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미연은 박유진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말해도 강지한은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할 말이 없었다.“전에는 내가 이혼하려고 일부러 당신과 온지유 동영상을 휴대폰으로 찍었다고 하더니, 이제는 내가 다음 남자를 찾는 데 급급하다고 하네. 강지한, 그렇게 한가해?”생각이 단순하다고 욕하고 싶었지만 아직 이 남자를 화나게 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심미연, 내가 원하지 않는 한 네가 나와 이혼하고 싶어도 소용없어! 내겐 이노하이브 법률팀 전체가 있는데 너 혼자 소송에서 어떻게 날 이겨? 결국 고생하는 건 너야.” 강지한은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비웃었고 그의 눈은 조롱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 여자가 그의 법률팀을 우습게 보고 있으니 자신과 싸우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심미연은 남자의 고고한 눈매를 바라보며 가슴속에서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강지한, 당신과 온지유는 아이까지 있으면서 왜 이혼을 안 해, 왜 날 안 놔주는 건데? 대체 날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만들 생각이야?”최대한 침착하려 했다. 남자가 아무리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여도 다른 여자들처럼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강지한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 아무리 미쳐 날뛰어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았다.그의 눈엔 한낱 웃음거리일 뿐이겠지.생각하니 서글펐다.9년 동안 사랑했던 남자인데 왜 이렇게 됐을까.“왜겠어?”강지한의 눈동자에 싸늘한 서리가 내려앉았다.“3년 전 나를 속여 결혼을 강요했으면 남은 인생 시달릴 각오를 했어야지. 이제 겨우 3년이 지났는데 벌써 보내주면 너만 좋은 일이 되잖아.”홧김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3년 전 심미연에게 당했던 게 강지한의 마음속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벽이었다.심미연은 평생 자신을 괴롭히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 가슴이 저도 모르게 저릿했지만 굳이 3년 전 일을 그에게 다시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여러 번 설명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어차피 중요하지도 않으니 원하는 대로 생각하라지.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두 사람을 위해서?” 강지한의 얼굴에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빨리 이혼해서 박유진과 함께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 그래!”조금 전 식당에서 달려들어 박유진을 때리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히 봐줬다.“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얘기 다 끝났어? 그러면 택시 타고 로펌으로 가.”차를 몰고 왔지만 강지한이 전에 그녀의 차가 편하지 않다고 싫어한 이후로 다시는 차에 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강지한이 인상을 찌푸렸다.“택시는 많은 사람들이 타서 더럽잖아. 안 타!”심미연은 어이가 없었다. 참 모시기 힘든 남자다.‘됐다, 그냥 기다리지 뭐.’그 순간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오자 강지한은 심미연을 차로 끌고 갔다.“집으로 가!”심미연의 심장이 철렁했다.대낮에 집으로 돌아간다니, 또 그런 짓을 하려고?아까 화장실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걸 이어가려는 거다.강지한과 3년 동안 부부로 지내오면서 그가 밤일에 얼마나 뛰어난지 잘 알았다.처음 결혼했을 때는 매일 밤부터 새벽까지 지칠 줄 모르고 달리다가 나중엔 서서히 줄어들었다.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누울 때면 그는 매번 원했다.과거에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임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원한다면 기꺼이 응했지만 이제 그녀는 임신과 함께 이혼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하지만...강지한을 만족시키지 않으면 외할머니 약은 어떡하나.“지한 씨, 나 로펌에 출근해야 해. 오후에 할 일이 많아서 지체할 여유가 없어!” 그녀가 서둘러 말하자 강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심미연, 나 화난 거 안 보여? 온지유라면 벌써 눈치챘어.”온지유는 눈치챌 뿐만 아니라 그를 달래줬을 거다.“안 보여, 나 눈이 멀었어.”심미연은 사랑하고 달래주는 사람이 있다고 과시하는 남자에게 속으로 저주를 퍼부었다.‘비열해!’강지한은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계속 고집부려봐. 이따가 울면서 빌게 될 거니까.”그와 심미연 사이의 갈등은 대부분 침대에서 해결됐다.그게 이젠 두 사람의 암
