신하린을 바라봤다. “이모, 저 보고 싶었어요?” 부드럽고 귀여운 목소리에 신하린은 기분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엄청엄청 보고 싶었지.” 심태하는 까치발을 들고 침대에 올라가려고 애썼지만 키가 닿지 않자 포기하고 조그만 얼굴을 숙여 신하린의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저도 엄청 보고 싶었어요.”심미연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 한구석이 시리게 아려왔다. 손에 든 죽을 옆의 서랍장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혹여 자신의 감정이 신하린에게 전해질까 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심미연은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서둘러 말했다. “전화 좀 받고 올게.” 짧은 말만 남긴 채 병실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신하린은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어깨에 담긴 쓸쓸함이 선명하게 느껴져 마음 한쪽이 시큰해졌다.지금 심미연이 자신을 보고 얼마나 마음 아파할지 신하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심미연이 조금이라도 덜 걱정하도록 신하린은 아픈 내색 하나 없이 묵묵히 치료에 임했다. 하루라도 빨리 회복해서 병원을 나가고 싶었다. 그래야 심미연이 더는 자신 때문에 속상해하지 않을 테니까.심미연은 병실을 나온 뒤에야 전화를 받았다. [보스, 신하린 씨 사고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냈습니다.] 심미연의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누구예요?] [한유나 씨 아버지입니다.]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그날 밤 경비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심미연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박유진과 언젠가는 결혼할 것이라는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말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박유진은 심미연이 멍하니 있는 걸 보며 잠시 마음이 조금 씁쓸했지만 여전히 미소를 띠고 말을 이어갔다. “농담이야. 결혼 강요하려던 건 아니었어. 이렇게 하자. 오후에 시간이 되면 같이 보러 가자. 마음에 들면 내일 바로 이사도 가능해. 어때?”그는 심미연의 마음속에 강지한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확실히 알고 있었던 건 심미연이 그와 함께 평생을 살아갈 만큼 감정이 깊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심미연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오빠...” 심미연은 박유진이 억지로 웃고 있다는 걸 느꼈고 그 모습에 마음속 깊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박유진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지금은 오빠한테 결혼을 약속할 수 없어.” 그녀는 아직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으로 박유진을 평생 고통 속에 두고 싶지 않았다. “알아.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도 돼.” 박유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낮추며 말했다. “내가 너무 서둘렀어.”심미연은 계속해서 자신에게 마음의 병이 있다고 말하며 그와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박유진은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진성에 있을 때였다면 이렇게 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경성에 돌아온 후 강지한이 언제든지 심미연과 심태하를 빼앗아 갈 것만 같아 점점 더 초조해졌다.“나 의사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치료 받을 거야.” 심미연은 그에게 어떤 약속도 할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확신시키려 애썼다. 매번 의사 말을 순순히 따르며 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상태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심미연은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를 조심스럽게 품에서 내려놓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심미연은 세수를 하고 간단히 준비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박유진은 이미 아침을 준비해 놓고 거실을 정리하고 있었다.“일찍 일어났네? 조금 더 자.” 박유진은 청소기를 끄고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오늘 할 일이 많아서 더 이상 못 자. 정신없이 바쁠 거야.” 심미연은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먼저 아침 먹어. 나는 위층 가서 태하 깨울게.” 박유진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알겠어. 오빠가 태하 깨워줘.” 심미연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살짝 비벼댔다.박유진과 함께하는 시간은 평온하고 따뜻했다. 그저 이런 일상이 이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아침 먹어. 난 위층 가서 좀 보고 올게.” 박유진은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으며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심미연은 그의 귀 끝이 살짝 붉어진 걸 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식탁으로 향했다. 박유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깊은 숨을 내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심미연의 방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엎드려 자고 있는 심태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박유진의 마음은 저절로 따뜻해졌다. 심미연과 심태하를 돌보는 건 그에게 큰 행복이자 기쁨이었다.심미연은 식탁에 앉아 보온병을 열었다. 따뜻한 우유와 갓 구운 빵의 고소한 향기가 퍼졌다. 빵은 부드럽고 입 안에서 살살 녹으며 그 맛이 정말 좋았다. 박유진은 예전엔 찐빵이나 만두 같은 것만 만들 줄 알았고 빵과 케이크는 나중에 배우게 된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녀와 심태하에게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심미연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무거웠다. 아침을 먹으면서도 심미연은 복잡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아침을 마치고 거실로 나가자 박유진이 심태하를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