심미연은 깜짝 놀랐다.강지한은 대체 뭐 하려는 걸까.운전기사는 눈치껏 차를 세우고 곧바로 내렸다.‘도련님께서 밖에서 즐기려고 하시네, 그런 취향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차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던 강지한은 손을 뻗어 심미연을 품에 안으며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이제 운전기사도 없으니까 해도 되지?”심미연은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방금 많이 먹어서 운동을 못 해! 안 그러면 차에 토해서 더러워질 거야!”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핑계를 대자 강지하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심미연, 아직 이혼한 것도 아닌데 벌써 박유진을 위해 몸을 사리는 거야? 왜, 할머니 약 받기 싫어? 친구 작업실도 버리는 거야? 아, 사랑하는 박유진이 새로 차린 로펌도 문 닫게 해줄까?”속에서 분노가 이글거리던 강지한은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고 심미연은 순간 등줄기에 오싹한 한기만 느껴졌다.강지한은 그녀 주위 사람들로 협박하고 있었다.“심미연, 분명히 말하는데 난 이혼 안 해! 네가 밖에서 다른 남자와 바람피우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거야. 안 그럼 내가 방금 한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알게 되겠지.”그렇게 말하며 강지한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 키스하려는데 심미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격렬하게 손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때렸다.“강지한, 이건 너무하잖아!”지난 3년 동안 그의 수발을 들어준 걸로도 모자라서 이런 식으로 그녀를 대하는 걸까.강지한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이혼하기 싫다니까 이젠 폭력을 행사해? 사모님, 변호사라서 잘 알 텐데. 그러다 내가 널 고소할 수가 있어!”“강지한, 우리 둘 사이 일에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지 마. 그 사람들이 뭘 잘못했다고 그래?”심미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어깨를 살짝 떠는 모습이 무척 불쌍해 보였다.온지유였다면 강지한은 절대 그녀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이게 애정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그 사람들은 잘못이 없지. 잘못은 네가 했지.
심미연은 이제 수치심 따위 뒤로 한 채 강지한의 화를 풀어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강지한의 화가 풀리면 그녀 주변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고 수십억도 이대로 사라지길 바랐다.품에 안긴 여자의 부드러운 몸, 귓가에 들리는 여자의 홀리는 듯한 목소리, 코를 가득 채우는 특유의 향기에 강지한의 몸이 달아오르며 큰 손으로 여자의 허리를 움켜쥐었다.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가장 친밀한 행동을 하면서 입으로는 잔인한 말을 뱉었다.“사모님 몸 파는 건가? 한 번에 얼마를 받을 생각이지? 얼마나 해야 심씨 가문에서 수십억을 갚을까?”심미연은 모든 장기가 뒤틀린 것 같고 통증이 극심해 견디기 힘들었다.필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시자 작은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번지며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몇 번이나 할 지는 강 대표님의 아량에 달렸죠. 대표님께서 너그럽게 봐주시면 한 번으로도 갚을 수 있고 인색하면 여러 번 해야죠 뭐. 그리고 또 하나, 대표님께서 너그럽게 제 주변 사람들은 봐주셨으면 좋겠는데요?”그녀의 슬픔과 연약함은 강지한의 짜증만 불러오기에 강지한 앞에서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그녀의 말에 자극받은 강지한의 눈이 새빨갛게 변하며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 여린 살을 꽉 움켜쥐었다.“지금 이 모습이 3년 전 그날 밤과 똑같네. 두 번 다 목적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나를 기쁘게 하려고 하잖아.”역시나 그의 생각이 맞았다. 주변 사람들을 건드릴까 봐 그를 기쁘게 해주려는 거다.곧 거칠게 그녀의 치마를 찢어버렸고 심미연의 작은 얼굴은 고통에 하얗게 질리더니 두 손으로 급히 배를 감쌌다.“강지한, 살살해! 아파!”그녀는 배 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강지한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몸을 파는 거면 주인님께 뭐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지. 살살해? 그럼 난 즐겁지 않잖아!”심미연은 몸도 마음도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강지한, 움직이지 마. 아프다고!”강지한은 그녀가 꽉 조이는 것을 느끼며 숨이 막히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배가 무척 아파서 심미연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강지한이 차에서 내린 뒤 황급히 통증을 참으며 일어나 옷을 입었다.우연히 차창 밖의 남자가 택시를 타는 모습을 보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조금 전까지 그녀가 택시를 타자고 했을 땐 더럽다더니 서둘러 온지유를 만나러 갈 땐 더럽지 않나 보다.이중적인 남자.심미연은 몸을 정리하고 몸에 걸친 옷을 모두 입었는지 확인한 후 차에서 내리려고 문을 열었다.운전기사가 그녀를 보고 서둘러 다가왔다.“사모님, 왜 차에서 내리셨어요? 도련님께서 집까지 모시라고 했어요.”“됐어요, 택시 타고 갈게요.”강지한의 차는 전부 온지유가 탔기에 역겨운 데다 조금 전 안에서 남자에게 이리저리 휘둘렸기 때문에 더욱 메스껍고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하지만 사모님...”운전기사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되어 감히 그녀 혼자 보낼 수 없었다.배가 아픈 심미연은 손을 뻗어 택시를 부르며 말했다.“강지한이 뭐라고 하면 온지유가 탔던 차라 역겹다고 전해요.”“사모님, 그건...”운전기사는 감히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심미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괜찮아요, 그렇게 얘기하세요.”그렇게 말해도 어차피 사실이기에 강지한이 어쩌진 못할 거다.“사모님, 안색이 좋지 않은데 제가 모셔다드릴게요.”강씨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 중 강지한과 온지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에 운전기사는 심미연을 말릴 수는 없었지만 최선을 다해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려고 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됐어요.”운전기사가 다른 말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한 차가 심미연 앞에 멈추더니 창문이 열리고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미연아, 차에 타.”그 목소리를 들은 심미연은 시선을 들어 박유진의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했고 잠시 마음속으로 고민하다가 기사에게 말했다.“친구한테 데려다 달라고 하면 돼요. 먼저 갈게요.”운전기사는 그녀가 차에 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심미연이 차에 앉자 박유진은
“마침 로펌에서 시니어 파트너를 구하는데 할 생각 있어?” 박유진의 말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다.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다가 잠시 후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정말로 로펌 파트너 변호사가 된다면 심씨 가문 사람들이 죽이려고 칼을 들고 쫓아올 텐데, 그렇게 위험한 짓은 할 수 없었다.“내가 자리를 비워둘 테니 생각나면 언제든지 와” 박유진은 강요하지 않았다.그저 그녀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데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그래.” 심미연은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의 슬픔을 본 박유진은 음악을 틀어놓고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익숙한 멜로디를 듣던 심미연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박유진이 잘해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하지만 이미 놓친 사람이라 고개를 돌리지 말고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박유진은 얼굴을 옆으로 돌려 차 유리창에 비친 여자의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자 누군가 무딘 칼로 자기 심장 부위를 하나하나 베는 듯한 고통이 극심했다.그는 3년 전의 결정을 정말 후회하고 있다.그때 고집을 부렸다면 심미연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가는 동안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을 했고 곧 차는 병원 앞에 멈췄다.박유진은 차를 주차하고 내려 심미연에게 문을 열어주었다.“걸을 수 있어?”심미연은 울고 난 후 살짝 눈이 부었지만 박유진에게 들킬까 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걸을 수 있어. 오빠, 먼저 가. 나 혼자 들어가면 돼.”박유진은 얼굴을 찡그렸다.“몸이 안 좋은데 내가 챙겨주는 게 뭐 어때서? 왜 나를 자꾸 밀어내? 미연아, 우리 이렇게 서먹한 사이 아니잖아.”심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오빠, 나 혼자서도 괜찮아. 가서 일해.”그녀와 박유진 사이에는 더 이상 접점이 없어야 했다.아니면 강지한이 그 모습을 봤다가 또 성가시게 굴 텐데 자신 때문에 박유진이 강지한의 표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조용히 한숨을 쉰 박유진
사진 속 낯익은 여자가 유난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강지한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지한 씨, 누가 메시지를 보냈어요? 뭐래요?”방금 메시지를 슬쩍 확인한 그녀는 사진 속 인물을 명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강지한에게 보여줬다.심미연이 바람을 피웠다면 강지한은 당연히 이혼할 것이다.곧 온지유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두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이혼할 수 있도록 부추겨야 한다.강지한은 빠르게 사진을 자기 휴대폰에 전송하고 지워버렸다.“스팸이야. 내가 지웠어.”온지유는 당황하다가 이내 그의 말을 알아듣고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아, 그래요. 고마워요.”강지한은 전화기를 다시 건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담배가 당기네. 나가서 피고 올게.”온지유는 전화기를 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다녀와요.”강지한은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온지유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담배를 피우긴, 전화를 걸어 심미연을 욕하려는 거겠지.’그녀는 두 사람이 최대한 많이 다투기를, 차라리 빨리 싸우고 당장이라도 이혼하기를 바랐다.강지한은 병동 밖으로 걸어 나와 육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한이?”육현성은 온지유와 강지한이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온지유가 강지한에게 자신이 보낸 메시지를 보여준 것도 몰랐기에 강지한의 전화를 받고 살짝 당황했다.“심미연 어디서 봤어?” 강지한이 곧바로 묻자 육현성은 당황하다가 정신을 차렸다.“지금 큰형수님과 같이 있어?”“네가 찍은 사진 봤어.”“병원 앞에서.”강지한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육현성은 전화기에서 들리는 신호음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무슨 뜻이지?’고민 끝에 그는 황급히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성 오빠, 무슨 일이에요?”“방금 지한이한테 전화가 왔는데 내가 보낸 사진 보여줬어요?”“손이 부
“긴장하지 말고 힘 푸세요. 아니면 검사할 수 없어요.”의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초보 엄마들은 다 그래요. 그래도 배 속의 아기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기는 생각보다 강해서 쉽게 유산되지 않아요.”심미연은 의사의 말에 겨우 안심했다.의사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진찰하고 배를 만지며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이렇게 말했다.“바지 입고 내려오세요. 약 처방해 드릴게요.”그러고는 장갑을 벗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손을 씻고 닦은 다음 책상 앞에 앉았다.심미연은 바지를 입고 침대에서 일어나면서도 여전히 배가 아파서 문지르며 의자에 앉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선생님, 제 아기는 괜찮아요?”그때 문 앞에서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연아, 휴대폰을 차에 두고 내렸어.”심미연은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서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 온화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박유진을 발견했다.“남편분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들어오시라고 해요.”의사의 눈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심미연에게 말을 건넸다.“저 사람은...”심미연이 막 설명하려던 찰나, 박유진이 다가와 전화기를 건네며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였다.“괜찮아.”의사는 박유진에게 진단서를 건네며 심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부인께서 아직 임신 3개월이 채 안 됐으니까 부부 관계는 절제하시고 도저히 못 참겠으면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해야 해요. 오늘은 작은 출혈이지만 다음엔 유산할 수도 있어요. 임신 초기 3개월은 성관계를 피하는 것이 좋으며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으면 각방을 쓰시는 걸 추천해 드려요. 3개월 지나면 괜찮을 거예요.”의사로서 정력이 넘치는 젊은 부부를 수없이 만났고 잦은 성관계를 가진다는 걸 알지만 임신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임신했다면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해야 했다.의사의 말에 심미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박유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여전히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의사에게 말했다.“네,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
강지한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얼굴의 선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심미연은 분명 병실에 와서 강상미를 만났지만 의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정말 독한 여자야.’“시간도 늦었고 나도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 먼저 간다.” 이진영은 담배를 끄고 일어나 곧장 밖으로 나갔다. 강지한은 술을 따라 마시며 심미연에 관한 생각에 잠겼다. ‘심미연은 언제 의술을 배운 거지?’ ‘이 3년 동안 이 여자는 도대체 뭘 했던 걸까?’이진영이 차에 올라타자 기사가 물었다. “도련님,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이진영은 미간을 문지르며 신하린의 분노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순간 마음 속이 답답해졌다. “병원으로 가자.”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엔진을 돌렸다.신하린의 병실 앞에 도착한 이진영은 누군가에게 가로막혔다. 이진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들어가서 잠깐 보고 올게요.” “신 대표님이 명령하셨습니다. 심미연 대표님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결론은 한 마디였다. 그들은 명령을 따랐기에 규칙을 어길 수 없었다.이진영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여기는 내 병원인데 병실도 맘대로 들어가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돌아가 주세요.” 경호원이 좋은 말로 타일렀다. 하지만 그때 병실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이진영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급하게 말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어요. 들어가게 해줘요.” 경호원은 그를 막으려 했지만 그때 또 한 번 병실 안에서 큰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경호원도 놀라서 급하게 병실 문을 열었다.이진영은 병실로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신하린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조명 아래서 그 모습은 다소 섬뜩하게 보였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급히 다가가 신하린을 침대에 눕히고 몸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면서 옆에 멍하니 서 있던 경호원에게는 급히 소치쳤다. “의사
“너희 아버지가 최근에 한석훈과 많이 가까워졌다고 들었어. 내가 알기로 한석훈과의 관계가 간단하지 않다더라.” 강지한은 박시훈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이진영에게 전했다. 이진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 사실 지난 4년 동안 그는 한석훈의 배후 세력을 조사해왔고 조사할수록 그 배후는 점점 더 복잡하고 충격적인 사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 너와 한유나 씨 사이의 일은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야?” 이진영은 조용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말했다. “혼약을 해제할 생각이야.” 그는 이미 한유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한유나는 최근 들어 그를 피하는 듯했다. 그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구아정은 어떻게 할 거야?” 강지한이 다시 물었다. “네 첫사랑이라고 했지?”“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했던 사람이야.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고 그 뒤로 그냥 끝났어.” 이진영은 무의식적으로 신하린의 얼굴을 떠올렸다.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사실 지금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신하린이었다.이제 그녀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이제야 확실히 느꼈다. 그녀의 다리가 이렇게 된 지금 그녀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로 인해 그녀를 돌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구아정, 그 여자에 대해 조사해본 적 있어?” 강지한이 상기시키듯 말했다.“조사 중이야.” 이진영은 숨기지 않고 답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나타났으니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르겠어.”구아정은 분명 그를 찾으러 온 거였다.‘왜일까?’“신하린 씨의 일은 잘 해결됐나?” 강지한은 그녀에게서 도움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물었다.“하린이 오른쪽 다리가 절단됐어.” 이진영은 말하면서도 짜증이 치밀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흡입했다. 연기가 흩어질 때 그는 다시 한 번 신하린의 분노 어린 눈빛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자신을 증오하고 있을 것이다.“언제 그런 일이 있었지?” 강지한은 잠시
문소영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만약 나를 살려주지 않으면 우리가 두 명의 아들을 뒀다는 사실을 세상에 공개할 거야. 그럼 당신도 명예를 잃고 끝장날 거라고.” 그녀는 지금 이 남자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우리가 두 아들을 뒀다고? 증거 없이는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남자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하며 눈빛은 강렬하게 빛났다. “당시 내 임신 검진서도 여전히 남아 있고 병원에 가면 내 출산 기록도 확인할 수 있어. 그 아이들의 혈액형은 당신이랑 똑같아.” 문소영은 그동안 이 모든 것을 철저히 보관해 왔다.“문소영, 나를 망치려고 하는 거야?” 남자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나는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가기를 바래.” 문소영은 감정을 정리한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갈수록 나에게 유리해.” “내가 원칙을 깨고 너를 돕기를 바란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남자는 술잔을 비운 후 탁자 위에 쿵 하고 내려놓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소영은 그가 떠나는 모습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며 부르지 않았다. 오늘은 그에게 경고만 준 것뿐이다. 그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한 대로였다.잠시 후 문소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모님, 지시하신 대로 사람을 공해에 던졌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해외로 잠시 숨어 있어. 여기 상황이 정리 될 때까지 기다려. 그때 다시 돌아오면 된다.] 문소영의 얼굴엔 차가운 표정이 가득했다. 그들이 돌아올 때쯤 심서연의 죽음은 이미 잠잠해지고 그 어떤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누구도 이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문소영은 전화를 끊고 술을 따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이진영은 술을 많이 마셨고 잠간 밖으로 나왔다. 그때 한 남자의 뒷모습이 아버지를 닮은 듯해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잠시 멈칫하며 발걸음
문소영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말없이 있었다.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TV 뉴스에서 그의 모습을 보며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미칠 듯했다. 문소영은 자신이 더 이상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 믿어왔다. 남자는 그녀의 침묵을 감지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문소영은 깊은 생각을 떨쳐내고 몸을 곧게 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필요해서 왔어. 우리 아들에 관한 일이야.” 남자는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우리가 아들이 있다고? 그럴 리가...” “쌍둥이였어. 작은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납치됐고 큰 아이는 강지성. 몇 년 전에 사고로 죽었어.” 문소영은 눈물을 훔치며 말을 급히 이어갔다.이건 그녀가 삼십 년 넘게 숨겨온 비밀이었다. 그녀는 이 생에서 절대 말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순간 이렇게 쉽게 입 밖으로 내뱉게 되었다. 문소영의 말은 마치 폭탄처럼 남자의 가슴 속에 떨어졌고 남자는 동공이 급격히 축소되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절대 상상할 수 없었다. 문소영과 자신이 쌍둥이 아들을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사실 처음 내가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바로 당신에게 말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집에서 강제로 나를 강우석과 결혼시키려 했고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어. 그러자 부모님은 나를 감금하고 내 핸드폰도 압수했어. 외부와 연락할 방법이 전혀 없었어.” 문소영은 말하면서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그녀는 부모님의 강요로 강씨 가문에 보내졌었다. 강우석과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우석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강우석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그 상대가 바로 강지한의 어머니였다. 7개월 후 그녀는 쌍둥이를 낳았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 그 중 한 명이 사라졌다. 그녀는 30년 동안 그 아이를 훔쳐간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그 사람이 누구
“문소영 씨...” 심서연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소영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밖으로 끌고 나갔다. “어디 가는 거예요?”심서연은 문소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를 느끼며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를 저승에 보내줄 거야. 안 돼?” 문소영은 비웃듯이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심서연, 내가 너를 위해 모든 길을 다 만들어줬는데 결과는 이게 뭐야!”그 당시 심미연의 딸을 훔친 건 심서연을 강지한의 곁에 두기 위함이었다. 원래는 심서연을 이용해 강지한에게서 유용한 정보를 끌어내려고 했으나 3년이 넘도록 이 멍청한 여자는 강지한의 침대조차 올라가지 못했다. ‘쓸모없는 것.’“이건 내 잘못이 아니잖아요.” 심서연은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그 3년 동안 그녀는 심미연을 따라 하며 살아왔다.그리고 강상미도 열심히 키웠다.하지만 강지한은 냉정하게도 그녀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다. 문소영은 더 이상 말을 아끼지 않고 그녀를 거칠게 끌고 내려갔다. 곧 사람들이 다가왔다. “대표님.” 심서연은 그 남자를 보며 점점 더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이 여자 데려가서 교훈을 좀 줘.” 문소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문소영 씨, 당신은 나한테 이러면 안 돼요.” 심서연은 비명을 지르며 후회가 밀려왔다. 처음엔 문소영의 약점을 쥐고 있으면 그녀가 자신에게 손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깨달았다. 문소영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사람이라는 걸. “시끄러워. 입 다물어.” 문소영은 냉정하게 그녀를 호통쳤다. 심서연은 원래 입을 다물 생각이 없었지만 순간 누군가 그녀의 입에 더러운 양말을 밀어넣었다. 심서연은 몇 번이나 헛구역질을 하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후 그녀는 사람들에게 힘껏 끌려가 차에 강제로 밀어넣어졌다.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창 밖으로 보이는 문소영을 응시했다. 문소영에게서 느껴지는 그 무시무시한 살기가 가슴 속 깊이까지 전해져 왔다.
모두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한 발 물러서며 심서연과 거리를 뒀다.심서연은 눈알을 굴려 주변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속으로 비웃었다. 바로 병실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경호원 한 명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꽉 붙잡았다.“못 들어갑니다.”이런 인품을 가진 사람은 더더욱 아이 곁에 둘 수 없었다.“사람 살려. 성추행이에요.” 심서연은 목청껏 소리를 질렀지만 경호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재빠르게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에 덮었다. 이어서 거침없이 그녀의 몸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성큼성큼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가 12층이 아니었다면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렸을지도 몰랐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심서연을 바닥에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내가 여자한테 손대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었으면 당신 손발부터 분질렀어요. 그러니까 지금 좋게 말할 때 당장 돌아가세요.” 남자의 기세에 압도당한 심서연은 겁에 질려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병원 안으로 사라졌다.그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심서연은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남자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속으로 강지한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저 냉혈한 자식.’ ‘진짜로 딸을 보지도 못하게 막다니.’ ‘아무리 그래도 당시 내가 직접 아이를 안겨준 사람이었는데.’땅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심서연은 이내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꺼내어 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나 병실에 못 들어갔어. 애를 데리고 나올 방법이 없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냉정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멍청한 것.] 심서연은 속이 상해 울먹거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강지한이 이렇게 매몰찰 줄...] [너 박유진 약혼녀 아니었어? 박유진 찾아가.] [뭐? 왜 박유진이야?] 그녀는 이미 박유진에게 마음이 떠났고 이제 와서 다시 함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찾으라고 하면 그냥 찾으러 가.]
‘우리 딸이 아직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이때 병실에서. 강지한이 딸을 재우자마자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 번호가 성무진의 것임을 확인한 후 그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아가씨와의 친자 확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두 분 사이에는 혈연 관계가 없습니다.] 성무진은 왜 강지한이 갑자기 친자 확인을 하려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도 주운 아이였기 때문에 이 결과는 전혀 놀랍지 않았다.[친자 확인 할 때 쭉 지켜봤어?] 강지한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상미와 심태하의 얼굴이 똑같은데 어떻게 혈연 관계가 없을 수 있지?’ [인하 병원에서 했습니다.] ‘이노하이브 산하 병원이라 그런 실수는 없을 거 같은데.’성무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알겠다.] 강지한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한 번 친자 확인을 하려는 계획을 마음속에 세웠다.[대표님.] 성무진은 강지한의 표정을 볼 수 없어서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음이 불안해져서 조심스럽게 한 마디 했다. [말해.] [바렐 그룹과의 합작 계약이 전부 취소되었는데 이제 어떻게 할까요?]이렇게 많은 합작이 한 번에 취소되었으니 각 부서 모두 불안하지 않을 리 없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처리할게.] 원래 성무진은 회사 직원들의 불안한 정서에 대해 말하려 했지만 강지한이 이렇게 말하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음 기회에 말해야겠다.’성무진과의 전화를 끊고 강지한은 이진영의 번호를 눌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급한 일 있어?] 이진영의 목소리에서 피로가 묻어났다. [한 잔 하러 가자.] [좋아. 어디서 마셔?] 두 사람은 장소를 정하고 강지한은 전화를 끊었다.병실로 돌아온 그는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봐도 자기와 똑같이 닮은 얼굴이었다. ‘어떻게 상미가 내 딸이 아닐 수 있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그는 조용히 자리에서
“태하야, 아빠 말 좀 들어봐.” 박유진은 심태하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아파 목소리가 자연스레 떨렸다. “동생은 다른 세계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너무 힘들어하지 마. 알겠지?” 말을 하며 그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흘러나왔다.심미연은 그의 품에서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괜찮아. 이제 울지 마. 오늘 밤은 엄마랑 같이 자자.” 심태하는 두 살부터 혼자 자던 아이였지만 그래도 겨우 세 살밖에 되지 않았다. 방금 그런 꿈을 꾸었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네.” 심태하는 눈물을 닦으며 엄마 품에 얼굴을 비볐다. 엄마가 있으니까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심미연은 박유진을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오빠, 그럼 먼저 방에 가 있어. 난 태하 데리고 잘게.” 박유진은 그녀를 안고 한 번 더 꽉 안아주었다. “알았어. 잘 자.” 그렇게 말하며 심미연과 심태하의 얼굴에 각각 입맞춤을 했다. 비록 마음은 살짝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잠간의 즐거움을 위해 아이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었다.박유진이 방을 나간 후 심미연은 심태하를 안고 침대에 누웠다.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침실의 불을 모두 끄자 순간적으로 어두운 세상이 펼쳐졌다. “엄마, 무서워요.” 심태하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엄마 있잖아. 걱정하지 말고 자자.” 심태하는 눈을 감았지만 그 순간 바로 전에 꿈이 눈에 나타났다. 여동생은 온몸에 피를 흘리며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눈은 하늘의 별처럼 빛났고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바로 여동생은 사라져 버렸다. 심태하의 감정이 갑자기 격해졌다.“안 돼. 가지 마.” 어둠 속에서 심태하의 낮은 목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그를 더 꽉 안았다. “걱정하지 마. 엄마 여기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를 귀 뒤로 넘긴 후 그녀는 겨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열자 아직 눈앞에 있는 사람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몸이 툭 밀려 들어와 문 뒤로 기대어졌다. 남자는 막 샤워를 끝낸 듯 몸에서 은은한 바디워시 향이 퍼져 나왔다. 그 향은 정말로 기분 좋게 느껴졌다. 심미연의 심장은 저절로 조금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미연아, 준비됐어?”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낮고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등을 곧게 펴며 말했다. “나... 심리 상담 예약했어. 내일 오후에 가보려고.” 그녀도 빨리 자신을 치료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유진은 마치 머리에 차가운 물 한 통을 끼얹은 것처럼 느껴졌다. 몸 속의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미연이 아직 괜찮지 않다면 그는 물론 그녀의 감정을 무시하고 강제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오빠, 미안해.” 심미연은 발끝을 들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나 치료 잘 받을게. 믿어줘. 금방 나을 거야.” 박유진은 그녀를 꼭 안으며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기다릴게.” 그런데 두 사람의 입술이 막 맞닿을 순간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엄마, 빨리 문 열어줘요. 저예요.” 심태하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박유진은 어쩔 수 없이 손을 풀며 살짝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문 열자. 애가 무슨 일인지 한번 보자.” 밖에 아이가 있으니 자신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오빠, 미안해.” 심미연은 그를 안아주고 나서 팔을 풀었다. 그녀는 정말 박유진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느꼈다. “아니야. 더 이상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 또 미안하다고 하면 화낼 거야.” 박유진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문 열어 봐.”심미연은 급히 문을 열었다. 작은 몸뚱이가 곧바로 달려들어왔다. “엄마, 너무 무서워요.” 목소리엔 울음이 섞여 있었고 떨리